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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소시집 시평
‘사랑’의 이해, 말(言)과 마음(心) 사이
전 해 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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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소설 『사랑의 이해』가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사랑에 대한 시각이 달리 조명되고 있다. 인물 간의 구체적인 대립구도와 서사를 얹어 입체적인 극으로 표출된 ‘사랑의 이해’는 상수, 수영, 미경, 종현 등 네 인물을 통해, 사랑이 복잡하고도 추상적인 감정이지만 매우 현실적인 태도를 지닌 관계의 형성임을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드라마에서 반영한 사랑의 유형은 첫째, 완전한 사랑을 여전히 믿으려 하는 상수, 둘째, 끊임없이 사랑을 불신하는 인물인 수영, 셋째,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소유하려는 미경과 넷째, 사랑도 ‘부채’임을 인식하는 종현 등 저마다 욕망하는 사랑의 지점에서 체온이 다른 사랑의 온도를 드러낸다. 이들은 드라마 속 인물이지만 사랑 앞에서 이해(利害)를 따져 묻는 남녀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마침내 이해(理解)하게 되는 이야기를 밀도 있게 그린다.
흡사 드라마처럼, 현실 세계에서의 사랑 또한 과연 어떤 위치와 형태에서 가장 따뜻한 체온을 유지할 수 있을까를 대입해 본다. 이대흠과 이재연의 이번 신작시에는 ‘사랑의 이해’를 가늠해 볼, 차갑고 뜨거운 말의 온도가 왕래하여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두 시인이 ‘이해’하는 ‘사랑’은 분명 사랑을 감각하는 시공간의 차이거나 성별로 분류되는 남녀의 인식 차이만은 아니겠지만, 사랑을 ‘투시’하는 말(言)과 마음(心)의 운용이 두 시인의 사랑에 대한 이해(理解)를 반영하고 있어서 무척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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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시인은 “너의 기분”(이하 「나는 말을 잃어버려서 앵무새를 키워요」에서 인용)을 알아내기 위해 상대의 “말”을 듣고 풀고 반복적으로 재생한다. 말은 사랑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는 수단이지만, 말은 마음을 대신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말이 많은 너와 말을 만들기 위해 입을 다문 나 사이로” 소통은 쉽지 않다. 근본적으로 말은 오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시 「나는 말을 잃어버려서 앵무새를 키워요」는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앵무새”를 등장시킨다. 앵무새는 상대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오해의 여지를 차단한다. 화자는 대응할 적합한 “말”을 잃어버려 “앵무새”를 “너의 기분” 속으로 끌어들인다. “앵무새”는 ‘마음을 대신할 수 없는 말’을 따라 하고 또한 ‘마음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말’을 전하는 상관물로 지시된다. 말과 마음의 간극이 “앵무새”의 존재와 역할로 표출되고 있다.
이외에도 이대흠 시인은 “너의 검색 엔진에 나를 노출 시켜”(이하 「어떻게든 검색」에서 인용) 너에게 들키고 싶은 사랑의 “마음”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사랑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지만 결단코 말로 표현해야만 하는 도리 없는 마음임을 알고 있으며, 이러한 사랑의 관계에서 말 때문에 적잖이 소통과 불통 사이를 헤매도, ‘사랑’은 여전히 삶의 중요한 지향점이기에 놓지 못한다.
랑을 원하고 랑을 쓰고 랑을 먹고 랑을 싼다
랑랑랑랑 그것이 인생
-이대흠, 「랑랑랑랑 그것이 인생」 부분
이대흠 시인은 “랑랑랑랑” “랑을 네 개쯤 듬뿍” 넣어 4랑이 넘치는, 4랑을 위한, “새로운 (사랑의) 말을 만”들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랑이 곧 인생이기 때문이다. 위 시는 이대흠 시인의 사랑에 대한 ‘꺾이지 않는’ 의지와 확신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랑은 체념부터 배워야 하는 지도 모른다. 4랑(사랑)은 “고랑 노랑 도랑 라랑 마랑/ 사랑에서 벼랑까지” 다다라 “(사)랑”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이처럼 점차 불편해지는 사랑마저도 시인은 명랑한 말의 놀이로 넘어보려 한다. 사랑이니까. 4랑이니까, “랑랑랑랑 그것은 인생”이니까, 의미심장한 말의 파편과 흔들리는 마음 사이에서, 불안하게 오가는 ‘우리 시대의 사랑’을, 이대흠 시인은 마음(心)의 자세와 말(言)의 기능으로써 사랑의 의미를 증명해 보이려 한다.
공은 둥글어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보이지만
모두가 공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
사랑도 마찬가지
사랑을 하려 하지 말고 사랑을 잘 해야 한다 병두야
사랑과 놀고 종일 사랑을 생각하고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할까
사랑이 만족할 수 있게 마르고 닳도록 사랑을 사용하면서
-이대흠, 「소문내기 활동을 하면서 해당 업체로부터」 부분
이대흠의 시는 마음(心)의 깊이가 말(言)에서 예각 되어 드러난다. 그것은 말(言)에 마음(心)을 슬쩍 담는, 이대흠 시인만의, 놀라운 시적 기술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말과 마음이 일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 기대지 않고 허투루(말의 유희를 사용하여), 때로는 “앵무새”의 반복적 도돌이표의 말로써, 어려운 사랑의 감정을 노출하면서 사랑의 처음과 끝을 마주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대흠 시인이 위 시에서 “사랑을 하려 하지 말고 사랑을 잘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도 인생을 잘 사는 일이 사랑을 잘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대흠 시인은 사랑을 선전포고하여서라도 종일 “사랑과 놀고 종일 사랑을 생각하고” 오로지 “사랑이 만족할 수 있게 마르고 닳도록 사랑을 사용하면서” 사랑만을 파고든다. 시인은 사랑의 본성을 따르다 보면 인생의 길은 절로 환해질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닐지.
네게 들어가려고 수십 번 시도해도
안 되는 로그인
다시 처음부터 이름 넣고
주민등록번호 넣고 주소 넣고
-중략-
너에게 들키고 싶은 내 마음이 있어
네가 하늘이라고 치면 내 얼굴이 떠오르고
네가 치킨이라고 쳐도 내 이름이 떠오르는
그런 검색 엔진을 선물하고 싶어
-이대흠, 「어떻게든 검색」 부분
이대흠 시인은 “로그인”의 의미를 로그아웃과 대비되는 것 즉 ‘생명성(生命性)’에 둔다. “로그인”은 ‘사랑’을 시작하는 정확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생명’의 부여 즉, 존재의 의미를 사랑(로그인이라는 접속)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름을 넣고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입력한 후 마우스를 당겨 로그인을 실행하면, 사랑은 “검색 엔진”에 의해 나의 존재를 너를 향한 생명으로 인식하여 언제든 너에게로 다가갈 준비가 되었다는 내 마음을 대신한다. 로그인의 반대말이 ‘로그아웃’이란 점을 상기해보자. 말의 파편이 행위가 되어,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마음의 표현으로 ‘커서’는 바로 ‘로그인’을 움직인다.
그러나 시인이 흠모하는 자들은 사랑했으나 평생 가질 수는 없는 사람들이다. 끝내 말(言)은 사랑의 마음(心)을 온전히 대신하지 못한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心)은 말(言)이 필요하다. 다만, 자괴감, 시기심, 모욕과 같은 말들을 통해 사랑을 하려 하지 말고 “사랑을 들키고 싶은” “마음”으로, “사랑을 (자주) 사용하면서”, “사랑을 잘” 해야 한다. 어떻게 사랑을 ‘잘’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사랑은 재능이 필요한가? 아니다. 이대흠의 시는 말(言)로, 사랑을, 우선, 제대로 시작하라고 충고한다. 사랑은 종종, 말이 필요하고, 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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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연 시인은 사랑의 후면(後面)에서 “회환, 적막, 고요, 신비, 아쉬움, 따뜻함, 궁핍”(이하 「시작노트」 참조)의 정서들로 사랑을 비워내는 데에 보다 힘을 쓴다. 이재연 시인에게 사랑은 “소리없이 무너지고 아프고 막막했던 시간”으로 기억되며, “한 사람의 삶을 옮기듯” 가없는 감정에 머무른, 혹은 ‘잃어버린 사랑의 대상’과 현재에도 아스라하게 연결되어있는 ‘결핍’의 사랑을 주목한다.
이재연 시인은 부재한 사랑의 감정을 애써 감춘다. 그리하여 사랑의 환희보다는 뒤안길에서 막막한 감정을 내려놓고, 사랑의 “아쉬움”과 “궁핍”을 체감하면서, 소싯적 “아이”(이하 「신과 아이」에서 인용)의 “빨간 열매를 꺾던” 숲의 “신”을 불러본다. 그것은 사랑의 기도와 연결된 자기 주문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들리지 않았던 하늘의 목소리”에 아득한 “회환”과 “적막”의 감정을 전이하는 것으로 남은 결핍을 분사한다. 이재현의 시는 ‘이미 놓친 말’과 ‘변질된 마음’ 사이에서 꿈틀 되는 사랑의 변화(회한)를 직시한다.
⓵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세상을 발견하고 풍요로워진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단념하게 하라
-이재연, 「사랑의 책」 부분
⓶
낮에는 돌 위에 돌을 놓았습니다
지나간 사람이 놓은 돌 위에
또 다시 지나간 사람이 되어 돌을 놓았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나타나는 창가의 밤에서
난독이 잉태하는 것을 어느 비문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당신은 천 명 중에 한 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만 명 중에 두 사람이 되었습니다
돌 위에 돌을 놓고 지나갑니다
-이재연, 「밤하늘에 너를 놓고 지나갑니다」 부분
이재연의 시는 쓸모없거나, 현실에 유용하지 않은 비루한 것들을 불러내, “지나간 사람이 놓은 돌 위에” “다시 지나간 사람이 되어 돌을 놓”듯 사물의 마음에 마음을 옮겨 싣는다. 말은 필요하지 않다. 어떤 기원(祈願)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그저 돌 위에 돌을 얹는 쓸모없는 행위일지라도, “세상을 발견”하고 “세상을 단념”하는 일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단념이 기도가 될 때, “밤하늘에 너를 놓고 지나가”는 일은 가능해진다. 그저 “숲”의 “나무”를 옮기듯 그것이 새건, 코끼리 인형이건, “숲의 윤곽을 가져오는” “어둠”의 일부라면, 사랑의 작은 몸짓도 시인은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재연의 시에서 “돌”은 쓸모없는 사물이 아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돌 위에 돌을 놓고 지나가는 일을 반복하면서 그들의 인연이 돌탑을 쌓아 비로소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적막”이 될 지라도 적막은 신비가 된 이후에 더 이상 읽히지 않는 “난독을 잉태하는” “비문”을 추앙하지 않을 것이다. 도무지 읽히지 않는 마음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이재연의 시는 그 마음을 좇는다.
이재연의 신작시 가운데 ‘신비’와 ‘고요’의 정서가 깃든 작품이 위 시 「사랑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이재연 시인은 “세상을 발견하고 풍요로워진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단념하게 하라”는 도마복음 110절을 인용하여 어둠이 신의 일부로 생겨난 ‘세상의 조각’임을 신의 목소리를 빌려 인정하려 한다.
아직 다 자라지 않는 겨울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적막과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흰 눈길까지도
다 어린 기도였던 그때
어머니는 불길을 다독이는 아궁이 앞에 있었고
신은 빨간 열매를 꺾던
그 숲에 있었다
-이재연, 「신과 아이」 부분
완전하지 않은 세상을 발견하고, 풍요로워진 사람은 과연 있을까. 그는 누구일까. 「신과 아이」는 아궁이 앞에서 불을 지피는 어머니의 사랑을 불러들인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이 사랑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 할지라도,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겨울나무 가지” 같은 “어린 기도”를 가진 아이가 기도로 신과 연결된다면, 아이는 신의 기도 속으로 들어가 “불길을 다독이는” 어머니의 아궁이 앞에 무릎을 조아리고 사랑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숲의 나무 중 단 하나의 나무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어린 기도를 떠올리는 시, 이재연의 시는 밤하늘에 던진 사랑의 책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사랑의 기도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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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신작시에 반영된 이대흠과 이재연의 ‘사랑의 이해’가 드라마보다 웅숭깊은 것은 사랑에 대한 마음이 ‘설정(設定)’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말의 저변에 포석을 둔 시인의 진짜 사랑 체험이 진솔한 마음으로 그들의 시에서 전달되고 있다. 고백의 방식이 아니더라도, 시는 인간애가 깃든다. 시와 사랑은 어쩌면 일생에서 가장 놀랍도록 흥미진진한 ‘판타지’가 아닐까. 인생에서 사랑을 뺀다면 가슴 아픈 이별도 없을 것이고, 이별이 없다면 눈물도 사라질 테니, 한낱 그리움은 결코 존재하지않을 것 아닌가. 그러나 열 번의 이별을 맞닥뜨려도 우리는 또, 사랑을 한다. 시인은 다시, 시를 든다.
다만, 환각을 한 숟가락 보탠 잔혹한 판타지가 내 사랑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랑랑랑랑 인생”이 “랑”이 네 개인 ‘사랑’이라 노래하는 이대흠의 위트도 일순간 현실에서는 블랙 유머가 되고, “떠날 테면 떠나라” 작별하는 이재연 시인의 다짐도 온전히 남은 “나” 하나뿐인 ‘적막’에 다다르면 막막한 허공을 응시한다. 그러니, 사랑아 너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온 생애를 바치는구나. 그러므로, 사랑아 말(言)과 마음(心) 사이 너에게로 향하는 것을 끝내 막지는 못하는구나.
사랑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랑은 말과 마음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대흠과 이재연의 시를 덮는다. 그래도 여전히 사랑이 흐른다.
전해수
2005년 《문학선》 평론 등단. 평론집으로 『목어와 낙타』, 『비평의 시그널』, 『메타모포시스 시학』, 『푸자의 언어』가 있음. 현재 상명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