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을 여행하던 나그네가 여행 중 날이 어두워지니 텐트를 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텐트라고 해 봐야 한 사람 들어가면 꽉 차는 텐트입니다. 이상한 숨소리에 눈을 떠 보니 밖에 있던 낙타가 추위를 피해 텐트 안으로 코를 들이 민 것이었습니다. “코쯤이야! 괜찮겠지!”하고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시간이 쫌 지난 후 느낌이 이상해서 다시 일어나 보니 이번에 낙타의 머리가 텐트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얼마나 추웠으면 그럴까!” 하고 그대로 잠들었습니다. 얼마 지난 다음 무거운 것에 짓눌린 듯해서 깨어보니 낙타의 큰 몸이 통째로 텐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결국 텐트 밖으로 밀려나 추위에 떨며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낙타의 코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듯해서 방심했는데 나중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낙타를 텐트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코를 들이 밀었을 때 충격적인 일침을 가해서 밀어내는 것입니다.
연평도에 떨어진 포탄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지난 주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 쯤 서해 5도 중 한 섬인 연평도 복판에 예고 없이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이 폭격으로 군인과 민간이 3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천안함 사태가 발생한지 8개월 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것이 낙타의 코에서 머리를 디미는 것이 아니야 하는 것입니다. 서해 5도란 연평도, 소연평도, 대청도, 소청도, 백령도 이렇게 다섯 개의 섬을 가리켜 서해 5도라고 합니다. 이 섬들은 우리나라 수도권을 방위하는 해상 1차 방어선입니다. 그러면서 북측으로서는 목에 가시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폭격을 받고 서해 5도 주민들 거의 대부분이 섬을 빠져나왔습니다. 서해 5도 중 이번에 공격을 받은 연평도는 조국을 수호하는 측면에서 보면 보통 섬이 아닙니다. 6.25 사변이 일어난 지 나흘 만에 서울을 잃고 두 달이 못 되어 대구와 부산이 위협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연평도는 적군의 군화발이 닿지 못했습니다. 이 섬의 원주민들과 이 섬에 피난 온 주민들이 계급장도, 군번도, 보상도, 명예도 없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그들은 유격대를 조직해서 이 섬을 발판으로 해서 다시 떠나온 고향 땅을 되찾기를 염원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교복 입은 학생도 있고, 합바지 차림의 청년도 있었습니다. 연평도를 점령하고자 하는 적군과 싸우다 전사한 대원이 4,000명이 넘고 부상자는 그 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렇게 지켜낸 연평도가 북한군의 공격으로 짓밟혀 버렸습니다. 천만다행인 것은 그 시간이 대부분 생업현장에 나가 있는 시간이라서 마을이 파괴되어도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가 바닷물이 빠져 나가는 시간이라 주민들이 굴을 따러 갯벌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선착장에 들어오는 여객선을 맞으러 나간 시간이라 마을은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8개 동의 민간인 집과 시설이 파괴되었지만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학생들은 무사했습니다. 학교는 폭격을 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평 중학교 뒷산에 포탄이 떨어져서 불바다가 되고 관사가 불탔습니다. 만일 민간인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고 또 학생들이 교실에 있을 때 폭격을 당했다면 상상도 못할 엄청난 참극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주민인 어느 할머니는 “6.25 때도 이 지경은 아니었다.”고 하니 그 모습이 얼마나 참담한지를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통계에 의하면 복구비가 400억 원 정도 될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가치 말고 주민들의 정신적 충격과 피해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의 문제점
이번 사태로 한국의 문제점이 여실히 들어나고 말았습니다. 첫째, 안보 불감증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구 최후의 분단국입니다. 그런데도 안보 불감증에 걸려있는 것 같습니다. 멀쩡한 군함을 밤중에 격침 시키더니 이번에 백주 대낮에 대놓고 민가를 포탄으로 공격했습니다. 지금 남한은 비급한 평화라도 평화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감정적으로 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북한과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북한과 같은 전술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가지고 지혜롭게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분노와 모멸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당하면서도 평화의 이름으로 계속 당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연평도 다음에는 인천이 될 수도 있고 서울이 될 수도 있고 부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안보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다.
둘째, 대응이 소극적이면서 미약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야 할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전쟁이 확전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 고 했다가 다시 “막대한 응징하라.” “상황에 따라 북한 미사일 기지를 타격하라.” 했습니다. 확전 방지와 막대한 응징은 정반대가 되는 개념입니다. 대통령으로서는 고민이 있을 것입니다. 국토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과 도발하는 적에 대한 응징 사이에서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가 대통령의 판단의 몫입니다. 그런데 복한은 포탄을 170여발을 쏘았는데 우리 측에서는 80발을 쏘았다는 것입니다. 교전 비례성의 원칙에 의하면 적이 170여발의 포탄을 쏘면 그 보다 2내지 3배의 화력으로 대응해야 비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G20 정상 회의 의장국이며 주최국이 되고 세계 15위 경제권을 가지고 있는 대한 민국에서 국민을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무서워서 더 이상 못 살겠다”고 하면서 피난 가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북한은 ‘막가파식 수법’으로 남한을 대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가 북한이라는 불량국가 앞에서 쩔쩔매는 형편입니다. 누가 이 북한을 상대해야 합니까? 우리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연평도에 있는 곡사포 화기로는 북한의 해안포 절벽지대에 갱도를 파고 거기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북한군을 타격하기에는 불가능합니다. 북한군 갱도를 정확히 타격하기 위해서는 단거리 미사일이나 공군 전투기에서 정밀 타격 미사일을 발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105mm 포만 가지고는 북한 영토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현재로서는 북한의 해안포를 공격할 수단이 연평도에서는 없는 것입니다. 대응이 너무나 소극적이고 미약합니다.
셋째, 응징 벙법이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를 생각하기에 앞서 성경은 전쟁을 어떻게 보고있으며 성경에 근거해서 신학자들이 전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A. 평화주의적 입장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많은 전쟁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후 2세기에 말시온(Marcion)이란 사람이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의 신이요, 폭력의 신이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다.” 그래서 말시온은 구약은 배척하고 신약의 하나님만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고, 칼로 일어난 자 칼로 망한다고 했다. 적군이 쳐들어 오고 전쟁이 일어나 나를 죽인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감사함으로 죽겠다.” 이런 입장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에센파 라는 종교집단은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은둔해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철저히 비폭력을 주장하는 평화주의자들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퀘이커 교단의 창시 자인 죠지 폭스(George Fox)도 주장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그 어떤 폭력도 거부하고 폭력에 맞서지 않는 종교 단체이기 때문에 군대 가서 총을 잡는 대신 감옥에 가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군목으로 있을 때 훈련 받으면서 사격훈련을 하면서 총도 쏘고, 적과 맞붙었을 때 백병전을 대비해서 총검술도 익혔습니다. 그리고 총 들고 38선을 지키는 장병들에게 잘 지키라고, 적이 오면 잘 싸우라고 격려하고 기도하며 다녔습니다. 그러니 저는 절대 평화주의자는 아닙니다. 신학적 전쟁에 대하여 절대 평화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 행동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국가가 있는 크리스챤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국민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내세 지향적이거나 은둔해 살게 됩니다.
B. 두 번째 입장은 의로운 전쟁(The Just War) 입장입니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가의 종교로 공인하면서 기독교 국가로서의 로마제국의 생존을 위협하거나 방해하는 이교도들을, 전쟁을 통해 물리쳤습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나, 람세이(Paul Ramsey)같은 신학자가 보는 입장입니다. 이 전쟁관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의로운 백성을 도우셔서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평화가 오게 하는 전쟁관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전쟁의 승리를 주시지만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하나님께만 마끼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안 되고 전쟁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여호와의 전쟁(War of Yahweh)라는 말이 민21:14, 삼상18:17;25:28에 나와 있습니다. 이 때의 전쟁은 영토 확장이나 백성들의 생존권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약의 경우를 보면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약속의 땅입니다. 택하신 백성이 그곳에서 살면서 창조주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열방에 선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이방신을 섬기는 백성들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살면서 이방인을 섬겼던 헷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때 전쟁으로 죽이는 행위인 ‘진멸하라’는 말은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살인이란 히브리어 ‘라치하흐’가 아니고 ‘헤렘’이라는 일반 살인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 살인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견해를 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군대가 우리의 자녀들이 군대에 가서 국가가 법으로 정한 의무 복무를 하면서 적을 모조리 죽이는 일에 가담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한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는 국가의 전쟁 명령과 하나님의 명령이 불일치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합니까? 문제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군목도 자기 나라 자기 부대가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영국군 군목도 자기 나라 자기 부대가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어느 편을 들어야 합니까? 북한이 도발을 계속할 때 이것을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으로 알고 다 진멸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길이 있는 것입니까?
한국에 전쟁이 일어날 것인가?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탈출해서 한국에 귀순한 귀순자가 대담과정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목회와 신학 1994년 6월호. p93). 북한 국민들 굶어 죽으니 차라리 전쟁이라도 하자고 합니다. ‘미국만 물러가면 남한은 그저 먹기’라고 합니다. “한국에 와 보니 남한은 북한 체제 실상을 너무 모르고 있다.” 라고 했습니다. 북한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남한은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 이렇게 안이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전쟁이란? 전쟁이 무엇입니까? 전쟁학자로 권위있는 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전쟁이란 “아군의 뜻을 달성하기 위해 적군을 강제로 제압하려는 폭력행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나 집단과 집단과의 싸움을 전쟁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전쟁은 상당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전제로 한 큰 싸움입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까? 안 일어날 것입니까? 일어나서 북한을 무력으로 정복해야 할 것입니까? 평화적으로 공존해야 합니까? 북한이 내분으로 무너질 때를 기다려 흡수해야 할 것입니까? 그러면 중국은 어떻게 나올 것입니까?
인류의 전쟁사 이전 같으면 “조국 평화와 인류의 정의를 위해서 이 한 목숨 바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전(Holy War)에 참여한다.” 하면 굉장히 거룩해 보이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전쟁이라는 것이 근대에 와서는 서로의 관계가 너무나 복잡하고 또 무엇보다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가 넘나 파괴적입니다. 아무리 평화의 저의라는 좋은 명분을 가지고 전쟁에 참여해서 싸우고 죽어가도 그 과정이 너무 참혹합니다. 너무 잔인합니다. 너무 많은 숫자의 군인이 비참하게 죽습니다. 그리고 현대 무기는 화학무기, 병균무기, 중성자탄 이런 것이 있어서 그 후유증이 너무나 큽니다. 독일의 경우 30년 전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때 인구의 1/3이 죽었습니다. 몽고가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을 때 결사 항전으로 나라를 지켰는데 그 때 고려 인구 1/4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일어나고 핵을 사용하면 남북한 모두 완전 초토화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최빈국이 되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전쟁을 해야 합니까? 그리고 모든 전쟁이 그렇게 선악의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흑백논리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이 지구위에서 얼마나 많은 전쟁을 했느냐 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사람이 있느데 노만 카즌스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BC 3,500년부터 AD 1,950년까지 크고 작은 전쟁이 14,500번 일어났고 지구상에서 인류가 존재하면서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292년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인류가 존재하면서 지난 5,600년간 매년 어디에선가 매번 수차례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지금까지도 200회 정도의 전쟁, 쿠테타, 혁명,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매년 어딘가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26일에 불과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전쟁이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전쟁이 안 일어나게 하는 유일한 인간적인 방법은 남한에서 전쟁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보고 그 전쟁을 철저히 대비하는 길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전쟁이 안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남한을 몇 번 건드려 보았더니 이건 본전도 못 찾겠다.” 이렇게 확신하면 전쟁이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자꾸 건드려 보아도 두려워하고 떨고 있으면 “이것 봐라. 우리 밥이다.” 하면서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북한 응징의 방법 이제 저는 북한을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를 말씀 드리면서 성경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삼상 17:47에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에게 사사시대가 끝나고 사울을 왕으로 하는 왕정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차츰 강성해지는 이스라엘을 견제하기 위해 블레셋이 골리앗을 앞세우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에는 언제나 전술이 있고 전략이 있습니다. 그중에 심리전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싸우기 전에 적의 심리를 제압해서 힘들이지 않고 피해를 적게 내면서 이기는 전술입니다. 블레셋의 골리앗이 앞에 나와 큰소리를 치면서 이 전술을 사용합니다. 이 때 이스라엘 측은 사울 왕을 비롯해서 전 장수와 군대가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때 다윗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전쟁의 승패가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다. 골리앗 너는 칼과 창을 들고 나가지만 나는 내가 믿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간다.” 하면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전투에 임했습니다. 북한을 어떻게 응징하겠습니까? 지금 한국의 보수 반공주의자들은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장 무력으로 북한을 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햇빛정책은 무력으로 충돌하며 피차 손해가 많으니 피해를 볼 돈으로 친구 만들어서 친하게 지내자는 것입니다.
무력응징
A. 한국 국방연구원 안보전략 연구센터 팀장인 백 응주 팀장은 북한을 무력으로 응징하는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무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화력을 이동시켜서 포를 쏜 북한 해안포 기지를 공격해서 무력화 시킬 수 있습니다. 나아가 공격의 주도 세력인 북한군 거점을 타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을 했을 때 북한이 어떻게 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북한이 한 짓이 있으니 당하고만 있으면 끝나는 것인데 그 다음에 전면전을 불사하고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은 이판사판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굶어 죽고, 전쟁 한 번 치루고 죽어도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싸워 보고라도 죽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나라도 그들의 자타공멸 작전에 말려들게 되는 것이고 나라와 민족이 완전히 망하는 것입니다. 이래도 전쟁을 해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B. 그리고 동국대학교 북한학과에서 가르치는 김 육현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력 사용은 안 된다. 단기적 대응이고 감정적 대응이다. 흥분하지 말고 외교적으로 접근하자.” 미국과 중국이 북한을 압박해서 나쁜 행동을 자제케 하자는 것입니다. 햇빛정책으로 지난 10년간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북한과 친해져 보려고 노력하고 어떤 도발에도 참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어가는 것 살려 놓았더니 “내 보따리 내 놓아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인내보다는 맞설 용기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맞서 싸울 때에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측에서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북한은 인내할 대상도 용기를 낼 대상도 아니라 관리가 필요한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자세
성경은 인류의 역사를 영적 전쟁의 역사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영적 전쟁은 실제로 나라와 나라의 전쟁으로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도 마24:7에서 “마지막 때 곳곳과 처처에서 전쟁과 기근이 있을 것이고 나라가 나라를 치게 되리라.” 했습니다. 세계 최후의 미래 전쟁인 남북전쟁과 동서전쟁이 다니엘서와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군대와 싸우게 되는 아마겟돈 전쟁이 예언 되어 있습니다. 전쟁이 없을 수 없습니다. 북한이 대적해 올 때 안 싸울 수 없습니다. 싸우는 것이 선한 것은 아닙니다만 안 싸우고 있으면 너무나도 더 큰 악한 일이 일어나가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전쟁은 악한 것이라고 총을 안 잡고 피하면 악한 군대가 짓밟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감정에 치우쳐 성급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전쟁을 막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반도에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을 내다보며 철저히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북한에서는 안 되겠다 하면서 포기할 것입니다. 혹시 도발해 와도 준비한 것이 있기 때문에 승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줄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버리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안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기도 안하고 준비 안하면 전쟁은 일어납니다. 그때는 완전히 망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정과 외국에 사는 교포들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정과 우리들의 태국에서의 위상에 비례한다는 것을 실감할 것입니다. 포만 몇 번 쏘아도 환율이 올라가고 불안해 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고 깨어 기도하며 준비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나라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