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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주지 / 정우 스님
“불자들이여, 보살 마하살은 열 가지 고달프지 않은 마음을 내나니, 이른바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 데 고달프지 않은 마음과 모든 선지식을 친히 가까이 하는 데 고달프지 않은 마음과 모든 법을 구하는 데 고달프지 않은 마음과 바른 법을 듣는 데 고달프지 않은 마음과 바른 법을 말하는 데 고달프지 않은 마음과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조복시키는 데 고달프지 않은 마음이며, 또한 일체중생을 부처의 보리에 드는 데 고달프지않은 마음과 낱낱 세계마다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내면서 보살의 행을행하는 데 고달프지 않은 마음과 모든 세계에 다니는 데 고달프지 않은 마음과 온갖불법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데 고달프지 않은 마음이니, 만일 보살들이 이 법에 편안히머물면 여래의 고달프지 않은 위없는 큰 지혜를 얻게 되느니라.” -화엄경 이세간품
마음이 번거로우면 세상이 다 번거롭고,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세상 또한 맑고 깨끗해진다고 합니다. 요즘 지구 공동체가 참으로 어수선하고 사회경제도 무척 어렵다고들 하는데, 많이들 힘드시지요? 그래도 위로 쳐다보면 목도 아프고 힘들지만 아래로 내려다보면 더 힘들고어려운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이 시절에 힘든 이들을 쉬게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안심입명(安心立命)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벌러덩드러누워 쉬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때와 장소를 잘 가름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지혜이며, 가장보편적인 삶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운 세상, 꿈같은 세상에서도 한결같이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하는 것이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삶의 핵심이 아닐까요.
얼마 전, 저는 30여 년 만에 산내 암자인 백운암을 다녀왔습니다. 차가 닿지 않는 곳까지 약속시간에 맞춰 가려니, 몸놀림은 급해지는데 오르는 길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두 다리로 걷다가 이내 막대기 하나를 구해 세 다리로 오르고, 또 한참을 가다가 네 다리로 오르면서, 저는 인생 궤도를 다시 수정했습니다. 인생 열두 고개에서‘아직은 열 고개쯤 와 있겠지, 열 고개 초입이겠지.’생각했는데‘ 이제 열한 고개에 와있구나.’라고 말입니다. 죽은 다음에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세상의 평가를 받는 것이 열두 번째 고개라면, 저는 이제 열한 번째 고개를 걷고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불자들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행복하고 상쾌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집착하고 고집합니다. 하지만, 작은 그릇 속에 정체된 물처럼 옹색한 마음으로 살 일은 아니다 싶습니다. 사시절서(四時節序) 중에도 24절기, 365일이 있으며 자연의 모습은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한밤중에 하루가 시작되고 마감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지도 1년 절기 중에 마지막 시간이자 새로운 시간이요, 시곗바늘도 0도에서 시작해 한 바퀴 돌아 360도에 이르면 같은 자리입니다.
이것은 마치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이 오백 동남동녀 가운데 선재를 선택해 53명의 선지식을 찾아가는 시발점을 마련해준 것과 같습니다. 덕운 비구, 해운 비구, 미륵보살 등을 거쳐 마지막에 만난 이가 제일 처음 만났던 문수보살이었을 때, 우리 같으면 억장이 무너지고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재동자가 초심을 잃지 않았기에 보현행원품의 십대원이 드러나는 것을 화엄산림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지막에 만났을 때의 경계는 같은 자리인 것 같고 같은 보살인 것 같지만, 정녕코 같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비추어 봐야 할 것은, 화엄경에 나오는 보살은 열 가지로 고달프지않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고달프지 않은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한결같이 따뜻하고 편안하고 넉넉하며, 너그럽고 포근한 마음으로 모든 이를 감싸 안고 다독거려주는 모습 입니다. 부모 형제 처자 권속이 함께 어우러져 살고, 이웃·도반과 함께 어우러져 살면 언제 만나도 기쁘고 좋지, 고달프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보살님이 이렇게 고달프지 않은 마음을 가지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러해서 어디를 가더라도 고달프지 않은 마음으로 다니고, 온갖 부처님의 법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데도 고달프지 않은 마음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덧붙여, 편안하게 드러누워 있는 것이 고달프지 않은 삶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고 고단하더라도 보살은 절대로, 불자는 절대로, 우리어버이는 절대로 고달픈 생각을 내지 않음을 알고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내가 나를 이해하고, 내가 나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래야 내 가족도 들여다볼 수 있고 이웃도 들여다볼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누구를 알고 누구를 이해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마음을 먼저 들여다 보자고요. 우리 마음은 분별식심으로 항상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흔들리는 것이 깃발 일까요, 바람 일까요.
육조스님은 그것을 마음이라고도 했습니다. 또한, 능엄경에서는 ‘흔들리는 것은 티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설법전 안에도 미세한 먼지가 가득하겠지만, 조도가 낮은 전깃불 아래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깨끗한 집에서도 문틈 사이로 햇빛이 비치면 비로소 수많은 먼지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밝은 햇빛이 들어와야만 우리 눈에 티끌이 보이지, 그냥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집채만 한 번뇌는 아무리 미련하고 어리석고 욕심 많은이라도 느끼고 알 수 있지만, 미세한 번뇌망상은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 정진을해야 하고 수행을 해야 하며 불자의 따뜻한 기운을 가지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밝은 빛이 모자라 티끌 같은 미세한 번뇌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 생활불교인들이 번뇌를 여의는 공부를 통해 지혜를 드러낸다면 번뇌는 저절로사라집니다. 아침에 햇빛이 들면 어둠이 저절로 사라지고 해가 지면 어둠이 저절로 오지만, 햇빛이 어둠을 쫓아내고 밝음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도 그렇습니다. 행복과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도 나에게 있고, 불행도 나에게 있는데 어떤 것을 선택해서 살 수 있느냐가 우리의 관건입니다.
TV를 보다가 재미가 없으면 쉽게 채널을 바꾸는 것처럼, 자기 속에 들어있는 채널도 바꿀줄 알아야 합니다. 중생심이 작용해 분별식심과 번뇌망상으로 찌들어 있는 우리의 상태를 알고 진지한 삶을 살아가는 수행정진과 기도의 득력을 통해 먼지처럼 미세한 번뇌를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맑고 깨끗해지게 되는 이치를 응용하면 됩니다. 그러니, 스스로 번뇌망상을 일으켜 삼계 육도 사생 칠취에 윤회하는 원인을 짓고 있는 우리 중생들은 이제 놓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에 와서 기도하는 시간만 기도정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매 순간기도정진을 통해서 항상 우리 마음속에 따뜻한 기운, 넉넉한 기운, 온화한 기운, 편안한 기운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저잣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처럼 속되게 행동하고 살면서도 변화하지 않는다면, 이는 미세한 번뇌를 비추고 있지 못함이며 불자로서 충분한 기도와 정진을 하고있지 않은 것입니다.
엊그저께 백운암에 갔다 온 것 같은데 벌써 30년이 넘었다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도 귀한 시간을 아끼고 소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타성과 게으름에 빠져 현재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 내일이 오늘보다 더 건강할 수 없습니다. 지금 힘이 있을 때 용기를 드러내어 미진하고 부족한 것을 채우고자 열심히 살아가는 불자의 모습, 그리고 가족들도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끄는 불자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 아닐까요.
(月刊등불3월에서 옮김, 智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