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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정읍사문학상 대상
내장산, 벽련암을 가다
정월숙
10월의 바람소리가 길의 한 귀퉁이를 깁는다
내던지듯 들어선 숲이 죄다 깊어
그늘도 허기 채워 가라앉고
서래봉에 걸친 갈대숲을 들추면
망연히 손 흔드는 목어木魚
숨차게 헤엄쳐 온 대웅전 아래서
뭉클한 비린내를 풍긴다
허방의 깊이를 재겠다고
말갛게 닦아놓은 탑전을 도는 낙엽들
두 귀 세워가며 열심히 새겨듣는 이는 없다
선잠을 깨우는 불경소리가
단풍 든 산골짜기로 깊숙이 스밀 뿐
하늘색도 비껴갔을까
발 저린 햇살을 추스르는 내장산 자락
허드레 단풍잎만 객客들처럼 왁자하게 목 떨구는데
둘레 물길 따라 입산하는 저 나무들
산세山勢는 가도 가도 세상과 인연 없다고
몸 뒤채는 풀벌레 소리 탑전에 들었다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바위너설과 반질거리는
길옆의 돌무더기
염원 받아 너그럽게 주름 펴주던 가을
세상 욕심과 멀어진 듯
푸른 소나무 위에 얹힌 깃털 하나
뚝 떨어진다
<당선 소감>
가을은 댕기꼬리만한 볕도 쓰임이 있다고 들었다. 요즘은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녹슨 시계바늘도 한 칸 정도는 움직이지 않을까 싶다.
작년에 내장산을 다녀온 경험이 있어 정읍사문학상에 덜컥 시 3편을 보내놓고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헌데 저녁 무렵 한통의 문자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반가우면서도 실감나지 않았다. 이리 저리 찾아보다 사실임을 확인하면서 덜컥 무게감을 느낀다.
늘 시와 시름하다 지쳐서 밀쳐놓곤 했었다. 헌데 살아가는 내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시를 통한 나의 표현을 찾고 나면 가슴 한쪽이 후련해졌다. 내 가슴엔 늘 돌탑이 쌓여 있을지 모른다. 내장산 자락을 올라가다 돌무더기를 발견하면 나도 돌을 얹어 놓곤 했다. 그 염원과 소망이 모여 언덕이 되고 계단이 되고 높은 산도 오르게 되는가 보다. 많이 부족한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약력:
草海 정 월 숙
* 음성문인협회 회원 * 둥그레시 동인회원 *향인문학 회원
* 해양문학상 전국 공모전 금상
* 의정부문학상 전국 공모전 은상
* 마산 합포의 얼 전국백일장 장원
* 부산 남구 백일장 장원
* 한밭 전국 백일장 장원
* 시집:《서랍속의 바다》
* e-mail: es889@naver.com
제4회 정읍사문학상 우수상
내장산 스케치/ 최 일 걸
내장산에 이르러 사무치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춰야
발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문맥을 이룬 나뭇가지 마다
바람이 댓글을 다느라 소란스럽습니다
내가 살아온 날들을 시험하듯이
이파리들이 자꾸 빈 칸을 열어보입니다
내장산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지 못했지만
걸음걸음으로 빈 칸을 채워 나갑니다
스케치북 위로 흘러 들어오던 내장산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꽃뱀처럼 열리는 오솔길이 똬리를 틉니다
나의 내륙으로 가는 길이 환히 열립니다
아니, 내장산을 오르는 길이
내 깊은 속내와 겹쳐 떨립니다
산새들이 펼치는 구름의 악보에
음표 대신 눈물을 매달아 봅니다
태양의 기울기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산빛에 온전히 나를 내어줘야
오롯이 저를 드러내는 내장사는
선문답의 방식으로 풍경 소리를 울립니다
약력:
1967년 전북 진안 출생
1995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1997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2006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2006 전남일보 신춘문예 희곡 가작 입선
2008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13 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5.18문학상, 전태일 문학상, 해양문학상 수상
<당선 소감>
대학 시절 내장산으로 스케치 여행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스케치 북에 담던 내장산이 한 편의 시가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 이르러 돌이켜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문학이라는 외길은 험난하고도 고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버팀목이 되어주신 부모님 덕분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께 깊이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를 맡으신 소재호 선생님을 비롯하여 여러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합니다.
이번 수상을 기폭제 삼아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제4회 정읍사문학상 우수상(수필)
동진강흙바람/김길영
큰할아버지의 가족사에 대해 말할 때가 되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 일이거나 기억하기 어려운 어릴 적 일이다. 친척들의 전언과 여러 참고문헌을 토대로 흐름을 맞춰보았다.
큰할아버지는 고부에서 이사 온 전봉준과 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동학농민혁명거사 때는 김개남. 김덕명. 최선경 등과 함께 전봉준의 참모 역할을 충실히 했던 주요 인물 중 한 분이셨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터전삼아 살던 농민들이 농기구를 들고 일어선 것이 동학농민혁명이었다. 봉기초기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의기충천했으나 군의 조직을 갖추고 훈련받은 관군과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성군을 모시고 배고픔을 면해보려던 순수한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기존질서에 반기를 들고 혁명하여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역적이다. 동학농민군이 실패로 돌아가자 혁명에 가담했던 삼남지방의 30만 명에 달하는 농민군은 졸지에 역적으로 몰렸다. 어느 싸움에서나 패자는 응분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혁명군 핵심인사들은 처참한 죽음을 면치 못했다. 혁명에 가담한 대부분의 농민들도 목숨이 붙어 있을 뿐,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대부분의 혁명군은 생활 터전을 잃고 떠돌이처럼 흩어졌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살아가는 가난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생활이 어렵더라도 가문의 명예를 중히 여겼던 그 시절, 가슴 아팠던 것은 자손 대대로 역적의 멍에를 메야 했기 때문이다.
1862년에 봉기한 진주민란도 지역적 반발이 아니었다. 왕조의 부패와 지방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에 집단적으로 항거한 항쟁이었다. 부패한 왕조는 안팎으로 물이 새었다. 그 후, 30년 뒤 참다 참다 지친 농민들이 죽기 살기로 봉기한 것이 동학농민혁명이다. 밥그릇을 지키려는 가장 원초적인 발로였다. 자기 숟가락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가 참지 못해 대든 것이다.
우리들의 상식으로 판단할 때 참을 수 없는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칠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우리들의 유전자 속에는 옳고 그름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하게 선을 그을 줄 안다. 부정한 짓에 항거했다는 이유만으로 역적의 굴레를 쓰고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어 역적이 되고 가난을 물려받아야 했는지 모르겠다.
내 조국의 허약한 왕조는 일제에 강점당했다. 치욕의 36년을 견뎠다. 어렵게 되찾은 광복의 기쁨마저 얼마가지 못했다. 치안이 확립되지 못한 건국초기에 학습되지 않은 사상의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다. 좌우로 편을 갈라 부모 죽인 원수처럼 싸웠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간조차 어려웠다.
큰할아버지의 행적 때문에 역적의 자식이 된 당숙은 사람대우를 받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그늘에서 독버섯처럼 살았다. 멸시받고 배고팠던 그에게 사회주의는 희망의 불빛이었을 것이다. 그가 기회를 놓칠 리 만무다. 그는 곧 사회주의 붉은 물이 들었고 지하당조직에서 간부가 되었다.
그가 속한 지하당 무리들은 헐벗고 소외된 농부들을 부추겨 시위를 벌였다. 내 유년시절에는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었다. 벌집 쑤신 벌떼처럼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그들이 홀대받으며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가. 그들에게는 대반전의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시위 때마다 경찰이 동원되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언제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지만 몇 대의 트럭에 분승한 촉성회 회원들이 진압에 가담했다. 잡혀온 그들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뭇매를 맞았다. 내 어릴 적 잔상에는 살육의 현장 같았다. 누가 무엇을 잘하고 못했는지 내가 알 길이 없었다. 새 세상이 온다는 유언비어가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시퍼런 칼을 숫돌에 갈면서 후일을 도모했을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들이 활동하던 지하당조직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상으로 얼굴을 내밀고 팔뚝에는 붉은 완장을 찼다. 역적의 자식으로 고통과 비웃음이 몸에 밴 당숙도 서슬 퍼런 권력을 손에 쥐고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했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다. 붉은 권력도 국군의 대반격으로 오래 누리지 못했다. 당숙도 짧은 권력을 놓치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산속으로 숨어들었으나 죽음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죽음은 곧 모질게 살아온 한 인생의 마무리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세상사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 연좌제란 사슬이 육촌들의 발을 다시 묶어 버렸기 때문이다.
의義의 깃발을 들고 동학농민혁명거사에 합류한 큰할아버지의 행장을 내가 함부로 들먹일 수 없다. 붉은 완장을 찰 수밖에 없었던 당숙의 행적도 무어라고 언급할 수가 없다. 역적으로, 역적의 자식으로, 좌익분자로, 좌익분자의 자식으로 대를 이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척박한 토양이 문제였다.
2006년 국회가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증손과 고손까지도 동학농민혁명군의 유족으로 인정한다고 한다. 사료를 탐독해 보았지만 남아 있는 기록문서 어디에도 큰할아버지 함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전봉준이 가명을 사용했다는 기록을 보면 큰할아버지도 가명을 사용했으리라는 믿음이 전부일 뿐이다.
허물어진 가문과 찌든 가난을 물려받고 어깨를 펼 수 없었던 그들에게 특별법이 위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학교에서 ‘동학’을 배울 때는‘동학란’이었다. ‘난’이 ‘혁명’으로 바뀌었다고 그들의 슬픈 비밀을 다 찾아 안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혀가고 있다.
삼십만 명에 이르는 동학농민혁명군의 후예들이 역적의 자식으로 또 연좌제로 묶여 산 세월이 한 세기가 넘는다. 긴긴 세월 동안 흙바람 일던 동진강은 황톳물과 핏물로 몸살을 앓았다. 오늘도 동진강은 말없이 흐른다. 한 세기 넘도록 피멍든 사연을 다독이며 흘러간다. 그 역사 속에 우리 당숙의 경우와 유사한 비밀을 가진 가족사가 얼마나 많겠는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살아온 그들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이제라도 동진강기슭에 감춰진 수많은 사연들을 끄집어낼 일이다. 뿌리 깊게 반목하며 살아온 뼈아픈 역사를 세상에 알릴 때가 되었다.
당선소감>
내 고향 정읍 땅을 떠난 지 60년이 지났다. 객지를 떠돌면서 고향 하늘과 땅을 그리워만 했다. 나의 인생 3모작은 근대사의 증거물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맞았고 6.25 전쟁을 겪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유학할 때 4.19학생혁명과 5.16군사정권 탄생을 지켜보았다.
늘그막에 무엇인가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글을 썼다. 그 중 한 편이 <동진강흙바람>이다. 글을 쓸 때는 정읍사문학상에 응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 글이 헛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섰다. 이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2013년 현대수필 신인상
2015년 대구문학 운문 신인상
현대수필작가회원
대구수필사랑문학회회원
텃밭시인학교 회원
제4회 정읍사문학상 우수상(수필)
전봉준을 만나다/윤우향
얼마 전, 남편과 함께 백남기 농민이 입원해 있는 서울에 다녀왔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이 어서 빨리 깨어나길 기도했다. 선생은 그날 물대포를 맞은 후 깨어나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농민들이 왜 서울까지 올라가 투쟁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다가 문득 동학혁명을 떠올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봉준이 떠올랐다.
정읍은 ‘정읍사’, ‘상춘곡’등 한국 문학의 원류이기도 하지만 동학혁명의 발상지고, 일제 강점기 독립 유공자를 많이 배출 곳으로도 유명한 의(義)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 전봉준이 있다.
동학 하면 떠오른 사람이 최제우, 최시형이지만 사람들의 의식에 가장 깊게 각인된 사람은 역시 전봉준일 것이다. 전봉준은 이념이 아니라, 실천으로 평등사상을 구현한 사람으로 농민 봉기를 주도했다.
전봉준은 1893년 11월, 지금의 정읍시 고부(高阜)에서 농민 봉기 계획을 세웠다. 전봉준은 당시 농민들을 수탈하던 군수 조병갑을 처형하고 한양까지 올라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전봉준의 이러한 계획은 지배층의 수탈과 가렴주구(苛斂誅求)로 농민들의 삶이 파탄에 이르고, 서구 열강들의 조선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 사회는 화폐경제 발달로 농민들이 빠르게 분화되었고, 외척들의 세도 정치로 정치 기강이 무너졌으며, 지방 토호들의 횡포는 극에 달해 농민들이 도저히 살 수 없었다.
설상가상 전염병, 자연 재해까지 겹쳐 농민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졌다. 거기에다 서구 열강까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발톱을 드러냈으니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풍전등화 상태였다. 동학이 서학의 대척점에 선 것도 그 때문이다.
동학의 목적은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었다. 최제우. 최시형, 전봉준은 그것이 천명(天命)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유불선 종교가 뜻은 조금씩 다르나 결국 수렴하는 것은 인간으로 보고 인내천 사상을 실천했다.
전봉준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평등사상을 구현했고, 사회의 변화를 촉구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전망을 제시해 주어 엄청난 지지가 이어졌다. 지배 계급을 옹호하던 성리학을 배제하고 오직 인간 중심의 사상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동학이 반봉건, 반외세에만 집중했으므로 동학이 아니라 농민전쟁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실천한 인내천 사상은 하나의 종교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전봉준이 호남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세를 넓혀간 것은 그만큼 농도(農道) 호남이 피폐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한국 농촌은 각종 FTA로 피폐일로에 놓여 있다. 자신들이 생산한 농작물을 생산 경비도 안 된다며 경운기로 갈아엎는 농민들을 보면서 120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개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호남은 가장 많은 농민들이 사는 곳으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산업화가 가속화되고 신자유주의가 팽배해 무한경쟁에 내몰리자 급속하게 퇴락을 거듭했다.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마을에선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120년 전 동학의 외침이 왜 오늘에도 필요한지 선생이 입원해 있는 곳을 나서면서 우리 부부는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윤우향(尹又香)
1967년 생(50세)
현재 전남 순천시 거주
삶의 향기 동서문학상 소설 입선
<당선소감>
글을 보내고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우수상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정봉준을 통해 백남기 농민의 이야기를 하고 그의 무사귀환을 빌었는데, 그 사이 백남기 농민이 운명을 달리하셨다. 가슴 아프다.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럽다. 120년 전과 별단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고 때론 분노가 인다.
백남기 농민의 명복을 빌며 전봉준 정신을 계승하여 부디 정의로운 나라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다시 외치지만 농자천하지대본이고 흙은 우리 정신의 원형이다.
못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김길영 시인님
오래 정성들인 작품 빛을 보니 덩달아 기쁩니다.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 앞으로도 많이 남기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수필을 쓰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이런 글을 써야 합니다. 저의 성장과정에서 보고 기억되었던 것들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의무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