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길 인생을 올곧게 살아온 검도구 장인 그의 경지는 그 자체가 검도의 정서적 상징과 다르지 않다. 산업의 기계화 속에 점차 잊혀져 가는 호구 장인과 그네들의 삶은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검도문화유산이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8월 중순 수원시내의 중심을 흘러내리는 버드내길을 따라 이승희(49세) 장인(匠人)의 작업실을 찾았다. 대문밖에는 주렁주렁 달린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가 서있었다. 순간 시골의 어느 집 앞을 서성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도심 속 주택의 색다른 면모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승희 장인(匠人)의 집 3층에 마련된 작업실로 들어섰다. 생각보다는 작업공간이 커보였다. 구석구석에 제작도구며, 재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이승희 장인(匠人)의 손끝이 머물지 않은 것이 없는 듯 모두가 일정한 질서 속에 제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창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장인(匠人)의 콧잔등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작업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손잡이가 반질반질하게 닳은 제작도구를 통해 세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은 한 순간도 그냥 흐르지 않는다. 어린 벼이삭을 영글게 하고, 아이를 어른으로 키우는 시간은, 장인(匠人)에게는 작품을 이루어 내게 한다. 호구제작의 전 공정을 단지 수작업에만 의존하는 장인(匠人)은 현재 우리나라에 몇 안 된다. 이승희 장인(匠人)은 이 어려운 공정을 단지 손으로만 해내는 억척스런 고집을 35년 동안 이어오고 있다. 그의 손을 들여다보면 손가락 마디마디에 어느 한구석 성한 것이 없다. 바늘에 찔리고 도구에 눌려가며 작업을 통한 수많은 전투에서 얻어진 훈장이 삐뚤어진 장인(匠人)의 손마디에 모두 스며 있었다. 검도구 제작의 전 공정 중 90퍼센트 이상이 바늘로 누비는 작업이다. 길고 지난(至難)한 시간을 가지런히 여며, 고운 바름땀으로 빚어낸 쪽빛 면포, 천 개의 바늘 땀 위에는 장인(匠人)의 혼과 일생을 건 한 장인(匠人)의 세월이 여며져 있다. 충북 음성에서 상경 이승희 장인(匠人)은 고향인 충북 음성에서 상경하여 광희동 작은 할아버지 댁에서 기거하였다. 그 당시 집 근처에는 계림극장이 있었고, 을지로에는 지상에 전차가 다니던 시절이었다. 청계천은 복개가 한창이었는데 이제는 그것을 뜯어내고 있으니 세월의 덧없음을 실감하게 한다. 이승희 장인(匠人)이 열네 살 때인 1969년 동서무도구에 입사하여 검도구 제조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너무 어린나이에 시작된 공장생활이라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도우면서 어깨 너머로 장인(匠人)들의 기술을 하나둘씩 익혀나갔다. 검도구 공장에서의 생활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남다른 손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검도구 제작기술을 습득하는 속도와 완성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빨랐다. 그 당시 가끔 일본에서 호구제작 장인(匠人)들이 공장을 방문하여 검도구 제작기술을 시범보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그는 일본 장인(匠人)들 곁에 꼭 달라붙어 제작기술을 유심히 지켜보았다가 똑같이 만들어 내곤 하였다. 일본 장인(匠人)들은 그의 솜씨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동서무도구에 들어간 지 3년 만에 그는 조장이 되었고, 처음에 그를 회사에 들어가도록 주선했던 박 모 씨는 아직도 말단 기술자에 머물러 있었을 만큼 그의 노력과 기술은 남달랐다. 그 당시 이승희 장인(匠人)은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기술을 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1968년 고향에서 가족들이 상경하여 이듬해 아버지가 운영하던 유황공장에 불이나서 사업이 기울게 되었고, 거기다가 빚보증으로 인해 가산이 기울대로 기울어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질 못했다. 처음에는 부모를 원망도 해보았고,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는데 시간이 차차 지나며 검도구 제작기술로 더욱 깊이 빠져들면서 다른 것에 한눈 팔 여유가 없었다. 이왕 시작한 기술자 생활이니 좀더 배우고 익혀서 이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어보자는 결심으로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에서 인정받는 기술자가 되었고, 주변의 다른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가 빗발쳤다. 얼마 후 이승희 장인(匠人)은 직장을 옮겨 만리동의 대한무도구(이연근 사장이 경영)에 공장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동안 3년여 동안 갈고 닦은 기술을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조건은 선수금으로 허름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을(50만원) 받았다. 아직도 어린 나이였지만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에 따른 일도 그만큼 힘든 게 사실이었다. 심지어는 작업장에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사장이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일을 시켰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사장의 마음을 이해하고 오직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곳에서 편무실 장인(匠人)도 3년여 동안 함께 일을 했었는데 그는 호완파트의 조장이었다. 대한무도구에서 4년간 일을 하다가 마포의 화랑사(최용묵 사장)로 직장을 옮겨서 3년 여 동안 일을 했다. 안양에 문을 연 팔만무도구사에 공장장으로 입사하여 곽준상 사장을 도와 일본으로 호구를 만들어 수출하는 일을 하였다. 이승희 장인(匠人)은 그곳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결혼을 하였다. 현재의 아내 이연숙(46세)씨를 만나 신혼살림을 꾸려 슬하에 1남 1녀를 두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내가 자신의 일을 도우게 되어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이문동 본가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팔만무도구사에서 4년 여의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는 자택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수제호구를 만들어 크고 작은 회사에 납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떻게 알고 찾아온 일본인 바이어가 수제호구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그의 오더를 받아 일본으로 직접 수출을 하게 되었다. 면포 누빔질 땀질로 일정하게 누벼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기교도 기법도 필요 없는 손누빔질, 그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긴 인내를 필요로 한다. 한 땀도 건너 뛸 수 없는 바느질의 지난한 과정 서두르는 마음이나 잘하겠다는 욕심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무념 무상의 상태에서만 이루어지는 작품, 그것이 이승희 장인(匠人)의 면포누빔 작업이다. 옛 사람들은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에게 누비옷을 지어 입히면 화살도 피해간다고 믿었다. 누비옷에 깃든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복 시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끝없이 계속되는 단조로운 반복이 지극한 아름다움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 사람 그가 일평생 반지라고는 쇠로 만든 골무밖에 끼어본 적이 없는 검도구의 장인(匠人)이다. 그렇게 면포의 누빔질에만 의존하여 호구를 제작한 지가 벌써 35년, 그 세월과 정성이 그를 장인(匠人)의 경지에 올려놓았다. 바늘에 실을 꿰어 꿰매기만 하면 되는 지극히 쉬운 일. 그래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면포누빔질이지만, 또한 누구도 쉬 장인(匠人)의 경지에 오를 수 없는 것이 누빔작업이다. 그래서 참고 또 참는 수양의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에 잡념이 생기면 바느질을 할 수가 없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바느질을 해야하는데 마음이 흔들리면 한 땀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번뇌를 잠재워야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호구는 하늘을 닮고 천의무봉(天衣無縫) 마음을 다스리는 방패가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업을 견딜 수 있는 인내와 숨을 고르고, 일정하게 바늘땀을 놓을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을 얻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면포 누빔질, 처음엔 땀수도 거칠고 실이 꼬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혼란한 마음이 가라앉고, 굳어있던 손이 바늘과 친숙해지며 한 호흡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 땀 한 땀 누벼갈 때마다 장인(匠人)의 마음속 욕망도 한 가지씩 버려진다. 무념무상, 지난한 인고 끝에 드디어 탄생하는 면포는 군더더기가 없는 정성과 멋이 담긴 예술의 극치다. 그러나 누비기법은 그 지루하고 단조로운 과정으로 인해 재빨리 기계화가 되었고, 긴 세월 동안 인내를 감내하게 했던 누비 바늘을 서둘러 손에서 놓아버렸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간 누빔질은 검도구 제작에서는 수제호구의 매력으로 남아 있다. 근래에는 미싱으로 누비는 작업도 채산성이 맞지 않아 중국, 대만, 미얀마로 공장을 옮긴지 오래 전이다. 일본 검도계에서 인정받는 숨은 장인(匠人) 이승희 장인(匠人)의 능숙한 솜씨로도 일점이부짜리 호구 한벌을 짓는데, 꼬박 4개월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한 번의 마음이 흐트러짐도 없이 무념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한 땀의 어긋남도 없이 고르게 나 있는 바느질 선은 누빈 이의 그런 마음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흐르는 물같이 평온한 면포의 누비선은 원단에 입힌 천연의 쪽빛과 조화를 이루어 무사의 기품을 지니니, 호구의 지극한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다. 그렇게 지고의 정성을 들여 비로소 완성하기에 면포는 죽도의 세례를 막아 인간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는 면(面)의 전체를 휘어감는다. 망부석처럼 꼼짝없이 앉아 바느질을 한지 35년, 그가 지은 호구 한 벌에 깊고 고른 골이 패였다. 한 땀 한 땀 숨을 죽이고 체온을 더해 누빈 바느질, 그 물결같은 바느질 땀엔, 장인(匠人)의 삶의 문양마저 얼비쳐 보이는 듯하다. 호구 최고의 아름다움은 뛰어난 기교가 아닌 정신적인 자기통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는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잊혀져가던 들판의 쪽풀처럼, 작은 바느질 한 땀처럼 그렇게 소리 없이 평생을 호구를 지어온 이승희 장인(匠人). 그렇게 긴 세월을 곰삭여 세상 밖에 내놓은 호구는 그 올마다 패인 시간과 정성으로 인해 일본 검도인들의 탄복을 자아내게 한다. 그가 만든 호구 한 벌의 가격은 일본에서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그러나 일본 검도인들은 그런 호구가 한국인 장인(匠人)의 손에 의해서 만든 사실을 모른다. 일본 장인(匠人)이 만든 상표를 달고 시중에 나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본 장인(匠人)들이나 무역상인들은 그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몇 해 전 그동안 20여 년 동안 거래해 오던 업자 몰래 어느 다른 업체로부터 러브콜을 받고는 갈등을 하기도 하였지만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전에 거래하던 업체에 납품을 유지하기로 결심하였다. 한 가지 것을 고집해온 사람들에게는 지극한 아름다움이 있다. 자신이 누벼온 바느질처럼, 한평생 오로지 한 가지 것만을 위해 살아온 장인(匠人), 그의 일생을 여며 수제호구에만 생을 바쳐온 장인(匠人) 이승희, 그가 있어 검도인의 수련과 기품을 한층 더 높여주고, 수제호구의 아름다움을 오늘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