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옛 땅 유왕산에서 금년에도 추모제를 지낸다. 유왕산추모제추진위원회 이름으로 발간한 <유왕산추모제> 보도자료에는 추모제의 횟수를 통산 1296회라고 적고 있다. 660년 백제가 신라에게 패망한 이후에 매년 이 고장 부녀자들이 해오던 행사를 1948년에 남로당이 준동하여 정부에서 치안상의 문제로 중지시킨 이후에 해 오지 않다가 지금으로부터 9년 전에 이 고장 출신의 김정은씨(현 부여군의회의원)가 사비를 들여 복원해 오다가 요즈음은 다소나마 부여군의 재정지원을 받아가며 지방화시대의 취지에 맞게 축제의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다.
이 고장 출신으로 이 고장에서 살다가 지금은 안산에 살고 있는 김혜숙씨가 기독교를 믿다가 신이 내려 무당이 된 후에 나와는 10년 지기가 된 셈인데, 내가 서울의 강북문화원에서 <삼각산축제>를 만들어 한인·한웅·단군왕검 세 분에게 제사지내는 삼조제례三祖祭禮를 복원하여 1997년 음력 10월 삼각산에서 제1회 개천제 제사를 지낼 때서부터 3회 제사지낼 때가지 참여했던 인연이 있고, 또 지금은 시인이 된 박송희씨가 1999년 8월에 <독일의 문호 헬만 헤세 신명좌정굿>을 하고 싶다고 하여 또 함께 삼각산에서 굿을 했던 인연도 있고, 금년인 2005년 칠월칠석 날 광화문 앞에 있는 열린 시민공원(옛 경기도청·양주군청·치안국 자리)에서 칠석제를 할 때도 함께 한 인연이 있어서, 내게 이번에 자기가 유왕산추모제 때 굿을 하게 되면 함께 가자는 요청을 받은 바 있다.
그가 9월 9일 유왕산에 기기로 했다면서 전화를 걸어와 이런 일에는 마다않고 나와 동행이 되어 기록으로 남기는 장영호씨와 함께 그를 화성휴게소에서 만나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천을 거쳐 부여군의 서남 쪽 끝 금강 가에 자리 잡고 있는 화양면에 있는 유왕산을 찾았다. 유왕산 밑의 금강은 의자왕이 당으로 압송될 때 이곳에서 의병이 대기하고 있다가 당군을 공격하는 바람에 배가 당군의 토벌이 끝날 때가지 한동안 머물렀다가 간 곳이라고 한다.
유왕산 가는 길은 유왕면을 지나가는데 아주 한적한 곳이다. 금강하구언을 만들어 뱃길을 막기 전에는 양화의 갓포나루에서 어물을 다 부리고 부릴 데가 없으면 강경으로 넘어갔다고 전해 오던 말하자면 부여군의 경제가 흥청거리던 곳이다. 그래서 할 일이 없으면 갓포에 가서 소금이나 한 섬 지고 오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라고 한다.
금년 45세의 김혜숙씨가 이 고장에 살았던 어렸을 때에도 그런 흥청거리던 경기가 살아있었다고 한다. 금강하구언이 양화와 강경의 경제를 죽인 셈이다. 그래도 강경은 나지도 않는 <새우젓축제>를 벌여 그 축제가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그런 강경에 비하면 <유왕산 추모제>는 역사성이 있는 축제를 오랜 세월 벌여오면서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이제야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게 되는 셈이다. <유왕산 축제>로 말을 바꾸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축제祝祭’란 원래 ‘축문을 읽고 제사지낸다’는 뜻이므로 굳이 추모제라는 이름을 붙여 행사를 어둡게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백제 망국의 한을 지닌 곳이 이 곳인데 지금은 너무나 조용한 한촌으로 변해 있다. 도로에서 풀을 깎는 할머니 몇 분이 보일 뿐이다. 금강하구언을 막아서 그런지 드넓은 강에는 배 한척 보이지 않는다. 오면서 보니 다른 곳의 하늘은 멀쩡한데 이 곳의 하늘은 흐려있고 백제가 망한 그 날을 기억하라는 듯 한두 방울 눈물을 떨어뜨린다.
유왕산은 이곳 주민들이 세상에 알리지 않고 동네 축제처럼 이 고장에서 당군을 공격하다 의사한 의병들의 넋을 기리고, 또한 백강전투에서 전멸한 백제부흥군의 넋을 기리고, 그들을 전장으로 떠나보내고 고초를 겪어 온 그 당시 여인들의 고를 풀고 넋을 달래는 추모제를 지내온 현장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엿하게 정자를 짓고, <백제유민정한불망비>도 세우고, 돌계단도 만들어 <유왕산추모제>를 지내기에는 불편하지 않게 해 놓았다. 정자 앞에 가서 금강을 바라보니 오른쪽으로 장대교長大橋인 웅포교가 금강을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고, 물이 가득하여 나당연합군과 백제부흥군의 함선들이 수전을 벌였음직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강 건너는 후기백제의 제2의 국도가 있었던 익산이 펼쳐져 있다. 그러니 백제 최후의 결전을 벌일만한 곳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중국 중원 발해만 일대, 요서지방과 산동반도 일대를 백제의 본고장으로 보는 설을 주장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많이 있어, 이 상반된 주장의 역사를 어떻게 하나로 정리해 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백제가 처음에 직산稷山에 도읍했다가 북상하여 하남백제의 시대를 누리면서, 백제를 세운 소서노와 온조왕이 두고 떠나온 연주兗州 일대를 후손들이 수복하여 중원에 백제대국을 건설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중원에 백제군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은 물론이고, 한반도에도 직산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믿는다.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내세워 온통 나라 안이 시끌벅적 떠들어 댈 때, 나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건국의 주인공 소서노召西弩를 동북공정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장문의 글을 써서 인터넷 카페에 올린 적이 있었다. 이 글이 나로서는 초기백제사와 관련하여 쓴 유일한 글이었는데, 이 글을 읽은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최근에는 어떤 문학지를 함께 만드는 일로 전씨중앙종친회의 전용찬 회장 사무실에 드나들며 全씨의 시조인 전섭全聶이라는 분이 초기 백제를 연 십제의 핵심 멤버이고, 그가 온조왕으로부터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초기백제역사와 말기백제역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십신의 한 분인 전섭이라는 분이 후대에 와서 갑자기 백제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기 시작했는데, 백제가 멸망한지 10년 되는 해에, 백제의 유민인 전씨 진眞씨 목木씨가 주동이 되어,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다방리에 비암사碑岩寺를 짓고, 만들어 봉안한 <계유명癸酉銘 전씨全氏 아미타삼존석상阿彌陀佛三尊石像>(국보로 지정)이 1960년 9월에 황수영 박사에 의하여 발견된 이후부터이다.
이 석상에는 몇 줄의 명문이 있는데, 이 명문에는 백제시대의 대성인 전씨·진씨·목씨가 나오고, 절을 짓고 석상을 발원하게 된 이유를 “國王大臣 及 七世父母 含靈等 願敬造寺智識明記 (백제의 역대국왕과 대신들, 칠세부모와 전쟁으로 죽은 백성 등을 위하여 발원하여 그들을 모시는 절을 짓고 석상을 만들었음을 명기한 것)”하여, 전씨문중에서 관심을 갖게 하였다.
이 명문을 통하여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에 백제유민에 대하여 강압정책을 쓰지 않고 유화정책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가 그러한 정책을 썼기 때문에 백제의 유민이 모여 원찰을 짓고, 죽은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는 석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이 고장에서 매년 음력 8월 17일 의자왕이 잠시 이 곳에 머물다가 가게 된 그날을 기려 부녀자들이 흰옷을 입고 금강 남북에서 자발적으로 모여 만남의 행사를 갖게 된 것도 그 신라가 유화정책을 서서 백제 사람들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곳 지명이 보여주는 양良자와 화化자의 의미에서도 백제 유민을 자유스럽게 놓아 둔 신라의 의도가 읽어진다. 이 곳의 지명 유례를 보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적량과 홍화 두 곳을 합치고 두 곳의 이름에서 양자와 화자를 따서 양화良化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명을 개편하면서 양자화 화자를 붙여 쓴 의도가 신라의 의도를 존중하자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이 고장 사람들의 기질이 신라에 대하여 반골기질이 강하므로 이 고장 사람들을 순화시켜 신라에 속복하는 양민화良民化에 성공하였다는 뜻으로 볼 수 도 있다.
고대사에서는 역사에 등장하는 사람과 관련되는 한자나 지명의 한자를 문자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면 놀랍게도 많은 역사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백제역사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문자학을 동원하여 어느 정소 해소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표의문자가 갖은 의미의 확정성 때문이다. 표의문자는 그 의미가 한 번 정해지면 그 음과 의미가 오랜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 문자 하나에 하나의 음만이 존재한다고 볼 때, 이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중국의 음을 이유로 들어, 한자가 중국의 문자가 아니라 우리의 문자라고 주장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필자가 소서노에 대하여 쓴 글도 문자 의미의 확정성을 기초로 하여 문자를 분석함으로써 찾아낸 역사기록이다.
전섭이나 환성군이라는 문자를 분석하여 초기 백제의 역사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전섭이라는 이름에서는 그가 십제의 최고 리더임이 밝혀지고, 환성군에서는 그가 백제의 토착세력임이 밝혀진다. 소서노에게서는 그가 무당(사제)이고 여자무사임이 밝혀진다.
백제역사는 멸망한 나라의 역사이므로 위와 같이 풀어보면 풀리는 의문이 너무나 많은 미스터리의 역사이다. 역사서에서 밝혀지지 않는 부분인 백제대륙진출의 진위여부와 백제멸망역사에 대한 이런저런 의문을 사료를 다시 해석하고 사료에 나타난 문자를 재해석함으로써 풀 수 있는 한 풀어내야 하는데, 이 작업이 가능하다. 유왕산에서도 유왕산과 관련이 되는 문자들을 분석함으로써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역사를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나는 백제의 최후전투인 白馬江전투(白村江전투)가 부여의 백마강에서 벌어지지 않고 중국 중원에 있는 백마하白馬河에서 벌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또 백제는 주류성周留城전투에서 패배하였는데, 한반도에는 주유성이 없고 중국에 주류성이 있으므로 백제 최후의 전투는 중원에서 벌어졌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이러한 추론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임천면 양화면 일대는 백제 최후의 격전지로 구전되어 왔고. 양화면에 있는 금강에 면한 유왕산에는 소정방에게 잡혀 당나라로 압송되어 가는 의자왕이 탄 배가 머물렀다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또한 주변의 지명이 백제멸망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백제 역사의 이러한 부분은 중원에서의 백제 역사와 맞물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제는 이 혼란스러운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아니 될 시점에 와 있다. 중국이 동북공정·단대공정·탐원공정을 내세워 우리의 역사를 통째로 먹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면도 있다.
백제사에서 풀어지지 않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하여 가설을 하나 세워 보기로 한다. 백제는 중원백제와 한반도백제의 두 백제로 함께 존재하였다고 추론한다.
두 백제가 중원과 한반도에 각각 있었음을 백제의 첫 국호였던 십제十濟를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다. 십十은 연다는 뜻이다. 제濟는 백제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십제’는 ‘제를 열다’ 즉 제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뜻이다.
제濟는 제수濟水가 흐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제수濟水를 연수兗水라고도 하였다. 연수를 줄여서 연渷이라고도 하였다. 백제 당시에 연주兗州가 있었는데, 연주는 백제의 다른 이름으로 볼 수 있는 이름이다. 연兗은 우리 말 연다는 뜻의 음차인 연이다. 그러므로 연다는 뜻의 십十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십제는 연제로 부를 수 있다.
십제를 세우는데 공헌한 사람이 온조왕의 어머니 수서노召西弩였다. 소서노는 십제(10명의 공신)를 이끌고 연주(십제)를 떠나 소래(미추홀彌鄒忽-인천을 미추홀이라고 하나 잘못된 추론이라고 본다. 미추홀은 너를 추모왕이 보낸 곳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의도에 합당한 지명은 소래일 뿐이다.蘇來를 召來로 읽으면 소서노가 온 곳이 됨으로 의문이 풀린다)에 상륙하여 남쪽으로 안양 시흥 서울 양주를 모두 정벌하여 십제의 영토로 하였다. 그래서 소서노가 정벌하여 얻은 땅이라고 하여 잉벌노仍伐弩라고 호칭하였다. 잉벌노는 소서노가 정벌해서 생긴 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후로 소서노는 누구에겐가 돈을 주고 이 땅을 샀다. 그래서 이 땅을 매소홀買召忽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소서노가 토착민에게 돈을 주고 땅을 샀을 것으로 추리한다. (이러한 유습은 무령왕 때에도 시행되었다. 그의 능에서 토지를 산 증표인 매지권買地券이 나왔던 것이다.) 매소홀은 소서노가 산 땅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양주성을 매소성(매초성이라고도 하나 이는 매소성의 오기라고 본다)이라고 하였다.
인류 역사상 여자의 몸으로 두 나라(고구려와 백제)를 세우는 데에 기여한 최고의 슈퍼우먼은 소서노뿐이다. 여자의 몸으로 주도적으로 두 나라를 세우는데 관여한 사람은 인류 역사에서 아무도 없었다. 말하자면 전세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던 것이다.
소서노召西弩의 召는 입에 칼을 물고 있음을 나타내는 문자이다. 입에 칼을 무는 사람은 무당밖에 없다. 즉 소서노가 무당이라는 뜻이다. 서西는 그가 서쪽에서 왔다는 뜻이다. 그가 떠나온 연주兗州(십제)는 한반도 서쪽에 있다. 노弩는 단거리전투 때 쓰는 활인 쇠뇌이다. 쇠뇌는 요새 말로 휴대가 간편한 기관단총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문자만 풀어 봐도 소서노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도출된다.
나는 의자왕이 당나라로 압송되어 가다가 쉴 수밖에 없었던 곳 유왕산에서 백제를 건국한 소서노를 떠올리고 있었다. 거의 동시대에 그가 세우는 데에 관여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무엇인가 징조를 보이지는 않았을까? 나는 징조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백제부흥군의 출동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이 치룬 마지막 전쟁은 중원에 있는 백제의 백마강에서 벌어졌다. 의자왕은 싸움에 지자 핵심세력을 이끌고 황해연안 항로를 따라 금강의 기벌포를 거쳐 웅진성으로 들어가고, 군사는 사비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였다. 나당연합군이 추격하여 660년 7월 13일 사비성이 함락당했다. 의자왕은 7월 18일 전의를 잃고 웅진성에서 나와 소부리에서 소정방에게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소서노와 온조가 세운 백제는 31대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8월 17일 의자왕을 비롯하여 태자 효, 중신 88명, 백성 12,807명이 당으로 압송되었다. 아마 첫 배는 의자왕이 타고 가고, 다른 사람들은 날짜의 차이를 두어 수송하였을 것이다. 의자왕을 태운 배가 유왕산 앞을 지나갈 때, 그의 모습을 보기 위하여 망국의 유민들이 유왕산 일대에 모여들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인들이었다. 강 건너(익산 쪽)와 강 이쪽에서 몰려들어 산하를 하얗게 덮었고, 왕의 장도를 비통해 하였다.
전설은 의인과 무사들이 몰래 만나서 의자왕을 실은 선단이 유왕산 앞에 다다르자 화살을 쏘아 공격하였다고 한다. 당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하선하여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공격하여 이들을 전멸시켰고, 최후의 백제군이 당군을 공격한 그 산을 그 후대에 사당산射唐山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사당산은 당군에게 화살을 쏘아 공격한 산이라는 뜻이다.
이 후로 이 날이 오면 이 고장 인근의 부녀자들이 하얗게 소복하고 유왕산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정한을 달래는 행사가 시작되었고, 이 행사가 이어져 내려온 횟수가 금년으로 1296회나 된다고 한다. 세월이 가면서 당시의 정한은 사라지고, 시집간 딸과 친정부보가 이날 모이는 장소로 변모하였고, 이 곳에 난장이 서고 풍물패가 풍물을 치고, 일제로부터 해방전후에는 악극단이 들어와 악극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유왕산에서 감회에 젖어 있다가 하산하여 이곳에서 9년 째 유왕산 추모제를 집행해 오고 있는 부여군의회의 김정은金釘銀 의원과 양화면 면장 두 분을 만나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이분들이 안내하여 충화면 가화리에 있는 SBS방송 서동요촬영세트장을 둘러보았다. 견고한 세트장을 지어가면서 촬영을 병행하고 있었다. 부여군에서 세트장 건너편에 무예촌武藝村을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촬영장이 들어서는 배면엔 아름다운 산과 호수가 그윽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이름이 가화저수지라고 한다. 민물낚시터인데 낚시꾼들에게만 내어주기에는 너무나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의 낚시터이다.
이 곳에 집이 한 채 서있고, 이 집이 매운탕집이란다. 세트장을 떠나서 이곳에 와 차를 대니 비가 본격적으로 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쳤다 다시 오기를 반복한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퍼붓기 시작한다.
가화호수에서는 마고를 곰(固麻-마고·북두칠성이라는 뜻)으로 바꾸어 한성백제의 이름으로 섰던 소서노의 넋이 비를 뿌려 서리는 것만 같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곰을 뜻하는 웅포교가 있고, 또 옛날에 백제 멸망의 비운을 맞은 웅진성(곰나루성·마고나루성·칠성나루성)도 있었으니, 어찌 소서노와 무관하다고 할 것인가.
“소서노의 통한의 눈물” 내가 한마디 하니, 김혜숙씨가 “인터넷에 그 글이 뜨겠군요.”라고 받는다. 소서노는 내가 동북공정의 대응책으로 소서노를 부각시켜야 한다고 쓴 글에 보답하려는 것이 아닐까? 백제를 세운 소서노가 고구려의 발목을 잡고 있으므로 중국이 아무리 고구려를 끌고 가고 싶어도 백제라는 존재의 무게 때문에 운신이 여의치 않을 것이라고 본 글이다.
맛이 일품인 메기매운탕으로 점심 겸 저녁을 먹으며 이 고장 소주로 격해오는 목을 달래나 마음 한구석은 백제의 마지막 날이 어른거려 우울하고 서글프다. 시나 한 수 지어야 가슴에 맺혀 오는 응어리가 풀릴 것인지... 이 고장에서 태어나 이 고장에 와서 유왕산 굿을 하게 되는 김혜숙 무당이 굿을 해야 풀릴 것인지... 나는 김혜숙씨가 서소노의 한을 풀어 줄 것을 기대한다. 이런 응어리는 무당이 풀어야지 누가 풀 것인가.
첫댓글 감사히 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