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달구벌수필 작품상(2019) 심사평
유기적 생명체로서의 수필 쓰기
달구벌수필문학상(2019)심사평1.hwp
여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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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에 동원되는 모든 소재는 주제를 표현하는 데에 반드시 일정한 기여를 해야 한다.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 주제는 소재의 통찰을 통해 발견되는 의미이며 소재의 해석을 통해 부여하는 의미이다. 주제와 소재의 관계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문학작품은 하나의 전체로 존재하는가, 수많은 부분의 집합으로 존재하는가? 전체가 하나로 존재한다는 주장은 문학작품이 유기체적 생명을 지닌다고 하며,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서 전체야말로 진정한 것이고 부분은 전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봉사할 따름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문학작품이 부분의 집합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은 문학작품에서 부분은 모두 독자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씩 살펴야 하며, 부분이야말로 진정한 것이고 전체는 부분을 한데 모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문학작품의 실상은 어떠한가. 전체가 진정한 것이라고 해야 작품 전체의 질서와 의미를 존중할 수 있다. 전체적인 질서와 의미를 갖추고 있으므로 문학작품이 문학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전체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부분의 합계가 전체는 아니다. 부분의 총합과 전체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전체와 부분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전체는 부분이 있으므로 전체이고, 부분은 전체가 있으므로 부분이다. 부분과 전체의 이러한 존재 양식을 구조라 한다. 문학작품은 하나의 유기체적 구조로 이루어진다. 문학을 지향하는 수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한국 수필이 대중적 글쓰기로 부상하면서 유기체적 생명을 지닌 작품으로 탄생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유기적 생명체로서의 수필 쓰기라는 포괄적인 전제 위에서,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작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들 작품을 정독하였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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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위의 발자국>, <달이 춥겠다>, <숲>, <할아버지꽃>, <명당자리>가 본심의 대상이다. 다섯 편의 작품을 일차적으로 통독하고 나서 몹시 난감하고 당황했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다섯 작품 모두가 그 나름대로 개성과 장점을 지닌 채 상당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작품들의 절대적 가치는 제쳐두고 그 상대적 흠결을 찾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저울질에 골몰한 작품이 <명당자리>와 <할아버지꽃>, 그리고 <숲>이었다.
<눈 위의 발자국>은 철저한 구상 전략을 미리 세워놓고 쓴 작품인 듯하다. 눈이 쌓인 뒷산을 걸으면서 무심코 남긴 발자국은 볼썽사나운 갈 之자에 흐트러진 八자 걸음이었다. 마음을 다잡아 다시 조심스럽게 걸어보니 아주 반듯하지는 못해도 조금은 다소곳한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이런 내용을 외적 담론으로 배치한다. 그 중간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여 정착할 때까지 힘겨웠지만 일에 몰입했던 과정을, 그리고 결혼한 아내를 두고 능력 있는 여자와 마음씨 고운 여자들에게 흔들렸던 마음을 내적 담론으로 삽입시킨다. 액자형 구성을 의도한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진작 조심스레 살아야 했던 것을”이라는 문장으로 자아성찰적 주제를 이끌어낸다. 문맥의 흐름은 다소 서툴다 할지라도 상당히 완성도를 갖춘 작품으로 형상화한 듯하다. 그런데 꼼꼼히 살펴보면 내적 담론에 문제가 있다. 지나온 삶이 조심스럽지 못하여 볼썽사납고 흐트러져 있었다고 해야 외적 담론이나 주제와 원활한 결합이 이루어지는데, 내적 담론이 그렇게 수렴되지 못하고 있다. 물질적 이윤 추구에 비틀거리지 않고 일에만 몰입했던 즐거움을 누렸다고 하는 데에 서술의 무게를 둔 탓이다.
<달이 춥겠다>는 일종의 서정수필이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화전민촌을 떠나지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 어느 오두막집 노인의 외로움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런 경우, 작가는 자신의 감정과 소통하는 대상의 외로운 성정을 드러내야 한다. 노인에게 스며있는 외로움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노인에 대한 모든 서술은 그 정서적 감응을 표출하는 데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노인의 형상에서 드러내야 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 상태를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노인을 그려내야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화전민촌을 떠나지 않고 홀로 남은 외딴 오두막은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기에 적절한 배경이다. “달이 춥겠다”라고 내뱉는 노인의 독백, 아궁이에 장작을 자꾸 넣는 노인의 행위, 허위허위 산을 올라 부모와 아내의 무덤으로 향하는 노인의 습관적 일상은 외로움의 정서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 제 구실을 한다. 그러나 빛바랜 사진에 대해 설명하는 노인의 모습이나 향수 어린 상차림 등에 대한 서술은 외로움의 정서를 드러내는 요소로 역할하지 못한다.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의 질감이 선명하게 돋보이도록 경험의 조각을 선택하고 결합하는 ‘정서의 명료화’(노엘 캐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숲>은 의도된 구성 전략을 알아채지 못을 만큼 자연스러운 작품이다. 한 편의 작품을 의미론적 정합체로 완성시켜 그것에 유기적인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다. 숲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통찰력도 돋보인다. 이 작품은 폭풍으로 쓰러진 장송 한 그루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숲의 경쟁적인 생존원리에 인간세상의 삶을 반추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숲의 나무들이 그렇듯이 경쟁 사회이지만 독불장군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삶의 진실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의도한 구성이 그러하다면, 뼈대에 살점을 붙이는 작업인 문단과 문장 쓰기가 이에 따라 빈틈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여기에서 문제를 드러낸다. 조상이 물려준 유전형질대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한다는 운명적인 환경결정론, 온대나 한대 지방에서 씨족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침엽수들을 패배자라고 해석한 것은 작품의 의미론적 정합성에 흠집을 남긴다. “경사지가 아닌 좋은 터에 터를 잡아야 하고, 뿌리끼리 스크럼을 짜듯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문장과 의미 충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문장의 수사적 허세를 거둬내고 절제미를 추구한 것도 이 작품의 미덕이다. 하지만, 지나친 생략에 따른 주어 없는 몇몇 문장들이 문맥의 혈류를 원활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문제들은 미장센의 최종적인 점검이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가를 깨닫게 한다.
<할아버지꽃>은 뜰에 심은 나팔꽃을 남편의 환생인 양 여기면서 살아온 누님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민군의 습격으로 순경이었던 남편이 전사하자 누님은 스물다섯 살 꽃다운 나이 때부터 시부모를 모시고 자식 남매를 키우며 살았다. 시골집 뒤란에 심은 나팔꽃을 보면 남편을 만난 듯 위로가 되었다는 누님이 서울로 이사한 뒤에는 그 마음을 읽은 생질이 다시 화단에 나팔꽃을 심었다. 누님의 손자들이 ‘할아버지꽃’이라 부르는 나팔꽃은 남편을 향한 누님의 그리움을 상징하는 메타포이다. 이 작품은 평생 남편을 그리워하며 살아온 누님의 애잔한 이미지를 잘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서술시점과 명명법의 혼란이 독서를 다소 어렵게 한다. 가령, “서울 누님이 다쳐서 위문하러 왔다가 하루를 묵었다”에서는 서술시점이 문제된다. “그 댁 식구들은 나팔꽃이 할아버지로 환생하여 할머니 방으로 올라온다는 꿈 같은 사실을 믿고 있다”나 “가족들도 할머니 마음을 알고 도와주고 있다”에서는 명명법에 파탄이 생긴다. 서술시점을 분명히 하면 명명은 저절로 해결된다. 누가, 어느 위치, 어떤 시각에서 말하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명당자리>는 유기적인 생명체로서의 수필 쓰기라는 측면에서 흠결이 거의 없는 작품이다. 서사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말하기와 보여주기를 교차시키면서 이야기를 상당히 매끄럽게 끌고 간다. 정서적 맥락이 면면히 흐르는 물줄기와 같다. 시아버지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가족 묘역이 집안의 합의에 의해 병석에 있는 시아버지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파헤쳐지는 상황을 보며, 작가는 착잡한 심정을 담담한 문장으로 표현해 낸다. 문장의 품위가 느껴진다. 분묘들이 파헤쳐지는 상황과 조상 숭배 및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시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상충 관계에 놓인다. 즉, 작가는 현재적 상황과 과거의 기억을 실질적 가치와 관념적 가치로 해석하고 환원한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를 아직 부정할 수 없지만 경험적 현실은 그러한 구속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작가의 관념과 경험 사이의 갈등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전통적 관념 쪽을 대변하거나 현실적 경험 쪽을 지지하지 않는다. 작품 내에서의 가치 판단을 유보한 채 그저 현실의 상황과 과거의 기억을 객관적이고 생생하게 제시해 놓을 뿐이다. 작가는 어느 쪽이든 감싸 안을 수 있는 가치중립성을 지님으로써, 두 가치관 사이의 논쟁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 작품은 가치관 전환의 시대에 벌어질 수 있는 갈등 문제를 가족 분묘의 문제로 구체화하고 환유하고 형상화한다.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가 상당하다. 그러나 미세한 흠결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불볕 여름날이다’라는 첫 문장의 무의미함이나 ‘넓적한 대리석이 매달려 너풀너풀 흔들리다가’에서 사용된 어휘의 부적절한 결합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명당자리>(김귀선)는 수작이다. 이 작품을 2019년 달구벌수필 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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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논리를 넘어선다. 논리는 폐쇄되어 있지만 문학은 개방되어 있다. 논리는 한정되어 있지만 문학은 그렇지 않다. 논리와 문학 사이의 간극은 비평에서 언제나 문제될 수 있는 심각한 고민이다. 문학을 논리로 다룰 수 있다고 여기면서 논리로써 읽을 때 생기는 고민이다. 그렇다고 문학을 주관적인 감각으로 읽고 평가할 수는 없다.
사리가 이러하므로, 문학작품을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하고 이에 근거하여 분석하고 평가하는 비평이 절대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유기체적 완성도가 미흡한 수필들을 묶은 책들이 비범한 통찰력이나 예민한 감수성, 또는 인문학적 해석력이나 참신한 기획력 등의 매력 때문에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유기적 생명체로서의 수필 쓰기를 무조건 고집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어떤 논리이든 절대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완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문학작품은 분석 과정에 적용된 논리의 성과를 항상 넘어선다. 문학작품에 대한 지속적이고 새로운 읽기를 가능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여세주 : 문학평론가, 수필가. 《수필미학》 발행인. 저서 《새롭게 쓴 수필창작론》, 《수필의 전형과 실험》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