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47. 800년 된 시조묘(始祖墓)와 원모재(遠慕齋), 하빈 이씨(제74호. 2026.3.3)
송은석(대구향교장의·대구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달성군 하빈면사무소에서 칠곡군 신동 방면으로 국도를 1.7km쯤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두 개를 볼 수 있다. ‘하빈이씨 시조 문정공 묘소, 원모재’, ‘무등2리 낫골마을’. 표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800m 정도 들어가면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무등(武等) 2리’인데, 다른 말로 ‘낫골·낙골’ 또는 ‘겸동(鎌洞)’이라 불리는 마을이다. 이 마을 초입 왼쪽에 큰 재실이 하나 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하빈 이씨 재실 ‘원모재(遠慕齋)’다.
하빈 이씨 시조, 하빈군(河濱君) 이거(李琚)
원모재는 하빈 이씨 시조 문정공(文貞公) 이거(李琚)를 추모하는 재실이다. 인근에는 역사가 무려 800년이나 된 이거의 묘소도 있다. 이거는 자가 ‘거옥(居玉)’, 시호는 ‘문정’으로 고려 때 인물이다. 그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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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0년 정중부에 의해 무신의 난이 일어났다. 무신정권에 의해 의종은 폐위되고 명종이 왕위를 이었다. 1174년 병부 상서 겸 서경 유수로 있던 조위총이 난을 일으켰다. 고려 의종을 폐위한 무신정권의 수장 정중부·이의방 등을 제거하기 위한 난이었다. 당시 낭장의 신분으로 이 난에 가담한 이거는 중요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화주성의 성문을 내부에서 열어 조위총 군대가 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이로써 조위총의 반란군은 한 때 맹위를 떨칠 수 있었다. 하지만 2년 뒤인 1176년 6월, 조위총의 반란군은 무신정권에 의해 진압됐다. 세월이 흐른 뒤 이거는 조위총의 난 때 왕실에 대한 충을 인정받아 예부 상서에 이르고 하빈군에 봉군됐다. 이런 내력으로 이거의 후손들은 하빈을 본관으로 삼고, 그를 하빈 이씨 시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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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의 시호 문정(文貞)은 ‘널리 배워 이로움에 통했으며, 마음을 오로지 하여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빈 이씨 중시조, 이우당(二憂堂) 이경(李瓊)
중시조는 시조 이후 가문을 크게 중흥시킨 훌륭한 선조를 말한다. 하빈 이씨 종중 14개 파에서 공히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내세우는 중시조가 있다. 바로 이우당 이경(1337-?)이다. 그는 이거의 손자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나라 안에 소문이 났다. 그의 나이 15세 때 고려 충정왕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만나보았다. 왕은 그의 재능을 확인하고는 서책과 지필묵 등을 하사하면서 왕명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며 격려했다. 그의 나이 24세 때인 1360년(공민왕 9), 과거에서 정몽주가 장원급제할 때 그 역시 12위로 동방급제 했다. 정몽주와는 같은 동네 친구로서 동갑(同甲), 동학(同學), 동방(同榜)의 인연이었다. 이후 화주 목사 등을 지냈고, 우왕 시절에는 이인임 일파에 의해 정몽주 등과 함께 유배형을 입기도 했다. 그의 호 이우당(二憂堂)은 길재가 지어준 것인데, ‘나아가도 나라 걱정, 물러나도 나라 걱정’을 한다는 뜻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졌다. 그해 10월 16일, 그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등지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이른바 ‘두문동72현’에 든 것이다. 두문동으로 들어간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심지어 그의 몰년조차도 알 수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하빈 이씨 인물 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련 있는 인물이 있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성재(誠齋) 이동휘(1873-1935)다. 그는 한성무관학교를 수료한 무관으로 평생을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망명지 연해주(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에서 서거한 독립운동 지도자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그의 유해를 모신 묘가 없다. 서거 당시 연해주 신한촌에서 고려인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피르바야 레츠카 공동묘지에 안장됐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정확한 묘 위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 현충원 무후(無後) 순국선열제단에 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참고로 이동휘 집안은 3대 독립운동 집안이다. 아버지 이발(이승교), 이동휘, 이동휘의 딸 이인순, 이의순이 모두 독립 유공자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이 외에도 하빈 이씨 독립유공자 중에는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공산면 백안동), 독립투사 이현준(하빈면 낫골) 등이 있다.
하빈 이씨 성지, 원모재(遠慕齋)
본래 원모재는 인근에 있는 하빈 이씨 시조 이거의 묘소 수호 재실이었다. 1941년 낫골 현령공파에서 성금을 모아 고가(古家) 한 채를 매입해 이건한 것이 원모재의 출발이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원모재가 퇴락하자 1년여의 대대적인 증개축 공사를 거쳐 1996년 겨울, 비로소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췄다. 원모재는 강당, 동·서재, 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은 높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2.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 나머지 좌우 각 1칸씩은 방이며 전면으로 반 칸 툇간을 두었다. 강당 아래는 넓은 뜰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동·서재가 놓여 있다.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홑처마 건물이다. 동재 앞뜰에는 ‘하빈이씨유허비’와 ‘송덕비’가 있고, 서재 남쪽에는 ‘헌성비’가 있다. 대문은 솟을삼문으로 마을을 둘러싼 비룡산(또는 龍載山)의 이름을 따 비룡문이다.
에필로그
우리나라 하빈 이씨의 성지 하빈면 무등리 낫골(낙골). 낫골은 마을 지형이 낫을 닮아서, 낙골은 마을에 낙석이 많은 것에 유래됐다고 한다. 한자로는 ‘낫 겸’ 겸동(鎌洞)인데, ‘칼 겸’ 겸동(鉗洞)으로도 볼 수도 있다. 칼은 죄인들의 목에 씌우는 형구인데 하늘에서 내려다본 겸동 골짜기 모습이 칼의 두 다리를 닮았다. 풍수에서는 이런 터를 명당으로 보는데 겸혈형(鉗穴形)이라고 한다. 무등(武等)은 무등(武登)으로도 볼 수 있다. 마을을 둘러싼 비룡산에 선녀와 용이 되어 승천한 무관(武官) 전설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대구에는 하빈 이씨 중시조 이우당 이경을 모신 ‘이우당’이 북구 연경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