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9년에도 역모가 있었고, 이를 진압한 후 경과를 치렀습니다. 정조 9년(1785)의 을사정시가 바로 그 시험이었습니다.
_№ 557. 正祖 09年(1785) 乙巳庭試榜 10人
(武科 宋應昌 等 142人) 이번 정시는 討逆을 경하한다는 명분으로 마련한 慶科였다. 여기서 말하는 ‘討逆’이란 李瑮, 梁衡, 洪福榮, 文洋海, 洪樂聞, 朱亨采, 金斗恭 등이 일으킨 역모 사건을 평정한 것을 말한다. 흔히 ‘文洋海 逆謀事件’, ‘鄭鑑錄 역모사건’으로 알려진 이번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올해, 즉 정조 9년(1785) 2월 말, 前 判書 金鍾秀와 訓練大將 具善復이 정조에게 변란을 보고하면서 부터였다. 그리고 前 縣監 金履容을 통하여 역모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내용이 밝혀진다.
문양해, 이율 등의 역모 사건에 대한 조사는 김종수의 보고가 있던 바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곧바로 鞫廳이 설치되었으며,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정조의 親鞫이 진행되었다. 그 시작은 김이용과 이율에 대한 대질 신문이었다. 이후 약 보름 정도 鞠問이 계속되었는데, 관련자들의 증언이 나오면서 이율 등이 올해 3월에 擧事할 계획을 세웠다는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다. 그리고 마침내 4월 14일(癸巳), 역모 가담자들에 처벌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 이번 사건의 평정에 대한 賀禮를 거행하게 된다.
경과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온 때는, 위 하례가 있기 3일 전인 4월 11일(庚寅)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위 날짜의 SJW 기사를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이를 보면 右承旨 趙鼎鎭이 “이번에 저 凶惡한 역적을 懲討한 의례는 실로 온 나라에 더없이 큰 경사입니다. 그 사실을 종묘에 고하고, 관련된 교서를 반포하는 절차를 거행하였으니, 다음으로는 과거를 설치하여 인재를 선발하는 일을 마땅히 시행해야 합니다. 이전 사례를 살펴보니, 先王朝 戊申年과 庚戌年의 토역 경과에서는 庭試를 설치하였고, 을해년에는 초시가 생략된 정시를 시행하였으며, 정유년의 토역 경과에서는 초시가 있는 정시를 시행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토역 경과는 어느 해의 전례에 따라 거행할 것이며, 날짜 또한 어느 때로 택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아뢰자 정조가 “정시로 마련하되 초시를 시행하라. 그런데 만약 시험을 만약 7월이나 8월에 시행하게 되면 監試의 初試와 그 일정이 서로 겹치게 된다. 그렇다고 이번 달에 시행하자니 시기가 촉박하고, 다음 달에 시행하자니 한창 농사철이다. 어느 시기에 시행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해 原任 및 現任의 여러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草記로 아뢰게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답하였던 것이다.
조정진이 前例라고 거론한 선왕조의 戊申年과 庚戌年 그리고 乙亥年의 토역 경과는 각각 영조 4년(1728) 戊申庭試와 영조 7년(1731) 辛亥庭試 그리고 영조 31년(1755) 乙亥庭試를 가리킨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戊申庭試는 李麟佐의 亂을 평정하고 난 후에, 辛亥庭試는 崔必雄의 역모 사건을 평정하고 난 후에, 乙亥庭試는 尹志의 난을 평정하고 난 후에 치른 경과였다. 이 가운데 최필웅의 난과 관련한 을해정시는 당초 영조 30년(1754)에 실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景宗의 繼妃인 宣懿王后 魚氏의 승하로 인하여 한 해 退行된 것이다.
위 인용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번 정시에서는 초시가 있었다. 정시에서는 원래 초시가 없었지만, 영조 19년(1743) 이후, 정시 시장의 혼잡함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이유로 초시제를 도입하게 되는데, 하지만 모든 정시 때마다 초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시라는 시험이 지니고 있는 특징 때문이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그런데 이전 정시에서 초시 일정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경과에 대한 조정진의 청이 있던 때, 그러니까 올해 4월부터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시험을 진행한다면, 그리고 거기에 ‘慶不踰年’, 즉 “경과란 그 경과의 배경이 된 경사가 발생한 해를 넘기지 않고 치른다”는 관례를 따른다면, 그것은 빨라야 5월 이후가 되는데, 그 시기는 농사일이 바쁠 것이라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그런가 하면 더운 여름이나 추수 후로 미루기도 곤란하였다. 그때는 내년, 즉 정조 10년(1786)에 있을 丙午式年試의 문과와 무과 그리고 생원진사시와 잡과의 초시를 실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일을 최대한 앞당겨 4월 안으로 잡을 수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4월 안으로 시험을 치른다는 말은, 곧 시험 공고일과 시험일 사이의 간격이 그만큼 짧다는 의미가 되는데, 그렇게 할 경우 서울과 경기도를 제외한 외방에 사는 사람들은 시험에 참여하기가 어려울 것이요, 그렇게 되면 토역의 기쁨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경과를 마련한다는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이번 정시의 초시는 가을 추수가 끝나고 식량 사정이 넉넉해지는 그리고 병오식년시의 초시를 마친 이후인 10월 中旬에 진행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초시를 치른 날은 10월 16일(壬辰)이었다. 초시 선발 인원은 300인, 그리고 이들을 상대로 10월 21일(丁酉)에 전시를 실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초시일과 전시일이 너무 촉박하여 시험 진행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 10월 28일(甲辰)로 변경하게 된다. 한편 이번 정시의 초시는 정조의 친림 하에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이 초시는 전시로 간주되었어야 옳다. 영조 19년(1743)에 마련한 정시 초시에 관한 규정에 의하면, 정시에서 왕이 친림하는 시험은 전시로 간주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번 정시에서는 위 규정을 따르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혹시 이번 정시를 치를 무렵, 정시 초시 운영의 방침에 어떤 변화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최종 선발 인원은 10인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5인은 직부전시자였다. 정조 8년(1784) 12월의 황감시 수석자 洪樂貞, 정조 9년(1785) 1월의 春到記儒生의 講論試 수석자 方在岳과 製述試 수석자 張至冕, 정조 9년 8월 秋到記儒生 製述試 수석자 張相吾와 講經試 수석자 金復仁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 가운데 장지면은 이번 정시의 장원이었는데, 정시에서 직부전시자가 장원을 차지한 예가 정조 이전에는 없었다. 정시에 참여하는 직부전시자는 모두 榜末로 처리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한 후 이 원칙에 변화가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SJW 정조 9년 10월 28일(甲辰)을 보면 “거두어 들인 답안지를 모두 합하니 360장이었다. 임금이 여러 시관들을 입시하게 하였다. 익(熤) 등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나아가 엎드린 후 합고(合考)한 방목을 개봉하고 장지면 등 11인을 취하였다.”라고 하여 이번 정시의 전시에서 거두어들인 답안지가 362장이었고, 그 중 11명을 선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이번 정시의 전시 운영과 관련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 첫째는 전시의 참여자가 362인이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이번 정시의 초시 선발 인원이 300인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전시 참여자 역시 300인이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 보다 62인이 더 많았는데, 그 62인은 節日祭와 같은 試才를 통하여 직부회시의 자격을 받은 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두 번째로 중요한 점은 이번 정시의 선발 인원이 원래는 10인 아니라 11인이었다는 사실이다. 11인에서 한 사람을 빼고 10인에게만 급제를 주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제외된 사람은 누구였으며 그를 제외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SJW 정조 9년 10월 29일(乙巳)에서 구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尹永偉라는 자 때문이었다.
윤영위는 정조 9년 9월 9일(乙卯)에 실시한 九日製 大輪次의 表 부분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직부전시의 자격을 취득했던 尹永僖의 동생이었다. 윤영희는 이번 정시의 전시에 참여하지 않았다. 반면 윤영위는 이번 정시의 초시를 거쳐 28일에 실시한 전시에 참여했다. 그런데 전시 시관들이 이 윤영위를 윤영희라고 착각하고 그를 급제자로 올렸던 것이다. 偉字와 僖字가 너무도 비슷하여 빗어진 실수였다. 결국 윤영위의 이름을 제외한 방목을 다시 만들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최종 급제자를 결정하는 일은 하루 늦추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윤영희는 이번 정시가 아니라 이번 정시 바로 뒤에 소개되는 № 558. 正祖 10年(1786) 丙午別試에서 급제를 받는다.
무과에서는 142인을 뽑았다. 무과 전시는 10월 28일(甲辰)에 이어 10월 29일(乙巳)에도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무과 전시에 참여한 자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번 무과 전시에서는 武經에 대한 講書가 진행되었다. 시험의 진행 과정이 그만큼 더딜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