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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여호와의증인 정보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천불아
「최초로 할례를 베푼 아브라함은 영혼에 대해 예수를 예견해 서푼자의 교의를 받아 할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에 속하는 18명 및 3백명의 남자에게 할례를 베풀었다(창세17:22, 27 및14:14)」에서 살필 수 있다. 그에게 줄 수 있었던 지식은 그러면 무엇이었는가? 그가 먼저 18명이라고 말하고 간격을 두어 3백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 주세요. 18(을 구성하는)은 (수치가) 10인 I(이오타)와 (수치가) 8인 H(에이타)이다. 그러므로 이에스스(=예수)가 된다. 또 T(타우)(수치는 3백)로(나타난다) 십자가가 은혜를 의미하고 있으므로 3백명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그러므로 2개의 문자로 예수를, 또 한 글자로는 십자가를 나타낸다.」( 「사도 교부 문서」코단샤, 1974년,41-2페이지) |
바나바는 이 해설에 대해 십자가가 T에 의해 표현된다, 라고 명언하고 있다. 이 T(타우)에의 언급은 예수의 십자가가 한 개의 형주는 아니고 T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고 하는 그 의미로 통한다.
협회는 십자가가 T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경우 담무스 신과 묶는다. 그런데 바나바의 편지는 같은 T에 묶어도 속죄의 은혜와 관계 짓고 있다. 전자이면 이교와의 관계가 나오지만, 후자이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신 자신의 축복을 예상시킨다.
게다가 이 바나바의 편지는 이스라엘의 백성이 아말렉와 싸웠을 때에 모세가 손을 든 기록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모세가 손을 들었을 때의 모습은 십자가를 나타내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같은책 43 페이지).
독자는 출 이집트기 17장11-12절을 살펴보셔서 모세가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그 모세의 모습은 전통적인 십자가에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협회가 주장하는 한 개의 형주에 부합 하는지를 판단해 주셨으면 한다.
3.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 서기110-165년)
유스티누스는 2 세기 전반에 활약한 또 한사람의 교부이다. 그의 발언 중에서 십자가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살펴보자. 우선「제일 변명-First Apology」중에서이다.
「한명의 아기가 우리를 위해서 태어났고, 한사람의 젊은이가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의 정사는 그의 어깨에 드리워졌다. 이것은 그의 어깨가 붙은 십자가의 힘의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 「유스티누스」, 쿄우분관, 1992년, 50 페이지)
유스티누스는 예수가 사형으로 되었을 때 예수의 어깨가 십자가에 붙어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협회가 가르치는 한 개의 형주의 경우에는 예수가 어깨를「형주」에 붙였다고 하는 것이 되어 부자연스럽다. 형주라면 그 어깨는 공중에 뜨게 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예수의 형구가 전통적인 십자가였다고 하는 전제에 선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스티누스는 그 「제일 변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심지어 Jupiter(또는 Zeus)의 아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경우에서도 없었고, 그들이 십자가형을 모방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스타우로스)를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십자가(스타우로스)에 관한 모든 말은 이미 분명히 했듯이 심볼에 의해 말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가 예고했듯이 이것이야말로 그 힘과 지배를 나타내는 최대의 상징이며, 그것은 우리의 눈으로 지각하는 곳에서도 증명될 수 있습니다.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고찰해 주시길 바랍니다. 도대체 만물이 십자(스타우로스)의 형태없이 질서와 연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우선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는 돛대로 불리는 이 승표가 배 속에서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흙은 이 형상의 도구에 의하지 않으면 경작할 수가 없습니다. 이 형상의 도구에 의하지 않으면 굴착인은 일을 할 수 없고 공인도 같습니다.」
「한층 더 인간의 형상이 비이성적인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의 경우 신체의 직립 방향과 직각에 양손이 뻗어져 있고 얼굴의 경우에는 생물의 삶을 위한 숨을 쉬는 코라 불리우는 것이 얼굴 표면에서 돌출되어 있어 이것은 십자의 형태(스타우로스)의 그 이상의 것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다음의 말은 예언자를 통해서 말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의 앞의 숨결은 주 그리스도이다. 」」
「여러분들 로마인의 사이에 이용되고 있는 심볼도 이 형상의 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군기와 승표의 형태인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 도처 여러분들의 진군이 있어 거기에 힘과 지배의 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비록 여러분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유스티누스」, 쿄우분관, 1992년, 73 페이지) |
이상과 같은 내용 중에서, 유스티누스는 예수의 십자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가지 예를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돛대가 서 있는 배, 흙을 경작하는 도구, 직립 해 양손을 직각에 늘리고 있는 인간, 얼굴표면과 이루는 코, 로마군의 군기, 승표이다.
각각의 비유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상상해 주시길 바란다. 여기에 우리는 매우 쉽게 모든 비유가 예수가 처해진 형구는 전통적인 십자가의 형태이며 협회가 가르치는 한 개의 형주가 아닌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주-물론 원어에서는 십자가를 나타낼 때 “스타우로스”를 쓰고 있고, 이 스타우로스의 형태에 대해 위의 예를 제시한 것이다.)
덧붙여 여기에 나오는 로마군의 「군기(exillum)」란 T자의 형태를 한 지주에 기가 붙여진 것을 가리킨다. 또, 「승표(tropaion)」란 적으로 부터 승리했을 경우 그 적의 갑주나 무기 등을 묶어 매달기 위한 것이다. 그 형태는, T자였다. 로마군은 그리스 이래 로마 시대에 있어도 승리의 표징으로서 그것을 전장에 세우는 것이 관습이었다.
게다가 유스티누스가 저술한 「트리폰과의 대화」로부터 십자가의 형태를 암시하는 곳을 살펴보자. 그 서적은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에 관계되어 구약 성서를 예형론적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구워진 양안에 예수의 십자가를 살피고 있다.
「완전하게 구어지도록 명을 받은 그 양은 그리스도가 겪은 십자가의 고통의 상징이다. 구워진 양은 십자의 형태로 정렬을 시켰다. 왜냐하면 한 개의 쇠꼬챙이는 아래쪽으로부터 머리로 향해 꿰뚫어지고 있고 양의 다리들에 붙여서져서 등을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이다.」(Dialogue With Trypho", Ante-Nicene Fathers, vol. 1 Chapter XL p. 215) |
유스티누스는 구약시대의 양이 세로의 꼬치와 횡단목에 의해 구워졌던 것에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그리스도가 구약시대의 새끼양이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약시대의 양이 구워지는 그런 희생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말은 전통적인 십자가의 형태로 의미가 있다. 협회가 말하는 한 개의 형주에서는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트리폰과의 대화」에 대해도 바나바의 편지와 같이 이스라엘의 백성이 아말렉와 싸웠을 때를 다루고 있다. (출애굽기 17: 8-16)
「백성이 아말렉와 싸울 때 여호수아가 싸움을 이끌고 모세 자신은 양손을 뻗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풀과 아론은 하루 종일 그 손을 지쳤을 때에 내려지지 않도록 계속 붙잡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만약 십자의 모양(스타우로스)의 신호를 계속하지 않았을 때 백성들은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 십자의 모양(스타우로스)을 계속 유지를 할 때에는 반대로 아말렉이 전투에서 졌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전투에서 이긴 것은 모세가 전투의 앞에서 백성에게 힘을 달라고 기도를 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십자의 모양(스타우로스)을 유지하면서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같은 책, 244페이지) |
유스티누스는 모세가 손을 뻗어 신에 기도했을 때의 모습을「십자 모양의 표시」라고 말해 모세의 승리는 십자를 유지한 기도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 한번 더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 모세가 손을 뻗었다(stretching out both hands)란 어떠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유스티누스가「훌과 아론은 하루종일 그 손을, 지쳤을 때에 내리지 않게 계속 유지했다」라고 기술했을 때, 특히 성서에서는 12절에 훌은 이편에 아론은 저편이라고 표현을 하면서 언급을 하고 있는 이 모습이 한 개의 형주를 상상하는 것이 좋은지 그렇지 않으면 전통적인 십자가의 형태를 상상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지를 생각해 주시길 바란다.
게다가 유스티누스는 「트리폰과의 대화」안에서 유니콘의 십자를 살피고 있다.
「 유니콘의 뿔의 모양은 십자를 그린 타입 이상의 사실이나 그림이라고 하는 사실은 누구라도 말하는 것이고 또 증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타우로스의 하나의 beam은 수직으로 위를 향하고 있고 이 것은 가장 극적인 큰 뿔을 나타내고, 나머지 하나의 beam은 거기에 붙어있어 고정되어 있는데 그러한 뿔이 하나의 뿔로 엮어져서 있는 것과 같이 양 사이드에서 나타난다. 」(같은 책 245페이지) |
여기에 그려져 있는 「유니콘」은 앞이 나뉘고 있는 뿔을 갖고 있는 짐승이다. 그 짐승의 뿔은, 한 개의 형주를 표상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십자가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트리폰과의 대화」중에서 청동의 뱀에 대해 접하고 있는 부분을 인용해 두자.
「그는 청동의 뱀을 만들어 그것을 군기로 내걸고 뱀에게 물린 사람들은 그것을 보도록 명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보았을 때 살았다. 하나님이 최초로 저주하셔서 이사야가 말하고 있듯이 큰 검으로 잘린 뱀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적용일 될까? 당신 선생의 어리석은 지식처럼 이것들을 표시로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을 어리석게도 그대로 받아 들일것인가? 오히려 군기를 수난의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위해서 언급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모세는 예수(여호수아)라고 이름 붙여진 분과 함께 손을 뻗음으로 당신의 백성을 승리로 이끈 것이 아닌가?」(같은 책 255페이지) |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민수기 21장4-9절에 나오는 「청동의 뱀(놋뱀)」이다. 그는 그 뱀이 매달린 곳이 군기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라고 해설하고 있다. 유스티누스가 군기라고 말할 때 그것은 로마군의 군기로 T자형의 깃대를 가리키고 있다. 그 말은 예수가 매달린 나무는 한 개의 형주가 아니라 십자였던 것을 나타내고 있다.
4. 시뷰라의 신탁 (Sibyllin Oracles)
2 세기 중반에 기록되어진「시뷰라의 신탁」은 바나바의 편지, 유스티누스처럼 모세의 기원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모세는 성스러운 팔을 펴서 믿음에 의해 아말렉인에 이겨 그의 원형이 되었다.」( 「성서 외전위전 6」쿄우분관, 1991년, 348페이지) |
「그의 원형」이란, 예수가 사형된 것을 가리킨다. 「팔을 펴서」라고 표현되고 있는 이상 그 형구는 전통적인 형태의 십자가였던 것은 틀림없다.
또, 같은 서적의 2페이지 후반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 그는 그의 손을 벌렸고 온 세상을 감싸셨다. ... 그리고 첫째 주님은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죽으신 이후의 모습을 명백히 보이셨다. 그분은 나무위에서 박힌 4개의 못자국이 생긴 손들과 발들을 보이셨고, 이것은 동과서 남과북으로 고정되는 하나의 마크이다」( 「성서 외전위전 6」쿄우분관, 1991년, 350페이지) |
이 기록은, 예수의 손과 다리에는 「4개의 상처」가 있는 것에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예수의 각각의 손발에 한 개씩의 못이 맞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그의 모습에서 세상을 감싸시고 동서남북으로서의 화합을 나타내는 그 모습은 협회가 말하는 그런 하나의 형주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5. 베드로행전
「베드로행전」은 서기180-90년경에 기록된 서적이다. 그 38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여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지금 듣고 있는 사람도 또 장래의 사람들도 당신들은 최초의 죄를 돌이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오르는 것은 이를 위한 것입니다. 이분은 유일 무비하신 말씀이시며, 나의 영혼은 이분에 대해 또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면 무엇일까?」그 말씀은 내가 매달린 수직의 나무이며 그 수직의 것은 인간의 본성인 수평과 교차하고 있고, 십자가의 가지인 수평의 나무와 수직의 나무를 연결하는 중앙의 못은 인간의 뉘우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 「성서 외전위전 7」쿄우분관, 1993년, 86 페이지) |
이 기록은 말씀이 세로의 나무로 뻗은 나무와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는 수평목을 이루는 십자가의 형태에서 그 만나는 중심은 인간의 회심을 상징하고 우리는 그런 십자가를 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죄에서 돌이킬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중앙 근처에서 가로대를 수직의 나무에 고정하고 있다」라고 그리고 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한 개의 형주는 아니고 전통적인 형태라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리라.
6. 바울행전
「바울행전」은 200년경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의 장로에 의해 쓰여졌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사형을 집행 사람들은 나무들을 넓혀 그것들을 쌓아올린 화장단상에 오르도록 해서 그녀에게 명했다. 그녀는 십자가의 모양을 취하고 그리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불을 붙였다. 그런데 큰 불길이 붉게 타올랐는데 불은 그녀에게 붙지 않았다.」( 「신약 성서 외전」코단샤, 1974년, 167페이지) |
이 기록은 분명하게 십자가가 전통적인 형태인 것을 전제로 해서 적고 있다. 즉, 십자가형은 그 4세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다.
7. 토마스행전
「토마스행전」은 3 세기 중반까지는 시리아어로 완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제5행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해 빵에 십자가의 표시를 붙여 그것을 찢어 분배하기 시작했다.」( 「성서 외전위전 7」쿄우분관, 1993년, 275페이지) |
여기서 빵에 긋는 이유는 「죄와 영원의 잘못 때문에」의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었지만 십자가가 한 개의 형주이었다면 한 개의 선이라고 적었을 것이다. 십자가가 2 개선이 사귀는 십자였기 때문에 「십자가의 표시」라고 기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또, 「사도 유다·토마스의 행전」에는「십자가의 표시를 긋는다.」라고 하는 것이 자주 나온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그리고, 그는 젊은이에게 말한「너의 마음을 우리들의 주에게 펼치세요. 」그리고, 그는 십자가의 표시를 그으며 그에게 말했다.」( 「신약 성서 외전」코단샤, 1974년, 239페이지) |
그런데 「십자가의 표시를 긋는다」란 어떠한 행위인가? 그것은, 오늘날 카톨릭의 경우 그 신도들이 십자를 긋는 것과 같다. 다음의 문장을 읽어 주셨으면 한다.
「그러나 유다는 신을 칭찬한 참아 머릿에 십자가의 표시를 그었다. 그리고 그는 조금의 기름으로 자신의 비강을 적셔 얼마를 자신의 귀안에 넣어 두상에 십자가의 표시를 그었다.」( 「신약 성서 외전」코단샤, 1974년,194-5페이지) |
독자 여러분 여기에 기록되고 있는 대로 해 주시길 바란다. 손가락을 우선 비강에 넣어 다음에 양귀에 그리고 마지막에 두상에 닿아 주셨으면 한다. 그것이, 「십자가의 표시」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어떠한 형태가 되는지 분명하리라 생각된다. 즉, 현재에서도 카톨릭에서 하고 있는 전승은 4세기 이후에 이교의 유물의 잔재가 아니라, 초가 사도들로 교부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8. 터툴리안(Tertullian 서기200-250년, 기록은 190-220 )
터툴리안은 3 세기 전반에 활약한 가장 유명한 교부 였다. 그는「호교론」의 12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군은 그리스도교인을 십자가(crucibus)나 기둥(stipitibus)에 매달고 있다. 저기있는 우상은 무엇인가? 점토로 만들어져 그리고 십자가나 기둥 위에 매단것이 아닌가? 당신의 신의 몸이 처음으로 희생이 된 것이 바로 횡단목(patibulum) 위에서이다.」( 「터툴리안」그리스도교 교부 저작집(쿄우분관, 1987년), 37 페이지) |
여기서, 터툴리안는 십자가와 기둥을 병렬하여 언급하고 있다. 터툴리안의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로도, 기둥에 의해서도 사형되었다는 것이다. 기둥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한 개의 형주이다. 그러면, 십자가는 다른 형태였던 것이 된다. 이것은 예수의 형구가 한 개의 형주는 아니었던 것을 증언 하고 있게 된다.
같은 서적의 16장에 대해 터툴리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수직에 위치한 목재는 동일하게 십자가의 일부이다. 만약 우리가 십자가 그렇다면, 부분적이 아닌 하나님께 전체적으로 빌고 있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여러분의 신들의 기원은 조각가들에 의해 십자 위에 만들어진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한편 여러분도 또 승리의 여신들이 있다. 전승(트로파에움)의 기둥의 경우도 그 내용은 십자의 기둥이 되어 있다. 군대에서는 로마의 종교로서 군단 알고가 있고, 거기를 향해 맹세를 함으로 모든 신들보다 그것을 존중하고 있다. 거기에 너저분하게 붙은 신들의 상은 사형의 기둥(십자가)의 장식이다. 황제기나 장군기 위에 붙이는 헝겊도 그 기둥의 옷이다. 나는 여러분의 마음을 기리고 싶다. 십자가가 장식도 없고, 벌거벗은 채로의 것을 여러분은 바라고 계시지 않는 것이니까.」(같은책 46 페이지) |
이 문장은, 그리스도인은 3 세기의 초기 무렵, 「십자가에게 비는 사람」이라고 오해 받아 비난 되고 있던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여기에는, 「수직에 위치한 나무」는 「십자가의 일부이다」이라고 진술되고 있다. 그 말은 십자가는 한 개의 기둥 이상의 것이었던 것을 시사한다.
또, 여기서 「전승의 기둥」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트로파에움은 유스티누스의 서적으로 「승표」라고 번역된 것으로 그 형태가 십자가였던 것은 이미 말했다.
「군단의 표시」라고 번역되고 있는「스이그나」라고 하는 말은 로마의 군단에 있어서는 군기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는 아니고 각종의 상이나 심볼을 횡단목에 붙인 것이다. 이것도 터툴리안에 의하면 십자가의 형태를 시사하는 것이었다.
장군기와는 로마 장군의 진지 혹은 로마의 선단에 붙인 적기이다. 「헝겊」은 범선의 마스트의 끝에 붙이는 돛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기둥의 옷」(크룩스·스트라)이라고 말해지고 있었다. 그것도 십자가의 모습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 말은 이 비유도 십자가는 한 개의 형주는 아니고 전통적인 형태인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터툴리안이「유대인에게로의 대답」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새겨두자. 그는 신명기 33장 17절의 「들소의 모퉁이」가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여 다음과 같은 해설을 하고 있다.
「모퉁이의 2개의 것은 그리스도의 성향을 나타내고, 그 하나는 재판을 하시는 강직하심과 구세주로서의 상냥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모퉁이는 십자가의 양단이다. 십자가의 부분인 배의 돛에 대해 조차 첨단이 그처럼 불리고 있다. 마스트의 중심의 기둥은 유니콘으로 불리고 있다. 실제 이 십자가의 힘에 의해 이 모퉁이의 방법에 따라 지금은 세계의 나라들을 신앙에 의해 땅에서 하늘로 밀어 올리고 있다. 」(편집자주-Adversus Marcionem 3,18,3-4) |
여기에서는 힘과 상냥함은「십자가의 양단」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것이 십자가의 횡단목의 양단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표현은 십자가를 협회가 주장하는 한 개의 형주로 해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십자가를 상정하는 것 그것을 의미한다.
한층 더 이 기록은 배와 돛을 십자가에 설명하고 있다. 이 묘사도 십자가는 한 개의 형주는 아니고 전통적인 형태이다.
(편집자 주 - 위의 내용말고도 십자가의 모양으로서의 증명을 그의 저서 중에 Ibid.,3,18,6 그리고 Ibid., 3,23,6 그리고 De idol atria, 12 를 살펴보면 모세의 이야기,그리스 문자 TAU의 T 이야기, 예수님의 제자들로 우리들이 지녀야 할 모습으로서의 십자가의 형태 를 이야기하고 있다.)
9. 미누시우스·훼리크스(Minucius Felix 서기210-250)
3 세기 초기의 훼리크스의 서적에 이교도의 카에시리우스와 그리스도인의 오크타비아스라는 논의가 나온다. 로마의 변호사였던 오크타비아스는 십자가의 형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호하고 있다.
「늘려진 올에 의해 그리고 닻이 올려져 배가 조용하게 진행될 때, 뚫고 나온 돛에 의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십자가의 표시를 본다. 그리고 사람이 순수한 마음으로 손을 뻗어 신을 우러러볼 때 그것은 십자가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자연으런 이유로서 이 십자가의 상징은 지속되고 또는 당신의 신항은 그에 대한 존중의 마음으로 형성된다.」(The Octavius of Minucius Felix, Ch. 29, Ante-Nicene Fathers, vol. 4 p. 191) |
훼리크스는, 배와 올의 관계 혹은 배와 돛의 관계 안에서 「십자가」를 보고 있다. 이 양쪽 모두의 비유로부터 추측할 수 있는「십자가」란 역시 전통적인 형태의 십자가가 된다.
게다가 이 기록은 사람이 손을 뻗고 있는 모습안에 십자가를 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는 양손을 벌려 신을 우러러보는 것을 습관으로 하고 있는 친구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들의 모습을 상상했을 때 한 개의 형주는 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십자가의 형태가 되어 버린다.
협회는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이교의 심볼인 십자가가 그리스도교국의 교회에 도입되었다, 라고 말한다. 따라서 협회의 가설을 논파하기 위해 4 세기 중반까지의 증언을 포함하여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근처에 멈추어 둔다.
왜냐하면, 협회는 자설을 옹호 하기 위해서 자주 바인의 사전을 인용한다. 그 바인의 사전은 3 세기 중반무렵까지 그리스도교의 배교가 일어나 십자가의 심볼이 도입되었는지를 같이 적고 있다. 이 논술을 받아들인다면 3 세기 중반까지의 증언에는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증언에는 의미가 없다.
예를 들면 라크탄티우스는 「그는 십자가 위에서 손을 뻗었다. 그는 명백하게 그의 날개를 동쪽 그리고 서쪽으로 뻗었다. 이는 세상 모든 백성이 그 아래 모여져 정리되고 평정이 된다」(The Epitome of the Divine Institutes, Ch. 51, Ante-Nicene Fathers, vol. 7 p. 243)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동서로 여러 가지 일의 관계를 맺은 것을 온 세상의 백성을 모으는 상징적인 모습을 읽어내고 있다.
혹은, 라크탄티우스의 문장안에는 satan이 십자가의 표시에 대해서 도망쳐 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곳도 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집의 기둥의 횡단목과 기둥에 피를 발랐다. 그것은 해방의 표시이며, 십자가의 형태였다」(The Divine Institutes, Book 4, ch. 26, Ante-Nicene Fathers, vol. 7)이라고 말해 출 이집트 시에 유대인이 횡단목과 기둥에 피를 바른 행위를 「십자가의 상징」이라고 보고 있다.
라크탄티우스의 이상과 같은 논술이 예수의 형구는 한 개의 형주는 아니고 전통적인 십자가였던 것을 증언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라크탄티우스는 서기 260년경부터 330년 정도까지 산 교부이다. 그 말은 3 세기 후반부터 4 세기 전반의 인물이라는 것이 된다. 십자가 도입을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하는 협회의 입장에 서면 라크탄티우스의 이러한 증언은 타격이다. 그러나, 바인의 증언의 입장에 서면 라크탄티우스의 증언은 이미 배교가 일어나고 나서의 발언으로서 거부되어 버릴 것이다.
거기서, 교부의 증언은 이 정도로 해 두기로 하자.
필자는 교회사의 전문가는 아니다. 따라서 필자가 십자가와 관계되는 자료로서 모을 수 있던 초대 교회의 문헌은 적은 양에 불과하다. 만약 교부들의 문헌을 주의 깊고 빠짐없이 검증한다면 예수의 형구가 한 개의 봉은 아니고 전통적인 형태인 것을 시사하는 기술을 그 밖에도 많이 발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교회사의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한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3세기 이후의 십자가 도입이라고 하는 부분의 일응의 결론을 내려면 이상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0. 편집자의 보충 (4세기 이전의 십자가의 증거)
(1) Clement of Alexandria (A.D 150-215) - Exhortaton to the Greeks, 11 (2) Firmicus ( 기록연대 AD 346) - Error of the Pagan Religions, 21,3-6) (3) Rufinus (기록연대 AD 404) - Commentary on the Apostles' Creed, 14) (4) Jerome (AD 347-420) - Homily,68 Homily,84 (5) Augustine (기록연대 AD 412-414) - De Doctrina Christiana,2,41 Letters, 26 (6) Paulinus of Nola (AD 355-431) - Letters,23 Poems,17 Poems 19 (7) The Odes of Solomon(1세기 말 - 2세기 초) - Ode 27, Ode 37:1, Ode 42:1,2 (8) Sibylline Oracles (2세기) - SibOr 6,26,-28 SibOr 8,251-253 SibOr 8,302,318-321) (9) Acts of Andrew (3세기) (10) Pseudo-Titus Epistle (4세기) 등등 |
제 4 장 고고학의 증거
필자의 수중에 협회가 1969년에 출판한 「그리스어 성서 크룩스 행간 삽입역」이 있다. 거기에는 부록이 있어 그리스어의 스타우로스를「고통의 기둥」이라고 번역한 것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이 혁명적인 번역인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순수한 것이다. 때의 경과와 고고학적인 발견은 확실히 그것이 올바른 일을 증명할 것이다. 현재에도 예수가 한 개의 형주가 아닌 것 위에서 죽은 것을 증명한다고 하는 무거운 짐은 종교적 전통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다.」 (위의 우측 밑줄 부분) |
이 문장을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스타우로스를 「고통의 기둥」이라고 번역했던 것은 혁명적인 일로 그야말로 순수한 번역이다. 십자가와 번역하고 싶은 사람은 스타우로스가 전통적인 십자가인 것을 증명할 책임이 있다.
필자의 수중에는 다른 「그리스어 성서 크룩스 행간 삽입역」(1985년판)도 있다. 그 판의 부록은, P·W·슈미트의 연구를 더하고 있는 것 외에는 앞의 69년판과 기본적으로 모두 같다. 그런데 하나 차이가 있다. 상기에 인용한 부분만큼은 삭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때의 경과와 고고학적인 발견은 확실히 그것이 올바른 일을 증명할 것이다.)이 삭제된 것은 우연일까? 그렇지 않으면 69년 이후의 고고학적 발견의 실상을 알고 있다는 것인가? 필자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다른 부분이 기본적으로 변함없는 것이니까 우연일 수는 없다. 역시 의도적으로 삭제될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협회도 또 최근의 고고학의 발견이 협회의 견해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다.
그런데 1 세기 전후의 저술가들은 십자가에 대해 기술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고고학은 십자가의 형벌이라고 하는 문제를 표면화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고고학적 발견은 아직도 얼마에 지나지 않는다. 「신성서 사전」은 이런 사정을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신성서 사전, 253페이지).
「사형의 방법에 대해서는 로마 제국의 장소에 의해 여러가지로 차이가 난다. 당시의 세속의 저술가들은 이 가장 잔인한 품위를 떨어뜨려 버리는 것 같은 사형 방법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을 남기는 것에 망설여 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에 있어서의 고고학적인 작업에 의해 이 문제에 새로운 빛을 던질 수 있었다.」
고고학적인 발견에는 언제라도 애매한 요소가 있는 것을 인정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가 매달린 형구 그 자체가 발견되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한꺼번에 해결되지만, 그러한 일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 시대의 그 지역에 있어서의 고고학적인 발견을 인내심을 갖고 깊게 탐구함으로써 예수 시대의 십자가에 대해 추측하는 이외 현재 방법은 없다.
그럼 예수가 형주는 아니고 전통적인 형태의 십자가에 매달린 것을 증명하는 증거를 5개를 보면서 검증하기로 하자.
1. 폼페이의 200년제의 집 (또는 헤르큘라니움의 십자가-Cross of Herculaneum)
첫째로 AD 79년에 폐허화한 폼페이의 정적의 발굴(1939년 발견)로부터이다. 출토한 집에서부터 금속의 십자가의 자취가 발견되었다. 이 발견에 대해 폴·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앙심이 Naples의 Bay 근교에 퍼져 있던 것은 이 초기의 회중에 의해서 일지도 모르다. 왜냐하면 그 후에 헤리큐라니움(Herculaneum)의 근처에서 그리스도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스비우스(Vesuvius)산의 화산폭팔의 매장을 당하는 것을 피한 리조트의 마을에 지어진 하나의 집은 분명히 한 금속의 십자가의 자취를 나타내고 있다. 그 십자가는 윗층의 흑눌음이 된 기도대의 안쪽의 벽에 각인 되고 있다. 십자가는 물고기와 같이 옛부터의 그리스도교의 심볼이었던 것이다.」(First Christians, First Harper &Row, New York, 1976, p140) |
마이어는 일세기의 반에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심볼로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마이어는 계속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층에는「200 년의 집」으로 불린 초기의 그리스도인의 예배당이 있었다. 희게 회반죽이 칠해진 패널은 큰 십자가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아마도 금속으로 되어있었고, 도장을 찍는 그런 기구로 사용된 것이다. 그 전에는 작은 나무의 제단의 잔존물이 있다. 그것은 베스비우스산의 폭발에 의한 용암에 의해 흑눌음이 되어 버렸지만.」(같은 책, 141페이지) |
그 집은 그리스도인의 예배당이었던 것이다. 작은 나무의 제단이란 성찬대인가, 설교대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초대 교회의 최초의 무렵부터 현재의 교회당과 같이 십자가를 심볼로서 내걸고 있었다는 것이다.
편집자 보충설명
이 Hreculaneum 의 십자가의 발견은 1939년 2월에 발견되었고, 폼페이의 이 지역은 AD 79년 8월 24일에 화산에 의해 덮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에도 Giv'at ha-Mitvar의 발견과 유사한 점을 Marcel Brion 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기도대 또는 예배의 단과 같은 말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찬장에 벽에 그려져 있는 십자가가 놓여졌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이 곳에는 십자가의 양팔 (편집자주 -즉 가로목의 양끝)에 못이 박힌 나무 십자가가 있었고, 신성한 상징으로서의 붉꽃과 그 그림자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벽의 한 부분은 흰 석회로 칠해져 있다. 이 십자가는 이유모를 원인으로 옮겨졌고, 팔의 형상은 닳아져 있다. - Brion, "Pompeii and Herculaneum" : "The Glory and the Grief", John Rosenberg 역, New York:Crown Publishers, 1960) pp82
AD 79년 그 유명한 베스비우스 화산폭발로 침몰한 Herculaneum이 발견된 그 이후 몇몇 학자는 이 벽화는 초기 그리스도인을 증명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아마도 사도바울 그 자신이 아니었을까라고도 생각을 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죽움과 유사한 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 Amedeo Maiuri, "Herculaneum" V. Priestley 번역 (Rome: Istituto Plokgrafico Dello Stato, 1962), p 47: Joseph Jay Deiss. Herculaneum: Italy's Buried Treasure (New York: Harper & Row, 1985)
위와 같은 사실은 먼저 재 확인해 두고, 이 카페의 한 분이 협회의 글을 인용하시어 여기에 해당되는 사실을 확인해 보자.
위의 언급에 대해 그 마을의 집터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그 마을에서 어느 한 빵집을 말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Antonio Vanero의 글을 읽어 보면 쉽게 알 수 있으련만, 지금은 이 깨어라지의 기사만을 살펴보자.
위의 내용은 협회가 주장하는 내용으로, 처음에는 몇몇의 학자들은 초기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먼저 첫 단락에서 언급하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반증으로 Antonio Varone 의 저서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즉, 여기서 많은 학자들이 이 유적지에서 십자가를 발견한 것은 모두가 사실이라는 점에 확인(협회의 글에서는 4세기 전에 십자가를 쓴 유적은 없다고 종종가르쳐왔다.)을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발견된 것이 십자가가 아니라는 반증이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를 사용한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왜 아닌가를 Antonio Varone의 책 속에서 하나하나 제시하고 있다. 즉 다음의 내용이다.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십자가 숭배가 온전한 형태를 갖춘” 것을 찾기 원한다면, “우리는 4세기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 때가 되어서야 황제와 대규모의 이교도들의 개종으로 말미암아 이교도들의 종교성과 좀더 부합하는 그러한 형태의 숭배가 생기게 되었다”
“심지어 2세기와 3세기에도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시대까지도, 그리스도교와 분명히 관련이 있는 그와 같은 상징물이 발견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 빵집의 거주자가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가졌다는 가정과 조화시키기 어려운 극도로 외설적인 얼마의 발견물들”이 있다.
“문명의 동이 트면서부터, 십자가가 구속의 상징이 되기 전부터, 십자가 모양은 분명히 주술적이고 의식상 중요한 의미를 지닌 상징물로 사용되었다.”
안토니오 바로네의 서적 중에 위의 저서의 번역문은 아직 입수할 수 없었고, 인터넷 상에서 바로네의 저서를 살피면서도 아직 그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한가지 알게 된 것은, 바로네는 이 유적지의 한 집에서 발견되는 물품중에 그리스도의 영성을 가진 사람이 취하는 행동이라 보여지지 않는 여러 가지 물품들을 발견하게 된다. 즉, 그는 폼페이의 유적지에서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남아 있고 그 곳에서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그 흔적 중에서는 이 빵집에서 발견되는 여러물품 들을 비교해 보면 깨어라지의 말처럼 바네로는 위와 같은 말을 사실상 하지만, 다음과 같은 말은 파수대에 빠져 있다.
In his book Jewish and Christian Presence in Pompeii Varone does not deny but affirms that sure it's very strange the fact that Christian symbols were found. The finding of the cross in Bethsaida does away with any doubt in this regard.
즉, 그는 이 근방에서 발견되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보면서 이곳도 그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몰래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가진 사람치고는 그 모습이 조금 황당하다는 말이다.
협회의 언급은 십자가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십자가를 사용한 그리스도인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이 고고학적 발견의 핵심을 벗어나려는 듯하다. 어느 정도의 영성을 갖추어야할지 모르겠으나, 다른 학자들은 이곳의 빵집의 경우 외의 주위의 다른 흩어진 유적들로부터 이 일대에 속한 초창기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Antonio Varone의 글을 확인하고 싶다. |
2. 예루살렘 근교의 납골당
다음에 예루살렘 근교 올리브산의 기슭 근처에서 프랑스의 고고학자 찰스·쿠레아만 간네아(Charles Clermont-Ganneau)가 1873년에 발견한 30의 사체가 매장해진 납골당을 소개하자.
작은 석회의 직사각형의 관에는 몸의 뼈가 매장품과 함께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거기에는 매장해진 사람의 이름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기록되고 있었다. 어느 관에는 유다라는 이름위에 십자가의 모양이 새겨져 있다.
게다가 예수라는 이름이 3회 등장해 그 중의 2회는 십자가와 관련하여 얘기하고 있다. 유대인의 제2의 반란 사건 이후 이 지역에 유대인이 들어오는 것은 금지되고 있었으므로 매장해진 연대는 서기 135년 이후에서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서기 70-135년의 사이와 추정된다(이 발견에 대해서는 Ancient Times Vol 3, No. 1 July 1958 p. 3에 자세하게 보고되고 있다).
이 고고학적 발견도 1 세기 후반인가 2 세기 초두에는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심볼로서 채용되고 있던 것을 증언 하고 있다.
3. 폐허의 벽화
한사람의 사람이 T형의 십자가에 묶여 있다. 그 십자가에 매달린 인물의 머리는 당나귀로서 그려져 있다. 십자가의 좌측에는 왼손을 들어 숭배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는 한사람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그 오른쪽 아래에는「아레크사메노스는 그의 신을 예배하고 있다」라고 하는 문자가 기록되고 있다.
그 벽화는 현재 로마의 키르체리아노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그것이 작성된 연대는 서기 217년경이라고 생각된다.
이 벽화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분을 「우리들의 신」으로서 예배하고 있던 것을 시사하고 있다. 게다가 그 쪽이 붙여진 형구는 T자형의 십자가였다.
이 벽화에 관계되어 피네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대 문화의 빛」이와나미 서점, 쇼와 41년, 368페이지).
「파라티누스의 남서쪽 키르크스·마크심스의 근처에 오늘 파이다고기움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건물이 있지만 이것은 아마 궁전의 관공서의 1개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방안이 있는 것은 감옥에 이용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벽에는 지금도 그랏피티(graffiti)라고 불리는 조잡하게 써 붙인 그림이나 문장이 가득하게 있다. 그 하나로 가룻치가 1856년에 발견해 현재 로마의 교회 박물관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유명한 「십자가의 낙서」(그림 124)이다. 이 엉성한 낙서는 당나귀의 머리를 가진 한사람의 인간의 십자가상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양 다리는 단상에 의지해 편 양팔은 십자가의 가로대에 얽매이고 있다. 왼손에는 아이 혹은 젊은이의 약간 작은 모습이 한 손을 들어 숭배의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문자는「아레크사메노스가 그 신을 숭배」라고 적어 있다. 아마 이것은 궁전내 있는 젊은 그리스도 교도로 향해진 조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 낙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었을 때보다 아마 150년 정도 뒤의 것 즉 3세기의 처음의 것으로 이것은 십자가의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어리석은 것으로 취급되었는지 성서에서도 명료하게 가리키고 있다. (고린도전서1:18).」 |
덧붙여 이 정보에 대해서는 Buried History vol 9, No. 2 p. 41혹은 Ancient Times Vol 5, No. 3 Marach 1961 p. 12 등에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이 벽화는 예수가 T자형의 십자가에 매달린 것 그리고 예수는 신으로서 숭배되고 있던 것을 시사하고 있다. 십자가에 걸린 인물의 머리가 당나귀로 그려져 있는 것은 벽화가 그리스도교를 비웃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려졌던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2 세기 후반부터 3 세기 초두에 걸친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이 묘사되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4. 가족의 무덤
1945년 헤브루 대학의 유대인 고고학 박물관의 E. L. 슈케이닉크 교수는 어느 가족의 무덤을 발견했다. 2개의 납골당에는 그리스어로 예수의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두 번째 편에는 4개의 큰 십자가도 그려져 있었다.
Ancient Times 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슈케이닉크 교수는 십자가는「십자가 조림이야」라고 하는 절규에 동일한 괴로움의 표현일지도 모르다. 아무리 늦어도 그 각인은 예수의 십자가로부터 20년 이내의 것일 것이다.」(Ancient Times, vol 3, No. 1 July 1958 pp. 3-5 또, 같은 잡지, vol 5, No. 3 March 1961 p. 13도 참조). |
이 무덤은 출토 한 도자기, 램프, 문자의 서체로부터 기원전 일세기부터 서기 후 일세기의 반까지의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그 말은 예수 시대보다 바로 후에 그리스도인들의 무덤에는 십자가가 심볼로서 사용되고 있던 것이 된다.
5. 못이 박힌 뼈
5번째는 1968년 바시리오·자페리스에 이끌린 팀이 예루살렘 근교의 기밧트·하미브탈(Giv'at ha-Mitvar - 라스·에르마사레후)에서 발견된 유대인의 무덤이다.
그 중의 하나의 납골당으로부터 정책이 된 한사람의 젊은이의 뼈가 나왔다. 그 연대는 거기로부터 출토 한 토기로부터 서기 7년부터 66년간의 것과 추정되고 있다. 거기에는 이에호하난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발견에 대해 「신성서 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53페이지)
「그 젊은이의 팔에는 못이 횡단목에 박혀져서 붙여져 있었다. 엉덩이의 근처에는, 횡단목이 붙여져 거기에 따라 체중이 유지되고 있었다. 다리는 가지런히 해서 굽힐 수 있어 못 박혀 있고, 그 한 개의 못이 발뒤꿈치의 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못은 14센치에서 2센치의 부분이 꺽여지고 있었다. 못과 뼈와의 사이에는 1.5-2센치의 아카시아나 피스타치오의 판이 붙여져 있었다. 또 못이 꺽여진 부분에는 작은 올리브의 목편이 발견되었다. 이상과 같은 증거로부터, 이 케이스에 대해서는 다리는 주역봉에 못 박힌 것이 아니고 그 주역봉에 횡판이 붙여져 그 횡판에 못 밖힌 것으로 생각된다.
다리 뼈는 한 개는 심한 손상을 받고 있어 벌써 한 개는 도끼와 같이 날카로운 도구로 얻어맞고 꺾어지고 있다.「꺾어진 뼈」(crura fracta)는 사형수의 임종을 빨리 하게위해 로마에서는 자주 행해졌다(Cicero, Philippicae 13 12). ···「손목의 뼈는 거의 손상되어 있지 않다. 팔뚝의 뼈는 손상되었지만,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 아니면 묶여 있었는지에 대한 결론적인 말은 할 수 없다.」 |
이 발견에 대해 「파수대」지 1987년 8월 15일호(페이지)는 특별히 2페이지를 할애해 그 연구 성과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파수대」지는 그 발견에 대해 정확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학문적으로 매우 부정직히 취급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무슨 일인지 같은 잡지는 발견 후 곧바로 발표된 하안 교수(Nico Haas of Hebrew University Hadassah Medical School)의 시 보고와 그 15년 후에 발표된 두 명의 학자의 시 보고와의 사이에 의견의 상위가 있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학문적으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 같은 결론을 내 버렸던 것이다.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하자. 우선「파수대」지의 결론 부분을 소개한다.
*** 파87 8/15 29면 그의 다리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
예수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러면 이 점은 예수께서 사형당하신 방법에 대해서 어떠한 점을 시사해 주는가? 사실상, 별로 시사해 주는 바가 없다! 예를 들면, 23면에서 토론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가로 막대가 없는 곧은 기둥에서 사형당하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늘날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 몇개나 되는 못이 사용되었는지조차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국제 표준 성서 백과사전」(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1979년, 제 1권, 826면)은 이렇게 해설한다. “사용된 못의 정확한 수는 ··· 무수한 추측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십자가 형에 대한 최초의 묘사에서는 예수의 발이 따로따로 못박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후기의 것은 발이 엇갈려서 곧은 기둥에 하나의 못으로 박혀 있는 모습이다.” |
이 기사는 우선 발굴된 뼈로부터 사형이 된 사람은 다리를 굴절시키는 사형이 되었으므로 , 라고 하는 1970년에 니코·하스 박사가 발표한 견해를 소개한다. 그리고 다음에, 다리 뼈와 못의 길이나 형상으로부터 양 다리는 기둥을 넘는 것 같은 모습으로 못 박혔다라고 하는 1985년에 죠셉·지아스와 에리자·세케레스가 발표한 견해를 소개한다. 손에 관해서 말하면 전자는 못 박혔다고 발표했지만, 후자는 줄로 묵여있었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두 학자는 무엇을 논하고 있는가? 발꿈치에 박힌 뼈속의 못의 위치가 어떠하냐? 그리고 두 손은 못 밖혔느냐? 로마의 전통 중의 하나인 묶인 상태이냐? 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바로 양자 모두 형구가 전통적인 십자가의 형태였던 것에는 이론이 없었다.
협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자신의 교리와 직접적인 것은 물론이려니와, 간접적인 이야기 즉, 위와 같은 고고학적 증거에 대하 반증의 이론등이 나오게 되면 이를 기사화함으로서 독자들을 잘 어리둥절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이상과 같은 2개의 가설을 소개했을 경우 어떠한 결론을 내는 것이 온당할 것일까? 대답은 최초의 견해를 지지하는지, 두번째의 견해를 지지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판단을 유보할지 어떨지에 대한 것이다. 이 경우의 유보란, 이 사형된 사람의 손이나 다리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혹은 줄로 묶여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편집자 주 - 로마의 처형법에 대해 없으나 손을 묶어서 또는 못을 박아서 집행하는 경우들이 있었다는 기록과 이야기는 마지막장에서 언급한다.)
그런데 이 「파수대」지의 결론은 완전히 다르다. 2개의 견해에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은 고고학적인 연구가 얼마나 합리적이지 않은 것을 나타내고 따라서, 소개한 2개의 견해는 틀리고 협회가 주장하고 있는 한 개의 형주라고 하는 견해야말로 올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도 파수대를 잘 읽고 그 배경을 잘 이해한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보통의 증인분은 예수님의 형구는 십자가라는 증거에 대해 고고학자들은 그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고 있다고 생각하기 일수이다.
그러나, 「파수대」지가 소개하고 있는 2개의 견해는 한 개의 형주가 아니라 십자가이다 라고 하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고 다른 논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형의 방법에 대해서는 상세한 점으로써 이론이 있지만 형구가 십자가였던 것은 학회에서 넓게 인지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한번 뒤집으면서 어떻게 보면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분명한 속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본다.
게다가,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연구자들은 그리스도교국의 학자는 아니다. 즉, 배교 한 그리스도교국과는 전혀 무관한 진지한 유대교의 고고학자들이다. 그들이 1 세기의 유대에 있어 전통적인 형태의 십자가를 당연한 일로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정면으로부터 받아 들여지는 것이다.
대립되는 의견이 존재하기 때문에 학문의 세계는 성립된다. 이것은 완전한 상식이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지는 사람들의 사이에 대립 의견이 존재하므로 결국 자신의 의견이 올바르게 되는 경우에 마음이 아프더라도 학자의 사이에서도, 일반 사회에서도 과거의 주장은 일소된다. 웃으며 끝내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이후 전혀 상대하지 않는 그런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파수대」지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필자는 워치타워협회이니까 이러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동료의 목사나 제자가 그러한 논리를 사용한다면 직접 담판해 철회를 요구한다. 그들에게 창피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문제로서는 필자는 그러한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과거 30 수년의 사이의 목사 생활로 그러한 친구에게도 학생에게도 선배에게도 만났던 적은 없기 때문이다. 만난 것은 다만 하나의 그룹 워치타워의 출판물 뿐이다.
여기서, 필자는 협회의 출판물의 집필자들과 여호와의 증인의 분들을 구별하고 생각하고 싶다. 필자가 지금까지 접해 온 증인의 분들은 결코 사실을 분별하지 않는 분들은 아니다. 대부분의 분은 논리적이고 판단력도 뛰어나다. 만약, 정확한 정보를 전하기만 하면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일하게 해 협회 출판물을 정확하게 읽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꼭, 상기의 「파수대」지의 기사를 재차 쿨한 눈으로 읽어 주셨으면 한다.
제5장 성서의 증언
지금까지 예수의 형구가 한 개의 형주이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전통적인 십자가였는가를 협회의 출판물의 증언, 초대 교부들의 문헌, 한층 더 나아가 고고학적 발견으로부터 검증해 왔다. 마지막으로, 이 점에 관계되어 성서의 기술이 어떠한 힌트를 주지 않은지 고찰해 보고 싶다.
들어가며 - 비판자에 대한 대응
우선 처음에 알아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성서는 예수의 형구의 형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그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따라서, 다양한 부수적인 일로부터 형구의 형태를 시사하는 힌트를 찾아내는 것 외에는 없다.
사실은 예수가 사형된 형구의 형태 등 인류를 속죄하기 위한 예수의 죽음에 사용된 도구가 어떠한 것이라도 좋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짊어져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죽으실 때에 이용된 형구가 한 개의 형주이어도, 전통적인 십자가의 형태라도 상관없다.
그럼 왜 예수의 형구의 형태에 관계되어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은 성서에서 어떠한 힌트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그것은, 워치타워협회가 십자가는 이교에 기원을 가지는 것이어 우상 숭배에 관련되는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국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협회에 있어서는 십자가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적인 귀결로 합리적인 결론을 내려야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잘못되어 있다고 지적되었을 경우 그것을 믿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고 해도 그 비판자에 대해서 그러한 일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고 무시해도 좋은 것일까? 부당한 비판에 지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성실한 것이면 거기에 대답하지 않는 것은 불성실하다.
이러한 점에 관계되어 워치타워협회의 자세는 어떠한가? 여호와의 증인의 분들은 어떻겠는가?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
비판자에게 성실에 대응하는 것은 반드시 간단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은 성실에 대응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다음의 성실하지 못한 태도를 살피면서 여기에 속한 경우라면 우리 모두가 다시 태도를 정비하고 생각해 보자.
1) 비판하는 사람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 내용의 비판을 일절 듣지도 묻지도 않는다.
2) 비판자를 비판해 비판되고 있는 문제가 아니면 무시한다.
3) 비판되고 있는 것으로 입장이 곤란한 부분은 무시하고 대답할 수 있는 곳만 대답해 끝마친다.
4) 논점을 애매하게 해 문제를 살짝 바꾸어, 비판되고 있는 것으로는 다른 것을 대답한다.
5) 비판되고 있는 문제와 닮은 문제를 채택해 궤변을 이용해 속인다.
6) 비판하는 사람의 동기를 물어 동기를 비판하면서 비판되고 있는 문제에 바로 정면으로부터 직면하지 않는다.
7) 비판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자설의 찬동자를 찾아 그 권위에 호소해 비판을 봉한다.
8) 비판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자신은 무지하다 발뺌을 해 문제에 직면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은 어떠한 의견을 묻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롭다. 어떠한 학설이든, 신조든, 그것을 표방하는 것은 상관없다. 그러나 그 의견, 학설, 신조를 가지는 자유에 대해서도 책임이 수반한다. 그것들에 대한 진지인 비판에 성실하게 대답할 책임이다. 이 책임을 방치한다면 그것은 독단이며 혼잣말이 되어 버린다.
본서의 독자는 현역의 여호와의 증인일지도 모르다. 혹은 그리스도교국의 그리스도인일지도 모르다. 혹은 종교와는 무연인 사람이라면 편히 생각할지도 모르다. 비판자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는지, 라고 하는 점에 대해 말하면, 그 사람이 취하는 종교적 입장은 큰 문제가 아니다. 어떠한 비판이든 바로 정면으로부터 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사람의 개인에게 들어맞는 것만이 아니다. 뜻을 같이 하는 그룹에도 학풍을 같이 하는 연구자에게도 동일 신조를 믿는 종교 단체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이 점으로써 워치타워협회의 지도자에게는 필자는 실망을 계속 시켜왔다. 필자는, 지금까지 협회 리더에게 10통에 가까운 편지를 보내 왔다. 그러나, 단순한 한 통의 대답도 없었다. 30년 이상의 목사 생활 40년 이상의 그리스도인 생활 60년에 가까운 인생 안에서, 이러한 경험은 처음이다. 필자의 신변에 있는 증인의 분들이 성실하다는 인상과는 달리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만일 의견을 달리해도 편지를 받았다는 답장 정도는 주시는 것이 예의는 아닐까? (편집자주- 보통의 증인분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묻는 사람의 태도가 불손하기 때문이든지, 무언가 성실치 못한 부분이 있어서라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워치타워협회의 리더의 태도에 대해 어떻게든 필자 자신은 모든 비판자에게 성실에 대응하길 바라고 있다. 오늘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향후도 그렇게 할 것을 약속 한다. 그러니까, 본서도 집필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협회가 비판하고 있는 「예수의 형구는 십자가였다」라고 하는 가르침을 믿는 사람이다. 물론, 전통적인 형태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든지, 성서를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 등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십자가에서도 형주에서도, 어디라도 좋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워치타워협회가 필자의 견해를 비판하는 이상 필자는 거기에 대답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 예수의 형구에 관해서 힌트가 되는 성서의 증언을 검증하자.
1. 못의 수
우선, 요한 20장 25절을 펴 주시길 바란다. 신세계역 성서로 읽어 보자.
「25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를 보았습니다!” 하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예수의 제자 도마는 부활된 예수에 대해「그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 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으면 결코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극히 세세한 일이지만, 도마의 말 안의 「못」이라고 하는 말에 주목해 주시길 바란다. 못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헬로스」는 여기에서는 단수형은 아니고 헬 론과 복수형이 되어 있다. 그 말은 예수의 손은 2개 이상의 못이 박혔던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로마의 십자가형의 경우 팔은 못으로 박히는 것보다 속박되는 케이스가 많았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도마의 상기의 증언으로부터 예수는 못으로 박혔다고 생각한다.
누가복음 24장 39절의 증언도 또 이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39 내 손과 발을 보십시오. 바로 나입니다. 나를 만지고 또 보십시오. 영은 살과 뼈가 없으나, 여러분이 보다시피 나는 있기 때문입니다.” (신세계역)
여기서,「못」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스파이크」라고 하는 그리스어는 어디에라도 있는 작은 못은 아니고, 몹시 큰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못이 복수인 것은, 양쪽 모두의 손에 한 개씩, 2 개의 못이 맞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제일 자연스럽다. 워치타워의 문헌이 게재하고 있는 형주에 매달린 예수의 그림을 잘 관찰해 주시길 바란다. 양손은 합쳐져서 그 양손은, 한 개의 못으로 박혀 있다. 그러나, 토마스가 증언 한 못의 수는 협회가 주장하는 한 개의 형주보다 전통적인 형태의 십자가를 시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편집자주- 이부분의 원어분석은 확인 못했음. 양해바람)
협회 출판물도 이 비판을 알아 변명을 시도하고 있다. 예를 들면「파수대」지의 1984년 4월 1일호(31 페이지)이다. (한국어판 확인안됨-그래서 원문 그대로 번역함)
「Some have concluded from John 20:25 that two nails were used, one through each hand. But does Thomas's use of the plural(nails)have to be understood as a precise description indicating that each of Jesus's hands was pierced by a separate nail?
In Luke 24:39 the resurrected Jesus said: "See my hands and my feet, that it is I myself." This suggests that Christ's feet also were nailed. Since Thomas made no mention of nailprints in Jesus' feet, his use of the plural "nails" could have been a general reference to multiple nails used in impaling Jesus.
Thus, it is just not possible at this point to state with certainty how many nails were used.
요한 20장 25절로부터, 각각의 손을 꿰뚫기 위해서 합계 2개의 못이 사용되었다고 결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마가 못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예수의 양쪽 모두의 손이 별개의 못으로 꿰뚫어진 것을 나타내는 명확한 묘사로서 이해해야 할까요?
누가 24장 39절로 부활하신 예수는 「나의 손과 다리를 보세요. 이것은 나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다리도 못을 박아 고정시킨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도마는 다리의 못 박힌 자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수형의 「못」이라고 하는 말은 예수를 형주에 매달 때에 사용된 복수의 못이 형주에 두 개의 못이 박혀 있다는 일반적인 참고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명백히 얼마나 많은 못이 사용되었는지를 진술하는 그런 가능성은 없습니다.」 |
필자는, 협회 출판물이 자설을 지키기 위해 예상도 하지 못한 논리를 붙이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된다. 상기의 내용도 그 전형적인 것이다. 「파수대」지는 일부러 누가 24장 39절을 인용해 도마의 복수의 못은 예수의 손과 다리에 박힌 못일 것이다(이것도 애매한 표현이 되어 있지만)라고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의 말의 그리스어 원문은 「그의 손(복수)안에 못(복수)의 자국을 보고, 나의 손을 못(복수)의 구멍에 넣지 않으면 않으면」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복수의 못의 자취는 어디까지나 예수의 손안에 없으면 안 된다. 다리의 못까지 꺼내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협회가 자설의 난처한 변명을 하는 것이다.
「파수대」지 1987년 8월 15일호(29 페이지)도 또한, 같은 변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뉘앙스를 바꾸고 있다.
*** 파87 8/15 29면 그의 다리의 위치는 어디였는가? ***
확실히 예수의 손 또는 팔은 단순히 묶여 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도마는 후에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 보지 않고는” 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요한 20:25) ‘예수의 손과 발’에 있는 못자국이란 말은 양손에 하나의 못을 박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여러 개의 “못들”을 박은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참조 누가 24:39.) 또한 못이 예수의 손 부위를 관통하였다는 것은 분명히 알지만, 정확하게 어느 부분인지는 알 수 없다. 성경 기록은 명료하게 정확한 세부점을 알려 주지 않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더우기, 1968년에 예루살렘 근처에서 발견된 뼈를 직접 조사해 본 학자들조차도 그 시체가 어떤 자세로 있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다면, 예수께서 어떤 자세로 죽으셨는지를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이 호는 다리의 못이라고 하는 가능성에 비중을 두면서도 「못이 한 개씩 각각의 손을 꿰뚫고 있었다고 하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라고 양손의 가능성도 인정하고 있다. 2년전의 설명에 비해 어느 정도 톤 다운하고 있는 것은 앞의 변명이 너무나 이상한 것을 자신도 알고 있어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면서 궤도수정을 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2. 죄목의 위치
다음에 마태 27장 37절을 읽어 보자.
신세계역「 37 또한 그들은 그분의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이다”라고 쓴 그분의 죄목을 붙였다」
로마의 사형에 대해서는 범죄인의 죄상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죄목을 보고 조심하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 관습에 근거해 예수의 경우는 「유대인 왕 예수」라고 하는 죄목을 들이대었다.
그런데, 예수의 경우 그 죄목을 예수의 머리 위에 내걸었다는 그 말은 예수의 사형의 도구가 십자가인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예수가 한 개의 형주에 매달린 경우 죄목은 머리 위가 아니고 손 위가 된다. 「예수의
머리」이라고 하는 표현은 전통적인 십자가의 형태를 상정하는 것이 적합하다.
한 개의 형주의 경우에서도 예수의 머리 위에 손으로 쓴 글씨가 손위에 위치한 것은 결국 머리 위에 위치한 것과 같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양보해서 받아 들인다면 결정적인 증거보다는 참조를 하기 위한 자료로 한번 생각해도 상관없다. 결국은 모든 자료를 통해 우리는 살펴보고 결론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3. 손을 뻗는다
요한 21장 18절을 살펴본다.
「18 진실로 진실로 당신에게 말하는데, 당신이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띠를 띠고 원하는 곳을 걸어다니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늙으면 손을 내밀 것이며,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띠를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이 예수의 말은 다음 절에서 살펴보듯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을 맞는지에 대해 예고한 것이다. 또, 「손을 뻗는다」의 그리스어 「에크테이노」는 고대의 문헌에서는 십자가형의 문맥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손을 내밀고 띠를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말은 베드로가 십자가의 횡단목 위에 손을 뻗는 것 그리고 그 횡단목에 손이 속박되는 것, 그리고 사형장까지 데리고 가지는 것이 예고되었다는 된다(D. A. Carson저,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1, p. 679 참조).
덧붙여 그리스어「에크테이노」는 신약 성서에 있어도 손을 옆에 늘리는 경우에 사용되고 있고(마태8:3,12:13,12:49,14:31,26:51, 마가1:41,3:5, 누가5:13,6:10, 사도4:30,26:1등 참조), 손을 위에 올린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 말은 초대 교회의 사람들의 십자가 이해는 한 개의 봉은 아니고 전통적인 십자가의 형태였던 것이 된다.
4. 십자가를 진다
예수는 마태 10장 38절(평행 기사는 누가 14장 27절)과 마태 16장 24절(평행 기사는 마가 8장 34절, 누가 9장 23절)에 대해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도록 격려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파수대」도 권위 있는 사전으로서 자주 인용하는(정확하게 말하면, 악인용하지만) 「국제 표준 성서 사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827페이지).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는 다양한 설명이 제창되고 있지만(TDNT,Ⅶ,578-79페이지), 이 비유는 죄 있는 사람이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의 일부를 사형장에 옮겨 간다고 하는 로마의 습관이 베이스가 되어 있다. 그렇지만, 예수가 십자가를 지기 전에 그의 청중이 이 비유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는가는 확실치 않다.」
똑같이 「신성서 사전」도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254페이지).
「범죄자가 횡단목을 옮긴다고 하는 수치스런 모습은 예수의 청중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것이었으므로, 세 번 더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말이 제자들에게 말해졌다(마태10:38, 마가8:34, 누가14:27).」
이 예수의 비유는 사형수가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의 일부(횡단목)를 사형장까지 옮긴다고 하는 로마에 있어서의 십자가형의 방법을 배경으로 말한 것이다. 그것은, Plutarch가 「각각의 범죄자는 스스로의 벌의 일부로서 자신의 십자가를 스스로의 등에 짊어져 옮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Plutarch, The Divine Vengeance, 554 A/B). 그 말은 예수는 로마 세계에 있어서의 십자가를 비유에 이용했다고 하는 것이 된다.
그 십자가가 세로의 곧은 선과 횡단목 이라든지 또는 2 개의 기둥에 의해 구성되어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5. 예수의 십자가
마태 27장 32절, 마가 15장 21절, 누가 23장 26절은,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형장에 가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 때 로마의 병사는 예수가 그 십자가를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구레네인 시몬에게 돕도록 명하고 있다. 통상, 그 십자가(기리샤투 스타우로스)는 십자에 짜여진 십자가라고 생각되고 있지만 엄밀하게는 십자가를 구성하고 있는 횡단목(라틴어로 이 횡단목을 patibulum라고 부른다)이다.
요한 19장 16절 후반부터 18절의 내용은 예수가 횡단목을 지고 가는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신세계역을 열어 주시길 바란다.
「16 그때에 빌라도는 그분을 기둥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맡았다. 17 그분은 친히 고통의 기둥을 지고 이른바 ‘해골터’ 곧 히브리어로 골고타라고 하는 곳으로 나가셨다. 18 거기서 그들은 그분을 기둥에 못 박았으며, 그분과 함께 다른 두 사람을 하나는 이쪽에 하나는 저쪽에 못 박고 예수는 가운데 두었다. 거기서 그들은 예수의 몸을 인수했다. 」
「그들」이란 24-25 마디에서 로마의 병사를 가리킨다. 「친히」라고 하는 그리스어 「헤아우트」의 직역은 「그 자신을 위한」이다. 그것은 그 십자가가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 준비된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 말은 사형장에 미리 갖춰져 있는 세로의 곧은 선이 아니고 그 사람을 위해 준비된 범죄자가 사형장까지 떠맡아 가는 횡단목이다. 「지면서」라고 하는 그리스어 「바스타조」는 짊어진다가 원 의미이지만, 이 말은 「십자가의 횡단목을 짊어져서 온 마을에게 보이고 경계를 하라고 하는 표시로 나타난다」라고 하는 당시의 로마 세계에 있어서의 십자가형의 습관을 암시한 말이다. 「형주에 매달렸다」라고 하는 그리스어 「에스타우로산」은 예수의 손을 짊어져 온 횡단목에 못 박고, 그 횡단목을 사형장에 있던 세로의 곧은 선과 묶어 올릴 때까지의 일련의 사건을 가리킨다.
이상과 같이 요한의 복음서의 이 기록의 하나하나는 당시의 로마 세계의 십자가형을 배경으로 읽는다면 모든 것이 일치하는 것이다. 그 말은, 예수의 십자가의 형태는 형주는 아니고, 십자가였다는 것이 된다.
제 6 장 십자가에 대한 고찰
본서가 취급하고 있는 테마는 예수의 형구가 형주이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였는가? 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문제를 협회 출판물, 초대 교회의 교부의 문헌, 고고학적 발견물, 그리고 성서의 기술 등에서 검증해 보았다. 그 결과, 어느 증거에 비추어 보더라도 형주가 아니라 십자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마지막 장에서는 예수의 십자가의 중요성을 보다 쉽게 알려 주기 위해 몇 개의 내용을 추가로 쓴 것으로 생각해도 좋다. 십자가의 역사적인 고찰을 로마와 유대인의 시대, 그리고 예수님의 시대의 이야기를 논한다.
1. 로마 이전의 상황
일반적으로 책형 중에서 사형으로 사용된 것은 페르시아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TDNT, 7, 573페이지). 헤로도토스가 거기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다. (1 128 2, 3 125 3, 132 2, 159 1, 4 43 2 및 7, 6 30 1, 7 194 1 f, 트키디디스 1 110 3이나 참조).
그러나, 그것보다 오래된 보다 야만스러운 민족 아래에서 실시된 적이 있다. 그리스나 로마의 역사가도 책형이라고 하는 야만스러운 사형 방법을 미개의 사람들로부터 계승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고고학은 고대 중근동, 특히 압사 리어 제국의 정치가들은 도망자, 적군으로 포로가 된 사람들, 혹은 반역자등을 책형과 관계가 있는 방법으로 사형할 것을 밝히고 있다(ANEP, 362 368 373 참조). 다만 일반적인 사형과 책형의 사형이 달라 나무에 매달아질 때는 이미 시체를 매단 경우, 그렇지 않으면 산채로 매단 경우, 사형수를 못 박는 경우, 그렇지 않으면 줄로 속박하는 경우 등의 경우에 관한 점은 항상 그 구체적인 사형방법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헤로도토스는 살아 있는 사람을 사형하는 경우에는「아나스코로피조」라고 하는 동사, 시체를 햇볕에 쬐어서 표시를 하여 죽이는 경우에는「아나스타우로」라고 하는 동사를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그런데 헤로도토스 이후가 되면 이 2개의 말의 사이에 명확한 구별은 없어져 버린다.
그리스 세계에 있어서의 상황은 어떨까? 사실은 책형이라고 하는 사형 방법은 그리스 제국의 초기에 있어서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제국의 후기가 되면서 꽤 일반화 된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이 트로의 사이를 물리쳐 정복 했을 때에는 2,000명을 책형으로 했던 것이 기록되고 있다(Historia Alexandri 4 4 17).
2. 로마 세계의 상황
고대의 문헌에 의하면 카르타고인은 책형의 형을 빈번하게 행해 온 것 같고 로마인은 그 카르타고로부터 책형의 사형 방법을 계승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형의 형의 상당수는 최초 한 개의 기둥에 의해 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점에 관해서 워치타워협회도 권위 있는 사전으로서 자주 인용하고 있는「신국제 신약 성서 신학 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형태의 사형 집행은 로마 사람에 의해 집행되었다. 스타우로스는 십자가의 형태에 대해 횡판이 붙여졌던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일반의 역사의 자료로부터는 십자가의 정확한 형태가 같은 길이의 봉으로부터 생긴 십자가(crux immisa)였는가, T자의 십자가(crux commissa)였는가는 분명히 할 수 없다. 죄목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는 언제라도 전통적인 십자의 형태(crux immissa)를 하고 있었다, 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늘의 역사가는 기원전 2 세기 무렵에는 벌써 횡단목(가로대)이 붙여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을 역사적으로 확증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횡단목이 더해져 오늘의 십자가가 일반적으로 되어 로마인이 십자가에 대해 라틴어의 crux라는 말을 적용시키게 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로마 제국에 있어서의 십자가형에 대해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인물은 로마의 희극 작가 쟁기 토스이다(기원전 254-184년).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범죄인은 태고의 옛부터 그 반역성의 연고로 십자가의 괴로움을 진다, 라고 말하고 있다(Martin Hengel, Crucifixion, Fort Press, p. 52). 그러나, 로마의 풍자 시인 쥬베나르는 자주 집정자의 변덕의 연고로 십자가를 지게하는 일이 있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Satires 4 219-223).
로마의 정치적 지도자는 제국 초기의 무렵부터 십자가형을 노예의 범죄에 적용했다. 극히 잔인한 사형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로마 세계에 있어서는 물론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유민이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형은 적용되지 않았다(Cicero, In Verrem 1 5 66).
덧붙여 로마에 대해서는 옛 부터 알몸의 나무(arbor infelix)에 반역죄의 사람이나 무거운 죄를 범한 사람을 매단다, 라고 하는 행태가 있었다. 그 경우에도 십자가형 같이 매우 예외적인 것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경우는 없었다.
십자가형은 점차 노예만이 아니고 외국인에게 그리고 도둑이나 강도에 적용되게 되어 갔다. 노예였던 사람들이 강도 등과 같은 상황이 되기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형은 최초 로마를 중심으로 실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지방에서도 잘 행해지게 되었다. 이유인즉, 로마의 정치적 독재자들은 이 십자가형이 법과 질서의 유지를 위해 극히 유효한 수단인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다양한 지방에 있어 로마 정부는 이 사형 방법에 따라 권위에 거역하는 운동을 진압해 나간다. 로마 제국의 확립·유지를 위해서는 십자가형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Cicero(기원 전106-43년)는 「십자가라는 말 자체로 로마 시민의 몸으로부터 그 뿐만 아니라, 그 생각 중에서도 사라져 버릴 수 있다」라고 외치고 있다(Pro Rabiro 5). 당시의 저술가들의 상당수는 이 사형 방법을 너무 잔혹한 것이라고 비난 하고 있다(Cicero, In Verrem 64 165 그 외 많이 타키트스, Historia 4 3 11, 요세푸스, 유대 전기 7 203). 십자가형은 당시에 있어도 그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로마의 수사학자 쿠이테리안(서기35-95년)은 십자가형이 범죄자나 선동자를 무서워하게 하는데 제일 효과가 있는 것 그리고 그 범죄자들에 의해 희생이 된 사람들에게 큰 만족을 주는 것을 이유로 십자가는 마을의 제일 떠들썩한 큰 길의 중심에 지어져야 한다, 라고 변호하고 있다(Declamationes minores 274). 로마 세계에 있어 사형수가 자신이 직접 나무 십자가의 일부(횡단목)를 짊어져 동네를 돌면서 수치를 당하는 것이나, 사형이 공개의 광장에서 이루어졌던 것은 단지 형벌의 의미를 갖고 있던 것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폭동의 억제 기능을 위해서 이용되고 있었다.
서기 200년경에 활약한 로마의 법률가에게 유리우스·파우르스는 십자가형이 화형, 참수와 함께 제일 무거운 형벌(summa supplicia)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법률가에 의하면, 십자가형은 도망자, 비밀을 흘린 배반자, 국가 전복의 선동자, 살인자 등에게 적용되었다. 요컨데, 십자가형은 국가에 대한 반역죄와 같은 사회불안을 가져오는 중죄에 대해서만 부과되었다.
3. 사형 방법
고대의 저술가는 십자가형이 어떻게 집행되었지에 대해 아무 것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노예나 극악인의 사형 방법 등 기록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하는 생각인지도 모르다. 그 뿐만 아니라 오늘의 역사가는 십자가형이 너무나 잔인한 방법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기도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수수께끼가 남겨지고 있을 뿐이다.
십자가형의 사형 방법이 때와 장소, 범죄의 내용이나 사형수에 의해 상당히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전쟁에서 적군의 장교를 사형하는 것과 평시에 정치적인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한 범죄자를 사형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고 해도 일반적인 규칙이 있던 것도 또한 틀림없다. 여기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십자가의 처형 과정을 역사적인 자료로부터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소개하고 싶다.
우선, 처음의 것은 법적인 중재이다. 전쟁과 같이 특수한 상황 때에는 그 중재는 전쟁의 현장에서 행해져서 사형이라는 것은 그 장소에서 실시되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법적인 중재는 생략 되었거나 간략하게 행해졌다. 그러나, 통상의 경우는 로마 정부의 아래에서 로마법에 근거해 엄격한 재판을 했다.
재판에 의해 유죄가 확정되면, 사형을 집행하는 로마의 병사는 사형수를 고문을 가했다. 사형수를 채찍으로 치는 것은(이것은 카르타고에서 계승된 것이지만) 반 관습적인 모습이었다. 게다가, 병사는 사형수로부터 많은 피가 흐를 만큼 채찍으로 쳤기 때문에, 사형수는 그 죽음을 빨리 할 수 있던 것이 보통이었다. 즉, 고문은 십자가상에서의 괴로움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사형수는 병사로부터 고문을 받은 후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의 일부(횡단목)를 지게 되었다. 그 때 줄로 간단하게 묶여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 함으로써 그들도 그런 죄를 짓지 말 것을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또한 사형수에게 조소나 매도를 퍼 붓는다. 그리고 사형수는 그런 조소를 받으면서 사형장까지의 도정을 걸었다.
사형장에 도착하면 사형수는 짊어져 온 십자가의 횡단목을 미리 지면에 지어져 있는 세로의 곧은 선의 곳까지 옮겼다. 그 후 알몸으로 다시 채찍을 맞았다.
그리고 횡단목이 사형수에게 붙여진다. 예수의 경우 양손은 못으로 박혔지만 못으로 박는 경우는 드물었다 (헤로도토스, 9 120 4, 7 33). 많은 경우 줄로 묶였다. 최근 발굴된 케이스나 예수의 경우에는 다리도 또 못이 박힌 것을 안다. (누가24:39참조). 그러나 항상 그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십자가를 세우는 방법에는 2개가 있다. 하나는 사형장에 있는 종단목을 지면에 눞혀 사형수가 그 위에 십자의 형태로 매달린 후에 그 십자가를 수직으로 세우는 방법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형수를 횡단목에 매단 후 후 이를 끌어서 지면의 세로줄에 묶는 방법이다. 노예가 횡단목(patibulum)을 가지고 사형장까지 오는 로마에서는 두 번째의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십자가의 형태로서는 T자형의 것(crux commissa)이 보다 많았다. 그 십자가의 높이는 3미터 정도로부터 사람의 키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의 모습을 지니는 여러형태를 갖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기둥 가운데에 작은 나무(sedicula)를 붙여서 거기에 허리를 걸게해서 몸의 중량감을 지지하게 한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손에 못을 박았을 경우 손이 몸의 중량감을 지지하지 못하고 찢어지지 않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범죄인이 십자가에 고정되면 한사람이 그 앞에 나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사람은 사형수를 매도하게 되고 매도한 군중은 이제 그 현장을 떠난다. 남은 사형수는 가혹한 기후와 싸움을 해야 한다. 격렬한 고통이 체내를 덮쳐 체력이 소모돼 질식해 죽어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곤충이나 동물의 먹이가 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시체는 그대로 방치되는 것이 많았다. 그 경우 송장 고기를 요구하는 육식 동물이나 길짐승들의 먹이가 되었다. 범죄자의 친척이나 친구가 시체를 맡아 무덤에 매장하는 일도 있었다. 특히, 유대인 사회에서는 시체가 방치되는 것은 불명예스럽다고 여기고 있었고 가능하면 방치하지 않게 했다.
(토비트서는 산헤립왕이 사형한 사람들의 시체를 토비트가 매장한 것을 선행으로서 전하고 있다;토비트서 1장18-19절).
4. 유대 세계에 있어
구약 성서에는 책형(磔刑)이라는 형이 나온다. 그 처음은 요셉 시대의 이집트에 있었던 사건이다. 창세기 40장18-22절은 왕 파라오의 요리 관장이 나무에 매달릴 것을 알리고 있다. 그것은 사형되어 시체가 된 후 나무에 매달아졌다고 생각된다. (zzang(닉네임) 님 각주-두산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책형은 죄인을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 죽이던 형벌이었다고 함. 동양에서는 일본의 책형이 유명하다. 일본의 책형은 기둥에 두 개의 횡목(橫木)을 달고, 죄인을 뉘어 팔과 다리를 벌려 ‘대’자가 되게 횡목에 묶어서, 기둥을 세워 구덩이에 밑 부분을 묻는다. 그런 다음 두 창수(槍手)가 양 겨드랑이를 중심으로 20∼30번 찌르고, 마지막으로 목을 찌른다. 한국의 경우는 고구려의 기록에서 보이는 기시(棄市:저자에 버린다는 뜻)가 책형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죄인을 기둥에 묶고 많은 사람들이 횃불로 지진 다음 목을 쳐서, 며칠씩 저자에 두어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
여호수아는 아이 왕을 죽여 목을 매달았지만 저녁 무렵에 나무에서 내렸다(여호수아 8장 29절). 그 후 5명의 왕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하고 있다(여호수아 10장 26절).
사울과 그 아들들은 적군에 의해 살해당해 성벽에 보이도록 표지로서 걸쳐졌다. (사무엘상 31장9-10절). 기원전 11 세기의 사건이다.
에스더서는 왕의 명령에 반하는 사람의 목을 매단 것을 적고 있다(에스더 5장 14절, 6장 4절, 7장9-10절, 9장13-14절). 그것은 페르시아 시대 기원전 5 세기의 일이다.
기원전 2 세기에는 70인역 그리스어 구약 성서가 번역되었다. 그 번역은 스타우로스라는 말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스더 7장 9절의 「들인다(히브리어-)」나, 8장 12절(거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없기 때문에 역자가 보충한다.), 게다가 애가 5장 12절에 대해 동사 「스타우로오」를 사용하고 있다. 모두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을 사형한 케이스로서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다.
에스라 6장 11절에 관해서는 조금 애매해서 거기로부터 무엇인가를 말할 수 없다. 여호수아서 8장 29절의 그리스어번역은 「목을 매단다」(에크레마센·에피·쿠쉬 루)의 말 뒤에 「디데무」(2개의)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이것은 2개의 나무라고 보아 십자가를 나타내는 해석도 가능하다.
율법학자의 문헌도 이와 견해를 같이한다. 그들은 신명기 21장22-23절을 기초로 해서 섬세한 규정을 만들었다. 즉, 신을 모독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는 사형을 실시 했으나 그 후로 법적인 형식을 정돈하기 위해 목을 매다는 형을 실시했다. 어느 사람을 묶어서 사형을 시키는 등의 법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모습을 취했다. (파업 락 빌라 베크 1 1034-35).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이상적인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실제로 언제라도 행해졌다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기원전 1 세기의 반 무렵부터 유대인의 최고 의회 산헤드린에는 사형 집행의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이상한 사형의 집행이 논의되고 있었던 것은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로마 정부는 책형에 의한 사형 방법을 집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모두 그러한 사형 방법에 대해 미움을 갖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 로마 정부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책형의 형은 유대교 안에서는 형벌의 모습으로서는 묵인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는 살아 있는 범죄자가 책형(磔刑)에 의해 사형되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우상 숭배자 혹은 신을 모독하는 사람은 돌로 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죽인 후 신을 저주한 후 그 사람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았던 것 같다. (신명기 21장 23절). 게다가 그 시체는 밤에 그 나무에서 내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하느님이 준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일대가 외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세계의 사형 방법인 책형이 유대인의 사이에서도 도입되게 되었다. 특히, 헬레니즘 시대의 하스몬 왕조의 시대에는 그것이 실시되었다고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우스(Alexander Jannaeus 기원전 103-76년)는 반역한 바트메의 마을을 공략했을 때 800명의 위선자들을 십자가형으로 사형을 했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1 4 6, 「유대 고대사」13 14 2로 3). 사해사본의 나훔 1장 7절의 주해나 요세푸스의 서적은 이 사형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다(유대 고대사, 11 261, 266 f, 17 295, 20 102 129 161, 유대 전기 5 449 이하 참조).
헤롯이 대왕으로 있었을 당시 십자가형은 접할 수 없었다. 단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뿐일지도 모르다. 그러나 그가 하스모닌 왕조와 거리를 두려고 십자가형을 의도적으로 치운 결과인지도 모르다.
마지막으로, 요세푸스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몸에 털이 난 것들은 모두 십자가형으로 집행된 것을 증언 하고 있다(유대 전기, 5 11 1). 그것은 「가장 비참한 죽음」이었다(같은 책, 7 6 4). 덧붙여 요세푸스는 거의 저서에서, 지방에 있었던 다양한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십자가형이 극히 많이 이용되었다고 전하고 있다(유대 전기, 2 5 2, 12 6, 13 2, 14 9, 3 7 33, 5 7 5, 7 10 1, 유대 고대사 17 10 10, 20 6 2).
5. 십자가형의 폐지
이 십자가형이 폐지되는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이다. 그는 십자가형이 그리스도교에 있어 치욕적인 것이라고 생각해고 로마 제국에 있어 이 사형제도를 폐지했던 것이다.
협회도 그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통찰」은 그 때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통-1 254면 기둥에 못 박음 ***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기둥에 다는 페니키아인들의 관행을 받아들였으며, 이런 관행은 콘스탄티누스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제국 내에서 폐지되었다고 한다. 로마 시민을 기둥에 못 박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런 형벌은 대개 노예나 천한 신분의 범죄자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로마인 모두 기둥에 못 박히는 것을 저주받은 자에게 마땅한 모욕과 수치의 상징으로 보았다.―신 21:23; 갈 3:13; 빌 2:8. |
협회의 말대로, 그 가혹함의 괴로움의 형주에 의한 사형을 폐지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왜 태양숭배를 근거로 십자가를 도입했다고 협회는 가르칠지 모르지만 어쨌든 협회는 그처럼 믿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협회의 해설은 다른 말로 하면 실제로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십자가에 의한 사형은 폐지되어 십자가(crux)라는 말은 성스러운 말이 된다. 법률 문서에서는 십자가 대신에 교수대(furca)라는 말이 사용되게 되었다. 사형수는 십자가의 경우라면 죽을 때까지의 긴 시간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교수대에 대해 한순간에 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수대가 보다 인간적인 배려가 있는 사형 방법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6. 예수의 죽음
역사상의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죽음에 관해서는 마태 27장1-2절,11-61절, 마가 15장1-47절, 누가 23장1-56절, 요한 18장 28절-19장 24절에 기록되고 있다. 게다가 마태 20장 19절, 26장 2절, 누가 24장 20절, 사도 2장 36절, 4장 10절, 계시록 11장 8절 등에도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예수는 유다가 데리고 온 유대인 병사에 의해 체포된다(마가 14장43-46절).
2) 유대의 최고 의회 산헤드린이 소집되어 예수를 조사했다(14장53-61절).
3) 의회는 예수가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판단해 사형을 주장할 것을 결정했다(14장62-64절).
4) 유대인들은 예수를 우롱 했다(14장 65절).
5) 의회는 예수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인도했다(15장 1절).
(예수 시대 유대지역에서 십자가형은 로마 정부만이 행사할 수가 있었다. )
6)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인지를 심문했다(15장 5절).
(십자가형은 로마 정부에 반역하는 것 같은 대죄가 아니면 집행할 수 없었다. )
7) 빌라도는 침묵을 지키는 예수를 사면하려고 시도했다(15장6-12절).
(로마법에 비추었을 경우 예수를 유죄로 하기에는 불충분한 상황이었다. )
8) 군중은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는 것을 요구했다(15장11-14절).
(예수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총독은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내릴 수도 있었다.)
9) 총독은 예수를 채찍으로 치고 십자가형을 시행토록 로마 병사에 인도했다(15장 15절).
(로마법에 의하면 범죄인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채찍으로 맞게 되어 있었다. )
10) 형을 집행하는 병사들은 다양한 조롱으로 예수님을 모욕했다. (15장17-19절).
11) 예수는, 십자가의 횡단목을 짊어지고 사형장으로 향했다(15장 20절).
(로마법에 의하면 사형수는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하는 그런 표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횡단목을 짊어지고 마을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
12) 병사는 예수의 십자가를 시몬에 짊어지게 해 사형장으로 연행했다(15장 21절).
(로마법에서 타인이 사형수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예수의 육체의 고통과 피로가 막대했고 사형장까지도 갈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걱정한 사형 집행인의 병사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
13) 예수에게 몰약을 혼합한 포도주가 내밀어졌지만 마시지 않았다(15장 23절).
(몰약을 혼합한 것은 아픔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유대 독특한 것이었다. )
14)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렸다(15장 24절).
(시몬이 짊어진 횡단목 위에 양손이 못으로 박힌 후 미리 수직으로 세워진 가로목으로 끌어 올려 매단 것으로 생각된다.)
15) 「유대인 왕」이라고 하는 죄목을 내 걸었다. (15장 26절).
(예수는 로마 황제에 반역하는 유대인의 정치적범으로서 재판받았던 것이다.)
16) 예수는 사람들과 옆의 범죄자로부터 조롱을 당하셨다. (15장 29절, 32절).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주위에 모여 범죄자를 조롱하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 관습이었다. )
17) 예수에게 신 포도주가 내밀어졌다(15장 36절).
18)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다(15장 38절).
(성전의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막으로 막이 찢어졌다는 것은 성소와 지성소의 구별이 필요 없게 된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죽음에 의해 하나님과의 교류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
19) 예수는 숨을 거두셨다(15장 39절).
20) 아리마대의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의 인도를 요청했다(15장 43절).
(유대에 있어서는 사체를 안식일에 치우지 않는다고 하는 습관이 있었다. 요한 19장 31절 참조).
[31절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mevga"(메가스) "큰, 위대한" 날이라고 한 것은 유월절과 안식일이 같은 날이 되기 때문인데 이 때는 금요일 오후로 안식일이 시작되기 바로 전이다. 다리를 꺽어 시체를 치워달라 십자가형틀에 매달린 자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으로 다리를 부러뜨리면 통증이 가중되고 받침대에 유지하던 균형이 흐트러지면서 죽게되는 것이다. 또한 신21:22의 시체가 밤이 새도록 매달려 있으면 안된 다는 율법도 작용했을 것이다.예수의 시체는 빨리 장사해야 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만일 예수의 시체를 지금 빨리 장사지내지 않으면 안식일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21) 로마 총독 빌라도는 백부장에 의해 예수의 죽음을 확인해 예수의 몸을 의회의 의원 요셉에게 주었다(15장 45절).
22) 요셉은 예수의 사체를 옷감으로 싸 그 자신을 위해 준비한 무덤에 안치했다(15장 46절).
이상이, 예수의 죽음의 역사적 경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있어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이 있다. 예수의 죽음은 단지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중요한 것은 아니고, 속죄의 관점으로부터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13개의 편지를 남겼다. 그 중에서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있어 중요한 일을 남겼다. 그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예수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 다만, 한 곳 데살로니가첫째 2 장15-16절에 대해 「유대인들은 심지어 주 예수와 예언자들까지 죽였고 우리를 박해하였습니다.」라고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역사상의 예수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았을지라도, 확실히 지금은 더 이상 그분을 그렇게 알고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둘째 5 장 16절). 즉, 인간으로서 행동하신 역사상의 예수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다, 라고까지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바울은 예수의 죽음의 역사적 사실을 경시한 것은 아니다. 그 진심은 계속되는 고린도 둘째 5 장18-20절에 진술되고 있다. 즉, 예수의 역사상의 죽음을 복음이라고 하는 시점으로부터 파악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및 초대의 그리스도인인은 역사상 실제로 일어난 예수의 죽음을 중요시했다. 그야말로 그들이 받고 또 전파한 복음의 중심적 사건이었다. 고린도첫째 15장3-4절을 인용해 두자.
「3 나는 첫째 가는 것들 가운데서 나 역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4 그분이 묻히셨다는 것, 아니, 그분이 성경대로 셋째 날에 일으킴을 받으셨다는 것, 5 그리고 그분이 게바에게,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
초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역사의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죽음은 복음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중요했다. 예수의 책형의 과정, 그 때의 육체적·정신적 고통, 형구의 형태등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이 초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야말로 현대의 그리스도인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설령, 예수의 역사적인 죽음을 정확하게 더듬을 수가 있어도 예수에 의한 속죄의 은혜를 알수 없으면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이다.
성서는 예수가 책형으로 된 모습을 상세하게는 묘사하고 있지 않다. 다만, 사실을 담담하게 기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육체가 경험한 괴로움, 재판에 관련된 사람들의 심리 상태, 주위 사람들의 반응 등에 대해서는 필요 최소한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예수의 속죄의 사업이라는 본질적인 내용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또는 속죄의 본질적인 의미가 애매하게 되거난 희석 되는 그런 위험성이 높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러한 묘사를 피했을지도 모르다.
7. 스타우로스에 대해
마지막으로, 그리스어의「스타우로스」에 대해 정리해 보자. 전자메일로 받은 편지에 대해 자세히 하지 못하고 간략하게 해 본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말은, 본서의 내용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때가 되는대로 언급해 왔다. 여기에서는 일부 중복되는 것은 피하면서 재차 정리해 둔다.
1) 스타우로스는 원래 한 개의 곧은 봉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를 들면 기원전 7세기의 호메로스(Homer-호머)는 펜스라고 하는 고통의 의미로( 「오디세이아」14,11), 기원전 5 세기의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기초나 토대라고 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7,25,5).(zzang님 각주- 호메로스는 기원전 800?~기원전 750년경의 그리스 시인이며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71-401년경 그리스의 역사가이다.)
2) 동의어로 동사 「스타우로오」는「아나운서」라고 하는 접두사를 적어 「아나스타우로오」로서 보다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것은「내건다」또는「다하고 찌른다」를 의미한 「아나크레마니미」(헤로도토스, 3,125,3 f, 7,194,1 f) 혹은 「아나스코로피조」(헤로도토스, 9,78,3)와 혼용되어 사용되는 말이었다.
이것들 일련의 동사는 「찌른다」(헤로도토스, 7,238,1)라는 사형 혹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하나의 표시로 「내건다」(헤로도토스, 3,125,3 f), 한층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는「십자가에 매단다」, 「근심」,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게다가 그것들 모두가 공중의 면전에서 이루어졌을 경우에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동사의 엄밀한 의미는 그 말이 사용되고 있는 문헌의 장소나 시대, 그리고 전후의 문맥으로부터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일반화하는 그 논의는 무의미하다.
3) 언어의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말하자면「스타우로오」(stau․roˊo)혹은「아나스타우로오」(a․na․stau․roˊo)라는 동사가 명사 「스타우로스」(stau․rosˊ)보다 훨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명사 「스타우로스」도 점차 동사에 상응하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zzang님 각주-성서필자들은 그리스어 명사 스타우로스를 27회, 동사들인 스타우로오를 46회, 신스타우로오(접두사 신은 “함께”를 의미함)를 5회, 아나스타우로오(아나는 “다시”를 의미함)를 1회 사용하였다.)
책형의 형구에 대해 「스타우로스」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게 되지만, 기원전 3, 4 세기의 무렵에는 동쪽과 서쪽에서는 그 사용법에 차이를 볼 수 있다. 동쪽에서는 참형으로 된 범죄인이 더욱 수치스러움을 느끼게하고 시체를 보이도록 해서 표시로 되었지만 그 때 이용된 형구를 스타우로스라고 불렀다(포리비우스, 7,21,3). 그러나 서쪽에서는 그러한 일은 용서되지 않고 실시되는 경우도 없었다(헤로도토스, 7,238,1 f, 9,78,3, 9,79,1, Plutarch 「De Pericle, 28,1). 스타우로스는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범죄인을 사형에 대처하는 형구였다.
4) 로마 시대에는 사형수가 십자가의 일부(라틴어로, 이 횡단목을 파티불룸-patibulum이라고 부른다)를 짊어지고 사람들에게 보이도록하는 제한 표지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관습은 그리스 및 카르타고에서도 실시되고 있었다는 것이 오늘날 확인되고 있다. 많은 역사학자는 로마인은 이 방법을 카르타고에서 배웠다고 추측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그것을 확증 하는 것은 어렵지만 동방 제국에 있어서는 그러한 방법이 실행된 적은 없었다.
5) 결국 그리스어 「스타우로스」는 죄인을 매달어 내 거는 봉(기원전 1 세기의 데오도시우스·식스, 2,18,2)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었고, 십자가의 세로의 곧은 선을 가리키는 경우도, 횡단목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십자가 전체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외 사형수를 찌르거나 목 졸라 죽이거나 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봉을 가리키는 일도 있었다.
「스타우로스」의 의미를 결정하려면 그 문헌이 기록되었던 시대 및 장소를 잘 고려해야 한다. 물론 많은 경우 그것만으로는 결론을 내리기 않기 위해 전후의 문맥으로부터 추측해야 한다.
말의 의미는 전후의 문맥으로부터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연이다. 알기 쉬운 예를 하나만 살펴보자. 예를 들면, 누가 7장 24절에, 「요한의 사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사자」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앙겔로스」이다. 그것은 물론 통상「천사」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천사」로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그 앞의 19절부터 요한의 두 명의 제자를 가리키고 있다. 언어는 문맥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전형적인 예이다.
(zzang님 각주-이 그리스어단어 앙겔로스에서 영어단어 엔젤angel이 유래했다. 계시록1:20에서 신세계역은 “일곱 회중의 천사들”을 언급하고 있다. 개역한글판에는 그 부분이 “일곱 교회의 사자”로 되어있으며 둘 다 그리스어 앙겔로스를 번역한 말이다. 신세계역은 이 성구에서 앙겔로스를 문자적인 의미인 “천사”로 번역하였으나, 출판물에서는 그 의미가 “사자(使者)”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어 단어 앙겔로스는 실제로 영계에 있는 천사들로 번역하고 이해해야 하는 성구도 있고, 사람들로 된 사자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하는 성구도 있다. 두 가지 번역 모두 정확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의미는 문맥이 결정한다.)
결 론
「 파수대」지(1971년 2월 1일호 - 한국 71.5.15 p221)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파71 5/15 221면 성서에는 그런 가르침이 없다! *** 성서는 그것의 형태를 전혀 묘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성서가 사용한 희랍어 단어들이 “십자가”보다는 “막대기”, “기둥” 혹은 “나무”이기 때문에 책임은 사실 예수께서 돌아가신 기둥에는 횡목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자들 위에 있다. |
입증 책임이 워치타워협회 측에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국 측에 있는지 이것은 재미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지금은 책임의 소재를 묻는 것은 옆으로 제쳐두자. 어쨌든 필자는 「기둥에는 횡목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자」이다. 따라서 협회의 생각에 의하면 필자가 예수의 형구가 십자가였던 일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국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사형된 형구의 형태 등 인류의 속죄의 업에 대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한 개의 형주든 전통적인 십자가의 형태든 예수가 우리의 죄를 짊어져 죽음 될 수 있던 사실은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성서는 예수의 사형의 형구가 어떠한 것이었는가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중요한 것이면 성서 기자는 당연 영감에 의해 예수의 형구의 형태를 분명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감을 받은 성서 기자는 그 좋은 문제를 무시하고 있다.
어느 증인이 예수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교를 배경으로 한 십자가에 의해 사형될 리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필자는, 그러한 주장을 협회 출판물에 의해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필자와 이야기한 증인의 개인적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 출처가 없는 것에 대해서 또는 협회의 내용이 아닌 것을 열심히 이야기하다가 협회의 입장이 아니면 그 증인은 협회의 견해로 맞추고 종전의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예수의 형구가 한 개의 형주이었다고 해도 예수는 로마 정부의 아래에서 사형된 이상 이교도가 집행하고 있던 사형 기구에 의해 사형되었던 것이다. 기구만이 아니고 재판의 법률도 재판관도 사형의 수속도 모든 것은 이교적 배경 안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필자는 본서에 대해 예수를 매단 것은 한 개의 형주가 아니고 십자가였다고 논해 왔다. 통상의 센스를 가지고 계신다면 납득해 주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직을 절대시 해, 여기에 소개한 자료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제공한 자료의 적음에 있는 것은 아니다. 판단 기준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가 교부의 증언, 고고학의 자료, 성서의 증언으로부터 앞으로 5개의 증거를 더해도 그 쪽은 납득해 주시지 않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필자 자신은 만약 예수의 형구가 한 개의 형주이었던 일을 여러가지 증거로부터 납득할 수 있다면 기뻐해 즉석에서 형주라고 인정한다. 그 정직함이 필요하다. 필자는 같은 것을 증인의 분들에게도 요구하고 싶다. 만약, 예수가 전통적인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하는 것을 본서에 준 증거로부터 납득할 수 있다면 형주라고 하는 생각을 버려 십자가를 받아들여 주셨으면 한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는 아니고, 사실의 문제이며 역사의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성서의 갈라디아 3장 1절(한글개역)을 읽어 주셨으면 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편집 후기>
항상 이런 일을 하고 나면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아마도 단순한 노동의 일이지만 이런 일들을 끝내고 나면 감사함과 경외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작업의 한 귀퉁이에 이런 글을 남기고 싶은가 보다.
우연인지는 모른다. 7월의 토론의 주제가 형상숭배의 문제였고, 본인이 속한 조직에서는 마리아와 성물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관련은 없지만 결국 논해져야하는 십자가인가 형주인가 였다. 나에게 있어서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 형주에서 돌아가셨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증인분들로부터 듣는 본인은 교회에서 십자가 숭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조금 황당하지만 복음의 관점은 그 의미를 알게 모르게 희석시키는 부분에서 시작되고 그러다 보면 언쟁을 통해 상처를 주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 분을 위한 기도말고는 이러쿵 저러쿵의 논쟁은 삼가고 싶었다.
그래서, 7월에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데, 본인이 많이 위로받고 힘이 되어 주시는 증인분(zzang형님)과의 전화를 통해 우연히 이 주제에 대한 기사의 출처와 그 부분도 궁금하시다는 얘기를 듣고서 초안을 잡았고, 일은 쉽게 진행되었다. 번역이라는 하는 일은 단순 노동이면서도 일본어가 원서인지라 번역기를 통해 쓰면 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출처에 대한 한개 한개의 근거를 본인도 직접 확인해야했기 때문에 그 출처의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 나갔다. 설마 했던 내용들 특히 이 글의 저자가 차마 쓰지 못한 부분들도 읽으면서 조금은 황당했다.
그리고, 수중에 없는 자료의 근거를 찾는 과정에서도 수 많은 학자들이 십자가의 문제에 대해 많은 논문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여전히 미국에서는 활성화가 많이 되어있는게 사실이었다. 물론, 통일교의 자료가 한국에 많은 것 처럼 말이다.
말이 길었다. 본인은 이 작업을 통해 내가 정말 무식하고 단순한 하나의 틀 속에서 몸부림 치면서 단편적인 면을 바라보고 많이 고생했다는 것을 새삼느꼈다. 입체적인 그런 하나님의 계획과 준비하심을 느끼면 아마도 나의 말이 무슨 말이진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즉,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을 이루는 과정에서의 마음의 태도와 진지함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서의 고통과 외로움을 통한 십자가의 의미에서 오는 위로,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준비된 일의 감사함. 이런 배려를 받으며 이 작업을 거의 마치고 나면 모든 것이 감사하다.
바울의 경우에서도 힘든 와중에도 웃으면서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말한 이유를 알겠다.
그렇다. 십자가든 형주든 전파되는 것은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지, 그리고 그 죽음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사탄은 그 죽음으로 힘들어 하는지를 전파하자...
이제는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조금 톤을 낮추고, 왜 죽었는지를 함께 전하자. 그 죽음의 승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심어주자. 사탄에게 스타우로스가 형주인지 십자가인지 우린 싸우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그 스타우로스의 승리를 다시 알려주고 사탄을 놀려주자. ^^
항상 그 분의 사랑과 위로에 감사하며, 지금도 나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항상 인도하시는 그 분께 이후의 열매를 맡기며 증인분과 우리 개신교의 형제 자매에게 주님의 큰 은혜와 사랑으로 스타우로스 아래에서 하나되길 기도한다.
Annaja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