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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문장 5기 고영경입니다.
벌써부터 어떻게 써야할 지 막막하기만 한데요,
이 글에는 마땅한 모범답안이 없는 수기이기에, 저는 합격수기보다는 지난날의 제 자신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식으로 써볼까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중학교 때부터 국문과에 들어가길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공부를 했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솔직히 중학교 때의 저는 제가 공부를 못한다는 생각은 안했습니다.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는 실력이 천지차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던 우물 안 올챙이였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저는 서울대를 갈 줄 알았고, 2학년 때는 연고대를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전과목 3.5등급. 반 석차 8등. 세상에서 가장 어정쩡한 성적으로 저는 앞길이 캄캄할 뿐이었습니다. 서울로는 가고 싶은데, 이 정도로는 전조대 갈 실력밖에 되질 않았습니다.
무작정 서울만 꿈꾸고 있는 제게 선생님은 비웃음과 잘 해봐라 하는 텅 빈 격려만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막막해 하고 있던 고등학교 1학년 11월 쯤, 학교 앞에서 나누어주던 공책을 받았습니다. 그땐 ‘문장’이 아니었던 학원의 홍보공책이었습니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제 눈에 두드러지게 보인 것은 ‘터닝포인트’라는 단어였습니다.
순간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 있어서 터닝포인트일지도 모르겠다고.
엄마를 무작정 졸랐습니다.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저를 알았던 엄마였지만 그것만은 반대였습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충분히 서울로 갈 수 있을 실력이라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저를 말리고 말리셨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린 게 아니라 학원에 가고 싶어 하던 저를 무시했습니다.
오기가 났습니다. 엄마와 상의도 없이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혼자 상담 날짜를 잡아놓고 엄마에게 통보를 했습니다.
터키에 가지 않겠노라고. 그때, 엄마와 저는 터키에 갈 계획이었습니다. 3년 동안 그것만을 기대했던 제게 있어서 터키가 어떤 의미인지 알았던 엄마는 결국 한숨을 폭 쉬며 딱 3개월만 다녀보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 성과가 있다면 계속 다녀도 좋고, 성과가 없다면 바로 끊자는, 일종의 계약을 맺은 채로 학원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3월.
처음 학원에 가서는 이곳이 바로 신세계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글을 쓰고 있던 언니들과 오빠들 그리고 주혜와 일하. 모두가 존경스러웠습니다. 처음 시다운 시를 써서 선생님께 보여드렸을 때 쫙쫙 그어지는 행들과 함께, 저는 결심했습니다.
이제 나는 無의 상태로 되돌아가야한다. 제가 알고 있던 지식들이 그곳에서는 쓸모없는 지식이었고, 제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곳에서는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문장에서 ‘백지의 상태’를 배웠습니다.
선생님은 문학이 예체능이 아니라고 우겼습니다.
새학년 새학기. 저는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었으나, 처음부터 트러블이 생기고야 말았습니다. 우리 문장인이 겪는 가장 큰 문제가 선생님들과의 마찰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이 저에게도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 학원책자를 드리고 설명에 보충까지 했지만 선생님은 “흥!”이라는 한마디로 저를 눌러버리셨습니다. 키는 쥐꼬리만 했지만 자신이 한 번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절대 그 생각을 굽히지 않는 고집 중에 놀부고집이었습니다.
어렸던 저는 선생님의 말씀에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굽신굽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말인 토요일 일요일. 그리고 가끔 병원 간다고 뻥쳐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저는 한 달에 겨우 10번 정도만 학원에 갈 수 있었습니다.
돈이 아까웠습니다. 시간도 아까웠고, 모든 것이 아쉬웠습니다.
다른 선배들과 친구들은 일주일에 5번이 넘게 가서 매일매일 글을 쓰고 배우는데, 저는 학교에 처박혀서 공부만 해야 했습니다. 사실, 공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시간들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야자시간에 필사를 했습니다. 필사를 어떻게 하는 지도 몰랐던 그때, 저는 남쌤의 시를 무작정 공책에 옮겨 쓰면서 영단어 외우듯 시를 달달 외웠습니다. 빨간 줄까지 쳐가며 선생님이 지나갈 때마다 공부하는 척, 훼이크를 보여주었습니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가는 시간, 버스로 1시간. 그 시간조차 아까워 시집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내릴 곳을 놓쳐 난생 처음 보는 곳에서 내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남들이 볼 땐 허세라고 하겠지만 저에게는 꿈을 향한 필사적인 노력이었습니다.
남들은 학원에 가서 열심히 필사하고 글을 썼지만 저는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항상 뒤처진다는 느낌으로 학원엘 가야했습니다.
필사를 하면서 ‘시간을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처음 나간 백일장은 새얼백일장.
처음 나간다는 생각에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이처럼 두근두근 떨렸습니다. 새얼백일장은 한 달 동안 썼던 제 시의 실력을 테스트해보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엄청난 경기장과 사람들에게 기가 죽었지만, 저는 엄청나게 열심히 썼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지용. 물론 처음 나간 대회였고, 실력도 형편없었던 시절이었지만 저는 꼴등상이라도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이었으니까요. 그 대회 이후 저는 제 자신이 바닥인 걸 알았습니다.
글을 쓰다 ‘제 자신’을 알았습니다.
선생님은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엔 제게 관심이 코딱지만큼도 없을 분이 백일장을 다녀온 제게 “상은?”이라는 말로 반기셨습니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한 대한민국 사회를 학교에서 알았습니다. 아직 발표가 안 났다는 말만 세 달을 했습니다. 지나가다가도 절 보면 “아직도 발표 안났니?”라는 말을 툭툭 던지셨습니다.
물론 그 처참했던 결과는 얼마 후에 나왔지만 화가 났습니다. 선생님의 치솟은 코를 눌러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선생님께 ‘중앙대 백일장’참가신청서를 드렸습니다.
중앙대 백일장에서 상을 탔습니다.
그렇게 큰 대회에서는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상이었습니다. 당일시상이었지만 상을 당연히 안 탈거라고 예상해 집에 갔던 터라 시상식에는 참가하지 못했었습니다. 제가 수상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처음 떠올랐던 사람의 얼굴은 엄마도 아빠도 아닌 바로, 담임선생님의 고집쟁이 얼굴이었습니다. 드디어 코를 눌러줄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상을 하나 둘 씩 타면서 선생님께 인정을 받았고, 결국 월수금 간다는 조건으로 저는 학원에 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당시에도 학원은 월요일에 쉬었기 때문에 수,금,토,일 일주일에 4번을 갔지만 그것만으로도 굽신굽신 감사감사했습니다.
학원에 다니면서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장관상을 받았습니다.
입이 쩍 벌어지는 상이었습니다. 글을 안 썼다면 평생 받아보지도 못할 상이었습니다. 수상자에 제 이름이 뜬 걸 본 순간 ‘우와, 내 인생에 이런 날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서울이 성큼, 내 앞으로 다가온 것을 느꼈습니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저는 광주 변두리가 다가왔음을 느껴야 했지요.
상을 받으면서 ‘꿈이 실현될 것’을 느꼈습니다.
발목에 깁스를 했습니다.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오는 날이 일주일 연속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4월. 남들은 평생 한번 할까 말까 한 깁스를 하다니. 발목은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습니다. 끊어져 평생 붙지 않을 거라는 인대. 앞으로 하이힐을 신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선생님의 말. 황망, 절망, 좌절, 캄캄, 현기증, 그리고 기절.
눈을 떴을 때, 현실을 알았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몇 달 동안은 장애인이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다. 나는 백일장을 다녀야만 한다. 나는 전국투어를 해야 한다. 나는,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글을 써야만 한다.
발로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만약 발로 글을 썼다면 저는 지금 이렇게 수기를 쓴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일이지요.
날마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집으로 저를 픽업해주는 부모님에게 항상 죄송했습니다. 멀쩡한 두 발이 있었다면 부모님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글을 쓰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항상 미안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학원에 다니면서 ‘평범함의 소중함’을 배웠습니다.
수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연속적이었습니다. 목발을 포함해 세 발로 절뚝이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상은커녕 글솜씨도 늘지 않아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친구들은 장원이며 차상이며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저는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항상 미안한 마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글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조금만 노력해도 느는 것이 글솜씨인 것을, 그땐 제 사정에만 빠져 모르고 있었습니다. 심각하게 모든 것을 놓아버릴까 하는데 엄마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말을 하시더군요. 저는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그 언젠가는 내 고통을 보상받는 날이 오겠지.
백일장에 다니면서 ‘꿈의 날이 올 것이라는 확신’을 배웠습니다.
(이 문단은 입학사정관제의 질문 중 ‘역경을 어떻게 극복했나’라는 것의 모범답안임을 알려드립니다. 하하하하하)
수시철이 되었습니다.
저는 입학사정관제를 주로 썼기 때문에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밤을 새는 것이 부지기수였습니다. 힘들게 밤을 새가면서도 저는 조금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꿈에 물들어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공부로 했으면 꿈도 꾸지 못할 대학들을 지원했기에, 엄마는 학원에 다니길 잘 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문득 제가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키가 엄청나게 커져서 저 위에 있던 대학의 문턱들을 내다볼 수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문장을 알고서부터 저는 ‘성장’했습니다.
동국대학교에 합격을 했습니다.
발표가 떴다는 문자 알림을 보고 엄청나게 떨렸습니다. 제가 여태 고생해왔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부모님 얼굴도, 선생님 얼굴도 스쳐지나갔습니다.
합격하셨습니다.
그 일곱 글자에 저는 엄청난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침 학교 쉬는 시간이었고, 저의 소리를 들은 친구들은 무슨 소린가 하여 제게로 몰려들었습니다. ‘합격’이라는 말에 친구들도 놀라고 저를 모르던 옆 반 아이들도 놀랐습니다. 저는 제게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친구들을 떼어놓고 3학년 담임선생님들이 계신 진학실로 곰처럼 달려갔습니다. 선생님은 제 발소리에 놀라 저를 쳐다보시더니, ‘합격’이라는 말에 저를 얼싸안고 천장에 닿아라 방방 뛰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께 소리치셨습니다. ‘우리 반이 서울권 수시는 처음인거지? 앗싸! 일등이다!’
소녀 같이 활짝 웃으며 방방 뛰는 선생님, 얼이 빠져 혼수상태였던 나. 다른 선생님들은 웃으면서도 저를 칭찬하기 바빴습니다. 평소에 저에게 관심도 없으셨던 선생님이 그날따라 예쁘다고 하셨습니다. ‘문학이 무슨 예능...헛!’ 문학을 무시하려다 입막음 당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3학년 처음으로 수시 합격했다는 말에 저는 진학실의 모든 선생님께 이쁨을 받았습니다. 합격 소식은 진학실 칠판에 크게 <동국대 국어국문 수시 합격 고영경>이라고 적혔습니다. 반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어와서는 제게 악수를 청하시고 나간 선생님도 계셨고, 제가 그런 높은 대학에 합격할 줄 몰랐던 선생님들은 놀라움의 박수까지 치곤 하셨습니다.
저는 3학년 최초의 영웅(!)이 된 것입니다. 물론 다른 공부 잘하는 학생들도 많았지만, 서울권으로 수시합격 한 것은 제가 처음이었고, 예체능이었으며,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해 나갔기 때문에 저를 포함해 선생님들과 부모님, 친구들, 친척들까지도 놀랐습니다.
친구들은 부러워했습니다.
2학년 때, 선배들이 서울권 대학에 붙었을 때도, 진지하게 학원에 올 것을 고려하던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수시에 합격하자마자 지금이라도 학원을 다닐 수 없느냐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남들이 다 가는 길로 가면 그만큼 갈 수 있는 길이 좁아지기 때문에 친구들은 전대, 조대 그것도 못가서 동신대 광주대를 썼습니다. 서울에 가는 제가 마냥 부럽다는 말을 했던 친구도 있었습니다. 저보다 공부를 더 잘했던 친구들, 그리고 성적이 전교에서 노는 친구들 역시 전대에 머무를 뿐이었습니다. ‘광주에서 태어났으니 내고향 광주를 지키겠다!’라는 말을 장난스레 하는 친구들이지만 부럽다는 말을 빼놓진 않았습니다.
제가 서울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무작정 동경해오던 서울. 그 모든 것은 ‘문장의 힘’덕분입니다. 제가 만약 문장을 모르고 살아왔더라면 지금쯤 수능공부를 박 터지게 하고 있었겠지요. 그리고 나서도 전대에 떨어질까 전전긍긍하고 있었겠지요.
후배들은 저보다 더 큰 것을 꿈꾸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노력만 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글 안에 자신의 꿈을 풀어 넣고 정확한 미래상만 그려낸다면 후배님들은 서울뿐만 아니라 세계로 나아갈지도 모르겠네요.
지금은 힘들지 몰라도 일 년, 이 년 후의 후배님들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그건 힘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목발 짚고 백일장 안다녀봤다면 힘들다는 말 하덜덜 말어용.
저의 미래와 이상을 꿈꾸게 해준 최금진 선생님, 문지원 선생님, 박경희 선생님께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일 년 여의 시간동안 함께 울고 웃으면서 지내왔던 선배님들, 친구들, 후배들. 정말 고맙습니다.
허세와 거만에 찌들린 저의 모습에 실망한 친구들도 분명 있겠지요. 제게 실망했던 분들, 꿈을 위해서라면 앞뒤 안 가리는 성격 때문에 저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분들, 이 자리를 빌려서 미안하다는 말 하고 싶네요.
저는 문장의 힘을 빌려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구요, 앞으로도 ‘문장의 힘’을 빌려 더 큰 제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문장은 모든 문장인들에게 ‘터닝포인트였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네요.
엄청나게 긴 수기였지만 제 진실과 과거가 담겼던 글이니만큼 잘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이 세상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 꼭 하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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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터닝포인트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은데? ㅋㅋㅋㅋ 암튼 추카추카 !!
추카해!!! 자주 보장 ^____^
하따! 수기를 엄청 감동적으로 썼네. 가슴이 찡하다야. 우리 영경이 고생 많았지. 내가 알지. 그래서 앞으론 고생 안 하고 큰인물이 되리라 믿는다. 더 큰 물에 가면 더 할 일이 많은 법. 이제 너의 목표와 꿈을 수정해가면서 진취적으로 열심히 나아가도록 해라. 영경이 화이팅!!!
슨생님ㅠㅠㅠㅠㅠㅠㅠㅠ선생님은 선생님이 아니예요...스승님입니다요..감사합니다ㅠㅠ!!!!
허세와 거만에 찌들린 고영경에게 축하한다는 한마디를 남깁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 난 허세녀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츄카츄카후기가솔직하당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하하하 동국대 부럽군ㅋㅋㅋ ㅊㅋㅊㅋ
하하하하 너도 동대 썼으면 갔을겨 하하하하 장학금 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