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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ARTIST
하철경
Ha, Chul-Kyung
2006. 3. 29-4. 5
상 갤러리
전통과 현대, 필묵의 해방과 개별화된 산수
- 임농 하철경전에 부쳐 -
김상철 / 공평아트센터 관장
전통적인 동양회화에 있어서 산수는 종주(宗主)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에 있어서도 여전히 그러한가 하는 물음에는 선뜻 긍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재료의 개방에 따른 표현 영역의 확장과 소재의 다양화로 대변되는 현대 한국화에 있어서는 산수는 오히려 쇠락한 양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적인 관념 산수가 지나치게 교조적인 형식 답습의 경직성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종언을 고하고 이를 대신한 실경 산수라는 개념이 대두 된지도 이미 일정기간이 경과하였다.
실경 산수의 조형적 경험은 분명 산수화에 새로운 생명력을 수혈해 주었지만 산수를 예전과 같은 요지부동의 자리에 안착시키기에는 역부족임이 여실하다. 사실 이러한 산수의 쇠락은 단지 산수라는 단일한 화목(畵目)의 침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심미관과 조형 체계, 그리고 감상 방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화에 굳이 현대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에 대한 가름이자 구분이라 할 것이다.
임농(林濃) 하철경(河喆鏡)의 작업은 바로 산수화가 감내하였던 영광과 쇠락의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할 것이며, 이러한 역정을 통하여 이른바 전통과 현대라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그만의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임농의 작업은 운림산방(雲林山房)의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만약 전통산수의 일정한 맥이 운림산방을 통하여 계승되어 온 것이라 한다면 적어도 그의 작업은 이러한 적통의 계승성을 지니는 것이다.
이는 임농의 작업이 지니고 있는 커다란 자부심일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 근대를 아우르며 동양회화의 대표적인 영역으로 군림하던 남종 산수가 생명력 없는 형식의 재연과 산수 자체에 대한 교조적이고 경직된 이해로 말미암아 오늘의 피폐화된 현실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의 작업은 이 문제를 여하히 해결하며 오늘을 포용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책임 있는 답을 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제식 학습의 엄격한 훈련과정을 통하여 전통적인 남화의 기초를 익힌 그의 작업들은 이른바 현대적 교육 과정을 거쳐 입문한 여타의 작가들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다른 이들이 현대적 조형 감각을 익힐 때 그는 지필묵에 대한 혹독한 훈련을 통하여 재료에 대한 장악력을 확보하였다. 이는 그의 작업을 규정짓는 특징적인 요소인 동시에 현대라는 새로운 상황을 해석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다. 운필의 완급을 조절하고 먹색의 농담을 구분하며 화면을 구축해 나아가는 작업 방식은 그의 작업을 관류하고 있는 일관된 방식이다. 파괴적인 실험과 분방한 소재 표현이 난무하였던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그는 오로지 이러한 지필묵의 세계를 고수하였을 뿐이다. 이는 지필묵에 대한 확실한 장악력이라는 학습기의 성과와 그 표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반영된 것이라 여겨진다. 적지 않은 이들이 새변신하며 새로운 것을 추종할 때 그가 보여준 우둔할 정도의 고집스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현대라는 가치에 부응하기 위하여 다투어 러운 행보는 분명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의미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남종 산수의 전통을 작업의 근간으로 삼았기에 그의 작업에는 여전히 그 기운들이 오롯하다. 맑고 담백한 묵운(墨韻) 속에서 어우러지는 산수의 세계는 서정적인 시취(詩趣)가 가득하다. 특히 오랜 세월의 묵은 흔적들이 내려앉은 고가(古家)가 등장하는 소슬한 화면은 그의 이러한 작품 세계를 상징하는 특징적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작업들이 비록 부분적으로 양식화된 표현 방식을 원용하는 경우가 엿보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표현과 현장감이 두드러지는 것들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과 주관적인 표현 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관념 산수의 그것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며, 오히려 실경 산수의 표현 방식과 근사한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산수 작업은 남종 산수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이를 실경에 대한 관찰과 표현 과정을 통해 개별화한 것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전통에 대한 집중적이고 깊이 있는 학습은 작가에게 숙련된 운필의 기능과 더불어 조형에 대한 자신감을 확보해 주었다. 임농의 작업은 예외 없이 빠르고 거침없는 속필들로 이루어져 있다. 성긴 듯 덤덤하게 찍어가는 운필의 흔적들에는 머뭇거리거나 주저함이 없다. 그럼으로 빼어나게 세련되거나 정교하고 정치한 것이라기보다는 둔탁하고 얽매이지 않은 분방함이 두드러진다. 마치 붓을 던지듯이 툭 툭 찍어 내려가는 듯한 그의 운필에는 필봉(筆鋒)의 날카롭고 섬세함은 별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마치 몽당 붓(禿筆)을 사용한 듯 둔탁하고 둔중하다. 현악기의 섬세한 떨림 대신 타악기의 둔탁한 울림을 택한 것이다. 이미 재료와 표현에 대한 자신만의 확고한 장악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를 숨기고 드러내지 않음은 하나의 덕목이다. 빼어나고(秀) 공교로워지기(巧) 마련인 기능적 숙련을 오히려 졸박(拙朴)한 것으로 안착시킴은 그의 관심이 이미 표면적인 표현에 머물고 있지 않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흔히 준법(?法)을 산수의 영혼이라 말하지만, 그의 작업에는 두드러진 준법의 운용이나 구사가 별반 두드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수묵을 여러 번 덧칠하여 이루어지는 텁텁하고 투박한 수묵의 깊이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경향은 작가가 실경 작업에 매진한 이후 더욱 두드러진다. 실경에 대한 관심과 추구는 지난 시절 일정 기간을 풍미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통 산수에 대한 반성과 자구의 일환으로 제기된 산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 시도이다. 임농의 작업은 바로 전통과 현대, 관념과 실경이라는 산수화의 가치가 대립하고 충돌하는 민감한 경계에 자리하는 것이었다.
작가는 비록 남종 산수에 대한 학습을 통하여 화업에 입문하였지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가치의 수용을 통하여 그만의 독특한 해석 방식으로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필묵의 해방이다. 예의 던지듯 무심하게 찍어 내리는 붓끝에서 굳이 중봉(中鋒)의 전통적 심미와 가치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상을 취하고 이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그의 작업은 남종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로지 대상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교감과 호흡에 그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임농의 빠르고 거침없는 속필은 단지 기능적 숙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관점과 표현 방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근자에 들어 더욱 그 속도를 빠 르게 하고 있다. 특정한 법칙이나 원칙을 고수하기 보다는 대상에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적극적인 작업 의지는 급기야 운필의 기능적 운용은 물론 사물의 형상 표현을 넘어서 오로지 기운과 운율로 개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럼으로 임농의 필묵은 더욱 자유로운 여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전통과 현대라는 시공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확보된 공간은 전통의 그것처럼 경직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현대라는 이름의 무책임한 경박함과도 다른 것이다. 이는 전통과 현대라는 민감한 경계에서 작가가 드러내는 무개실린 답변일 것이다.
韓國精神의 根幹을 이룬 山水景 지켜온
最後의 堡壘
김남수 / 미술평론가
예술인에게 있어서 창작행위는 예술인이 생존하기 위한 대전제요, 독자적인 자가언어를 갖는다는 것은 필수적인 예술가의 덕목이기도 하다. 이를 좀더 상술하면 화가가 가진 자기언어는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그만의 캐릭터요,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매너리즘이나 아류, 이령비령(耳鈴鼻鈴)한 것은 예술작품의 반열에 낄 수 없음을 의미한다.
화가 하철경은 우리 화단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표적인 산수화가다. 이른바 하철경만의 극명한 캐릭터로 완성을 한 화가라는 뜻이다. 오늘이 있기까지 30년의 긴 세월 동안 작가는 자기만의 산수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처음 남농 허건 화백의 사숙에 입문하여 산수화와 문인화를 근 10년 동안 연찬했고, 다시 현대미술을 집중적으로 천착하기 위해 만학으로 미술대학에 들어가 한국화를 전공했다.
그는 현대미술이론의 깊이를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세종대학 대학원에 진학, 이론과 실기를 겸전한 우리 화단의 엘리트로 부상했다. 그사이 그는 공모전 등 실기에서 자기역량을 다지는 등 명실공히 최다수상작가로 각광을 받았다.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연 4회의 특선과 연 6회의 입선, 무등미술대전에서 특선, 우수상, 대상, 전남도전에서 특선 및 종합대상 등 무려 30여회의 큰상을 수상했고, 미술대전을 비롯한 각급 공모전에서 30여회의 심사위원을 지냈다.
그는 오늘까지 31회의 개인 발표전을 가졌고, 지난 97년에는 파리 몽마르트 실브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같은 해 주불 한국문화원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지난 2003년에는 뉴욕의 퀸즈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2002년과 2003년 동경도미술관에서 주일 한국대사관의 초청전을, 동경 긴자(銀座) 스기노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갖는 등 실로 그룹전을 포함하여 수십회의 해외전을 갖고 있다.
그는 미술계의 제도개혁과 구질서의 청산 등 한국미술의 숙원사업을 성취하기 위한 지방출신의 화가요, 교수로서 제20대 미술협회 이사장에 출마하여 당선의 영광을 차지했다. 미협사상 초유로 지방미술인들 까지도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이번 집행부는 2만여 회원의 권익신장과 미협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게 됐다.
河喆鏡의 作品世界
산수경은 우리의 생활환경이요, 우리가 낳고 자란 본향이다. 조선시대부터 우리의 선배화가들은 산수화를 즐겨 그려왔다. 작가 하철경도 어림잡아 30년은 산수화를 그려 왔을 것이다. 처음 스승에게 도제식 사승을 할 때는 채본으로 그려 받거나 사숙에서 관렴 산수화 등을 익혔다. 그후 현장을 탐방하여 사생위주의 실경화를 그렸고, 다시 예술성을 탐색하는 등 외연을 수단으로 한 정신주의 추구 등 작가의 내재률이 농축된 또 다른 자연을 화폭에 탄생시켰다. 현장에서 한국화가 화폭 위에 스케치와 설채 등 직접 채색을 가하는 등 작품을 현장에서 완성했던 것도 작가가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렇듯 끊임없는 실험과 변주 등 완만하고 점진적인 변화를 시도하면서 오늘의 위치에 까지 끌어올린 것이 임농 하철경의 산수화다. 솔직히 말해 그에게 회화양식의 영향을 주었던 스승이나 선배화가들은 남농 허건, 도촌 신영복, 전정 박항환, 일초 이철주 등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철경의 작품세계는 스승이나 선배작가들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자성을 표출해 내고 있다
한마디로 창작행위에서 자기만의 사투리를 만들어낸 성공한 화가가 바로 임농 하철경이가 아닌가!
한편 갈필법과 파필법 등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등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운필의 세(勢) 등에서 기운생동한 맛을 만끽하는 것은 작가의 오랜 숙련된 기교와 정신주의가 만들어낸 성과가 아닌가 싶다. 그의 화면의 경영위치 등 여백과 공간의 비백처리 등은 마치 동양의 사유의 철학을 연상케 할만큼 달관해 있다. 서양예술이 물상이나 피사체가 주요 묘사시점이라고 한다면 동양화는 여백과 중용의 사상이 예술의 주제로 등장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만큼 그의 예술은 한 차원 높은 수준에 가 있다는 뜻이다. 그가 사생현장에서 완성한 실경들은 하나 같이 단순한 재현으로 완성한 것들은 없다. 표현질의 진수나 진경화법을 통한 작가의 정신세계가 투영된 또 다른 자연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작가의 나이 50대초반에 이르러 작품세계는 원숙의 경지에 이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얼핏보면 돛단배나 점중인물 등이 등장하는 것은 사의(寫意)와 형상의 이미지가 만들어낸 것이 남화사상이요, 동양화는 사진처럼 리얼한 묘사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작가는 예술성의 창출에
훨씬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 아닌한국정신의 가 싶다.
결론으로 이야기하면 임농 하철경은 산수경을 근간으로 한 자연을 그리는 한국화가다. 그가 추구하는 주제와 정신주의는 한국성의 발현에 있고 우리의 것이 세계의 예술양식 속에 접목되고 공존하는, 그래서 한국미술이 세계질서 속에 합류하는 그 날을 희구하고 염원하는 집념의 화가다. 그의 예술의 중심사상은 동양의 인본주의, 인간주의의 실현에 있고, 예술을 통하여 인간이 완성되는 미래지향적인 예술관을 가지고 있는 화가다.
임농 하철경은 1953년 전남 진도에서 출생했다. 목포대학과 세종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지냈다. 그는 한국예총예술문화상 그리고 전라남도문화상, 남농예술문화상, 목포시민의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전남예총 회장, 한국예총 부회장, 남도예술회관장, 호남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자연, 그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세계
- 林農 河喆鏡의 작품전에 부쳐 -
신현식 / 미술평론가
세속에의 눈길을 접고 잠시 고개를 돌리면 문득 평온한 고향마을이 펼쳐진다. 욕심어린 일상을 벗어던지고 마음의 문을 살포시 열면 곧바로 순진무구의 세상이 열린다. 불현듯 눈앞의 풍경 속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걸어 나와 무상(無常)하면서도 영원한 삶의 진리를 고즈넉이 설파할 것만 같은 세계가 엄숙하게 다가온다.
임농 하철경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숙연하게 느껴지는 감동들이다. 과연 내가 자연의 이처럼 진솔한 모습을 발견하기 위하여 일찍이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마음을 쏟아본 적이 있었던가? 자연은 우리가 그것에 관심과 정을 쏟은 분량만큼 그만큼 정직하게 자신의 아름다움과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법이 아니던가? 문득 자신을 향한 책망과 깨달음이 뒤따라온다.
임농의 산수화가 주는 이러한 진한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는 지난 30여 년간 자연의 순수함과 자연이 지닌 생명력을 붓의 언어로 그려내기 위해 천착해 온 작가이다. 그에게 자연은 단순히 예술적 묘사의 대상이기 이전에 더없이 친근한 벗이다. 그는 감히 자연을 분석하려거나 자연과 대결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친한 벗들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자연과 공존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그것과 묵묵히 하나 되려 한다.
하여, 그의 작품들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순수함과 진솔함이 한결같이 배어나며, 따라서 그의 화폭들을 대하게 되면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경망스러운 생각이나 자연은 인간이 정복하고 지배해도 좋을 대상이라는 가당치 않은 생각은 한순간에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또 다른 한편으로, 임농에게 자연은 언제까지나 숭모(崇慕)하고 따라야 할 참된 스승이다. 그의 산수화들에는 그가 자연으로부터 익힌 평범하면서도 지고(至高)한 가르침들, 즉 생명의 근원과 만물의 본질, 빛과 색의 눈부신 조화, 그리고 변화의 놀라운 이치 등이 올곧게 배어있다. 겨울을 인내하고 봄을 기다려 생명을 틔워내는 지순한 싹들, 늠름하되 결코 거만하지 않은 어진 나무들, 굽이굽이 첩경을 헤치며 잠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지혜로운 물줄기들, 게다가 철따라 시각따라 형태와 색깔을 바꾸는 변화무쌍한 잎들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그에게 탄생이 있으면 소멸이 있고, 곧음과 부드러움은 동일한 대상의 서로 다른 속성이며, 생명의 본질은 곧 변화라는 평범하고도 값진 가르침들을 베풀어왔다.
이와 같이 벗이자 스승인 자연을 임농은 가히 구도자의 자세로 대한다. 그에게 자연은 단순히 묘사의 대상이기 이전에 인간의 생명이 출발한 근원이며 종국에는 돌아가야 할 종착점이다.
그는 자연과의 동화(同化) 또는 자연에의 귀의(歸依)를 꿈꾼다. 그는 자연과 하나 되는 일이 곧 인간의 영혼을 정화(淨化)하는 최고의 수단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삶을 영원으로 승화(昇華)시키는 구원의 몸짓임을 굳게 믿는다. 이러한 임농에게 “덕이란 자연을 사랑함이며, 지혜란 자연을 이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옛말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했던가? 그러고 보니 그는 어느새 화법(畵法)으로나 성품(性品)으로나 자연을 넉넉하게 닮아있다.
임농이 오랜 기간 동안 자연을 왜곡이나 과장 없이 단순하고 진솔하게 그려온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구도자적 마음가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 근대 화단의 관념적 산수에서 벗어나 주변의 실경을 직접 사생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화폭에 담아왔다. 그의 주요 활동무대였던 호남지역은 조선후기 김정희의 남종화법의 영향을 받은 소치(小癡) 허련과 그 이후 미산(米山) 허형, 남농(南農) 허건으로 이어져온 남도 특유의 정신적 분위기가 팽배한 곳이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오랫동안 남농에게서 사사한 임농은 한국의 산수를 정밀하고 섬세하게 재현하려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탄탄한 사실묘사와 정교한 화면의 포치법(布置法)을 체득할 수 있었다.
임농의 화풍은 1990년대 중반 무렵 상당한 변화를 보인다. 이전 작품의 주류였던 사실적인 정밀한 표현에서 점차 그 무게중심을 자신만의 화법을 통한 사의적(寫意的) 표현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는 스승 남농의 남종화법을 현대적 어휘로 발전시켜 자연에 대한 숙연함과 평화로운 정신을 새로이 구현하는 일에 자신의 화운(畵運)을 걸었다.
그리하여, 남농으로부터 호방한 운필(運筆)과 거침없는 용필(用筆)을 체득한 그는 이후에 도촌(稻邨) 신영복, 전정(田丁) 박항환, 일초(逸初) 이철주 등에게 사사하며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하여 나갔다. 한편으로 스승들이 걸어온 독특한 작품세계를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화법을 개척하기 위해 분투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임농은 근대 한국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함으로써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나가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근년의 임농의 화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문기(文氣)어린 수묵정신이다. 그는 다양한 선염(渲染)을 토대로 묵을 거침없이 구사하는 등 이전과는 달리 표현적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하는 사의적(寫意的) 표현을 추구하고 있다. 작품들의 시점은 하나같이 감상자 시선에 맞추어 낮게 설정되어 있으며 마치 수채화처럼 친숙하고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먹의 농담에 자유와 대담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으며, 거침없는 용필은 감상자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에 더하여 그는 수묵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절제된 채색의 안배를 가미함으로써 채색의 자유스러움까지 획득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대담하게 사용되는 파묵(破墨)이나, 농묵(濃墨)과 담묵(淡墨)의 구성진 조화, 적절한 여백의 안배, 긴장감 도는 감필묘(減筆描) 등 표현방식에 있어서 가히 자신만의 완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금번에 또다시 전시회를 갖는 임농의 작품들은 다시 한 번 자연에의 변함없는, 그러면서도 색다른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임농으로 하여금 오늘도 자연을 향한 찬미에의 지칠 줄 모르는 붓을 들게 하는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연에 대한 신앙과도 같은 그의 열정이다. 구도자로서의 그에게 작품에의 열정은 한갓 권리나 취미가 아닌 의무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변함없이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가? 그것은 자연을 닮은 그의 성실함이 빚어낸 임농의 재능이다. 붓을 들어 자연을 화폭에 옮기는 일에 늘 조바심을 내되 결코 서두르지 않는 그는, 그렇다고 자신의 화법을 갈고 닦는 일에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열정과 재능, 이 값진 두 가지 요소를 함께 지닌 화가는 오늘날 흔치 않다.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는 한편, 새로운 변화를 부단히 모색해 나가려는 임농에게 이 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큰 재산임에 틀림없으리라. 필자가 임농의 다음 작품전들을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의 이러한 열정과 재능이 빚어낼 또 다른 결실들이 우리 화단을 더욱 풍요롭고 성숙하게 만들어 나가리라는 굳은 믿음 때문이다.
COVER ARTIST
Ha, Chul-Kyung
2005. 3.16 ~ 3. 25 갤러리 상(전관)
임농 하철경은 산수경을 근간으로 한 자연을 그리는 한국화가다. 그가 추구하는 주제와 정신주의는 한국성의 발현에 있고 우리의 것이 세계의 예술양식 속에 접목되고 공존하는, 그래서 한국미술이 세계질서 속에 합류하는 그 날을 희구하고 염원하는 집념의 화가다. 그의 예술의 중심사상은 동양의 인본주의, 인간주의의 실현에 있고, 예술을 통하여 인간이 완성되는 미래지향적인 예술관을 가지고 있는 화가다.
獨自的인 自記言語 만들어 낸 畵壇의 重鎭
김남수 / 미술평론가
예술인에게 있어서 창작행위는 예술인이 생존하기 위한 대전제요, 독자적인 자가언어를 갖는다는 것은 필수적인 예술가의 덕목이기도 하다. 이를 좀더 상술하면 화가가 가진 자기언어는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그만의 캐릭터요,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매너리즘이나 아류, 이령비령(耳鈴鼻鈴)한 것은 예술작품의 반열에 낄 수 없음을 의미한다.
화가 하철경은 우리 화단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표적인 산수화가다. 이른바 하철경만의 극명한 캐릭터로 완성을 한 화가라는 뜻이다. 오늘이 있기까지 30년의 긴 세월 동안 작가는 자기만의 산수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처음 남농 허건 화백의 사숙에 입문하여 산수화와 문인화를 근 10년 동안 연찬했고, 다시 현대미술을 집중적으로 천착하기 위해 만학으로 목포대학에 들어가 한국화를 연구했다. 그는 현대미술이론의 깊이를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세종대학 대학원에 진학, 이론과 실기를 겸전한 우리 화단의 엘리트로 부상했다. 그사이 그는 공모전 등 실기에서 자기역량을 다지는 등 명실공히 최다수상작가로 각광을 받았다.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연 4회의 특선과 연 6회의 입선, 무등미술대전에서 특선, 우수상, 대상, 전남도전에서 특선 및 종합대상 등 무려 30여회의 큰상을 수상했고, 미술대전을 비롯한 각급 공모전에서 30여회의 심사위원을 지냈다.
그는 오늘까지 31회의 개인 발표전을 가졌고, 지난 97년에는 파리 몽마르트 실브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같은 해 주불 한국문화원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지난해(2003)에는 뉴욕의 퀸즈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2002년과 2003년 동경도미술관에서 주일 한국대사관의 초청전을, 동경 긴자(銀座) 스기노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갖는 등 실로 그룹전을 포함하여 수십회의 해외전을 갖고 있다. 그는 미술계의 제도개혁과 구질서의 청산 등 한국미술의 숙원사업을 성취하기 위한 지방출신의 화가요, 교수로서 제20대 미술협회 이사장에 출마하여 당선의 영광을 차지했다. 미협사상 초유로 지방미술인들 까지도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이번 집행부는 2만여 회원의 권익신장과 미협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게 됐다.
河喆鏡의 作品世界
산수경은 우리의 생활환경이요, 우리가 낳고 자란 본향이다. 조선시대부터 우리의 선배화가들은 산수화를 즐겨 그려왔다. 작가 하철경도 어림잡아 30년은 산수화를 그려 왔을 것이다. 처음 스승에게 도제식 사승을 할 때는 채본으로 그려 받거나 사숙에서 관렴 산수화 등을 익혔다. 그후 현장을 탐방하여 사생위주의 실경화를 그렸고, 다시 예술성을 탐색하는 등 외연을 수단으로 한 정신주의 추구 등 작가의 내재률이 농축된 또 다른 자연을 화폭에 탄생시켰다
현장에서 한국화가 화폭 위에 스케치와 설채 등 직접 채색을 칠하는 등 작품을 완성했던 것도 작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렇듯 끊임없는 실험과 변주 등 완만하고 점진적인 변화를 시도하면서 오늘의 위치에 끌어올린 것이 임농 하철경의 산수화다. 솔직히 말해 그에게 회화양식의 영향을 주었던 스승이나 선배화가들은 남농 허건, 도촌 신영복, 전정 박항환, 일초 이철주 등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철경의 작품세계는 스승이나 선배작가들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자성을 표출해 내고 있다. 한마디로 창작행위에서 자기만의 사투리를 만들어낸 성공한 화가가 바로 임농 하철경이가 아닌가. 한편 갈필법과 파필법 등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등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운필의 세(勢) 등에서 기운생동한 맛을 만끽하는 것은 작가의 오랜 숙련된 기교와 정신주의가 만들어낸 성과가 아닌가 싶다.그의 화면의 경영위치 등 여백과 공간의 비백처리 등은 마치 동양의 사유의 철학을 연상케 할만큼 달관해 있다. 서양예술이 물상이나 피사체가 주요 묘사시점이라고 한다면 동양화는 여백과 중용의 사상이 예술의 주제로 등장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만큼 그의 예술은 한 차원 높은 수준에 가 있다는 뜻이다. 그가 사생현장에서 완성한 실경들은 하나 같이 단순한 재현으로 완성한 것들은 없다. 표현질의 진수나 진경화법을 통한 작가의 정신세계가 투영된 또 다른 자연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작가의 나이 50대초반에 이르러 작품세계는 원숙의 경지에 이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얼핏보면 돛단배나 점중인물 등이 등장하는 것은 사의(寫意)와 형상의 이미지가 만들어낸 것이 남화사상이요, 동양화는 사진처럼 리얼한 묘사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작가는 예술성의 창출에 훨씬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 아닌가 싶다.
결론으로 이야기하면 임농 하철경은 산수경을 근간으로 한 자연을 그리는 한국화가다. 그가 추구하는 주제와 정신주의는 한국성의 발현에 있고 우리의 것이 세계의 예술양식 속에 접목되고 공존하는, 그래서 한국미술이 세계질서 속에 합류하는 그 날을 희구하고 염원하는 집념의 화가다. 그의 예술의 중심사상은 동양의 인본주의, 인간주의의 실현에 있고, 예술을 통하여 인간이 완성되는 미래지향적인 예술관을 가지고 있는 화가다.
임농 하철경은 1953년 전남 진도에서 출생했다. 목포대학과 세종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지냈다. 그는 한국예총예술문화상 그리고 전라남도문화상, 남농예술문화상, 목포시민의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전남예총 회장, 한국예총 부회장, 남도예술회관장, 호남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河喆鏡의 自然 讚美
- 한국의 현대 산수화를 ‘한국성’이라는 집념 하나로 일구다.
장준석 / 미술평론가
필자는 지금 머릿속에 한 장의 그림처럼 남아있는 임농(林農) 하철경(河喆鏡) 선생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본다. 15년 전쯤에 필자는 대학원을 갓 졸업하고 전라도 광주에 있는 호남대학교로 강의를 나가게 되었으므로 학기 초에 교수 연구실마다 인사를 하러 다녔다. 임농선생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였던 필자는 ‘하철경’이라는 교수 명패가 붙어있는 연구실 앞에서 호흡을 조절하였다.
학생 신분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긴장감과 조심스 러움으로 노크를 했으나 아마도 소리가 작았던 것 같다. 잠시 기다려도 아무 인기척이 없어서 혹시 하는 마음으로 손잡이를 돌렸는데, 문틈 사이로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듯한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그림을 바닥에 깔아놓고 미동도 없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임농선생은 필자의 머릿속에 외유내강형의 의지를 지닌 강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전라도 어느 지방대의 교수였던 林農은 그로부터 정확하게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많은 개인전을 치렀고, 또한 한국미협의 수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 동안 간헐적으로 길거리에서나 화랑가에서 우연히 임농을 뵌 경우는 있었지만 그 때마다 그저 부드러운 인사 정도가 전부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의 첫 만남을 제외한다면 그 동안 임농에 대한 기억은 항상 밝게 웃는 모습으로 점철된다. 그런 임농에 대해 글을 쓸 기회가 필자에게 있다는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왜냐하면 필자는 임농과의 짧은 첫 만남을 통해서도 그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비록 여러 번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혼자만의 작업 공간 속의 임농의 모습에서 그의 인간적인 기질과 그림에 대한 진지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林農의 진면목
예술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길 바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화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소망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화가들은 이 꿈들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림을 그려 화가로서 성공한다는 것은 생각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여느 직업과는 달라서, 기존의 화가들이 정년퇴임이나 은퇴를 해서 그 빈 자리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기에 명문대학을 졸업하고도 화가라는 명함도 제대로 내보지 못하고 도태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게 우리 한국 화단의 현실이다.
여기에 비하면 화가 河喆鏡은 우리화단에서 눈에 띠게 성공한 화가라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한국의 산수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는 어찌 보면 한국 미술에서 가장 어렵고도 중심이 되는 주요한 소재라고도 하겠다. 지금까지 한국의 회화를 살펴볼 때 주목할만한 사실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걸쭉한 화가들의 대부분이 산수화가이거나, 그 시대의 모습을 담은 인물화 혹은 종교를 소재로 한 그림 등을 그렸다는 점이다. 이는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요즘의 추세이기도 하다. 특히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산수 자연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는 산수 자연을 통해서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인간생활의 비밀을 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산수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은 표현하기가 쉽지 않고 작가적 역량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화가들이 산수를 그리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수를 제대로 그리는 화가는 중국이든 우리나라든 항상 어느 시대에서나 매우 적었다. 그래서 그림을 평할 때 산수 그림을 으뜸으로 쳐주었으며 화론에서도 산수를 가장 많이 언급하여왔다. 이처럼 화가로서 성공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한국 화단에서 화가 林農 河喆鏡이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로 성공하게 된 것은 산수 그림을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그려온 까닭일 것이다.
林農이 산수화에 더욱 많은 관심을 지니게 된 것은 남농 허건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여기서 문인화의 기본을 익히게 되었는데,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그림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임농은 자신에게 그림을 가르쳐준 스승들이 남농 선생과 도촌 신용복, 전정 박항환, 일초 이철주 선생 등이라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의 많은 작가들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남다른 면이기도 하다. 서구 미술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오늘의 대다수 화가들은 실험적이다 못해 도전적이며 극단적이기도 하다. 화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나 이미지에 손상이 갈 것 같으면, 자신들의 스승까지도 부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게 오늘의 현실이다.
林農은 역량 있는 화가로 성장한 지금에도, 한때 자신에게 많은 영 향을 준 스승들을 겸손하게 예우하고 있다. 이는 임농이 테크닉에만일가견이 있는 단순한 그림쟁이가 아닌, 진정으로 속 깊은 겸손한 화가임을 말해준다. 그는 마음이 겸손한 화가이기에 스승들의 화풍에서 자신이 영향 받은 장점만을 생각하고 그분들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林農은 선배 대가들의 그림에서도 좋은 그림을 배우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남들이 유행에 뒤졌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전통산수화를 새로운 현대적 이미지로 탈바꿈시킨 몇 안 되는 역량 있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林農이 스승들의 그림의 그늘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남달리 많은 시간에 걸쳐서 그림의 기본을 배웠고,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자신만의 그림이 서서히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40대 중반 이전까지는 여러 선생님들의 장점만을 충분히 연구하였는데, 이 장점들은 오늘날 그의 그림을 더욱 탄탄하게 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사람들은 누가 어떤 선생의 무릎 제자라고 하면 제자가 스승보다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林農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많은 그림을 그렸고 타고난 예술적 감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노력을 한 화가이다. 그가 스승들의 문하에서 배운 것은 그림을 그리는 방법과 화가로서의 기본을 배운 것으로서, 이미 그림의 형식에 있어서나 예술 정신에 있어서 그 스승들의 정신을 본받고 있다. 그의 서른 번이 넘는 전시가 이를 잘 말해준다. 더구나 그의 작업은 아무렇게나 그릴 수 있는 추상의 작업이 아니다. 또한 거의 비슷한 형식으로 그리는 관념 산수도 아니다. 서양화처럼 실재의 산수 자연을 보고 그 산수의 외관만을 그리는 작업도 아닌, 산수 자연의 본질을 현대적 이미지로 화폭에 옮기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모아 무려 30여회 이상 전시회를 하였다. 그는 그림에 대한 역량뿐만 아니라 인덕을 갖춘 인간미가 있는 화가이다. 많은 사람들이 혹시 스승의 그늘에 의해 가려지지나 않을까 불안해하여 누구의 제자라는 말을 주저하는 요즈음 세태에서 임농은 자신 있게 누구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고 말한다.
타고난 예술적 감각과 천혜의 환경
전라도 진도의 13대 어느 종갓집에서 태어난 임농은 어려서부터 상당히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면서도 안으로는 의지력이 강한 아이였다. 게다가 林農은 어려서부터 해양 풍광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뛰어난 진도에서 생활하였는데, 이러한 환경과 타고난 인성이 오늘의 임농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어린 시절 진도에서의 생활은 오늘날의 임농의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소일거리로 바느질을 하는 어머니의 옆에서 그림을 그리며 놀기도 하고 만화책을 보면서 그림을 그려보는 등 그의 일상생활은 노상 그림을 그리는 일로 점철되어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낙으로 삼고 하루하루를 보낸 임농은 주변의 앞뒤 동산의 천혜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몸소 피부로 느끼고 마음으로 체득하는 등 그림에 대한 소양을 기르는 남다른 어린 시절을 경험하였다. 그가 오늘날 한국의 산수 자연을 보다 한국적인 감성에 맞게 그릴 수 있는 힘도 여기서부터 발원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는 전통 산수의 틀에서 벗어난 남다른 시각에서, 한국의 자연 특히 남도의 자연 경관을 그만의 감성을 지닌 순수한 자연의 모습이자 독창적인 화풍으로 그려왔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서 남다른 전문성이나 해박한 미술적 이론을 이끌어 내려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대중적인 그림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다가가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林農의 이와 같은 마음은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자연스러운 ‘대중을 향한 美的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임농은 많은 사람들에게, 한 발짝 더 그림을 이해하고 그림을 사랑하게 되는 계기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순수하고 여린 마음은 남도의 풍광을 즐겨 그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더욱 깊이 충만하게 되었고, 임농만의 산수 그림으로 더욱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林農의 서정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성품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며, 이러한 면은 그의 작업 세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임농이 열여덟, 열아홉에 그린 연필 소묘들은 상당히 정적이면서도 깊은 맛을 지니고 있다. 이 그림들은 서양식의 날카로운 선묘의 구사로 이루어진 기교 위주의 그림이라기보다는 기교가 없는 듯하면서도 은근한 깊이감을 주는 그림들이다. 이 몇 장의 소묘들은 그림을 그릴 당시의 나이에 비해 상당히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주는데, 그가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바탕을 단단하게 갖출 수 있었던 것은 감각적으로 타고난 성품과 자신의 고향 진도의 천혜의 환경이나 유복한 가정환경 등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林農의 예술관
그림을 대하는 진지함은 실제로 자신의 그림을 창작하는 일련의 행보 속에서도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임농이 그려온 그림들을 살펴보면, 거의 일관되게 산수를 소재로 하여 그려진 것들이다. 이는 곧 林農 자신의 작업세계에 대한 진지함을 대변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는 항상 자신의 그림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해온 작가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그의 진지함은 그 동안의 30여 차례가 넘는 개인전 속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의 개인전은 1979년 이래 거의 매년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전개되어 왔다. 이 하나만 봐도 임농의 그림에 대한 애정과 올곧은 예술적 심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한국의 전통 산수화가 새로운 산수화로 거듭나도록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임농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일이지도 모른다. 그만큼 임농은 그림에 대한 방향이나 방법 혹은 이론적 틀에 대해 관심을 갖기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그림에 대해 뜨거운 정열을 불사르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색과 마음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그림을 그린다. 어쩌면 임농은 그림을 통해 삶의 이치를 깨닫고 또 그림을 통해 우주 조화의 비밀을 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는 91년도에 자신의 그림세계에 대해 “나는 늘 붓을 들 때마다 그림이란 무엇인가, 또 어떻게 그려야 하고 어떤 방법론과 형식을 수반시키며 절충시킬 것인가? 등등 고민과 번뇌 속에 다시금 붓을 놓곤 한다.…….
때로는 관광을 즐기고 호화 유람선보다는 퀴퀴한 갯냄새와, 술렁이고 분주한 포구의 이른 아침의 다정다감한 정경이라든가, 또는 정박해 있는 포구의 어선들의 정중동의 풍경 속에 나 또한 몰입되어 함께 대화를 나누노라면 그리고자 하는 세계는 나와 함께 자연 동화된다. 늘 지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살아가는 일상이지만 오늘도 나는 창작이라는 과제와 삶의 여정을 함께 화필로 대신한다.” 라고 독백 식으로 말하였다.
그의 이 글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임농은 그림에 대해 애절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삶의 철학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추구하였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임농의 그림에 대한 철학은 단순히 당시의 일시적인 언변으로 끝나버린 게 아니고 이후 지속적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원인자가 되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그림을 통한 林農의 절절한 고민과 번뇌는 단순히 그림에만 국한되지 않고 자신의 삶 전체에 깊은 영향을 주어왔다. 그에게 있어 만약 그림이 없었다면, 그는 그 어떠한 세상에 대한 진리도 철리도 지금처럼 심도 있게 맛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그림은 곧 임농에게 있어 자신의 분신일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세상이고 또 하나의 진리인 것이다. 임농은 그림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작업 가운데서 삶의 철학과 섭리를 터득하였다.
林農이 지금까지 추구한 영역은 여느 화가가 추구한 미술의 장르보다도 중요하고 스케일이 있는 부분이다. 한국화에서 이보다 더 무게가 있고 중요한 회화적 장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자연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는 산수화는 우리 한국의 전통의 뿌리를 이어오는 한국 미술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최근 한국화에서 추상 작업을 전개하는 작가들이 간혹 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한국화나 동양화는 그림에 형태가 들어가 있다 해도 예술적 사상으로는 서양의 추상성을 담고 있다. 그만큼 한국화나 동양화에는 서양의 회화와는 달리 깊은 예술적 정신이 담겨있다.
林農의 산수 그림은 서양 미학의 관점으로 보자면 구상이기도 하고 추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대상의 외양만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내적으로는 기운생동(氣韻生動)함이 흐른다. 서양 미술에서 이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외면당하는 추상 미술을 흉내 낸 듯한 느낌을 주는 한국화 혹은 동양화에서의 추상은 우리 전통 미술의 높은 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초래된 것이다. 林農은 자신의 그림을 생동(生動)함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비록 자신의 그림이기는 하지만 솔직하면서도 정확하게 꼬집은 말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산수 그림에서 제대로 된 훌륭한 그림에는 기운생동(氣韻生動)함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구상적인 작업이지만 구상이 전부가 아닌, 가장 격(格)이 있는 기운 생동함이 흐르는 것이다. 그 밖의 다른 어떠한 소재나 장르도 이처럼 기운 생동함을 담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당말(唐末) 이후 산수그림을 으뜸으로 생각하였고 기운 생동함이 그 원천이 될 수 있었다. 기운(氣韻)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기(氣)는 양(陽)의 기이고 운(韻)은 음(陰)의 기로서 이 두 가지는 모두 기(氣)를 의미한다. 이러한 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추상성을 담은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것은 서구의 형상성의 미학에 사로잡힌 사고일 뿐이다.
그가 지금까지 추구해 온 산수 그림은 한국의 현대적인 기운을 가장 이상적으로 담고 있다. 林農의 산수 그림은 오늘날 한국의 산과 물의 모습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오늘의 한국의 삶이 배어있고 오늘의 기운 생동함이 담겨있다. 林農은 “그림이란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이라 말한다. 이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이란 각각의 시대마다 사람들의 정서와 관심이 욕구에 맞게 변화하듯이 미적 정서도 변화한다는 의미로서, 똑같은 산수화라도 조선시대의 산수화와 오늘날의 현대 산수 그림이 다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담겨있는 기운 생동함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는 현장에 뛰어드는 작업을 통해서 살아있는 기운 생동함을 산과 물 등 자연 경관을 통해 투시해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林農 河喆鏡의 그림은 그만의 독창적인 시각에서 오늘을 표현한 현대적 산수 그림이 되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자신만의 시각에서 우러나오는 기운 생동함이 녹아있다. 그는 현대적 시각에서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림을 사랑하는 혜안을 지닌 진정한 한국의 현대 작가라 하겠다. 그래서 임농이 그림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목적은 한국의 전통 회화의 현대화 작업이며, 그는 먹으로 빚어낸 한국의 산수화가 세계적인 미술 양식으로 발전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열심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미술이 비록 열악하지만 세계 미술에서 하나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기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林農의 作品世界
林農은 여백을 남겨놓는 것이 아니라 여백을 그리는 화가라 할 수 있다. 여백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임농이 ‘자유함’을 얻는 수준 높은 그림을 그린다는 하나의 반증이기도 하다.
그가 산수 그림을 그릴 때는 주로 현장에서의 감각적이면서도 감흥적인 측면을 중시하는데, 화면의 대상에 집중하여 그리기에는 시간적인 제약이 만만치 않을 터인데, 대상을 그리는 것에 중심을 두지 않고 여백의 흐름을 보고 그린다는 것은 그만큼 그림에 대한 수련 기간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그것도 실내에서 그림의 상황을 보아가면서 동시에 여백에 신경을 써가면서 그리는 것이 아닌, 현장에서 즉흥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표출해내는 것은 임농이 그만큼 앞으로도 더욱 성장할 가능성을 지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방법은 독창적이며 기법적인 면에서도 한국적인 산수를 창출해 내기 위해 주목할만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그는 이처럼 ‘여백을 그림’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을 보다 감성적이고 감흥적으로, 완연하고 완숙하게 내적으로 표출하여 과거의 준법이나 전통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먹을 주로 사용하여 그 이미지를 독창적으로 창출해낸 것이다. 이러한 면은 아마도 林農이 여러 선생의 문하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터득하고 훈련받은 고도의 테크닉을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철경 HA, CHUL-KYUNG
현재
•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호남대 예술대 교수, 전남예총 회장, 한국예총 부회장
주요약력
* 국립목포대학교 미술학과졸업 세종대 대학원 미술학과졸업
* 대한만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1996, 2000)
*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역임(2004)
* 대한민국미술대전 연 4회 특선(1988-1992)
* 한국예총 예술문화상 대상수상(미술부문)
* 전남도문화상 수상(예술부문)
* 남농예술문화상 수상
* 목포시민의 상 수상(교육, 문화부문)
* 전국무등미술대전 대상수상
* 전남도전 종합대상 수상(문공부장관상)
* 프랑스주재한국문화원, 일본주재한국문화원, 뉴욕 퀸스미술관, 일본,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독일 등 초대 개인전 5회
* 국내·외 초대그룹전 500여회
*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초대전 (조달청)
* 2002 당대 한·중 대표작가 연합전(세종문화회관)
* 2002 Korean Arts Festival(예술의 전당)
*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 이사 역임
* 무등미술대전, 한국화대전, 광주시전, 전남도전, 전북도전, 제주도전, 대구시전, 울산시전, 단원미술대전,
나혜석미술대전, 인천시전, 신라미술대전 등 초대, 운영, 심사위원 역임
* 현:한국미협 이사장, 호남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한국예총 부회장, 전남예총 회장, 남도예술회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