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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
까미노에서 향수를 불러온 천사의 나팔
새벽 단잠에서 깨어난 이른 아침,
뽀르뚜갈의 초로남(初老男)이며, 뻬레그리노 라기 보다는 알베르가두(albergado/homeless)라는
느낌의 코골이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7시를 지나고 있는 내 손목의 시계(wristwatch)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늦잠 때문에 코골이의 퇴실을 몰랐다는 생각보다 필히 지켜야 하는 퇴실시간을 어겼기 때문인데,
또 속았다.
스페인~뽀르뚜갈 간에는 1시간의 시차가 있으나 곧 스페인으로 귀환하게 된다는 이유로 시간을
수정하지 않는 똥고집 때문이었을 뿐 뽀르뚜갈의 아침은 아직 이른 6시였다.
1시간이 선 뽀르뚜갈 후 스페인 관계라면, 아마 앞당겨 놓았을 것이다.
아날로그시계(analogue)의 메커니즘(machanism)은 바늘을 앞으로 당기는 것만 허용하고 뒤로
돌리는 것은 고장을 이유로 금기가 되어 있기 때문에 1시간 늦추려면 11바퀴를 돌려야 하니까.
(시계가 희귀했던 때의 풍설이라 故障의 진위 여부는 아직도 모른다)
봄베이루스(Bombeiros Voluntários de Oliveira de Azeméis)의 퇴실 요망 시한은 6시 30분이다.
그러므로, 반시간이나 여유로운 이른 아침인데 한 순간이나마 자책하며 법석을 떨었다.
또한 이 코골이가 까미노 뽀르뚜게스의 봄베이루스 알베르게에서 단 둘이 동숙하면서도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된 까닭을 내 늦잠 탓이라 할 수는 없잖은가.
어둑한 때 차를 타고 왔기 때문인지 환한 아침인데도 주변이 생소했다.
봄베이루스에서 동쪽으로 코앞 처럼 보이는 까미노 뽀르뚜게스가 뽀르뗄라 길(R. da Portela)이
되어 남북으로 뻗어 있으나 진입할 길이 애매하여 다리품을 파는 것으로 시작된 아침.
신발제조판매(La Salette & Carvalho) 건물 앞에서 완만한 내리막 길을 걸을 때는 자욱한 운무에
불안한 남행이었으나 까미노 진입 때와 달리 순조로웠다.
주의 깊지 못해서 파랑 화살표를 놓치기도 했으나, 이런 때는 노랑 화살표가 나서 주었으니까.
한가로운 농촌 길, 이른 아침이라 더욱 괴괴한 길, 만나는 사람 없는 나홀로 길인데도 왠지 그저
평화로운 아침 길이었다.
짙은 운무에도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마씨냐따 다 세이사(Macinhata da Seixa).
옛 소 교구마을(freguesia)의 간판인데, 201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라졌다 하나 그것이 남아서
급격한 내리막 길을 편안하게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으니까.
그러나 곧, 이름을 달리 하며(R. da Portela~R. do Alméu~R. do Requeixo), 폭이 넓은 차로에서
좁은 농로로, 시멘트 포장과 뽀르뚜갈 전통의 포장길 또는 포장이 사라질 정도로 낡은 길이다.
농촌의 현실인 을씨년스런 폐가와 산뜻한 새 집, 이끼 낀 돌담과 철망 담장이 대조되는 촌로(村
路)는 N1국도에 접근하다가 철마의 굉음이 사라진 녹슨 레일(狹軌)을 건너 옥수수밭 길이 된다.
광대한 밭 가운데로 난 좁은 길이 옥수수의 젖줄인 수로 위의 다리를 건넌다.
교령(橋齡)이 270년(1746년에 건설)이며 예수의 십자고상(十字苦像/사당shrine)이 안치되어 있는
다리(Senhor da Ponte/Ponte do Senhor da Pedra)다.
그 오래 전부터 올리베이라(Oliveira de azeméis)의 남쪽 관문(關門)이었으며, 좁은 이 길이 도심
으로 가는 진입로였음을 의미하는 다리.
새 길들의 개설로 본래의 구실을 상실하고 농로로 전락되었지만 까미노데 산띠아고(Camino de
Santiago)의 뽀르뚜 길로 역사성을 유지하고 있는 길이며 다리란다.
좁은 농수로에 아치 형(arch型)이며 뽀르뚜갈의 전통 포장 등 중세 다리의 특징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이 다리가 현대 감각에는 매치(match)되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가설도 가능하겠다.
농경지로 개간되기 전, 이 일대가 야산지대였을 때, 까미노 뽀르뚜게스가 농사용 수로 이전 부터
절로 있던 개천을 건너야 했다면 중세 때의 다리를 놓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라고.
소 교구마을이 뜨라방까(Travanca)로 바뀌고, 농로(R. do Senhor da Ponte/세뇨르 다 뽄치 길)의
완만한 오름이 끝나면 다시 레일을 만난다.
동쪽 지근에서 P-턴(P-turn)하여 돌아오는, 조금 전에 건넜던 협궤(狹軌)다.
까미노는 레일과 잠시 동행해 도로(Av. Sá Carneiro/N1도로)를 지층으로 횡단한 후 레일을 떠나
뽀부아 길(R. da Povoa)을 따라서 남하한다.
후아 몬치 데 알렝(R. Monte D'Além)으로 바뀐 길을 따라서 남서향하는 까미노는 사거리에서 왼
쪽길(R. da Estrada Real)을 택해 남하를 계속한다.
국도(N224)를 건넌(입체다리) 후 양편(右左)에 꽤 넓은(뽀르뚜갈에서는) 포도밭을 지나 직각으로
좌회전하고 길은 새 이름(R. de Besteiros)을 달고 철도를 횡단하는 등 2km쯤 지난다.
건널목 장치가 작동하는 철도다(조금 전에 건너온 레일과 달리 살아서 구실을 하고 있는 철길)
건너 온 건널목에서 우측 2층건물(赤色)의 담벽에 붙박이 십자고 상(shrine)이 있는 집.
담 안쪽에 피어있는 노란 천사의 나팔(Angel's Trumphet)이 늙은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따금 있는 일인데, 내 집(서울) 마당의 꽃과 같은 류의 꽃들, 수선화와 홍매화, 밤에 피는 분꽃,
야생화 등 귀하지 않으며 서민적인 꽃들이 향수(nostalgia)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본연의 그리움이나 시름 따위 보다 이런저런 걱정이 더 많이 담겨있는 향수다.
늙은 부부만의 집이라 장기간의 길 나그네에게는 약방의 감초같은 향수를 따돌릴 묘수가 없다.
자력으로 가능한 일이 날로 더 드물어 가는 아내 걱정이 절대적이지만 내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집안의 꽃과 나무, 풀까지도 걱정거리다.
아내는 도움을 요청하고 받을 수 있지만 식물은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특히 아름다운 자태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식물일 수록 더 많은 보살핌을 바라는데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위치에 있으니 더욱 안타깝고 애잔할 수 밖에.
유산의 마을 삐녜이루 다 벰뽀스따
레일을 건넌 후 이름을 바꾼 길(Av. do Espirito Santo)은 오르막길이며, 이후 완만한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삼거리에서 마누엘 아마데우 상 올리베이라 길(R. Manuel Amadeu São Olliveira)로 다시 바뀌어
국도(N1, IC2)를 횡단한다.
U-턴 하듯 하지만 역(逆) S자 형(순방향에서는 S자형)으로 돌아서 남하한다.
길 이름이 또 바뀌고(Av. Nossa Sra. das Flores로), 소 교구마을도 바뀌고(Pinheiro da Bemposta
로) 건물 마저도 띄엄띄엄 한가롭던 농촌이 이미 취락이 이뤄졌음(年輪)을 느끼게 한다.
(2013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여러 소 교구마을/Freguesias이 통폐합(União/ Travanca, Palmas가
기존 Pinheiro da Bemposta로)되었다 하나 탁상의 일일 뿐 현장은 옛 그대로다)
문서에 최초로 등장하기는 1114년이며 1514년~1855년 간에 지자체로 존재했다는 벰뽀스따.
농촌의 소 교구마을로는 드물게 역사와 유산이 가득한 마을, 삐녜이루 다 벰뽀스따.
뽀르뚜갈의 최고급 유산인 국립기념물(Monumento Nacional) 810점 중 1점, 다음급인 공익재산
(Imóvel de Interesse Público) 2701점 중 3점 등 4점이나 있다는 농촌마을이다.
뽀르뚜갈 전체의 3511점 중 4점이며, 아베이루 현(19개지자체)에서는 MN 21점 중 1점, IIP 65점
중 3점으로 총 86점 중 4점이다.
지자체 올리베이라 지 아지메이스의 8개 소 교구 마을 중 MN은 유일하며 IIP는 7점 중 3점으로
총 8점 중 4점이나 된다.
Monumento Nacional(국립기념물) /Cruzeiro de Pinheiro da Bemposta(MN벰뽀스따의 십자가)
Imóvel de Interesse Público(공익재산) /Pelourinho de Pinheiro da Bemposta(벰뽀스따의 칼)
/Capela de Nossa Senhora da Ribeira(리베이라의 성모승천교회)
/Estação da Mala-Posta do Curval(꾸르발의 우편마차 역)
뽀르뚜갈의 유산(património)은 총 11개 등급으로 분류한다.
우리나라의 국보급인 국립기념물(Monumento Nacional / MN)을 비롯하여 공익재산(Imóvel de
Interesse Público / IIP), 공익기념물(Monumento de Interesse Público / MIP)에 이어 8듭급으로.
후속 8개 등급은
CIP / Conjunto de Interesse Público. SIP / Sítio de Interesse Público.
IIM / Imóvel de Interesse Municipal. MIM / Monumento de Interesse Municipal.
CIM / Conjunto de Interesse Municipal. SIM / Sítio de Interesse Municipal.
VC / em Vias de Classificação. SPL / Sem Proteção Legal.
등이다.
이 정도면 앞 표현(역사와 유산이 가득한 마을/Zona Histórica da Bemposta)이 결코 허언이거나
과장이 아니지 않은가.
19c 초(1801년)에 1만명에 육박하던(9.722명) 주민의 상당수가 20c 초부터 브라질, 베네수엘라,
가나다, 미국 등지로 이주하여 3.324명으로 격감했으나(2011년) 명성은 더 확고해 간단다.
완만한 오름 길(R. dos Paços do Concelho)의 죄측에 자리한 벰뽀스따의 옛 청사 옆에 돌기둥인
'뻴로리뉴 지 삐녜이루 다 벰뽀스따'(Pelourinho de Pinheiro da Bemposta)가 있다.
1933년에 IIP(국가공익재산)로 지정되었다는 토목 건축 분야(Arquitectura civil)의 유산이다.
스페인에서는 중세 사법권을 상징하는 '로요 후리스딕시오날'(Rollo Jurisdiccional / 재판의 기둥)
이라 하는데 뽀르뚜갈에서는 'Pelourinho'(옛날죄인에게씌우던 칼 / mamueline pillory)라 한다.
전통적으로 시청 또는 기타 공식 기관 지근의 공공 장소에 세웠으며 범죄자 또는 체납자를 공개
처벌하는 형장이고 형구(刑具)라 할까.
이 옛 청사도 위층은 도시의 행정 및 사법 서비스 공간(Paços do Concelhos)이었고 1층은 감옥
으로 활용했단다.
이상하리 만큼 낮설지 않은 뻴로리뉴.
아마도, 프랑스 길 보아디야 델 까미노(Boadilla del Camino)와 마드리드 길의 비얄론 데 깜뽀스
(Villalon de Campos)의 마요르 광장(Plaza de Mayor) 등 스페인에서 눈익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 밖에도 까미노 도처에서(까미노외의 길은 거의 걷지 않았기 때문에 볼 기회가 없었지만) 보기
를 거듭하였으므로 낯익을 수 밖에.
이 뻴로리뉴가 삐녜이루 다 벰뽀스따마을의 역사적 비중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 유산(Património
de relevo)이며 관광 자원이란다.
이처럼 도처에 사법재판권을 강조하는 기둥들이 서있는 의미(까닭)는 무엇인가.
교회 권력의 전횡이 극에 달해 있었다는 역설(逆說/paradox)에 다름 아니다.
한 손에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든 정의의 여신 디케(Dike)의 입상을 왜 세웠는가.
정의와 형평을 갈망했기 때문이다.
정의와 형평이 보편적인 사회에는 디케가 출현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탈자가 유난히 많은 까미노
이름이 바뀌기를 거듭하는 길(Av. Nossa Sra. das Flores (1) ~ R. dos Paços do Concelho (2) ~R.
dom Manuel l (3)을 따라 남행하는 까미노 뽀르뚜게스.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지나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응어리져 있었다 할까.
여러 해가 지난 후라도 반추하며 그 응어리를 긍정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되어(아래) 다행이다.
(1)길이 S-자, 역 S자 형태가 된 까닭은 이해할 수 있다.
마을이 형성되고 그들의 편의를 위해 지역 도로들이 생기고 국가적 계획에 따라서 국도가 개설
됨으로서 어느 쪽에도 배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 까미노는 망측스런 꼴이 되었을 것이다.
이같은 망측한 형국은 뽀르뚜게스 뿐 아니라 전체 까미노의 도처에 있다.
일본의 시고꾸헨로에도 한두 곳이 아니다.
오르내림이 연잇는 것으로 미루어 까미노 뽀르뚜게스의 개설 당시에는 이 지역이 허허한 야산지
였을 것이며, 그러므로 치기어린 S-자 길이었을 리 없다.
까미노는 셋방살이 신세라 이리저리 밀리는 동안에 그 꼴이 되었을 텐데, 특정 구간이기는 해도
까미노를 통째로 이전도 하는 판국에 직선화가 금기 대상도 아니잖은가.
관계 당국자들은 이해 득실을 떠나서 바로잡아야 할 책무를 이행해야 할 것이다.
(2)길에는 담장에 붙박이 신사(shrine/좌측)가 있고 높고 육중한 돌담 구간이 있다.
좌우의 시야를 막아 머리 위의 좁은 하늘 외에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함은 물론 농구스타라도
들여다 볼 수 없을 장신 돌담 저쪽에 대한 궁금증이 여간 아니다.
전일(6월19일)에 지나온 그리주의 수도원 길(Alameda do Mosteiro) 담장도 그랬지만 보통 밭에
불과하여 실소 불금(失笑不禁)으로 끝났는데 여기도?
신문과 출판사에는 교정(校正,校訂) 파트(part)가 있다.
교정쇄(校正刷)를 원고와 대조하여 오탈자, 배열, 색 등과 책의 잘못된 글자나 어구 등을 바르게
고치는 일을 하는데 오래 할 일이 아니다.
틀린 것을 바로잡는 일인데도 왜 경계를 하는가.
부지불식간에 남의 흠(欠)을 찾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타성에 젖게 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더 크고 더 많은 자기의 허물은 그대로 두고 남의 사소한 잘못 들춰내는데 올인하는 직업을 좋은
일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젊은 시기의 극히 일부를 이 일에 사용했을 뿐인데도 이따금 경악한다.
까미노(Camino de Santiago)를 걸을 때도, 주마간산하듯이 지나치는데도 각종 표지판의 오탈자
(誤脫字) 발견이 유난했기 때문이다.
남의 허물을 들춰내는 짓을 경계하는 금언이 무수히 많다.
기독교 성경(신약 마태복음 7장)은 제 눈의 '들보' 와 남의 눈의 '티' 로 묘사했으며, 외국어성경은
(영어와 스페인어 성경) plank(널빤지)와 speck(티끌), viga(기둥)와 paja(지푸라기)로 비유했다.
남의 실수나 허물 보다 자기의 그 것이 훨씬 크고 많음을 의미한다.
한데, 이 유난이 현지 언어(스페인어, 뽀르뚜갈어)의 학습에는 백익무해(百益無害)의 공신이다.
지대한 효과가 있음을 의미하며 타기해야 할 타성이 아니고, 권장할 장기(talent)라는 것.
스페인의 바스크, 갈리씨아 등 북부지방에서는 교통표지판을 비롯해 거의 모든 안내판에 스페인
어와 지방어(現地語)를 함께 표기한다.
까미노의 메카(mecca)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가 있는 갈리씨아 지방이 특히 심하다.
뻬레그리노스를 위해 도처(Camino의)에 설치되어 있는 수도꼭지 또는 저장한 물 주변에는 음수
(汚染) 여부의 안내판이 있는데 필히 등장하는 단어가 agua(아구아) 또는 auga(아우가)다.
전자는 스페인어로, 후자는 갈리씨아어로 물(water)이라는 단어다.
2, 3번 스펠링(spelling)의 차례가 바뀌었을 뿐 같은 4자의 알파벳으로 조립된 단어라 스페인어
'agua'(아구아)의 오식으로 보기 십상인 auga에는 한 에피소드(episode)가 있다.
까미노 뽀르뚜게스를 순 방향으로 걷던 2011년 5월 어느 날.
뽀르뚜갈에서 스페인의 갈리씨아 지방으로 국경을 넘었을 때였다.
이미, 한달 이상 적응한 후 떠났던 땅이라는 이유에선지, 마치 외국에서 귀국하는 기분이었으나
내 눈을 편치 않게 한 이 단어(auga)와 조우하게 되었다.
그 때, auga가 스페인어 agua의 오식일 것이며, 낡고 퇴색하기 까지 방관하고 있는 스페인인들
이라고 생각한 내게 그들의 이미지는 부정적이었다.
두번째로 까미노를 걷던 2015년 어느날, 'auga'를 다시 대면한 날 빔이었다.
퇴근할 채비를 하고 있는 알베르게의 차분한 중년 오스삐딸레라(hospitalera)를, 내 까미노 일상
에서는 드물게 붙들고 단어 아우가에 대한 내 생각을 밝혔다.
"애초에는 스페인어의 오식이었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갈리씨아로 둔갑시킴으로서 정당화한
것 아니냐"며 내가 만든 조견표(아래)를 보여주었다.
(1) 'POTABLE AGUA'(뽀따블레 아구아), - 스페인어 + 스페인어
(2) 'POTABLE AUGA'(뽀따블레 아우가) - 스페인어 + 갈리씨아어
(3) 'POTABEL AGUA'(뽀따벨 아구아) - 갈리씨아어 + 스페인어
(4) 'POTABEL AUGA'(뽀따벨 아우가) - 갈리씨아어 + 갈리씨아어
'음수 가능'이라는 위 4표기 중 정확한 것은 (1)과 (4/두 단어가 모두 갈리씨아어라는 전제로)다.
(2, 3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스페인어와 갈리씨아어 단어의 혼합 사용은 공교롭게도 이 경우 외
에는 본 적이 없다)
주목할 것은 모든 정황으로 보아 (2), (3)의 갈리씨아어는 스페인어의 오식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는 점이다.
의사가 통하지 않을 때는 백지에 그려가며 파고드는 동양 늙은이의 열정(?)에 감동 먹었는가.
귀가 자세를 풀고 'si'(동의)를 연발한 그녀는 유감스럽게도 갈리씨아 지방 출신이 아니란다.
갈리씨아어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면서도 내 주장이 합리적인 것 같아서 동의했다나.
2011년에는 갈리씨아어의 학습 기회가 없었는데 4년 사이에 장족의 발전을 한 인터넷을 통해서
갈리씨아어를 접하게 됨으로서 구체적으로 접근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이베리아 반도의 동서남북에 퍼져있는 까미노를 걸으며 유사한 경우들을 목도할 수록
내 생각이 포기되지 않았으며 지금(2022년)도 변함이 없다.
여러 왕국의 시대와 달리 통일 스페인이라 하나 4개의 공식 공용어(까스띠야, 까딸루냐, 바스크,
갈리씨아)와 여러 개의 비공식 공용어가 사용되고 있다면 통일은 허울 좋은 수사일 뿐이다.
그래서, 4분의 3c나 분단국 상태지만(얼마나 더 계속될지 모르지만) 훼손하거나 변형하지 않고
확고하게 고수하는 우리 말과 글(한글)이 통일에 대한 확신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것이다.
(2)번길, 후아 두스 빠수스 두 꼰쎌류(Rua dos Paços do Concelho)의 표기도 눈에 거슬렸다.
하나의 길 이름을 'concelho'(꼰쎌류)와 'conselho'(꼰셀류)로 각가 다르게 표기하고 있는 것.
발음은 대동하나 뜻이 전혀 다른데도(전자는 지방관청길, 후자는 협의 또는 충고의 길)
현지에서 확인된 이름(지명, 도로명)은 전자가 맞다.
그럼에도 경제용어(Gresham's law)를 빌어 말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
잘못된 표기(후자)가 인터넷의 위력(?)으로 확산되고 있으나 바로잡을 묘수가 없는데, 이 문제는
우리 주변에도 부지기수다.
내가 꼽는 대표적인 것은 실학자 다산 丁若鏞(1762~1836)의 諡號 文度公이다.
시호는 사후에 내려지는 號니까 1960년대까지 130여년간을 올바르게 내려오던 '문탁공'이 어느
천박한 식자에 의해서 문도공으로 전락되었다.
'度'자의 音이 '탁'과 '도'지만 訓을 살펴보면 쉬이 가릴 수 있건만 茶山 專門家然하는 자들까지도
사려깊지 못한 짓을 하고 있다.
COVID-19
폭이 더 좁아지면서 주택가를 지나는 후아 동 마누엘 I(R. dom Manuel I/마누엘 1세 길) 노변의
여유로운 공간이 있는 그늘막 건물이 눈에 번쩍 띄었다.
나무 그늘에 벤치형 탁자가 있고 편하게 휴식하기 그만인, 빠르케(parque)에 다름 아닌 공간이.
땅이 넓은 스페인의 까미노에는 보다 큰 규모의 공간이 도처에 조성되어 있으나 뽀르뚜갈에는
좁은 땅이기 때문인지 규모가 작고 수(數)도 적은데.
이곳은 인터넷(google) 지도에는 '오락실'로 표기되어 있으나 간판(건물 기둥에 부착)은 '라르구
다 말랴'(Largo da Malha/말랴 광장?)다.
아침길을 10km 남짓 걸어왔으므로 시장기 들 때가 되었는데 도중에 빵 배달차에서 산 바게트를
먹을 절호의 장소였다.
새벽(몇시간전)에 구워낸 바게트라 솜털 처럼 부드럽고 고소해서 가장 단조롭기는 해도 가장 편
한 장소에서 가장 맛 좋은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지나다가 내 모습을 본 마음씨 고운, 나이 든 여인이 잠시 후에 작은 페트병 하나를 들고 왔다.
얼음 처럼 시원한 물까지 더해서 행복을 만끽하는 아침이 되었다.
'마누엘 1세 길'은 좁고 길지는 않으나 넓은 삐녜이루 길(R. do Pinheiro)로 바뀔 때 까지 도보
뻬레그리노스에게 아주 편한 길이다.
노랑, 파랑 화살표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는지 'Santiago' , 'Fatima'를 첨가하였으며 'PEREGRINOS'
푯말을 박았고 여유 공간에는 편히 쉴 수 있도록 간이의자들이 놓여 있으니까.
특히 노약자를 위해서라면 가뭄에 콩나듯 드물게 있는 고급스런 의자보다 이같은 간이의자라도
이처럼 여유공간마다 놓여 있어야 한다.
까미노 뽀르뚜게스는 삐녜이루 길(N224-3)을 통해서 N1(IC2)에 진출, 보행자 고가교로 국도를
건넌 후 좌로 돌았다가 우측의 반다 지 무지까 길(R. da Banda de Musica)에 들어선다.
(길 이름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으며, 주목할 만한 사연도 있다.
'음악 밴드'(Banda de Musica)라는 이름이 붙은 이 길(R. da Banda de Musica)이 바로 그에 해당
하는데 내 궁금증을 풀어줄 아무도 없었으며 아직도 풀지 못했다)
또 바뀐 조제 뻬레이라 따바레스 길(R. José Pereira Tavares)을 따르면 하늘 밖에 보아지 않던 길
에서 탈출, 소규모 우체국이 있는 5거리, 교차로의 광장(Largo do Cruzeiro/N224-3)에 당도한다.
4개의 기둥을 기반으로 한 피라미드 형 지붕의 내부에 십자고 상(十字苦像)이 있는 신전(神殿/祠
堂?)이며 뽀르뚜갈의 국립기념물(MN) 810점 중 하나인 끄루제이루(Cruzeiro) 앞이다.
1604년에 건립한 이래 개축(1774년)과 수리(20c초)를 거듭하는 공을 들였으며 1910년에 MN로
선정되었다는 이 끄루제이루의 프로필(profile)이 너무 빈약한 것이 유감이었다.
존재 이유와 그에 못지 않게 이 국보가 농촌에 자리하게 된 내력 등을 알 수 없는 것이.
당초부터 현재처럼 어색하기 짝 없는 위치였을 리 없지 않은가.
광장의 서남쪽 길, 역 방향 뽀르뚜게스의 출구(R. de São Paio/N224-3)에 있으며 뻬레그리노스
에게 회자될 만큼 매너가 그만이라는 까페(Alfazema Pastelar)에서 커피 한잔으로 휴식을 취했다.
불특정 다수가 고객인 영업장이 호황을 누리거나 불황에 허덕인다면 양의 동서를 망라해서 같은
이유가 있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매너(Manner)다.
까미노(Camino de Santiago)에도 막심한 타격을 주고 있는 COVID-19(coronavirus disease19)는
지구적 재난을 가져온 악마다.
지구를 통째로 장기적 비상시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방역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일부 분야 외에는 온 셰계가 허덕이고 있는 형국이다.
장기화에 따른 각국의 대응책에 대해서도 설왕설래하며 특히 우리 정부의 대책에는 백가쟁명식
이론이 분분하다.
이 악마(꼬로나19)의 대 확산으로 인한 우리 정부의 조치를 어떻게 봐야 할까.
"정부의 방역조치로 인하여 망했다. 먹여 살려라"
소상공인들의 이같은 요구에 표(投票)를 의식하는 소위 정치인들은 너나없이 신바람나게 맞장구
치고 정부는 대부분을 수용하고 있는 형국이다.
과연 지당, 온당한 조치인가.
찬찬히 들여다보면 희비가 엇갈릴 뿐 아니라 선뜻 동의할 수도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패의 키(key)는 자신(manner)에게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매너 있게 최선을 다하는데도 안타깝게도 불운이 잇따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COVID-19
와 무관하게 망하는 것이 당연하며 필연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후자)의 매너는 필망(必亡)이며 망하지 않는 것이 되레 변고(變故)다.
그러므로, 전자에게는 정부의 지원이 구원의 손길이지만, 후자에게는 꼬로나19가 행운이다.
정부의 지원을 회복과 재기의 발판으로 삼는 전자와 달리 후자에게는 그것(정부의 지원)이 꼬로나
19가 가져다 주는 횡재라면 과연 정부의 조치에 동의할 수 있는가.
기독교 성경의 비유(신약 마택복음13:24~30)에 따르면 전자는 '알곡'이고 후자는 '가라지'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이 뽑힐까 저어되어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둔다"고 했다.
그 때(추수)를 기다려야 하는가.
까미노에서 우매한 황희 정승을 생각하다
광장을 떠나 전방 200여m 안팎의 철길을 건넜다.
건널목의 차단기와 신호등, "빨간 불 때 정지"(PARE AO SINAL VERMELHO) 안내판 등은 달리는
철마는 보지 못했지만 살아서 구실을 하고 있다는 증표일 것이다.
철길을 건넌 까미노는 삼거리에서 좌측길(Largo da Estação)을 택한다.
포스터 '헤꼬멘다두 까미뉴 지 파띠마'(Recomendado Caminho de Fatima)
음식점(Tasquinha) 벽에 붙어서, 의심하거나 불안해 할 여지 없게, 확실하게 안내하고 있다.
까미노는 100여m 지나 직각으로 좌회전(정남향의 R. da Gandara로), 남하한다.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완만한 경사가 되풀이 되고 오래 된 집들 사이에는 핑크색 브라질 스타일
(Brazilian-style/식민지 브라질에서 벌어온 돈으로 지은) 집들이 있는 길이다.
(스페인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부자가 되어 돌아온 사람을 Indiano라 하는데 그들이 지은 새
집도 쉬이 구분된다)
포도밭과 오렌지밭, 옥수수밭이 있고 하지(夏至)에 캔다 해서 하지감자라는 감자밭도 있다.
적지 않은 수의 오렌지와 포도나무, 옥수수와 감자 등 고루 있는, 텃밭에 다름 아닌 너른 밭에서,
하지를 하루(또는 이틀) 앞에 두고, 감자를 캐던 중년녀와 눈 인사를 나누었다.
마침, 파띠마로 가는 단체 순례자들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인지 나도 그들과 한 무리로 생각한 듯
했으나 이내 동양 할아버지로 알게 된 그녀는 후한 인심을 드러냈다.
나무에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려서 노랗게 익어가고 있는, 거인 주먹만큼 큰 오렌지 3개를 따서
조수로 대동하고 있는 소년(아들?) 편에 보내왔으니까.
배낭이 무거워진다는 이유로 배를 사양했던 낙남정맥(진주의 해동농원)이 떠올랐다.
그랬음에도 이번에는 기꺼이 받았다.
그 때(2004년)는 높은 산을 오르내려야 하는 늙은 산나그네라 그랬는데 지금(2015년)은 당시와
달리 더 많이 늙기는 했으나 평탄한 길을 걷고 있는 다다익선의 길 나그네(peregrino)니까.
"뽀르뚜게스(Português)가 에스빠뇰(Español) 보다 인심이 더 후한 것 같다"
어느 북유럽계 제 삼국 뻬레그리노의 말이다.
두 나라에서 비슷한 수의 경험을 했다면 단연코 맞는 말이다.
뽀르뚜갈의 인구가 스페인의 4.5분의 1에 불과하므로 후한 인심은 4.5배가 된다.
까미노의 길이(長/length/메인 루트만)도 스페인과 뽀르뚜갈은 10 대 1 의 차가 있다.
뽀르뚜갈의 인심이 스페인보다 10배나 후하다고 할 수 있는 수적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의 주관적 체험을 객관화 할 수 없으며 다른 제삼국인의 체험은 다를 수 있다.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강도와 농도, 분위기(정황)를 담을 수 없는 단순 수치만으로의 판단은 삼가야 하는 일인데도 그는
왜 내게 그 말을 했을까.
같은 유럽 연합(EU/European Union) 회원국인이며 자국화폐로 유로화(貨)를 소지하고 있는 그도
까미노를 걷는 중인 뻬레그리노다.
왜 동양 늙은이에게 두 나라의 인심을 평(評)해서 황희 정승의 일화(episode)를 생각나게 했을까.
왕십리를 지나가던 황희(黃喜 / 1363~1452/世宗때 領議政)는 소 2필로 밭을 갈고 있는 농부에게
"어느 소가 일을 더 잘 합니까"
이 물음을 들은 농부는 일을 멈추고 황희에게 다가가서 누가 들을세라 귓속말로 대답했다.
농부의 처사를 괴이쩍게 여긴 황희가 다시 연유를 물었다.
"짐승도 귀가 있는데 자기 흉보는 말을 듣는다면 힘껏 일할 맛이 나겠소?"
600여년 전, 이조 초기의 일이다.
황희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을 역사상 최장수(18년)로 지낸 명
재상이었지만 현명한 농부 앞에서는 우매한 영감에 불과했다.
6c전 미개했던 나라의 농부도 이랬거늘 최고로 개화된 나라 사람이 가질 처신이 아니잖은가.
1km 쯤의 간다라 길(R. da Gandara)이 직각에 가깝게 좌회전함으로서 끝나고 후아 두 라가르 지
아제이치(Rua do Lagar de Azeite)가 시작된다.
좌측(순방향은 우측)의 유칼립투스(eucaliptus) 숲을 지나 'T'자 길에서 좌회전하면 이스꼴라스 길
(R. das Escolas)에 이어 친뚜라리아 길(R. da Tinturaria)이 이어진다.
다시 건널목 있는 철길과 만난다.
친뚜라리아 길은 끊기고 까미노 뽀르뚜게스는 철길을 건너지 않고 잠시지만 철길과 동행한다.
살아있는 철길이라면 그 가장자리를 걷는 것이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대체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철길이 폐기(정지?)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전(열차가 운행 중이었을 때)의 까미노는?
인접해 있는 국도(N1)를 이용했을까.?.
그랬다면 철도와 국도의 개설 이전에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부티와 빈티
철로 곁을 걷는 중에(철길이 끝나기 전) 까미노 뽀르뚜게스는 소 교구마을 삐녜이루 다 벰뽀스따
를 벗어나 브랑까(Branca) 땅에 들어선다.
벰뽀스따(Pinheiro da Bemposta)는 지자체 올리베이라 다 아지메이스의 최남단이고 브랑까는
지자체 알베르가리아-아-벨랴(Albergaria-A-Vehla)의 최북단이다.
그러므로 지자체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내력으로 보면 브랑까는 본래 삐녜이라 다 벰뽀스따에 속해 있었으나 1835년의 행정제도 변혁
때 알베르가리아 아 벨랴 소속으로 바뀐 곳.
로마제국의 몰락 이후 서 고트족(Visigoths)과 무슬림(Muslim/이슬람)의 축출을 위한 헤꽁키스따
(Reconquista/스페인어는 레꽁키스따)에 기록이 있다는 마을.
5.621명(2011년현재)의 주민이 면적30.29km²에 거주하고 있으므로 국가의 인구밀도(114명/km²)
보다 훨씬 높은(185.6명/km²) 소 교구마을(freguesia)이다.
서쪽은 주로 고도70~110m인 평야지, 동쪽은 고도가 최대 333m에 이르는 거센 지형이지만 유황,
석탄, 텅스텐(tungsten), 방연광 등 광물과 금을 채취했던 국가적 중요 관심지역이었단다.
접경인 두 지자체는 시각적 구분 표지가 없어도 서로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치체 시행의 한 까닭이므로 당연하지만 삐녜이루 다 벰뽀스따와 브랑까의 비교는 달랐다.
전자가 역사적 조명을 받고 있는데 반해 낙후된 농촌이라면 후자는 역사적 유산은 빈약하지만
시각적으로 발전이 두드러지고 부(富)티가 나는 마을이라 할까.
하긴, 알베르가리아-아-벨랴는 땅이 비옥한데도 1차산업(13.6%/농축산업)보다 월등히 많은 인구
가 2차산업(56.2%/야금, 산업용 섬유 및 목재산업 관련 기본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2차산업) 대부분이 소 교구마을 알베르가리아-아-빌랴와 브랑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소
득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일*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위와 같은 비교에는 도사리고 있는 함정도 있다.
2는 1의 2배지만 4의 반(2분의 1)이며 3을 기준하면 1.5분의 1로 줄어진다.
허허한 섬에 올라온 30층 건물은 단연 고층 빌딩이었으나 이웃에 들어선 61층 건물로 인하여 반
토막으로 낮아졌으며 결국 재건축하게 되었다.
고층 빌딩 숲을 이루고 있는 여의도(서울 한강邊)의 오래지 않은 옛 모습 중 하나다.
한데, 100층 이상의 초 고층 빌딩이 이웃하게 된다면?.
우뚝했던 61층 건물이 이전의 30층 건물 꼴이 될 것임은 명약관화 하지 않은가.
지상 123층, 555m(첨탑)인 롯데월드타워(서울 송파구)와 그 주변이 실증이다.
부티를 쉬이 느낄 수 있음은 빈(貧)티 나는 지역을 거쳐 왔기 때문이며, 벰뽀스따가 보다(better)
부유한 마을이었다면 브랑까는 빈티 마을로 느껴졌을 것이다.
설정 기준에 따라서 정 반대의 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삼가야 하는 비교지만, 아무튼 산뜻한
현대감각의 핑크빛 건물들(신축 또는리모델링)이 들어서고 있는 브랑까인 것만은 분명하다.
객관화 된, 시각적 단순 비교도 이처럼 가변적이거늘 시각에 감각을 가미해야 하는 주관적 비교
야 말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오로지 명상과 기도,고행을 통한 수련의 행보로 일관해야 하는 뻬레그리노가 까미노에서
할 일이 아니다.
결단코 있어서는 안될 탈선이며 해서는 안되는 일탈 행위다.
많이 묻는자가 많이 안다
좌측 국도(N1,IC2)에 밀착하기 직전, 철길을 벗어나 3시 방향(우측)의 길(Estr.dos Reis)을 따라서
남진하다가 남행하는 동안에 가졌던 이 과오에서 소스라쳐 각성하며 본분으로 돌아왔다.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두며 실베이라스 길(R. Silveiras)과 함께 남남동진하는데 좌측 가까이에
세라믹 요업(ceramics 窯業)의 상징인 붉고 높은 굴뚝이 눈에 잡혔다.
굴뚝 쪽으로 난 길을 세라믹스(陶器) 길(R. da Cerâmica)이라 명명했을 만큼의 요업 공장.
건축이 활성적이라면 건축자재의 수요도 비례 증가할 것이다.
브랑까가 바로 그 지역이며 연기가 지속적으로 세차게 솟아올라야 할 그 곳의 굴뚝(세라믹 요업)
이 왜 잠자고 있을까.
벽돌과 기와, 기타 건축자재들이 산적해 있어야 할 굴뚝 일대의 너른 땅에 잡초만 무성하니 건축
경기의 침체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
철길을 떠나 1km남짓 지점, 삐녜이루 다 벰뽀스따에서 3km쯤에 새 알베르게가 태어났다.
지도(Google)를 추적하다가 발견한 '까자 까똘리꾸'(Casa Catolico).
숲에 가려져서 지나치기 십상이겠는데 2019년 신설의 도나띠부(Donativo/寄附) 알베르게라니까
내가 지나갔던 2015년 6월 20일에는 눈에 띄었을 리 없는 순례자용 숙소다.
노르떼 길에 이어 뽀르뚜 길에서도 2015년 이후에 폐문한 알베르게(순례자 전용)가 확인될 때의
안타까움을 신생 알베르게가 상쇄해 주어서 다행이다.
까미노 뽀르뚜게스는 후아 다스 바헤이라스(R. das Barreiras) ~ 이스뜨라다 헤알(Estrada Real)로
이름을 바꾸며 N1국도(Ic2)에 합류하기 까지 전제적으로 남하하는 길과 함께 한다.
조금 전에 걸었던 철길을 다시 만난다.
만나고 헤어지고, 함께 가다 갈라서기를 거듭하는 철로.
영구 폐기했다면 철거함으로서 값진 자원(鐵)의 재활용은 물론 그 땅의 이용 가치가 다대할 텐데
왜 철거하지 않고 사장(死藏) 상태로 방치하고 있는가.
철도가 잠정적 휴업을 하고 있을 뿐인가?
금방 뉘우치고 다짐두었는데도 뻬레그리노스와 무관한, 오지랖 넓은 짓을 또 하고 있으니.....
그렇다 해도, 뻬레그리노스의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비판 일변도 해야 하겠는가.
최신해(崔臣海/1919~1991) 정신과 의사에 의하면 정신질환 중에 묻는 병이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도 끝도 없이 묻기를 계속하는 질환이 아니면 많이 묻는 자가 많이 알게
되는 당연한 이치를 경계하거나 외면할 일이 아니잖은가
서울 S대학교의 L교수가 수도권의 한 대학교에 출강을 한 적이 있다.
삼고초려의 간청에 1학기를 조건으로 수락했기 때문에 다음 학기를 고심 중인 기말의 교무처에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의 낭보가 날아왔다.
다음 학기에도 계속해서 출강하고 싶다는 L교수의 서면 의향서가.
그러나, 상당 기간 출강이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2학기로 끝났다.
<본교의 강의시간에 마주하는 젊은이들(대학생)이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긴장의 끈을 놓기는 커녕 느슨해서도 안됩니다.
한데, 이 출강시간은 그 시간(본교의 강의)과 달리 매주 1번씩 교외로 소풍을 나온 기분이 들도록
마냥 편하고 안도(安堵)의 시간이며 이곳이 휴식처에 다름 아닙니다.
송곳과 비수같은 섬뜩함과 압박감을 주는 질문들 때문에 완벽하게 준비해야 하는 본교의 강의와
달리 진지한 질문이 없기 때문에 준비가 없어도 긴장되지 않으니까요.
첫 학기는 이 대학 출강일이 기다려질 정도로 유익했습니다.
그래서 이 유익이 연장되기를 바랐는데 해악을 동반한 위험한 유익임을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활력적 에너지(Dynamic Energy)로 승화되어야 할 유익이 도리어 나태와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들어가게 하고 있으니 그만둘 수 밖에요.>
사석에서 들은 그(L교수)의 말이다.
질문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질문 없는 것이 불만이며 그런 곳을 거부한 그.
그는 왜 도착적(倒錯的?)이었을까
나는 그에게서 바람직한 교수상(像)을 보았다.
연구하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질문의 전 단계가 의문이고, 그 질문은 지식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묻는 것이 질환이 아니라면 의문을 가질수록, 그래서 많이 물을수록 보다 더 활력적
이며 생동감을 높여주는데 이 과정이 생략됨으로서 맥 빠진 강의였다는 것.
편하다고 생각되었던 첫 학기와 달리 새 학기에 들어서는 이같은 시간을 즐기고 있는 듯한 자신
을 스스로 채찍하기 시작했다는 것.
생명력 없는 강의를 계속하는 것은 교수 본분의 유기라며.
그의 말은 내가 몸 담고 있는 대학에 대한 비하에 다름 아닌데도 전혀 언짢지 않았다.
반박 또는 부정하거나 변명할 여지 없는 사실이기 떼문이었다.
오히려 내 위치(신분)를 의식하지 않고 허심탄회한 그의 인품에 내가 끌렸으며 직분에 따른 불가
피했던 거리감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