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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60대 원문보기 글쓴이: 바위솔
2016년 3월 29일 (화) 촬영
도봉산 입구에 있는 광륜사의 삼성각입니다.
이 곳 광륜사 일대가 조선의 23대왕 순조의 며느리이자 24대왕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조대비)의
별장터였다고 전해져 오는 말을 뒷받침 하듯 삼성각 안에는
아버지인 순조를 대신해 19세때 부터 대리청정을 하던 중 3년 3개월만인 22세에 각혈을 하며 요절한
효명세자(추존,익종)의 비 였던 조대비의 영가가 모셔져 있습니다.
신정왕후(1808~1890)는 남편과는 달리 장수 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경복궁 흥복전(복원중 임) 에서 83세까지 살았으니까요.
하지만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들인 헌종이 8세에 임금에 올랐지만
시어머니인 순조비 순원왕후(김조순의 딸)가 섭정(헌종이 15세가 될때까지)을 하며 안동김씨의 세상으로
만들어 놓았으니까요.
순원왕후는 헌종의 비도 자신의 친척인 김조근의 딸을 들였으며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 하자 다음 임금도 자신의 뜻대로 철종(강화도령19세)을 25대 왕으로 즉위시켰고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도 안동 김씨인 김문근의 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또 철종이 22세가 될 때까지 3년간을 섭정을 했습니다.
신정왕후는 순원왕후가 승하한 1834년에야 비로소 궁중의 최고 어른이 되어 자신의 뜻을 도모할 수가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과 함께 말이죠. 고종 임금은 신정왕후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시어머니인 순원왕후가 했던 것처럼 자신도 12세의 고종을 대신해 3년 동안 섭정을 했습니다
신정왕후, 이곳이 그의 흔적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땅 입니다.
도봉산 입구에 있는 폭포입니다. 허가 없이는 출입이 제한된 곳이라 보신적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폭포 옆 바위엔 "필동암, 용주담"등의 글자가 새겨 있습니다.
도봉산 입구 숨겨진 곳에 이런 폭포가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지나쳤네요.
이 폭포 옆에 <가학루>란 아담한 정자가 있습니다.
1947년 가학루 중수기에 의하면 가학루 현판을 흥선대원군이 썼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원군 시기부터 있었던 정자로 보이는 이 정자는 네차례 수리를 한 기록이 있지만
현재의 정자는 1930년도에 지은 정자로 조대비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도봉계곡은 길이가 0.6키로 정도 되는데 주위에 열 곳의 사찰과 서원 한 곳,
그리고 17개의 바위 글씨가 있습니다. '제일동천"도 그 중 하나로 천하에 제일가는 경치라는 뜻 입니다.
바위글씨 중에는 도봉서원 터 앞에 있는 계곡 바위에 새긴 고산앙지(高山仰止)라고 쓴 글도 있는데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란 뜻으로 조선 숙종때 사람인 병조판서 김수증(1624~1701)이
도봉서원에 배향된 조광조를 사모하며 쓴 글입니다.
김수증은 청음 김상헌의 손자로 형제 영의정이었던 김수흥, 김수항의 형입니다.
김수항의 아들도 영의정을 한 김창집으로 그의 5대 손은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를 연 김조순이지요.
호사다마라고 영의정을 했던 김수흥, 김수항, 김창집은 모두 제명에 못죽고 사사 되거나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합니다(김수흥).
특히 김창집은 신임사화에 연루돼 귀양 중 금부도사 조문보(조광조의 후손)가 사약을 들고 와
빨리 마시라고 독촉하자 "어찌 네 선조도 생각지 않느냐고 호통을 치고 사약을 마셨다고 합니다.
김창집이 사약을 받았을 때는 75세 였습니다.
사약을 가지고 왔던 조문보도 후에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장살 처분을 받아 맞아 죽었으니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생각납니다.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6년) 양주 목사로 부임한 남언경이 조광조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웠습니다.
이듬해에 사액을 받았지만 1579년(선조12년)에야 완성 했는데
1871년 고종의 서원 철폐령때 훼철되었습니다.
1775년(영조51) 영조임금이 도봉서원"이란 친필 사액도 내렸었던 서원엔
1696년(숙종22)부터 송시열 선생도 배향 했습니다. 그러나 송시열 선생은 1723년(경종3년) 출향되었다가
1725년(영조1)에 재배향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도봉동문"이란 바위글씨는 송시열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봉계곡 입구란 뜻입니다.
도봉서원은 복원을 위해 2011년 발굴 중
12세기 이전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강령(불교의식에 쓰는 방울) 등 국보급 불교유물 77점이 발견되며
영국사란 절 터 였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불교계의 반대로 서원 복원이 보류되고 있습니다.
이 터는 또 고려시대 도봉원이 있던 곳이 아닌가 하여 연구 중이기도 합니다.
도봉산 입구에는 또 유희경과 이매창의 시비도 있습니다.
13세때(1557년) 아버지를 여윈 천민 출신유희경이 시묘살이를 한다는 소문을 듣고
당시 대학자이던 남언경이 찾아와 두꺼운 옷 한벌을 주고 보살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유희경은 남언경의 문하에 들어가 예학을 배워 상례 전문가가 됩니다.
후에 양주 목사로 부임한 남언경이 도봉서원을 건립하자 유희경도 이 곳에 오게 되지요
그 인연으로 유희경과 이매창의 시비가 이 곳에 세워지게 된것입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누나
마음속 그리운 정 말로는 다할 길 없어
밤새 생각타보니 머리카락 반이나 세었구나
신첩의 괴로워하는 이 심정 아시려거든
금가락지 헐거워진 이 손가락을 보옵소서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시 중, 두편을 올려봅니다.
사진은 능원사란 절 입구의 일주문입니다.
장엄하고 화려한 단청이 눈길을 잡는 능원사입니다.
보통 절의 종각인 법음각과 대웅전인 용화전입니다.
적심당의 측면
용화전 용마루에 있는 새는 용을 잡아 먹고 산다는 상상의 새 금시조입니다.
법음각 앞에서 본 일주문.
왕궁의 정전을 연상 시키는 능원사의 대웅전인 용화전 모습.
월대로 오르는 계단에 용이 새겨진 어도 같은 길도 있습니다.
화려함의 극치, 용화전 현판 주변의 외출목과 단청.
처마 안쪽 공포 사이 마다 부처님을 모셔 놓았는데 관세음보살, 약사여래불, 미륵존불, 석가세손, 입니다
내외를 합처 그 수가 모두 무려 104구나 된다고 합니다.
현판 양 옆에는 보통 사찰에 있는 용이 아니라 봉황새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창문 문양도 화려하네요.
이 곳에 수록된 사진들은 크릭하면 모두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화려한 단청을 클릭해 보세요.
철웅당과 5층 석탑.
경복궁 근정전과 흡사한 월대의 난간
다포식 공포와 외출목에 더해진 금색 단청이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화려하고 장엄합니다.
벽화
능원사는 개인 사찰로 불교 어느 종파에도 속해 있지 않으며 포교하지도 않고 신도회도 없다고 합니다
인연이 되면 머물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라" 고.... 물 흐르듯....
법당 내부입니다. 밖에서 머리만 보이던 봉황새의 꼬리는 법당 안에 있네요.
좌측은 약사불이고 오른쪽 조금 큰 불상이 능원사의 본존불인 미륵존불입니다.
본존불이 모셔진 제단 위의 모습입니다. 일반 사찰처럼 닫집이 없어도 더 화려합니다.
제단에 모셔진 네분의 부처. 좌로부터 관세음보살, 약사여래불, 미륵존불, 석가세존불 입니다.
70평이나 되는 법당 내부에 기둥이 없습니다.
좌로 부터
법당 내에는 천불과
제단에 모신 네분의 부처 외에도 추녀 아래에 모신 104분의 부처까지 1,108불이 있습니다.
법당내 범종.
이렇게 큰 법당을 내부 기둥을 쓰지 않고 세울 수 있었던 것은
4개의 대형 대들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종각인 법음각에서 보이는 풍경입니다.
능원사 입구에 있는 건물의 단청은 또 달랐습니다.
능원사의 담장입니다. 막새기와에 화"자 와 박쥐의 문양이 있습니다.
능원사 바로 위에 있는 도봉사입니다.
도봉사는 천년 고찰로 고려때인 968년 혜거국사가 창건 했고
고려 현종이 거란의 침입때 남쪽으로 피난 중 이 곳에 들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의 도봉사는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옛 흔적은 전혀 없고
당시 도봉원도 이 곳이 아닌 도봉서원 터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원이 있었다고 하기엔 좁다)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탑이 대웅전 양 쪽에 있습니다.
대웅전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목탁.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불과 협시불인 관세음보살,지장보살.
원래 중앙의 석가모니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철불로 서울시 유형문화재(151호)로 지정 됐으나
현재는 서울 원서동에 있는 불교박물관에 있습니다.
대웅전은 밖에서는 2층이나 내부는 통층으로 문들이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대웅전 전면의 유리 문 문양.
2층의 문도 유리문이네요.
철근 콘크리트 건물인 대웅전
진주 류씨 류양의 묘입니다.
류양의 2남 1녀 중 장남 류첨정은 이 곳에 아버지와 함께 묻혀 있지만
차남인 류순정은 중종 반정의 주역 중 한사람으로 부천에 그의 묘가 있습니다.
딸은 세종의 9남인
영해군의 아들 영춘정에게 시집 갔습니다. 그의 묘는 바로 이웃에 있는 영해군파 가족묘에 있습니다
류양의 묘 아래에 있는 그의 큰 아들 류첨정의 묘.
류양의 묘 위에는 류첨정의 아들 그러니까 류양의 손자인 유부의 묘가 있습니다. 역장을 한 경우입니다.
무수골입니다.
미술동호회원들이 그림을 그리러 나왔더라구요.
무수골에 있는 세종의 9남 영해군 당의 묘역입니다.
이 묘역 맨 앞에는 특이하게도 노비의 무덤이 있습니다.
묘갈까지 세워 놓은 노비의 무덤은 주인을 위해 목숨을 버린 노비를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영해군 묘역 조금 위에 있는 그의 아들 영춘정 인의 묘 앞에 있는 신도비입니다.
공식 문서가 아닌
개인의 묘에 "도봉과 노원"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비'로 명필 이조참의 유연재 김희수가 썼습니다
김희수가 썼다는 내용이 있는 비문.
영춘정은 영해군의 아들이므로 당연히 정'으로 이름지어 졌지만
중종 반정시 공을 세워 한단계 높은 군'으로 봉해져 영춘군이 되었습니다.
영춘군은 류순정의 누이와 혼인 했습니다. 류양의 사위입니다.
비에 돌 꽃이 피여 있네요.
오늘 도봉산 입구 탐방은 여기서 마칩니다. 주문해 놓은 토종닭 도리탕 먹으러 가야합니다.
왕의 아들을 왕자라고 하죠. 왕자 중 한 명은 왕이 되지만 나머지 왕자들은 할 일 없는 실업자로 평생을 살다
가게 됩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자손들은 4대까지 과거도 볼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정계에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왕손이므로 벼슬은 하지 못하더라도 품계는 있었습니다.
왕의 아들인 대군과 군은 정1품~종1품의 품계를,
대군과 군의 아들인 도정(都正)과 정은 정3품 당상관(도정)과 당하관(정)의 품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정의 아들은 ? .....알고 싶은분은 댓글 주세요.
첫댓글 요즘 난계님 때문에 역사 탐방을 하게 되는 군요.
날이 풀리면 개인 사찰인 능원사를 가보야겠군요.
돈이 얼마나 많으면 이렇게 화려한 사찰을 지었을까요?
그렇죠?
모든 장식은 다 갇다 붙였습니다
아마 주체할수없는 돈으로 마음껏 장식한 모양입니다 ㅜㅜ
<아름다운 60대> 덕분에 [道峰洞門] 구역의 유적탐방 잘 하였소이다
현재 [도봉서원]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자리는 본래 신라시대 고찰 <靈國寺> 폐사지로
영조때 현재 <光輪寺> 절 뒤편에 위치했던 [도봉서원]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오이다
때문에 현 [광륜사] 사찰 앞 [도봉산국립공원 탐방센터]가 위치한 지역을 <서원마을> 이라 부르고 있소이다
[광륜사]와 <조대비>와의 연을 맺게 된 것은 광릉내 근처 <풍양 조씨>선산에 묻힌 친정아버지 <조만영>의 묘소를 참배한 후 자주들려 천도시주를 하게 되면서 부터이오이다
도봉산쪽은 딱 한번 가본것 같습니다
언제나 좋은 설명 감사드립니다^^
내일 날씨도 많이 춥다니 국립박물관 이나 역사 박물관 탐방 번개 올려주세요~~
道峰산의 <天竺寺> <靈國寺> 와 함께 '道峰洞天'의 3대사찰이었던 <광륜사>는 본래 '萬丈寺'라 불렀으며
<조대비>에 의해 커다란 불사가 이루어져 '光輪寺'라 고치고 별장처럼 이용하였다
고종 초기에 <조대비>가 수렴첨정을 하면서 壯洞金門의 눈을 피해 이곳에서 <흥선대원군>과 정치적 遭遇를 하였을 뿐만아니라
<흥선대원군>의 섭정기간에도 <대원군>이 이곳에서 측근들과 국정을 논의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寧海君 <李塘>은 세종의 18남 중에 17번째 아들로서 후궁 <신빈김씨>와의 사이에 6남 중 5번째로 태어난 9번째 서자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형제간에 다투는 일이 없어 특히 세종 말년에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寧海君의 장남인 永春君 <仁> 역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묘역을 도봉산 우이암 [보문능선]에서 발원한 [무수골 계곡] 명당에 조성하고
이곳은 '모든 근심을 잊게하는 곳' 이라 하여 이후 이 골짜기를 '無愁谷 : 무수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무수골]은 [도봉산 둘레길]의 '도봉옛길' 구역에 인접한 골짜기로 곳곳에 권문세족들의 묘역이 자리한 명당이다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에는 宗山 임에도 불구하고 묘역에 <영해군>의 장남인 <영춘군>의 장인인 평산신씨 <申允童>의 묘소가 함께 할 뿐만 아니라
집안의 家奴였던 忠奴 <金同伊>의 묘를 묘역에 함께 안장하여
신분과 가문을 초월한 가족의 화목과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을 몸소 실천한 <영해군>가문의 가풍이 이어져 온 묘역이다
따뜻한날
탐사하면서 명강의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내일 번개를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