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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慧月의 天眞性과 內面化
인간의 일생이란 살아있는 사람만이 그 삶을 증언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이란 끝없는 움직임인 동시에 죽음의 문을 향해 가는 행각이다. 사실 이 행각은 숙명적이라 해도 좋고 운명적이라 해도 타당할만큼 정해져있다.
그러나 행각의 종점은 임종으로 인해 확인된다. 이때 남는것은 1. 有餘한 삶의 허실이다.
한 사람의 전기란 것은 살고 간 사람의 삶의 행적을 추적하는 일이다. 이때 작가란 전기의 주체적 인물과 만남이다. 그러나 그 주체적인 인물과 일체화되어 다시 삶을 개화하여 행각을 시작해야 한다.
나는 혜월선사와 행각을 같이 하면서 그가 이룩한 삶에 동화할 수 없었고 悟道的 체험을 통해 창조해 놓은 2. 無礙(무애) 공간에 머물 수 없었다. 그는 분명히 내 의식의 추적된 밖에 존재하고 있었고 친밀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지닐 직관의 부정확이었고 정신 투망의 어긋남 때문이었다.
그의 삶은 一超直入如來地의 정신과 그 삶을 조금씩 조금씩 사랑하면서 천진만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破天眞이 된 내 자신의 분화의 일신으로는 慧月의 삶에 안주할 수 없었다. 다만 인간이 지닐 천진의 열정이 문득 문득 충격을 가해 때로는 그 천진을 붙들고 있다가 삶의 공간을 놓치고 때로는 無碍의 무중력에 시선을 두다가 옷깃마저 놓쳐 버리고 말았다.
慧月의 천진은 성서와 같았다. 아흔 아홉 가지의 거짓이 한 가지 진실을 극복하지 못하듯이 그가 지닌 천진은 우리의 거짓을 깨우치는 활력으로 오고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天眞道人
[자네 어데서 왔지?]
[전라도 송광사에서 왔습니다.]
[전라도 부처는 요즈음 時節因緣이 어떻든가?]
[行往坐臥가 여일합니다.]
[자네는 이곳에 어찌 왔는고?]
[참선할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時節因緣을 볼려고 왔습니다.]
[참선해서 뭣 할려고?]
[그거야 부처될려고 그러지요.]
[참선은 앉아서 하는가 서서 하는가?]
[앉아서 합니다.]
[그놈의 부처는 다리 병신인 모양이지 않아서만 있어.]
[좌선을 앉아서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앉아 있는 것이지 부처되는 작업은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먹물 옷 입고 시주밥 먹으면서 그것도 몰라?]
[그래서 스님에게 문안드리지 않습니까?]
혜월은 자기를 찾아온 수행자에게 가슴을 찔러 대는 질문을 퍼붓고는
[점심 공양이나 하게 나는 시장에나 갔다 와야겠네.]
이때 스님은 달성군 파계사 성전에 계실 때였다.
열 두어살 되는 동승 하나를 데리고 적막의 공간에서 세상의 거짓을 엿보고 있었다.
이때 동승은 혜월에게 유일한 道伴이었고 사부였다. 그는 도승이 지닌 천진을 실험하면서 일체심을 도모하였다.
혜월이 시장으로 갈려고 절 문밖을 나서려 할 때 방안에서 아이고 곡소리가 들려왔다. 혜월은 다시 방문 앞으로 다가서서
[큰 스님 저 시장에 다녀오겠습니다. 객스님하고 재밌게 노십시요]
[아니 내 점심은 안주고 너 혼자 가려고?]
동승과 혜월의 대화 사이에는 격차가 없었다. 그것은 친밀한 도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우정 같았다. 그러니 객승은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승의 무례가 분노를 몰아오고 있었다.
혜월은 동승에게 깍듯이 인사를 드리고 가벼운 발길로 문밖을 나섰다. 오히려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때 동승은 무료한 듯 방문을 열었다. 그에게도 문득 고독이 찾아든 것이다. 가슴속에 차지하고 있던 혜월이 그에게는 母情과 父情이었기 때문에 혜월이 없는 시간이 어린 가슴을 때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진속에 있는 고독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어디서 온 객중인데 건방지게 앉아만 있는고. 우리 스님은 아침 저녁 나에게 문안을 올리는데 너는 인사도 할 줄 모르느냐?]
객스님은 하도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속에서 불덩어리 같은 분노가 치밀었지만 남의 절에 와서 그것도 동승과 싸운다는 것이 쑥스러워 참고 말았다.
본래적 位相에서 볼 때 천진은 그대로 佛로 파악된다. 그리고 깨친 사람에게는 눈앞에 서있는 山河도 법신으로 파악 되듯이 동승이 지닌 천진은 世와 悟의 공간 사이에 있는 것 같았다.
분노를 속으로 가라 앉게 한 후 그는 동승을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왜 부르지?]
말끝을 흐리며 들어서는 동승을 보고 그는
[너 이놈! 어데서 그렇게 무례한 짓만 배웠는고. 당장에 옷을 벗겨 절 밖으로 추방할 것이다.]
참았던 분노를 동승의 면전에 폭발하고 말았다.
처음 당한 힘의 우위의 폭력이었다.
[저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요]
구슬같은 눈물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이리 앉아라.]
자리에 앉는 동승은 앉는 법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오늘부터 내가 가르치는 대로 하여라.]
[네]
[스님이 어데 갔다 오시면 스님 다녀오십니까. 인사를 해야 하고 앉을 때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방으로 돌아가거라.]
동승은 천진에서 헤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천진을 파괴하는 행위인지 그는 모르고 있었다.
저녁 늦게사 혜월이 시장에서 돌아왔다 . 절문을 들어서면서 큰스님! 큰스님 ! 동승을 부르고 있었다.
풀이 죽은 채 동승은 깊은 적막을 갖고
[스님이제 다녀오십니까.]
하고 울음을 토할 것 같은 목소리로 절을 하였다.
동승에게서 처음으로 오염된 인간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별 일이다. 저놈이 인사를 하다니. 아무것도 모르는 저 아이가 인사하는 예법을 갖추었으니 오늘은 객스님이 가르쳐 준 모양이군. 생각을 하면서 저녁을 들었다.
혜월은 객스님을 불렀다.
[스님께서 동승에게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하도 무례해서 예법을 가르쳤습니다.]
얼굴에 약간의 노기와 失意를 띈 혜월은
[스님! 저가 예법을 몰라서 저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았겠습니까? 천진 그 모습이 하도 좋아 때묻지 않게 가꾸고 있는데 스님이 그 천진을 깨뜨렸습니다. 이제 저하고 인연이 다 했습니다. 스님께서 데리고 가십시요.]
객스님을 따라 나서는 동승을 본 혜월은 [큰스님 공부 잘 하십시요.]
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 흔들림 속에 혜월의 아픔이 떨리고 있었다.
객승의 뒤를 따르는 동승의 모습이 혜월의 가슴을 메이게 하였다. 인간의 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법은 아니다. 살아가다 보면 재산은 생기는 법이지만 정은 재산처럼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놈의 중이 破天眞을 하다니 또 하나 부처를 버렸군 속으로 가슴을 치는 動情을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이렇게 천진한 생활을 어느 사문보다 거침없이 한분이 혜월선사이다.
出生과 出家
스님의 생애는 無所有와 천진만으로 결산할 수 있다. 그래서 혜월에게는 번득이는 지혜보다 순진무구한 정이 있었고 자비로 뭇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조 25대 哲宗 12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하여 덕숭산 정혜사에서 11세 때 득도하고 24세 때 경허스님에게 普照法語를 배우다가 내면 깊숙히 존재하고 있는 본래 천진을 확인하고 경허의 제자가 되었다.
자신이 지닌 천진을 내면에서 체험하고 부터는 중국 白丈스님의 생활규범인 一日不作 一日不食 의 정신패턴을 하루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당시 삼대 결승하면 가는 곳마다 불모지를 개간하는 慧月과 사원을 중수하는 만공과 譯經과 포교를 일삼던 백용성이 항상 끼었다. 그가 61세때 1922년 부산 부암동 선암사에서 계실 때 손수 이천평을 개간한 일은 혜원의 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대표적 예인데 얼마 안가서 마을 사람들의 유혹에 의해 그 논을 팔고만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혜월의 천진함을 이용한 것이다. 밤마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속셈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래 얼마를 줄려고?]
[시세대로 드리겠습니다.]
혜월은 마을사람들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주막으로 따라가 술과 고기가 차려진 술상 앞에서 논 계약을 하고 말았다.
저녁 늦게야 논값을 가지고 제자들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혜월은 욕망에 가득찬 제자들의 얼굴빛을 살피면서 논판 경위를 설명하였다.
[스님. 그 돈은 두마지기 값밖에 되지 않습니다.]
무서운 힐난과 질타가 혜월의 면전에 와 닿았다. 그는 혼을 빼앗기고 온 사람처럼 묵묵히 앉아 있다가 제자들을 설득하였다.
[이놈들아! 논 세마지기는 그대로 있고 여기 두마지기 값이 있으니 다섯마지기가 아니냐? 장사를 이처럼 해야지.]
혜월의 천진스럽고 바보스런 말을 듣고 제자들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혜월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놈들아! 어쩌면 속에서 탐심이 꽉찬 놈들하고 같으냐. 사문은 욕심이 없어야햐ㅐ]
[스님 그러나 손해가 너무 많습니다.]
[허허, 원래 인간의 마음속에는 더할 것도 덜 한 것도 없나이다.]
제자들은 허탈한 기분으로 각기 제방으로 돌아갔다. 혜월의 무소유의 우주적 안목은 읽지 못하고 손해 보았다는 피해의식만 마음속에 가득하였다.
우리는 스님의 천진스런 이 일화를 통해 오늘의 사문들의 생활을 견주어 볼 수 있다. 정각을 목적하여 수행하는 사문이 생활으로 수도장에서 정각 이념을 망각하고 어떻게 하면 신도들을 유혹하여 윤택한 생활을 할수있을까 고민만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사문들의 수행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을 통해 보면 그 족적 속에는 자비와 지혜가 없는 반면 부정 축재 마냥 재산만이 허탈하게 남아 있음을 볼 때가 많다. 사실 오늘의 불교권 속에는 사람이 그리운 시대다. 우리들의 어두운 가슴을 밝히는 사람이 한없이 그리운 시대다.
신라의 원효처럼 훌륭한 사문만 출현한다면 얄팍한 수단을 쓰지 않고 부처를 팔지 않더라도 퇴락된 사원은 중수될 것이고 인재부재의 불교적 풍토는 개선될 것이다.
불타는 우리를 향해 [비구]라고 말씀하셨다. [비구]란 산스크리트의 원어로서 乞士란 내용을 갖고 있다. 외적으로 재물을 갖고 있지 않으니 밥을 벌고 안으로 자기 확인을 위해 법을 벌자고 비구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사문은 얻어먹는 선비이다.
얻어먹어야 할 선비가 재물을 탐하면 속인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하여 원효는 [慳貪於物(간탐어물)은 시마권속(是魔眷屬]이라고 하였다.
물건을 탐하는 사문은 마군의 권속이란 말이다.
자기의 내면적 체험과 우주적 체험을 통해서 보면 우주법계가 그대로 법당이고 사문의 재산 아님이 없다. 혜월은 이러한 우주 의식에서 자기 실현을 철저히 실행한 사문이다.
放生(방생)
방생이란 말은 죽어가는 생명을 자비심으로 구제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인간에 한해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삼라만상까지 뜻하고 있다. 유명한 철학자이고 의사인 슈바이처는 눈앞에 존재해 있는 一草一木의 생명까지 생명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면서 살았다. 불교에서도 살생을 금하고 있다. 살생을 하면 마음속에 자비의 종자가 소멸된다고 불타는 경전에서 누차 강조하였다.
자비와 지혜는 종교인의 생명이다. 이 자비와 지혜가 없는 종교인의 생명이다. 이 자비와 지혜가 없는 종교인은 죽은 종교인과 마찬가지이다. 혜월은 방생을 누구보다 철저히 실천한 종교인이다. 그는 죽어가는 생명앞에서 자기 존재의 무상을 배우고 아픔을 자각하였다.
그가 지니고 있는 생명의 경외심은 슈바이처만큼 못지 않았다.
혜월이 선암사에 계실 때이다. 그는 밤마다 살두지를 방문하는 쥐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일이 있었다.
사실 쥐란 놈은 밤만 되면 천정 아니면 쌀두지에서 쉴사이 없이 물건을 축내는 짐승이다. 맛있는 음식을 잘 간수 하지 않으면 주인 보다 먼저 잠깐 실례하는 얌체 짐승이다. 그러나 불교적 견지에서 보면 그것은 업력에 따라 [쥐]라는 껍질을 쓰게 된 것일뿐, [쥐]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靈識(영식)은 참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識作用(식작용)과 흡사한 점이 많다.
혜월은 이러한 짐승에게까지 자비를 회사하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께서 아침 불공할 때 쓸려고 시장에 가서 밤을 두되 사다 뒷마당 움막속에 넣어 두었다. 그런데 밤중이 되자 쥐란 놈들이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신바람이 나있었다. 잠을 자다 쥐들의 찍찍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스님들이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까지 먹고 있구나, 이놈들 혼좀 나봐라, 속으로 생각을 하다가 움막속에 고양이를 집어 넣고 말았다. 고양이를 움막속에 넣고 온 스님은 마음속에서 불안한 생각이 일어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고양이에게 피투성이가 될 쥐를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고 마음이 아팠다.
혜월은 자리에 일어나 움막속에 넣은 고양이를 다시 끄집어 내고 말았다. 아침이 되어 혹시 하는 마음으로 움막속에 가 본 스님은 없어져야 할 밤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피씩 웃고 말았다. 그만이 알 수 있는 생명의 경외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요즘같이 살생을 일삼는 현대인에겐 공감이 가지 않는 일이다. 그는 이렇게 삼라만상, 그리고 동물에까지 자기와 일체화를 위해 정진하였다. 또 한번은 그가 양산 내원사에서 住錫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주지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소를 팔아가지고 대중들에게 포식을 시켰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소를 먹었으니 밭에 나가 일할 걱정은 없어졌다고 하였다. 외출다녀온 주지는 소를 찾았다. 그러나 혜월에 의해 없어진 소가 있을 리 없었다. 대중은 공범자가 되어 함구무언이었다. 그때 한사문이 혜월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다. 주지는 혜월의 방앞에서 스님하고 불렀다. 아무 기척이 없었다. 또 한번 스님하고 물었다. 그때서야 방안에서 음메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주지는 아연실색하였다. 혜월이 옷을 벗고 음메, 송아지 울음을 횽내내며 소 걸음을 걷고 있었다. 일체를 소유하고 일체를 버린 자에게 아무것도 걸림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何處來 何處去
인간에게는 죽음을 거부할 만한 힘이 없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종말이고 영원한 허무이다. 종말에 이 허무를 잉태하기 위해 인간은 산다.
[何處來 何處去], 어데서 왔다가 어데로 가는지, 인간은 생 이전의 곳도 모르고 또 사이후의 곳도 모른다.
佛陀는 이생을 한 조각 뜬 구름이요 죽음 이것도 한 조각 구름이 쓰러짐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때로 죽음의 현장을 목격할 때가 있다. 수없이 非命橫死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도 언젠가 그 함정에 묻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종교인은 사후 미래를 가르치고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직접 화장막에 가서 한번 보라. 한시간이면 육체가 재가 되어 나오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재를 산과강에 뿌리고나면 한 인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가. 이렇게 무로 환원한상태에서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주장하고 미래를 주장할 것인가. 참으로 허망한 일이다. 그래서 孔子의 제자 안연은 스승인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생사문제를 물은 일이 있었다.
[스승님 죽고나면 어떻게 됩니까?]
[내 아직 생의 본질을 모르는데 생의 후를 어떻게 알겠는가.]
살아도 삶의 주체적 의미를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이야기이다.
1939년 어느날 慧月은 제자 雲峰을 불렀다.
[이제 가야겠다.]
[한말씀 하시고 가셔야지요.]
一體有爲法 (일체유위법)
本無眞實相 (본무진실상)
於相義無相 (어상의무상)
卽名爲見性 (즉명위견성)
일체 변하는 법은
본래 그 실체가 없다
모양이란 원래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알라.
바로 이것이 견성이다.
그는 雲峰에게 전하는 傳法偈를 들려주고는 눈을 감고 단식에 들어 갔다. 한 생애 동안 속으로 쌓았던 일체 것을 밖으로 토해 내는 작업을 한 것이다. 마음은 텅 비었다. 텅빈 마음속에는 전쟁의 자기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수정빛 처럼 밝아진 하늘에 죽고난 후 자기 실상도 떠올랐다. 慧月은 기진 맥진한 육체를 이끌고 부산 범일동 안양암 뒷산으로 오르고 있었다.
산과 들 하늘에서 자기의 임종을 슬퍼하고 있었다.
인간은 죽을 때 이렇게 진한 슬픔을 동반한다.
산에서 들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혜월은 듣고 있었다.
한 수레가 어느 종점에 닿은 것이다. 일체의 것을 토해 버린 수레, 수레만 텅비어 있는 것이다.
스님의 눈에는 늙은 육체가 수레로 보인 것이다. 이제는 이 수레도 버려야 한다. 버려진 수레는 한줌 흙으로 변하고 스님의 진실한 면목만 남는다. 한 생애를 산다는 것 하얀 종이에 여러가지 물감을 칠하듯 우리의 마음 우리의 육체는 숱한 괴로움과 슬픔으로 물들여져 있다. 자신이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오색 무지개가 빛일런지 모른다. 이 무지개빛을 약수건으로 짜 본다면 외롭다는 말 한마디만 남을 것이다. 혜월은 솔가지를 잡고 썼다. 속에서 현기증이 일어나고 있었다.
남들처럼 유언도 남기지 않은 채 솔가지를 잡고 무아의 고향으로 스스로 돌아갔다. 그 천진스런 무애와 자비는 다 죽어도 별빛처럼 우리 가슴을 밝힌다. 어디로 가셨을가? 우리와 인연한 그 밝은 별은 어디로 가셨을까? 그는 솔가지를 잡은채 坐脫立亡의 열반을 한 것이다. 숱한 고승이 많은 法語를 남겼지만 오직 그 많은 법어도 死句를 면치 못한다 하면서 일체와 더불어 이해를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혜월에게는 死句인 선시 같은 것이 없다.
주(註) ① 유여(有餘) : 아직 끝까지 궁구하지 못하였다는 말
② 무애(無碍) : 장애가 없다는 뜻 모든 바깥 경계에 장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것
③ 방생(放生) : 다른 이가 잡은 물고기 새 짐승 등의 산 것을 사서 산에나 못에 놓아 살려주는 것
④ 전법게(傳法偈) : 깊은 법을 스승이 제자에게 전해주기 위해 쓰인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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