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미동 시범단 출신 00기 000입니다. 저는 원장님께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시범단 단원으로 지도 받았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선 태권도를 하지 않았지만 군대 다녀와서 태권도 사범이 되어 이제는 개인 도장도 운영하고 대학도 다니면서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제가 원장님과 나이 차이가 삼십년이 넘게 나네요.(웃음) 일흔을 넘기신 원장님께서 제 나이인 마흔 초반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원장님께서 무엇을 우선적으로 하고 싶으신가요?
원장님에 관한 남아있는 최초의 보도 자료인 00신문을 보면 장수군민들에게 무료로 태권도를 보급하여 7개면에 10개의 분관을 둔 1600명의 관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10대의 나이 어린 사범이 성취하기엔 너무나 커다란 족적인데, 분관이 어떻게 생기고 성장했는지, 조직 관리를 어떻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자세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기록을 보면 고등학교 졸업 후에 곧바로 군대 가지 않고 ?년 후에 입대합니다. 장수군에서 태권도 지도가 좋아서 입대를 미룬 건지, 군대 가기 싫어서 延期연기한 건지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습니다.
- 입대한 해는 정확히 19??년입니다. 제 나이 2?살 때지요. 당시로선 상당히 늦었지요. 장수에서의 사범 생활은 태권도를 마음껏 가르칠 수 있어서 좋았지만, 무보수로 가르쳤기에 궁핍한 가정과 어린 동생들을 보면서 얼른 군대라도 가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근데 제 나이 또래들이 입대 영장이 나오는데 저만 나오지 않는거예요. 병무청에 얘기를 해도 모르겠다는 답변만 돌아왔어요. 1.21 사태라고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 병역 기간이 가장 긴 3?개월로 늘어난데다 월남전 참전 등으로 군 복무가 힘든 시기였어요. 제 상황도 경제적 궁핍 속에서 고민이 많았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입대를 원했는데, 저의 고향 후배이자 태권도 제자와 함께 입대하게 되었지요. 당시에 하사관 업무가 힘들었는데, 하사관을 별도로 모집하기 위해 고졸 이상 대학 재학 중인 신체 갑종을 뽑느라고 제 입대가 늦춰진 거였어요.
결국 하사관 모집으로 입대하여 00개월에 걸쳐 힘든 하사관 훈련을 받고, ???? 거쳐 육군행정학교에서 태권도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2군 사령관 채명신 소장의 경호원이자 수행비서로 발탁되어 사령관 비서실에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 공표에 채명신 사령관이 반대하고 그 여파로 승급에 누락 되어 저는 다시 육군행정학교에서 태권도 교관으로 군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미동초등학교 태권도부와의 인연은 당시 미동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께서 육군행정학교 00교장님께 군대의 민간 지원 차원에서 태권도 사범을 부탁한데서 시작합니다.
군대에서 미동초등학교 태권도부와의 인연이 특별하네요. 원장님께서는 미동에서 33년, 청장년 시기를 모두 어린이들에게 바치잖아요? 한국 남자들 세계에서 군대 얘기가 매우 중요한데, 태권도와 관련하여 군대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나요?
- 우선 육군행정학교에서의 태권도 교관 생활이 각별합니다. 당시 월남전 참전으로 육군 전체에 태권도 수련이 중요하여 장교는 00주, 하사관은 00주, 행정학교에 와서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당시 행정학교가 지금의 국군체육부대의 전신이라 볼 수 있기에 태권도 교관으로는 저 말고도 여러 명이 배속되어 나누어서 지도했어요. 또한 유도, 레슬링, 권투 다른 스포츠 분야에서도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교관으로서 자기가 맡은 鬪技투기 종목을 가르쳤습니다. 투기 종목의 교관들끼리 서로 친했기에 남는 시간에 서로가 다른 종목을 배우는 일종의 교환교육을 실천했다는 점이 이채롭습니다. 저는 당시 권투와 유도를 배우면서 태권도에서 부족한 주먹 기술과 낙법 등을 좀 더 깊이있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최고의 선수들에게 서로의 기술을 배울 수 있었기에 저의 태권도 세계가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 인연이 된 교관들이 나중에 국가대표 감독이 되거나 외국에 나가 지도자로 成功성공하게 되었지요.
군대에서 제 태권도 실력을 알아본 000사범이 주선하여 저도 군 제대 후 미국에 가서 대학을 다니면서 도장을 운영할 수 있는 조건으로 미국에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一生一大일생일대의 중요한 기회가 온 거지요. 당시에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미국에 갈 기회는 드물었거든요. 이것 또한 태권도가 만든 인연입니다. 하지만 이 조건은 미동초등학교 태권도부 학생들과 인연이 되면서 물거품이 되지요. 태권도를 소재로 한 부귀영화와 어린이 사이의 갈림길에서 어린이를 선택한 거지요. 젊은 날의 제 肖像초상은 어린이에게 끌렸던 거지요.
(채명신 장군 서거 추서장 수여 사진)
채명신 사령관과의 인연도 각별합니다. 지위 높은 2군 사령관이니 아무나 곁에 두고 싶지 않아 저를 비롯한 태권도 교관과 다른 투기 종목 교관들이 면접을 보았는데, 저만 뽑힌 거지요. 사령관의 수행비서는 계급장 없이 제게 개인지프차까지 지급되어 일종의 암행어사 같은 신분이라 사령관 수행 외로는 공관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령관께서 진급에 누락되어 제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도 특별했지요. 채명신 사령관은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시고 독재로 치닫는 박정희 대통령께도 유신 반대를 소신있게 외쳤던 참군인으로서 태권도와도 잠시 000협회장을 맡으셔서 인연이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국기원장으로 재직할 때라 추서단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젊었을 때 인연이 나이들어서도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있어요. 참 묘합니다.
군에서 처음에 악연을 만나 고생했던 일도 있어요. 처음에 하사관 교육을 받았는데, 그때 제 고향 후배이자 태권도 제자와 함께 입대하여 함께 훈련 받았는데, 담당 중대장이 몸시 심하게 구타와 기합을 가하여 제자가 힘들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 역시 같은 조가 되어 제자가 못하면 함께 기합을 받다 팔굼치가 많이 까져서 염증으로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어느 날 중대장이 태권도를 지도하는 시간에 자신의 실력을 뽐낸다고 부대원을 구타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중대장이 자신이 태권도 잘한다고 으시댈 때, 제 제자가 제가 태권도 유단자라고 발설한 것입니다. 그러자 중대장은 저를 불러내어 어디 실력 한번 보자며 즉석에서 겨루기를 제안한 것입니다. 별 수 없이 겨루기를 할 수 밖에 없었기에 중대장의 발차기 공격에 피한다고 점프하여 뒤차기 자세에서 무릎을 접었는데, 중대장이 너무 앞으로 들어와 스스로 제 발에 맞고 코피가 나고 쓰러졌지요. 결국 하사관 교육 받는 내내 중대장의 손아귀에서 갖은 기합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휘관이 마음을 잘못 먹으면 아래 부대원이 얼마나 고생하는가를 똑똑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군에서도 시간이 흘러 육군행정학교에서 태권도 교관을 하다가 채명신 사령관의 수행비서가 되어 제 개인 지프차를 타고 여기저기 순찰하다가 마침 2군 사령부 병원을 지나갈 때 바로 이 중대장을 본 것입니다. 제가 지프차로 옆에 가서 어디 가는지 물으니 병원에 볼 일이 있어 왔는데, 퇴근 시간이 지나 그냥 돌아간다고 하기에 제 지프차에 태우고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암행어사 같은 권한이 제게 있었기에 일사천리로 일을 마치게 도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워서 함께 사령관 공간으로 데려왔지요. 모자를 눌러 썼으니 중대장은 저를 알아볼 리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단 둘만 제 방에 들어와 제 모자를 벗고 제 정체를 알렸습니다. 그는 그제야 무릎을 꿇고 죽을 죄를 지었다고 잘못을 빌었습니다. 저는 다시는 부하 장병에게 나쁜 짓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용서했습니다.
(군에서 만든 교본 자료)
제가 만든 태권도 교본이 총 4종이 있는데, 최초의 교본이 바로 육군행정학교에서 제작한 자료입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태권도 연구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요. 군인들을 일정 기간 동안 어느 수준으로까지 가르쳐야겠다는 교과과정을 계획하고 문서로 만드는 과정에서 태권도 기술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용어 사용에 주의깊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타 무술인 유도와 권투 교관도 있었기에 태권도라는 무도스포츠를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따질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