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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에 말려든 하인
호텔을 나온 파스파르투는 카프나티크 호가 있는 부두로 갔습니다. 거기서 근처를 왔다갔다 하고 있는 픽스 형사를 발견했습니다.
픽스 형사는 퍽 우울해 보였습니다. 그것은 애타게 기다리던 체포 영장이 아직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체포 영장이 아직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체포 영장이 자기보다 늦게 오리라는 예상은 했었지만, 그것은 앞으로도 2, 3일은 더 있어야 받을 수 있겠기에 기가 막혔던 것입니다.
요코하마로 가는 배는 내일 떠나고 맙니다. 더구나 이 곳은 영국의 영토로는 마지막이므로 여기서 포그 씨를 잡지 못하면 아주 놓치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모르는 파스파르투는 웃으며 픽스 형사에게로 다가가 빈정대기 시작했습니다.
" 픽스 씨, 당신은 우리와 함께 미국까지 가실 생각이신가 보지요?"
" 글쎄, 뭐...."
픽스 형사는 당황한 듯 말끝을 흐렸습니다.
" 당신이 우리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자, 함께 선실을 예약하러 가시지요."
픽스 형사와 파스파르투는 선박 회사 사무실로 들어가 네 사람의 선실을 예약했습니다.
그 때 사무원이 카르나티크 호의 수리가 예정보다 빨리 끝났으므로 내일 아침에 떠날 것이 아니라 오늘 밤 8시에 떠나게 되었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 그거 참 잘 되었군!"
파스파르투는 이 좋은 소식을 포그 씨에게 알려 주어 기쁘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얼른 사무실을 나왔습니다. 픽스 형사가 파스파르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 순간이었습니다. 포그 씨를 단 며칠 동안이라도 홍콩에 묶어 두기 위해서는 이제 그 길밖에는 없었습니다.
부두로 나온 픽스 형사는 파스파르투에게 한잔 하자고 말했습니다. 아직도 시간이 남아 있었으므로 파스파르투는 픽스 형사의 호의를 물리칠 수도 없었습니다.
픽스 형사와 파스파르투는 부두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넓은 술집 안에는 30명 가량의 손님들이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맥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었고, 진이나 브랜디 같은 독한 술을 찔금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긴 담뱃대로 아편을 피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는 침대가 놓여 있는데, 그 위에 몇 사람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픽스형사가 포도주를 두 병이나 주문하자, 파스파르투는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픽스 형사는 조심스레 상대편을 살펴보느라고 술맛도 알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술병이 모두 비었습니다. 파스파르투는 픽스 형사를 카르나티크 호에 태우게 된 것이 유쾌했습니다. 그리고 배가 일찍 떠나게 되었다는 것을 주인에게 알려야 할 일이 생각나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러자 픽스 형사가 그를 자리에 앉히며 말했습니다.
" 왜 벌써 일어나려고 하시오, 조금만 더 마십시다. 그리고 잠간 터놓고 해야 할 아주 중요한 얘기도 있어요."
" 그럼, 내일 하시지요. 지금은 급히 가 봐야겠어요."
" 그러지 말고 내 말을 들어요. 이건 당신 주인에 관한 얘기니까요."
픽스 형사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이자, 순진한 파스파르투는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 대체 무슨 얘기인데 이러시지요?"
그러자 픽스 형사는 파스파르투의 손을 잡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습니다.
"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아시오?"
" 새삼스럽게 무슨 그런 말을..."
파스파르투는 씨익 웃으며 말했습니다.
" 그럼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니,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이야기합시다."
" 대체 무얼 털어놓는다는 말인가요?"
" 먼저 한 가지 묻고 싶은 말인데, 당신들은 대체 무슨 돈이 어디서 났기에 그렇게 물 쓰듯 하시오?"
" 돈이라니요?"
파스파르투는 눈이 둥그레졌습니다.
" 그렇다면 좋아요. 당신은 포그 씨의 여행 자금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픽스 형사가 이렇게 묻자, 파스파르투는 이봐란 듯이 대답했습니다.
" 그런 것쯤이야 모를 리가 있나요? 2만 파운드지요."
그러자 픽스 형사가 핀잔 주듯 말했습니다.
" 천만에! 5만 5천 파운드요."
" 예엣? 포그 씨가 그렇게 많은 돈을 걸었던가? 5만 5천 파운드씩이나? 그렇다면 내가 더더욱 이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파스파르투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픽스 형사는 브랜디 한 병을 더 주문하고, 억지로 파스파르투를 잡아 앉혔습니다.
" 자그마치 5만 5천 파운드란 말요."
" 그게 어쨌다는 거요?"
" 알겠소? 잘 들어요. 만일 내가 성공한다면 2천 파운드의 상금을 받게 되오. 당신이 나를 도와 준다면 그 중에서 5백 파운드를 주겠소. 어떻소?"
" 당신을 도와 달라고요?"
파스파르투는 놀랍고 기가 막혀 크게 소리쳤습니다.
" 그렇소. 포그 씨를 며칠만 더 홍콩에 머물도록 해 주면 되오."
파스파르투는 더욱 놀라 외쳤습니다.
" 뭐, 뭐라고요? 그 놈들은 주인 어른을 뒤따르게 해서 그 정직한 마음을 의심할 뿐 아니라, 여행을 방해하기까지 하는군요! 그런 짓을 해도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가!"
" 뭐라고요? 당신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픽스 형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습니다.
" 그건 정말 사기요! 신사인 체하면서 친구를 이렇게 배신하다니!"
픽스 형사는 전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파스파르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 혁신 클럽 회원들은 모두 포그 씨의 친구란 말이오! 픽스씨, 우리 주인 어른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오. 내기를 해도 정정당당하게 이기는 것만 생각한단 말이오."
픽스 형사는 파스파르투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 이봐요. 당신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 그거야 뻔한 일 아니겠소. 런던의 혁신 클럽 회원이 보낸 스파이지요. 당신은 우리 주인 어른의 여행을 방해할 임무를 맡은 거지요? 정말 비겁한 일이예요. 나는 벌서부터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었지만, 나만 알고 주인 어른께는 알리지도 않았소."
" 그러니까 포그 씨는 아직 모른단 말이요?"
픽스 형사는 흥분하며 물었습니다.
" 아무것도 모르시오."
이 말을 들은 픽스 형사는 이마에 손을 얹고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 이 사나이는 어디까지나 충실한 하인일 뿐, 포그의 공범이나 한패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 사나이가 잘못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런 말큼 내 생각과는 다르다. 이 사나이가 한패가 아니라면 원래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니까 나를 도와 줄지도 모르지."
픽스 형사는 이렇게 생각하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클럽 회원이 보낸 스파이는 아니오."
" 글쎄요, 그럴까요?"
파스파르투는 빈정거리듯 말했습니다.
" 나는 런던 경시청의 명령을 받고 온 형사요."
" 당신이 형사란 말인가요?"
" 그렇소. 못 믿겠다니 증거를 보여 주겠소."
픽스 형사는 주머니에서 런던 경시청 총감의 사인이 있는 경찰 수첩을 꺼내 보였습니다. 파스파르투는 어이없는 얼굴로 입을 크게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픽스 형사가 설명하듯 말했습니다.
" 포그 씨가 내기를 걸어 여행을 떠났다는 것은 당신이나 클럽 친구들을 속이기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아요."
" 그게 무슨 말이요?"
파스파르투의 술취한 얼굴은 더욱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 자, 들어봐요. 지난 9월 29일, 런던에 있는 잉글랜드 은행에서 5만 5천 파운드를 도둑맞았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도둑을 본 사람이 있어서 인상 그림을 그렸어요. 자, 이게 그 인상 그림이오. 어때요? 포그 씨와 똑같지 않소?"
파스파르투는 그 인상 그림은 볼 생각도 하지 않고
"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을!"
하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꽝 내리쳤습니다.
" 우리 주인 어른이 은행 도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란 말이오! 우리 주인 어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분이실 거요. 그렇게 용기있고 인정 많으신 분께 그런 못된죄를 뒤집어씌우려 들다니, 당신은 천벌을 받을 거요!"
파스파르투는 포그 씨에게 죄가 있다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파스파르투를 보자, 픽스 형사는 자신의 기대가 또다시 어긋나 버렸음을 알고 짜증스러워졌지만, 꾹 참고 파스파르투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 당신은 몰랐을 거요. 당신이 어떻게 알았겠소? 당신은 런던을 떠나는 날 고용되었지 않소? 그러니 알 리가 없지요. 그는 세계 일주를 한답시고 가방에 돈뭉치만 넣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을 데리고 떠났소. 이래도 당신은 그가 이 세상에서 제일로 정직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하겠소?"
" 당신이 뭐라고 한다해도, 우리 주인 어른만큼 착하고 너그러우신 분은 이 세상에 없어요. 그러한 분이 은행 도둑이라니! 가없은 아우다 부인을 구해 내신 용기있고 인정 많으신 분이 도둑이라니! 믿어지지 않아요."
파스파르투는 한참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픽스 형사에게 물었습니다.
" 그래서 나더러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 당신도 들어서 알다시피, 나는 포그 씨의 뒤를 밟아 여기까지 왔소.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런던 경시청에서 오기로 되어 있는 체포 영장이 아직까지 오지 않았소.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포그 씨를 이 홍콩에 묶어 두어야겠는데, 어떻소? 내게 힘을 빌려 주지 않겠소?"
" 내가 말입니까?"
" 잉글랜드 은행에서 받게 될 상금은 당신에게도 나누어 주겠소. 그러니..."
" 그게 무슨 말이오? 나는 싫소."
파스파르투는 이렇게 소리치고 일어서려고 했으나, 다리에 힘이 없어 다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 픽스 씨, 당신의 말이 모두 옳다고 하더라도....., 우리 주인 어른이 당신 말대로 은행 도둑이라 하더라도, 그 분은 역시 나의 주인 어른이고, 그만큼 좋은 분은 없어요. 정직하고 너그럽고....., 이 세상의 돈을 다 준다고 해도 나는 그 분을 배신할 수는 없어요."
" 그럼, 당신은 내 말을 거절하겠소?"
" 물론이지요!"
" 그렇다면 좋아요. 아무 말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어서 술이나 듭시다."
" 그러지요."
파스파르투는 다시 술을 마셨습니다.
픽스 형사는 어떻게 해서라도 파스파르투를 포그 씨와 떼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테이블 위에 아편 빨대 몇 개가 있었습니다.
픽스 형사가 그것을 손에 쥐어 주자, 파스파르투는 담뱃대인 줄 알고 불을 붙여 몇 모금 빨더니, 그대로 마룻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 옳지 됐다! 이만하면 포그 씨는 이 프랑스 놈이 깨어날때까지는 카르나티크 호의 출발이 빨라진 줄을 알 리 없고, 설사 출발한다 해도 이 얄미운 프랑스 놈은 버려 두고 가게 되겠구나!'
픽스 형사는 빙긋이 웃고 돈을 지불한 다음 밖으로 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