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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총신동문 평택문화유산답사
◉ 주제 : 경주 이씨 가문에게 역사의 길(道)을 묻다
◉ 답사일정 : 진위면 마산리 경주 이씨 묘역과 이성무 묘 → 진위면 동천리 이연손, 이광좌 묘 → 점심식사(진위 장수촌) → 진위향교 → 봉남리 아곡마을 이세필 신도비 → 진위면 가곡리 이정좌, 이계조 묘 → 폐회(진위역)
◉답사안내
1.경주 이씨 상서공파의 가계
◉시조 :이알평(李謁平) : 알천, 아찬
•17세 :이 과(李 薖) : 상서-상서공파의 파조
•20세 :이연손(李延孫) : 공조참판
◉22세 :이성무(李成茂) : 안동판관 -①인신(仁臣) ②의신(義臣) ③예신(禮臣) ④지신(智臣)
•23세 : 이성무의 3남 이예신(李禮臣)
•24세 :이예신의 2남 이몽량(李夢亮) - 우참찬, 정헌공
◉25세 :이몽량의 4남 이항복(李恒福) - 영의정, 문충공, 권율의 사위
•26세 : 이항복의 장남 이성남(李星男) -이조판서
•29세 : 이성남의 증손자 이광좌(李光佐) - 대제학, 영의정, 문충공
◉26세 :이항복의 2남 이정남(李井男) - 이조판서
•28세 :이정남의 손자 이세필(李世弼)-형조참판-①태좌(台佐) ②정좌(鼎佐) ③형좌(衡佐)
•외손자 : 박문수
◉29세 : 이세필의 큰아들 이태좌(李台佐) - 좌의정, 충정공
•30세 : 이태좌의 큰아들 이종성(李宗城) - 영의정, 문충공
•34세 : 이유승(李裕承) -우찬성 -①건영(健榮) ②석영(石榮, 이유원에게 출계) ③철영(哲榮) ④회영(會榮) ⑤시영(始榮) ⑥호영(頀榮)
• 이회영 : 아들 이규동 -손자 이종찬(전 국회의원, 국정원장), 이종걸(더민주당 원내대표)
• 이시영 : 초대 부통령
◉29세 :이세필의 2남 이정좌(李鼎佐) -증 영의정
•33세 : 이계조(李啓朝) - 이조판서, 문정공
•34세 :이유원(李裕元) - 영의정, 충문공
•35세 :이석영(李石榮) - 생부 이유승
2.평택과 경주 이씨
평택시 진위면 무봉산 일대는 경주 이시의 터전이다. 무봉산 일대가 경주 이씨의 터전이 된 것은 조선 전기 이연손, 이성무 때지만 처음 입향한 것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수종부터다. 그 뒤로 박문수의 외조부인 이세필이 입향하였고, 그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봉남리, 가곡리, 동천리, 마산리, 송북동 일대에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 가운데 가곡1리 신가곡은 만주 무장투쟁을 이끈 이회영 형제들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 신가곡 일대가 이회영의 둘째 형 이석영의 양부 이유원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이석영은 양부에게서 상속받은 신가곡 일대의 땅을 모두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회영(李會榮, 1867~1932)과 다섯 형제들은 1867년 서울 남산골(苧洞)에서 이유승(李裕承)을 아버지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였다.(직계 후손들에서만 문과 급제자 31명, 정승 6명, 대제학 2명) 그의 가계는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조(吏曹)판서와 우찬성을 지낸 손꼽히는 소론 명문가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운이 위태로울 때에는 신민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한일강제합병 이후에는 때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 회영, 시영(始榮), 호영(頀榮) 등 6형제 50여 가족이 전 재산을 팔아서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만주 이주 후 서간도 삼원포 지역을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했고, 경학사와 부민단 등 자치조직을 건설하여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였다. 1920년대 초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의 주축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며,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1920, 30년대 독립전쟁의 중심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있었다. 덕분에 경주 이씨 가문은 독립투쟁에 헌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이석영은 상해에서 굶어죽었고, 이회영, 이호영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받아 순국하였으며, 나머지 형제들도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만주 이주 초기 50여 명의 가족 가운데 해방 후 이시영이 임정요인으로 가족들과 함께 귀국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2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현재 신가곡에는 경주 이씨가 살고 있지 않다. 다만 이유원의 아버지 이계조의 묘와 위로 5대조인 이정좌의 묘, 경주 이씨 재실, 그리고 마을 입구의 ‘경주이씨천’ 표석뿐이다.
3.운곡 이광좌
동천재는 동천리에 있는 경주 이씨 상서공파의 재실이다. 이곳에는 상서공파의 중시조 이매를 비롯하여, 이원보, 이승, 이성무, 이의신, 이시현, 이수종, 이광좌 등 9명의 신위가 있다. 1978년에 중수했으며 매월 10월 초하루에 제를 올린다. 사우 옆으로는 상서공파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이광좌의 묘는 동천1리 마을 북동쪽 산기슭에 이연손의 묘와 함께 있다. 이광좌는 조선 후기 소론의 영수로 숙종, 경종 때 대제학과 정승을 두루 지내며 소론 정권을 이끌고, 영조 때에는 탕평책에 따라 영의정에 등용되어 탕평정국을 이끌었다. 그러다 이인좌의 난 이후 점차 세력을 잃었는데, 1740년 영의정으로 재직 중 박동준 등이 역적을 변호한 죄를 들어 탄핵하자 울분 끝에 단식하다가 죽었다. 이후 1755년 나주괘서사건(을해옥사)으로 관직이 추탈되었다가 복권되었다. 문집으로 『운곡실기』가 있다.
4.우당 이회영
이회영은 1867년 음력 3월 17일 한성부의 저동(苧洞)에서 고종 때 이조판서와 우찬성을 지낸 이유승(1835~1906)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유승에게는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소영, 호영 등 7형제와 딸 둘이 있었다.
이회영(1867~1932)은 개방적이고 호탕한 성격이었다.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거나 남의 집 종들에게 높임말을 쓰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하였다. 1907년 부인이 죽자 1908년 이은숙과 재혼할 때는 상동감리교회에서 신식결혼식을 올렸고, 통념을 깨고 일찍 과부가 된 누이를 죽은 것으로 부고를 낸 뒤 재가시키기도 했다. 1896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는 황해도 개성 인근에 삼포농장을 경영하며 군자금을 댔고, 독립협회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여준, 윤치호, 남궁억, 이상재 등을 만나 교유했고, 1906년 부친이 사망한 뒤에는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면천시켰다.
1905년 을사늑약 뒤에는 장훈학교, 공옥학교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안창호, 전덕기, 양기탁, 이상재, 김규식, 이시영 등과 애국계몽단체 신민회 조직에 앞장섰다. 그는 신민회 중앙위원으로 교육운동과 민중계몽을 위해 노력했으며, 정주 오산학교, 평양 대성학교, 상동청년학원 운영에 힘을 쏟았다. 1909년 양기탁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총회를 소집하여 만주 독립운동 기지건설을 결의한 뒤에는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를 후보지로 정하고 1910년 이동녕 등과 사전 답사를 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회영은 가족회의를 열어 독립운동을 위한 만주이주를 결의하였고 형제들은 재산 모두를 처분하여 50여 명의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1910년 12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 만주에 도착한 일가족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정착하여 1911년에는 이상룡, 김동삼 등과 재만한인자치조직인 경학사를 설립하여 동포들을 결집시키는 한 편, 1912년에는 신흥학교(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독립군 양성을 하였다. 1919년에는 고종망명계획을 세웠지만 고종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패하였고, 3.1운동 뒤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는 동생 이시영과 함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내분에 휩싸이자 베이징으로 건너갔고 이 기간에 유자명을 통해 접한 오스기 사카에의 책을 접하고 이에 감며을 받아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그 뒤 임정을 탈퇴하고 아나키즘 활동에 적극 나섰으며, 19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 1925년에는 비밀결사 다물단, 1931년에는 한중일 아나키스트 합작조직인 항일구국연맹 의장에 취임하였으며,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백정기, 원심창 등의 육삼정 의거(국민당 내 친일그룹인 왕정위 암살 시도사건)를 지휘했다. 1932년에는 국민당 요인들의 지원을 받아 중국북동부 지역에 거점확보와 일본 관동군 사령관 무토대장 암살을 목적으로 북행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 밀접의 첩보와 노선이 달랐던 조카 이규서(이석영의 차남)의 밀고로 대련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6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망 후 시체는 송진우, 변영태, 윤치호 등에 의해 화장되어 개풍군에 묻혔다가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했고, 당시 서울에 살았던 부인 이은숙과 6세된 아들 이규동은 살아 남아 부인은 1979년에, 아들은 2015년에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2000년에는 중국정부에 의해 항일혁명열사로 추서되었다.
4.경주 이씨와 박문수(1691∼1756)
박문수는 천안시 병천이 고향으로 본관은 고령이다. 이조판서 박장원(長遠)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영은군(靈恩君) 박향한이며, 어머니는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 외가인 진위면 봉남리에서 태어나 어려서 외사촌 이종성(영의정을 지냄)과 함께 외삼촌 이태좌(영조 때 좌의정을 지냄)에게 학문을 수학하였다.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면서 다시 등용되었으며, 여러 차례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으며 경상도관찰사에 발탁되었다. 그 뒤로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지냈고,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가 기민(饑民)의 구제에 힘썼다. 암행어사에서 돌아온 뒤에는 예조, 호조참판, 도승지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사신의 일행으로 여러 차례 청나라에도 다녀왔으며, 함경도관찰사, 어영대장도 지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강이 휘돌아 가는 이유
우대식(시인)
강이 휘돌아 가는 이유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직선의 거리를 넘어
흔드는 손을 눈에 담고 결별의 힘으로
휘돌아 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짧은 탄성과 함께 느릿느릿 걸어왔거늘
노을 앞아세는 한 없이 빛나다가 잦아드는
강물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았는가
강이 굽이굽이 휘돌아 가는 이유는
굽은 곳에 생명이 깃들기 때문이다
굽이져 잠시 쉬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들이 악수를 나눈다
물에 젖은 생명들은 푸르다
푸른 피를 만들고 푸른 포도주를 만든다
강이 에둘러 굽이굽이 휘돌아 가는 것은
강마을에 사는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감사 때문이다
▪우대식 1965년 원주에서 태어났다.
아주대학교 국문과 박사
숭실대학교 겸임교수
진위고등학교 교사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단검(실천문학사)’, ‘설산국경(문예중앙)’, ‘시에 죽고 시에 살다(새움)’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