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상호(1997). 『학문과 교육(상): 학문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4장 응용학문
4.3. 지식의 선용과 악용의 책임
647
4.3. 지식의 선용과 악용의 책임
4.3.1. 가치기준의 공립과 갈등가능성
우리는 이제까지 세계의 다원성을 전제해 왔고, 그 다원적인 세계 가운데 학문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택해 왔다. 본 저서가 일관성 있게 견지해 온 태도의 하나는 세계들 간의 독립과 조화라고 하는 것이다. 수도계의 하나로서 학문계는 그 나름의 존립의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 나름의 가치를 추구한다. 그 가치는 반복되는 말이지만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학문의 세계는 다른 세계들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관계는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학문계와 도덕계 사이에는 우연적인 관계가 성립할 따름이다. 학문은 말할 필요도 없이 도덕적인 가치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학문은 도덕적으로 ‘중립’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학문은 최종적인 결과로 본다면, 항상 선용되거나 악용될 양방의 가능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이것은 극
648
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본 절에서는 그러한 개연성을 두고,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되는지를 간략하게 다루어 보고자 한다.
흔히 우리는 과학적 지식이나 그로부터 개발된 기술이 여러 방면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 생활하고 있다. 이 때 ‘이용’이라는 말 혹은 ‘활용’이라는 말은 언뜻 듣기에 그 결과가 좋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지식과 기술은 거의 예외 없이 선용의 소지 못지않게 악용의 소지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놓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문이 더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도덕이 더 중요한 것인가?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양자택일 식으로 성급하게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가지 사건을 다양한 가치기준에 의해서 여러 차례 독립적으로 평가하고, 가능한 한 그 개별적인 가치를 다원적으로 공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예컨대, 어떤 지식을 진리의 기준에 의해서 추구하고 평가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도덕성을 따지는 일은 어느 것을 다른 것으로 환원시키는 일이 아닌 이상에는 모두 중요한 일이다.
과학과 기술은 현대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지식은 우리들 문명의 훌륭하고 빛나는 소산의 하나이다. 과학을 이용하여 보다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그 위력과 한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과학에 의해서 그 가능성이 실현된 기술을 잘못 적용하면 인간생활에 참혹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과학과 기술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할 때, 우리는 과학기술과 도덕의 공립가능성을 꾀할 여유를 갖게 된다. 그것이 일차적으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태도이다. 지식이 악용되는 사례를 막기 위하여 지식을 만들어내는 활동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좋다는 제안이 나올 수도 있다.
과학적 지식은 언제나 오용될 소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탐구하는 것 자체를 억제하는 일은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위험한 발상으로 보인다. 첫째로, 그 억제 자체는 윤리적인 가치의 측면에서 정당화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하여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가치인 진리탐구
649
가 저해를 받게 된다. 학문과 도덕은 모두 수도계의 하위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며, 인간의 삶에서 도덕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일도 역시 고귀한 것이다. 학문이 가치추구의 활동인 이상 그 결과의 도덕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활동을 중단하지는 않을 것이며, 또 중단시켜서도 안 된다. 둘째, 학문의 악용만을 보는 것은 사태의 일면만을 따져서 그 전부를 부정하는 오류에 빠진다. 지식은 악용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못지않게 선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삶은 거의 과학의 발전에 의존하고 그것에 의하여 영위되고 있다. 무지에 의존해서 우리의 인간적인 존엄성과 도덕적 가치를 보존하려는 것은, 원시에로의 퇴행을 가져올 뿐이다. 지식과 무지를 비교할 때, 후자가 전자보다 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우리는 가난 · 질병 · 재난 등이 많은 경우에 무지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 횡포와 편견이 얼마나 우리의 생활을 비참하게 했는지는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우리가 취해야 할 정당한 태도는 자연과 우리 자신에 관해서 타당한 지식을 추구하고, 그 이해를 토대로 우리들의 존엄성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진리탐구는 가끔 국가의 목적과 갈등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만약 후자를 위해서 전자를 억압하거나 혹은 왜곡시킨다고 한다면, 학문의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학문은 사회적 조건이 그 실천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초연해 있어야 한다. 학문은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학문이 그것이 아닌 무엇에 소용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결국 학문으로 하여금 기업체나 정부의 보이지 않는 기득권을 위해 봉사하기를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학자들이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고 연구활동을 하도록 권장하여야 한다. 그들에 대해서 우리가 적용해야 할 올바른 판단기준은 진리이다. 만약 우리가 학문 외적인 목적이나 특정 세력의 이해만을 고려해서 과학활동을 억압한다면, 학문이 갖는 가치는 충분히 실현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흔히 우리 주변에는 과학의 사회적인 기능만을 강조하고, 그 공리적인 개념을 내세워 과학을 중앙정부에서 통제하는
650
정책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전체주의 국가들은 과학 자체를 위한 순수과학은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면서 학문적인 지식은 오로지 국가의 목적에 봉사해야 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학문의 자율성을 유린하고 정상적인 발전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과학과 권력 사이에는 피하기 힘든 일종의 공존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으로, 과학은 탐구의 진행을 위해서 물질적인 지원을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 정부는 과학자들이 정부가 사회를 통제하는 데 필요한 일정한 역할을 하는 한에서 그들을 필요로 한다. 대부분의 과학에 대한 정책은 무지한 관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 경우 연구비를 얻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권력에 봉사하거나 잘못된 정치의 앞잡이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일찍이 폴라니(1951, 1974)는 독일의 히틀러 정권과 소련의 스탈린 정권이 순수학문을 비난하고, 과학을 국가적인 이해의 하위수단으로 삼음으로써 학문을 포함한 모든 문화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사태를 직접 목격하고, “지식의 사회적 이용”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위험성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과학은 그것이 응용의 문제에 개입하는 한, 과학 외적인 감독과 간여로부터 해방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과학을 응용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문제로 인하여 인간사의 다른 가치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그것이 인간사에 아무렇게나 적용되도록 방임해 놓기에는 그 영향력이 너무도 강력하며, 때때로 생겨나는 부작용은 또한 너무도 치명적이다. 따라서 그 응용이 다른 가치들과 균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과 정치적 개입은 불가피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과학하는 일과 도덕을 만족시키는 일은 서로 다른 기준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하며, 가능하다면 공립시키는 것이 인간사의 다원화를 위해서 바람직하다는 사실이다.
651
4.3.2. 자연인의 다면성
구체적인 자연인에게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 우리는 다양한 세계와 관련을 맺으며 살고 있고, 특정한 세계에 참여할 때는 그 세계가 요구하는 태도와 관점을 동원한다. 이 때문에 어느 개인을 특정한 세계에만 참여하는 것으로 배타적으로 규정하기보다는 그가 종사하는 다양한 세계들과 그 때 그가 취하는 태도와 활동의 양상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어느 개인이 다양한 세계와 관련을 맺기는 하지만 그 세계들 가운데 학문과 관련된 부분이 있고, 그 부분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할 경우에만 우리는 그를 학자라는 범주로 다룬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학자라는 범주에 속하는 개인이 수행하는 모든 것이 학문활동이라는 혼동에서 해방될 수 있다. 가령 이러한 방식에 의해서 과학자라는 명칭이 부여된 어떤 구체적인 자연인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과학자로서 그러한 활동을 한다기보다는 경제인, 혹은 정치인, 혹은 사회인으로서 그렇게 활동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다른 범주에서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인간적인 측면들인 것이다. 우리의 세계분류방식을 따른다면, 한 구체적인 개인은 이를테면 학문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여타의 수도적인 생활 · 세속적인 생활 · 교육적인 생활을 동시에 하고 있다. [각주 4: 이 대목에서 독자가 앞서 “본위의 선택(1.2.)”이라는 주제와 “선인의 귀감(1.3.)”이라는 주제를 연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가운데 우리는 상황에 따라 어떤 세계를 선택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책임과 적응 양태를 요구받는다.
학문계를 위주로 생활하고 있는 개인의 측면에서 책임질 것은 진리의 기준에 맞는 지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유능한 학자라고 해서 그가 반드시 도덕적으로 선행을 한다거나 윤리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
652
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 학자의 범주에 드는 사람은 학문의 면에서는 영향력이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정도의 세속계적인 판단력이나 영향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어떤 특정한 지식이 초래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오직 학자들만의 책임소관이 아닌 점을 인정한다면, 그에 대한 판단과 견제의 책임은 과학자들만이 아니라, 그 과학의 영향을 받을 모든 사람들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학문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때, 그것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먼저 세계의 다면성에 비추어 책임의 소재를 따져야만 한다. 우리는 흔히 과학기술의 활용과 관련하여 그것을 산출하는 데 참여하고 있는 학자나 기술자의 도덕적 양식을 믿거나 문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식과 기술은 일단 산출되고 나면, 그것을 산출하는 데 참여한 학자나 기술자의 손을 벗어나 그것을 입수하고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의해서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지식이 진리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데에 따른 책임은 학자나 기술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학문과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이고, 도덕의 문제는 학문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다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변별적인 태도는 이른바 스스로 ‘학자’의 범주에 속함을 핑계로 삼아서 도덕적인 문제를 외면하려고 하는 많은 자연인에게도 요구된다. 그는 학자임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시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 물론 학자로서의 자신의 임무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얻은 지식은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시민으로서 일부의 책임을 질 용의가 있어야 한다. 단지 가치중립적이라는 말로 자신의 도덕적인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올바른 태도가 되지 못한다. 흔히 과학적 기술의 지지론자들은 가치중립을 천진난만하게 표방하면서 그 적용의 결과를 외면하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 가치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가치가 작용하지 않는 공간은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과학자로서 도덕적으로 중립을 선언한다면, 그 태도는 결국 기존의 가치체제에 수긍하는 결과를 가져온다(Habermas, 1968). 즉, 과학자들이 자신의 입장
653
을 중립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사실상 기존의 가치를 지지하는 입장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가치에 공감할 수 없다면, 그는 시민으로서 자신의 과학적인 활동이 가져올 도덕적인 결과에 대해서 용기 있게 발언함과 동시에 그것을 지지하는 사회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는 유능한 과학자이자, 동시에 책임 있는 시민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4.3.3. 유용성이라는 개념의 양극성
우리는 학문의 외재적 가치를 논하는 자리(2.2.1.)에서 “지식은 힘”이라는 베이컨의 명언을 인용한 바 있다. 이 때 그 ‘힘’이라는 말은 단지 선용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악용이 또한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완전한 해방을 가져오리라고 믿었던 기술문명이 오히려 인간의 실존을 파괴할 수도 있다. 이 말이 가장 실감나는 분야가 핵공학이다. 핵공학은 오늘날 선용과 악용의 양면성을 보이고 있다. 핵공학의 연구는 한편으로 “제 2의 불의 발견”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로 인해서 점차 고갈되어 가는 석탄과 석유라는 자원에 의존하지 않고, 산업체와 우리의 생활공간을 가동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핵에너지는 어떤 다른 에너지보다 적은 역효과를 가지고, 적은 노력으로도 많은 효용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핵공학이 우리 생활에 가져올 수 있는 결과의 일면에 불과하다. 다른 일면은 그것이 평화적 이용과 더불어 인류를 대량으로 살상하는 무기를 제조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선용과 악용을 기다리는 과학적 지식이나 기술은 핵공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화약은 불꽃놀이를 하거나 여타의 평화로운 목적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는가 하면, 총알과 대포알을 날려보내는 폭약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각주 5: 노벨상은 이런 양면적인 용도를 가진 폭약의 제작자에 의해서 제정되었다.] 항생
654
물질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은 병균과의 전쟁에서 인간에게 승리를 약속했고 연합군의 승전을 이끄는 숨은 공로자가 되었다. 그러나 미생물의 발견은 다른 한편으로 인간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세균무기의 개발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생명현상에 대한 획기적인 발견으로서 근래에 분자생물학에서 이루어진 생물의 DNA 분자구조의 해명은 생물의 품종개량 · 유전적인 질병치료의 가능성을 넓혀 놓았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에게 이로움만을 준다는 보장은 없다. 그 가능성에는 역시 큰 재앙을 초래할 위험성도 포함되어 있다. 그로부터 괴물이 창조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단지 기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선용과 악용의 가능성을 가진 과학적 기술의 목록은 끝없이 열거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과학기술을 단지 찬탄의 눈으로 방관만 하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낙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연과학과 그에 따른 공학을 주로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바로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사실만큼 충분하게 인식되고 있지 않다. 오늘날 행동과학이나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다양한 인과관계의 해명에 몰두하고 있다. 그들은 특정한 독립변인을 조작하여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특정한 반응을 유발하는 비법을 찾아 왔다. 그러한 지식과 행동통제의 개발은 자연과학적 지식의 경우와 같이 괄목할 정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동안 상당한 정도의 진전을 보고 있다.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는 지식과 기법이 날로 쇄신되고 있는 추세가 계속된다면, 머지않아 그것은 자연과학이 성취했던 수준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의 유전인자와 일단의 환경요인이 특정한 상호작용의 패턴에 의해서 어떤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는 공식이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비밀이 밝혀지는 시점이 온다면, 우리는 행복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에 우리는 와 있다(장상호, 1980a, 1980b).
655
4.3.4. 환경공해의 문제
금세기는 하루가 다르게 기술공학적 세계로 치닫고 있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과학적 기술의 효용성을 실감한 시대사조는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야 말로 부를 창조하고,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며,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을 기초로 과학과 기술의 개발을 대규모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의 협조는 현대인에게 엄청난 통제력을 제공하였지만, 그 결과는 앞서 우리가 우려했듯이 반드시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동안 현대인은 공학이 부과하는 윤리적인 과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장도리를 든 어린이가 모든 것을 두드려 보는 것처럼 가능한 것은 모두 실현시켜 본다는 식의 횡포를 자행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예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자원의 고갈과 불균형, 그리고 공해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들이다.
기술은 자연을 정복한다는 이데올로기의 기초 위에서 성립되었다. 산업문명의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자연과 전쟁을 벌였다. 자연과학과 그것에 기초한 기술에 의해 우리생활을 통제하는 일은 우리들 자신의 유기체적 특성과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적 환경을 전반적으로 고려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만약 X하면, Y한다”는 단순한 인과법칙을 이용한다. 그들은 Y라는 특정한 결과에 관심을 가지며, 그것을 위해서 X를 조작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때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 X라는 조작이 결과하는 것은 단지 Y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제한된 실험실에서는 그러한 결과를 얻을지 모르나, 그것이 유기체에 혹은 생태적 환경에 적용될 때에는 예기치 않은 결과가 생겨날 수 있고, 이는 유기체 혹은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자연과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물질과 에너지의 이동을 통해서 서로 관련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생물계는 자연과 상호작용함과 동시에 그 내부에서는 식물을 매개로 한 생물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656
또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인류는 생물의 진화과정 가운데서 탄생하여 그 나름의 사회문화적인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사회문화적인 체계 가운데 하나인 인류의 과학기술은 생태계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으로 등장하여 자연계와 생물계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을 왜곡시키고 있고, 그것이 바로 인류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적용은 거의 예외 없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도 동시에 초래한다. 그 두드러진 사례의 하나가 DDT의 살포이다. 우리는 해충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한다는 오직 하나의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살충제 DDT를 개발하고 대량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실험결과는 DDT를 살포하면 틀림없이 해충이 박멸될 수 있는 것으로 나왔다. 그 결과를 토대로 지구의 전지역에 DDT가 살포되었고 많은 해충을 박멸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공학적 도식의 문제는 곧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험에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부작용이다. DDT의 대량살포는 인간에게 이로운 곤충을 포함하여 여타의 생물을 동시에 죽이면서 결과적으로 생태계 전체를 파괴하였다. 이제는 부작용의 해독이 효과보다도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기술공학적 부작용은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체를 헤아리는 의식의 부재는 전체에 손상을 가져온다. 약의 부작용도 여기에 포함된다. 항생제는 폐병을 치료하는 데 특효가 있지만, 그로 인해서 위장장애나 호흡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규모적인 부작용보다 더욱 심각한 것이 이른바 “진보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각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규모의 환경파괴이다. 열대의 우림이 벌목되고 개발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자연은 인간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고, 그 반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파괴된 환경이 우리에게 복수할 차례가 된 것이다. 하늘에서는 산성비가 내리고 공기는 오염되어 있다. 오존층이 파괴되어 유해한 적외선이 우리의 피부에 직접 도달한다. 자연의 반격은 그것과의 전쟁을 선포한 세대에게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세대에 더욱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 문제는 자연계나 생물계 또는 인간계에 국한되는 문제라기보다는 지구의 총체적인 체계의 문제로 등장하였으
657
며, 인류의 의사결정이 여기서 중요한 관건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기술공학과 자본주의체제는 ‘공해(public nuisance)’라는 새로운 부산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공해란 말 그대로 ‘공익’에 반대된다는 뜻이다. 대기오염 · 수질오염 · 토양오염 · 소음 등 인간의 건강과 생활환경에 피해가 되는 각종의 오염은 기업이 무계획적으로 자신의 이윤만을 위해 과학과 기술을 악용하는 데서 오는 사회적 재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그 생리상 산물을 과생산하여 구매자가 과소비하도록 조장한다. 이에 따라 쓰레기와 각종 오염이 불가피하게 된다. 특정 또는 불특정 다수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인해 불특정 다수인이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해의 문제 역시 환경파괴와 마찬가지로 국지적인 문제가 아니다.
4.3.5. 행동통제의 문제
우리는 다양한 수준의 사회적 단위에 참여하면서 알게 모르게 서로의 행동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인간성의 일면에는 조작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상 인간은 어느 동물보다도 타인을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조작하는 일에 능통한 존재로 알려지고 있다(Shostrom, 1967). 우리들의 심리상태나 행동을 계획적으로 통제하려는 의도를 가진 세력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의 환경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소비자들이 특정한 상품들을 구매하도록 유인하는 광고업이 오늘날 인기 있는 직업으로 등장하고 있다. 부모 · 친구 · 목사 · 정치가 · 교사 · 대중선동가 · 기업가 · 사회적 이상주의자 · 모리배꾼 등이 어떤 방식으로 간에 우리들의 행동을 바꾸어 놓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는 과학적인 지식보다는 일상적인 경험과 상식을 토대로 그러한 활동을 하여왔고, 이 때문에 그 의도가 제대로 관찰되지 않거나 혹은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범위가 한정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행동과학적인 통제기법을 입수하려 할 것이고, 자연과학자들이 그러했듯이 행동과학자들은 이 점증하는 지식의 구매
658
자들에게 그들의 지식을 공급할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의 의도적인 행동통제는 체계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확산될 것이다.
불행히도 일상인은 그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실제로 조작당하고 있으면서도 조작의 실체를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일부의 양식 있는 행동과학자들은 행동통제의 비법이 비천한 방식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켈만(H. C. Kelman, 1965)의 경고는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오늘날 사회과학자, 그리고 특히 행동변화의 실천가와 탐구자는 핵물리학자가 처한 것과 유사한 상황에 자신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창안해내거나 적용하고 있는 인간행동의 통제 및 조작에 관한 지식은 그것이 윤리적인 것인지가 대단히 불명료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사회적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수락해야 한다. 순수연구자들조차도 지식이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라는 안일한 확신 속으로 퇴행할 수는 없다. 물론 그것은 [각주 6: 지식이 중립적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어디까지나 진실이다. 그러나 그는 지식이 그것을 배태한 특수한 사회적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천가는 그가 타인을 도우면서도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에 대해서 궁극적인 안도감을 가질 수 없다.
위의 말은 경고의 의미는 있으나 현실감이 결여된 주장처럼 보인다. 이미 자연과학과 그에 따른 공학의 응용사례에서 입증되었듯이 행동의 법칙을 발견한 순수학자의 윤리적인 주문이 사용자의 의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순수과학자가 항상 윤리적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가정도 성립하지 않는다. 사실 순수연구라고 하는 것도 상당한 경비가 들며, 따라서 연구자는 그 연구결과를 연구비의 제공자에게만 헌납하는 경향조차 보이고 있다. 그래서 그 한정된 지식의 수납자들은 독점된 지식을 오직 그들의 특정한 목적에 맞도록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 인용하는 졸라드(S. M. Jourard, 1968)의 호소는 이 문제가 얼마나 급박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간접적으로 보
659
여주고 있다.
연구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직의 우두머리들에게 스스로 노예(servants)가 되는 상황을 피하고, 대신에 그들이 연구대상으로 삼은 피험자의 자유와 자아실현의 증진에 기여하겠다고 사심 없이 맹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그들은 인간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비밀을 얻게 된 수납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또한 그 수납자로서 간주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비밀들을 광고업자 · 정치가 · 교육매체전문가 또는 군대조직에 팔아넘긴다면 수납자로서의 책임을 수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연구자들은 피험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하며, 피험자들이 오도되거나 조작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깨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들의 안목을 확장시켜 주어야 한다. 요약하면, 나는 연구자들이 개인의 자유와 성장 또는 자아실현의 충복이 되고,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려고 연구자들에게 봉급과 연구비를 지불하는 기관의 첩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p.8).
우리는 앞 절에서 행동과학의 한 응용학문으로서 경영학이 출현했음을 지적했다. 켈만과 졸라드의 우려와 경고는 아마도 경영학의 실제를 검토하는 데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경영학의 배후에 있는 이데올로기는 아직도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그것은 자본가를 위한 것인가 혹은 노동자를 위한 것인가? 경영학에는 일반적으로 생산성이 향상되면 고용주나 종업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이 항상 예상했던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때로는 경영학이 오히려 생산성을 저해시킨 사례가 적지 않으며, “인간이 없는 조직(organization without people)” 등 여러 형태의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예컨대, 테일러가 처방한 기업의 과학적 관리기법은 노동자로부터 그들의 이니셔티브를 완전히 빼앗아감으로써 경영의 자의적인 관리를 가능하게 했고, 인간노동을 단순화시킴으로써 소외현상을 유발시킨 전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이후에 이에 대한 반성도 있었다. 이러한 부작용을 내부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과업의 성취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장과 실현 그리고 사회적 책임에 초점을 둔 접근방법이 고려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노동자 편의 직무만
660
족도 · 독립적인 의사결정 · 분권화 · 개방적인 의사소통 · 경영자 편의 윤리와 사회적인 책임 · 공해와 에너지 문제 등이 포함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해방이라는 측면보다는 수익성 · 경제성 · 생산성의 향상이라는 측면이 더 고려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아직도 경영학의 골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인간이 없는 조직(organization without people)”이라는 슬로건도 생산성의 향상이라는 목표에 공헌하는 범위 내에서 고려사항이 된다. 그리고 경영학의 연구를 지원하는 실질적인 세력은 근로자 집단이 아니라 경영자 집단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영학이 주로 기업주 편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는 실정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4.3.6. 선용의 책임소재
기술공학은 우리 생활의 깊은 곳에까지 이미 침투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것의 사용에 따르는 우울하고 모호한 가치의 혼미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인가? 그 주체는 누구인가? 이와 관련하여 일찍이 영국의 스티븐슨이 지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라는 괴기소설을 연상할 수 있는 독자는 여기에 내포된 문제와 그에 따른 해결의 실마리를 보다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소설에서 주인공 지킬박사는 유능한 학자로서 선악을 구분할 약을 제조하는 데 성공한다. 그 후에 그는 악성을 유발하는 약을 스스로 복용하고 추악한 하이드씨로 변신한다. 이어 살인을 범하고 쫓기게 됨에 따라 자살을 선택하면서 모든 것을 유서로 고백한다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끝난다. 이 소설은 과학기술의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성격분열을 매우 적절하게 예고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인격은 철학자 · 과학적 기술의 창안자 · 그 기술의 소유자 그리고 그것을 통제하는 크고 작은 규모의 단체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인간성에 선악의 양면이 있듯이 인간이 만든 학문적인 지식도 그것을 소유
661
하고 있는 사람의 양식에 따라서 양면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전쟁행위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가 되새겨야 할 사실은 핵에너지가 평화적인 이용보다는 군사목적에 의해서 먼저 개발되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당시까지 밝혀진 핵물리학과 핵기술로 인간을 효과적으로 살상하는 무기를 개발하려는 거대한 맨하튼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여기에는 아인슈타인이 만든 E=mc²이라는 공식과 여타의 기술공학적 지식들이 이용되었다. 그렇다면 지식의 오용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흔히 그 책임은 지식을 창조한 과학자에게 돌려진다. 과학의 사회적 결과에 대한 책임의 면에서 순수연구자와 응용연구자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순수연구자는 응용적 결과를 예상하지 않음에 비해서 후자는 어떤 특정한 실용적 목표를 처음부터 계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령 여기에 어떤 응용연구자에 의하여 고안된 특별한 폭발장치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선용과 악용의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 이 점에서 그것을 고안해낸 응용연구자에게 모든 사회적인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지식이건 기술이건 간에 그것이 후일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것을 최종적으로 사용하는 사람과 그의 도덕적인 심성에 영향을 주거나 그에게 사회적 제약을 행사하는 더 넓은 의미의 사회에 책임의 일부가 전가되는 것이다.
물론 과학자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소지가 명백히 있는 것을 연구한다면, 그는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인 가책과 견제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도덕적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한 가지 이유는 과학자가 흔히 그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책임을 감당할 만한 자질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도덕적 책임은 도덕적 능력을 전제한다. 과학자의 도덕적 자질과 능력이 반드시 일반인보다 뛰어나다는 보장은 없다. 일반 대중은 도덕적 판단이 과학자의 전문적인 소관사항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과학자들의 지식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은
662
진리보다는 善意志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도덕적인 능력의 면에서 학자들이 다른 어떤 사회적 집단보다 더 탁월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에게 보통 사람의 도덕적 판단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과학자들에게 전적인 책임을 지울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지식과 기술은 항상 그 창조자의 수중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적 지식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창안되지만 일단 그것이 남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 그것의 선용과 악용의 문제는 그들의 통제 밖에 놓인다. 예컨대, 핵공학의 지식은 그것을 창조한 과학자의 손을 벗어나 이미 정부와 관료와 군부의 손으로 넘어 갔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에 맞게 핵공학이 조립되고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 그 지식에 대한 사용의 책임은 과학자나 기술자의 책임범위를 넘어서게 된다. 우리는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과학자들에게 요구할 수 있다. 예컨대, 이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원자탄이라는 전쟁무기의 제조에 쓰일 위험성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또 그러한 방식으로 이용하려는 조짐이 있음을 알고 나서는 그것을 저지하는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평화주의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이 행사할 수 있었던 것만큼의 영향력이 없었다. 또한 원폭제조에 참여한 학자들이 그것은 선용되어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그들의 호소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제조된 원자탄은 이미 과학자의 손을 벗어나 독점기업과 군부의 통제에 들어갔다. 미국의 지배층은 원자탄 제조에 참여했던 학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전후의 세계에서 자신의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혹은 전쟁을 종식시킨다는 그들 나름의 명분을 세우기 위하여 원폭투하를 감행하였다. 그로 인해서 수십만 명의 양민이 살상되었다. 1945년 8월 6일 오후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듣고 나서 당시까지 원자에 관한 연구에 종사하였던 하이젠베르크(1969/1982)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그 날 밤 라디오에서 거기에 소요되었던 막대한 기술출자에 대한 뉴스 해설자의
663
설명을 듣고서 나는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하여 우리가 심혈을 기울이던 원자물리학의 발전이 지금 10만 명을 훨씬 넘는 인간의 죽음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엄연한 사실과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p.257).
지금도 원폭의 제조기술은 계속 실험되고 있으며, 그 과학적 기술과 막대한 힘은 특정한 국가 혹은 소수의 권력층의 통제하에 있다. 우리가 항해하고 있는 지구호의 창고 안에는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 전체를 순식간에 파괴하고도 남을 만큼의 핵무기가 실려 있고, 그들을 통제할 만한 어떤 확실한 안전책도 없다. 그 힘이 소수의 사람들에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 힘은 원자탄의 제조에 참여한 지식인 혹은 그것에 협조한 과학자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 소수의 선의에 우리 자신과 지구의 운명을 맡길 것인가? 이것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현대인이 안게 된 과제이다.
흔히 우리 생활에서 가치의 문제가 제기되면, 우리는 그 해답이 철학자와 같은 학자들의 입에서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그 기대 역시 환상이다. 이 점은 앞서 학문의 내재성을 다루는 자리(2.2.5.)에서 과학철학자인 라이헨바흐의 말을 인용하면서 강조된 바 있다. “어느 철학자가 당신에게 다가와서 궁극적인 善을 알고 있다고 말하거든 그를 믿지 마시오.” 역사상 철학자들의 가치론은 대부분 통치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해 왔다. 이 사실은 근래에 푸코가 일련의 저서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폭로한 바 있다(Foucault, 1972; Dreyfus & Rabinov, 1983). 그가 권력의 정밀분석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것은 우리가 과학적이고, 이성적이고,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미화하는 것들이 사실은 종종 권력의 조직화와 체계화를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혹은 이것을 합리화시켜주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러한 과학의 권력적 합리화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예컨대, 미친 사람 · 정신병동에 수감된 자 · 죄수 · 여성 등과 같은 사회의 주변집단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고발하였다. 지식과 권력의 결탁은 곧 ‘규율(discipline)’이라는 미명하에
664
피압제자가 압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기술자들도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 그는 과학자임과 동시에 보통의 세속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학자들은 특정한 권력자나 재력가에게 고용되어 지식을 자신을 후원하는 세력에 봉사하는 방식으로 응용하는 데 열중할 수도 있다. 학자가 학문에 대해서 무지한 정치적인 관료와 손을 잡고 연구비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충족시켜 주는 결과를 안겨주는 일은 결코 드문 현상이 아니다. 자연과학자가 독재국가의 전쟁목적을 위해서 원자탄 제조에 참여한다거나, 행동과학자가 행동통제의 원리를 이용하여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이윤을 올릴 수 있는 경영절차를 고안한다거나, 사회과학자가 독재정권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시킨다거나 하는 일에 고용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회고하기에도 끔찍스러운 일이지만, 과학기술의 행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독일의 히틀러 정권은 그들의 恣意에 의해서 누가 구제될 인간이고 누가 값어치가 없는 인간인지를 구분한 뒤, 후자를 인종적으로 제거하는 일에 과학자들을 참여시켰다. 독일민족을 퇴화시킨다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유태인을 대량학살하는 데는 독가스의 사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작업에 참여하였던 학자들은 많은 경우에 단지 강요에 의해서 그렇게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계산된 행동을 수행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그러한 몰지각한 처사를 견제할 세력이 누구일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이에 대한 해답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다시 과거의 순진성으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다짐할 필요가 있다. 그 순진성에는 과학자들이 일반인들과는 다른 도덕적인 양식을 가지고 있다거나 혹은 도덕의 원칙을 창출해낼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이 포함되어 있다. 윤리의 문제는 소수의 학자나 특권층이 전담할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과학기술의 활용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과학자의 양식을 지나치게 신봉하지 말 것을 경고한 브로노브스키(J. Bronowski, 1965)의 다음 말은 더욱 현실에 부합한다.
우리는 과학이 깊숙하게 침투되어 있는 세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 세계는 총
665
괄적인 것이고 실제적인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편싸움에 가담함으로써 이 사실을 하나의 게임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상게임(make-believe game)은 우리가 가치롭게 여기던 것, 즉 우리 삶의 인간적인 내용을 우리에게서 탈취해 가도록 할지도 모른다. 과학을 경멸하는 학자는 우스갯소리로 말할지 모르지만, 이 농담은 전혀 웃어넘길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책임을 특별한 마력으로 무장된 소수의 과학자들에게 위임할 수 있다는 환상보다 더 위협적이고 욕된 교리는 없다. … 오늘날의 세계는 과학에 의해서 제조되었으며, 과학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그리고 과학에 관한 관심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눈을 뜨고 노예로 향하는 길을 걷는 것과 같다(pp.5-6).
이 말은 인류역사에서 과학이라는 인간활동이 있는 한, 우리 모두가 항상 기억해 두어야 할 지침인 듯하다. 과학자는 참된 지식을 창출한다는 특별한 임무를 띠고 있고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 만약 그 일의 성과를 자신에게 연구비를 지급하는 특정한 세력이나 소수의 권세 있는 집단을 위한 수단으로 제공한다면, 그는 그 기관이나 집단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한 노예는 이미 상당한 숫자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노예에게 우리가 도덕적인 판단을 요구한다거나 그 사용에 있어서 도덕성을 보장하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들 자신 역시 과학자들의 노예가 되기를 스스로 용인하는 셈이 될 것이다. 노예란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자신들이 판단할 일을 포기하고 그 책임을 일부의 사람들에게 위임하는 것이 노예들의 속성이다.
일반인이 가끔 간과하는 사실은 지식의 배분과 관련된 문제이다. 지식과 기술이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권력과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일반대중들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와 기술을 소유하게 된다. 학문이 발전하면서 엘리트들과 일반대중이 가질 수 있는 지식의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한 지식들이 만약 특정한 지배자들에 의해 독점된다면 일반대중은 그만큼 그들의 통제와 조작을 받기 쉽게 된다. 이 점에서 마르쿠제(H. Marcuse, 1964)의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 그는 이전에 마르크스가 양분했던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생산관계를 현대 산업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을 가진 자와
666
그렇지 못한 자의 양분관계로 바꾸어 비판하였다. 거대한 기술사회의 토대가 되고 있는 과학은 그것을 독점하고 있는 일부 관료주의자들의 손안에서 인간과 자연을 완전히 파멸시킬 수 있는 무기의 제작과 전쟁의 도구로 변모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제국주의하에서 과학기술이 죽음과 파괴를 위한 군사기술로 급격하게 발달함으로써 종속국 또는 식민지는 독자의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당하고 생산력의 발전에 불균형을 맞이하였다. 오늘날에도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핵무기 제조의 기술을 소수의 나라가 독점하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 양상의 주인과 노예가 탄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과학기술을 책임 있게 활용할 수 있는 가치기준을 정립하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우리가 한편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에 대해서 두려움과 혐의를 두고 있는 것은 그것을 선용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아직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신의 명령 · 선발된 사상가들의 지혜 · 권력자의 통치이념이 행동의 준거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준거를 소수가 독점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반드시 대중의 이익을 제대로 반영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 동안 역사는 자유의 길을 선택했고 이제 어느 때보다도 대중의 힘은 확대되었다. 그러나 자유의 확대만큼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걸머지게 된 대중이 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문화가 다원화됨에 따라 현대인은 서로 모순되는 가치의 함정 속에 빠져서 즉흥적이고 임기응변적인 합리화로 그 갈등을 해소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4.3.7. 우리 모두의 책임
과학기술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비단 과학자와 기술자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을 생산해낸 사람은 물론 그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쓰일지는 결국 그것을 소유하고 쓰는 사람의 의도에 의해서 좌우된다. 칼
667
의 제작자가 그것이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서 사용되는 방식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아래와 같은 자이만(J. Ziman, /1994)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이러한 문제는 의심할 것 없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과학자원(사람과 돈)이 군사계획에 집중적으로 사용될 것인가, 아니면 평화적인 산업개발에 쓰여질 것인가는 우리들 모두의 문제이다. 다른 에너지 체계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어려운 정책결정은 핵에너지 연구와 다른 에너지 연구의 어느 쪽에 역점을 둘 것인가라는 문제와 맞서게 된다. 최근까지 환경오염에 관한 대규모 연구의 개발이 가능하게 된 것은 기업활동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경향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과학적 · 기술적 협력이 순수하게 상업적인 동기에 좌우된 결과, 인간의 복지에 커다란 손해를 주는 일이 많다는 것은 매우 우려해야 할 일이다(p.130).
이제 모든 도덕적 권위가 집단이나 개인의 이해관계로 해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지식과 기술이 누구의 통제하에 있어야 하느냐라는 문제는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문제가 어떤 특정한 집단에 의해서 원만히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안이한 대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기술공학은 과학기술자 · 특수 이해집단 · 국가의 통치자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그들을 포함한 모든 세계시민의 문제가 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며, 우리의 주변환경은 점차 우리가 예측하지 않은 방식과 상태로 악화되고 있다. 그 대가는 우리의 세대보다는 다음 세대가 지불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우리는 하나의 지구를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우리의 자손이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제부터라도 과학기술 자체에 대한 개념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대처방식도 바꾸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과학기술을 사용하고 그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될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여야 하며, 종국적으로는 그들의 통제하에 놓여야 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다원화되고 있고 그 책임소재 역시 모호해져 가고 있다.
668
오늘날의 연구는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할 만큼 거대해지고 있다. 또한 연구소는 자금의 지원을 외부로부터 받으면서 그 대가로 지원자의 특정한 목표에 부합하는 기술을 제공하면서 공생관계를 맺고 있다. 이 때 그 지원자의 특정 목적이 설사 비도덕적이고 동의할 수 없는 가치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연구소는 자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혹은 가치중립을 표방하면서 그들의 도구가 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학자는 연구보다는 지원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이 때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목적을 위해서 의도가 불순한 기업체나 정부기관의 후원을 받아 연구를 수행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예상할 수 있었거나 예상할 수 없었던 부작용을 현저하게 초래할 수도 있다. 이 때 이미 지식과 기술의 적용 문제는 그것을 창안한 과학자나 기술자들의 통제 밖에 놓인 것이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누가 최종적인 책임을 질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선용과 악용의 책임이 기술공학적 가능성으로부터 현재 영향을 받고 있고, 또 멀지 않아 영향을 받게 될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자각에서 찾아야 한다. 학문적 지식의 확장이 인간의 복지를 위해서 이용되도록 하는 책임은 학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일반대중으로서 우리가 주체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불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과학적 지식이나 기술이 사용되는 일이 없도록 제어하려면, 다시 말하여 기술공학의 제공자나 사용자 또는 기술공학 자체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항상 그것들을 경계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누가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며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를 논의하고 그 결론을 기다릴 겨를이 없다. 이제 기술공학의 영향이 사용자의 의도를 벗어나고 있고, 그 여파는 한정된 개인이나 특수집단에게만 미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은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운동으로부터 독립해 있을 수 없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전의 개념과 태도를 재정립하고 그 토대 위에서 우리 모두가 새로운 사회적 운동에 참여해야 되는 것이다.
해결방식은 여러 모로 강구되어야 하겠지만, 그 중 몇 가지만 들어보자. 첫
669
째, 우리 스스로가 변모해야 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현재의 환경문제나 공해문제는 지식이나 기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 자신의 태도에 의해서 야기되고 있다. 기술공학은 악용과 선용의 양면이 항상 있다. 따라서 개발과 발전이라는 말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면을 우리는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기술공학을 적용한다고 하면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사용될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세속계라면 정치 · 경제 · 사회 가운데 어느 쪽에, 만약 수도계라면 예술 · 기예 · 선 · 검도 가운데 어느 쪽에, 그도 아니고 교육계라면 상구 혹은 하화 가운데 어느 쪽에 사용될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경우에 대해서 선용과 더불어 악용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무지는 교육에 의해서 극복되어야 하고, 무책임과 불감증은 사회적 이익의 우선원칙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한다.
둘째, 기술공학에 대한 이용 면에서 우리 각자가 좀더 대국적인 안목을 확보해야 한다. 업적지향적인 개인이나 집단은 X라는 조작이 가져올 Y라는 효과만을 강조할 뿐, 여타의 영향에 대해서는 대부분 모르거나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이제 그 비특정적 영향이 무엇이며, 그 영향이 가져올 총체적인 효과가 무엇인지를 저울질할 수 있는 안목에 의해서 과학기술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결과로서의 지식과 기술은 누구에게 전달되는가? 그것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떻게 이용되는가? 이러한 질문은 특정한 분야에 한정된 지식과 기술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앞서 현대인의 교양의 하나로서 “균형 있는 전체의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바 있다. 현대인은 자기가 소속된 특수한 전공분야보다는 좀더 큰 세계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걱정할 수 있어야 한다. 미시적인 태도보다는 거시적인 태도, 단기적인 효과보다는 장기적인 효과, 일면적인 목표의 달성보다는 동시다발적인 목표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셋째,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민주적으로 개혁하고, 그 토대 위에서 상이한 이해관계를 공개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질 필요가 있다. 가려진 커
670
튼 뒤에서 진행되어 왔던 독점적이고 은밀한 흥정이 폭로되어야 한다. 시민은 자신의 가치를 분명하게 정초하고, 그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능력은 우리의 삶에는 다양한 가치가 있고, 그들 간에는 갈등이 있을 수 있다는 자각을 포함해야 한다. 그는 개인 · 국가 그리고 문화에 따라 가치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한 가치차이는 항상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연구 자체를 방해하거나 저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것이 누구에게 소유되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될 것인지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하다.
넷째, 고도의 기술문명 속에서 사는 우리는 특별한 의미의 새로운 윤리의식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시대마다 인간에게 요망되는 덕목은 바뀌고 있다. 한 때 덕목이던 것이 다른 때에는 오히려 진보를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시대적 변화에 부합하는 덕목이 무엇인지를 예감하고, 그 인간성의 변화가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서로가 협력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취지에서 <변화하는 인간상(1982)>이라는 저서를 내놓은 마클리와 하르트만(Markley & Hartman)은 과학에 토대를 둔 기술에 의존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새로운 덕목으로서 이른바 “生態的 倫理(ecological ethic)”를 제안한다.
생태적 윤리는 인간이 지구에 의존해서 존속하는 복잡한 생명유지체계를 파괴하는 사태를 예방하는 데 필요하다. 그것은 공간을 포함하는 가용한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간을 자연계의 통합적인 일부로서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적은 것을 가지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검약의 윤리 속에 포함된 “새로운 희소가치”를 반영해야 한다. 그것은 개인들 간의 상호적인 이익이라는 감각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이익 그리고 더 나아가서 동료 생물들(가깝고 먼, 그리고 현존하는 것과 미래의 모든 것)의 이익에 대한 감각을 포함해야 한다. 하나의 생태적 윤리는 그 안에서 인간이 생태적 관계를 조화시키기 위하여 자연과 협력하고 만족스러운 재순환의 기제를 형성함으로써 하나의 동질정체적인(그러나 역동적인) 경제체계와 생태적 체계를 지향하는 운동을 함축한다(p.114).
671
다섯째, 가치는 단지 주장이나 말보다는 행위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도덕과 윤리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일차적인 요건에 불과하다. 그것이 단지 불평이나 논의에 그쳐서는 아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주장을 하면서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그때 일어나는 사건 · 이슈 혹은 문제를 중심으로 누구나 사회적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으로서 시민의 힘은 약하다. 우리의 주장이 관찰될 수 있으려면, 개인보다는 집단이 힘을 빌리는 것이 효과적이다. 조직화된 운동과 압력은 조그마한 규모의 집단에서부터 국가 혹은 국제적인 규모로 발전되어야 한다. 이제 과학이 갖는 국제성에 비추어 선진제국과 개발도상국들이 국제적으로 협력하고, 평화적인 이용과 인류복지라는 측면에서 과학의 사용을 감시하고 감독해야 하는 등 아직도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많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술공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불필요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기술공학으로부터 손쉬운 해결책을 얻으려는 자세를 경계해야 한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현대생활의 전영역이 합리성과 기술이라는 일차원적인 관심으로 전환되고 있다(Marcuse, 1964). 어느 틈에 우리는 과학기술이 있어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에 취해 있다. 그러면서도 현대인은 역사상 유례없이 물질적인 기술문화의 병폐에 의해서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문제를 푸는 것 같지만, 이전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데는 놀라우리만큼 무력하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을 중독 시키고 있는 과학기술의 마력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하나의 방도는 수억 년에 걸쳐 진화해 온 지구의 생태적 기제와 약 20만 년에 걸쳐 누적되어 온 인류의 지혜를 존중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이러한 생태적 기제와 진화적 지혜를 결코 대치할 수 없다. 장기적으로 볼 때, DDT에 의한 살충보다는 생태적인 구충이 더 효과적이다. 아스피린보다는 생체 내부의 지혜와 치유능력이 더 강하다. 우리의 뇌는 그것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이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지력의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 판단은 컴퓨터의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명하다.
672
이러한 태도는 과학기술 사회의 구현을 무조건 서둘러서 열광적으로 지향하는 현존의 한국인에게 특히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학문을 동도서기의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계기가 있었고, 따라서 오직 그러한 맥락에서 학문을 이용하려는 면에만 부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서구의 산업사회를 옮겨 놓으려는 야심에 찬 목소리로 가득하다. 그러나 과학의 응용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산업사회가 얼마만큼 부정의와 억압 · 대중의 빈곤과 자유의식의 몰락 ·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등과 같은 부정적인 요소를 구조적으로 가지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일이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기술이 현대산업사회에서 강력한 생산력이 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일차원적 사회와 일차원적인 사유가 사회적 존재 전체를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사회에서는 전체적인 획일성만이 진리로 통용되기 때문에 자유의 의식이란 한갓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엄청난 투자상의 손실로 나타날 것이다. 또한 이는 지식의 공정한 배분과 사회 전반의 이익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과학기술에 의한 완전지배만이 인간 생존에 현실적인 만족감과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선진국의 오류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한계와 맹점을 미리 자각하고, 우리의 생활에서 탈과학기술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