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셀 교회는 기본적으로 전통교회에 대한 회의와 신약교회에 대한 회귀라는 도식 위에 서 있다. 이로부터 셀 교회의 이상에는 긍정적인 면들이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장점들은 이미 위의 진술에서 적지 않게 지적되었다고 생각되므로 지금부터는 셀 교회의 문제점 몇 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셀 개념
셀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사적으로 셀 교회의 기원과 관련하여 요한 웨슬레를 소그룹 복음전파의 선구자로 보고 조용기 목사를 새로운 시대를 위한 소그룹 운동의 안내자로 여긴다. 하지만 셀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학적으로는 셀 교회가 신약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첫째로 셀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를 묘사하기 위한 용어선택에서 난점을 일으킨다. 그들은 셀 교회의 개념이 신약성경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지만 신약성경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한번도 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신약교회의 모습을 셀로 규정하는 것은 단지 셀 교회 지도자들의 해석적인 결과일 뿐이다. 둘째로 셀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설정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그들은 교회의 개념을 셀로 설명함으로써 매우 미세한 조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생물학적으로 셀은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조직체의 최소단위구조'이다... 하나 하나의 셀이 모여서 한 사람의 몸을 이루는 것처럼 셀 모임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셀은 두 개의 셀로 나누어질 때까지 계속 성장하고 재생산의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과정들은 또한 건강한 교회의 셀에서도 일어나는 과정들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신약성경은 교회를 몸, 건물, 신부, 어머니 등으로 설명함으로써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셀은 생물학적 (biological) 성격을 가지고는 있지만 구체적인 형태는 아니다. 셋째로 셀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한 인격요소에서 혼동을 일으킨다. 신약성경은 교회를 인격적인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셀은 인격으로서의 교회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셀은 생명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은 아니기 때문이다. 셀은 생물학적인 개념이지만 인격인 개념이 아니다. 넷째로 셀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를 전도와 관련하여 설명하기 위해서 셀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셀은 신자 대 불신자와 같은 성격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질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번식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셀 개념은 전도와 맞지 않는다.
셀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약성경의 교회와 관련하여 오해하고 있는 중대한 것은 가정교회 개념이다. 셀교회 지도자들은 신약의 가정교회를 A라는 가정에서 B라는 가정의 일원 중 어떤이(들)과 C라는 가정의 일원 중 어떤이(들)과 이런 식으로 여러 가정의 일원 중 어떤이(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 가정교회의 이차적인 모습이다. 신약 가정교회의 일차적인 모습은 가정 그 자체가 교회이다. A라는 가정에서 B라는 가정의 일원 중 어떤이(들)과 C라는 가정의 일원 중 어떤이(들)과 이런 식으로 여러 가정의 일원 중 어떤이(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기 전에, A 가정, B 가정, C 가정 이런 식으로 여러 가정들은 부모와 자녀가 전체적으로 교회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A가정도 이미 교회이며, B가정도 이미 교회이며, C가정도 이미 교회이다. 이렇게 볼 때 신약성경이 지시하는 교회의 기초적인 단위는 엄격히 말해서 가정교회 (House Church)라기보다는 가족교회 (Family Church)이다. 가족교회가 모여서 가정교회가 된다.
2) 사역자
셀 교회의 지도자들은 셀 그룹 교회에는 프로그램도 없고 전문목사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셀 교회의 조직을 보면 사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셀 교회에도 프로그램과 전문목사가 있는데 단지 전통교회의 것과 성격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셀 교회는 세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로 외향적으로는 모든 개개의 지체들이 훈련을 받아 외부로 복음을 전하여 불신자들을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전력한다. 둘째로 내향적 또는 수평적으로 볼 때 셀은 지리적으로 형성되어 비슷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까이 사는 사람들로 맺어진다. 셀들은 6-8명의 사람들이 어느 일정한 기간 (보통 반 년 정도) 동안 성장하면 두 개로 나누어져 번식하고, 교회 안에서 모든 셀들은 서로 간에 사랑으로 연결된다. 셋째로 수직적으로 볼 때 셀 교회는 한 명의 공동의 리더 아래 구조적 권위 아래 존재하게 된다. 이 마지막 사항인 셀 교회의 구조를 더욱 자세히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셀 교회에 해당되는 가장 중요한 구조는 소위 셀 교회의 5X5 구조이다. 첫째로 셀 교회의 가장 작은 단위는 셀 그룹으로서 대략 10여명으로 구성된다. 셀은 목자 그룹이다. 목자 그룹은 사람들을 성숙하게 만들기 위하여 섬기는 일에 훈련받는 셀이다. 이때 목자들은 훌륭한 성경교사가 되거나 또는 능력있는 전도자가 될 필요는 없다. 단지 목자는 양떼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의 필요들에 위해 사명을 감당하려는 소망을 품어야 한다". 각 셀 그룹에는 셀 리더를 돕는 인턴들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 둘째 단계로 모든 다섯 개의 셀 그룹마다 하나의 지역장 (구역장, 코치)이 있어야 한다. 셋째 단계로 25개의 셀 그룹마다 전임 지역목사가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전임 지역목사는 다섯 명의 지역장과 스물 다섯 개의 셀을 조정하기 위해 세움을 받은 사람이다. 이 전임사역자는 5X5 구조에서 처음으로 급료를 받는 위치에 있게 된다. 셀 교회들은 회중들을 돌보고 살피기 위해 "지역목사"를 육성한다. 지역목사는 설교와 교육에 관한 은사보다는 상담과 행정과 복음전도 쪽의 분야에 은사를 받은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섬기는 지역 셀 그룹들과 회중모임에서 "담임목사"가 되는데, 그의 사역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지 강단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셀 그룹의 전체모임은 축제예배에서 이루어진다. "셀 그룹들이 함께 모이는 일정한 시간들이 정해져 있는데, 이 때에 모든 셀의 멤버들은 커다란 축제 예배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 대하여 증거한다. 이 모임은 엄밀히 말해, 예배가 아니라 '행사'이며 그 범위는 정해져 있지 않다". 만일에 모든 셀 그룹을 축제예배에 다 수용할 수 없을 때는 축제예배를 분리시키게 된다. "대부분의 셀 그룹 교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역을 감당할 둘, 넷, 또는 일곱 개의 축제예배로 확대되어야 한다... 결국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만한 시설이 그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럴 때쯤 ... 건축을 위한 모금을 할 수 있게 된다".
셀 교회에서 최소구조인 셀과 최대구조인 교회를 살펴보면 전통교회에 못지 않은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째로 최소구조인 셀은 일반적으로 G12 구조라고 불린다. 여기에는 셀 리더가 지도자이다. 그와 함께 3명의 제자들이 있다. 그들은 미래에 셀을 지도하기 위해 훈련을 받는다. 또한 멤버들이 있는데, 그들은 세례를 받았고 협력하는 멤버로 다양한 부서에서 일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나아가서 새신자들은 16주 동안 '양육받기' 과정에서 셀의 제자 중 한 사람에게 교육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여기에는 손님들이 있다. 리더들은 그들의 집을 방문하여 믿음을 갖도록 인도한다. 둘째로 최대구조인 교회는 부서들의 사역으로 분류된다. 담임목사 아래 사역책임자들은 도움사역 (치유사역, 가정사역, 교도소사역, 병원사역, 집사 사역, 전통적인 타종교 사역), 중앙사역 (셀부서, 전도, 여자, 어린이, 컨퍼런스, 셀교회 개척 및 선교), 전문사역 (행정, 재정, 미디어, 지역사회, 음악, 교회도우미 사회사업 재정관리) 등으로 분리되어 활동을 한다.
위에서 살펴본 내용들은 셀 교회의 문제점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여준다. 결국 셀 교회는 교회성장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대형교회가 되면 다단계적인 조직 (피라미드 구조)으로 교회를 운영하게 된다. 때때로 이것은 셀 교회가 비판하는 전통적인 대형교회의 운영보다도 훨씬 더 강도있는 운영을 추구한다. 이렇게 볼 때 셀 교회는 평신도 사역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조직화된 전문사역자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인상을 벗어버리기 어렵다. 특히 축제예배에서 셀 교회의 결정적인 큰 문제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셀 교회에는 예배 개념이 무척 약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축제예배가 대형화되면 분리시키지 않을 수 없으므로 셀 교회가 그렇게 강조하는 전체 교제는 자연히 사라지고 만다. 마지막으로 셀 교회는 셀 목회 자체가 일종의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차치하더라도 여러 가지 부서들을 설립하여 다양한 사역을 시도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프로그램 중심의 전통교회와 같은 현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3) 전도목적
셀 교회는 근본적으로 전도를 지향하는 목회이론이다. 물론 셀 교회가 성경교육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매우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셀 교회의 지도자들은 셀 그룹 이전에 강화된 성경교육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셀 그룹은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운영되어야 하며, 셀 모임의 목적은 반드시 서로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셀 교회가 지적인 배움 중심의 모임이 되어서는 안되며, 그 대신에 은사들이 한 몸된 지체들 사이에 흘러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셀 교회의 지도자들은 셀 그룹 모임을 성경공부로 전환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서로간의 관계성이 생겨야할 시간을, 다른 지적인 활동을 하는 시간으로 대체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셀 그룹의 모임은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지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셀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경공부를 위해서 모일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에 쓰시기 위해 성경을 통해 깨끗하게 하시고 훈련시켜 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성경공부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셀 교회에서는 성경공부를 할 때 그 정보 (지식)를 추구하기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삶과 사명을 확인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공부의 목적은 섬김을 위해 그리스도인을 훈련시키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영양분을 제공하지 않고 성장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을 일으킨다. 이러한 사고 하에서 이루어지는 셀 교회의 설교는 본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된다. 대표적인 예로 셀 교회의 지도자인 "다이언 로버트 목사는 '주님을 잃은' 자신의 교인들을 양육하고 권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여러 셀 모임에서 섬기는 자들이 전하는 보고서에 담긴 의견을 토대로 해서 설교를 준비한다. 이 보고서들에는 여러 셀 모임에 속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문제들과 영적인 문제들이 담겨있고, 그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설교를 한다". 이것은 상황설교로서 초대교회의 설교와 상당히 다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셀 교회가 초대교회를 원형으로 삼고 있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4) 성령의 은사와 계시
셀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대단히 강조한다. 심지어 성령의 은사를 그리스도의 몸 속에 흐르는 영적인 피라는 이상한 이론을 피력한다. 셀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강한 주장으로부터 직접계시를 주장하는 듯한 인상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인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인정하면서도 개인에게 주어지는 계시를 상당히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래서 셀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자들이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워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할 때 계시가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계시와 조명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며, 둘째로 더욱 큰 문제는 사도행전의 개인적인 계시를 우리 시대에서 계속되는 것으로 오해함으로써 성경시대와 우리시대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4. 현대목회전략
지금까지 우리는 셀 교회의 주장과 문제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현대의 목회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사실 현대교회의 목회를 위한 방법은 이미 초대교회의 목회에 다 들어있다. 따라서 현대교회의 목회를 말하려면 신약교회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 신약교회의 목회를 알면 현대교회의 목회를 알 수 있다.
1) 신약성경의 목회
(1) 교회관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목회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약성경의 교회관을 이해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처음부터 교회를 인격체로 설명한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교회가 마치 사람이 두 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교회관을 보여준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두 손 교회" (two-hands-church)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교회가 가지는 권세를 두 가지 방면으로 설명하셨다 (마 16:13-20). 첫째로 교회는 지옥의 문들 (개역: 음부의 권세)을 이기는 권세를 가진다. 비록 지옥이 많은 문을 가지고 교회를 방어한다 할지라도 교회를 이길 수는 없다. 둘째로 교회는 천국의 열쇠들을 소유하는 권세를 가진다. 교회는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어서 천국의 문을 부드럽게 열게 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두 권세를 말씀하심으로써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다. 교회는 지옥의 다스림을 받는 불신자들을 향한 사명과 천국의 다스림을 받는 신자들을 향한 사명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사도 바울도 "두 손 교회관"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와 만물에 관련시켜 설명한다 (엡 1:22-23).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교회는 한편으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볼 때 그의 몸 (소마)이며, 한편으로 만물과의 관계에서 볼 때 만물 위에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충만 (플레로마)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교회를 두 가지 방면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교회는 성도라는 지체들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 (소마)이며, 성도 외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하나님의 충만 (플레로마)이다. 교회는 두 가지 사명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신자들로 구성되는 몸을 향한 사명이며, 둘째는 불신자들을 포함하는 만물을 향한 사명이다. 이렇게 볼 때 신약성경은 교회의 사명을 두 손 사명으로 이해한다.
신자 <-- 교회 --> 불신자
교회는 천국 뿐 아니라 지옥도 관계하며, 신자 뿐 아니라 불신자도 관리한다. 교회 사명의 두 날개는 신자 관리와 불신자 관리에 있다. 교회에는 신자를 위한 기능과 불신자를 위한 기능이 병행적으로 존재한다.
(2) 목회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교회관에 근거하여 신약교회의 목회를 설명해 볼 수 있다. 신약교회의 목회관은 대상과 방식으로 나누어 살펴보게 된다.
A. 대상
신약성경의 목회관은 폭넓은 대상을 전제로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돌보았을 뿐 만 아니라 제자 아닌 사람들도 돌보았다. 예수께서는 병자와 죄인을 만나셨다. 예수께서는 현재 그의 품안에 들어와 있는 양들 뿐 아니라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 (요 10:16)에게도 관심을 가지셨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의 시야는 넓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현재 자기에게 속한 양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시다가 아직 자기의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에게로 화제를 돌리셨다. 예수께서는 장차 그가 인도해야 할 다른 양들,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할 다른 양들에게 마음을 기울이셨다. 예수의 안목이 확대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현재의 양들 뿐 만 아니라 미래의 양들까지도 바라보셨다. 이 장소의 양들에게 뿐 만 아니라 저 장소의 양들에게까지도 관심을 두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큰 안목, 큰 마음, 큰 관심을 발견한다. 예수의 이 넓은 안목이 우리에게 개안 (開眼)의 기회를 준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안목으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에 매이지 않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시간과 공간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양떼들 뿐 아니라 이 시간에 공간에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양떼들에게도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참으로 대적들 가운데조차도 미래의 시민이 숨어있는 것을 기억하기에, 심지어 그들에게서 적대를 받는 것을 소득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신국 1권 35장). 이러한 안목이 주어지면 세상을 조망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이러한 안목을 가지면 비그리스도인들을 소홀히 여길 수 없으며, 심지어 적그리스도인들까지도 관대하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에 들어올 가능성 앞에 있다. 교회는 예수께서 그의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을 바라보는 넓은 안목을 가지고 아직 예수에게 속하지 아니한 세상의 유리하는 양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초대교회의 사역이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로 이루어진 것이나 (행 5:42) 사도 바울의 사역이 성경교육과 복음전도로 진행된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관에 기원을 두고 있다.
B. 방식
신약성경의 교회가 신자와 불신자를 목회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측면만을 다루고자 한다.
A) 신자 목회방식
신약성경의 교회는 신자를 목회하는 방식에 있어서 가족을 신앙화하는 목회를 지향하였다.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많은 경우에 가족이 전체적으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이것은 구약교회 (신 6:4-9)와 중간기 시대의 유대교 (눅 1:58)와의 연속성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심지어 신약시대에는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들까지도 가족이 전체적으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를 볼 수 있다 (행 10:2 고넬료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초기 기독교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가정집회가 중시되었다 (행 2:46; 5:42). 사도 바울이 회심 전에 "각 집마다 다니며 남자들과 여자들을 끌어내어 옥에 가두었다" (행 8:3)는 말은 초기 기독교의 가정 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진술이다.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게 된 루디아는 모든 가족과 함께 다 세례를 받았다 (행 16: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고 알려주었고 결국 간수와 함께 그의 온 가족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행 16:34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고린도에서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었고 (행 18:8), 사도 바울은 스데바나의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고전 1: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 [오이코스]에게 세례를 주었고"; 참조. 고전 16:15 "스데바나의 집" [오이키아]). 이렇게 신약성경의 교회는 가족을 전체적으로 복음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외에도 신약성경의 교회에서 가족이 복음화되었다는 증거는 많이 있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작별하기 전에 마지막 집회를 가졌을 때 유두고라는 청년 (행 20:9)이자 아이 (행 20:12)가 밤늦게까지 그 집회에 참석한 것은 가족이 함께 참석한 것임을 암시한다. 드로아 집회는 가족교회들의 연합집회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기 위하여 두로를 통과하였을 때 두로의 제자들은 "다 그 처자와 함께" (행 21:5) 바울을 전송하였다. 이것은 두로의 신자들에게 가족이 복음화되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결국 가족의 복음화는 가족교회 (Family church)를 형성하게 되었다. 가족교회는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조직이다. 이에 대한 간단한 예를 들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가족교회이다 (롬 16:5 [개역에는 "저의 교회"라고 번역되었는데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번역해야 한다]; 고전 16:19). 조금 더 선명한 예는 빌레몬의 가족교회이다. 사도 바울이 문안하는 동역자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군사된 아킵보가 한 가족이라고 생각할 때,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 (몬 2 "네 집에 있는 교회")는 일차적으로 가족교회를 가리킨다. 이런 경우는 눔바라는 여성의 집에 있는 교회에서도 발견된다 (골 4:15). 아마도 사도 바울이 축복했던 오네시보로의 집도 이 경우에 속할 것이다 (딤후 1:16; 4:19).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가족교회들에게 문안하면서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들이 문안한다" (롬 16:16)고 말한 것은 지금 그가 로마서를 쓰고 있는 고린도 지역 (롬 16:1 참조)의 가족교회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자선을 강조하면서 특히 가족교회들을 고려할 것을 말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갈 6:10 "믿음의 가정들" [오이케이오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가정규칙 (Haustafel)을 준 것은 가족교회를 전제로 한 것일 수 있다 (엡 5:22-6:9; 골 3:18-4:1). 다시 말하자면 가정규칙은 가족교회들을 위한 지침이다. 특히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한 것은 가족교회의 정당성을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엡 5:22-33).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이 목회서신에서 직분자들을 세우는 일과 관련하여 집을 잘 다스리는 것을 조건으로 삼은 것은 가족교회의 지도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딤전 3:4,12). 이때 사도 바울이 감독의 직분을 위하여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서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딤전 3:5)라고 말한 것은 가족교회를 지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집" 딤전 3:15)도 지도할 수 없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또한 목회서신에서 사도 바울이 거짓 교사들은 신자들의 집에 침투하여 (딤후 3:6 오이키아) 전복시킨다 (딛 1:11 오이코스)고 말한 것은 단순히 신자의 가정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가족교회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가족교회는 한 가족의 교회이며 완벽한 성도로서의 가족이다. 가족교회는 신약성경 직후의 속사도 시대에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디다케 (Didache)에 의하면 기독교의 교사들이 순회하는 중에 숙박하게 되었을 때 세례와 성찬을 갖춘 예배를 인도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Did 11). 이것은 순회전도자들의 방문을 받는 가정이 가족교회와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경인 바울행전에 의하면 어떤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이고니온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아내와 두 자녀를 데리고 마중을 나갔다 (AThe 2). 이것은 속사도 시대에도 가정의 복음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가족교회들은 발전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가족교회는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첫째로 가족교회 (Family Church)는 가정교회 (House Church)로 발전하였다. 가족교회가 확대되어 가정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가족교회가 다른 사람들을 흡수함으로써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아볼로를 가족교회로 흡수하였다 (행 18:26). 골로새서와 빌레몬서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가족교회가 확대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라는 여성의 가족교회가 확대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골 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만일 사본읽기에 따라서 이 구절을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읽는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형제들이 중심이 된 것으로 말하게 된다). 가족교회가 가정교회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로마서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에게는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 (롬 16:14)이 있었고, 빌롤로고, 율리아, 네레오, 그의 자매, 올름바는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들" (롬 16:15)이 있었다. 이것은 처음에 가족으로 시작된 교회가 가정교회로 발전하여 성장한 증거를 보여준다.
둘째로 가족교회들 (또는 가족교회들로부터 발전한 가정교회들)은 연합하여 한 지역교회를 이루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는 로마교회이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는 로마교회는 지교회적인 개념보다는 노회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로마 교회에는 여러 개의 작은 가족교회들 (또는 가족교회들로부터 발전한 가정교회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있는 여러 성도들에게 문안을 하는 단락 (롬 16장)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확실하게 알 수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단락에서 "문안하라"는 말을 16번 사용하고 있다 (롬 16:3, 5, 6, 7, 8, 9, 10a, 10b, 11a, 11b, 12a, 12b, 13, 14, 15, 16).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사의 말로 때로는 한 개인에게, 때로는 두 인물에게, 때로는 여러 명에게 문안을 한다: 단독적인 인물로는 에배내도 (5), 마리아 ([여] 6), 암블리아 (8), 아벨레 (10a), 헤로디온 (11), 버시 ([여] 12b)가 언급된다. 두 명으로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3),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7), 우르바노와 스다구 (9),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12), 루포와 그의 어머니 (13)가 언급되는데, 이때 브리스가와 아굴라 (3),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부부이며 (7), 우르바노와 스다구는 모두 남성이고 (9), 드루배나와 드루보사는 모두 여성이며 (12), 루포와 그의 어머니는 모자관계이다 (13). 여러 명으로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가 한 그룹으로 (14), 빌롤로고, 율리아, 네레오, 그의 자매, 올름바가 한 그룹으로 언급된다 (15).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문안하라"는 말은 아마도 로마교회 안에 있던 여러 가족그룹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로마교회 안에는 여러 개의 작은 교회들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입증해주는 것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에 교회가 있었고 (롬 16:5), 아순그리도, 블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에게는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 (롬 16:14)이 있었고, 빌롤로고, 율리아, 네레오, 그의 자매, 올름바는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들" (롬 16:15)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교회에 다양한 작은 가족교회들 (또는 가족교회들로부터 발전한 가정교회들)이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로마교회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가족교회 또는 가정교회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B) 불신자 목회방식
신약성경의 교회는 신자에게 뿐 만 아니라 동시에 불신자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신약성경의 교회는 불신자 전도에 최선을 다하였다.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 예수를 전하는 일은 신약성경 교회에게 가장 큰 사명이었다 (행 1:8). 이 사명은 신약성경 교회의 불신자 목회였다. 신약성경의 교회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신약성경의 교회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하였다. 첫째로 초대교회는 신자들에게 불신자의 생활이 무엇인지 가르쳤다 (마 24:37-39; 딤후 3:1-5). 둘째로 초대교회는 불신자를 접촉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고전 5:9-10). 불신자를 접촉하는 기회를 얻기 위하여 지혜를 발휘하게 하였다. "외인들을 향하여 지혜로 행하여 기회를 사라" (골 4:5). 불신자의 문을 열고 들어가거나 (골 4:3), 불신자가 신자의 모임에 들어오는 것을 장려하였다 (행 28:23; 고전 14:23-25). 불신자들에게 선한 행실을 보여 신자들에게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게 하였다 (마 5:16; 벧전 2:12; 행 2:47). 셋째로 초대교회는 불신자의 성향을 파악하여 전도를 하였다 (유대인 전도와 이방인 전도; 통치자 전도와 백성 전도. 사도행전 참조). 이것은 다양한 성향의 불신자들에게 적합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효과를 일으킨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5). 넷째로 초대교회는 불신자를 집요하게 공략하였다 (세 안식일의 데살로니가 집회. 행 17:1이하). 다섯째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불신자 목회를 위한 책임소재를 분명히 정하였다 (롬 15: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와 같은 구획설정으로 말미암아 복음으로 불신자를 책임진다는 사명이 더욱 강화되었다.
2) 현대 목회전략
우리는 이상과 같이 신약성경의 교회가 지향하는 중요한 목회방식으로부터 현대 목회를 위하여 몇 가지 아주 기본적인 전략을 세워볼 수 있다. 현대 목회의 전략을 위해서는 교회내적인 것으로부터 대사회적인 것까지 참으로 많은 것을 언급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단지 신약성경의 입장에서 볼 때 현대교회가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목회는 신약성경이 실행했던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신자를 위한 목회와 불신자를 위한 목회이다. 목회는 신자 뿐 아니라 불신자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두 손 목회"를 의미한다. 현대교회는 초대교회가 지향했던 "두 손 목회"를 시도할 때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1) 신자를 위한 목회
첫째로 "두 손 목회"의 한 방면으로 신자를 위한 목회를 살펴보자. 신자를 위한 목회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겠지만 신약성경의 방식을 따라서 무엇보다도 신자의 가정을 복음화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신자는 가족의 전원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온전가정 (perfect family)의 신자와 가족의 일부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결손가정 (defective family)의 신자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신앙에 있어서 가정적인 결손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발생한다. 온전가정과 결손가정의 비율차이는 대단히 크다. 온전가정이 많을수록 목회는 안정되고 결손가정이 많을수록 목회는 불안해진다. 신약성경의 교회가 가족복음화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현대목회도 가족복음화에 절대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교회는 신자들의 가정을 가족교회로 만드는 일에 힘써야 한다. 가족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로 가족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회는 부모가 목회자에 준하는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부모는 가족을 목회하는 부모가 될 수 있도록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는 마치 목회자와 같은 위치에서 가정을 신앙으로 지도해야 한다. 둘째로 가정예배가 현실화되어야 한다. 가정예배는 성경을 교육하는 측면과 더불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측면을 가져야 한다. 가정예배는 교육의 장으로서 또한 예배의 장으로서 기능해야 한다. 가정은 신앙을 학습하는 학교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와 같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가정예배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교회는 가정예배 책자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족교회는 가정예배를 위하여 매일같이 말씀을 공급받아야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임시적으로 인도자를 파송하는 것이 좋다. 셋째로 가족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성목회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대체적으로 교회에서 수효로 볼 때 남성은 여성보다 열세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현대교회가 여성중심적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족교회를 지향한다는 것은 무게중심을 여성목회와 남성목회에 동등하게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남성이 참여할 수 있는 방도를 적극적으로 고안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가족교회를 만드는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가정이 가족을 책임지게 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이제 가족교회가 교회성장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자. 교회의 바탕에 놓여있는 가장 기본적인 소그룹 구조인 가족교회는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함으로써 교회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첫째로 가족교회는 가정교회로 발전해야 한다. 이것은 가족교회의 단수적 발전을 가리킨다. 가족교회는 다른 여러 가정의 가족들을 흡수하여 더 큰 규모로 성장함으로써 가정교회가 된다. 이때 가정교회에 들어온 다른 가정의 가족들은 자신들의 가정을 가족교회로 변화시켜 더 많은 가족교회들이 생겨나게 된다.
둘째로 가족교회는 지역교회로 발전해야 한다. 이것은 가족교회의 복수적 발전을 가리킨다. 가족교회가 지역교회로 발전하는 것은 점진적인 과정을 따라 한 가족교회가 가정교회가 되고 다시 가정교회가 가족교회들이 되어 지역교회를 이룰 수도 있고 (위의 도표의 연장으로 지역교회를 말함), 동시적인 과정을 따라 여러 가족교회가 한편으로는 가정교회로 발전하면서도 동시에 지역교회를 이룰 수도 있다. 어쨌든지 지역교회는 가족교회들 (또는 가족교회[들]로부터 발전한 가정교회들)의 연합체이다. 이것은 모든 성도 (유아에서 노인까지)가 서로 세워주는 교제가 가능한 교회이다.
셀 교회는 교회를 설명하는 오이코스의 개념을 도입하여 그리스도인의 기본공동체는 단지 개인적인 헌신이 아닌 가족 단위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어느 정도 온전가족의 의미를 지적하지만 가족교회의 개념을 말하지는 않는다. 가족교회는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구성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소그룹이다. 여기에는 신앙적 인격적 성격이 들어있다. 가족교회는 엄청난 강점을 가진다. 가족교회는 신앙고백적인 가정을 성립시킴으로서 가족의 신앙과 비전이 확고해지며 가족의 관계와 유대가 확실해진다는 것이다. 가족교회들은 지역교회에 모여 전체로서의 교회를 이루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지역교회는 가장 견고하고 안전한 하부구조를 가지는 것이 된다. 지역교회는 모든 가족교회들이 모이는 교회이다. 여기에서 예배 (성례시행과 말씀선포)와 교제 (식탁교제)가 이루어진다. 가족교회들은 지역교회의 예배와 교제를 통하여 상호간에 연결된다. 지역교회의 장점은 연합과 성장과 사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2) 불신자를 위한 목회
둘째로 "두 손 목회"의 다른 방면으로 불신자를 위한 목회를 살펴보자. 목회가 불신자를 위하여 한 몫을 해야 한다는 것은 신약성경의 교회가 제시하는 중대한 사실이다. 신약성경은 신자를 위한 목회만큼이나 불신자를 위한 목회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현재의 불신자들 가운데는 미래의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 안된다. 불신자를 위한 목회는 다음과 같이 진행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신자에게 불신자에 관하여 가르쳐야 한다. 신자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신자에게 불신자의 관념을 이해시키는 것이 불신자 목회를 위한 첫 걸음이다. 실제로 불신자 목회는 신자들에게 불신자를 접근하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시작된다. 우선 교회 자체가 불신자 접촉을 구상하는 기관을 만들거나, 불신자와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거나, 불신자들이 관계할 수 있는 행사를 실행하는 것이 좋다. 신자는 불신자의 세계에 참여해야 한다. 아마도 셀 교회의 장점은 불신자 접촉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새신자 주변에서 접근할 수 있는 불신자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송이버섯이 발견되면 그 주위에는 많은 송이버섯이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새신자 주변을 주목해야 한다. 불신자를 접촉하기 위한 방법을 도모해야 한다. 불신자와의 교제는 두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은 불신자를 신자에게로 초청하는 하는 것과 신자가 불신자를 방문하는 것이다.
불신자 초청은 공간적으로는 가정이나 직장과 같은 곳으로 초청할 수 있고, 방법적으로는 행사와 사업을 통한 초청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자는 불신 이웃을 멀리하지 말고, 불신 친구를 많이 만들어 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불신자를 접근하는 것은 전도를 위한 목적성을 가지되 인격과 생활을 통한 전도가 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신자들에게 불신자를 접촉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불신자 목회의 핵심이다. 이것은 전도대상자를 개척하는 길이다. 더 나아가서 불신자 목회는 불신자에게 접근하면서 불신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다. 불신자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방식을 사용할 수 있다. 우선 불신자의 성향은 복음에 대한 관심도에 따라서 분류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불신자는 복음에 흥미를 보이는 관심자, 복음에 찬반의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는 중간자, 복음을 강하게 거부하는 반대자로 나눌 수가 있다. 또한 불신자의 성향은 거주하는 지역에 따라서 노화지역, 재개발지역, 신도시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불신자의 성향을 파악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점은 수준에 맞게 전도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때 교회는 불신자의 다양한 성향에 적합하게 접촉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또한 불신자를 접근하여 성향을 파악하게 되면 집요하게 공격해야 한다. 공격해야 할 대상은 최소수일수록 좋다. 대상의 수효가 제한적일 때 공격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를 가리켜 점 전도라고 부를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불신자 목회에서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불신자들을 책임질 수 있는 범위를 정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신자를 위한 구역장, 권찰, 조력자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불신자를 향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불신자에 대한 책임을 강화시킨다.
5. 결론
지금까지 셀 교회의 주장과 문제를 살펴보면서 현대 목회를 위한 전략을 간략하게 제시해보았다. 우리의 목회는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시대의 요청에 의하여 결정되어서는 안되고 (물론 이 말은 목회가 현실을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근본적으로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상을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목회는 과감하게 시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때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할 것을 믿는다. 본고는 제한된 시간과 지면 때문에 매우 기본적이고 부분적인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본고에서 제시한 이론들은 시험과 실험이 필요하다. 특히 본고는 목회를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만 다루었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이것은 마치 내면보다 외면에 치중한 것과 같다. 목회를 내면적인 면에서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의 목적은 방법론적인 것에 있기 때문에 내면적인 측면은 미루어 두었다. 하지만 본고를 결론짓기 전에 주마간산 격으로라도 한 가지 집고 지나가고 싶은 것은 목회자의 내면성에 관한 것이다. 결국 목회는 목회자에게 달려있는 것이므로 목회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목회가 결정될 수밖에 없다. 목회자에게는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진리가 있어야 한다 (렘 20:9). 불붙는 듯한 진리가 목회자의 속에 들어있을 때 목회는 방법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건강한 열매를 맺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Eloi.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