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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에서 찍은 대문 사진에 한 사람이 빠진 것 같아서....)
1.산행 참가 산우
부부조:남장현+최영,류창하+문영월,유병식+백낙은,최영진+김명자
단독조:김인욱,노재창,신윤식,양명륭,하대현
(뒷풀이조):김극범+장옥희,박영미,이용호,정혜인
2.산행 코스(약 11km)
사자사-서문-북문-동장대-동문(옹성)-남장대-남문-수어장대-서문-불성사
3.산행 落穗
其實 남한산성은 나름대로 익숙한 곳인데 8km 남짓한 성곽길을 완답하는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다.
오래 전 성남(아마 城의 남쪽이라는 뜻)에서 학교를 다닐 때 무료할 때면 자주 남쪽 기슭의 약사사 코스로 남문 거쳐 수어장대에 올라 송파 벌판에 떨어지는 특전사 병사들의 낙하산 落下 행렬을 보기도 하고 서울 비행장에 군용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내려오곤 했었는데...
당시 남한산성의 성남 쪽 기슭인 은행동과 서울 쪽의 거여,마천 지구는 이른바 都市 貧民들이 어렵사리 터를 잡은 거대한 판자촌 밀집 지구이어서 이들의 열악한 주거,교육 환경에 나름 대로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적,정치적 의식을 키워나가던 젊은 대학생들과 진취적 종교인들에게 意識化 교육을 위한 좋은 활동 무대가 되지 않았었나...
소위 운동권별로 모든 人民에게 經濟的 平等과 政治的 自由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같았겠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을 어떻게 다느냐 하듯 독재에 대항하는 방법론을 조금씩 달리하였을 터이고...
산성 기슭에서 몇 잔 막걸리에 흠뻑 취해 憂國을 향한 울분을 토해내던 꿈과 열정은 무상한 세월과 함께 시나브로 사라지고 삶의 조그만 哀歡에 울고 웃는 壯年의 小市民들만 몇몇 남은 셈인가...차라리 처음부터 安樂한 "쁘띠 부르죠아"의 길이나마 착실히 가야 했을 것을....왜 오늘 이런 생각이 나는 것일까 하며 오랜만에 나타난 盧江의 얼굴을 힐끗 본다.
사실 週中의 쉬어가는 산행으로서 산성일주 산행은 탁월한 선택이다.
비가 한 두 방울 듣는다 하지만 일단 성곽에 오르기만 하면 능선을 오르내리는 아늑한 숲길을 따라 선선한 초가을 바람을 쐬며 다투어 피어난 들꽃의 향연을 즐길 수 있고 산길 내내 은은하게 퍼져오는 솔향을 맡으며 그 옛날 그 자리에서 일어난 슬픈 역사의 조각도 떠올려볼 수 있지 않겠는가.... 산성길의 風致美를 대표하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의 나이가 이제 겨우 百年을 바라본다 하였던가...빛 바랜 주춧돌 하나,깨어진 기와장 한 조각에도 뼈아픈 역사의 고뇌가 배어있고 이 산성을 쌓노라 無賃의 품을 팔았을 백성들의 고된 숨결이 들려오는 듯한 산길이 아닌가...
마천동 산행지 입구의 북적거리는 좁은 먹자판 골목을 한참 지나 오늘 성곽 일주의 출발지인 西門으로 향하는 비탈길을 오른다.흙이 꽤 파내어져가는 비탈진 산길이 이리 저리 뚫려 있어 필요 이상의 산지 훼손이 일어난 느낌이다.
땀을 흠뻑 흘리고 서문에 닿아 산성 일주 조감도를 바라보며 8km 남짓이라는 성곽길의 흐름을 요량해 본다.산길이 아늑하다고 하지만 나름대로 오르내리는 길이 수월치만은 아닐터인데...
仁祖가 삼백 몇십 여년 전 어느 추운 겨울 날 더 이상의 항전을 포기하고 맨발로 이 서문을 통해 三田나룻터로 나아가 청태종에게 소위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三拜九叩頭라는 항복의 禮를 다했다 하던가...치욕의 역사를 뒤돌아보는 것은 씁쓸하지만 무능한 임금에게 떨어진 당연한 업보이었나...光海君을 몰아낸 반정 공신들에게 휘둘려 정사는 물론 후금에 대한 外交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을 뿐더러 본인이 嫡孫이 아니라는 심리적 부담감이 끝끝내 작용했는지 나중에는 오랜 볼모 생활을 했던 장자인 소현세자를 淸과 가깝다는 이유로 죽게하고(독살說이지만) 나름대로 신식 문물을 일찍 받아들여 무역과 경영 수완이 뛰어났던 세자빈 강씨도 賜死시킨 밉상의 임금이 아니었나....
검단산과 하남 쪽 풍경을 바라보며 구절초 피어난 산길을 걷다가 아름드리 老松 군락 한 가운데에 점심터를 잡는다.마침 안성맞춤으로 산중의 빈 식탁이 우리가 앉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구름에 달가듯이 行雲衲子의 발걸음을 옮기던 仁松과 大隱이 잠시 길을 엇갈리기도 했지만 금세 산중에 최고의 식탁이 차려진다.각자 정성으로 챙겨온 갖가지 음식과 호박색 액체가 어울린 훌륭한 酒案床이 웬만한 小市民의 생일상 보다 풍성하여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다.모두 흔쾌히 한 잔씩 飮福을 하는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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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의 진수성찬을 즐기는 즐거운 한 때...)
간간히 내리는 안개비 속에 가을 빛깔이 조금씩 물드는 산길을 걸어 북문을 지나고 동장대터에 이르러 조금 떨어진 벌봉을 바라본다.냉큼 달려갔다 되돌아 오고도 싶지만 발길을 그냥 동문으로 옮긴다.길은 어느 정도 꼬불거리며 오르내리지만 寸哲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는 길이 계속 된다.
안개 깃든 동문에서 사과와 배를 깍아 먹고 안개 깃든 산중의 모습을 살피며 급할 것 없는 산중의 망중한을 즐긴다.오늘 따라 仁松과 進山이 꽤 많은 과일 짐을 지고 온 듯 한데 사과 껍질 벗기는 실력은 大隱이 제일 난 듯하다.
사과 껍질 벗기듯 인생과 사랑의 껍질을 벗기는 산중의 인기 강의가 상당 시간 이어져 본의 아니게 聽講을 하게 되기도 하는데...인디언 섬머 같은 情炎은 누구에게나 찾어올 수 있을 터지만 精神의 배반은 죄가 되지 않고 肉體의 배신은 죄가 되는가...예술혼을 빙자한 男子의 바람기가 무죄라 한다면 메디슨 스퀘어의 다리 같은 여자의 사랑은 권장되어야 하는가....하늘을 보아야 별을 따듯 좋아하는 이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의 마음은 더 쓸쓸해지지 않는가...
동문 부근에 아기자기한 甕城의 모습이 두어 개 보인다.지금이야 한 가족의 소풍처로 적당한 곳이겠지만 나름대로 산성의 방어 목적으로 원형이나 네모 형태로 쌓은 성이라는데....서서히 성남 쪽 전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남장대터 이르는 곳의 암문은 일명 屍軀門....18세기 초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희생된 곳이라는데....단풍이 들 무렵이면 산길이 더욱 아늑할 터인데 이름 모를 들꽃이 누가 보든 아니든 곱게 피어나 있다.
남문 지나 수어장대에 닿아 오늘 산행의 畵龍點睛을 맛본다.이 곳에서 군사 훈련을 독려하며 "守城이 出城이다"라고 하며 淸에 대한 항전 의지를 다졌든 부득이한 和親을 주장했든 모두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었을 터인데...斥化派 김상헌이 淸에 잡혀가며 읊었다는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는 짙어진 안개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안개 깃든 수어장대에서 古今을 넘나드는 상념 속에 위스키를 한 모금씩 하고 메론 한 조각 씩 드니 小市民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산행의 격이 제법 향상된 느낌인데...
천천히 서문으로 향하니 다섯 시간 남짓 걸린 산성일주가 끝이 난다.
하산길은 올라온 길과 다르게 새로운 길로 불성사 거쳐 마천동 좁은 골목으로 내려온다.
(질펀한 뒷풀이 이야기는 생략....골프 드링크를 즐긴 후 갑자기 凡川이 사라졌나??오랜만에 본 宵昊 선생도 고맙고...마인쯔 돔 케이크도 잘 먹었습니다)
2007.10월 어느날
章
첫댓글 조회수 올리는 방법도 가지가지 ㅎㅎㅎ 벌써 몇번을 들렸다 가는지 모르겠네...
오늘 저녁 무렵까지 마무리하겠습니다.일요일 雨中 조계산 산행(송광사-선암사)으로 차를 오래 타서...몸조리 잘하시오.
학창시절 남령이 성남에 살 때 찾아가 하룻밤 신세 지던 생각이 나는군요. 같이 바둑을 두었던가 ? 다음 날 버스를 타고 동대문 운동장까지 나오는데 왜 그리도 멀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