미도장에서 연행
증언자 : 김병렬(남)
생년월일 : 1964. 12. 1(당시 나이 16세)
직 업 : 호텔 종업원(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1980년 5월 당시 미도장호텔 종업원이던 김병렬 씨가 19일 오전 같은 직원들과 투숙객들이 함께 심하게 구타당한 후 상무대에서 생활, 풀려난 후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 등을 기록하고 있다.
갑자기 뛰어 들어온 공수
우리 집은 원래 전남 보성군 조성면에서 꽤나 부잣집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조합장까지 지낸 분이었는데, 시골생활을 청산하고 광주로 이사왔다.
1980년에는 방림동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나는 5·18 때 광주직할시 금남로 3가 미도장호텔 종업원으로 근무중이었다.
5월 19일 오전에 바깥 분위기가 소란스러워 방청소를 하다 말고 옥상에서 금남로를 내려다보았다. 유동 삼거리 쪽에서 탱크 한 대를 앞세운 군인들이 열을 지어 달려오고 있었다. 군인들은 지하상가 쪽에서 나누어지더니, 그중 일부가 우리 호텔 쪽으로 달려왔다. 1층에는 지배인(조건수 씨)과 경리주임(손병섭)이 현관 입구 철문을 닫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우리 호텔 내의 직원들과 손님들이 공수부대에게 구타당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어렸던 나는(당시 16세) 아래층에서 나는 비명 소리를 듣고 겁에 질려 안절부절 못하고 숨을 곳을 찾아가 순간적으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설마 하니 잡아갈까 싶어 걸레를 들고 8층인가 9층인가에 올라갔다. 방을 닦는 시늉을 하는데 군인 2-3명이 우르르 올라와 나오라고 했다.
"야 이 새끼, 죽고 싶지 않으면 이리 나와."
워커발로 배와 가슴을 걷어찼다. 그들에게 끌려서 현관 입구 쪽으로 갔더니 프런트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차고 앞에는 김영대 씨 등 직원 (5-6명)과 젊은 남자 그리고 기자라는 사람이 잡혀 있었다. 한동안 진압봉으로 두들겨맞은 다음 우리는 손을 뒤로 하여 혁띠로 묶였다. 바지를 벗겨 손 사이에 끼워졌다. 우리는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 끌려가 2-3시간 꿇어앉아 있었다. 벌써 여러 사람이 아스팔트에 붙잡혀 있었다. 거기서도 진압봉으로 수차례 두들겨맞고 다른 사람들 처럼 이마를 땅바닥에 대고 꿇어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다리를 구부리고 있었더니 발이 저리고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없어져버렸다. 군인들의 워커발 소리와 구타,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지휘관급으로 느껴지는 어떤 사람이 "야, 됐다. 그만 해라" 하는 것이었다.
공포의 시간들
곧이어 호송차가 도착했다. 내 차례가 되어 차 앞으로 한걸음 가려는 순간 감각이 무뎌 휘청거렸다. 그러자 앞에 있던 군인이 "이 새끼" 하면서 워커발로 복부를 강타했고, 등뒤에서 "이 새끼 상처도 없으면서" 하는 소리와 함께 진압봉이 머리를 내리쳤다. 뒷머리가 띵하고 완전히 무중력상태에서 내 몸이 공중을 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탄 차는 형사기동대 버스였다. 우리는 옆 유리창 쪽을 보고 앉아 있었는데 옆사람이 "이 사람 피 좀 봐" 하면서 손수건으로 깨진 머리를 막아주었다.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웃옷이 완전히 피로 적셔졌다. 호송차가 도착한 곳은 '사식'이란 글씨나 요금이 씌어 있는 걸로 보아 어디 경찰서 유치장인 것 같았다. 철창 안으로 들어갈 때는 사물을 모두 회수하고 손을 묶었던 혁띠도 끌러주었다.
경찰들에게 사람들이 집으로 연락해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연락을 해주는 것 같지 같았다. 유치장 맨 뒤에 있던 한 사람이 갑자기 몸이 빳빳해지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경찰들이 밖으로 옮겨갔는데 그 후로는 어찌됐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의 말이 그 사람은 벙어리였는데 시내에서 잡혀올 때 반항한다고 무참히 두들겨맞았다고 했다.
그날 저녁 어둠이 깔리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저녁 대용으로 먹으라고 빵과 우유를 배급해 줬다. 빵을 먹으면서 우리는 다시 호송버스에 올랐다. 민간인 인솔자가 올라오더니 검문소에서 군인이 타면 모두 자기 앞좌석 밑으로 고개를 넣으라며 "공수부대가 목을 친다"고 말했다. 그 사람도 굉장히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야 안전하다는 그의 말이 절실히 느껴졌다. 우리가 탄 차는 보통 크기의 버스로 커튼이 달려 있었다.
어디선가 공수가 올라와서 처박은 우리들의 등을 짓밟고 닥치는대로 두들겨팼다. 여기저기서 "악악", "아이고" 하는 비명 소리가 났다. 상무대에 도착한 우리는 앞사람의 허리께를 잡고 고개도 들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나는 언제 신발을 잃어버렸는지 맨발이었다. 비가 와서 땅바닥이 축축한데도 우리는 취침, 뒤로 취침, 앉아, 꿇어 등의 기합을 받고 나서 어떤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잡혀와 있었다. 교관이라고 써진 철모를 쓴 사람이 "밀착, 밀착" 하면서 우리들을 공간 없이 딱 붙어 앉게 만들었다. 옆사람과 얘기를 하거나 고개를 들면 어김없이 몽둥이가 날아왔다.
세 끼 모두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들은 단무지가 든 알미늄 도시락을 배급받았다. 바닥에 깔려있는 가마니도 축축하고, 우리들 옷도 비에 젖어서 후끈 후끈한 김이 올라 강당 안은 숨막힐 지경이었다. 환하게 밤새 불을 켜두고 잠을 못 자게 했다. 시간감각마저도 느낄 수 없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다음날(20일)부터는 강당 안에서 삐딱하게 구는 사람들은 조교의 몽둥이 세례를 받아야 했다. 물을 먹고 싶으면 손을 들고 10명 정도 인원이 차면 열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천장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으면 각자의 입에다 물을 부어주었다. 한 번은 내가 물을 받아 먹다가 한 방울 흘렸다. 그러자 군인들이 쇠바가지로 내 머리통을 쳤다. 개돼지도 아닌데 이럴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우선 맞는 게 두려웠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처음으로 하느님께 기도를 했다.
화장실에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들고 있다가 인원이 차면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앞사람의 허리띠를 잡고 갔다. 돌아올 때도 같은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그 안에서 부상자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나도 머리 찢어진 곳을 소독했다. 내가 허리, 가슴, 등 온몸이 결린다고 했더니 알약을 주었는데 진통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20일 조서를 받는다고 한 사람씩 불려나갔다. 조그마한 책상 서너 개에 조사자가 한 명씩 앉아 일대일로 심문을 했다. 내 옆 학생은 심하게 구타당하며 "주동자가 누구냐. 숨어 있는 곳을 대라"고 계속 추궁을 받았다. 나를 담당한 수사관은 다행히도 나와 고향이 같았다. 우리 아버지 이름을 대면서 아무 죄도 없이 끌려왔으니 맞지 않게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 사람이 알아서 쓰겠다고 하면서 가라고 해 무사히 강당으로 되돌아 왔다.
다음날인 21일 오전에 수십 명씩 밖으로 불러내더니 큰 테이블을 중심으로 앉으라고 했다. '사소한 일로 부대에 들어와 보호받고 있으나 곧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가정 통신문을 쓰라는 것이었다.
그때 상황으로 볼 때 편지 배달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더구나 언제 풀려날지도 모르는 상태여서 혹시 죽게 되는 것이 아닌가 몹시 불안했다. 그런데 편지를 쓰고 강당으로 돌아오니 전원 석방한다고 밖에 나와 버스를 타라고 했다. 혹시 죽이러 가는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헌병대라고 씌어진 곳에 도착하여 전라도 출신 장군(소준열 장군)의 연설을 들었다. 그런 후에 안에서 있었던 일을 절대로 누설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와 지장을 찍고 풀려났다. 커다란 상자를 내놓고 유치장에 들어갈 때 회수했던 혁띠, 신발, 손목시계 등을 찾아가라고 했다. 나는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른 채 찾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우리를 태운 군용버스가 시내로 못 들어가니 걸어가라고 하면서 상무교회로 생각되는 곳에서 내려주었다. 같이 끌려갔던 호텔 식구들을 만나 손을 잡고 반가워 했다. 모두 울음조차 말라버린 듯 기진해 있었다.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생각 밖에 안 났다. 논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민가가 몇 채 보이고 주민들이 나와 준비해 둔 빵과 물을 주었다. 그들은 "고생 많이 했다"며 박수도 쳐주고 우리와 함께 눈물도 흘렸다. 내 머리는 피가 말라 붙어 있었고, 웃옷에도 피가 범벅이 된 채 빳빳해져 있었다. 맨발인 발등은 긁히고 멍이 들어 있었고 가슴과 등, 허리 등이 결려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미도장 종업원들이 두 시간 남짓 걸어 도착한 광천교 쪽에는 소방차 소리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미도장에 도착하니 문이 닫혀 있었다. 현대예식장 철문을 열어 후문을 두들기자 보일러 기사(박필호)가 문을 열어주었다. 사장님은 우리가 살아왔다고 기뻐하면서 울었고 우리도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나중에 들으니 죄없는 시민들이 수 없이 잡혀가자 시민들을 풀어내라고 시위가 더 거세졌다고 했다. 그날 저녁에 호텔 직원들과 저녁밥을 먹고 집(방림동)에 가려고 광주천을 따라 가는데 학생들이 있었다. 겁이 덜컥 났다. 일부러 저녁에 어디서 모이냐고 물었더니 공원에서 모인다고 했다. 총을 든 일반 시민만 봐도 새파랗게 질리고 모든 게 무섭게만 보였다. 하늘에는 공포탄인지 빨간 불빛이 날아 다녔다.
집에 들어가고부터는 발자국 소리만 나도 나를 잡으러 오지 않나 하는 불안감에 가슴을 졸이며 지냈다. 문밖에는 아예 나오지도 못하고 소변도 방에서 봐야 할 정도였다. 그날 밤부터 나는 집 안쪽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숭의실고 야간 2년생(이철) 방에서 함께 기거했다. 부모님도 아예 가게문을 닫아버렸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는데 하루는 새벽녘에 헬기 소리가 나고 "우리 시민군을 도와주십시오"라는 확성기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그 며칠 뒤에 전남대병원에서 무료로 부상자를 치료해 준다고 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찾아가 어깨와 가슴이 결린다고 했다. 그랬더니 응급실에서 진료 일지 기록도 없이 머리의 실만 빼주었다. 그 후 다시 미도장에 나가 근무를 시작하였다.
정신적인 고통과 육체적인 불편이
근무를 하면서 미도장 사장님 친구분이 운영하시는 박윤식 외과에서 엑스레이 촬영을 해보았다. 갈비뼈에 금이 갔으니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집에서 쉴 형편도 못 되어 계속 근무를 해야 했다. 몇 해 지나자 몸이 이상해지더니 매사에 의욕이 없어지고 진통제를 복용해도 뒷머리가 당기고 장시간 근무가 어려웠다. 낮에 시내를 나가면 머리 속이 어수선해 다방에라도 들어가 20-30분 쉬고 나서야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저녁에 잠을 자려 해도 허리와 무릎이 결리고 식은땀이 난다. 쭈그려 앉아 세수하기조차 힘들고 힘든 일을 하면 숨이 차고 옆구리에 통증을 느낀다. 또한 항상 누군가가 나를 해치지 않나 하는 불안감에 조그만 일에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처럼 5·18 이후 나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인 불편 속에 살고 있다. 죄없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수시로 '죽음'을 생각해야 했던 일들을 어디에 대고 하소연해야 할지.
지금에 와서 나는 5·18로 인한 피해 때문에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진상 규명도 좋지만 생활의 도움이 되는 금전적 보상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주경화)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