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신앙, 사랑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를 정복한 후 더 이상 정복할 나라가 없음에 울었다고 한다. 일개 육군 소위였던 나폴레옹이 군사 지도자가 되고 종신 통령이 되고, 이것이 양에 차지 않아 황제가 되려고 했던 것, 월터루 전쟁에서 웰링턴에게 패하여 유배를 가기까지 그의 일생은 권력 숭배라고 규정될 것이다. 히틀러가 게르만족의 우수성과 유대인 박멸의 정당성을 웅변할 때 많은 독일 국민이 히틀러의 악의에 전염되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주장은 교활한 거짓말이었고 그 교활한 거짓말은 사실 그의 사악한 권력욕에서 나온 것이었다. 니체는 히틀러를 오염시켰고,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오염시켰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도 쇼비니즘(극단적 국수주의)과 팽창주의의 더러운 권력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평생 다윗에 대한 질투로 초조한 인생을 살다가 마지막 블레셋과의 전쟁 때 길보아 산에서 자결하고 적군에 의해 그 시체마저 손상됐던 것도 권력욕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을 최대의 영적 위기로 몰고 간 아합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누군가 우연히 당긴 화살에 맞아 피를 쏟아가며 죽은 것, 그의 처 이세벨 역시 예후의 혁명으로 높은 곳에서 던져져 죽임을 당했던 것, 시므리가 자기의 주군인 엘라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지만 오므리와의 싸움에서 패해 일주일 만에 왕궁에 불을 놓고 자결한 것 모두가 권력욕 때문이다. 스크루우지가 자기 주변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닫고 냉혹한 처세술을 유지한 것은 재산에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니 권력욕과 상관없을까? 가룟 유다는 마땅히 사랑하고 경외해야 할 진리 자체 사랑 자체이신 분에 대한 눈이 가려 은 삼십 량에 그분을 팔아버리고 마는데 이것은 권력욕과는 무관한 일일까? 카사노바가 죽을 때까지 평생에 400여명 이상의 여성과 관계를 맺고 성애를 즐기면서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인생 표어를 앞세우고 살았던 것은 단순히 성적인 문제일까? 아니다. 하나님 없이 신앙 없이 그렇게 허망하게 끝낼 이 모든 광기 어린 생애는 모두 다 미친 욕망 때문이었고 그 미친 욕망은 하나님 아닌 다른 권력 추구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다른 쪽을 살펴보자. “인간이 곧 하나님이다” “하나님이란 인간의 자기 대상화에 불과하다.” “신학은 곧 인간학이다.” 이 말은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책에 나오는 주장이다. 이에 영향을 받은 니체 칼 마르크스 프로이트 에릭 프롬 칼 로저스 등은 경쟁하듯 반기독교적인 저술을 내놓았고, 그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을 제거한 인간의 주권과 자유와 행복을 사람들에게 강변했다.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인간의 구원자는 나 자신이다” “당신은 사랑받고 행복하고 영광스러워지도록 계획됐다” 등을 쏟아낸 조셉 머피, 노만 빈센트 빌, 로버트 슐러, 론다 번, 조엘 오스틴... 이들은 철학자 아니면 심리학자 아니면 사상가 아니면 목회자이기에 정신적이고 영적인 스승들일 뿐 권력에 대한 욕망과는 무관한 사람들일까? 그들은 권력의 성격만 다를 뿐 이들은 자기숭배와 불신앙적 신념 숭배 등 모두 자기 권력에 광분한 자들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곧 매몰되어버리고 마는 것이 권력과 재물과 종교와 성의 우상이요, 인간이 진리를 떠나면 곧 매몰되어버리는 것이 자기숭배적 철학 또는 사상이다.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 진리를 버린 사람들, 정상을 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이런 것들이다. 솔로몬의 결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빼고는 자기가 추구했던 모든 일들이 미친 짓이라는 것이었지만 그 후 수천 년이 흐르는 동안 사람은 이 미친 짓을 끝도 없이 해대는 것이다. 다 거미줄에 매달린 사탕 껍질 같은 것이건만.
예수님께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전율하며 예수님을 환호하던 군중들은 며칠 후 핏대를 올려가면서 빌라도에게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는 무리로 변한다. 왜일까? 그들이 권력이나 탐욕과는 거리가 먼 순진한 서민들이라고? 그 군중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멸망시키고 자기들을 세계의 영광스런 민족으로 상승시켜 주고 자기들에게 개인적인 부를 안겨줄 메시야이길 바라는 자기들의 부패한 기대와 욕망에서 벗어나자 이리떼로 변한 것이다. 순진한 것 같은 그 군중들 역시 다만 권력에 눈 먼 강도들의 심리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예수님께서 빌라도를 대면하셨을 때 빌라도는 자기가 예수님을 풀어줄 수도 처벌할 수도 있는 권력자라는 것을 인지시켰다. 그러자 주님께선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그런 권력이란 주어지든지 박탈되든지 하늘의 주권일 뿐이라는 것과, 주님 자신의 왕국은 현재의 정치 시스템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럼 네가 왕이 아니냐?” 라고 빌라도가 질문하자. “내가 왕이다”고 답하셨다. 그때 빌라도의 초점은 어디에 있고 주님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 것이었을까? 빌라도의 초점은 현재의 지상 권력에 맞추어져 있고, 주님의 초점은 영원한 아버지의 뜻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주님께선 이 세상의 부패한 권력보다 인류 구원을 위한 사랑의 길을 택하신 것이다. 사탄과는 정반대의 길인 것이다.
<야살의 책>과 <미드라쉬>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는 이 책들의 내용을 믿지 않지만 참고로 소개한다. 아브라함은 데라의 아들이요, 데라는 니므롯의 군대장관이었다. 그런데 니므롯은 그 이름(반역자)처럼 하나님께 반역의 정신으로 충만하고, 그가 다스리던 고대 바벨론은 그에게 몰려 각종 우상을 만들어 섬기던 우상의 땅이었다. 데라 역시 집안에 돌과 나무로 만든 12가지 우상을 세워놓고 섬기고 있었다. 아브라함도 그런 세상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혼돈스러워하며 태양을 하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밤하늘의 달과 별이야말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서 해도 달도 별도 아닌 우주를 창조하신 참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게 되면서부터 모든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하루는 부모님을 집안 우상 앞으로 데리고 와서 우상에게 자기가 만든 음식을 먹으라고 했다. 어떻게 먹겠는가? 생명 없는 것들이. 부모님을 깨닫게 하기 위한 계책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도끼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 자기 아버지 집에 있는 우상을 다 때려 부숴버렸다. 이 일로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의 미움을 받고 마침내 니므롯에게로 끌려가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자기 동생 하란과 함께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에 던져진다. 이날 이 사형식을 구경하기 위해 90만명이 사형장에 몰려들었다. 불에 떨어진 하란은 즉시 죽었지만 아브라함은 불속에서 삼일 간을 걸어다녔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그때보다 나을까?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 특정 부류의 사람을 제외하고 현대인들은 돌과 쇠와 나무로 만들어진 우상을 숭배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믿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인가 믿는 대상이 있는 것이다. 숭배의 대상이 바뀐 것뿐이다. 고대 바벨론인이나 현대의 아인시타인이나 영적인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은, 과거의 사람들은 손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했지만 현대인은 관념이 만든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이성, 과학, 문명, 권력, 재물이 그것이다.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에게 말하라고 해보라. 못할 것이다. 이성, 과학, 문명, 권력, 재물에게 진리를 말해보라고 하라. 역시 못할 것이다.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에게 복을 달라고 해보라. 미친 짓이다. 이성, 과학, 문명, 권력, 재물에게 행복을 달라고 해보라. 어리석은 짓이다. 돌과 나무로 만든 우상에게 다양한 상황에 얽혀있는 인간을 구원하라고 해보라. 차라리 강아지를 키우는 게 나을 것이다. 이성, 과학, 문명, 권력, 재물에게 인간을 구원하라고 해보라. 그 대답은? 제로다. 인간의 불신과 어리석음에는 끝이 없다.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와 땀을 쏟으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이성, 과학, 문명, 권력, 재물을 택하는 한 그는 결코 영광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일생은 사랑 증명서다. 즉 한 인간의 일생은 그가 무엇을 사랑했느냐 하는 인생 성격의 표시란 말이다. 일생을 70~80년 잡아도 그것은 큰일을 이루기에는 부족한 기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업적의 분량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인간의 마음과 도리다. 인간이 마땅히 경외해야 할 것을 경외하며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큰 분량이 아니라도, 업적이 변변치 못해도 그가 마땅히 믿을 것을 믿으며 사랑할 것을 사랑하며 살았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의롭다고 인정될 것이다. 이 사실이 성경에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이신칭의의 진리다. 인간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나 업적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는 이 진리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인가 자기를 사랑하는 게 인간의 본분인가?”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경배하는 자세로 사랑하고 중요시해야 할 분이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는 사울이 아니며 아합도 아니다. 우리는 알렉산더도 아니며 나폴레옹도 아니다. 또 우리는 저명한 예술가나 문필가 또한 아니다. 그만큼 우리에겐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언급한 왕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저급한 삶을 살고 그 저명한 인사들보다 무가치한 인간이란 말인가? 나는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을 본다. 내게는 왕권이 없고 세계적 명성도 없지만 나는 나의 주님을 알았고 영원히 그와 연합되었다. 주일이면 정겨운 교회당을 찾아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른다. 따뜻한 밥 한 끼를 앞에 두고 나는 진정한 감사를 드릴 뿐 아니라 내게 주어지는 모든 선물들에서 주님의 따뜻한 임재를 느낀다. 나는 권력자가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왔고, 내게는 권력이 영광이 아니라 복음이 영광이다. 내 가슴엔 욕망이 아니라 신앙이 머무르기를 원한다. 나는 통치하지 않고 존재한다. 나는 권력이 아니라 사랑을 원한다. 나는 빌라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식구 동료 지인 주변 사물 등 사랑할 것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하다. 나는 내가 만든 목적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목적에 조용히 응답할 뿐이다. 허망한 짓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 마치는 날 나의 주님과 완전하게 연합될 날을 소망한다. 내가 판단하기론 거미줄에 매달린 행복이 아닌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
<우리가 지상에 보내진 목적/이호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