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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벧엘교회 구요셉목사님
성경의 번역 오류로 모든 교회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하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주에 한 성도님이 창세기와 로마서 말씀을 가지고 질문을 하셨는데 말씀을 보실 때 한 문장이나 구절에 집중을 하면 오해를 하기가 쉽습니다. 성경에 아담과 하와가 둘만 태어났고 자녀는 가인과 아벨이 두명만 나오는데 가인이 결혼을 했고, 가인을 죽이려는 자가 있다고 하니까 많은 분들이 이상하다는 의문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사람을 만드시고 2장에 구체적으로 아담과 하와는 흙으로 만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분들은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을 때 먼저 사람이 태어났고 아담과 하와는 그 이후에 만들었다고 주장을 하고, 아담과 하와 말고도 사람들이 있었다고 설교하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오류이고 성경에서 어떻게 예언을 하고 있느냐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강단에 서는 분들은 성도님들께 정확하게 가르쳐 드려야 됩니다.
성경은 처음에 모든 것의 전체적 개념의 예언을 해 주십니다. 두 번째 넘어가면 전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창세기 1장의 남자와 여자 이야기는 2장에서 그 남자와 여자를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과 다니엘도 마찬가지고 성경 예언의 법칙이 전부 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서에 신상 이야기는 장래의 이 세상 제국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신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뒤에 구체적으로 각 짐승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로 통틀어 말했다면 다니엘서 후반에는 개별적으로 자세하게 설명을 하는것이 하나님이 성경을 쓰시고 예언해 주신 방식입니다. 요한계시록도 10장에 ‘네가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하시면서 구체적 설명이 나오는 방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은 그리스식 사고 방식 이라서 성경을 잘못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그리스식 사고는 문장에서 단어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구절에서 분석을 하고 또 다른 구절에 분석을 해서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으면 오류라고 잘못 생각하고 다르게 또 분석을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식이 아니라 한국의 사고 방식과 같은 동양 방식으로 쓰인 책으로 전체적인 맥락에서 부분을 보는 방식입니다. 바울이 성경책을 들고 다녔을까요? 지금은 성경이 간편하지만 두루마리는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 외우고 다녔습니다. 경전을 외우고 중요한 두루마리는 가지고 다녔을 것입니다. 바울 같은 분들은 성경을 외우셨다고 봐야 합니다.
요즘 교육이 분석해서 이해하는 것이라면 그 당시의 교육은 통째로 외우는 방식이었고, 한국도 1900년대까지는 책을 외우는 방식으로 교육을 했습니다. 외우게 되면 분석적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좋은 점이 있고 현재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는 교육이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잘못된 분석적 사고 방식으로 볼 때 오해가 있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에 이르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다른 사람들이 미리 창조가 되었다면 아담이 지은 죄를 다른 사람들이 함께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아담에 의해서만 인류가 탄생되었고 아담의 자손들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성인으로 태어나서 한 살 때부터 바로 자녀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중간에도 많은 자녀들이 태어났고 그 중에서 가인의 아내도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타당합니다. 로마서 5장 말씀대로 한 사람의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에 이르고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구원이 선물로 인류에게 왔다.하신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첫 번째 아담이요, 두 번째 아담을 예수님이라 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에 의해서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두 번째 아담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드릴 주제도 성경을 오류로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오는 큰 잘못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부터 20절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율법’이나 ‘선지자’에 대한 말씀은 명확한 번역 오류인데 이 말씀의 기초에서 신약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신약 교회들이 카톨릭이나 개신교가 똑같이 번역을 잘못한 결과가 얼마나 큰 잘못을 하는지 모릅니다. 17절 ‘내가 율법이나’에서 율법은 우리가 알고 있는 헌법이고 성경의 대강령 ‘법’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율법은 히브리 말로 〔토라〕라고 합니다. 토라는 ‘율법’이라는 뜻이 아니고 정확한 뜻은 ‘가르침’입니다. 더 정확하게 들어가면 토라는 성경 전체를 말하지 않고 ‘모세 5경’을 이야기한다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또 오류를 범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과 신약이라고 할때 ‘약’자는 계약 할 때 ‘약(約:맺다,약속하다)’자로 계약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을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성경, 신약을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에 성경으로 알고 있는 것은 이해 부족입니다. ‘약(約)’자를 계약과 언약이라는 뜻으로 하면 성경은 계약서, 언약서가 원래 뜻입니다. 계약 당사자가 하나님과 사람의 계약서입니다. 〔토라〕는 하나님과 사람이 계약을 했는데 그 계약 내용을 가르치겠다.하신 것이고, ‘구약’의 원래 뜻이 ‘모세 5경의 가르침’입니다. ‘신약’의 원래 뜻은 여기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한 것입니다. 그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변하는 것이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 17장에 신약의 계약과 언약의 내용들입니다.
그러면 율법과 계약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다른지 보겠습니다. 법을 어기면 벌 받는다.와 같이, 교회들이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을 어기면 ‘벌 받는다. 지옥 간다’라고 성경을 보는데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계약 이라는 것은 혼인 계약이고 우리가 말하는 ‘법궤’는 잘못 번역된 것이고 정확하게는 ‘언약궤’ 곧 혼인 언약 입니다. 성경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류는 지옥에 가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셔서 사람과 계약을 맺으시고 이 계약서대로 이행하면 백성 삼고 구원해주시겠다. 나의 아내로 삼아주겠다.는 것이 계약서의 내용입니다. 모세 5경을 주신 목적은 범죄한 사람을 죽이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살리려고 주신 책이고 법률 서적이 아닙니다. 잘못 받아들여서 ‘범죄하면 지옥 간다’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그의 안에 거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고 혼인하여 하나가 되겠다는 언약서입니다. 살리려고 주신 책이고 법률이 아니라 우리와 결혼하여 함께 사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책입니다.
〔토라〕의 어원을 보면 〔야라〕에서 파생되어 ‘과녁을 정확하게 관통하다’는 뜻이고,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 ‘과녁을 벗어나다’ 입니다. 그러므로 언약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고, 언약 밖으로 나가면 구원을 못 받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도덕적으로 굉장히 탁월한 분들이 성경으로 보면 정확하게 구원을 못받습니다. 언약 안에 들어오지 않으셨기 때문에 계약서대로 같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약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이고 나와 네가 믿는다는 ‘믿음’이라는 개념입니다. 믿음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습니다’는 뜻이 아니라 ‘계약했다’는 뜻입니다. 첫 번역부터 잘못되어 잘못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죄를 짓는다, 안짓는다가 아니라 ‘하나님과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느냐, 맺고 있지 않느냐’가 구원의 요점입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 ‘율법’의 번역을 ‘모세 5경의 가르침 곧 계약과 언약’이라고 바꾸어야 이해가 갑니다. 선지자는 〔라비〕이고 뜻은 ‘대언자, 말씀을 선언하는 자, 말씀을 공포하는 자’로 이 구절에서 선지자는 구약에 있는 모든 선지자가 아닙니다. 토라가 ‘모세 5경의 가르침’이라고 말씀드렸고 모세 5경의 선지자는 모세입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은 예수님이 ‘내가 모세 5경의 계약서, 언약서와 모세를 폐하러 온 줄 아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일반적으로 구약의 말씀과 다르게 들리니까 모세의 율법과 5개의 서적을 어기는 사람, 파괴하는 사람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난하는 것을 설명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모세 5경과 모세의 가르침을 (모세가 공포한 것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이렇게 번역을 하면 뒤에 말씀이 열립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말씀을 율법으로 번역하면 해석이 안되는데 이것을 ‘언약’으로 바꾸어서 보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언약’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는 너희와 내가 맺은 그 ‘언약’을 나는 반드시 이행할 것이다.로 이해가 됩니다. 모든 교회가 잘못된 번역을 해서 고딕 양식으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이 법을 어기면 안 되니까 목사님은 집행자가 되고 신부님들도 심판자가 되어서 단정하게 재판장이 입는 검정색 옷을 입습니다. 목사님들도 흰 와이셔츠를 입고 깨끗하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성경 말씀을 법률로 보는 관점에서 잘못된 오해가 교회 전체에 흐릅니다. 교회는 권위적이기 쉽고 남에게 ‘이렇게 하면 안돼’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기초가 번역의 오류에서 시작됩니다.
19절 말씀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하는 계명은 십계명의 언약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 5경의 가장 중심은 십계명의 언약서입니다. 십계명의 언약은 우리가 법을 어기면 지옥가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잘 지켜서 결혼합시다’는 뜻입니다. 사랑한다, 결혼하자, 나만 사랑할 거지? 라고 묻는 청혼서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을 주시는 책입니다. 교회 전체가 잘못된 오류의 번역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안그러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성경이 이해가 안가서 구약은 옛날에 버려졌고, 신약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 곧 네가 서기관과 바리새인같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도 버리고, 바울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만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뭐라고 합니까? 미국 주류 남침례교회가 큰일 날 소리를 가르칩니다.
성경은 오류가 없고 일관되며 베드로가 한 말과 똑같은데 왜 분류합니까? 구약은 잘못된 계약이라 말하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이고, 우리 이방인은 신약의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도 버리고 (성경을 다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언약과 구원에 관하여) 바울이 이야기했던 것만 받아들여서 다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성경은 연결되어 있고 하나가 된 책입니다. 분석적으로 보니까 잘못된 오류적인 말을 하고 중요한 것은 주류 교회들이 그런 말들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완벽하게 뒤집는 것입니다. 말씀은 구약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바울의 말이 동일하고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18장 15절부터 20절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19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이 토라와 선지자를 온전케 하러 오셨다고 하신 것은 이 말씀을 가지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후에 장차 다른 선지자가 와서 이 음성을 너희에게 다시 들려줄 거라고 말씀하고, 예수님은 내가 곧 대언자, 모세가 말한 선지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토라 바로 모세의 율법 5경과 모세에 대하여 완전케 하러 왔노라고 번역해야 되고 바로 이 말씀을 이루려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번역 오류가 많은데 가장 핵심적인 것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2절부터 35절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지난주에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는데 구약을 모르니까 다르게 이해를 하고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버리다 보니까 그런것인데, 히브리서와 신약에서 사도들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구약에 있는 말씀과 율법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고 제사법을 버리라고 한것입니다. 제사법과 날짜에 관한 것과 할례받는 것, 형식을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형식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고 구약에 있는 안식일도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런 형식을 버리고 예수를 받아들이라고 하는데, 엉뚱하게도 법으로 받아들여서 혼란이 있고 부딪히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돼서 구약도 버려지고 사복음서도 버려지고 뒤에 바울이 한 이야기 일부만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코끼리의 꼬리만 붙잡고 이게 코끼리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체적인 이해를 못하는 것이고 분석적 방식의 해석이 얼마나 오류가 많은가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지난번에 말씀드렸기 때문에 넘어가고, 대체 신학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없었을 때 번역이 된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지금은 이스라엘이 있고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관점을 가지고 다시 성경을 다시 봐야 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는 대체 신학은 원래 상태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직도 머무르고 계신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33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이스라엘이 독립된 것을 보거든 예수님이 곧 오실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34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이 ‘세대’라는 단어가 명확한 번역 오류입니다.
어릴 때 성경을 보다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시는데 하나도 안 이루어져서 전도사님 찾아가서 물어보기도 하고 목사님께 여쭈어보기도 하고 설교할 때 들어보았는데 아무도 말을 안 해주는 것입니다. 이 질문 하나를 가지고 갔는데 대답은 30분 동안 해주시는데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세대’가 〔게네아〕 이고, ‘가문, 종족, 인종, 세대, 시대’ 이런 뜻입니다. 34절에서 ‘가문, 족속, 인종’ 의미를 안 받아들이고, 이스라엘 국가가 없으니까 ‘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 국가가 생겼기 때문에 이것은 헬라식으로 번역을 해도 ‘족속, 가문’으로 받아들여야 되고, 이 (이스라엘) ‘족속, 민족‘으로 번역해야 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원래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는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로 마태복음에 〔샤르바트〕라고 적혀 있고 ‘샤르바트’는 ‘세대’라는 뜻이 없고 ‘족속,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에서 ‘세대’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샤르바트〕로 쓰인 것은 세 개 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세대’를 대신해 ‘민족’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민족’이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온 세상이 다 멸망되기 전에, 온 세상의 모든 일이 일어나고 예수님께서 지상 재림하실 때까지 이 민족은 있다, 존재하리라.는 뜻입니다. 번역 오류로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이 말씀이 안 풀렸고, (세대가) 70년 80년도 아니고, 이 민족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 존재하리라 뜻이라고 아람어로 푸니까 이해가 됩니다. 아람어 〔샤르바트〕는 마태복음 12장에도 나옵니다.
마태복음 12장 38절부터 42절
38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민족’이, (그 당시 사람들, 이스라엘을 얘기하신 것입니다) ‘족속’이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족속’ 사람을 (이 ‘민족’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민족’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니느웨 사람도 회개하였고 내 말을 들었고 안에 들어왔건만, 너희들은 내가 선포하였으되 모세의 권위로, 선지자로 다시 언약을 맺으러 왔건만 너희는 그 언약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민족’은 망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신 똑같은 〔샤르바트〕입니다. ‘민족’으로 받아들이니까 정확하게 이해가 되고,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은 회개치 아니하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이스라엘 ‘민족’, 구체적으로 벌을 받은 죽어버린 무화과나무를 어떻게 예수님이 다시 마지막 때 회개시켜서 살릴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살리는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서 9장 1절부터 7절
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히브리서가 과거의 구약 성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첫 언약 곧 모세 5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하신 십계명 언약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언약책입니다. 구약은 옛날 첫 언약이고 신약은 새로 맺은 언약입니다. 첫 언약의 예법에 관해서 설명하는 것이 바로 성전 건축을 볼 때 언약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장막 안에 지성소를 설명하고 있으며 둘째 휘장에 관한 것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첫째 언약은 사라지고 둘째 언약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언약과 두 번째 언약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궤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이 둘이 있는 것도 정확하게 성경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룹 둘은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룹이 네 분인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을 보좌하는 그룹은 두 분입니다. 성경에 정확히 나옵니다. 두 그룹만 섬기는 자세로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지상 재림을 하셔서 이 땅을 친히 다스릴 것이라는 천년 왕국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성막은 매일 들어가는데 안쪽에 지성소 둘째 장막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일 차만 들어갑니다. 단번에 생명을 드리신 예수의 피로 인하여 두 번째 지성소가 열리는 것입니다. 모든 허물과 죄를 사해주시는 두 번째의 새 언약을 예수님이 피로 맺는 것입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바로 예수님의 피 언약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이 피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새 계명을 주노니(요13:34)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1절에서 12절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첫 번째 언약은 염소와 소의 피로써 죄를 씻어주시고 구원하신다는 뜻인데 두 번째 언약은 단번에 예수가 피를 다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일 년에 일 차씩 들어가는 제사법이 사라졌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제사법들은 소멸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피로써 새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과거 구약에 구언약으로 염소와 송아지 피로 맺었던 언약도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확정되고 그들도 구원받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8절부터 21절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첫 언약도 피로써 맺었는데 진짜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피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4절부터 28절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성전의 성소는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현장을 얘기하고 있고 지성소는 천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성소는 천국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자기 십자가 보혈의 피로 단번에 들어가셨고 예수의 십자가 보혈의 피로 인하여 우리 모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과거의 그림자 형식의 제사법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라졌고 과거에 날과 절기를 지키는 것, 안식일이나 날짜를 지키는 것들은 이미 사라졌고 할례를 받는 형식은 사라졌다고 정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27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나 예수로 인하여 십자가 보혈의 피로 인하여 심판을 면하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구원에 이르고 죄와 상관이 없으므로 예수님과 언약을 했으므로 사모하며 기다려야 됩니다. 히브리서는 계약에 대해서 혼인 언약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혼인 언약은 폐해졌으나 두 번째 혼인 언약을 예수와 했으므로 예수를 사모하며 기다리라는 것이 구약 전체, 신약 전체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을 사모하며 기다립니까?
성경은 예수님을 사모하면 기다리라 말씀하고 있는데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오늘날 교회가 왜 이렇게 잘못되었습니까? 잘못된 번역을 받아들여서 오류된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생명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되고 매일 예수를 사모하며 기다려야 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면 눈동자가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습관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집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기다리라 말씀하시고 마태복음 24장에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는 마지막 때이고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성경은 언약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그 언약을 늘 기억하며 사랑하는 신랑 예수님을 기다립시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은 성경 말씀이 잘못 번역된 것들이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하여 교회가 예수님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사모하여 기다리는 자들을 오히려 욕하고 있습니다.
주님 그러나 말씀 안에 들어가 보았더니 성경 말씀은 새 언약의 말씀인 걸 우리가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혼인 언약을 늘 기억하며 사랑하는 주님을 기다리겠습니다.
우리 성도 한 명 한 명의 생각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마음에 늘 소망을 가지고 평화와 기쁨이 차고 넘치는 우리 성도들에게 아버지 역사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