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 하얀용WhtDrgon. 김동은
안녕하세요. 천공 향 비등 백룡, 하얀용 김동은입니다. 또 접니다. 2002년 사반년동안 저만 보고 계시니 살살 지루해지셨을 때도
되셨을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다행입니다.^^ 이제 마지막편이니까요. 핫하. 어차피 마지막편! 하얀용의 습관대로 삼천포여행을….
성을 쌓는데 돌이 얼마나 들어갈까. 돈은 얼마나 들까. 그외 뭐가 필요한 걸까… 그걸 아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실제로 지어진 성을
보고 얼마가 들어갔는지 안 후 비교하는 방법이겠죠. 어디 성이 공짜로 지어지는 것이겠습니까.
1. 조선시대의 Task Force 도감
기동대군요. 태스크포스. 특별 임시 위원회라는 뜻도 있습니다. 어떤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임시로 조직된 후, 결과가 처리되면
없어지는 조직이죠.
예를 들면 학교나 회사에서 체육대회를 한다고 하면 체육대회 준비 위원회가 생기죠. 네~네. 안 그런 학교도 많아요. 우리 학교도
안그랬으니까. 뭐 학생회장이 위원장을 맡든 귀염받는 전교 1등이 맡든 어쨌든 체육위원이라던가 그리고 열심히 준비하고는 체육대회 끝나면
없어집니다. 뭐 잘하면 백서 하나 남기고, 아니면 그런 것도 없었죠 뭐. 암튼 그런게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바로 도감(都監)입니다. 항상 있는 일이라면 관청을 따로 만들지만 그렇지 않은 일은 도감이 만들어졌죠. 예를 들면
궁궐건설본부라던가 임금님 등극잔치 준비위원회, 임금님 초상 준비 위원회... 음… 임금님 초상나는 거야 정기적인 일이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초상을 담당하는 관청을 만들 수도 없잖아요. 뭐 그러고보면 저 멀리 이집트란 나라에선 그렇게 하긴 했군요.
이 도감은 조선시대에 생긴 물건은 아닙니다. 이성계 장군이 시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명언을 남긴 최영 장군님 보내버리고 만든
나라인지라, 고려 것을 꽤 많이 가져다 썼습니다. 후기에까지 남아있던 걸 보면 꽤 쓸모있는 제도였나 보죠?
도감이 설치되면 최고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에 우리도 익히 아는 고위관료를 임명합니다. 뭐, 병조판서라던가 하는 6조판서나, 좀
큰일이면 영의정을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누가 총책임자가 되느냐에 따라 당연히 공사의 규모나 진행속도가 달라지죠.
그리고 그 밑으로 제조(提調), 도청(都廳), 낭청(郞廳), 감조관(監造官), 정사(正使),부사(副使),전교관(傳敎官) 등을
임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직책들도 겸직인데 이런 임시직을 통틀어 권설직(權設職)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도감이 임시조직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수해나는 것마냥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어차피 어느 때쯤엔 정기적으로 있는 일이어서 그
일을 맡는 도감도 종류가 있었습니다.
1.1. 책례도감(冊禮都監)
책봉이라고 하나요? 왕세자로 책봉 시키려면 모두 찍어내야 할 것이야. 우움… 뜬금없는 말이지만, 전 같은 시대에 살았던 두 여인
중에 정난정보다는 황진이를 더 좋아한답니다. 아, 책봉이야기 했죠?
세자대빵인 왕세자, 왕세손, 국왕 안사람, 왕세자 여편네, 왕세손마누라… 그냥 앗나~ 니 담에 왕해라 하고 담배 두 개피 던져주듯
옥새 던져주고 끝내면 서로 신간 편하련만 어디 왕 그리 쉽게 해먹나. 당연히 잔치를 벌렸죠. 책례는 그 준비위원회입니다. 국정
보살피랴, 담당 업무하랴, 윗사람 줄 대랴 바쁜 공무원들 동원해서 일시키는 거죠 뭐.
온김에 더 알아보고 갈까요? 책봉의식에는 먼저 백관들이 모두 모입니다. 백관은 모든 벼슬아치들을 말하는 말이죠.
백관(百官)이라고도 하고 백공(百工), 백규(百揆), 백료(百寮), 백사(百司)라고도 하죠. 거 있잖아요, 문무백관이라던가
만조백관이라던가 하는 말…(만조(滿朝)는 온 조정이란 뜻이에요) 그렇다고 공무원들이 모두 모인 것은 아니죠. 대통령 취임식에도 좀
잔반이 되는 사람들이나 모이는 것처럼. (하긴 마이클 잭슨도 오두만. 아, 그 친구는 좀 되는군요. 나왕 케촉 데리고 할 대통령은
없으려나…)
그리고 종실도 참석하죠. 종실(宗室)은 종친(宗親)이라고도 하는데 임금님의 일가친척들을 말합니다.
참고로 종친은 유복친을 제외한 9촌부터 시작되는 3종친 이상을 말합니다. 뭔소린지 모르겠다고요? 뭐 한 김에 아예 이것도 찍고
가죠.
4촌부터 5촌은 종(從)이라고 부릅니다. 6-7촌은 재종(再從)이라고 부르고 8-9촌은 삼종(三從), 10-11촌은
사종(四從)이라고 부릅니다. 유복친은 8촌까지이고 종친은 그 이상입니다.

참고로 유복친은 옷을 입는 친척이라고 해서 상을 당했을 때 상복을 입는 혈족을 말하죠. 뭐 이렇게까지 말했지만, 그냥 종실이라고
하면 임금님네 핏줄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시 책봉 이야기로 돌아가죠?
많이 삐져나왔군요. 이거… 아무튼… 이렇게 문무백관 종실들이 모여서 왕에게 이것저것 받습니다. 책보나 책인. 그리고 교명을 받는데
책보/책인은 책과 도장이어서 합 세가지를 받게됩니다.
그리고 책보(冊寶)나 책인(冊印)이라고 했는데 같은 겁니다. 간책(簡冊)과 보인(寶印)을 말하는 거죠. 왕비 책봉할 때 주는
옥책(玉冊)과 옥보(玉寶)를 책보라고 하고, 왕세자 이하 기타 등등 자투리들 주는 죽책(竹冊)과 인장(印章)을 책인이라고 합니다.
어차피 옥책이나 죽책이나 둘다 책이고 옥보나 인장이나 도장입니다. 옥책 혹은 죽책은 비행기 띄우는 글이 써진 대나무쪽 책입니다.
죽간이라고 하죠. 뭐 타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어쩌고 저쩌고 하는 글입니다.
마지막으로 교명. 이제 왕세자가 됐으니 촐싹거리지 말구 잘 좀 해라 라고 잔소리가 써진 종이를 주는데 이걸 교명(敎命)이라고
합니다. 있잖아요, 그 반장임명장 줄 때 타의 모범이 되며… 어쩌고 저쩌고 써있는 그거.
교명은 왕비 시켜주니까 앞으로 잘해라 라고 써진거고, 옥책에는 품행이 방정해서 왕비에 딱이로구나라고 써진 겁니다. 죽책에는 아빠
닮아 잘났으니 왕세자가 될만도 하지 라고 써진거죠. 데굴.
1.13.1. 옥새
그리고 이 교명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었습니다.

시명지보는 옥새의 일종인데, 명나라 왕한테서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도장을 받아서 명나라에 문서 보낼 때 쓰고,
시명지보는 교서, 교지 내릴 때 쓰고, 이덕지보(以德之寶)는 통신국서, 유서지보(諭書之寶)는 관찰사, 방어사들이 부임할 때 썼습니다.
그 외에도 우글 우글 많은 종류가 왕마다 따로 있는데 이건 인부랑 사이트 (http://inburang.co.kr/)에
가시면 자세히 잘 나와 있습니다.
암튼…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수원 화성을 지으신 우리의 슈퍼스타 정조대왕께서 왕세손으로 책봉되실 때 영조께선 저기 위에 말한
중요한 도장인 조선왕보를 찍어서 내려주셨는데 그때 책례도감이 딴지를 겁니다. 양식이 다르다 이거죠. 뭐 그 뒤에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더 가면 하얀용 밑천 나오니까 여기서 그만.
책례도감은 책봉에 관련된 행사를 모두 주관하는 T/F였습니다. 단순한 행사준비뿐 아니라 저렇게 행사 전반에 대해 왕에게 조언을
하고 이것저것 잘 됐는지 맞추는 일을 했죠.
아, 그건 그렇고 받은 다음엔 뭐하냐고요? 음… 책례도감 이야기는 끝났는데, 뭐 궁금하시다면야.
1.13.6. 책례
그걸 받고 나서는 임금님이랑 어르신들에게 전문을 올리고 인사합니다. 전문(箋文)은 큰일 있을 때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사륙체의
글입니다. 사륙체는 아시죠? 국어시간에 시조 공부할 때 배우는데… 뭐, 아니면 말고요. 사륙체는 변려문이라고도 하는데, 4.6자
한자로 된 문장법입니다. 한자 4자로 전편을 만들고, 6자로 대꾸하는 거죠. 비슷한 것으로는 오언고시가 있습니다. 이건 5자씩 끊는
거죠.
왜 하필 이런 거였냐면 그 당시 외교를 할때는 한문이 당연 필수였고 (왜나라든, 중국이든) 거기에 더해서 이런 문서는 공식문서 즉
변려문이어야 했습니다. 잘난척 한다고 해야할 지, 격식을 맞춘다고 해야할 지… 뭐 비슷한 예는 서양이든 어디서건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참고로 을지문덕 장군이 적장에게 보낸 오언고시를 보실까요? 여수장우중문시라는 것이죠. 그만하고 집에 가지? 라고 비꼬는
글인데…
神策究天文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모두 알고 있고
妙算窮地理 오묘한 계책은 지리를 다 알았구나
戰勝功旣高 전쟁에 이겨 이미 공이 높으니
止足願云止 만족함을 알고 그만 그치기를 바라노라
멋지죠? 그리고 살수대첩이 있었죠. 그러고 보면 외교문서가 변려문인 것도 어느정도 이해는 갑니다. 아! 이 이야기하려는게
아닌데…!
왕이랑 어르신들게 전문 올린다고 말했나요? 책봉 받았으니 책봉 받은걸 임금께 고하는 절차죠. 거참. 임금이 책봉했는데, 임금께
고하는 건 또 뭐람. 그리고나선 신하들에게서 치사받고, 전문받고 또 했답니다. 치사(致詞)는 치사빤쓰할 때 그 치사가 아니라 경사를
축하하는 송덕의 글입니다. 공덕을 칭송하는거죠.
뭐, 복잡하죠? 이건 간략한 절차고 음악불고 행차하고 꽤나 복잡했습니다. 더군다나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이면 책비례까지 중간에
했답니다. 이런 복잡한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걸 모두 관리하는 곳이 책례도감이었죠.
그리고 그 결과를 다 책으로 써서 남긴답니다. 도감이 남기는 글을 의궤라고 하는데 일종의 백서입니다. 나중에 참고하려고 써놓은
글이죠. 화성성역의궤도 화성의 공사감독을 한 도감에서 써서 남긴 글입니다.
자, 그럼 다음… 네? 책비례는 뭐냐고요? 왠만하면 그냥 넘어가시지… 뭐 다음에 설명할 가례도감이 할 일이니까요.
1.14. 가례도감(嘉禮都監)
뭐, 어쩔수 없죠. 책비례는 대혼 절차 중 하나입니다. 왕세자나 임금이 결혼하는 것을 대혼(大婚)이라고 했죠. 납채례, 납징례,
고기례, 대혼/책비례, 친영례, 상견례로 이루어집니다. 례라고 안붙이고 의라고 붙이기도 한답니다. 납채의, 납징의, 고기의…
이렇게요. 이 행사와는 별도로 납채, 납징, 고기, 책비, 친영, 동뢰를 육례(六禮)라고 한답니다. 납채할 때 납채례를 하는거죠.
마지막에 상견례와 동뢰가 다르죠? 상견례는 얼굴보고 맞절하는 행사고, 동뢰는 결혼식의 하일라이트. 네. 그겁니다. 동뢰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니 냅두고, 이 대혼이라는 행사가 무지막지한 물건이라 당연히 도감이 설치됐답니다. 킹 장가 보내기 특별 위원회.
처음엔 신랑의 일가친척중에 사자를 정하는데 덕망있는 친척이 맡게 됩니다. 그래서 사주단자와 납채서를 들고가서 혼인을 청하는게
납채례(納采禮)라고 합니다.
사주단자는 아시죠? 탄생 년월일시. 설마 종이쪼가리 들고 갔겠습니까… 아니죠. 먼저 가로 40센티, 세로 28센티의 백지를 5칸으로
접은 다음에 한가운데에 육십갑자로 생년월일시를 쓰고 봉투에 넣고, 그 봉투를 싸리가지 사이에 끼우고 청실홍실로 위쪽부터 옭아묶어서
겉면은 다홍,안은 청색인 네모난 2겹 비단의 네 귀퉁이에 금전지(金箋紙:금종이로 만든 장식. 방승(方勝)이라고도 함)가 달린 사주보에
싸서 사주라고 쓴 띠를 두른겁니다. 헥헥…
그리고 납채문은 니 딸 내놔라라고 써놓은 글입니다. 이때 신부집에선 미리 준비해놓은 탁자에 사주단자를 받게되는데, 딸을 안줄려면
단자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어허… 이 어르신 겁이 없구만.
사자가 "신부댁의 은혜로 따님을 배필로 맞이하게 되어 납채례를 드리려 하니 거두어달라"는, 순순히내놔라는 말을 하면 "미비한
딸이지만 사주단자를 사양하지 않겠노라"라고 하면서 사주단자를 받고 답장을 줍니다. 저의 여식이 미련하고 어리석은데다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였사온데 이미 채택하여 주셨으니, 어찌 따르지 않사오리까. 너그러이 살려 주시옵소서. X년 X월X일 고길동 아룀이라는 납채서냐?
납치서냐?라는 요지의 내용이죠. 그리곤 사주단자를 사당에 가져가 조상님께 고하고 이 사주단자는 신부가 가지게 됩니다. 펴엉생~
그리고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예물을 보내는 행사가 납징례(納徵禮)입니다. 고기례는 사주보고 결혼날짜를 잡아서 통보하는거고, 친영례는
얼굴보는거, 상견례는 서로 맞절하는 거랍니다.
1.19.1. 정말 왕비책례
어허! 그런데… 이건 민간 이야기이고, 국왕은 다르죠. 네네… 그냥 참고하시라고 썼습니다.
그럼 국왕은 어떻게 하느냐!
처음엔 금혼령이 내려집니다. 전국 12-17세의 처녀는 모두 결혼을 못하게 되죠. 박력이 넘치죠?
그리고 별궁이 정해집니다. 이 별궁(別宮)은 잠시동안 왕비가 될 처자의 집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아까 말한 민간에서 행하는 일
중에 신부의 집을 이 별궁이 대신합니다. 왕비가 되는데 필요한 준비사항과 기타 등등을 모두 가르치죠. 수납채, 수납징, 수고기,
비수책, 친영의를 배우게 되죠. 아까 말한 거와 조금 다르죠? 아까 그건 신랑쪽의 이야기이고, 신부쪽에서는 이것을 수납징, 수고기,
비수책, 친영의라고 합니다. 신랑이 납했으니 신부가 수납하는거죠. 사실 왕이 신부네 집에 신랑이랍시고 가는건 좀 그렇잖아요? 별궁이
정해지면 별궁을 새로 고치고, 기타 등등 목적에 적합한 시설이 되기위한 여러가지 설비를 한답니다.
암튼… 금혼령을 내린 다음 적당한 궁궐 바깥쪽 건물에서 초간택을 합니다. 이때 O명의 처녀가 간택이 되고, 바로 별궁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3명 정도를 뽑는 것이 재간택, 마지막으로 삼간택에서 한명을 뽑아 XX의 딸 XX를 조선 X대 왕의 비로
맞이함이라는 조칙을 내립니다.
그리고 임금이 계신 대궐에서 납채의(納采儀)를 합니다. 그럼 별궁에서 수납채의(受納采儀) 행사를 하죠. 대궐에서 별궁(신부의
집)으로 청혼하러 사자를 보내는 것이 납채의고, 별궁(신부집)에서 이를 허락하는 것이 수납채의입니다. 설마 거절할까. 왕이 좋긴
좋습니다. 프로포즈 해놓고 답신 안 기다려도 되고.
납징은 대궐에서 사자가 별궁으로 예물을 보내는 납징의(納徵儀)와, 마찬가지로 별궁에서 그 예물을 받는 수납징의(受納徵儀)를
치룹니다. 고기(告期)는 대궐에서 길일(吉日)을 택하여 결혼날짜 잡아 알려주는 고기의(告期儀)와 똑같이 별궁에서 받는
수고기의(受告期儀)를 치룹니다.
아! 이제 나왔습니다. 책비례! 책비례는 책비의 단계중 대궐에서 하는걸 말합니다. 바로 자네를 왕비에 임명한다라는 거죠.
별궁에서는 그 임명을 받게되는데 (니 내 색시하라는 어명이요~) 이걸 비수책의(妃受冊儀)라고 합니다.
끝이 아닙니다! 또 홈쇼핑입니까. 안됩니다. 끝나면. 결혼식의 하일라이트를 꼭 봐야합니다.
친영(親迎)은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당연히 왕이 별궁에 행차하시는 거죠. 사실은 국왕 전하
결혼식중에 이게 가장 큰 행사입니다. 움직이잖아요.
그리고 대망의 동뢰(同牢)! …는 왕이 친영을 하신 후, 밤에 서로 맞절하는 상견례로서 마지막 공개 행사를 마치신 다음 술 한잔
나누시고, 결혼식의 하일라이트이자 유일한 비공개 행사인 동뢰연((同牢宴)을 하십니다. 음… 창구멍 내다간 온 몸에 창구멍 납니다.
쳇. 이런 재미없는 결혼식 같으니라구.
다음날 왕비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기타 등등 뵙는 조현례(朝見禮)를 올립니다. 기간은 어느 정도나 걸렸냐하면… 예를 들죠.
1866년 1월 01일 전국에 금혼령
1866년 2월 25일 초간택(창덕궁 중희당). 간택: 민자영외 5명
1866년 2월 29일 재간택 민자영외 3명
1866년 3월 06일 삼간택 민자영 간택!
1866년 3월 07일 "민자영을 조선 26대 왕의 비로 맞이" 조칙발표
1866년 3월 09일 납채의(창덕궁) - 수납채의(운현궁)
1866년 3월 11일 납징의(창덕궁) - 수납징의(운현궁)
1866년 3월 17일 고기의(창덕궁) - 수고기의(운현궁)
1866년 3월 20일 책비의(창덕궁) - 비수책의(운현궁)
1866년 3월 21일 친영의(운현궁) 및 동뢰연(T.T)
1866년 3월 22일 조현례(대왕대비, 왕대비, 대비전)
금혼령부터 결혼까지 근 넉달이 걸렸군요. 뭐 어떻게 보면 빠른 편이네요.
결혼할래! 부터 첫날밤까지 4개월이라니T.T
슬슬 도감이 하는 일이 감이 잡히시겠죠? 이런 일에 도감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자… 이제 도감은 의궤쓰고 해산합니다.
아, 민자영이 누구냐고요? 아시면서. 명성황후의 아버지는 민치록(閔致祿)이고 명성황후의 이름은 자영(紫英)이랍니다. 요즘이라면
민자영씨죠. 閔紫英.^^
자영씨~ 부디 행복하셔야해요~ T.T
1.20. 존숭도감(尊崇都監)
존숭도감은 존호를 올릴 때 그 이름을 짓고 행사를 주관하는 도감입니다. 존호는 말 그대로 존귀한 이름으로 영어로는
honorific title이라고 한답니다. 왕이 멋진 사고 한번 치면 신료들이 업적을 찬양하며 올리는 이름이죠.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자를 쓰거라 로 유명한 한석봉 어르신도 1604년에 존숭도감 서사관을 지냈답니다. 최고 명필이 불려오는 자리니 알만하죠.
우리의 슈퍼스타 정조대왕님께서는 집권 9년만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고는 축하기념으로 경과(慶科:기쁜일 있을 때
맘대로 여는 과거시험)를 열어서 2000명이나 합격시켜버린 일이 있었죠. 이때도 물론 존숭도감에서 열심히 이름을 뭘로 지을까 고민
꽤나 했겠죠.
존호 말고도 왕은 많은 이름들이 있죠. 뭐냐고요? (아니면 제발 그냥 넘어가라고요?) 원하신다니 별 수 없죠. (싫어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죠.)
1.21.1. 왕의 명칭
아랫것들과는 다르게 왕은 나면서 이름이 없답니다. 중전마마의 맏아들로 태어나면 원자라고 불러줍니다. 아직 왕세자도 안됐다는거죠.
그리고 자가 있습니다. 이건 아시죠? 좌우명 같은 2글자죠. 또, 휘(諱)라고 하는 진짜 이름이 있습니다. 이 글자는 아예 종이에도
쓸수 없는 글자가 되서, 각종 공문에 절대 써서는 안되는 글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주 특이하거나 안쓰는 글자로 이름을 짓죠. 그리고
호(號)는 왕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생략. 근처사람이 붙여주거나 자기가 스스로 붙이는 이름입니다.
존호(尊號)는 왕이 뭔가 잘했을 때 신하들이 올리는 호칭이죠. 바로 존숭도감이 하는 일입니다.^^
시호(諡號)는 중국에서 내려주기도 하고, 시호도감에서도 붙이는데 왕이 죽었을 때 붙이는 호칭입니다. 이건 그냥 덜렁덜렁 붙이는게
아니라 조선 초기에 194자, 세종 이후 107자 합 301자 중에 골라서 짓는 것입니다. 글자마다 10-15가지의 의미가 있고
거기에 왕이 살아생전 잘한걸 골라서 붙이는, 이른바 킹 메이커 엔딩 화면인거죠. 하지만 엔딩이 아닙니다. 우리가 왕 이름으로 가장 잘
알고있는 하나가 있으니까요.
묘호(廟號)는 3년상 치루고 나서 종묘에서 신주에 붙여주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태정태세문단세라고 외우는 거죠. 공이 많으면 조,
덕이 많으면 종이 붙습니다. 당연히 -일반적으로- 공이 많으려면 전쟁이 있어야하고 덕이 많으려면 평화로워야 하니, 사고친 왕은 조가
붙고, 어떻게 잘 넘긴 왕은 종이 붙지만, 이것도 다 조정대신들의 평가점수에 달린 일이죠.
끝이냐? 아니죠. 왕인데. --; 홈쇼핑의 역사는 탁월합니다. 네, 네.
마지막으로 능호(陵號)가 있습니다. 바로 무덤 이름이죠.
1.22. 진연도감
진연은 궁중 잔치의 일종입니다. 나라에서 연꽃 건져올려 심청이가 나오면 잔치를 벌이는데 이걸 궁중연의(宮中宴儀)라고 하고, 작은
순으로 진작(進爵), 진작(進酌), 진찬(進饌), 진연(進宴), 진풍정(進豊呈)이라 부릅니다. 이 잔치를 주관하는 곳이 바로
진연도감입니다.
진찬은 왕족간에 경사가 있을 때 하는 거라 절차가 간소합니다. 진작은 잔치라기보다 진연 때 임금에게 술을 올리는 별도의
의식이고요.
잔치할 일이 생기면 먼저 진연도감이 만들어지고 제일 먼저 날짜를 정합니다. 생신이나 회갑 같은 건 그냥 그날 하고 안 정해진 것은
길일을 잡습니다. 이 시점이 잔치 수개월 전입니다. 기획서를 잘 만들어서 상감께 결재 받고 행사 치루고, 백서 발간해서 진찬의궤,
진연의궤라는 식의 제목 붙이고나서 진연도감을 해체합니다.
1848년에 대왕대비전 육순잔치 진찬의궤에 보면, 진찬을 3월 17일에 시작해서 19일까지 3일간 잔치를 여는 내용이 나옵니다.
잔치를 열기 전에 습의(習儀)라고 예행 연습을 7번이나 했다는군요. 대단한 리허설이죠? 그리고 임금님 상인 진어찬안은 높은
그릇(고배)에 담아 여섯 상을 쫙 늘어놓게 되어있고, 이 음식들도 별도의 절차에 따라 놓는 음식이 정해졌다고 하는군요. 상에는 용을
그린 녹색의 비단(용문단(龍文緞))을 두르고, 운문단이라는 복숭아색 비단을 상 위에 덮습니다. 기름 종이를 깐 다음 음식을 놓게되는데
진어찬안이 6상이라는 것은 이 밥상이 6개가 붙어있다는 소리죠.
하지만 6개가 아니라 8개입니다. 이 찬안이라고 부르는 6상의 양옆에 협안이라고 해서 상 두개를 더 붙입니다. 장식은 찬안과
똑같답니다. 그리고 별도로 수주정(壽酒亭)이라고 부르는 술상을 따로 두는데 마찬가지로 주칠을 한 상에 붉은색 비단을 깔고 은주전자,
은술잔 등등… 술단지와 부수자재들을 올려놓죠. 주칠은 수은과 황으로 칠한 붉은색에 가까운 칠이랍니다. 아시죠? 옛날모양 장롱이나
밥상에 칠해져있는 색이죠. 옻칠보다는 좀 연합니다.
그리고 또 따로 술잔을 올릴 때 쓰는 진작안(進爵案)이라는 상을 따로 두고, 찻상으로 다정(茶亭)이라는 상을 따로 둡니다.
수주정이나 진작안이나 다정이나 모두 똑같은 상이랍니다.
모든 상에는 좌면지(座面紙)라고 부르는 상에 까는 기름종이를 깔고 주칠한 작은 원형상에 은 찻주전자에 은찻잔을 놓습니다. 그리고
은령롱시(銀玲瓏匙)라고 은으로 만든 작은 화채용 수저를, 운수저를 은시접에 담아놓고 은젓가락,은보시기(작은그릇)를 놓고요. 닭갈비집
마냥 앞에 두르는 앞치마를 넣어놓은 휘건함탁(揮巾函卓)이라는 나무상자를 놓고, 촉대(촛대), 꽃단지 등을 늘어놓습니다. 음. 이건
상다리도 은으로 하던가 해야할지도요.--;
이렇게 진어찬안 외에도, 진어미수(進御味數), 진소선(進小膳), 진대선(進大膳), 진어염수(進御鹽水), 진탕(進湯),
진만두(進饅頭), 진다(進茶), 진어별찬안(進御別饌案), 진과합(進果 , 찬합음식)순으로 차례차례 상이 올랐습니다.
잔치의 주인이 이 상을 받는 것 외에도 대전, 중전, 왕세자, 세자빈, 공주, 옹주 등의 각 왕족에게 고배상을 차리고, 잔치에
초대된 제신 일동에게 크게 차린 상으로 한상씩 내리고, 대궐 안에서 근무하는 관원에게 적게 차린 상으로 또 한상을 내리는데 이렇게
임금이 신하에게 음식을 내리는 것을 반사(頒賜)라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한명 한명에게 따로 상차림을 하는 독상이고, 그 밑으로는 상에 여럿이 붙어 먹는 것으로 두레라고 합니다. 여기도 등급이
있어서 상반(上盤), 중반(中盤), 소반(小盤), 대우판(大隅板), 중우판(註柳板), 소우판(小隅板), 쟁반(錚盤)에 음식을 모듬으로
차립니다. 제일 조그마한 건 궤찬(饋饌)으로 병쫄따구들에게 내리는 것인데, 흰떡 3개, 산적 한꼬치, 청주 한잔이 전부랍니다.
암튼 이렇게 잔뜩 대접 받는 수가 1000여명. 음식을 만드는 숙수(熟手)가 100명이었습니다. 그중에 잔치음식은
대령숙수(待令熟手)가 만들고, 임금님 수랏상은 소주방(燒廚房)의 책임자인 주방내인이 만들고, 차, 화채 같은 간식은 생과방(生果房)의
내인들이 만든다는군요.
잔치음식 만들 때는 잔치에 사용되는 모든 기물과 재료, 장비 등을 각 고을에서 물자를 상납하고, 궁궐에서는 소주방 외에 별도로
임시 건물을 짓고 거기서 음식상을 꾸민답니다. 말 그대로 이런 잔치판을 벌리는 모든 일을 감독하는 것이 이 진연도감이 할 일이죠.
1.26. 빈전도감, 국장도감, 신릉도감
이 세 도감은 왕이 돌아가시면 일제히 설치됩니다. 빈전도감은 시체를 염하고, 빈소를 차리고, 상복을 준비하는 등의 일을 하는
곳이고, 국장도감은 관을 짜고, 장례 행사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합니다. 또 산릉 도감은 봉분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되죠.
이게 또 대책 안서게 큼지막한 일입니다만, 빨리 삼천포에서 원대복귀하여야 하는 관계로 인하여 궁금하신 분은 서울 600년사
홈페이지(http://seoul600.visitseoul.net/
시대사→일제침략 하의서울→사회사정→제5절 관혼상제의 변천 항)에 있는 국장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1.27. 축성도감
이제야 슬슬 제자리로 돌아가는군요. 먼 여행 수고하셨습니다. 축성도감은 성을 쌓는 일을 맡은 도감입니다. 태조께서 백성의 피로
서울 4대문과 성벽을 쌓을 때 설립되었죠.
그럼 수원 화성을 지을 때 이 축성 도감이 설치되었으냐. 그건 아닙니다. 애석하게도요.
2. 화성 성역소
쪼그마한 일이면 도감이라고 안부르고, 소, 청이라는 명칭으로 부릅니다. 뭔가 수리할 때는 수리소라는 소를 설치하고 책임자는
당상입니다. 우리 식으로는 소장이라고 해야겠죠. 그리고 그보다 더 격이 낮은걸 청이라고 합니다. 1677년에 임금님 초상화 보관소인
남별전을 증축할 때 '남별전증건청'이라고 불렀고, 책임자는 도제조가 아닌 당상입니다.
화성이 대단한 목적을 가진 야심찬 성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서울 성벽을 쌓거나하는 큰 일이 아니라 지방의 성 축조 공사였기 때문에
역시 도감을 설치하는데는 무리가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결국 정조대왕께서는 성역소를 설치하여 공사를 진행하게 하십니다.
정조 17년에 수원부가 화성이라고 명명되었고, 축성 공사의 정식 명칭이 화성성역, 도감이 아니라 소니까 건설본부 명칭
'화성성역소'가 탄생합니다.
이래서야 로망이 좀 떨어지는군요. 네네. 하지만 우리의 슈퍼스타 정조대왕 마마께서는 여기서 또 찬란한 로망을 펼치십니다.
2.1. 화성 성역소의 인사
아까 소는 당상이 최고책임자가 된다고 했죠? 이때 맡는 사람의 직책은 판서 정도입니다. 뭐 잘해봐야 시장 정도죠. 하지만
화성성역소는 이런 개념에서 벗어난 초호화 인사편제를 이룹니다.
최고 책임자의 직함은 당상도, 도제조도 아닌 총리대신! 그리고 그 자리에 두 번째 가는 슈퍼스타인 체제공이 임명됩니다. 아~
체제공이 누구셨던가! 정조대왕께서도 친히 "경을 알고 경을 씀에 내 득실히 믿었노라", "조정에 노성(老成)이 없다면 국가를 어찌
보존하랴.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한다 소문 자자하니 경같은 이는 매우 드물도다" 라고 극찬하신 분이며, 맹사성, 황희 정승과 함께
거론되는 청백리 정승이시고, 좌우정, 우의정을 두루 돌고 임명당시에는 국가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중추부의 최고 책임자로서,
의정을 역임한 원로대신 중 최고 서열위 한명만이 임명되는 영중추부사를 지내시던 국가 원로 대신이셨습니다. 어허, 체제공께서 오래
살다보니 소장도 다해보시고… 이런 국가원로가 소의 장을 맡게 되는 일은 조선역사에 단 한번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당상이라는 쪼글쪼글한 직함 대신 총리대신의 직함으로 체제공을 임명하시고, 그 밑에 감동당상의 실무책임자로서 조심태가
임명되었습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국왕친위군 지방군 총사령관이자 수원 시장님 아니신가?
대단하죠? 정조대왕님 당신은 진정한 멋쟁이십니다!
2.4. 수원성역소의 직책구성
가장
위에는 총리대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현장을 돌며 실무를 책임지는 감동당상이 있고, 그 아래는 도청과 책응도청이 있습니다.
도청은 현장사무소이고, 책응도청은 돈과 자재의 경리업무를 맡은 사무부서입니다.
이 책응도청 밑에는 현장에서 사무업무를 추진하는 감관(感官)이 있죠. 감관 밑에는 회계 업무를 보는 서리, 문서 수발하는 서사,
창고와 자재 경비원인 고직, 서울로 왔다갔다하며 우편과 업무 연락을 하는 사령이 있습니다.
현장사무소인 도청 밑에는 공사의 기술업무를 담당하는 감동, 간역, 폐장이 있습니다. 이 밑으로 장인,노무자들이 있죠.
총리대신 체제공은 서울에 머무르셨고, 공사를 관리하고 왕에게 진척 보고를 하는 일은 감동당상이 맡았습니다.
도청은 공사진행을 감독하며 열흘마다 총리대신에게 보고하고, 패장을 비롯한 감독관들의 근태를 체크해서 감동당상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감동은 현감출신인 현직 중하위 무관들이 맡았는데, 주요 공사장마다 1-2명씩 배치되어 철릭을 입고, 주립을 쓰고 돌아다니면서
패장들을 감독하는 일을 했습니다. 사진의 좌상단의 의상이 철릭이고, 밑의 모자가 주립입니다. 그림에서는 철릭 위에 답보라고 부르는
일종의 겉옷을 걸치고 있는 차림입니다.
감동의 수는 22명이었고, 패장은 178명이 공사에 참여하였습니다. 패장이 일을 제대로 안하면 곤장을 치기도 했다는군요. 음… 빡센
일정이었겠군요. 삐대다간 엉덩이 쪼개집니다. 그렇다고 패장이 단순한 감독이나 잡일꾼은 아니었습니다. 엄연히 기술감독자였죠. 목수
출신이나 현직 목수 등 기술적인 부분을 알고있는 사람이 중간관리자가 되면 프로젝트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움직이는 지는 기술 계통의
개발자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
3.
공사비용
수원 화성은 돈 86만냥, 쌀 1500석, 곡식 13000석이 소모되었습니다.
돌과 자재 구매비에 32만냥, 장인과 모군의 인건비가 29만냥(임원과 간부는 뺀거죠. 공무원이니까.) 운반비가 약 18만냥,
공사의식과 토지매입비 5만량 정도가 들었습니다. 세세한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3.1. 자재비
목재 매입에 4629냥, 석재 매입에 179320냥, 기와가 6183냥, 기타 잡비에 70265냥, 토사매입에 35593냥 총합
322566냥이 들었습니다.
석재비가 억수루 들었죠? 그건 돌을 사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부역으로 부렸지만, 18세기에 와서는 그게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되어 규격별로 가격을 정해놓고, 돌을 가지고 오면 값을 쳐주는 형식이었죠. 화성 근처의 숙지산에 돌이 무진장
있어서 모두 그걸 떠왔답니다.
한변 2자(1자=30센티미터 정도)에 길이 3자 5치짜리 큰 성돌 8전.
한변 1자8치, 길이 3자의 중간 성돌 5전
한변 1자5치, 길이 2자 8치의 작은 성돌 3전
길이 4자, 넓이 3자, 두께 1자 2치짜리 바닥에 까는 큰 전돌이 1냥
길이 3자, 넓이 2자5치, 두께 1자짜리 작은 바닥 전돌이 8전
길이 5자 2치에 넓이 4자 1치, 높이 4자의 네모반듯한 선단석이 15냥.
길이 5자 2치, 넓이 2자, 높이 2자 7치의 아치형 옹예석이 12냥이었습니다.
또 그때그때 별도로 필요한 치수의 돌의 크기를 만들도록 명령해서 처리한 것이었죠.
그래서 돈도 많이 들었지만, 그전에 태조가 백성들 부역을 시켜서 쌓은 서울 성벽은 그 다음해 여름에 비 내리자 와장창
무너졌습니다. 여름에는 농사지어야 하니까 성벽 공사를 겨울에 했거든요. 그래서 12만명의 한겨울 생노가다는 끝장났고, 그래서 다시
똑같은 짓을 또 했지만, 뭐 무너지진 않았어도 흔들거리긴 마찬가지였죠.
세종은 서울인구 10만인데 전국 농민 30만명을 동원해서 성벽을 전부 돌로 바꾸려 했는데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얼어 죽거나 깔려
죽은 사람이 800에, 자꾸 도망가서 도망치는 사람은 붙잡아서 목을 베었고, 구역마다 감독관 이름을 써서 무너지면 책임을 묻겠다고
다그쳤지만 뭐, 그것도 판 벌인 거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성과는 없어서 결국 돈주고 사게 됐지만, 2년 반 만에 이렇게 멋진 성을
튼튼하게 지어올린 걸 생각하면 역시 최고 효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겠죠.
나무 값은 그렇게 많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건 국유지의 나무를 썰어왔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게나 고둥이나 나무를 베어다
썼지만, 숙종 때부터 전국 282개소에 봉산이라는 나무를 키우는 산을 지정하고 입산금지 금표를 둘러친다음 금송군이라는 군대가
지켰답니다. 그전에 나무를 마구 베어쓰다가 임진왜란 때 끝장난 후에 숙종이 보다 못해서 '소나무를 베었을 때 저절로 말라죽은 나무는
80대, 생나무는 100대를 친다' 라는 금송절목이라는 규정을 만들었죠. 나뭇꾼이 선녀 내지는 금도끼를 얻기 전에 엉덩이가
쪼개지겠군요. 저거 맞으면 죽습니다.
덕분에 슈퍼스타 정조대왕님은 나무가 남아도는 시대에 통치를 하시게 됐죠. 큰 나무는 그렇게 해결해서 운반하는데 곡식 밖에
안들었지만, 그래도 나무가 부족하고, 운반이 고약해서 서까래와 마루 깔 송판은 한강의 목재상에서 사들이거나 개인 소유의 산에서
베어내고 나무값을 치뤄줬답니다. 그렇게 사온 서까래가 13299개였고, 송판은 길이 30자, 넓이 1자, 두께 1치 7푼짜리로
2300립(장) 전부를 돈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길이 20자짜리 목재 1500주, 길이 9자의 작은 목재 3200주도 모두 돈 주고
샀죠.
그 외에도 많은 수많은 것들, 나무벽돌, 물감, 철물, 숫돌, 새끼줄… 모두 돈주고 샀습니다. 서울 상인에게서 사거나, 지방의
관청을 통해서 필요한걸 사들였죠.
철물은 연장 만들어야 하는 거라 가장 필요한 물건이었죠. 그래서 공사 처음부터 정철 51만근, 강철 6천근을 바로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장식 같은걸 만들 때 쓰는 철판이라고 할 수 있는 철엽은 2800근을 전주감영과 경상도 성주에서 가져오고, 나머지 철물은 모두
상인에게서 사들였죠.
숯은 69만석을 사들였고요. 벽돌접착제인 석회는 86만석을 황해도 금천과 경기도 안산에서 사들였습니다.
단청물감은 2100근을 사용하였는데 경상도 영일군 뇌성산에서만 뇌록색 단청안료가 나는지라 1400근은 사들이고 700근은
뇌성산에서 긁어 모았고요.
종이는 호조에서 보관하는 재고를 뺏어오고, 나머지는 상인에게서 사들였습니다.
숙마라고 하는 삼으로 만든 튼튼한 새끼줄, 빈 자루, 새끼줄은 모두 구매를 했고, 수레바퀴 매끄럽게 돌아가라고 윤활유처럼 쓰는
흑토라는 건 함경도 고원, 영흥에서 구해오고, 숫돌은 경상도 단성과 영일에서 구해오고….
전국을 누비는 대공사였죠. 대부분의 물건을 서울 상인에게서 살 수 있었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거의 상도 수준이로군요.
3.6. 인건비
감독관 노임 16900냥에 요미(料米:급료로 주는 쌀) 1495석, 일반노임 146241냥, 노역부 노임 13971냥, 총합
297132냥이 들었습니다.
수원 화성 공사의 특징 중에 두드러지는 것이 선진형 노임입니다.^^ 그전에는 그냥 데려다가 부려먹거나, 한달에 한번 일괄적으로
지급했지만, 화성 공사에서는 작업일수와 작업량을 기준으로 노임을 지급함으로서 빠르고, 예쁘고, 튼튼하게 공사가 진행되었죠.
감독자였던 감동의 급료는 돈 12량, 쌀 10말이었고, 패장은 돈6량, 쌀 9말이었습니다.
일반 기술자로 성 공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직종인 메이슨 즉 석수는 조역(조수) 1명을 짝으로 해서 둘이 셋트로 받는 돈이 하루
8전 9푼. 쌀 6되 (1되=1.8리터)를 줍니다.
대장장이는 야장이라고 부르며 3명의 어시스트가 딸려서 1패를 이루며, 1패에 하루 돈 8전 9푼을 줍니다.
목수, 미장이, 조각장, 화공(그림장이), 가칠장에게는 하루 4전 2푼을 줬습니다. 목수는 아실거고, 미장이는 흙벽이나 바닥을
바르는 사람이고, 가칠장은 단청하기 전에 그자리에 아교물을 타서 바르는 것을 가칠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5번을 하죠. 하지만 그냥
단청을 그리는 사람도 가칠장이라고도 합니다.
큰톱쟁이, 작은톱쟁이 등 잡다한 기술자들은 하루 돈 3전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노가다라고 부르는 모군은 하루 돈 2전 5푼이었습니다.
가장 비싼 석수가 시다(--;) 한 명 껴서 8전 9푼에 쌀 6됫박을 받았으니 그 조수를 단순기술자로 쳐서 돈 3전을 준다고
해도, 석수는 하루 5전 9푼에 쌀 6되를 받고, 노가다는 하루 돈 3전을 받았으니, 임금이 2배를 훨 넘어버리는 격차가 벌어지게
되죠. 그전에는 안 그랬답니다.
음 어디 보자… 요즘은 노가다는 6-7만원을 받고, 목수 아저씨들은 12만원 정도, 석수분들도 10-12만원 정도니까, 2배 안
되는 돈 받는 건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비슷비슷하네요. 여기까지. 더 이상 하면 하얀용의 전공이 뽀록 나겠군요.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 기술자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죠,
3.8.1. 기술자들
수원 화성 공사에는 22종의 장인 1840명이 종사하였습니다. 대부분은 서울 수도권의 장인들로서 우수인력이 동원된 공사였죠.
22종의 장인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석수
말 그대로 돌 다듬는 사람입니다. 석수는 전국에서 662명을 모았습니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이 219명으로 톱을 달리고 있고,
황해도 73명, 개성부에서 65명, 평안도에서 62명, 경기도 58명, 충청도 53명, 전라도 41명, 강화부 40명, 경상도
23명, 강원도 17명, 광주부 1명입니다. 역시 성이니만치 석수는 엄청나게 필요했나봅니다. 수가 가장 많고 전국에서 다 불러왔죠.
다른 직종들은 수원에서 멀어질수록 수가 적어집니다.
잠깐, 모든 기술자들의 지역별 인력 분포를 살펴보면 총 1840명중에 서울에서 1101명, 개성에서 133명, 수원에서 131명,
경기도에서 115명, 황해도에서 76명, 평안도에서 62명, 충청도에서 58명, 전라도에서 41명, 강화부에서 40명, 강원도에서
33명, 경상도에서 31명, 광주에서 16명, 함경도에서 3명을 불러왔죠. 서울 기술자들이 대량으로 쓰였죠?
목수
목수는 아다시피 나무 깍는 사람이죠. 목장(木匠) 혹은 목군(木軍)이라고도 했는데, 목공이라고는 안했습니다. 이건 바다 건너
VAIO 노트북 만드는 애들이 쓰는 말입니다. 목수도 기술에 따라 분야가 갈립니다. 대목은 집의 형태를 결정하는 기둥과 대들보,
도리, 공포(지난편에 설명함)를 짜는 큰 일을 하고, 소목은 창문, 문살, 반자(천정), 난간, 계단, 마루를 짜죠.

그리고 서열이 있어서 도편수, 부편수, 정현편수, 공도편수, 연목편수가 있었습니다. 편수는 일종의 마스터들이죠. 도편수는
총책임자, 부편수는 부사령관이고, 정현편수가 구배(slope:지붕의 삼각형 모양 틀)를 잡고 기둥과 보(beam:대들보 등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걸리는 횡기둥)의 크기와 간격을 결정하고, 공도편수가 기붕/보와 구배 사이에 놓이는 공포를 짭니다. 그리고 연목편수가
서까래(rafter)를 걸죠.

큰 공사가 서울에서 많아서 기술자가 넘쳤나봅니다. 총 335명의 인력중에서 서울에서 238명이 동원되었고, 수원에서 43명,
강원도 16명, 경기도 15명, 광주부 10명, 경상도 8명, 충청도 4명, 황해도 1명 순입니다.
이장(泥匠)
이장은 쉽게 말해 미장이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는 토역(土役)꾼, 토역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담장이나 부뚜막 기타 등등의 흙을
바르는 일을 하죠.
흙을 먼저 체로 쳐서 고운 흙을 모아 반죽을 해서 흙손으로 벽에 좍좍 바릅니다. 벽에는 먼저 수숫대나 싸리 같은 잡목을 엮어서
벽체를 만드는데 그것을 중계(中棨) 혹은 외(?), 욋가지라고 합니다. 이 외에 안쪽면을 먼저 바르는게 그걸 초벽질이라고 하고,
바깥쪽을 바르는걸 맞벽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안팎을 바르는데 그걸 재벽질이라고 하죠. 또 가는 모래를 섞은 진흙으로
바르는걸 특별히 사벽질이라고 부른답니다. 훌륭한 미장이는 큰집 한채를 바르는 동안 흙을 하나도 안 흘리는게 자랑이었다는군요.
작업 연장으로 흙을 걸러내는 흙체, 그리고 반죽한 흙덩이를 떠서 받치는 흙받기, 그리고 흙을 벽에 바를 때 쓰는 흙손과 흙주걱이
있습니다. 옆에 흙반죽을 잔뜩 쌓아두고, 왼손에 흙 한덩이 올려놓은 흙받이를 들고 오른손에 든 흙손으로 흙을 떠서 벽에 바르는 모습.
상상이 되시죠?
이장은 서울이 211명, 개성에서 67명, 수원에서 13명, 경기도에서 1명, 충청도에서 1명이 동원되었습니다.
와벽장(瓦?匠)
와벽장은 벽돌을 굽는 장인을 말합니다. 벽돌은 생각보다 엄청난 물건이었으니까요. 수원성처럼 벽돌이 많이 쓰인 적은 없었답니다.
거기다가 구워서 만드는 이 물건은 생각보다 매우 귀해서, 공사중에 모양에 맞춰 벽돌을 깨서 쓰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잘못 깨져서
버리는 비싼 벽돌이 아까워서 벽돌을 필요한 모양에 맞춰 숫돌에 가는 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정도였답니다.
서울에서 141명이나 동원됐지만, 정작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함경도에서 보낸 3명의 와벽장이 많은 노하우를 제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역소에서 함경감영에 보낸 공문에 우리 벽돌 많이 쓰는데 서울엔 벽돌을 잘 굽는 사람이 없으니 함경도에 재주있는 벽돌장 몇 명만
뽑아서 봄에 보내주세요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답장은 본읍의 벽장 최삼득 포함 3명을 보낸다였습니다.
함경도는 기술자를 통틀어 달랑 3명 보냈는데 그 3명이 바로 와벽장 3명입니다. 그리고 수원에 4명, 광주 1명, 경기도
1명입니다.
야장(冶匠)
야장은 대장장이입니다. 건물에 들어가는 각종 철제뿐 아니라 사용되는 모든 철제 연장을 직접 만들어댔죠.

야장은 서울이 63명, 수원20명이 전부였습니다.
개장(蓋匠)
개장은 기와를 굽는 사람입니다. 기와에서 가장 기본적인 게 암키와와 수키와죠. 암키와(암컷 기와)는 차력사들이나 무술하는 사람들이
10장씩 쌓아두고 뽀개는게 암기와고요. 암기와와 암기와 사이를 덮는 둥근 기와가 수키와입니다. 목수가 구배(목수 참조)를 만들고,
산자(?子:벽면의 외(이장에서 설명)처럼 수수깡 같은 걸로 쫙 얽어놓은 것)를 짜면 그 위 진흙을 얇게 펴 바르고, 암키와를 쫙
깔고, 수키와로 덮습니다. 그리고 처마 위에 막새를 붙이죠. 암키와 끝에 붙은게 암막새, 수키와 끝에 붙은게 수막새라고 합니다. 이
수막새를 특별히 와당이라고 하죠. 고구려의 와당은 유명하죠.

개장은 서울에서만 34명 투입됐습니다.
차장(車匠)
차장은 수레만드는 사람입니다. 서울에서만 10명이 동원됐습니다. 자세한건 운반비 항목을 보시길.
화공, 가칠장
그림 그리는 사람이죠. 건물에 단청 그리는 일을 했답니다.

단청을 칠할 때는 먼저 가칠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문양을 칠하죠. 가칠할 때는 천정쪽에는 뇌록색(청색과 황색의 중간색)을
칠하고, 기둥에는 석간주를 칠합니다. 아, 석간주는 물감으로 쓰는 붉은색의 흙이에요. 산화철이 들어있어서 그런 색이 나죠.
암튼 이렇게 색을 칠한 후, 가칠 위에 문양을 칠합니다. 화공도 편수가 따로 있어서 편수가 문양을 정하고, 안료를 배합해서
팔렛트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출초를 하죠. 이 문양을 정하는 것도, 색을 결정하는 것도 그냥 하는게 아닙니다.
단청의 종류에는 크게 다섯가지가 있어서, 우물이나 쉼터 등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에 하는, 가칠만 하고 끝내는 가칠단청, 가칠
단청에 먹선을 적당히 매겨서 펜터치 해주는 굿기단청이 있습니다. 이건 사찰이나 향교의 부속건물에 쓰이죠.
그리고 모로단청 혹은 머리단청이라고 끝부분에만 살짝 컬러터치를 해주고 나머지는 그냥 검은 펜터치로 끝내버리는 것으로 누각이나
궁궐의 쌈마이 건물에 씁니다. 또 금모로단청 혹은 얼금단청이라고 하는데, 살짝 컬러 펜터치가 아니라 그 부분은 본격적으로 해주고,
나머지는 대충 컬러로 해주거나 그것도 귀찮으면 까만 펜터치 해주는 단청입니다.
금단청은 비단 금자 쓴거 봐서 알다시피 전면 컬러 원고입니다. 법당 같은데나 쓰는거죠.
갖은금단청은 금단청의 초호화판으로 초특별판 한정판용 브로마이드 원고로서 문양이 더욱 세밀하고 아예 동물이나 신물의 그림을
그려넣고, 입체감도 주고, 금박도 입히는 돈칠 단청입니다. 비싼 법당에 사용되죠.
색 결정도 그냥 하는게 아닙니다. 기본 5색. 아시죠? 파랑, 빨강, 하양, 검정, 노랑입니다. 이걸 혼합해서 색을 만드는거죠.
청색은 방위는 동쪽, 신물은 용을 상징하고, 계절은 봄. 오행에서 나무를 상징합니다. 빨강은 방위는 남쪽, 신물은 새, 계절은 여름,
오행은 불이고요. 하양은 서쪽, 호랑이, 가을, 오행의 쇠를 상징하고, 검정은 북쪽, 현무, 겨울, 오행으로 물을 상징합니다. 노랑은
방위는 중앙이고, 계절은 환절기, 오행은 흙을 상징합니다. 이런걸 고려해서 색을 배합하죠.
출초를 합니다. 초는 색칠공부용 밑바탕 그림이고요. 이 초를 그리는걸 출초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밑그림이죠. 먼저 한지를
2-3겹 정도로 해서 초지를 만들고 거기에 밑그림을 그리죠. 이게 출초인데, 이 출초가 가장 중요한 작업이어서 가장 실력이 좋은 편수
즉 도편수가 맡아서 합니다. 그 다음에는 방석 한장 깔고 그 그림에서 선이 그려진 곳에 바늘 구멍을 막 뚫습니다. 그걸 천초라고
합니다. 이렇게 된 초지를 초지본이라고 하죠. 그 초지본을 -지금쯤 가칠이 끝났을- 단청을 칠할 곳에 대고 밀가루 주머니로 두드리면
기둥에 하얀 색으로 밑바탕이 만들어집니다. 이걸 타초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채화입니다. 윤곽 따라 도편수가 지정한 대로 채색을 하는거죠. 색칠담당 어시스트들. 움화하하.
화공은 다른 인력들과는 좀 다르게 서울에서 딸랑 5명, 수원에서 11명, 개성에서 1명, 광주에서 1명, 경기도에서 무려 28명이
동원됩니다. 거기다가 거의가 스님들이셨답니다. 이유는 아시겠죠? 뭐 꼭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승려분들이 목공이나 각종 기술계에 진출해
계셔서 민간에서 승려를 초청해서 집짓는 일은 흔히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무진장 호평을 받았죠. 민간 기술자 시키면 3일 걸릴 거 스님
기술자들은 하루면 끝낸다. 왜냐하면 농땡이 안피우고 정말 정성껏 열심히 하거든 이라는 기록도 있으니까요.
대인거장(大引鉅匠), 소인거장, 기거장(岐鉅匠), 걸거장(?鉅匠)
셋다 톱질하는 기술자입니다. 인거, 기거, 걸거라는 톱을 썼죠.
대인거장은 서울만 30명, 소인거장은 서울 16명, 수원 3명, 광주 1명, 총 20명 기거장은 서울 12명, 수원 6명, 경기도
9명, 총 27명. 걸거장은 서울 9명, 개성 1명, 광주 2명 총 12명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톱질하는 사람 총 89명.
마조장(磨造匠)
맷돌 만드는 사람입니다. 맷돌을… 사오면 되지 만들사람까지 필요했나.--; 서울에서 2명 데려왔습니다.
목혜장(木鞋匠)
갈수록 태산이군요. 목혜장은 나막신 만드는 사람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나막신을 목혜라고 불렀죠. 목혜는 소나무나 오리나무를 파서
만든답니다.

정말로 나막신을 만들었는지, 이 기술을 다른데 활용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진장 수가 많거든요. 서울에서 33명,수원에서
1명. 총 34명이나 투입됐답니다.
조각장(彫刻匠)
조각장이야 말 그대로 조각하는 사람이죠. 중요무형문화재 35호로 조이장(彫伊匠)이라고도 한답니다. 고려, 조선시대부터 지금
현대까지 꽤나 이름 날리던 기술자들이죠. 옛날에는 은장(銀匠)이라고도 불렀답니다. 실버샵 차려야겠군요.
조각장은 강철로 만들어진 5cm정도의 작은 정으로 백금을 포함한 귀금속의 금속 기물에 조각을 합니다. 정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촛정, 공군정, 다질정, 평다질정, 비늘정, 누깔정, 움푹정, 운풍정, 갈기정이 있고 그 외에도 광을 내는 광치기나 디바이스인
거름쇠, 소도리, 조이틀 등의 많은 도구를 썼습니다. 귀금속 세공사로군요.
이 도구들로 선각(선을 긋는 것. 촛정을 씀), 화각(쇠뿔을 두드려서 하는 공예. 위에 그림을 새기거나 그림. 다질정을 사용),
사군자나 십장생, 산수 등의 무늬를 새긴 금속편을 붕사로 땜질해서 입체적인 효과를 내거나(이걸 고각(高刻)이라고 합니다.), 구멍을
뚫어놓는 투각 등을 합니다.
조각장은 서울에서 31명, 수원에서 2명, 경기도 3명, 총 36명이 동원되었습니다.
선장
선장은 원래 배 만드는 사람인데, 이상한데 끌려와서 기둥이나 처마꼭지를 깍았답니다. 뭐 비슷하긴 합니다만…. 서울에서 2명,
수원에서 6명을 데려왔습니다.
안자장(鞍子匠)
안자장은 안장 만드는 사람인데… 우움.. 어따 썼을까요? 서울에서 4명이 고작입니다.
병풍장(屛風匠)
병풍장은 병풍 만드는 사람입니다. 아이고 표구사 사장님이 돌쌓는데는 왜 오셨지… 정말로 병풍을 만들었을까요? 인테리어에 필요하다곤
하지만 그거야 다른 물건처럼 사오면 그만인데… 서울에서 1명 딸랑 왔습니다. 어허..
박배장(朴俳匠)
문짝 기술자입니다. 문짝의 경첩인 돌쩌귀나 고리를 박고, 문짝을 문틀에 틀어맞추는 일을 합니다. 서울에서 1명 뽑았습니다.
부계장(浮械匠)
지금은 비계라고 부르는데, 영어로는 scaffolding이라고 합니다. 옆집 때려 뽀개고 건물 지을 때 건물을 둘러 싸듯이 옆에
쇠파이프로 격자 짜놓은거 있죠? 건축장에서 자주보게되는데, 먼지 날리지 말고, 미관상 좋으라고 보통 가운데 건축회사 마크가 들어간
네모난 비닐로 막혀있죠. 뭐 안 그런 것도 있고.
이건 예전에는 대나무로 했죠. 그 전에는 낙엽송으로 했다는군요. 러시아워2에서 성룡이 붙잡고 액션을 벌인 그것이죠. 바로 그걸
설치하는 기술자입니다. 이게 꽤 만만히 볼게 아니어서 꽤 위험한 작업이었다는군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요.
서울에서 1명 왔습니다. 혼자 그걸 다했나?
회장
오.. 팔자 좋아보이는 이름이군요. 그 회장이 아니라 회칠하는 장인인데 그렇다고 칠하는 건 아니고, 석회를 굽는 장인입니다. 벽에
회칠한다는 말이 있는데… 암튼 멀리 황해도에서 1명 불렀습니다.
3.9. 운반비 (294-304)
지방 운송비는 곡식 13176석, 현장운반비 146615냥, 기계나 수레의 비용이 42813냥 총합 189428냥.
돌을 깨고, 나무를 나르는데 비용이 들어갔죠. 또 나르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고요. 운반에 든 비용은 담운, 타운, 차운을
나뉘는데, 담운은 사람이 나르는 것이고, 타운은 동물을 이용하는 것, 차운은 수레로 나르는 것입니다. 세부내용으로는 담운이 5만
8천냥, 타운이 2만 3천냥, 차운이 5만 3천냥이 들었고, 수레 등의 장비 제작비용이 별도로 4만 3천냥이 들어서 총 19만냥에
가까운 돈이 들었습니다.
뭐 어쨌건 화성은 수레나 마차, 각종 기구들을 잘 활용한 공사로도 유명합니다. 또 화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중기도 있죠.
유형거라고 부르는 수레도 정약용 선생님이 만드신 겁니다. 근데 사실은 거중기도, 유형거도 별로 사용되진 않았어요. 특히 유형거는
이론은 모르겠는데 현실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죠.
수원 공사에서는 거중기가 1부, 유형거가 11량, 녹노가 2좌, 대차 8량, 별평차 17량, 평차 76량, 발차 2량, 동차
192량, 구파 8좌, 썰매 9자가 쓰였습니다.
대차는 소 40마리가 끄는 바퀴 2개짜리 크고 매우 긴 수레고요.
평차는 좀 작은 수레로 4~10마리의 소가 끄는 수레입니다.
발차는 대차, 평차와는 달리 바퀴가 바퀴살이 아닌 막힌 바퀴이고 소 한마리가 끌고.
동차는 발차와 같은 구조로 사람 4명이 끄는 구조입니다.
구판은 불조심 리본처럼 생긴 나무판 두 개에 줄을 달고, 바닥에는 피라미드 쌓을 때 쓰던 것처럼 보이는 둥근 통나무를 바닥에 많이
많이 깔아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썰매는 정말로 썰매처럼 생겼는데… 바나나 모양의 둥근 두꺼운 나무판 두 개의 사이에 각목 여러 개를 댄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녹노는 긴 장대 두 개를 하늘로 비스듬히 앞쪽으로 치솟게 해서 끝에 도르래를 달고, 장대 아랫 부분에는 물레를 달아놓은 물건으로
밧줄을 물레에 감아 돌려서 도르래를 통과해서 밑으로 내려오는 밧줄에 돌을 매달아 끌어올리는 장비입니다. 하는 짓은 거중기랑 비슷한데
거중기보다 훨씬 단순하게 생겼죠.
거중기는 의외로 별로 안쓰인 모양입니다. 공사 끝나고 났을 때 거중기는 고스란히 남았고, 유형거는 10대 뽀개지고 1대 남고,
녹노는 끝장나고, 대차는 고스란히 남았고, 별평차는 오히려 하나 늘었고(새끼쳤나.), 평차는 14량 남고, 발차는 둘 다 부서지고,
동차는 27량 겨우 남고, 구판은 다 없어지고, 썰매는 고스란히 남겼다는데, 안 부서졌다는 게 튼튼해서라기 보다는 사용을 별로
안해서라고 생각하는게 더 좋을듯합니다.
인건비 등등이 돈으로 지불되던 때니 만큼 인건비 상승은 장비의 발전을 불러오는 까닭인지 유독 수레나 각종 장비들이 많이 사용된
공사였죠.
3.12. 기타
도로 까는데 2901냥, 토지매입비 12724냥, 포상 및 의료비 7837냥, 제사 5988냥, 식목 1961냥, 기타 잡비
20161냥. 총합 51572냥.
제일 비싼게 토지매입비죠? 주택 철거와 농지의 보상금이 약 5천냥, 둔전을 매입하는데 약 5천냥이 들었답니다. 제사는 건물에
대들보를 얹을 때 치루는 의식 등등 상량식, 고유제를 치루는데 1200냥, 낙성연을 치루는데 4600냥이 들었습니다.
4. 끝
네. 끝입니다. 읽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워터가이드 관계자 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영양가
있는 글이어야 했을텐데 아쉬움도 남고요,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진정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성에 대해 말씀드리게 되어 기쁘기도 합니다. 다음 기회에 더 좋은 모습과 유익한 내용으로 다시 뵐 수있었으면 합니다. 그때까지 이만
하직인사 올리겠습니다.
-천공 향 비등 백룡. 하얀용WhtDrgon. 김동은
참조자료 (가나다순)
18세기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저자 김동욱, 출판사 발언)
꿈의 문화유산,화성 (저자 유봉학, 출판사 신구문화사)
야후 백과사전 (http://kr.encycl.yahoo.com/)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CD2000)
서울600년사 홈페이지(http://seoul600.visitseoul.net)/
수원화성-빛깔있는 책들 24 (저자 김동욱, 출판사 대원사)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저자 유봉학 외. 출판사 백산서당)
한국의고건축 7:수원성 (저자 주명덕, 출판사 광장)
화성성역의궤-국역 (역자 김만일외. 출판사 경기문화재단)
첫댓글 오옷, 마지막 아자씨 눈이 부리부리. 내용 나이수요~
오옷! 사진이 커졌다...^^;; 깜짝 놀랐어요...^^;; 좋은 자료 감사함다...^^ 역시 NHN에서 뽑을 만 하신 분이네요...^^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