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첫 번째 유배
정약용은 28세가 되던 1789년 1월에 성균관의 거재 유생(居齋儒生)에게 보이는 반시(泮試) 과거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이른바 표문(表文)으로 수석을 차지하고, 이어 그 해 3월에는 임금이 직접 참가하여 보이는 과거의 마지막 시험인 전시(殿試)에서 둘째로 합격했다. 드디어 대과 급제를 했다.
첫 벼슬은 종 7품에 해당하는 직장(直長)이었다. 지금의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에 있는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陵)을 지키는 능직이가 된 것이다. 능직이라면 한직 중의 한직이었다.
이때 정약용은 이런 시를 지었다.
자취를 숨기는 것은 참으로 나의 뜻이니
하게 된 벼슬이 바로 능직이라네
수풀 창 아침에는 고요함을 익히고
시냇가 언덕 해거름에 서늘함을 맞이하네
안개 걷히면 솔 빛이 곱고
산이 깊어 풀 기운 향기롭네
벼슬 낮지만 도리어 자취 아름답고
높이 날기를 연연해하지 않네
‘자취 아름답다’는 말은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일찍이 희릉 참봉(參奉)을 지낸 일이 있었는데 이제 아버지의 자취를 더듬게 되어 감개가 무량하다는 뜻이다.
능직이 생활은 길지 않았다. 이듬해 29세 때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정약용을 추천하여 윤지눌, 김이교와 더불어 한림의 후보 즉 한림회권(翰林會圈)으로 발탁되고, 시험을 거쳐 김이교와 같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정약용은 한림원(翰林院:藝文館)에서 숙직하던 날 밤에 이런 시를 지었다.
한미한 처지로 이제 막 초야에서 들어와
숙직하는 이 밤 내내 마음 설레네
한림시에 글 올리는 은총으로 족한데
한림으로 붓을 잡을 재주는 본디 아니라오
그런데 이때 사헌부에서 들고 일어났다. 한림의 선발 과정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반대파의 농간이었다. 정약용은 두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리고는 정조 임금이 여러 차례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 이것이 또 말썽이 되었다. 반대파들은 옳거니, 하고 들고 일어났다. 정조는 그 해 3월에 정약용을 현재의 충남 서산군 해미면인 충청도 해미(海美)로 정배했다. 그러나 열흘 만에 해배되었다. 이것이 정약용의 첫 번째 귀양살이였다.
재능이 뛰어난 정약용은 처음부터 정조의 지우를 받게 되자 이를 시기하는 악당들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정약용을 해코지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