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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미아가 입을 열어, 무유서에게 조부의 부탁을 설명했다. 살아있다면 정해년 설날 반드시 할아비를 찾아뵈도록 명하셨다고.
무유서가 몹시도 곤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두 분을 모셔가기 위해 제가 십여 기의 기마군을 이끌고 왔습니다.”
이루하가 여미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미아가 체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요. 하지만, 제가 가지 않으면 할아버지는 제가 죽은 줄로 아실 거예요.”
“할아버지께 편지를 쓰면 되지 않나요?”
무유서가 물었다.
“물론 편지를 쓰면 되지만, 제가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답니다. 그건 묻지 말아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아, 이런 참으로 안타깝군요.”
“장군님, 폐하께 전해 주실 수 없나요?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반드시 폐하를 알현하겠다고요.”
무유서는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오나, 대당大唐의 법률에도 십대十大 죄악 가운데 불효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손녀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슬퍼하신다면, 이는 크나큰 불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정황을 폐하께서 아신다면 폐하도 분명히 이를 용인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 아씨, 실은······.”
무유서가 더듬거리다가 부언했다.
“차마 제 입으로 얘기할 수 없군요.”
“말씀하시지 않아도 안답니다. 폐하께서 조영공자와 어처 극시아 마마를 보내신 후 걱정이 되어서, 저희를 낙양성 안에 머물러 있게 하시려는 게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무유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초조해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조영공자와 극시아 마마가 폐하의 명을 받고 어딘가를 가고 있다면 그 분들은 일을 마치고 무사히 폐하께로 돌아갈 거예요.”
무유서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여미아를 바라보았다.
‘이 여인이 한낱 하녀라고 하는데, 어째서 이리도 영리할까? 우리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다니.’
무유서는 설산의 깊은 호수 같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여미아의 눈매에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장담······?”
“제가 알기로 조영 공자는 그렇게 무신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유서는 차마, 무 태후가 극시아를 의심하고 있다고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여미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더했다.
“조영 공자님은 어린애가 아닙니다.”
무유서는 여미아의 말보다 그의 웃음에 애간장이 녹는 것 같았다. 그는 남몰래 깊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 때 금반金盤 위에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여미아의 목소리가 다시 그의 귀에 파고들었다.
“무 장군님! 그냥 돌아가시기는 어려울 거예요. 이건 대단히 죄송스럽고, 얼토당토않은 말이지만, 차라리 제가 조부님을 만나 뵙고 돌아갈 때까지 장군님이 저희와 동행하실 수 있다면, 너무 좋겠어요. 그럼 강도와 산적들이 들끓는 험난한 세상에서 저희도 십이분 안심이 될 거예요.”
여미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한 가지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조영공자 일행도 더욱 안전할 거구요.”
무유서는 이런 엉뚱한 말을 늘어놓는 여미아의 낯을 새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여미아의 표정은 극히 순진무구해 보이며, 일면 가녀리고 가엾어 보인다. 얼굴 가득 난색을 짓고 있던 무유서가 마침내 결심한 듯 대답했다.
“좋습니다. 군졸을 보내 아가씨의 의견을 폐하께 개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유서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말고 주춤거렸다.
“무 장군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기탄없이 얘기해 주세요.”
여미아의 말에 무유서가 더듬더듬 말했다.
“지난 번, 장생전 회합 때······.”
장생전 회합이라면, 무 태후가 무유서를 포함해 여러 젊은이들을 불러 허심탄회한 대화와 함께 만찬을 나누던 모임을 가리킬 터. 여미아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그의 눈을 바라다보았다. 무유서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고 물었다.
“그 때, 아가씨가 경교의 신 메시아 예수를 가리켜, 천대만세의 진산지보鎭山至寶라고 말씀하셨는데, 그에 관해 좀 더 듣고 싶습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그 얘기 좀 들려주실 수 없나요?”
“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무 장군님이 우리와 함께 가실 수 있다면 조만간 가능하겠죠.”
“나도 그렇게만 된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무유서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여인들이 그를 현관 문밖까지 배웅하다가 깜짝 놀랐다. 등불을 든 사환이 세 사람을 데리고 이쪽으로 왔는데, 등불 빛에 비친 세 사람이 다름 아닌, 조영과 극시아, 사비우였기 때문이다.
그들도 이쪽 세 사람을 보고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조영이 이쪽을 눈여겨보다가 물었다.
“혹시, 무후군 무유서 장군 아니시오?”
“쉿!”
이루하가 입에 손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며 두 손을 내밀어 방으로 들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밖으로 나가려던 무유서가 엉거주춤하고 있자, 이루하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무 공자님도 안으로 들어오세요.”
여섯 남녀가 함께 이루하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조영이 이루하와 무유서에게 동시에 물었다.
“아가씨, 어쩐 일이에요? 그리고 무 장군께서는?”
“공자님이야말로 무슨 일이에요?”
이루하가 대답 대신 되물었다.
조영이, 어처 극시아를 모시고 가는 중이라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이루하는 그의 말들 듣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저희는 공자님을 따라가고 있고 무 장군님은 저희를 따라온 거예요.”
이루하는 잠시 바깥에 귀를 기울이다가, 무 장군이 따라온 내막과 여미아의 제안에 대해 설명한 후 덧붙였다.
“조영 공자님, 혹시 수상한 자들의 그림자를 보지 못하셨나요?”
“알고 있습니다. 별 것 아닐 겁니다.”
“다행이군요. 우리가 괜히 마음을 졸였네요.”
“무 장군께서 여미아 아가씨의 제안대로 무후군을 거느리고 우릴 호위해 주신다면, 겁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조영의 말에 무유서가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아닙니다. 만에 하나 태후마마께서 저의 행로를 허락하신다면, 오히려 우리가 조영 장군과 사비우 장군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무유서는 그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히도 태후마마께서 친정親政을 시작하신 이후로 강호에 강도들과 산적들이 더욱 날뛴다고 합니다. 같은 무씨로서 책임이 지대함을 통감합니다.”
무유서는 무 태후의 조카다. 무유서의 자책에 이루하가 위로의 말을 건네며 덧붙였다.
“무 장군님, 모처럼 저희를 찾아왔으니, 이곳이 우리 집은 아니지만, 오늘 저희가 뭐 좀 대접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녀가 여미아를 바라보자 여미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때 무유서가 입을 열었다.
“이 성이 인구가 아주 많은 성이니, 아마도 큰 명절을 앞두고 야시장이 열렸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군졸들을 시켜 뭐 먹을 것 좀 사오도록 하겠습니다.”
무유서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에 돌아왔다. 무유서는 자리에 앉은 후 여미아를 바라보고 말했다.
“여미아 아가씨, 먹을 것이 오는 동안 방금 전에 제가 부탁했던 것을 좀 얘기해 주실 수 없는지요?”
여미아가 한낱 비자였으나, 지체 높은 귀족 무유서는 그녀 앞에서 매우 겸손했다.
“아, 하늘의 임금이신 예수님이 왜 진산지보인가, 그 얘기이신가요?”
“네.”
무유서가 대답하며 동의를 구하는 듯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다들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그 분을 얻을 때, 천상의 영원한 부귀공명권세, 세세토록 잃지 않는 그것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얻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무유서가 물었다.
“그건, 그 분을 마음에 나의 임금으로 모시고 그분과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사귀면서 그 분의 놀라운 사랑과 진리, 그 분의 아름다우심을 점점 알아가며, 나도 그 분을 닮아 그분의 영광스러운 인격과 행동을 겉으로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마치 달빛이 해의 영광을 드러내듯이요.”
“그 분은 근 칠백 년 전의 인물이라는데, 어떻게 그 분과 사귈 수 있습니까? 그분의 자서전이나 전기, 아니면 어록 등이 있어서 그것들을 읽는다는 뜻입니까?”
“그 분을 알고 그분과 사귈 수 있는 방편이 두 가지입니다. 둘 중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됩니다.”
“······?”
“하나는 그분의 말씀인 경전이고, 또 하나는, 그분을 모신 자들의 심령에 오신 영입니다.”
“경교의 경전은 무언지 알겠는데요, ‘심령에 오신 영’이 무엇입니까? 무당에게 신이 내리듯, 그분을 모신 자들에게 그분의 영이 임하는 것입니까?”
“무당에게 내리는 신은 추악한 귀신이고 악령이지만, 그 분을 믿고 모시는 자들에게 임하시는 그분의 영은, 선과 진리와 인자하심과 아름다움과 지혜가 충만하신 창조주 하늘 상제上帝님의 영이십니다.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무유서를 비롯한 좌중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여미아의 말이 도도하게 이어졌다.
“별유진보이신 그 분은, 천만세의 보고寶庫 안에 계신 비밀 중의 비밀입니다. 그 보고의 문을 여는 열쇠가 둘입니다. 두 개의 열쇠를 동시에 꽂아야 보고의 문이 열립니다. 하나는 그 분의 경전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공맹이나 노장老莊의 글을 읽고 암송하듯이 그 분의 경전을 깨우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그 분의 영은 무슨 역할을 하십니까?”
“두 가지 역할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공자孔子님이나 다른 성현들의 말씀을 기억하고 외우듯이, 그 분의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할 때, 그분의 영이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춰 그 말씀을 통해 그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미아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계속 이었다.
“또 하나는, 우리가 그 분과 직접 대화를 나눌 때, 그 분의 영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그 분을 깊이 알리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분과 대화를 할 수 있습니까?”
여미아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마치 동지섣달 설산 속에 활짝 핀 꽃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을 도취하게 했다.
“그 분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살아계셔서 영으로 이 자리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그분과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또한 그 분의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무유서가 감탄의 표정이 가득해 말했다.
“아, 무당이 귀신과 대화하는 걸 보았는데, 그와 흡사한가요?”
“아닙니다. 천양지차입니다. 귀신을 섬기며 귀신과 대화하면 결국 귀신을 따라 지옥에 가지만, 어진님이신 그 분과 대화하면, 그 분을 따라 참된 행복과 한량없는 기쁨의 저 천국을 영원토록 누리게 됩니다.”
“천국이라면 하늘 옥황상제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미아가 연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라고 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을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럼 그 분을 알 수 있는 말씀 한 가지만 얘기해 주실 수 없습니까?”
여미아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는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평안을 너희에게 유증遺贈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무유서의 얼굴에 탄복의 빛이 가득했다.
“성현들의 글에서 읽어보지 못한 생전 처음 듣는 말씀이군요. 그 분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모종의 평안을 친히 누리고 계실 뿐만 아니라 또 그것을 제자들에게 직접 나누어주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무 장군님께서는 극도로 총명하셔서 그 뜻을 금방 해득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아가씨는 그 분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을 누리고 있는가요?”
“암은요! 그렇고말고요.”
“아가씨가 너무나 부럽습니다. 그 분의 평안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무유서가 탄식과 함께 자기 심정을 솔직히 토로했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 그대로 세상의 재물이나 건강, 지위, 명예 등으로 얻을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을 의미합니다.”
“옛 성현들 중 세상의 명리를 버리고 초야에 묻혀 한가하게 살아간 이가 더러 있었는데, 그런 평안을 말씀하신 건가요?”
“그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초야에 묻혀 한가하게 사는 평안이 아니라, 질풍노도와 같은 험한 바다 위, 목숨이 극도로 위태로운 가운데서도 잃지 않는 태평이고, 세상에서 고난과 모진 핍박을 당하며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마치 거대한 강물처럼 흐르는 놀라운 평안입니다.”
“세상에 그런 평안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무유서는 크게 놀라마지 않았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심령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평안, 하늘의 어진님께로부터 초자연적으로 내려와 마음속에 굳건하게 자리 잡은 내적 평안입니다.”
이어서 여미아는, 경승 고양원에게 들은 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다른 수많은 제자들이 핍박을 받아 어떻게 죽어갔는가, 그 가운데서도 얼마나 놀라운 평안을 누렸는가를 들려주었다.
무유서 뿐만 아니라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여미아의 말을 듣고 대경실색하며 탄복해 마지않았다.
“우리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런 영웅들이 서쪽 세상에 있었군요.”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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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4. 12.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