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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줄시 노우트 1 - 세가지 요소
두줄시 운동을 처음 시작하고 나서 과연 그 호응이 어떨지 무척이나 궁금했었습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사실 구태여 말하자면 우리 문학사에서 두줄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몇 편의 두줄시는 두줄시를 하나의 문학장르로 보고 쓴 것이 아니라 시를 쓰다보니 우연히 두줄이 되었던 작품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사이트에서 우리가 선보이는 두줄시들은 우리나라 문학사상 처음으로 두줄시를 하나의 문학장르로 생각하고 쓰게 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이 사이트에 두줄시를 올리는 당신(들)은 우리나라 두줄시사의 첫 페이지에 이름이 기록될 것입니다. 두줄시는 단 두 줄이라는 점만 놓고 보면 누구라도 쉽게 쓸 수 있는 시 양식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두줄시라고 해서 자유시 한 편에 담는 내용을 못담으란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촌철살인의 매섭고 날카로운 두줄시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리 만만한 장르라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두줄시는 비유, 상징, 은유, 골계, 해학, 잠언, 서정, 서사….못담을 내용이 없습니다. 그렇긴 하나 두줄시를 문학쪽으로 한없이 밀고 가면 압축과 긴장으로 뭉뚱그려진 지뢰처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산지사방으로 폭발하는 힘(감동)을 간직한 시가 될 수 있고, 또 다른 엔터테인먼트쪽으로 밀고 가면 재치와 기지, 재미와 유머가 넘치는 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두줄시는 하나의 ‘국민시’라고 불러도 좋을 듯싶습니다. 두줄시는 시가 단 두 줄인 만큼 첫행에서 급소를 찌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를 멀리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설움이 깊어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사람이라면 두 줄의 눈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 절명의 순간에서 나오는 신음 같은 첫행은 내가 자주 써먹는 표현입니다만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가는 번쩍임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을 적에 소가 한 말을 듣고 깨달음의 첫줄을 얻었습니다. 부처님은 말했습니다. “그 다음 말을 해다오. 그 다음 말을 내가 듣게 되면 내가 너에게 먹히겠노라” 소가 둘째줄을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두줄시입니다. 두줄시는 어떤 점에서 절명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극단의 정제된 언어와 이미지, 뜻을 뭉뚱그려 쓴 문학양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냥 두 줄로 나누어서 쓴 시라고 해서 두줄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장치를 고려할 때 절대적으로 두줄로 나눌 필요가 있는, 그러니까 두줄이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쓰여진 시를 진정한 두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아다시피 시문학은 가락성, 의미성, 이미지성(에즈라 파운드)으로 표현되는 문학의 정수입니다. 어떤 시는 이미지가 선명하고, 어떤 시는 담고 있는 의미가 강하고, 또 어떤 시는 율조 즉 가락이 강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두줄시 역시 이 세가지 요소를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의 두줄시를 봅니다.
벼랑에 걸린 그믐달아,
부여잡은 거미줄을 놔버리렴
주정연 시인의 ‘달2’ 이 두줄시는 앞서 말한 세 가지 요소를 완벽히 구비하고 있는 시입니다. 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적 진실이라고 하는, 현실을 재해석한 시인의 독특한 시적 감수성으로 창조해내는 문학입니다. 달도 다 기운 그믐달이 벼랑에 위태롭게 걸려 있습니다. 평화스런 정경은 결코 아닙니다. 차고 기우는 달의 마지막 운행을 통해서 시인은 고단한 삶의 한 단면을 비유하는 것 같습니다. 그 달더러 그만 애써 부여잡은 거미줄을 놔버리라고 말합니다.
거미줄에 달이 걸려 있다고 보는 그 세심한 시인의 형형한 눈빛이 빛나보입니다. 그믐달이 거미줄을 놓아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나 시인은 실제로 거미줄을 놓고 달이 쨍그랑! 깨져버리길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믐달이 위태롭긴 하지만 연약한 거미줄을 잘 붙들고 있어달라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의 희망이 깨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두줄시는 정말이지 두줄시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은 문학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정중수
두줄시 노우트 2 - 언어를 넘어서
언어를 넘어서 나는 두줄시에 대해서 이런 비유를 들고 싶습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라는 영화제목을 화두로 삼아 그 제목만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자면 한여름의 태양에 달구어질 대로 달구어진 양철지붕 위에 고양이가 있는데, 고양이는 발이 데일 듯 뜨거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뛰어내리자니 너무나 아득한 바닥이요, 그대로 지붕 위에 있자니 발바닥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때, 고양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그것이 무엇이건 필사적인 것입니다. 그 필사적인 것은 고양이에게 있어서 진실 그 자체입니다. 두견이가 한밤중 산천초목을 울리는 것 역시도 필사적인 진실일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절체절명의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목숨을 걸 만큼 극적인 순간에 우리는 마치 두견이의 피울음 같은 두줄시의 첫행을 만납니다. 고려시대인가요, 김황원이라는 문인이 대동강 부벽루에 올라가 절경을 보고 시를 읊었습니다. ‘긴 성벽 한쪽 면에는 늠실늠실 강물이요,큰 들판 동쪽 머리에는 띄엄띄엄 산들일세’ 여기까지 써놓고는 다음 두줄을 쓰지 못해 해가 저물도록 시상을 그려내려다가 끝내 붓을 꺾고 엉엉 울고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시인은 풍경이 시를 압도하는 막다른 장면에서 그만 무릎을 꿇고 만 것입니다. 때로는 이처럼 느낌이 언어를 넘어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만물을 언어로 다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왕왕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경지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언어란 따지고 보면 극히 사물의 일부문만을 그려낼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극한의 감정을 언어로 다 표현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시인은 언어로 세상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언어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두줄시는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두견이의 피울음, 김황원 시인의 울음,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의 필사적인 순간에 있습니다. 두줄시는 ‘언어를 넘어선 언어’로 표현되는 시라고 하면 너무나 두줄시를 엄하게 말한 것이 될까요. 그런가 하면 두줄시는 산봉우리에 머문 한 조각 흰구름보다도 더 유유자적한 세계를 끌어낼 수 있기도 합니다. 언어로 언어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다음의 두줄시를 봅니다.
더 주실라 마세요, 들녘에 해는 기울고
봄나물이 한 소쿠리를 넘치는 데요
봄춘 시인의 ‘기도’ 이 두줄시는 흡사 밀레의 그림 ‘만종’을 연상케 합니다. 혼자서든 몇이서든 봄나물을 캐러 들로 소쿠리를 하나씩 들고 나갔습니다. 나물을 캐다 보니 어느덧 하루 해가 기울어갑니다.(인생이 다 저문 것입니다) 이미 소쿠리에는 나물이 그득히 찼습니다. 여기까지는 그저 평범한 시골 여인네의 나물 캐러간 전원풍경을 그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나물을 더 주실라고 하지 말라며 자신의 내면에 살고 있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나물을 캐는 것은 시인이지만 시인은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내어주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뜻대로 이 세상의 삶을 살고 있으므로 하느님이 그득 채워주신 삶의 소쿠리를 들고 일어서겠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말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봄나물이 한 소쿠리를 넘치게 된 것도 사실은 시인이 캔 것이지만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 돌려놓고 있습니다. 이 두줄시가 ‘만종’보다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그림을 능가합니다.
왜냐하면 두줄시 ‘기도’는 하느님께 영광(기쁨,만족)을 돌리며, 순명하는 겸손된 모습을 한껏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두줄시를 읽으면서 평범한 언어로 언어가 나타낼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선 두줄시의 국경선을 보는 느낌입니다.
이처럼 전원에서 흔히 목도하는 평범한 나물 캐는 장면을 삶의 지극한 경지로 펼쳐내는 시의 세계--언어를 넘어선 경지를 '기도'에서 나는 읽어봅니다. 그 나물 캐는 들판에 나도 끼어 있고 싶습니다. 정중수
두줄시 노우트 3 - 자연과 마음의 풍경
자연과 마음의 풍경 윌리엄 워드워즈는 ‘시는 감정의 흘러넘침’이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낭만주의 대가다운 설파입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어트는 지적인 시를 천착해온 대가입니다. 나름대로 다 특색이 있으며, 나름대로 시의 세계를 넓혀온 시인들입니다. 시가 어때야 한다고 누구도 큰소리를 칠 수가 없는 것이 시세계입니다. 시는 이론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첫째도 둘째도 시작품으로 말해지는 것이므로 시인이 어떤 시세계를 펼쳐보였든 나름대로 새로운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을 ‘입법자’라고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은 새로운 시세계를 창조해내는 ‘제2의 조물주’입니다. 지적인 시나 가슴으로 쓴 시나 시작품으로서의 완성도가 문제이지 특별히 시가 머리로 쓰여져야 한다든지, 혹은 가슴으로 쓰여져야 한다든지 고집할 건덕지가 없습니다.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엘리어트시를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가슴을 열어 쓴 서정이 넘쳐나는 시도 좋아합니다. 워드워즈 시의 오랜 울림은 고등학교때 배웠던 시에서 비롯합니다.
일반적으로 서정시가 독자들에게 쉽게 어필하는 것은 사람들이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쓴 시쪽에 더 기울여지기 쉽기 때문일 것입니다. 감동은 흔히 가슴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아마도 모르면 몰라도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시작품 중 서정시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고 해도 인간에게서 가슴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서정시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사이트에 발표되는 두줄시들을 읽고 있으면 서정, 서사, 재치, 사랑, 자연 등 다양한 시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개중에는 물론 기교면에서 좀더 다듬어졌으면 하는 작품들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흥미를 끄는 감동적인 시편들이 많습니다. 대부분 서정시들입니다. 다음의 두줄시를 봅니다.
허공에 가랑잎 떨리는 소리 그대의 귀에 들리나요
차마 아프다 소리 못내고 파르르 떨리는 심정을
안개꽃잎 시인의 ‘아픈 자리’ 서정시입니다. 시 작품의 표면에 드러난 것은 가랑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그대’는 듣고 있느냐, 떨어지면서도 차마 아프단 소리 못하고 떨어지는 그 마음을 알고 있느냐,는 나뭇잎의 낙하를 표현하고 있지만, 실상 잘 읽어보면 시의 이면에는 시인의 마음을 가랑잎에 비유하여 ‘그대’에게 가슴을 열어보이며 당신에게 말못하는 이 아픈 사랑을 알고 있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표면(가랑잎)과 이면(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짝이 잘맞는 시작품입니다.
직설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차마 아프단 소리도 못내고 떨어지는 가랑잎에 차마 사랑한단 말 못하는 시인의 마음을 비유하여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는 이처럼 이중 삼중의 겹쳐 보이는 이미지, 의미, 가락을 함축할 수 있어야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자연은 예술을 모방한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의 모든 현상은 인간의 마음의 세계를 표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시인에게 있어 ‘마음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가랑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것을 자신의 마음의 풍경으로 묘파한 이 두줄시인의 솜씨는 무척 빛나보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연은 당신의 마음을 표징하는 마음의 풍경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이 마음을 모방한다고 말한대서 크게 무리한 주장은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자연에는 훌퓽한 두줄시편들이 숨어 있습니다. 시인은 발견자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 두줄시의 경우 딱들어 맞는 표현인 듯싶습니다. 좋은 두줄시를 읽었습니다. 정중수
두줄시 노우트 4 - 말의 씨앗으로서의 시
성서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곧 우주(사물)가 되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말이 우주의 씨가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말은 사물을 창조하지는 못하지만 사물의 내용(이미지)를 규정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하얀 천을 가운데 뚝 잘라 한 쪽은 걸레라고 이름하고, 다른 쪽은 수건이라고 이름하면 사람들은 설령 걸레쪽이 더 깨끗해보여도 때가 좀 묻어 있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습니다.
이처럼 말은 내용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주술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어떤 말을 한다면 그대로 되는 일이 흔합니다. 내 말은 말의 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다른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시는 더더욱 말의 힘에 의지하는 문학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 김춘수는 '내가 꽃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만 그 말의 힘은 사물의 내용을 규정하면서 동시에 그림이 되고, 가락이 되는 것입니다. 시처럼 말의 힘을 극대화하는 양식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가령 당신에게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다면 그 이후 당신과 나 사이에는 새로운 우주가 생겨나게 됩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오고가는 말들은 일상의 말들일지라도 전혀 다른 의미를 띠게 됩니다.
시는 독자에게 마치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의 연인관계처럼 사물에게 새로운 의미를 입히게 됩니다. 그 시가 개인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더라도 다른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은 말의 힘을 사용한 보편성을 띠게 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시일수록 그렇게 해서 감동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두줄시는 그 양식이 단순하고 짧기 때문에 일반시보다도 더욱 말의 힘(빛깔, 이미지, 의미, 가락)을 잘 활용해야 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는 아주 작은 특이점에서 폭발하여 탄생되었다고 과학자들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줄시는 마치 그 작은 특이점과도 같이 엄청난 세계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두줄시에 동원되는 말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타골은 일제하에 있는 한국을 가리켜 '동방의 등불'이라고 읊었습니다. 그 시를 접하는 순간 한국사람들은 언젠가는 해방되어 동아시아의 등불로서 그 몫을 다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찬 기대를 품게 됩니다. 이처럼 한편의 시는 그 울림이 크고 중요해집니다. 사물의 깊은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 말이고, 그 말을 압축, 비유, 상징 등으로 빚어내는 것이 두줄시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두줄시로 못그려낼 시세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두줄시의 힘은 막강합니다. 다음의 두줄시를 봅니다.
기다리지 마 돌아오지 못할 거야
내소사 풍경소리가 5월을 넘고 있다
김동하 시인의 '봄이별' 첫행은 평범한 싯귀처럼 보입니다. 헤어지는 사람에게 나를 기다리지 말라고, 어쩌면 이번에 헤어져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고 이별의 정한을 담담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둘째행에서 '내소사 풍경소리'가 등장함으로서 이 두줄시는 아연 심상이 엄청나게 깊어지고 확대됩니다. 왜냐구요? 첫행의 싯귀가 일반 사람들이 사는 사바세계의 저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윤회의 고리를 끊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마음공부의 도량에서 진술되고 있음을 둘째행이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가에서는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해서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고 말합니다.
그 헤어짐이 세상을 떠나 열반으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인생의 도반과 헤어져 정처없이 구름처럼 어딘가로 훨훨 떠나가는 이별일 수도 있습니다. 헤어지는 장면에서 산 속 고적한 내소사의 추녀 끝에 매달려 있는 풍경을 5월의 끝자락 푸르름이 건드리고 지나갑니다. 한 폭의 그림 같지 않습니까. 짧은 두줄시가 긴 여운을 남겨 줍니다. 이 두줄시는 나로 하여금 인연이 다한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슬프게 혹은 아름답게 그려보는 씨앗이 되고 있습니다. 정중수
두줄시 노우트 5 - 시와 인생
어떤 시인은 '사람은 슬프려고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살아보면 살아볼수록 머리가 끄덕여지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저 산 너머'에 있습니다. 그러나 다가가면 무지개처럼 저만큼 멀어지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일생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 잘못 설정된 목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행복은 꿈꾸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행복을 찾아 사람들은 날마다 바삐 살아갑니다. 저 산 너머로 가면 행복이 있겠지, 하고. 그러나 저 산 너머로 가면 또다른 저 산 너머가 있습니다. 삶이란 산을 넘고 나면 또 산을 넘어야 하는 도정입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난의 길, 그것이 삶이지만 사람들은 고난을 겪고 나면 행복이 오리라는 기대로 살아갑니다. 그런 기대가 없다면 하루도 살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속아 산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겠지요.
시는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공감, 감동을 통해서 위로해준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사는 일이 고달플 때는 옛날에 읽었던 시편들이 생각나고, 그러다가 또 직접 마음의 쓸쓸한 풍경을 시로 쓰기도 합니다. 당신도 물론 그러시겠지요만. 두줄시는 그런 슬플 수밖에 없는 인생살이를 묘파하는 데도 제격입니다. 다음의 두줄시를 봅니다.
머리엔 잡동사니 짐 보따리, 등엔 칭얼대는 아이 업고
저다운 生의 십자가 짊어지고 노을 속을 걷고 있다
비움 시인의 '나그네' 이 두줄시는 어려운 대목이 없습니다. 서사적인 묘사로 인생이 무엇인가를 선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줄시를 읽고 나는 대뜸 머리 속에 한 폭의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이 시는 그만큼 회화성이 강한 시입니다. 이 시의 정경을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한번 그려봅니다. 어떤 여인이 살아가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과연 중요한 것이 있기나 합니까) 인생살이의 자질구레한 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있습니다.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란 아무리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사온 것일지라도 사실은 잡동사니일 뿐입니다. 나는 최근 집안에 책이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고 불평불만을 떠뜨리는 아내의 강압에 못이겨 한 2천권 정도 되는 책을 실어냈습니다. 책을 버리면서 생각하니 말라르가 '나는 모든 책을 읽었어라'고 탄식한 까닭을 알 것도 같았습니다. 등엔 계속 칭얼대는 아이를 업고-대부분의 인생이 자기 식구들을 건사하는 데 반평생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까-어쩔 수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인생의 황혼으로 가는 여정, 그것이 인생이라고 이 두줄시는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두줄시에서 오래도록 음미해볼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둘째행의 '노을 속을 걷고 있다'는 대목입니다. 지질구레한 살림들, 먹여 살려야 하는 권속들, 그리고 운명처럼 지고 다녀야 하는 이 세상에서의 고단한 삶 즉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그 배경은 앞날이 창창한 아침이 아니라 저녁 노을입니다. 이미 인생의 후반기에 다다른 것입니다. 대저 인생을 그림으로 그린다 한들 이 이상 어떻게 그릴 수 있겠습니까. 이 시인의 메시지(다소 슬프고 비관적이긴 하지만)에 나는 동의합니다. 성서를 따올 필요도 없이 인생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것이 아닐까요.
아, 이 두줄시를 감상하다보니 인생을 내가 너무 어둡게 보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이 두줄시는 인생이 어떻다는 것을 단 두줄로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행복에 대한 꿈을 버릴 수는 없겠지요. 두줄시 속의 사람들도 그러리라 믿습니다. 정중수
두줄시 노우트 6 - 먼 곳 바라보기
나는 아주 심한 돋보기를 쓰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눈이 안경알을 가득 채워 보여서 이상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얼굴에 두 눈만 크게 확대해 보여서 때로는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눌 때 그 사람이 나를 보는지 안보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한번은 용기를 내어 어쩌다 그렇게 심한 돋보기를 쓰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어릴 적에 태양이 너무 신비해 보여서 하루종일 꼼짝도 안하고 해를 보았더랬습니다. 그때 눈을 크게 상하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 이 세상에 위대한 시인이 있다면 이 사람이다'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사람의 상상력에 대해서 찬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 사람을 만날 때면 나는 늘 특별한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 듭니다. 마치 하늘에서 불을 훔쳐온 프로메테우스 같은 사람이 아닌가 싶은 신화적인 사람으로 생각되곤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그 일로 인해 시력이 거의 실명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눈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하루 종일 태양을 바라본 소년. 도대체 이 세상에 사람이 60억명이 살고 있다는데, 누가 맨 눈으로 태양의 신비스러움에 이끌려 하루종일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나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뇌성벽력 같은 것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무엇인가를 찾으려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 하루종일 태양을 바라본 소년은 어릴 적에 이미 무엇인가를 보아버린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은 늘 먼 곳을 바라본 자만이 간직할 수 있는 깊은 성품을 느끼게 해줍니다.
우리가 이 사이트에 올리는 두줄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아니, 문학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랍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왔다가 가면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이 인생의 궁극이 아닙니까. 두줄시도 극단으로 가면 결국 인생의 비의를 상징이나 비유를 통해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다음의 두줄시를 봅니다.
한 노인이 해바라기를 오래 봅니다
한 번도 해바라기를 실컷 본 적 없다며, 점심도 거르고 바라봅니다
문경 시인의 '경이' 이 두줄시는 이런 내용으로 읽혀집니다. 어떤 한 노인이 해바라기꽃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습니다. 늙어서 이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더 짧을 수밖에 없는, 머리 속에는 살아온 추억들로 가득한 노인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해바라기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산전수전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번도 마음을 놓고 무엇인가를 오래도록 바라본 일이 없이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이제야 가까스로 무엇인가를 응시할 기회, 혹은 마음자리가 온 것입니다.
이 두줄시에서는 해바라기꽃이 그런 상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해바라기꽃은 어쩌면 사라져간 젊은 날을 상징할 수도 있고, 좋았던 시절을 비유할 수도 있으므로 이 두줄시를 노인에게 다시는 오지 않을 날들에 대한 회상으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노인이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에 당도해서 무엇인가(해바라기꽃)를 발견한 것으로 읽혀집니다.
마침내 노인은 앞서 말한 '무엇인가'를 찾아낸 것입니다. 시인은 노인이 점심도 거르면서(그만큼 노인에게 해바라기꽃은 절실한 의미를 띠고 있는 발견물입니다) 해바라기꽃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노인이 살아오는 동안 '한번도 해바라기를 실컷 본 적 없다'고 쓰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사에 부대끼느라 중요하고, 신비스러운 것들을 놓치고 살아간다면 영원히 무엇인가를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 두줄시의 시적 진실이 해명이 된 셈입니까. 우리가 만일 그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주위에서 얼마든지 스쳐 지나온 해바라기꽃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중수
두줄시 노우트 7 - 시인의 마음
생(生)이란 강제된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좋건 싫건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20대 시절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고 밤을 밝히며 고민한 적이 없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 고민을 평생토록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어제 무슨 일로 덕수궁에 가게 되었는데, 어떤 할머니가 벤치에 혼자 앉아 있길래 잠시 옆에 가서 말동무가 되어 드렸습니다. "할머니, 나무는 푸르르고 햇빛은 맑고 참 좋은 날이지요?" "그렇지. 난 아이들따라 여기 왔다우. 내 나이 팔십둘인데 이런 날이 앞으로 얼마나 있겠수." "무슨 말씀이셔요. 앞으로 일백살 넘게 사셔서 좋은 날을 많이 보셔야지요." 할머니는 고개를 모로 흔들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데 무슨...."
나는 할머니께 묻고야 말았습니다. "팔십 평생 살아오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인생이 어떻다고 생각하셔요?" (객적은 질문이 발동된 것입니다.) "허무하지 뭐." 할머니와의 인생문답은 대답이 나온 셈입니다. 나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라고 빌어드리고는 다시 일행과 합류했습니다. 나는 할머니의 인생에 대한 결론을 생각다가 문득 인생은 다 살고 나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결론을 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을 그때그때 충실하게 산 사람은 죽음이 문제가 안되지만, 인생을 덧없이 산 사람은 죽음이 큰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내가 이 글을 이렇게 무겁게 시작하는 까닭을 말해야겠습니다. 인생은 '시인의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야 참고 견뎌내야 하는 가혹한 인생길을 가볍게 걸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시인의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사물로부터 '감동'과 '경이'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일상의 작은 일들에서 감동과 경이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훨씬 더 풍요롭고, 의미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만일 이 대목에서 그가 종교인이라면 저절로 '감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감동과 경이가 없다면 그 인생은 늘 고달프고 외롭고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바로 그 감동과 경이의 마음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입니다. 사람은 일생을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전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그가 시를 쓰지는 않더라도 하나의 나뭇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윤동주 시인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덧없는 일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의 두줄시를 봅니다.
초록 소리로 피어오르는 산안개
타는 마음 고개를 넘는 너와 나의 맘울림
최병두 시인의 '산울림' 시인은 온갖 나무들의 푸르름으로 무성한 산을 비단띠처럼 감싸고 있는 산안개를 보고 '경이'를 느낍니다. 안개가 산을 감싸고 있는 정경은 늘 보는 것으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시인은 놀라움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시인은 산안개를 보면서 이것을 안개에 머물지 않고, 산울림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시인의 마음이 있습니다.
나 역시도 이 대목에서 '감동'을 받습니다. 자, 다시 이 시를 감상해봅니다. 푸른 산을 산안개가 감싸고 있고, 그 안개가 고개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선경입니다. 그러나 안개는 '그대'를 향한 타는 내 마음과 '나'를 향한 그대의 마음의 울림처럼 서로 얽혀서 푸른 산을 휘돌아 감싸고 있습니다. 안개=맘울림이란 등식을 만들어 두 사람의 뜨거운 마음을 산안개에 의탁하여 쓰고 있습니다. 아니, 산안개를 두 사람의 마음에 의탁하고 있습니다.
산에 가서 소리를 지르면 산이 대답하는 '에코'가 생겨납니다. 그것은 시인에게 있어 초록소리(안개)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의 '맘울림'입니다. 인생을 감동과 경이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시인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산안개를 보고도 산을 울리는 당신과 나의 맘울림으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정중수
두줄시 노우트 8 - 인생의 보물창고
'어린 시절의 추억은 인생의 보고(寶庫)'라고 말한 사람은 헬만 헤세입니다. 그는, 새둥지에 한번도 손을 안넣어보고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자연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철없던 그 어린 시절이야말로 일생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때였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안그렇습니까. 그 시절, 남의 보리밭에 들어가 보리모가지를 뜯어다가 불을 피워 입이 새까맣게 되도록 보리를 구워먹던 일이며, 보리밭으로 꿩알을 주우러 다니던 기억....등 유년의 기억은 한없이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 철없던 시절이 아름다운 것은 그때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추억이어서가 아니라 아무런 욕심도 없는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다시는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늙는다는 것이 서러운 것은 몸이 늙어서가 아니라 그런 동심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로마 교황은 '어린 시절 품었던 마음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은 그만큼 불행한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어디 그것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뿐이겠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 못지 않은 아름다운 관계를 맺는 것도 또한 어린 시절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다음의 두줄시를 봅니다.
군불 지핀 아랫목에 끼니마다 묻어둔 밥 한 그릇
오늘도 벽오동 위에서 할매를 놀리는 애물단지
혜원 시인의 '까치 5' 이 두줄시를 읽노라니 금방 내 어릴 적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아랫목에 뽀깨뚜껑을 덮은 밥그릇을 담요 속에 묻어두고 일보러 밖에 나간 아버지나 자식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모습,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주려고 어머니는 그렇게 밥그릇을 묻어두곤 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이란 한끼를 때우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선, 깊은 사랑과 인정에 다름아닙니다. 이 두줄시의 첫행에서 시인은 끼니때마다 밥 한 그릇을 할머니가 아랫목에 묻어두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아마도 할머니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자식을 위해서였겠지요. 그런데 둘째행을 보면 까치가 벽오동 나무 위에서 울고 있는 정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옛부터 까치가 울면 반가운 사람이 온다고 하는데, 하마 오늘은 멀리 간 아들이 오려고 저리도 까치가 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미 시에 다 드러나고 있지만 오늘도 멀리 간 아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까치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를 역설적으로 시인은 까치를 '애물단지'라고 써서 능청을 떨고 있습니다.
날마다 끼니때마다 밥 한 그릇을 묻어두고 아들을 기다리는 할머니, 마당가 벽오동 나무 위에서 울어대는 까치, 그 정경이 눈물이 날 만큼 머리 속에 선연히 그려집니다.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지극한 마음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어떤 어머니는 돌아오는 아들이 집을 못 찾을까봐 50년 넘게 이사도 안갔다는 이야기를 언뜻 어디서 본 것 같습니다.
이 두줄시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엠한 까치의 울음을 애물단지라고 묘사하여 절묘하게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행의 까치가 할머니를 '놀리는'이라고 표현한 것은 너무나 딱 어울리는 언어선택입니다.
할머니는 온 정성을 다하여 아들을 기다리는데, 까치는 그런 할머니를 놀리고 있습니다. 단어 선택이 절묘하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 두줄시의 정경을 잘 들여다 보면 시에는 안 나타나 있지만 할머니의 손주, 즉 아직 돌아오지 않는 할머니의 아들의 아들이 시 바깥에 있습니다. '할매'라고 써서 시인이 곧 손주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어린 시절에 본 한 정경을 여지없이 두줄시로 엮어낸 것입니다. 회사에서 퇴근하면 집에는 아무도 없고 전기밥통에는 며칠째 다 먹지 못해 누렇게 바랜 밥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랫목에 따뜻한 밥을 묻어두던 그 시절로 갈 수만 있다면, 그 아름다운 시절로. 정중수
두줄시 노우트 9 - 창문 열기
어느 문학강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초빙문인의 강좌가 끝나고 청중과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떤 고등학생이 벌떡 일어서더니 질문을 했습니다. "집안에 화분을 들여놓고 나무를 가꾸는 것은 자연보호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 초빙문인의 강좌 내용 중에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말한 대목이 있어서 이 학생은 그런 질문을 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순간 매우 신선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본위로 산이나 들에서 자라야 할 나무들을 화분에 심어 집안에서 기르고 있는데, 나무들 편에서 보면 감옥살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그러자 초빙문인은 "듣고 보니 그렇다. 한번 생각해보고 집에 있는 화분들을 치우든지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신선한 질문에 신선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날의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세계 수목보호협회라도 만들어 집안에 있는 화분 치우기 운동이라도 벌여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집안에 화분을 들여놓고 이런저런 나무들을 기릅니다. 나무들은 작은 화분에 갇혀서 뿌리도 마음대로 뻗지 못하고, 자손 증식도 못하고, 고달픈 나무의 일생을 살아갑니다.
아마 모든 화분들의 나무들은 제 수명대로 살지도 못하고 일생을 마칠 것입니다.그렇긴 하나 향기를 내뿜는 꽃나무들을 집안에서 기르는 재미는 각별하지 않는가요. 꽃을 보고 향기를 맡고, 여름엔 푸른 잎새를 보고, 마치 작은 자연을 집안에 들여놓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좋지 않는가요.
화분 치우기는 어쩌면 철학적인 문제일 수도 있으니 다음에 더 생각해보기로 하고, 다음의 두줄시를 봅니다.
오월 아침 베란다 창문을 열면
바람 타고 달아나는 향기가 보인다
그림자 시인의 '화분' 두줄시이긴 하지만 소품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시인은 이른 아침 두 팔을 치켜들어 길게 하품을 하고는 베란다로 나가 문을 활짝 엽니다. 밤새 화분에서 내뿜은 꽃향기가 집안에 넘실거리고 있다가 문을 열자 창 밖으로 나갑니다.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가 소품이라고 했느냐 하면 둘째행에서 '바람 타고 달아나는 향기가 보인다'고 써서 시각적인 효과를 적절히 구사한 점이 돋보여서였습니다.
가만히 상상을 한 번 해보셔요. 푸르른 오월의 밤에 식구들은 화분에서 풍겨나오는 향기를 들이쉬며 봄잠을 자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시원한 바깥의 푸른 공기를 들여오려고 베란다 문을 열자 집안에 그득한 꽃향기가 눈에 보이듯이 오월의 창 밖으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보면 그냥 단순한 두줄시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좀더 음미할 수 있다면, 꽃나무 화분을 기르고 있는 시인의 집 식구들이 꽃향기를 코로 들이쉬면서 봄잠을 자는 모습까지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창밖은 오월이요, 향기 짙은 집안은 가족들의 단잠이요, 단란한 행복이 넘치는 스위트 홈 같지 않습니까.
시인의 가족들 만나면 꽃향기가 날 것 같습니다. 집집마다에서 베란다 문을 열어 향기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참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지요. 만일 창밖은 겨울이라고 생각해보면 이 두줄시와 같은 장면을 상상할 수는 없겠지요. 오월은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지나갔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월을 하나의 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그 사이에 푸르른 오월이라고, 하나의 계절로 나는 생각합니다. 정중수
두줄시 노우트 10 - 당신에게로 부는 바람
나는 언젠가 사람은 누구나 시인으로 태어난다, 는 투로 말한 일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서너 살된 유년의 아이가 세상만물에 대해서 엉뚱한 질문을 퍼부어대는 통에 부모가 쩔쩔 매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아이들의 마음은 시인의 마음인지라 세상만물에 호기심을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이들의 가슴 속에는 한 가마니의 느낌표(!)와 한 가마니의 물음표(?)가 들어 있는 듯합니다. 물어도 물어도 그침이 없는 질문 공세를 멈추지 않으니까요.
"왜 저 달은 내 뒤만 졸졸 따라 다녀요?" (당신도 어릴 적에 이런 질문을 했든 안했든 가슴 속에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정**, 아빠는 정중수, 형은 정**, 나는 정대인. 그럼 아빠, 해는 정 해, 나무는 정 나무, 맞지요?" (나는 아들녀석의 그런 질문을 받고 문득 깨우침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렇단다. 세상만물은 정 나무, 정 돌, 정 바람, 정 바다, 정 해바라기.... 다 정 자 성을 가지고 있단다. 모든 것이 정 자 성을 가지고 있으니 구태여 정 무엇 하고 부를 필요가 없어. 그래서 정 자를 빼고 부르는 거란 말야. 내가 너를 정대인 하지 않고 대인아, 하고 부르듯이 정 자를 빼고 그냥 해, 달, 산, 꽃 하고 부르는 거란다.
" 그것이 어디 정 자 성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겠습니까. 조, 최, 강, 문, 주, 김, 박......모든 성 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지요. 세상만물은 우리 인간들 각자와 혈연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어린 아들녀석의 질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이 세상의 흙으로 빚어졌다는 성서의 보도는 그런 뜻에서 믿을 만합니다. 시인의 마음을 가진 질문이 아니고서야 어찌 삼라만상의 그런 비밀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감히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시인으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자라나면서, 어른이 되어가면서, 아이들은 하나 하나씩 시인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느낌표와 물음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 사이트에 올라오는 두줄시들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까지 주로 두줄의 행간에 인생에 대한 깊은 의미가 있는 시들을 주목하고, 그런 시들에 대해서 내 나름의 감상을 써왔습니다만 그러느라 꽃잎을 건드리고 가는 실바람 같은 두줄시가 있다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던 듯합니다. 오늘은 이 시 저 시들을 클릭하다가, 시인의 마음을 간직한 어린 아이 같은 해맑은 느낌으로 쓴 두줄시를 봅니다.
창문 틈새로 새어드는 바람아
어디서 와서 이리 감미롭니
현진 시인의 '바람' 천의무봉(기운데 없는 하늘)한 두줄시입니다. 인생의 깊은 철리를 다룬 것도 아니고, 밤잠을 설치는 고뇌를 담은 것도 아니고, 어린 아이 같은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본 가벼운 느낌을 앙징맞게 빚어내고 있습니다. 조부장한 창문 틈으로 실바람이 스며들어옵니다. 그 바람은 어느 집 담장에 피어 있는 장미들을 간질이고 오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풀밭에 가서 풀꽃들을 건드리고 오는 것인지, 달크작한 향을 풍깁니다. 한번 생각해보셔요.
거리에서, 집에서, 산에서, 강에서, 바다에서 당신의 뺨을 스쳐가는 바람, 당신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고 가는 바람은 어느 마을과 산과 꽃과 나무 들을 지나온 바람이라는 것을. 그 바람 속에는 온갖 향기가 묻어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곤충은 그 바람에 코를 부벼보고 십 리 바깥에 있는 짝궁을 찾아간다지 않습니까. 짝궁의 분 냄새를 십리 바깥에서 알아보는 것이지요. 당신에게로 불어가는 바람 속에는 시인의 마음만이 알아볼 수 있는 기쁨이 들어 있습니다.그것을 느낌표로 찾아내는 것이 두줄시입니다. 정중수
두줄시 노우트 11 - 가슴 속의 비밀
두줄시 운동을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선 시형식이 짧은 데다 시를 읽으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해되고, 곧바로 감동을 얻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현대시의 경우 시창작은 시인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어 왔고, 때로는 무슨 내용인지를 잘 모르는 채로 시를 쓰고 감상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시 같은 고급 예술 양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자들도 지적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시의 닌해성이 시인의 책임만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의 내용을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읽어보니 좋은 느낌이 든다,는 정도로 시를 이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서 딱딱한 시론을 전개할 겨를은 없습니다만 나는 윤동주, 백석, 서정주, 유치환, 박용래, 천상병, 신경림(이 외에도 많은 시인들이 있습니다만) 시인들의 시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독자들이 쉽게 공감하고 감동을 얻는 경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두줄시는 아직은 시창작면에서 볼 때 실험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이트를 통해서 확인한 것은 두줄시의 시세계가 현대시 못지 않게 다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의 두줄시를 봅니다.
아무도 볼 수 없어요, 아무도 느낄 수 없어요
그대 가슴 안에서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강승도 시인의 ‘꽃’ 일견 평범한 두줄시입니다. 그러나 잘 음미해보면 사람마다의 가슴 속에 일고 있는 ‘불꽃’을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이 단절, 격절감은 어쩌면 인간존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끝끝내 간직한 절대고독을 노래한 것으로 읽혀집니다.
아니, 이 두줄시를 그렇게 어렵게 감상할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누군가를 연모하고 있는데, 그것을 아무도 모른 채로 내 가슴 속에서 죽을 때까지 타오르고 있다, 이렇게 아무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나 혼자만의 뜨거운 감정’을 노래한 것으로 읽는 편이 더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가슴 속에는 자기만이 아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모르는, ‘불꽃’ ‘열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인간은 저마다 그 불꽃을 피우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선덕여왕을 뜨겁게 사모한 지귀가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자기가 그만 잠든 새 여왕이 지귀의 연모를 안쓰러워하며 그의 가슴 위에 놓아두고 간 반지를 보고 그만 온몸이 훨훨 불타오르고 말았다는 설화처럼 당신의 가슴 속에도 분명 남이 모르는 그런 불꽃이 있을 것입니다. 그 불꽃이 꼭 남녀간의 사랑이라고만 우길 것은 없습니다. 시인은 아무도 볼 수 없고, 아무도 느낄 수 없는, 당신 가슴 속에 타오르고 있는 영원한 불꽃을 노래합니다.
이 두줄시를 읽노라니 정말 내 가슴 속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타오르고 있음을 새삼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 불꽃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까요.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 당신을 사랑하게 하는 열정, 이 모든 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두줄시는 단순하면 단순한 대로 ‘맛’이 있습니다. 정중수
두줄시 노우트 12 – 두줄시와 이미지
시는, 당신도 잘 아시는 말이지만, 언어로 그린 그림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미지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시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는 쪽에 서있습니다만 그렇더라도 표현양식은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로 이미지를 잘 그려내는 시인이 뛰어난 시인입니다. 이 점에서 시는 언어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언어로 평범하게 두줄로 나누어 썼다고 해서 두줄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언어로서 이미지를 잘 그려낼 수 있느냐, 이것은 시인 자신의 언어를 다루는 능력, 기술, 감각, 재능에 의해서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시를 쓸 때 번쩍, 하고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는 이미지를 포착하여 그것을 마치 화두처럼 간직하고 있다가 계속 그 이미지를 가지고 만지작거린 끝에 마침내 한 편의 시를 만들어냅니다. 뭐랄까, 영감을 통해 한 줄의 싯귀를 얻은 다음 그것을 가지고 가지를 뻗고 잎새를 내고, 하여 시를 만든다고 할까요.
요즘 내가 마음 속으로 그리는 두줄시 얘기를 잠깐 하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아직 완성하지는 못한 상태인데, 나는 무지개를 소재로 두줄시를 계속 그려내고 있는 중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무지개를 보고는 “아, 저것은 하느님의 친필 사인이다.”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영감이 떠올랐다고 할까요. 하느님이 천지창조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이제 다 완성하였다”는 뜻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쓱 휘갈겨 쓴 하느님의 친필 사인, 무지개가 바로 그것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 것입니다.
화가들이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그림의 한 귀퉁이에 사인을 남겨놓듯이 말입니다. 두줄시로 거의 다 써놓은 셈인데, 아직도 좀더 궁글려야 할 대목이 있어 밍기적거리고 있습니다.
시를 쓰는 과정의 고민도 사실은 시인에게는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 좋은 표현, 토씨 하나, 호흡과 관련한 운율….이것 저것을 따져가며 시를 쓸 때의 그 고민은 어쩌면 행복한 고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요, 쓰지 않으면 큰일 날 것도 아닌데, 한편의 시를 생각하며 사막 같은 백지 위를 헤매는 그 시간이야말로 행복한 순간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다음 두줄시를 봅니다.
산자락 휘감은 무명필
산을 칭칭 동여 끌고 왔다
가을 시인의 ‘길’ 어떻습니까. 10호짜리 그림 같지 않습니까. 멀리서 산을 보면 꼭 산을 휘감은 산길이 무슨 띠 같은 것으로 산을 칭칭 동여맨 것처럼 보입니다. 시인은 그 장면을 여지없이 언어로 포착하고는 한 술 더 떠서 동여맨 산을 (마을까지) 끌고 왔다,고 쓰고 있습니다. 재미난 발상입니다.
누가 집에 손님으로 왔습니다. 사립문을 열어줍니다. 손님은 말없이 자기가 걸어온 뒤쪽을 가리킵니다. 그 뒤쪽에 산이 따라와 있습니다. 산에는 꼬불꼬불한 산길들이 칭칭 동여매어 있습니다. 그 길들을 시골 사람들이 직접 짜는‘무명필’이라고 시인은 쓰고 있습니다. 아, 산이 가까운 시골로 가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무명필을 저녁이면 천사들이 하늘로 거두어 올라가서 밤마다 깨끗이 빨아(닦아) 새벽이면 도로 지상의 그 자리로 내려놓는다는 얘기는 못들어보셨는지요? 이미지가 강한 시입니다. 정중수
두줄시 노우트 14 --열 걸음 떨어져서 그래서 나는 자연은 인간과 혈연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긴 이런 생각은 나만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가톨릭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 프란치스코는 누이 달, 형제 나무, 아빠 해....모든 자연물을 한 가족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다음의 두줄시를 봅니다. 김엄조 시인의 '나무 그늘에' 불교의 초파일이 있는 달은 보통 5월입니다. 봄이 끝나가고 여름의 징후가 여기저기서 보이는 때입니다. 시인은 지금 풀냄새가 진동하는 숲 그늘에 편한 자세로 드러누워 있습니다. 열 걸음 떨어져서 자연의 품에 안겨 있는 것입니다. 숲 그늘에 누워 있는데 무슨 세상사에 대한 하잘것없는 욕망이 남아 있겠습니까. 그저 대자연의 두 팔에 안겨서 약동하는 계절의 푸르름을 마시며 생명의 전율을 느낄 따름이지요. 첫행은 그 불꽃 같은 대자연의 생명의 약동을 느끼면서 유유자적하고 한가롭게 보내는 인생의 한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러니까 초파일에 숲 그늘에 누워 등꽃이 한 철로 피어나 하늘을 가리우는 현실이라면 현실, 초월이라면 초월의 경지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아니, 숲그늘에 누워 보랏빛 등꽃이 화안히 피어나는 때 시인은 자연과 인간의 경계선에서 두 세계를 다 쥐어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양역에서> 점으로 다가와서 점으로 가는, 열차 인생이여. 기쁨도 슬픔도
* 열차를 기다리노라면 멀리 점으로 머리를 드는 열차는 쉬이 사라져 다시 점으로 사라져 간다. 슬픔도 기쁨도 꿈을 싣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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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민조의 가락들이 민들레처럼,
춤으로 노래로
두줄시 시인협회와 앞으로 함께 글쓰기의 길을 걸어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