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동안 시끌벅적했던 깐느 영화제....
하하하라는 영화가 비경쟁 분야에서 뭔가 상을 받았단다.
하녀도 뭔가 받았다던데 상을 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긴 하지..
시라는 영화는 각본 상을 받았단다.
하하하에 비해서 하녀와 시는 사전 마케팅을 많이 했는데, 하녀는 광고에서 기대한 바보다 재미없다는 소리도 들리고 시는 윤정희와 이창동이라는 내재적 상품 가치 때문에 여기저기서 자발적 홍보 판촉 활동이 많이 생겨나고 있단다. 재미있는 세상이다.
하하하는? 개봉하면 한 번 볼까나...
시라는 영화를 보고나서 내 아는 선배(평론가)가 나름대로의 평을 내게 보내 주셨다.
아주아주 냉정하게 객관적인 시각 아닌가 해서 같이 봤으면 한다.
이 영화는 우선, 시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로 읽힌다. 시란 무엇일까? 강물 위로 떠내려 오는 여학생의 시체가 클로즈업 되면서 그 옆에 나란히 ‘시’라는 제목이 뜨는 순간, 그 화면은 이미 시란 단지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고, 아니 그 아름다움은 소녀적 감상이나 유치한 말놀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고통과 더러움과 추함 속에서 시는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이 첫 장면은 나에게 더러운 시궁창 한 곳으로 햇살이 비추던 <밀양>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그 장면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햇살은, 신은, 그렇게 오는 거라고, 새삼 감격스러웠던 기억!)
예순여섯 살 먹은 할머니 미자씨가 시를 쓰고 싶어 한다. 이혼한 딸이 남긴 중학생 손자를 키우면서, 파출부 일을 하고 몸이 불편한 노인네 목욕을 시켜가며. 그러다 오른쪽 팔이 저려오고, 치매가 시작되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네는 비아그라를 먹어가며 그녀를 향한 욕망을 드러내고. 손자 입에 밥 들어가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한 그녀의 바로 그 손자가 여학생을 성폭행해서 자살에 이르게 하고. 딸과 자주 전화를 하고 서로 영원한 친구 같다고 얘기하지만, 정작 그 모든 걸 딸에게 얘기하지 못한 채 홀로 감당하고 있는 미자씨가 말이다.
시를 잘 쓰려면 잘 봐야 한다고 ‘보다’를 강조하는 시인(김용택 시인이 김용탁 시인으로 등장!)의 말처럼 시는 세상을 잘 ‘보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 미자씨는 이제 비로소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껏 한 번도 제대로 세상을 잘 보지 않았을 거라고, 앞으로는 세상을 잘 보고, 맛보고, 느끼라는 시인의 말은 그녀를 세상의 아름다움으로가 아니라 세상의 추함과 더러움 속으로 이끌어간다. 여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도 아무 죄의식도 없어 보이는 손자와 그 친구들, 그리고 돈 삼천만원으로 그 죽음을 해결할 수 있다고 모의인지 회의인지를 하는(그것도 심각하고 우울한 회의가 아니라 가볍고 농담이 있고 여유로운 그런 회의!) 부모들과 선생들. 그 사악함과 더러움과 추함 속에 어쩔 수 없이 이끌려가면서,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아름다운 나무와 바람과 새소리에 취하면서.
결국 이 둘 사이에서 혼란을 겪던 미자씨는 추악한 현실을 덮는 일을 포기하고, 사랑하던 손자에게 마지막으로 맛난 피자를 사 먹이고 몸을 깨끗이 해야 마음도 깨끗한 법이라며 손자 손발톱을 잘라준 뒤 손자를 경찰에게 넘긴다. 늙음과 죽음을 앞둔 삶에서 도망치듯 詩 혹은 美의 세계를 추구하던 그녀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현실의 추악한 이면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또 그것에 걸려 넘어졌으니, 아이러니한 것은 그때 바로 시가 태어났다는 것. 죽은 여학생의 세레명을 빌어 쓴 ‘아네스의 일기(고백?)’, 그것은 시를 빌어 아네스에게 바친 미자씨의 고해의 말이기도 하고, 우리들에 의해 버려지고 죽임을 당한 아네스 자신의 되살려진 말이기도 하다. 시는 그렇게, 세상의 더러움과 추악함 속에서, 그것을 응시하고 시인하는 고통과 용기 속에서 태어난다. 죽은 자를 위해 흰 꽃과 함께 바쳐진 것, 그것이 詩다. 그리고 이 詩로 인해 추악한 우리 삶은 숭고함을 얻는다. 미자씨가 진정 아름다운 사람('美子')인 이유이기도 하다.
전작 <밀양>에서 사이비 종교, 사이비 신이 시끄럽게 등장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사이비 시, 사이비 문학이 시끄럽게 등장한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주최하는 낭독회에서 시를 읽고 시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의 말과 몸짓은 얼마나 희극적인지. 음담패설을 섞어가며 시를 낭독하는 경찰관의 모습에서처럼 시는 이미 진흙탕 속을 나뒹굴고 있으니, 어쩌면 “시 그까지 것 죽어도 싸”라는 젊은 시인(황병승 시인이 분한 황명승 시인!)의 말처럼 사이비 시는, 삶이 아닌 시는 ‘죽어도 싸’ 보인다. 그러나 삶인 시, 그것은 죽지 않는다. 그러니 이 영화는 시에 대한 영화이자 삶에 대한 영화이다...
우리도 가끔은 술만 먹지 말고 먹고 살기 위해 아귀다툼만 하며 살지 말고....영화도 보고...그러면서 살자...
때려 부수는 영화도 좋고 늘씬하며 헐벗은 여자가 많이 나오는 것도 좋고 공룡이 툭 튀어 나오는 것도 신기하겠지만, 가끔은 허여멀건할 것 같은 영화도 봐줄만 하다. 봐 줄만 한 게 아니라 보고 나면 몸 속 어딘가가 씻겨 내려간 듯 한 기분이 든다.
영화 보기 전의 나를 잊은 듯 새로운 나를 생각하게도 한다.
영화는, 보고 나서 영화를 되새기고 기억하기보다, 나를 새롭게 하는 게 좋은 영화 아닌가 한다.
내 썰이 그럴 듯 하다면 밀양도 좋고 시도 좋고 솔로이스트도 좋으니 함 보자.
첫댓글 술 없는 모임을 함 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