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 : 36 - 39절
“넉넉히 이기느니라”
2024년 첫 예배를 드리면서 민수기 13장 30절 말씀을 통해 갈렙이 이렇게 고백한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었던 적이 있습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현실은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의 크기가 거구여서 그들 앞에 서면 메뚜기 같아 보일 정도로 초라한 형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렙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시기로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만을 믿고서 능히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선포를 했던 것입니다.
결국은 믿음대로 선포했던 갈렙은 능히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현실만 보면서 좌절하고 낙망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들의 말처럼 메뚜기 같이 바람 한 번 불면 날아가 버리는 연약한 존재가 되어서 광야에서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자는 의미에서 제가 읽었던 책 한 권도 소개를 해 드렸었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저자는 정신분석을 하는 전문의였습니다.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12년 동안 일을 하면서 누가 봐도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안정적인 삶을 살던 사람이 마흔 두 살에 파킨슨병에 걸립니다. 파킨슨병은 치매 다음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 퇴행성 뇌질환입니다. 그런 병을 정신과 의사가 마흔 두 살에 가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절망적이었겠습니까?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깊이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 전혀 없더랍니다. 그래서 내린 스스로의 진단을 보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몰두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보다 더 몰입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결단으로 살아도 이길까 말까인데 2024년 마지막 주를 맞이하면서 성도님들은 갈렙처럼 능히 이기는 삶을 살았는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렙처럼 능히 이기는 삶을 살았다면 올 한 해는 어느 누구보다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셨을 것이고 겨우 이기거나 올 한 해도 패배의 삶을 살았다면 기쁨보다는 걱정, 염려가 너 많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건강한 믿음을 가지려면 피드백을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어도 나랑은 상관이 없어!” “지난 주 들은 말씀, 올 해 첫 주에 들었던 말씀은 기억도 못하는 말씀들이기 때문에 더 이상 기억하거나 점검하는 것을 의미가 없어!” 이런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다음 주도, 그 다음 주도, 내년에도, 어쩌면 주님 다시 오실 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제가 자주 성도님들에게 질문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작년 보다 오늘, 또는 몇 달 전보다 지금 더 좋은 믿음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 피드백을 통해 능히 이기지 못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면 각성을 하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세워서 능히 이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싸우고 있는 영적 싸움의 본질인 것입니다.
별다른 변화도 없고 성장도 없고 이기는 일도 없는데 마냥 주일 예배만 드리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봉사와 헌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직분을 맡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난 괜찮을 거야! 이런 생각이 정말 위험한 생각이기 때문에 그런 나쁜 생각의 습관에서 빨리 벗어나서 능히 이기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넉넉히 이기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꼼꼼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우리가 겪게 될 믿음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36절에 보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물론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메시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생각하며 그냥 지나칠 수 있는데 요즘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도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를 그 어느 누구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럽처럼 완전히 망하지는 않겠지만 한국 기독교도 서서히 위축되고 축소되어서 소수가 믿는 종교로 전락할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전체를 봐도 그렇지만 우리 개개인의 믿음 또한 그렇게 타락하고 연약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 말씀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위험한 생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2024년을 마감하며 대다수의 정탄꾼들이 그랬던 것처럼 절망적인 생각을 가지고 부정적인 보고를 하면서 2025년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새 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반전의 메시지를 주시는 하나님의 섬세함을 보세요. 37절에 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능히 이기나 넉넉히 이기나 비슷한 표현이지 않겠습니까?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밝혀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잘 나서도 아니고, 특별한 훈련을 받아서도 아니고, 우리의 믿음이 뛰어나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2022년 중국 쓰촨성 원촨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1~2분 사이 땅이 진동하며 천지가 진동하더니 산천은 다 흔들리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생지옥 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사망자가 9만 명에 이르고 부상자가 37만 명 이상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었겠습니까? 그런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구조대가 한참 건물 더미를 파헤치는데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등이 콘크리트 더미에 찌그러진 모습으로 죽어있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미 죽은 그 여인을 들어 올리는 순간 여인의 품에 한 갓난아이가 먼지투성이의 상태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조대가 아이를 안고 일어서려는 순간! 아이 옆에는 엄마의 핸드폰이 있었는데 구조대가 핸드폰의 화면에 쓰여 진 글을 보고는 그만 통곡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화면에 있는 내용은 "아기야, 네가 만일 살아난다면 이 엄마가 너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마렴…."
최선을 다해 필사적으로 아기를 지킨 한 어머니의 모성이 우리에게 적지 않은 감동을 주는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38, 39절을 보세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중국에서는 아이는 살렸지만 더 이상 어머니의 사랑을 줄 수 없는 끊어진 사랑이 되었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심지어 사망도, 생명도, 천사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이나 깊음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랑,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이고 능히 이기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다가 약속 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넉넉히 이기는데 우리가 할 것은 별로 없습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서 그 사랑 안에 거하기만 하면 이길 수밖에 없는 영적 구조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 셋을 홀로 키우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자기 집에 온 지인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자녀 셋 중 누구를 가장 사랑하나요?" 그러자 여인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막내가 병들었을 때, 그때는 막내를 가장 사랑했습니다. 둘째가 집을 떠나 방황했을 때, 그때는 둘째를 가장 사랑했고요. 큰 아이가 학교성적과 이성 문제로 괴로워할 때, 그때는 큰아이를 가장 사랑했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했을 때, 회개하는 마음으로 애통하면서 살았을 때, 실패를 통해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을 때, 장미꽃을 구했는데 장미꽃 가시 때문에 속상해 하고 있을 때…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우리를 품으시고 감싸 안으시고 세상 풍파를 대신 맞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넉넉히 이기지 못하는 초라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였는데 전기 대학에 합격하지 못해서 후기 시험을 치른 후에 졸업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졸업선물은 꿈도 꾸지 못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졸업을 며칠 앞둔 날, 어머니께서 양복상의를 사오셨습니다. 너무 기뻐서 그 옷을 바로 입고는 옆 집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며 돌아다녔습니다. "우리 어머니께서 사주셨어요!" 어머니는 일당 1만 5천원을 벌고 계셨는데, 며칠 일한 것을 모으고 또 모으셔서, 바지는 없이 상의만 사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좋아하는 학생의 모습을 보시고 다음 며칠 동안 야근까지 하시면서 3만원 짜리 바지까지 사주셨습니다. 그래서 학생은 멋진 양복에 천 원짜리 빨간 넥타이를 매고, 졸업식 예행연습장에 갔습니다. 그 때 그 학생을 잘 모르는 선생님 한 분이 지나가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 이 학생은 이렇게 좋은 옷을 입은 걸 보니 좋은 대학에 붙었겠구나. 자네 어느 대학에 붙었나?" "아닙니다. 선생님. 저는 떨어졌습니다." 선생님은 좀 당황하셨지만 한 가지 질문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자네 옷은 참 멋있는데…." "아. 예~ 제 어머니께서 사주셨는데요. 어머니께서 그러셨습니다. 떨어져도 자식이라고요."
이런 사랑은 받은 학생들은 세상을 살면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고 이기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습니까? 독생자까지 버리면서 우리에게 천국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권세를 주셨는데 무엇을 해도 능히 이기고 넉넉히 승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그 사랑 안에 살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넉넉히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날마다 이기다가 예수님 오시는 그 날 최후 승리자가 되어서 다같이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 2024년을 마감하고 2025년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