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혁이가 몸살이 난 모양이다. 어제 학교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동혁이는 지금 팔다리가 아프고, 뱃살이 아프고, 어깨가 아프다.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다.
가을 해가 벌써 동산에 얼굴을 내민지 오래다.
"동혁아, 학교에 가야지."
이때껏 이렇게 늦잠 잔 적이 없는 동혁이가 이상해서 붕붕이가 동혁이 방쪽에 대고 소리쳤다.
붕붕이는 로봇이다. 지금 집에는 동혁이와 붕붕이만 있다. 동혁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먼 별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한 달 약속으로 떠나 있는 동안 동혁이를 돌 봐 줄 사람은 붕붕이 뿐이다.
방문을 열고 보니 아직 잠자리에 있는 동혁이.
"동혁아, 학교갈 시간이야!"
"아이구구 온 몸이 아파 못 일어나겠어."
"진짜 못 일어나겠어? 그럼 학교에도 못 가겠네?"
"응. 네가 대신 학교에 가면 얼마나 좋겠니?"
"정말?"
갑자기 힘이 나는 붕붕이는 벽에 달린 동혁이의 시간표를 보았다. 붕붕이는 로봇박사인 동혁이 아버지가 아주 섬세하게 만든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로봇이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옳지 여기에 있구나. 읽기, 수학 그리고 자율학습 또 야외활 동……, 어라! 동혁아, 자율학습과 야외활동이란 책은 어디 있어?"
"음냐 음, 읽기와 수학교과서만 챙겨 놓으면 돼."
"교과서도 없이 무얼 공부하는 거야?"
"참 시끄러워 죽겠네. 챙겨 주기만 해."
"이제 보니 순전히 공부도 하지 않고 놀았군 어쩐지……."
침대에 네 다리 벌리고 엎드려 누워 있는 동혁이를 보고 코웃음이 나왔다. 곧 붕붕이는 기쁨으로 출렁댔다. 그렇게도 가보고 싶은 학교에 갈 기회가 온 것이다.
"내가 변장하여 가면 감쪽같이 몰라볼 게다. 럴럴럴럴러"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붕붕이는 솜씨 좋게 가방을 챙기고, 옷을 챙기고, 동혁이의 인조 탈을 뒤집어썼다. 이렇게되면 옷을 벗겨 보기 전에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걸.
"학교 가는 버스는 9번 버스지?"
"왜? 네가 진짜 학교에 갈거니?
"그럼. 걱정말고 너는 너무 지쳐 있으니 하루 푹 쉬어."
"우리 학교 버스는 노란색 스쿨버스야. 우리 집 앞에 8시 20분에 온다."
그래놓고도 동혁이는 걱정이 된다. 그러나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어쩔 수 없다. 결석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붕붕이녀석 영리해서 잘 할 거야.
"잘난 척 하지 말고 쥐죽은 듯 앉아 있으면 돼."
"걱정 말라니까! 봐, 네 가방도 메었어."
"잘해 봐. 교실은 5학년 4반이니까 잘 찾아가 "
그래놓고 동혁이는 다시금 잠에 곯아떨어졌다.
방안에만 갇혀 있던 붕붕이는 밖으로 나오자 힘이 솟구쳤다. 정확하게 8시 20분이 되니까 학교버스가 미끄러지듯 붕붕이 앞에 멈췄다. 뽐내며 버스에 올랐다. 미소를 띄고 바라보는 기사아저씨를 보고 인사도 했다.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버스에 오르니 몇몇 아이들이 앉아 있었고, 빈자리가 듬성듬성 보였다. 붕붕이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크게 인사를 했다.
"여러분 안녕?"
그런데 그 목소리가 좀 쉰 듯 해서 한 어린이가 유심히 붕붕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붕붕이는 천연덕스럽게 빈자리에 가 턱 앉았다. 버스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기고는 바깥 구경을 하니까 텔레비전 보는 것보다 더 멋졌다.
"아하, 기분 좋다!"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아파트 그늘을 벗어나자 빛나는 태양이 보이고, 새소리 들리는 산도 보인다. 빵빵거리는 차들이 앞에도 있고, 뒤에도 따른다. 그뿐이 아니다. 옆에도 줄줄이 늘어선 차들이 경쟁이라도 하는 듯 앞다투어 달린다.
"하나, 둘, 셋……."
하얀 차, 잿빛차, 큰차, 작은 차 각가지 차들을 세어 본다. 창밖 풍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 붕붕이를 통로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 아이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동혁이가 오늘은 좀 이상한데.'
재미나는 학교
곧 학교에 도착했다. 벌집 속에서 날아 나오는 꿀벌처럼 아이들은 버스에서 퐁퐁 날아서 내렸다. 붕붕이의 앞에 널따란 운동장이 펼쳐지고 그 뒤쪽에 어마어마한 큰집이 턱 버티고 서서 붕붕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하, 동혁이 학교가 이렇게 클 줄이야!'
붕붕이는 놀라움에 입을 떡 벌리고 서서 교문을 들어서다 말고 감탄하였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운동장 가에는 줄을 맞춰 선 방울나무가 웅장하게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한 그루, 두 그루……,"
고개를 끄덕거리며 곧 방울나무를 세기 시작하였다. 그때 누군가 인사를 했다.
"동혁아, 안녕?"
바로 코앞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귀에 설다. 바라보니 예쁜 여자아이가 웃고 다가온다. 와, 예쁘다. 당장 사귀고 싶다. 동혁이가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가 있을 줄이야! 붕붕이도 아는 체를 했다.
"안녕?"
손까지 올리며 붕붕이는 능숙하게 맞이했다.
"어서 가자!"
어럽쇼! 자연스럽게 팔짱 끼는 동혁이의 여자친구는 바로 새봄이었다. 붕붕이는 당황했다. 그렇지만 흐뭇했다. 동혁이가 이런 재미가 있으니까 학교에 날마다 빠지지 않고 잘 다니지. 안 그러면 자기하고 놀면서 더러 빠지기도 할 것인데……, 무언가 알 것 같다.
호, 그리고 은근히 걱정이 되었던 교실 찾기 문제가 슬슬 풀리지 않는가? 새봄이만 따라가면 될 것이거든. 그런데 이 예쁜 여자아이의 이름이 무엇이지?
흥흥 흥얼거리는 새봄이는 기분이 아주 유쾌해 보였다. 붕붕이도 따라서 기분이 좋았다. 흥흥 따라하며 현관을 들어서 미끌미끌 반들반들한 골마루를 지나, 층층 계단을 올라 4층까지 올랐다.
교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새봄이를 따라 붕붕이는 들어섰다.
'우와, 멋지다.'
유리창에는 예쁜 커튼이 걸려 있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책걸상이 교실 가운데 줄을 맞춰 놓여 있었다. 붕붕이는 그것도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모두 스물 네 개다. 그것말고도 볼거리가 많았다. 교실 벽에는 자그마한 옷장들이 줄줄이 서 있고, 책장에는 알록달록 책들이 꽂혀 있고, 남쪽 창가에는 앙증스러운 물레방아가 도는 곁에 꽃밭이 이루어져 있는가 하면, 어항에는 빨간 금붕어가 헤엄치고 있는 것도 보인다. 붕붕이의 눈에도 이 모든 것이 신기하고, 멋져 보였다. 그리고 아직 열어보지 않은 비밀스런 문짝들이 닫혀 있다. 틈이 나면 저것들을 모두 열어볼 계획이다.
'동혁이 자리가 어디지?'
어서 자리에 앉고 싶어 책상을 요모조모 살펴도 동혁이라고 써 놓은 이름표는 없었다.
"여기 내 곁에 앉아."
새봄이가 또 친절하게 안내하였다. 그렇구나! 새봄이가 짝지가 되어서 그렇게 친절하게 군 것일까? 엉거주춤 붕붕이가 서 있는데 새봄이는 억지로 가방을 벗겨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호기심 찬 눈으로 따라가지만, 붕붕이는 겁이 났다. 대관절 이 아이가 나를 어쩔 셈인가? 여기도 조그만 방이다.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르지만 침대가 있고, 벽에 시력표가 붙어 있다. 돌아서는 새봄이는 갑자기 정색을 한다.
"너는 동혁이가 아니지?"
붕붕이는 찔끔했다. 이 아이가 도대체 어떻게 단번에 알아내었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 했단 말인가? 이렇게 물어오니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래, 동혁이가 아파서……."
"나는 팔짱을 끼었을 때 네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어. 간혹 로봇이 오는 경우가 있거든." "로봇이 오는 경우가 있다고?"
"그래."
"너는 누구니?"
"내 이름은 새봄이야.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대신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응, 새봄아! 하루만 도와줘."
둘이는 자연스럽게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너는 동혁이 짝지니?"
"짝지? 우린 그런 것 없어. 안고 싶은 곳에 앉으면 돼."
"괜히 자리 찾지 못할까 걱정했네."
아이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칠판을 닦는 아이, 마루에 비질을 하는 아이, 칠판에 적힌 문제를 푸는 아이, 금붕어 먹이를 주는 아이……, 시끌벅적하였다. 붕붕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유리창 칸을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수업 시간
드디어 선생님이 나타났다. 금테안경에 턱수염을 길렀다.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조용히 동작을 멈추고 일어섰다. 붕붕이도 일어섰다. 새봄이가 살며시 속삭였다.
"선생님께 인사할 때는 공손히 해야한다."
"그것쯤 알 수 있어."
"아는 척 하지마. 공손한 마음을 선생님은 재는 실력을 갖고 계셔."
선생님은 미소를 띄우고 아이들을 보고 먼저 인사를 하였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그 말을 듣자 아이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고운 목소리로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붕붕이도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눈을 들어 바라보니 선생님 얼굴에는 만족한 웃음이 보였다. 합격이다. 선생님의 날카로운 관찰력도 피했다. 뭔가 잘 될 것 같다.
"명상시간입니다. 오늘은 3분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은 조용히 앉아 눈을 감았다. 감미로운 음악이 들려왔다. 절간처럼 조용하다. 붕붕이도 따라 눈을 감았지만 다시 눈을 뜨고 싶어 좀이 쑤신다. 머리가 조용해지지 않았다. 어서 저 닫혀져 있는 서랍들을 열고 무엇이 들었는지 알고 싶다. 그리고 뒷벽에 붙어 있는 그림이 몇 개인지 세고 싶고, 화분에 심어져 있는 이름 모를 나무 잎도 세고 싶고. 아이들도 몇 명인지 세고 싶다. 그것말고도 알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그만!"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만 해도 왁자하던 아이들은 얌전한 신사가 되어 있었다.
"읽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무엇을 하기로 했지요?"
선생님은 붕붕이의 마음이야 아랑곳없다는 듯 점잖게 아이들에게 물었다.
"독서발표회를 하기로 했어요."
누군가 말하자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참, 오늘 동혁이 너는 세 번째 발표자야. 알고 있니?"
"말을 하지 않던데."
"어쨌든 발표해야 한다."
"큰일났네. 독서발표회를 어떻게 하는 거야?"
"쉿, 작은 소리로 말해. 책 읽고 나서 줄거리와 느낌을 발표하면 돼."
"그거라면 자신 있어."
"뭐라고! 네가 책을 읽었단 말이야?"
"응."
자신에 찬 붕붕이를 본 새봄이는 의아심이 생겼지만 더 간섭을 하지 않았다. 자신 있다는데 할 말이 없지.
붕붕이가 귀 기울여 들어보니 첫째 아이는 '콩쥐팥쥐' 옛날이야기를 재미나게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붕붕이는 기쁨으로 출렁댔다. 학교에 오니까 아이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 말이야, 학교라는 것은 참 좋은 곳이구나. 나도 동혁이 책을 본 것이 있거든. 그런데 동혁이가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했는데……, 에라 그래도 하는 것이 낫지.
둘째번 아이는 '우주여행'이란 책을 소개하였다. 비행접시를 타고, 은하계까지 가는 신기한 이야기는 아주 재미있었다.
세번째는 동혁이 차례다. 붕붕이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 앞으로 나가 여러 아이들 앞에 섰다.
"제가 읽은 책은 '읽기책' 입니다."
그러자 킥킥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선생님은 조용히 붕붕이를 바라보았다.
"먼저 줄거리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붕붕이는 거리낌없이 척척 자기 할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1. 시인이 되어. 시를 읽고, 서로의 생각이나 느낌이 다른 까닭을 알아봅시다. 같은 글을 읽더라고 읽는 이의 경험이나 살아 온 환경, 입장에 따라 다른 생각이나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선생님은 '뭐야?' 하는 눈빛으로 붕붕이를 쏘아보았다. 아이들은 키들키들 웃으며 선생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동혁이! 교과서 통째 다 말할 거야?"
"예."
"뭐! 네가 다 외운단 말이냐?"
"예."
"놀랍다. 하지만 오늘 발표는 줄거리를 요약하고, 네 느낌을 말하는 거야."
"요약이 뭔데요?"
"동혁이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요약을 묻다니! 줄거리를 간추려서 말하란 말이다."
붕붕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눈을 내리 감았다.
"너 목소리가 이상하다. 감기 들었어?"
"예. 그래서 줄거리 간추리기도 잘 되지 않았어요. 내일 하면 안 될까요?"
"할 수 없지 뭐. 그럼 다음 차례 나와 시작하세요."
붕붕이는 학교라는 곳이 즐거운 곳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냥 있는 대로 말하면 될 텐데 왜 또 간추려 말하라고 하지?
집짓기
길고도 어려운 첫 시간이 끝났다. 붕붕이는 풀이 죽었다. 제자리에 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는데 새봄이 목소리가 들렸다.
"얘, 가자. 다음 시간은 수학시간인데 컴퓨터실에서 하는 거야."
"컴퓨터? "
붕붕이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밝아졌다. 컴퓨터게임은 붕붕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다. 붕붕이가 새봄이의 뒤를 따라 컴퓨터 실로 들어갔다. 앞면에 커다란 화면이 비치고, 과제가 제시되어 있었다.
-삼각형으로 예쁘고, 튼튼한 집짓기-
벌써 몇몇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열심히 화면을 보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동혁아, 삼각형을 모아 튼튼하게 지어야 한다. 선생님이 다 지은 집을 찾아다니며 강력한 바람으로 시험을 해본단다. 부서지면 점수를 얻지 못해. 또 빛으로 누구 집이 아름다운지 시험을 하거든 잘 어울리지 못하면 점수를 못 얻는 것은 마찬가지야."
"걱정마, 나는 원래 이런 것 잘해."
"또, 저 자랑!"
삼각형은 여러 가지 형태의 모양이 있었다. 그걸 가져다가 조립식으로 딱딱 맞추어 가는데 집터부터 튼튼하게 만들고, 여러 개의 방과 마루, 그리고 지붕을 얹어 하나의 집을 만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수고, 다시 지었다. 색깔도 알록달록 잘 어울리게 넣어가며 만드는 재미는 쏠쏠했다.
"참, 점수를 얻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데?
갑자기 생각난 듯 붕붕이는 새봄이에게 물었다.
"그야, 다른 아이들보다 뒤떨어지게 되지. 순전히 기분 문제야. 선생님은 야단도 치지 않으셔."
붕붕이는 학교가 이렇게 재미있는 곳인 줄 몰랐다. 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아이들이 만든 집을 화면에 떠올리고는 이 집은 창이 밝겠다든지, 거실이 넓다든지 한 마디씩 칭찬을 하고는 마지막으로
"그럼 나의 위대한 바람으로 날려볼까요? 여러분은 시간을 재어 보세요. 시작!"
선생님이 갖고 있는 리모콘 단추를 누르자 화면에 센바람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웅장하게 서 있던 집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오마조마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쿵 드디어 넘어졌다.
"선생님의 저 바람에는 견디는 집이 없는 걸."
아이들은 존경어린 눈으로 빙그레 웃고 있는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자, 다음은 누구 집을 선보일까요?"
이렇게 해서 아이들 집이 차례차례 소개되고 넘어졌다. 그래도 가장 오래 버틴 새봄이 집이 제일 우수한 집으로 뽑혔다.
"야, 새봄이 너 잘하는구나!"
붕붕이는 놀란 눈빛으로 새봄이를 바라보았다. 붕붕이는 자기 보다 잘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은 이때껏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쭐해 있던 마음이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색깔은 문제없이 최고로 뽑힐 것 같았다.
"가장 아름다운 집은 동혁이가 지은 집이에요."
선생님은 여러 아이들 것을 하나씩 검사하고는 판정하였다. 그러면 그렇지! 붕붕이는 또 우쭐해졌다. 그래서 새봄이를 돌아보니 살며시 손뼉을 치며 축하를 보내고 있었다.
자율학습 시간
"이제 점심 시간까지 자율학습 시간이야."
"그럼 선생님은 어디 가시니?"
"선생님은 우리 학습 한 것을 평가하시기도 하고, 다음 학습 자료를 만드시기도 해."
"우리는 뭐 하며 지내지?"
"선생님이 권한 것은 음악과 사회야. 그렇지만 싫으면 안 해도 좋아."
"아니, 할 테야."
새봄이가 음악실 문을 열었다. 벌써 여러 아이들이 별별 악기들을 가지고 화면에 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연주하고 있었다. 붕붕이는 너무 좋아서 가슴이 떨렸다. 얼마나 마음껏 치고 싶은 악기들이냐?
아이들은 제멋대로 편안한 자세로 연주하고 있었다. 기타를 메고 서서 연주하는 아이, 북을 놓고 앉아 연주하는 아이, 꽹과리를 가지 펄떠꿍펄떠꿍 뛰며 연주하는 아이, 벽에 기대앉아 피리를 부는 아이, 들어 누워서 멜로디언을 치는 아이 등 각양각색이었다.
"나는 피아노를 치고 싶어."
그렇지만 미리 다른 아이가 커다란 피아노를 치고 있어 틀렸다고 기분이 조금 상했는데 새봄이가 팔을 이끌었다.
"피아노는 또 있어."
악기장 안에는 피아노를 비롯한 다른 악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새봄이가 '피아노'라는 단추를 누르자 소리 없이 피아노가 밖으로 스스로 미끄러져 나왔다. 붕붕이는 입이 함박만큼 벌어지며 앞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고운 음이 퐁퐁 쏟아졌다. 잠시 후 눈을 들어 바라보니 새봄이는 클라리넷을 불고 있었다.
"나도 그것 불고 싶어."
"좋아, 얼마든지!"
새봄이는 기분 좋게 클라리넷을 건네주었다. 음악 곡은 무궁화행진곡이 울리고 있었다. 모두 열심히 연주하고 있었지만 어떤 아이는 소리가 잘 나지 않는지 삑삑 거리며 단소를 불고 있었고, 박자도 맞지 않게 장구를 엉터리로 치는 아이도 있었지만 모두 흥겨운 얼굴이었다.
한창 기분 좋게 불고 난 후에
"이제 타임머신 타는 곳에 가 보자."
새봄이가 사회학습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엉! 그런 곳도 있어?"
둘이는 '옛날관'이라고 쓴 곳으로 들어갔다.
"어, 동혁아! 어서 와."
한 아이가 먼저 들어와 있다가 반겼다. 새봄이가 귓속말로 일렀다.
"동혁이가 하고 친한 친구야. 이름은 한울이. 다정한 체 해."
그 말을 들은 붕붕이는 활짝 웃으며 답을 하였다.
"한울아, 안녕!"
"오늘은 세종대왕과 이야기 나누고 싶어. 너도 같이 가자."
"좋아."
로켓트처럼 생긴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그 중 '조선시대'라는 곳으로 먼저 한울이가 쑥 들어갔다. 붕붕이도 호기심을 가지고 따라 들어갔다. 한울이는 능숙하게 자리에 앉자 말자 '세종대왕'이란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곧 화면에는 조선시대의 들판과 집들이 나타나고, 한복을 입은 사람들도 나타났다. 바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단지 소리가 들리지 않는 무성 영화였다. 드디어 대궐이 나타나고 임금이 앉아 있는 용상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임금님은 없었다. 어디 있는지 카메라는 부지런히 찾아 나서다가 후원에 서 있는 세종대왕을 찾아내었다. 뒷모습이다.
"임금님!"
갑자기 한울이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세종대왕이 그 소리가 들리는 듯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한울이가 보이는지 세종대왕 눈이 커다랗게 열리는 것이었다.
"어라, 너희들은 누구냐? 우리 나라 아이들 같지는 않은데……, 왜국에서 왔느냐? 옷차림이 희한 망측하구나? 여진족도 아닌 것 같고……, 대체 너희들이 어디서 왔느냐?"
"저는 한울이고요, 이 애는 내 친구 동혁이에요. 둘 다 임금님 후손이에요."
"후손이라고?"
"네, 그러니까 약600년 뒤에 나타난 후손이에요."
"뭐라고? 그러니까 너희들이 600년 뒤의 후손이란 말이냐? 내가 헛것을 보았나? 분명히 말소리도 들리는데……."
"우리는 임금님을 세종대왕이라고 부른단 말이에요. 가장 훌륭한 임금님이었어요."
세종대왕은 신기하다는 듯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내 이름이 세종대왕이라고?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말해 보아라."
"참, 임금님도! 그것보다 지금 임금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그것부터 말씀해 주셔야 거기부터 말씀을 드릴 수 있어요."
세종대왕은 두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포졸들이 철통같이 서 있는 열 두 대문의 궁중에 들어온 것을 보면 예사 아이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600년 후의 사람이라는 말이 될 말인가?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난단 말인가? 그렇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
"나는 지금 왜구들의 노략질을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울이는 빙그레 웃으며
"그리고 그 대책을 세웠지요? 이종무를 대장으로 하여 대마도를 정벌할 것이라고요."
세종대왕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내 마음 속을 다 알고 있단 말인가? 머리가 어지럽다. 어쩌면 조상이 나를 돕고자 이 아이들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맞혔다. 참 너는 참 똑똑하다. 누구집 자손인고?"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임금님 자손이라고. 저는 이한울이거든요. 이 아이는 박연의 후손인 박동혁이에요."
"너희들이 박연도 아느냐?"
"그럼요. 아악을 정리한 분이지요."
"그렇다면 앞으로 대마도 정벌이 성공하겠느냐?"
"그럼요. 여진족도 물리쳐 6진을 개척할 것이고요, 임금님은 한글이란 우리 글도 만들었어요."
"호, 그러냐?"
세종대왕은 아주 기뻐하였다.
점심시간에
점심 시간이 되었다. 급식소 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날아왔다.
"동혁아, 이리 와."
저쪽 모퉁이에서 새봄이가 불렀다. 동혁이는 한울이와 헤어져 쫓아갔다.
"동혁아, 너는 급식소를 가지 않아도 되지?"
"응."
"나도 본디 점심은 먹지 않는단다. 대신 도서실에 가서 책을 보았는데 오늘은 네가 처음으로 우리 학교에 왔으니까 내가 기념으로 너를 뒷동산 꼭대기에 데려가 줄게."
"그거 좋지."
둘이는 곧장 뒷동산에 올랐다. 야트막한 산에는 아카시아가 우거져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듬성듬성 소나무가 나타나고, 그 사이에 널따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군데군데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얼마가지 않아 꼭대기가 나타났는데 도끼로 찍은 듯한 바위가 힘차게 솟아 있었다. 손을 잡아끌며 가까스로 바위 위에 오르니 바로 붕붕이가 사는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법 큰 마을이다. 교회 탑이 멀리 보이고, 경비행기장에 헬기가 한 대 막 뜨는 것도 보인다. 붕붕이네 집은 작은 산이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아, 좋다!"
붕붕이는 기분이 좋아서 저절로 소리가 나왔다.
"야호!"
새봄이는 손나팔을 만들어 고함을 질렀다. 알록달록 집들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한 채, 두 채, 세 채……,"
붕붕이는 보이는 집들을 다 셀 양으로 손가락으로 세기 시작했다. 웃음을 띄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새봄이가 말을 걸었다.
"점심 시간이 끝나면 학교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야."
"열 다섯, 열 여섯……, 엉! 밖으로 간다고?"
"그래, 학교 뒷마당에 가서 가고싶은 곳으로 가면 돼."
"가고 싶은 곳으로 다 갈 수 있단 말이야?"
"아니, 오늘 갈 곳이 몇 군데 정해져 있는데 그곳 중에서 정해야 해."
"얼른 가 보자."
"아직 시간이 일러. 그 동안에 네가 어디로 갈 것인지 생각해 놔."
"어떤 곳에 갈 수 있는데?"
"축구장과 야구장 그리고 탁구장, 롤러스케이트장, 수영장, 민속놀이경기장 주로 오늘은 운동장이야. 왜냐하면 체육시간이거든."
"와, 대단하구나! 그런 곳을 다 갈 수 있단 말이냐?"
"이 중에서 골라서 간단 말이야."
"어, 나는 다 가고 싶은데……, 음 축구장에 갈까?"
"나는 무용교실에 갈 거야."
"같이 가면 좋을 텐데."
"괜찮아, 가면 같이 갈 친구들이 얼마든지 있어."
붕붕이는 그 말을 듣고 벌써부터 기분이 좋았다. 축구를 해 보기는 했다. 동혁이랑 뜰에서 주고받는 축구! 그렇지만 여러 아이들과 축구 경기는 아직 한번도 해 보지 않았다. 이렇게 신날 수가!
"날마다 오후만 되니 체육 시간이니?"
"아니야, 내일은 실과 시간이 들었어. 그러면 들판에 가서 고구마를 캐는 일,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는 일, 산에 가서 도토리를 따는 일, 배추밭에 벌레를 잡는 일 등 실제로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와, 신나겠다. 내일도 동혁이가 학교에 오지 않으려고 하면 좋겠다."
"그렇게는 안 될걸."
"아 참, 새봄아! 어제는 동혁이 무엇을 했는지 알아?"
"어제 오후 봉사활동을 갔지."
"봉사활동이라고?"
"그래, 화요일은 봉사활동을 하는 날인데 어제는 양로원에 가서 청소를 했단다. 동혁이는 몸이 불편하신 할아버지 목욕을 시켜드렸지. 꽤 고생했을 거다."
"아항, 그렇구나!"
붕붕이는 갑자기 동혁이가 존경스러웠다.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새봄이가 넌즛이 물었다.
"너는 꿈이 뭐니?"
"내 꿈 말이냐? 꿈은 가져본 적이 없어."
"꿈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야. 앞으로 꿈을 가져."
"나는 동혁이가 잘 되는 게 꿈이야. 너는 꿈이 뭐냐?"
"음, 이 학교에 계속해서 다니는 것."
"뭐라고? 너는 계속해서 다닐 거잖아. 졸업하면 몰라도."
그 말에 새봄이는 배시시 웃었다. 어쩐지 새봄이가 엉뚱해 보였다.
축구장에서
오후를 알리는 신호가 길게 울렸다. 가을 햇살은 따스하다. 산봉우리에는 벌써 단풍이 들었다. 붕붕이는 코스모스가 핀 학교 뒷마당으로 갔다. 각 팻말 마다 오는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붕붕이는 축구부라는 팻말이 적힌 곳으로 갔다.
"동혁아, 네가 오늘도 축구하러 갈 줄 알았지."
"너도 축구장으로 갈거니?"
"물론, 너 어제 그렇게 일을 많이 하고도 몸이 괜찮니?"
"응. 괜찮아."
대답은 했지만 붕붕이는 웬지 조금 부끄러웠다. 저쪽 줄에 서 있던 새봄이가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잠깐 동안이지만 무용교실에 갈까 마음이 일었으나 곧 눌러버렸다. 축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뒷마당에서 바로 울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자 케이블카를 타는 방이 나타났다. 거기에 선생님 한 분이 서 있었다. 축구장으로 가는 아이들은 딱 열한 사람이었다. 아마 그렇게 짜여 있는 모양이다.
"지금부터 축구장으로 가겠다."
선생님은 간단히 설명하고 단추를 누르자 갑자기 에스켈레이트처럼 땅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편안한 자세로 움직이는 길에 앉거나 서 있었다. 성급한 몇몇 아이는 그 길 위에서 걸어가기도 했다. 10분쯤 가니까 축구장 공원이란 간판이 나타나고 여러 개의 축구장의 웅장한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은 곧장 축구장 어귀에서 내렸다. 야구장은 좀 더 가야한다며 야구장에 가는 아이들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이곳 저곳 초록색 잔디가 쫙 깔려 있는 축구장에서는 아이들이 축구경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고, 멀리까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따라 '다음'이라는 축구장으로 갔다. 거기에는 다른 한 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 너희들이네! 저번처럼 지러 왔니?"
하며 경기 시작부터 약을 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이길 걸."
"헤헤, 그런 일 없을 거야."
붕붕이는 잔디가 곱게 깔려 있는 축구장 안으로 들어섰다. 햇볕이 눈부시다. 관람석은 텅텅 비어 있었지만 상관없다. 아이들은 다툼 없이 잠깐 사이 설자리를 정했다. 그리고는 동그랗게 빙둘러 서서 손바닥을 모아 큰 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힘내자, 이기자!"
늠름하게 힘내자고 고함을 지르고는 자기가 설자리를 찾아 모두 흩어졌다. 저쪽 편도 씩씩하게 성큼성큼 달려서 각자 자리로 갔다. 붕붕이는 문제없이 이길 것 같았다.
시작 신호가 울리자 저편은 공을 몰고 재빠르게 파고들었다. 붕붕이는 수비수다. 마침 공이 붕붕이 앞으로 굴러왔다. 붕붕이는 처음이라 그런지 공쪽으로 쫓아가다가 땅바닥에 넘어졌다. 하늘이 빙글 돈다. 우하하하 하고 비웃는 소리가 온 하늘에 가득한 것 같다.
"동혁아, 오늘 왜 그래?"
가까스로 공을 빼앗아 찬 같은 수비수가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와 묻는다. 아까 말을 걸어왔던 친구다. 괜찮다는 듯 팔을 올리며 일어섰다.
"미안해!"
공은 상대편 쪽으로 넘어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많은 아이들도 몰려서 저쪽 끝에 우루루 몰려 있는 것이 아스라이 보인다. 안심이다. 이제 공이 다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잠시후 금세 공이 넘어온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동혁아, 공 간다!"
붕붕이는 공중에서 날아오는 공을 보았다. 힘껏 걷어찼다. 그러나 헛발질이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또 들린다. 그 바람에 저쪽 공격수는 옳다구나 하고 바람처럼 공을 몰고 골문 쪽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골!"
공은 그물을 철렁하게 만들며 쑥 들어갔다. 순전히 붕붕이의 실수로 한 골을 먹었다. 저쪽 아이들이 팔딱팔딱 뛰는 것이 보인다. 붕붕이는 부끄러워 얼굴을 돌렸다. 아이들 야단치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할 것 같았다. 한 아이가 가까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주먹질까지 할까 걱정하고 있는데 뜻밖에 어깨를 토닥거리며
"괜찮아, 우리도 곧 한 골 넣으면 돼."
이러지 않는가. 붕붕이는 감격하여 돌아봤다. 또 그 얼굴이다. 누굴까? 동혁이하고 친한 것 같은데 얼른 이름을 알고 싶다. 힘이 났다.
"동혁이를 공격수하고 바꾸자."
누군가 제안했다.
"안 돼! 우리가 한 골 넣어야 되잖아."
하며 아까 그 아이가 반대했다. 그 아이의 말은 대단한 위력이 있었다. 아무도 반대를 하지 않았다. 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한동안은 공이 오지 않았다. 심심해진 붕붕이는 이제 한번쯤 공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붕붕이의 굳었던 몸이 좀 풀리는 듯 하였다. 가볍게 뛰며 공을 바라봤다. 공은 멀찍이 상대편 문 가까이에 가 있는지 아이들이 그쪽에 몰려 있었다.
"동혁아, 막아라!"
고함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상대편 아이 하나가 날렵하게 공을 몰고 중앙선을 넘어오고 있었다. 붕붕이는 재빠르게 달려나갔다. 그러자 그 아이는 솜씨 좋게 붕붕이를 따돌리고 밀고 들어갔다. 붕붕이는 다시 몸을 가다듬고 그 아이를 쫓아갔다. 어떻게나 빠른지 번개같았다. 단숨에 뒤쪽에서 따라가 공을 낚아챘다. 그 아이는 깜짝 놀랐다. 설마 뒤에서 낚아채리라고는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붕붕이는 놀라서 얼이 빠져 있는 아이를 뒤에 두고 질풍처럼 공을 몰고 가다가 한 아이가 나타나자 냅다 질렀다. 공은 큰 포물선을 그리며 상대방 문 쪽으로 날아갔다.
"골!"
갑자기 운동장 가득 함성이 일어난다. 붕붕이가 냅다 질러 찬 공이 그대로 상대방 골문으로 빨려가듯 들어가 버렸다. 이번에는 문지기가 넋이 빠졌다. 멀찍이 나와 있던 문지기가 손 쓸 틈도 없이 골이 들어가 버린 것이다.
두 팔을 하늘높이 치올리고 오던 아이들이 붕붕이를 감싸안았다. 붕붕이는 축구경기가 이렇게 멋진 줄 비로소 알았다.
"야, 동혁이가 그렇게 센 공을 멀리서 찰 줄은 몰랐지."
"그러게 말이야. 그것도 골로 연결되었으니까 말이야."
아이들은 신이나서 계속 떠들어댔다.
붕붕이는 한 골에서 끝나지 않고 잇달아 2골이나 퍼부어 붕붕이네 편이 3 :1로 이겼다. 붕붕이의 발은 강하고도 정확했다.
돌아오는 길에 붕붕이는 아이들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동혁아, 앞으로 너는 유명한 축구선수가 될 것 같다."
"네가 있는 한 우리 학교는 경기에서 지는 일이 없을 거야."
붕붕이는 기뻤다. 축구를 해서도 그렇지만 동혁이를 축구영웅으로 만든 즐거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꿈도 가졌다.
이제 집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 붕붕이는 오늘 하루 일어났던 일이 꿈만 같았다. 생전 처음으로 동혁이네 학교에 와서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던가! 생각할수록 근사하다. 학교에 도착하여 운동장으로 들어서니 저만큼 손을 흔들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새봄이다.
안녕
"동혁아, 새봄이가 연속 세 골을 넣었다고 너를 마중 나온 거야."
아까 친절하게 대했던 친구가 말했다.
"진수, 너 로봇에게 질투하는 것 아니냐?"
누군가 말했다. 붕붕이는 찔끔했다. 또 누군가 나의 비밀을 알고 있구나. 어떻게 해서 탄로 났을까 하고 돌아보니 축구경기를 할 때 언뜻 본 얼굴이다. 서로 부닥치지도 않았는데……, 그 친구를 바라보니 진작 붕붕이보다는 진수라는 아이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 친절하던 아이가 진수란 말이지?
"질투라고? 질투가 뭔데?"
진수는 장난스런 얼굴로 되물었다. 붕붕이는 진수가 좋았다. 진수는 질투를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마운 아이다.
"피, 너 새봄이를 좋아하잖아? 새봄이가 자꾸 동혁이를 좋아하니까 너는 기분이 좋지 않을 거 아냐?"
"동혁이를 좋아하지만, 나도 좋아할걸."
붕붕이는 얼떨떨했다. 동혁이를 새봄이가 좋아하는 말 같은데 아까 로봇을 좋아한다는 말은 뭐지? 그리고 로봇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동혁아,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니? 설마 새봄이가 로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겠지?"
귓속말로 속삭이는 진수의 말에 붕붕이는 다시 제 생각으로 돌아왔다. 붕붕이는 마음을 놓았다. 지금 이 아이들이 자기를 보고 하는 이야기하 아니라 새봄이를 보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런데 깜짝 놀라운 소식은 새봄이도 로봇이라니!
새봄이는 밝은 얼굴로 다가왔다.
"동혁아, 골을 세 골이나 넣고……, 굉장하던데!"
"고마워. 어떻게 알았어?"
"무용실에서도 체육 하는 아이들 모습을 볼 수 있단다."
붕붕이는 그 말에 기분이 좋아져 새봄이 손을 꽉 잡았다. 붕붕이 손에 전해오는 느낌이 로봇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수수께끼 같은 비밀이 술술 풀리고 있었다. 단번에 붕붕이를 알아맞힌 것이라든지, 점심 시간에 밥을 먹지 않는다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새봄이가 한층더 가깝게 다가왔다.
둘이서 걷게 되었을 때
"새봄아, 나도 네가 로봇이란 것을 알았다."
흠칫 놀라던 새봄이는 체념한 듯
"그래! 어떻게 알았지?"
하며 싱긋 웃었다.
"너는 언제부터 이 학교에 다녔니?"
"올해 2년째야."
"어째서 그렇게 오래도록 다닐 수 있니? 혹시 나도 그렇게 다닐 수 없을까?"
"안 될걸. 내 본 이름은 새콤이야. 새봄이는 지금 미국 갔거든. 2년 동안 공부하고 돌아오면 나는 다시 집에서 부엌일을 해야 해."
"부엌일 재미있니?"
"그래, 지금은 청소하는 싹싹이가 같이 하고 있어."
"너의 집에는 너 같은 로봇이 또 있니?"
"모두 셋이야. 나하고, 싹싹이 이외에 지킴이가 있어. 과수원도 돌보고, 집을 관리하고 있지. 아주 힘센 로봇이야."
"우리 집에는 나 뿐이야. 우리 집 아저씨는 로봇 박사인데도 다른 로봇을 들여놓지 않아. 왜냐면 집이 가난하거든."
"가난하다고? 설마, 아껴 쓰느라고 그르겠지 뭐."
"하기사 우리 식구들은 모두 아껴 쓰긴 해."
"오늘 만나서 반가워. 간혹 네가 나 있을 동안 학교에 나오면 좋겠다."
"동혁이를 도와 줘."
"응, 동혁이가 참 좋아."
둘이는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붕붕이는 학교라는 곳이 정말 멋진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회가 생기면 다시 오고 싶었다. 아직 살펴보지 못한 곳이 많이 남아 있는 학교에. 그리고 세콤이가 다니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