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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대장경 중아함 MN121 공의 짧은 경 - 소공경
아래는, 최근 까페에 소개된 [불교를 말한다 !] 게시판 2972번글 [공(空)에 대한 짧은 경]을 토대로, 의미 전달에 초점을 맞춰 발췌 요약 개편한 내용이다.
해당 [경] 원문의 전체 내용도 검토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위 2972번 게시글에 나오는 경전 내용 앞의 순번을 표시하고, 해당 게시글과 다른 표현을 쓰는 경우에는 가능한한 해당 게시글의 표현도 {}로 묶어 병기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뜻의 전달과 파악이 중요한 것이므로, 단어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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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난다 :
"공을 굳건히 확립한다 {공의 머묾으로 머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 :
(공을 굳건히 확립하려면, 다음과 같이 마음을 훈련시켜야 한다.)
가령 여기 숲에서는, 마을과 관련한 여러 번잡함이 공하다. 하지만 숲은 공하지 않다. 그러니 마을과 관련한 여러 번잡함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말고, 숲에만 마음을 기울여 숲에 대한 파악만 있도록 한다.
위와 같이 스스로를 정립하고, 정립한 사실에서 당연한 다음의 앎을 확고히 한다.
ⓐ 여기에서는 마을과 관련한 여러 번잡한 파악에 대한 불타오름은 없고{산만함이 없고}, 오직 숲에 대한 파악만큼만 불타고 있다.
ⓑ (그런즉) 여기에선 마을과 관련한 여러 번잡한 파악은 공하고, 숲에 대한 파악은 공하지 않다.
ⓒ (이처럼) 여기 없는 것에서 공을 확신하고, 여기 있는 것은 "여기 이것이 있다"고 선명하게 정립한다.
(ⓐ와 ⓑ 그리고 ⓒ라고 결정함,) 이것이 (이 단계에서) 사실에 입각해 그르침이 없는 올바른 공의 확립이다.
2.
이제 (숲에만 마음을 기울여 숲에 대한 파악만 있는 상태에서) 더는 숲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땅의 특성을 떠올려 그 특성으로서의) 땅에 대한 파악만 있도록 한다.
위와 같이 스스로를 정립하고, 정립한 사실에서 당연한 다음의 앎을 확고히 한다.
ⓐ 여기에서는 숲에 대한 파악의 불타오름조차 없고, 오직 땅에 대한 파악만큼만 불타고 있다.
ⓑ (그런즉) 여기에선 숲에 대한 파악조차 공하고, 땅에 대한 파악은 공하지 않다.
ⓒ (이처럼) 여기 없는 것들에서 공을 확신하고, 여기 있는 것은 "여기 이것이 있다"고 선명하게 정립한다.
(ⓐ와 ⓑ 그리고 ⓒ라고 결정함,) 이것이 (이 단계에서) 사실에 입각해 그르침이 없는 올바른 공의 확립이다.
3.
이제 (땅에만 마음을 기울여 땅에 대한 파악만 있는 상태에서) 더는 땅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공무변처에 대한 파악만 있도록 한다.
위와 같이 스스로를 정립하고, 정립한 사실에서 당연한 다음의 앎을 확고히 한다.
ⓐ 여기에서는 땅에 대한 파악의 불타오름조차 없고, 오직 공무변처에 대한 파악만큼만 불타고 있다.
ⓑ (그런즉) 여기에선 땅에 대한 파악조차 공하고, 공무변처에 대한 파악은 공하지 않다.
ⓒ (이처럼) 여기 없는 것들에서 공을 확신하고, 여기 있는 것은 "여기 이것이 있다"고 선명하게 정립한다.
(ⓐ와 ⓑ 그리고 ⓒ라고 결정함,) 이것이 (이 단계에서) 사실에 입각해 그르침이 없는 올바른 공의 확립이다.
4. 5. 6.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에 대하여도 위의 3.과 같다.
7.
이제 (비상비비상처에만 마음을 기울여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파악만 있는 상태에서) 더는 비상비비상처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만 있도록 한다.
위와 같이 스스로를 정립하고, 정립한 사실에서 당연한 다음의 앎을 확고히 한다.
ⓐ 여기에서는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파악의 불타오름조차 없지만, 생명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만큼은 불타고 있다.
ⓑ (그런즉) 여기에선 비상비비상처에 대한 파악조차 공하고, 생명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만큼은 공하지 않다.
ⓒ (이처럼) 여기 없는 것들에서 공을 확신하고, 여기 있는 것은 "여기 이것이 있다"고 선명하게 정립한다.
(ⓐ와 ⓑ 그리고 ⓒ라고 결정함,) 이것이 (이 단계에서) 사실에 입각해 그르침이 없는 올바른 공의 확립이다.
8.
위와 같이 정립하면,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 대하여 다음이 분명해진다.
이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도 조건지어지고 형성된 것이다.
그 무엇이든 조건지어지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되기 마련이다.
위와 같이 보고 알면, 감각적 욕망과 존재 그리고 어리석음에 기인한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 마음이 해탈하면, 감각적 욕망과 존재 그리고 어리석음에 기인한 번뇌로 불타오름은 없다. 단지 생명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만큼은 불타고 있다.
ⓑ 그런즉 감각적 욕망과 존재 그리고 어리석음에 기인한 번뇌는 공하고, 생명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만큼은 공하지 않다.
ⓒ 여기 없는 것들에서 공을 확신하고, 여기 있는 것은 "여기 이것이 있다"고 선명하게 정립한다.
이것이 사실에 입각해 그르침이 없는 위 없고 올바른 공의 확립이다.
9. 10.
위와 같을 때, 위 없고 올바른 공의 굳건한 확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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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경은 심해탈을 제시하는 전형적인 경전 중 하나이다. 그리고 심해탈의 기본적 사항은 이론적으로 복잡하거나 어려울 것이 없다. 심해탈은 소멸이 알려지기까지의 삼매가 그 골격인데, 삼매는 워낙 단순한 사실들이지 않은가?
이처럼 심해탈문은 그 특성상 이론적 요소는 간결한 반면, 직접 행하기는 어렵다. 삼매수행이라는 것이, 소위 잘 붙는 극소수의 사람이 있다. 안타깝지만, 안되는 이는 정말 잘 안되는 거다. 부처님 당대에조차 그랬는데, 오늘날은 말할 바도 없지 않겠는가?
어쨌든 심해탈문은 소멸이 알려지기까지 집중수행 즉 삼매를 개발하는 것이기에, '나는 없다(무아)'는 점이 정말 선명하게 파악된다. 해탈과 관련해서는 가장 깔끔한 방식이랄까? 특히 부처님 당대의 수행자들에게는 "삼매가 없으면 성취도 없다"는 고정 관념이 아주 강력했기에, 이러한 측면에서 그 시대에는 권위를 갖춘 가장 원칙적이고 정석적이며 설득력 있는 해탈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경전을 읽으면서 그 당시의 문화등을 고려하면 불필요한 혼동이 발생하지 않는다. 제시되는 내용만 살피지 말고, 그러한 내용이 어떻게 있고 없는지 그 조건도 헤아리면 뭐랄까... 어처구니 없이 꽉 막히는 경우는 예방할 수 있다. 그러니 가급적 그 시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읽으면 좋다.
소공경은 심해탈을 제시하는데, 마을과 숲은 심해탈 수행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 마을에서 숲으로 가는 것을 굳이 포장하자면, 마음의 출가? 그 정도라 하겠다.
마을과 숲등이 나오는 서술에서 중요한 것은, 경전의 내용을 보존하기 위한 집단 암송을 돕고 서술 일관성을 위해 등장하는 '공'등의 서술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출가'라 이름할 행위에서 워밍업으로다가 갖춰야 하는 자세다.
어떤 자세인가?
심해탈의 삼매수행은 내적 세계로 돌입해야 하므로, 이 세계는 주관적임을 자신에게 뚜렷하게 정립시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숲에서는 마을의 번잡함이 없다. 주관적 세계에서는 그것이 정녕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그러니 숲으로 들어감에 마을의 번잡함은 끊어야 한다. 없는 것에 마음을 쓰면, 삼매 수행의 출발도 할 수 없다. 삼매수행은 있는 것, 그것도 스스로 결정한 바로 그것에만 마음을 일으키는 거니까...
결국 위에서 마을과 숲이 나오는 1.문단에서의 올바른 공의 확립이란 삼매수행의 기본 자세를 갖추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알아차림으로 현전한 것에만 마음을 두는 훈련 정도의 단계라고 하겠다.
2.문단 이하부터는 본격적으로 삼매가 성취되어야 가능한 것인데, 이건 뭐...적었듯, 삼매가 붙어야 진행되는 거다.
하지만 자신에게 삼매가 붙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제 소공경의 내용을 이해하여 얻는 여러 이득이 있다. 삼매가 붙으면 직접적으로 이로울 수 밖에 없고... 그러니 아래에서는 몇가지 특이점과 필요한 간단한 이론을 살피며 소공경의 뜻을 점검해 보자.
2.문단에서 땅에 대한 삼매가 등장하고, 아래 3.문단에서 6.문단까지는 무색계 선정이 나온다.
흔히 아는 상식에 비춰 좀 특이한 점으로, 2.문단에서 색계의 네가지 선정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사실 당연하다. 색계 선정은, 흔히 말해지는 것과는 달리, 심해탈에서는 핵심 요소가 아니다.
통제의 측면에서 본다면, 색계 선정은 그냥 행복을 대상으로 집중하여 2.문단의 영역을 통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이 아니라 '땅'등에 집중을 해서 해당 영역을 통제해도 그만이다. 심해탈의 측면에서는, 무색계로 진행할 수 있도록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면 충분하다.
2.문단의 영역은 어떤 영역인가? 소위 욕계 내지 색계 선정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좀 어렵고 폼나는 말로 '능작근으로서의 마음이 활동하는(기능하는) 영역'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여기에서도 부처님께서 색계 선정을 제시한 까닭을 알 수 있다. 능작근 영역이므로, 선업을 행하고 그 과보를 누리라는 거지... 우리 중생의 행복을 위해, 색계 선정을 제시하신 거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행복에 노심초사하셨거든...
일상에서도 선업은 불교에서 필수 권장인데, 특히 (능작근으로서의 마음이 기능하는) 선정 영역에서 악업이 발현한다면 정말 위험천만이다. 그러니 더더욱 색계 선정이 중요해진다. 폼나게 말해, 색계 선정은 선정영역에서 행복이라는 세계수 즉 질서를 세우는 작업이라고 할까? 그냥 그런 거지, 엄청 특별시하고 절대시하여 반드시 그게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무조건적으로 색계선정을 요구하는 것은, 냉정하게 말해 그냥 장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무색계 선정은 네가지가 구체적으로 지정되며 다 언급되는 까닭이 뭔가? 능작근으로서의 마음이 작동하는 영역에서는 대상이 다양하여 천변만화할 수 있지만, 무색계 선정 영역은 능작근의 영역이 아니므로 그 네가지 상태 밖에 없다. 물론 기법에 따라서는 그 네가지 상태가 모두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2.문단 땅에서 6.문단의 비상비비상처까지 다음의 공통된 사항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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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서는 A에 대한 파악의 불타오름조차 없고, 오직 B에 대한 파악만큼만 불타고 있다.
ⓑ (그런즉) 여기에선 A에 대한 파악조차 공하고, B에 대한 파악은 공하지 않다.
ⓒ (이처럼) 여기 없는 것들에서 공을 확신하고, 여기 있는 것은 "여기 이것이 있다"고 선명하게 정립한다.
(ⓐ와 ⓑ 그리고 ⓒ라고 결정함,) 이것이 (이 단계에서) 사실에 입각해 그르침이 없는 올바른 공의 확립이다.
>>
위의 서술은, 해당 부분만을 따로 떼어 보면 일견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째서 그런가?
이전 단계에 언급된 A등은 없으니 공이고 지금 단계에서 언급되는 B는 있기에 공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렇게 아는 것이 올바른 공의 확립이라고 말한다. 즉 "지금 단계에서 공이 아닌 B가 있다"고 하는 것까지가 올바른 공의 확립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뭐지? 공이 아닌 것이 있다고 하는 것까지가, 올바른 공의 확립이라고?
실제로는 형식적으로 전혀 모순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전 단계에서는 "A가 있기에 A는 공하지 않다"고 표현했으니까... 수학의 점화식 같은 형식이라고 할까?
좀 더 구체적으로 적자면, 이전 단계에서 A가 있었는데 지금 단계에서는 A가 없다. 그런데 참으로 있었다면, 어떻게 없어질 수 있겠는가? A라는 것은 그 고유의 실체가 없기에, 지금 단계에서 없는 거다. 공하다... 지금 단계에서 A가 공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현재 단계에서는 아직 B가 공한지 공하지 않은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단계에서는 B가 있으니까... 그래서 문장 ⓒ에 '여기 없는 것들에서 공을 확신'이라는 표현이 나온 거다.
이상에서 생각나는게 있을 거다. 연기... 그렇지 않은가? A등이 연기에 따라 있고 없다면, B도 연기에 따른 성립일 것이다. 연기에 따라 성립한 것은 그 고유의 실체가 없기에 공하다. 없는 것에서 공을 확신한다면, 그래서 연기가 그만큼 선명해진다면, 있는 것을 있다고 해도 그것은 공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약간 부족하다. 왜? B는 있으니까... 그래서 삼매를 계속 개발해보니까... 어라... 마음이 소멸해 버렸네?
자... 내적 세계가 소멸해 버렸다... 더 이상 거기에 불타는게 없다. 오직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서만 그 삼매 자체에서 불타는게 언급되지 않는다. 더는 내적 세계에서 불타는게 없다... 그런즉 일관되게 여기 없는 것들에서 공을 확신해 왔다면, 내적 세계에서 공하지 않은 것은 없다. 즉 내적 세계에서 그 고유의 실체를 가진 것은 없다. 확신할 수 있다.
그러면 7.문단의 내용은 뭔가?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 즉 심소멸이 알려진 행자가 그것을 '나'등으로 취하여 기뻐날뛰지 않고 냉철하게 파악한다면, 다음의 두가지 의문과 같은 것이 발생한다.
① 정녕 마음이 소멸했다면, 왜 다시 마음이 발생하는가? 심소멸로 의식은 끝장나야 하지 않는가? 왜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가 깨져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가?
② 좋다. 다시 발생하는 것까지는 걍 넘어가고 싶다. 나는 내 수행 성취에 관해서는 무자게 관대하니까... 근데 말이다. 마음이 다시 발생함에 언제나 '일상의 나'로 돌아오는 까닭은 뭐지? 정말 소멸했다면,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어야 하잖아... 아무리 관대해질 수 있다지만, 이것까지는 좀...
그래서 다음과 같이 알게 된다. 일상의 몸과 관련한 무언가가 소멸하지 않고 있구나... 그건 없어진게 아니구나... 그건 있구나... 정말 냉철하다면, 이러한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여기까지가 7.문단이다.
위와 같은 결론에 이른 후, 이제 8.문단이 어떻게 나오나 보자.
①의 의문에서, (조건지어짐에게는)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 즉 '알려진 심소멸'도 무상하다고 시인한다.
②의 의문에서, (조건지어짐에게는)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 즉 '알려진 심소멸'도 조건지어짐을 시인한다.
또한 다시 점검한다.
'힘'이 알려지는 비상비비상처에서 힘을 거두는 방향으로 향했을 때,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가 성립해 알려진다. 그러니 이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 역시 '방향성 결정' 즉 '형성이라 할만한 것'에 의해 알려진다.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서는 그 무엇도 없다. 그러니 그 경계 자체만으로는 불타는 것이 없으며 조건지어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있음과의 관계에서는 분명 조건지어져 있다. 보다 엄밀히 말해, 조건지어짐에게는 조건지어짐을 떠나 알려지지 않는다. 조건지어진 것은 조건지어진 것이고, 알려짐도 조건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는 조건의 언명도 성립하는 것이다.
드디어 다음을 분명하게 안다.
내적 세계는 일체 공하다, 어리석음등은 공하다. 그리고 알려진 심소멸을 있는 그대로 볼 뿐, 그것을 향해 불타지도 않는다.
일체는 무상하다. 생명력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도 무상하다, 이것이 꺼지면 더 이상 불타는 것은 없다. 불은 꺼진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 심해탈은 (1개의 사실로 구성되는 가장 단순한 '주관적 세계(영역)'들을 통하여) 연기를 확증하는 것이다.
솔직히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가 알려지기 전에는, 직관적으로는 행자에게 이전 단계에 알려지던 것이 없어졌다고 판단되지 않는다. 그래서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가 알려지고 난 이후, 소급적으로 이전 단계도 발생과 소멸이었음을 확신하고 이후 그렇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반면 위의 소공경은 각 단계별로 연기에 입각한 판단 즉 "여기서는 있던 A가 없고 오직 B만 있다"는 판단을 권하고 있다. 즉 각 단계 별로 연기를 제한적으로나마 확정해 나가는 방식을 제시한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전 단계에서 조건발생했던 A가 지금 단계에서 조건 소멸임을 확인하고, 그래서 지금 단계의 B가 조건 발생임을 알아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중론은 그 처음에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연기에 따르는 것, 우리는 그것을 공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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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1
혼동 방지를 위하여,
(하나의 사실로 성립하는 가장 단순한 세계들을 통하여)라는 표현을,
(1개의 사실로 구성되는 가장 단순한 '주관적 세계(영역)'들을 통하여)로 대체하고 회색으로 표시하였다.
cf. 2
의문 ②와 관련하여 보강
위 소공경은 반복 패턴에서 벗어나는 두가지 요소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위에서 언급하였듯, 오직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서만은 그 삼매 자체에서 불타는게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생명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은 모든 단계에서 거론되어야 마땅한데, 오직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와 관련해서만 언급된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라, '생명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이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서만 있었겠는가?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서조차 있는 것이라면, 다른 삼매들에서는 당연히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의문이 생기지 않는가? 왜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서만 있다고 언급되었지? 그 까닭을 알겠는가?
의문을 가져 마땅한 것에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의외로, 그러기는 쉽지 않다.
심소멸로 이제는 정말 남은게 '생명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뿐이라서 그제서야 비로소 언급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없는 것은 없다고 있는 것은 있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하며 공을 정립해 나가던 방식이 마음에 걸릴 것이다.
위의 글을 잘 읽은 이는 다음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의 시작 부분에서 (마음) 자세를 제시함에, '이 세계는 주관적임을 자신에게 뚜렷하게 정립시키는 것'을 언급한 적이 있다. 즉 주관적 세계라는 논리를 관철하다 보면, 다른 삼매들에서 '생명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과 관련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 왜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서는 언급될까? 주관적 세계로 치자면,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서는 그 무엇도 없는데...
우리가 그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있고 없는지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 ②에서 제기되었듯, 마음이 소멸했음에도 다시 발생함에 일상의 나로 돌아오는 것에서 '생명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어떻게 '분명해진다'고 표현하는가? 예로, 공무변처에서 일상의 나로 돌아왔을 때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공무변처의 마음이 참된 것이며, 일상의 나에서도 그 마음은 언제나 있다." 하지만 마음이 소멸해 버렸다면, 그러한 판단은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마음이 소멸했음에도 언제나 일상의 나로 돌아온다. 그러니 주관적 세계를 일관되게 관철할 때,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서야 비로소 '생명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의 영향력은 따로이 있음이 뚜렷해진다.
다시 의문 ②로 돌아가 보자.
② 좋다. 다시 발생하는 것까지는 걍 넘어가고 싶다. 나는 내 수행 성취에 관해서는 무자게 관대하니까... 근데 말이다. 마음이 다시 발생함에 언제나 '일상의 나'로 돌아오는 까닭은 뭐지? 정말 소멸했다면,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어야 하잖아... 아무리 관대해질 수 있다지만, 이것까지는 좀...
마음이 소멸했다고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다면, 그것은 단견이다. 우연론이다. 인과의 부정이다.
하지만 마음이 소멸해도 언제나 '일상의 나'로 돌아온다면 그것은 인과의 긍정이며, 소멸함에도 (소멸을 가로질러) 인과과 긍정된다면 그것은 연기이다.
이상의 판단까지 성립한다면, 이제는 혜해탈이 가능함도 알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
각 단계가 모두 연기에 따라 성립하고 해체되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각 단계에서 모두 해탈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러난 바로 이 법'에서 해탈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멸까지 알려져야 함은, 의심하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믿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류문이다.
어느 정도나 되어야 혜해탈을 긍정할 것인가?
솔직히 소멸이 알려진 행자의 입장에서는, 소멸이 알려질 때까지 수행하지 못했다면, 삼매로 어디까지 성취하든 본질적 차이는 없다.
소멸이 알려지면 혜해탈이 가능함을 아는데, 소멸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 본질적 차이가 없다? 소멸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 삼매는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는 뜻이다.
첫댓글 일단 한번 읽으며 탈오자 수정을 했습니다.
날짜를 지키려다보니, 미흡한 부분이 있을 겁니다. 이상하거나 미진한 부분은 지적해 주세요.
지적하는 것은 아니고 첨언하자면요..
삼매에서 출정해서 삼매상태에서 인식되는 것은 있다고 알고 인식되지 않는것은 없다고 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공을 아는것이고,
삼매에서 출정한 후 삼매상태에서 인식된 것은 있지만 그것이 연기적으로 있는 것이고 머무르지 않아 자성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구경의 공이라는 의미 같습니다.
상수멸정은 삼매상태에서 인식되는 것은 없지만 의도된 것이고 출정한 후 없음이 소멸하기 때문에 무상하고 고정된 자성은 없다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연기 무아 공성은 조건지어지지 않은것이고 연기된 법은 조건지어진 것으로 보면 되겠네요.
수고하셨습니다.감사_()_
심혜탈이든 혜해탈이든 그어떤 수행이든 결국 연기, 무아를 선명하게 알기위한 훈련인거군요. 설명 듣고보니 다시 확연해집니다.
어처구니없는 질문인데요.
우리가 매일 잠에드는데요.
꿈을 꾸는 얕은 단계수면에서 시작하여 그 어떤 인식작용 비슷한 것도 없는 깊은 단계까지 가게 되잖아요.
그 '깊은 숙면 상태에서의 마음작용 없음'과
깊은 선정의 마지막에 도달되는 '심소멸'과 뭐가 다를까 싶거든요.
어처구니 없는 상상이지만..
살펴봐주세요.
눈꽃 님아..잠자다 알려진 것과 용쓰다 알려진 것은 우아함이 다른 거 아닐까 싶다.. ㅋㅋㅋ
방장님 욕보셨습니다..시간이 금인데 우아하신 방장님..()..
그 상태만 보면 차이가 없지만 삼매에서는 마음작용의 사라짐과 일어남을 제어할 수 있고 그 찰나를 알아차려서 기억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른거 같습니다.
뭐 시간 맞춰서 잠자고 제시간에 일어나지는 것도 제어한다는 측면에서 비슷하긴 한데요. 일반적으로 잠자는 동안 알아차리고 기억에 남는건 삼매에 비해 떨어질수 밖에 없죠.
그리고 잠은 몸이 피곤한 상태에서 들고 삼매는 편안한 상태에서 든다는 점이 다르겠네요..
주말에 본글 보강도 하고, 지적에 응하겠습니다. 늦어져 미안함니다.
하루 늦었는데요. 본글 보강을 좀 했습니다. 이상하거나 미진한 부분은 지적하면 됩니다.
넷활동 초창기에 수면 상태를 수행에 전용하는 것을 이야기했다가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보강 내용을 읽어 봐도 알 수 있듯, (앎에서) 본질적 차이는 없다고 해야 합니다.
추가된 부분이 있네요.
경은 암송을 위해 축약된 거라 부처님 당시에는 제자들이 좀더 상세한 설명을 들었을 거라고 보는데요.
이렇게 삼매에 있어 마스터인 방문객님에게 배울 수 있는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밤마다 심소멸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유익한 글을 만날 수 있음에 참으로 기쁩니다.
불교신문 등에 기고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깝다. 정말
'생명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이 있기에 심소멸 했음에도 인과가 성립하여 다시금 '나'로 돌아온다면 결국 '나의 있음'은 이 육체와 함께한다고 할 수 있을텐데요.
그렇다면 생물학적 죽음 후에 우리의 의식은 무엇에 연하여 인과를 거듭 이어가며 윤회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화엄에서 15년을 버티고 있으면서도..
생물학적 죽음 후의 윤회를 긍정 못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 죽음 후의 윤회가 긍정되지 않더라도
무아, 연기, 인과를 받아들임에 하등의 거부감을 갖지않습니다.
방문객님 답변이 늦네요.
질문에 대해 생각해봤는데요..
갈애와 취작이 있으면 내세가 있다.
갈애와 취작이 없으면 내세가 없다.
연기로 보면 내세 또한 조건에 따라 있고 없는 것이죠.
그래서 부처님도 내세가 무조건 없다는 견해는 단견으로 사견이라고 하셨죠.(눈꽃님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가 확신하지 못하지만 부처님이 긍정하신만큼
내세가 조건따라 있을 수 있다고 보는게 맞는거 같습니다.
만약 내세에 화생한다면 내세에 대한 확신도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제가 요즘 좀 많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생명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이 좀 마이 부실해져서요. '좀 마이' 씨리즈라고 할까요.
서술 구조상 문제와 분량등으로 적지 않은 논점들이 좀 있습니다. 다 적으면 난삽해지고, 당장 필요성도 적고, 불필요한 혼동도 생길 수 있고...시간, 게으름 기타 등등...
생각만 하고 스킵하다 보면, 요즘은 어떤 내용을 빼버렸는지 기억이 혼미해지고 그럽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만 언급해 보자면요. 삼매와 존재 표상의 획득, 표상과 무색계선정 그리고 암시에 따른 일상의 영향력, 무색계 선정과 능작근, 해탈과 깨달음 그리고 수행력과 방편, 유여열반등등이네요. 그런데 과거 이미 다 적었던 내용인데다, 위 본글 내용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다 알만한 내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교의 장점 중 하나가요. 그냥 불교 공부를 하다 보면, 생각하는 훈련이 된다는 겁니다. 나이 먹고는 그런 두뇌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불교 공부는 치매 예방에도 좋으려나? 최소한 머리가 둔해지는 속도를 좀 늦춰줄 것 같습니다.
이번 생은 당연히 생명력을 조건으로 취해진 몸과 함께 합니다. 이 몸을 취한 업력은 이 몸과 함께 하거든요.
연기의 이치에 따라 그렇게 성립했습니다.
마음이 해탈하면, 금생에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 몸을 취한 업력과 같은 것을 더는 일으키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태어남은 없다'고 하는 거구요. 마음이 해탈하지 못했다면, 금생의 이 몸을 취한 업력과 같은 것을 재차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인과'라고 이름하는 연기니까요.
위 소공경과 연결시켜 누구나 할 수만 있다면 확인 가능한 사실들을 가지고 판단해 보자면요. 윤회의 기억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도 소멸이 알려진 경우, 다음과 같은 판단이 성립합니다. 물론 윤회의 기억이 알려진 경우라도, 다음과 같은 판단 과정을 거쳐야 마땅합니다. 단순히 윤회등의 기억이 있다고, 무조건 믿고 그러는 거는 좀... 불교에서 권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언제나 면밀히 판단하기를 권합니다.
적었듯, 이 몸을 취한 업력이 소멸을 가로질러 인과를 성립시킵니다. 즉 그처럼 소멸을 가로질러 성립시키는 힘이 바로 지금 여기 있습니다. 있는 것은 있다고 알아야 합니다. 이거는, 위 본글에서 적었듯, 사실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사실에 붙은 판단에 따라 그러합니다.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소멸이라는 특수성이, 죽음과 관련한 판단에서도 나름의 독특한 하나의 기준을 부여합니다.
이제 살펴 봅시다.
소멸을 가로질러 인과를 성립시키는 이 몸을 취한 업력은, 원인이 없이 있는 힘인가? 이것을 긍정한다면, 원인 없는 성립을 긍정하는 겁니다. 즉 원인 없는 성립을 긍정한다면, 최소한 높은 확률로 '일상의 나'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발생해야 하는데 그런 경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문헌을 통해 봐도, 그런 경우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힘은 원인을 가지고 성립하는 힘입니다. 이 힘을 있게 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힘을 있게 한 그 무엇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 힘과 같은 것은 다시 발생할 겁니다. 소멸을 가로질러서요... 소멸을 가로지른다는 것이, 죽음을 가로지른다는 것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죽음이라 이름합니까?
불자는 알려진 사실에 입각한 논리적 내지 합리적 판단으로 윤회를 긍정합니다. 하지만 판단과 믿음은 같은 문제는 아닙니다. 뭐랄까... 그거 그게 맞는 거 같기는 한데, 별로 믿음은 안생겨...그런 경우 많잖아요? 믿음은 강요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같을 수 없는 나와 너, 서로에게 말입니다.
감초 등장임다..우몽은 가끔 사람과 아니 생명과 컴퓨터는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 보는데 아직 정리는 안됩니다..다만 내 스스로 신심의 고양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가령 노트북이 어쪄다 재수 없게도 차 바퀴에 깔려 납짝 사망한 것과 우몽도 노가다판에서 언제 차 바퀴에 깔려서 납짝 사망했다는 생각을 해 보면 별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컴터와 닮은 게 있다면 생전에 프로그램 등이 되 있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비슷해 보입니다.,
올 촌가 작년 촌가(아 기억이) 암턴 세탁기에 이불 빨면서 핸폰을 같이 돌렸는데 .. 살려 낸 것이라곤 나도 모르게
어찌 구글에 연결 된 것들만 살아 났고 그 외는 지금도 찾지 못해 아쉬운 것들이 많습니다..메모라든가 전번이라든가 주소라든가 포토라든가 등등 .,
그런식으로 ..윤회시스템도 비슷할 거 같아요.. 우몽은 여기까집니다..쓰다보니 갠적으로 정리가 더 아리삼삼해지는데요..
소멸이 무서운 건 내가 소멸 되는 게 무섭고 두렵지 소멸자체가 무서운 게 아닌 거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참나니 진아니 하는 부류들이 젤로 무서워하는 것이 .. 연기니 조건생 조건멸이니 다 아는 거 같이
떠들면서도 정작 지는 있는 거 같단 생각은 죽어도 타협이 안되는 거 같아요.. 그러니 마치 컴터 바탕화면이 있는 것처럼 마음도 그렇겠거니 하는 거 같읍니다..
근데 무슥한 우몽은 아무리 보아도 마음이란 마음 따로 있을 수가 없단 겁니다.. 마음은 아메바랑 같이 있던 지렁이랑 같이 있던 돌맹이랑 같이 있던 그런 것이지 .. 지 혼자 용빼는 재주도 유분수지 말임다 .. 아 .. 지송 .. 우몽 오늘 외출했다 지금 꽐라 되서리 지릅니다., 이거시 맨정신에 가능케씀 .. ㅋㅋㅋ
음 ..눈꽃..
더 지름 .. 일테먼 컴터도 어떤 조건으로 있는 것이면 혹 컴터 디엔에이도 있을 거 아닌가 싶어요.. 뭐 생각은 자유라고 봐 주시고 혹 .. 우몽만 모르는 것인가 싶어 쪽팔리기도 하고요.. 혹 또 사람이란 하도 가지각색이니까 우몽 횡설수설에 혹 누가 영감이 생겨날 사람도 또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땡!! 눈까풀이 까무락 까무락 ~~
방문객님 설명 잘 들었습니다.
다시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더불어 부디 체력 길러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