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앙 디오르 (프랑스어: Christian Dior, 1905년 1월 21일 ~ 1957년 10월 24일)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패션 디자이너 중 한명으로 세계적인 브랜드 크리스티앙 디오르 S.A. (Christian Dior S.A.)의 창시자다. 1947년 첫 콜렉션에서 선보인 뉴 룩 (New Look)으로 제1급 디자이너로 인정받았다. 이후 매 시즌 튤립 라인, H 라인, A 라인, 애로우 라인 등 새로운 디자인 라인을 선보이며 전 세계 패션계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상품의 범주를 확대시킨 글로벌 브랜드 크리스티앙 디오르 S.A. 설립을 통해 전후 패션 산업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1905년 프랑스의 바닷가 마을 노르망디 그랑빌에서 태어났다. 알렉상드르 루이스 모리스 디오르(프랑스어: Alexandre Louis Maurice Dior)의 다섯 자녀 중 둘째로 유복한 실업자의 아들이었다. 그는 항상 우아하고 세련되게 치장한 어머니를 여성의 모습으로 확립했고 이는 후에 크리스티앙 디오르 디자인에 영감을 주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최초의 향수인 ‘미스디오르’도 자신이 누이를 회상하며 만든 것이다. 부모님이 바라던 대로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에콜 리브르 데 시앙스 폴리테크 (프랑스어: the École des Sciences Politiques)에서 공부하고 외교관을 지망했지만 그는 건축과 예술에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학교를 떠나 아버지로부터 받은 돈으로 1928년 미술관 자크 봉장 (Jacques Bonjean)을 열었고,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장 콕토 (Jean Cocteau), 막스 자콥 (Max Jacob) 등의 작품들을 다뤘다.[1] 1930년 공황으로 집이 파산하고 1931년 어머니와 형이 세상이 떠난다. 갤러리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그는 친구 장 오젠느 (Jean Ozenne)에게 패션 드로잉을 배우고 막스 케나 (Max Kenna)에겐 색칠하는 법을 배워 생활의 방편으로 오트 쿠튀르 (haute couture)에 모자와 드레스의 크로키를 그려서 팔았다.[2]
이후 1938년부터 로버트 피제 (Robert Piquet)의 양장점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에 종군하면서 한동안 디자인을 하지 않고, 제대 후 프로방스의 칼리앙 (Callian)에서 농장을 운영했다. 전쟁 중 독일은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스 영화를 규제했지만 시대극은 장려했기 때문에 디오르는 이러한 영화의 의상을 디자인했다. 그 뒤로 루시앙 르롱 (Lucien Lelong)의 쿠튀르에서 피에르 발맹와 함께 모델리스트로서[3] 일하다 1946년 독립해 섬유 회사 Marcel Noussac의 지원을 받아 ‘메종 크리스티앙 디오르(프랑스어: La Maison Christian Dior)’를 설립한다.
전성기 편집 1947년 2월 12일 자신의 첫 콜렉션을 열었고 이때 선보인 디자인이 ‘뉴 룩'으로 불리면서 세간의 관심을 받아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같은 해 패션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리는 니먼마커스상(Neiman Marcus Award)을 수상, 세계 각지에 지사를 설립하고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년대 전 세계적인 규모의 왕성한 활동을 하는 패션계를 이끄는 디자이너 중 하나였다. 1956년에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도뇌르 훈장(프랑스어: Ordre de la Légion d'honneur)[4]을 받았다.
죽음 편집 그는 1957년 10월 23일, 이탈리아 투스카니 (Tuscany)의 스파 몬테카티니 (Montecatini)에서 5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57년 스핀들 라인을 발표한 후 사망했는데 디자인 박물관의 인물 소개에 따르면 그의 죽음은 생선뼈가 목에 걸린 후 심장 마비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1] 《타임》의 사망 기사에서는 카드 게임을 하던 중에 심장 마비로 죽은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5] 파리에서 열린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장례식에는 2,500명 이상의 인원이 참석했다고 한다.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사망한 후 메종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여러 명의 수석 디자이너에 의해 유지되었다.
1957년 ~ 1960년 이브 생 로랑 (Yves Henri Donat Mathieu Saint Laurent, 1936년 8월 1일 ~ 2008년 6월 1일) 1961년 ~ 1989년 마크 보한 (Marc Bohan) 1989년 ~ 1996년 지안 프랑코 페레 (Gianfranco Ferré) 1996년 ~ 2011년 존 갈리아노 (John Galliano) 2012년 ~ 현재 라프 시몬스 (Raf Simons) 메종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생긴 지 100년째인 2005년,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생가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수집해 온 디오르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들과 보석, 패션 사진, 회화 등 다양한 작품이 연대순으로 전시되었다.
어원 편집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뉴 룩 (New Look)의 본래 라인 이름은 코롤라 (corolla; 프랑스어: corolle)지만, 1947년 S/S 콜렉션에서 선보인 작품을 보고 하파스 바자 (Harper's Bazaar)의 편집장 카멜 스노우 (Carmel Snow)가 “이것은 확실히 뉴 룩이군요. (“Your dresses have such a new look.”)”라 말한 이후 ‘뉴 룩’이라 불리게 되었다.
스타일 편집 뉴 룩은 매우 여성미를 강조한 디자인이다. 디오르는 형태와 실루엣을 만드는 것에 정통했다. 그는 스스로 “I have designed flower women."라고 언급하며 곡선미를 강조하고 관능적인 실루엣으로 여성의 몸의 재구성을 시도했다. 이러한 실루엣에 맞추기 위해 힙의 주름장식, 코르셋, 패티코트 등을 입었고 몸에 잘 맞도록 케임브릭 (cambric)과 타피타 (taffeta)로 드레스를 만들었다.[2] 동글고 완만한 어깨, 허리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게 퍼지는 풍성한 플레어 스커트 (flare skirt), 가늘게 조인 허리로 전체적으로 8자를 이루는 여성스러움과 우아함을 극대화 시킨 실루엣이었다. 비교적 길이가 길고 드레스가 플레어가 많았기 때문에 삼각형을 이루는 피라미드 스타일이었고 소매도 여성스러운 라글란 소매 (raglan sleeve), 돌만 소매 (dolman sleeve), 목 부분도 윙 칼라 (wing collar) 등을 사용했다.
의의 편집 디오르는 전후의 참담함과 우울함을 아름다웠던 과거와 안락함, 부드러운 과거로 복원하고자 했으며, 일상에서 벗어난 환상적인 신화에 입각해 화려함과 귀족적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당시 전쟁에 계속되면서 궁핍한 생활에 시달린 유럽인들은 여성성을 강조하고 비싼 천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뉴 룩을 지나친 사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당시는 남녀의 구분이 확실치 않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옷감을 절약하는 형태와 밀리터리 룩이 유행했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억눌려있던 여성미에 대한 욕망이 한번에 분출되면서 뉴 룩은 패션계의 새 바람을 불러왔다. 전쟁에 영향을 받은 1940년대 패션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가 대성공을 이룬 것이었다. 또한 디오르의 뉴 룩은 전쟁이 끝나고 남자들에게 일자리를 돌려주고자 전쟁동안 공장에서 일했던 여성들에게 선전하던 서구정부의 정책과 잘 들어맞는 여성상을 만들었다.
첫댓글 바이올린 비올라 레슨 안내
2호선.신분당선 강남역에 레슨실을 가지고 레슨하는 중입니다.
레슨실이 강남역 5번 출구 바로 옆에 있습니다.
레슨은 일요일 제외하고 매일 있고요~(사정에 따라 시간 변경도 가능합니다~)
레슨비는 월4회 레슨에 8만원입니다. ( 1개월에 8만원 )
그룹레슨이라서 합리적인 레슨비로 부담없이 장기간 개인레슨을 받으실수 있습니다 (공간만 여럿이 한공간을 쓰고 진도는 각자 개인적으로 나갑니다)
독자적으로 오케스트라도 가지고 있습니다~
일정 수준 이상 진도 나가시면 참여 가능합니다
문의전화 010 9930 5313
본문 좌측 상단의 패션이야기를 누르시면 카페 메인 화면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