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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어 미 새” [생명공학으로 이 나라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뜻]
* 전임 한국한의학연구원장 김기옥(소설속의 이생명)의 자서전적 미래 가상소설
< 차 례 >
과거 - 이 생명이 한의학을 전공하게 된 동기
현재 - 이 생명이 연구한 내용들
미래, 가상현실 - 이생명이 한의학을 기반한 생명공학산업으로 국가 신성장동력으로 구축한다는 이야기
[ 과 거 ]
1. 박차고 나오다
이생명 은 충청도 어느 시골 ‘곶대골’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곶이란 하트의 아랫부분처럼 뾰족한 모양으로 땅이 솟아 오른 곳으로 이곳은 적들의 동태를 살피기 좋은 지형으로 그곳에 주로 관측대가 설치되어 있으므로 곶대라고 하였다. 곶 대골은 이런 지형에 망루가 있어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영토싸움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1954년 어느 봄 날 가난한 농부의 7남매중 4째 아들로 이생명이 태어나 나던 날 송아지도 함께 해산을 하게 된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벌떡 일어 나서 걷는 것을 보고 생명의 큰누나는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을 아주 신기
하게 생각했다. 애기는 태어나 독립하는데 적어도 30년을 의지하는데 동물은 사람과 다르게 바로 일어서서 젖을 찾아 먹는다. 동물은 빨리 젖을 빨아먹고 스스로 독립을 하는데 인간은 스스로 일어서는데 만 약 1년 정도가 걸리고 계속 양육하며 보살펴야만 한다. 왜 그럴까? 동물은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만 가면 되지만 인간은 우수한 두뇌를 이용하여 자신의 환경을 개선하며 살라고 하는 것이 동물과 다르게 신이 주신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게 된다.
생명의 부모는 이제껏 아이를 낳기만 하면 할머니가 다섯 아이들을 다 키워주셨다. 그래서 어머니도 해산한지 3일만 지나도 밭에 나가 일만하셨다. 그래서 자기 자식이라고 예뻐해 주지도 못했다. 할아버지는 소 안장에 줄을 이어 맷돌같은 큰 돌을 돌려 곡식을 찧는 '연자방앗간'을 하셨는데 1953년 한국 전쟁 통에 소의 뒷발에 차여 생긴 상처가 심해졌다. 그 염증이 전신에 퍼져 이기지 못하고 패혈증으로 돌아가셨다. 그 당시에는 변변한 항생제도 없었기 때문에 시름시름 앓고 있는 할아버님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생명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한 죄인이라 하늘에 석고대죄 하는 마음으로 사당에 모시고 아침저녁 새로이 밥을 지어 제상에 올리고 절하였으며, 외출할 때는 늘 삿갓을 쓰고 3년간 해를 직접 바라보지 못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전쟁이 끝나고 낳은 생명은 부모가 처음으로 업어 키운 자식이라 유달리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큰누나는 19살이나 차이가 나서 막내를 3살까지 키우다가 시집을 갔다. 큰 누나는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한의원을 크게 하시던 집안이 충정도 곳대골 옆집으로 피난을 왔다. 그 집 큰아들은 농대 축산과를 다녔다. 큰 누나는 딸이라 아들들을 먼저 공부시켜야 한다며 중학교도 못 가도록 하고 집안 일만 시켜 공부에 한이 맺혀 있었다. 한의원집 큰 아들을 그저 대학에 다니고 있다 는 이유로 흠모하다 연애를 하여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시집가게 되었다.
생명은 어려서 겁이 많았다. 큰 누나가 결혼식을 하는 날 가족 사집을 찍는데 그때 당시에는 프래쉬대신 마그네슘을 터뜨려 번쩍하는 불빛에 사진을 찍었다. 생명은 그 번쩍하는 불빛에 놀라 정신을 잃었다. 놀랜 아이를 들쳐 업고 동네에 와서 시골 동네 한의사 노약국할아버지에게 침을 맞고 나서야 깨어났다. 한 겨울에 시골 구들방은 나무를 많이 때어 아랫목은 절절 끓었다. 아래 여동생과 씨름을 하던 생명이 목이 타자 김칫국을 얼마나 많이 마셔댔는지 김칫국에 체했다. 열이 펄펄 나고 정신을 몽롱한데 하늘엔 비단 구름을 타고 나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들쳐 업고 또 노약국에 가서 노약국할아버지에게 사관을 침으로 뚫어주자 다시 깨어났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검은 폐타이어를 재생하여 만든 검정 고무신을 신을 때 아버지는 특별히 시장에서 비싸게 사온 검정 운동화를 사다주셔서 신고 다녔다. 어느 날 개울가에 놀라 나갔다가 다리위에서 빠뜨려 흘러가는 운동화를 바라보고 만 있어야 했다. 그 날 저녁 생명은 아버지에게 무척 혼난다.
아버지는 위장병으로 늘 고생하여 어느 때는 피를 토하시기도 하셨다. 그 때부터 늘 식사시간에 식구들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할 때 '위장병은 밥 한술 차이'라시며 약간 모자란 듯이 먹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어머니는 역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여 영양부족으로 한쪽 귀가 잘 안 들리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실 것이라고 걱정되어 며느리라도 빨리 보아 살림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큰형은 명문인 정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보아 떨어지자 시공 집에서 재수하던 중 공부하기가 싫은 차에 친한 친구의 권유로 부모님 몰래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늘 걱정되어 며느리 감을 물색하던 중 동네에 들어온 떠돌이 꿀 장수 아주머니가 참한 며느리 감이 있다는 말에 혹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말에 다음번에 올 때 사진을 가져 올 테니 보여주고 좋다면 결혼 시키자고 한다. 보름 후 꿀 장수는 8 Km 떨어진 시골의 방씨네 막내딸 사진을 가져 온다. 그래서 아버지는 편지를 써서 최전방에 근무하는 일병인 큰 아들에게 사진을 보내주고 결혼을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첫 휴가를 나오면 선을 보자고 한다. 착한 큰 아들은 휴가를 나오자마자 이튿날 읍내 다방에 나가 선을 본다. 별로 싫지는 않았다. 그러자 큰 아들이 귀대하고 나자 다시 동네에 온 꿀 장수 아줌마에게 좋으니 색씨집에 날을 잡자고 한다. 그리하여 제대하기 6개월 전 마지막 휴가를 나온 상병인 큰 아들을 결혼시킨다.
시골 잔치는 2일전 돼지를 잡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돼지 목을 따서 죽으면 내장을 떼 내어 싱싱한 간은 잡는 사람들 끼리 나누어 먹는다. 내장은 순대도 하고 껍데기는 전날 전을 붙일 때 솥뚜껑을 뒤집어 마당에 걸고 그 기름으로 전을 부 친다. 고기는 갈라 광에 두었다가 국을 끓일 때 잘라 넣는다. 드디어 결혼식은 구식으로 신랑 신부가 가운데 상을 펴고 닭 을 암 수 구해 보자기에 싸서 올려 두었다가 결혼식이 끝나면 날려보낸다. 저녁때 큰형 친구들이 몰려와 신랑을 길들여 야 한다며 다리를 묵어 시렁에 붙들어 매고 술상을 잘 차려 내오지 않는다며 발바닥을 방망이로 매우 친다.
늘 정의감에 불타는 생명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런데 자기 담임 남선생이 큰형님의 친구라서 담임이 형님의 발바 닥을 때리자 그것을 못 참고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어 잡아맨 끈을 끊겠다고 대든다. 그러다가 청년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 지 못하자 크게 울어 댄다. 사실은 신랑다루기는 신랑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의 용천혈을 때려주면 정력이 좋 아져 첫날밤을 무사히 치르라고 자극을 주는 것인데 자기 형님을 때린다고 목이 메어 울고불고 야단이다.
토성 초등학교엥 입학하여 어느 날 1학년 담임인 남선생은 남자 여자 짝을 만들어 함께 앉히기로 한다. 남자 여자 키 순 서 대로 차례로 세우는 데 생명은 키가 커서 맨 뒤에서 2번째 자리에 섰다. 마침 양지편 김순이와 짝을 하게 된다. 그런 데 공부 쉬는 시간에 키가 가장 큰 이광연은 남자 여자 앉는 것이 창피하다 며 자리를 바꾸자고 한다. 그래서 이생명도 김순 이와 짜고 남자는 남자끼리 이광연과 뒷자리에 앉고 김순이는 이광연의 짝과 자리를 바꿔 앉았다. 잠시 후 수업이 시 작되자 담임선생님이 보시고 화가 나시어 앞에 나가 의자를 짝끼리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벌을 선다. 조금 자났는데도 정말 팔이 아파 고통을 호소하자 앞으로는 짝을 바꾸지 않기로 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김순이는 별명이 착하다고 ‘착한이’, 순하다고 이름이 ‘순이’였다. 순이네는 양지편에서 구멍가게를 하였다. 어느 시험 이 있는 날 순이는 공부를 잘하는 생명에게 눈깔사탕을 2개 주며 절대 혼자 먹으라고 한다. 생명은 사탕을 몰래 먹었다. 그런데 시험을 보는 도중 순이는 생명이 옆구리를 툭 툭 치며 시험지를 보여 달라고 한다. 생명은 할 수 없이 답안지를 살 짝 보여준다.
시골서 자란 생명은 호기심 많고 총명하고 성실한 아이로 토성초등학교에서 항상 1.2등을 차지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느 추운 겨울날 수업 중 점심시간에 담임 오선생은 간식으로 반 아이들이 싸 온 생고구마를 빼앗아 얇개 잘라 뜨거 운 난로에 구워 생명이를 비롯한 우등생인 주위 학생들에게만 준다. 추운 겨울에 자리는 난로 주위에 성적순으로 앉히었다.
생명의 아버지 이복환씨는 몸이 약하여 학업을 포기하고 초등학교만 나오셨지만 독학으로 한문공부를 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으셔서 정주의 향교에서 유생 활동을 하셨다. 그래서 <주자십회훈>이라는 주자의 가르침을 방의 잘 보이는 안방 벽에 붓글씨로 직접 써서 붙여 자식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
1. 부모님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후 후회한다.
2.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면 멀어진 후 후회한다.
3. 젊어서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나이 들어서 후회한다.
4. 편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려워진 후 후회한다.
5. 돈을 많이 벌을 때 아껴 쓰지 않으면 돈 없을 때 후회한다.
6.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이 되면 후회한다.
7. 담장을 제대로 고치지 않으면 도둑을 맞은 후 후회한다.
8. 성생활을 절제하지 않으면 병이 든 후 후회한다.
9. 술 먹고 헛소리를 하면 술 깬 후 후회한다.
10.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지 않으면 손님이 가신 후 후회한다.
이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생명은 늘 후회하지 않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다.
또한 생명은 자연 속에 살며 몸으로 계절을 느끼며 살았다. 우리는 흔히 ‘철들었다’, ‘철이 없다’ 고들 하는데 철이라는 것 은 농경사회에서 24절기에 맞추어 농사를 준비하고 관리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계절이나 인생의 적절한 시 기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성장하면서도 느끼어 미리미리 대비하고 늘 규칙적이고 부지런한 생활을 하며 장 래에 대비하며 사는 것을 농촌 자연에서 배웠다. 또한 곶대골을 뒤쪽이 산으로 추운 바람을 막아주고 앞에는 개울가에 하 얀 금모래가 깔린 배산임수를 갖춘 곳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과 어울려 개울가에 나가 놀고 산과 들로 다니며 호기 심 많은 생명이 보고 즐기는 식물과 동물들은 하늘로 부터 받은 가장 훌륭한 선물이었다.
생명이 초등학교 4학년 때 홍대 미대 대학원을 다니시던 시골 부잣집 아드님이신 연선생님이 청산초등학교에 부임해 오셨다. 사실 1960년대 당시도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흔히 전방에서는 교전이 있어 연선생님 아버지는 외아들을 군에 보낼 수가 없어 대학원을 입학하여 연기하고 소집 연령을 넘기긴 했으나 군 미필자는 취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때 당시 시골 초등학교 교사가 모자라 군 미필자도 교사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연선생은 고향 선배인 생명의 큰 아버지인 도학무국장을 찾아가 취직을 부탁하였다. 덕분에 고향 토성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같은 반에서 1.2.3 등을 하던 생명과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의 자제 분인 정운과 동규는 그 선생님에게 방과 후 크레용 화, 수채화, 뎃생, 판화 등을 사사 받았다. 그 당시 데생은 깡통에 구멍을 내고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서 아궁이에 넣고 태워 남은 재를 식혀서 스케치북에 그리는 것이었다. 생명은 그림을 잘 그려 '대한신문 사생대회'가 정주 중앙공원에서 열 렸는데 거기서 그린 크레용 그림으로 입선하기도 했다.
연선생님은 그림에 소질이 있는 생명을 보고 꼭 그림으로 먹고 살려면 그 당시 상업미술이라고는 유일한 것이 극장 간판 그림이었는데 그것을 해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림을 그려서 직업으로 가지면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힘들을 것 같아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계속 해보라는 권유를 뿌리쳤다.
연선생님은 체격도 다부지게 좋으시어 선생님들이 편을 나누어 배구시합을 하시면 중앙 세타를 맡아 수비를 잘하였다. 시골운동장은 협소하여 변변한 시설이 배구장밖에 없었다. 가끔 여선생님을 포함하여 모든 교사들이 두 편으로 나누어 막걸리 내기를 하였다. 그러면 선생님들은 자전거를 잘 타는 생명에게 1키로나 떨어진 양조장에 커다란 물주전자를 들려 술심부름을 보내곤 했다. 그 때도 어떤 어린이는 심부름을 보내면 막걸리를 가져 오다가 몇 모금 먹고 물을 채워 오는 아이가 있었으므로 틀림없이 심부름을 잘 하는 생명에게 맡겼다. 생명이가 자전거에 술을 받아가지고 신작로로 올라치면 같은 반 체격이 큰 여학생 셋이서 골려주려고 손을 잡고 길을 가로 막는다. 그러면 생명은 자전거에서 내려 얼굴만 빨개 가지고 얼굴을 못 들고 있다. 그런 그 모습을 보고 한바탕 웃고는 못된 여학생들은 길을 터준다.
연선생은 배구시합에서 막걸리를 얼큰하게 마시면 어두컴컴한 교실 칠판에 워드워즈의 영시 ‘무지개를 보았을 때’란 시를 영어로 써 놓고 흥얼흥얼 암송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주머니에는 금침을 넣고 다니시다. 다치는 아이들에겐 침도 놓아주셨다. 생명은 축구를 좋아하여 축구를 하다가 발목을 삐었는데 연선생님이 주머니에서 금침을 꺼내어 새끼 발 가락과 넷째 발가락 사이에 침을 놓았는데 얼마나 아픈지 엉엉 울어 댔다. 그러나 이틑날 신기하게 아픈 것이 나았다. 아 마도 이것이 생명이 한의사를 택하게 되는 운명이 되었을 수도 있다.
생명이 6학년이 되자 도학무국장님이신 큰아지는 연선생을 불러 생명이의 형 셋이 다 충청도의 명문 정주중학교, 정주고를 나왔는데 “생명이의 실력은 어떻냐? ” "정주중학교를 넣을 수 있냐?"고 물었다. 그 당시 정주중학교를 몇 명이나 들어가느냐가 요즈음 명문 고등학교에서 서울대를 몇 명 보냈느냐라는 성적으로 줄을 세우듯 명문 초등학교의 실력 기준이었다. 그 당시 토성초등학교에서는 매년에 한 두명 정도 진학하는 형편이었다. 연선생님은 책임지고 생명이를 정주중학 교에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돌아 왔다.
연선생은 생명이의 6학년 담임을 맡아 직접 가르치셨다. 모든 과목을 늘 90점 이상 맞는 생명이가 하루는 산수를 63점을 맞자 종아리를 내리치시며 혼내신다. '그런 식으로 해서 정주중학교 갈수 있느냐'며 화를 내셨다. 그 후로 따로 저녁에는 생명이네 사랑방에 정운, 동규와 함께 특별 과외를 해주셨다. 일요일을 빼고 매일 밤 과외를 하는데 어느 날 생명이가 너 무 졸려 자습하는 시간에 옆방에서 잠이 든 사이 생명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방앗간에서 떡을 해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잠 만 자기도 했다.
어느 날은 정운이가 사랑방에 앉아 있는데 생명의 아버지는 사랑방으로 통하는 통로에 입구의 문을 푸석하고 갑자기 열자 누군지 얼굴이 안 보이니 “생명이냐?”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아버지는 “옛날에 어떤 유명한 장수가 부하가 얼마나 조심스러운 사람인가? 테스트하느라고 물을 한 컵 문짝위에 보이지 않게 올려놓아도 문을 열기 전에 살펴보고 내려놓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기 심복부하로 삼았다”고 한다. 또 “중국의 요 임금은 자기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전에 테스트해보기 위해 우물을 파라고 해 놓고 얼마쯤 땅속 밑으로 파고들어 갔을 때 흙을 메우니 이미 옆으로 도망갈 구멍을 파 놓고 들어가 화를 면했다. 또 한 번은 지붕위에 올라가라고 해 놓고 집에 불을 질렀더니 이미 옆에 뛰어 내릴 곳을 알아두었다가 화를 면하더란다. 또 큰 딸을 순임금에게 시집을 보내 놓고 너무 행복하게 잘 살아 이어 작은 딸마저도 주었더니 둘 다 싸우지 않게 잘 데리고 살았다.” 고 말씀 하신다. 아버지는 항상 자식들에게 매나 채찍을 들지 않으시고 이렇게 늘 교훈적인 말씀을 하시고 늘 모범적으로 사셨다. 그래서 생명의 형님 누님들은 아버지가 무서워 옆에도 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늘 감동적인 교훈으로 설득하니 아버님을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요즈음은 자식들과 대화를 하려고 해도 아빠 들이 너무 바쁘고 공부할 시간을 아껴야 한다며 자식들과 만날 시간이 없다. 하지만 옛날 농촌에서는 겨울 같은 농한기에는 3끼 식사를 가족이 함께 하며 하루에도 많은 시간을 자식들과 함께 생활하고 밥상머리 대화가 있었는데 그러려면 아버지가 올바르지 않고서는 말의 권위가 서지 않는 것이었다. 언젠가 종로 3가의 한문서당 서생님이 나오셔서 선생님은 평생에 한 푼도 벌지 못 하였지만 항상 아버지의 권위를 잃지 않고 자식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항상 정의롭게 살기 때문이시란다. 요즘 남자들은 돈을 벌어다 주고도 부인에게 절절 매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 고 하신다. 그 이유는 모두 정의롭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쓸데없는 이익에 눈이 멀고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 아이들은 과외가 끝나면 함께 자고 새벽에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 아침 먹고 학교에 가기도 했다. 정운이는 잠에 들면 업어 가도 모르게 깊이 잠에 빠지고는 했다. 동규는 머리가 아주 좋은 친구인데 공부에는 머리를 안 쓰고 쓸 데 없는 곳에 머리가 발달한 친구였다. 어느 날 동규는 정운이가 잠든 사이 성냥불을 붙여 성냥이 타고 있을 때 엄지와 검지에 침을 발라 성냥불을 잡으면 조그만 숯이 된다. 그것을 잘라내어 정운이의 팬티를 벗기고 그 숯 한쪽에 침을 발라 고추 끝에 붙이고 성냥에 불을 붙여 숯에 불을 붙였다. 잠자던 정운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조그만 숯은 떼어내고 화를 낸다. 그 사이 동규는 벌써 문밖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을 수학여행을 서울로 왔다. 새벽에 어머니가 준비해주신 김밥, 삶은 계란, 라면땅, 사이다를 싸서 배낭에 메고 시골길을 4키로 정도 걸어서 면사무소 소재의 청산역으로 모였다. 서울까지는 10시간을 가야하므로 새벽 7시까지는 도착해야 했다. 조치원에서 갈아타기 전까지는 여객차가 시간이 안 맞아 임시화물차를 이용해야 했다. 깜깜한 화물칸에 45명이 올라탔다. 문을 닫으면 아무것도 안보이므로 출입문만을 열고 달린다. 한참 후 터널을 지나자 정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연선생은 담배에 불을 붙여 손으로 뱅뱅 돌린다. 모두들 그 불빛에 의존하여 터널을 지나야 했다. 달리는 기차 속에서 허기진 배를 김밥으로 때우며 드디어 조치원에 도착하여 1시간이상을 기다려 겨우 서행 완행열차에 올랐다. 차를 바꿔 타고 조금 지나자 벌써 창문을 열고 토하고 얼굴이 핼쓱해 진 친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기차는 40여분 연착하여 저녁 7시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서울역광장 앞에 빙글 빙글 돌아가는 브라더미싱의 광고 네온사인에 모두들 눈이 휘둥글 해 졌다. “서울이 이런 곳이구나!” 갈월동 싸구려 여인숙의 커다란 방 하나에 15명씩 자게 되었다. 저녁을 먹은 후 지역구 국회의원 비서관이 찾아왔다. 환영한다며 국회의원 얼굴이 그려진 책받침을 하나씩 준다. 그것도 그 시절엔 너무 신기했다. 잠을 자려고 누웠으나 기차에서 내렸어도 아직도 기차를 탄 것처럼 창문이 덜컹덜컹하는 것 같았다. 겨우 잠이 들어 아침에 일어나니 여인숙 앞에는 벌써 장난감 장수, 야바위꾼 들이 시끌시끌하다. 10원을 내고 수틀처럼 천 조각을 싼 위에다 바늘을 꼽아 밑에 그어진 선에 닿으면 바람을 넣으면 꿈틀꿈틀하는 50원짜리 말장난감을 준다는 것이었다. 자기들이 할 때는 가만히 있으니 찌르자마자 밑에 선에 도달하지만 시골 촌놈들이 찌르면 천을 살짝 올려서 빗나가게 만든 것이었다. 정말 서울 가서 눈감으면 코를 베어 간다더니 아주 야비한 친구들이었다. 몇 명인가 아무리 애써도 안 되니 다들 달고나 장사에게로 옮겨갔다.
바다도 없는 충청도에서 올라와 인천에 바다 구경하러 기차를 타고 인천역에 도착했다. 부둣가에 내리니 비린내가 속을 역겹게 한다. 잠시 수산시장을 구경하려니 참을 수가 없어서 아침 먹고 온 것을 그대로 다 토해냈다. 자유공원에 가서 맥아더 동상을 보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다시 저녁이 되어서야 서울역에 돌아왔다.
때마침 생명의 아버지는 서울에 사시는 둘째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여 동숭동 큰집에서 하루 재워 보내라고 부탁하셨나보다. 사촌형에게 관용 지프차와 운전수를 내주시어 생명이를 집으로 데려오라고 하셨나보다. 지프차를 처음 타보는 데 부드럽게 달리는 승용차가 너무 좋았다. 종로 5가를 지나가는 데 마침 전차가 빗겨 지나간다. 캄캄한 하늘에 전차 위 접속키트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마치 번갯불처럼 불똥이 튀기는 모습에 정신을 팔았다.
큰집은 현관에 조그만 잔디밭이 있고 거실 입구에는 작은 온실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큰아버지는 잔디위에서 골프 피칭연습을 하시는데 탁탁 튀기는 하얀 골프공이 너무 신기했다. 생명이도 출세하면 푸른 잔디밭에서 꼭 골프를 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였다.
생명은 시험을 쳐서 들어가는 정주중학교에 지원하였다. 그 당시 합격자는 지역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발표하였었다. 합격자 발표하는 날 저녁 라디오에서는 합격자 발표가 시작되었다. 온 식구가 숨을 죽이고 라디오에 귀를 귀 울이고 있었다. 1, 2, 3등을 다투던 정운은 212번 동규는 324번 생명은 512번이었다.
“지금부터 정주중학교 합격자를 발표하겠습니다. 2번, 5번, 11번, .... 210번, 217번.. 아이 쿠야 정운이 는 떨어 졌네 ... 322번 325번... 동규도 떨어 졌네. 생명은 초조하다. 아버지도 초조하시다. 아버지는 생명에게 말한다. ”너 정주중학교 떨어지면 뭐할래?“ ”아빠하고 방앗간이나 하지?“ 잠시 적막이 흐른다. ..509번, 512번 ... 드디어 합격한 것이다. 환호소리가 동내가 떠나갈 듯했다.
이튿날 연선생님은 정주상업학교로 전근을 가셨다. 사실 이미 발령은 났으나 책임이 있어 임지로 못가고 계셨었다. 정주중학교입학은 곧 성공을 보장받는 일이라 생명은 첫해에 바로 들어가고 정운은 재수해서 그리고 동규는 삼수를 해서 입학했다.
도학무국장이시며 생명의 큰 아버지인 이국장은 정주중학교 교장 정주 농고 교장 등을 거쳐 학무과장 그리고 학무국장이 되셨다. 일본 강점기에 관리들이 쓰던 일본식 관사에 사셨는데 생명의 둘째형은 그 집의 문간방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며 비서노릇을 했다. 각 학교 교장선생들은 둘째형의 방 창문을 노크해서 국장님의 기분이 좋으시냐고 엄지를 올려 수신호를 하면 좋으면 엄지를 같이 올리고 기분이 않 좋으신 것 같으면 엄지를 아래로 하여 돌려보내곤 했다. 국장님이 워낙 점잖으시고 술을 않 좋아하시고 청렴하셔서 명절에 교장 선생님들이 와이셔츠 한 장 정도를 선물하는 것은 받으셨지만 더 이상은 절대 받지를 않으셨다. 어느 추석 1주일 전 시골의 농업학교 교장선생님이 농사를 지은 것이라며 쌀을 두가마니 부쳐왔다. 학무국장님이 저녁에 퇴근하셔서 말씀 드리셨더니 당장에 내일 기차 편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그래서 둘째형은 리어카 꾼을 불러 정주역에 가서 부쳐 돌려주었다.
그 추석 무렵 큰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서울의 전매청 생산국장을 하시는 둘째 큰집에 심부를을 갔다. 중앙부처 국장은 추석 때 무슨 선물이 들어오나 보니 일제 니비코 라디오가 선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때 니비코 라디오는 쌀로 14가마니였다. 그러니 중앙 국장과 지방 국장은 하늘과 땅차이로 격이 달랐다. 학무국장은 1966년 가을, 처음 생기는 교육감에 출마 준비를 하시다가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정주중학교는 워낙 명문학교라 한 학년 사이에도 명령에 복종해야하는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생명은 학교에서도 지도자로 뽑히어 3학년 때 중대장을 하여 같은 학년을 통솔하며 1학년인 동규는 지나가는 생명을 보고 “생명아 나 여기 있어 하며 아는 척을 하곤 했다.
생명은 1학년에 입학하자 큰 형님 댁에서 중 고등학교를, 누님 들 댁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때만 어머님이 차려주는 밥을 떳떳하게 먹었을 뿐 이때부터 군대갔다오고 눈칫밥을 결혼하여 부인에게 떳떳하게 얻어먹기 전까지 18년 동안을 눈칫밥만 먹었다. 그러니 늘 학교에서는 향수병에 시달리고 집에 와서는 밥 먹으면 책상, 책상에서 내려오면 밥상이었다. 그래서 조카들은 어려서 삼촌 외삼촌이 두 상을 벗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생물선생님이신 이종기 선생님은 친구 김조한과 2학년2반 반장인 이새명을 정주중학교 생물실험실로 나오라고 하신다. 방학동안 가을에 있을 전국과학전시회에 출품할 식물의 엽록소를 추출한 식품을 만들겠다고 실험에 매일 참가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아카시아 잎을 모아다 끓여 추출하고 고형성분으로 만들고 젤리로 만드는 일을 1달간 참여했다. 결과가 좋지 않아 전시회는 나가보지도 못하고 다음해에 다시하기로 하고 말았다.
구한말 생명의 할아버지는 일찍이 개화를 하셔서 아들들 농업학교에 보내시었다. 큰 아들은 학교 교사로부터 시작하여 도학무국장급 까지 출세하고 둘째 아들은 말단 공무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중앙정부의 전매청 생산국장을 지냈으며 막내 아들은 만주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촉망받는 군인이었는데 한국 전쟁 중에 전사하셨다. 생명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위장병으로 갖은 고생을 하느라 학업을 포기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시골서 살았다. 생명의 어머니는 가난하여 초등학교도 못 나온 부인과 결혼하여 집안 대소사, 제사, 명절 그리고 농사에 늘 고생하면서도 잘난 큰어머님들에게 부모님을 잘 못 모신다. 요리를 못 한다. 머리가 나쁘다며 혼나며 천덕꾸러기로 무시를 당하며 할머님에게 호되게시집살이를 하셨다. 하지만 생명의 아버지는 동네 이장 노인회 등의 일을 어머니는 교회 집사 권사 등의 일을 하며 많은 봉사활동을 하시며 살았다.
생명의 어머니는 무속신앙을 믿어 초하루 날에는 떡을 하여 소 우리, 화장실, 장독 등에 담아 두고 정안수를 떠다 놓고 치성을 다하였다. 어느 날인가는 작은 딸이 병약하여 늘 아프다고 하니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기도 하였다. 어느 날 작은 딸이 집안에서 안보이자 찾아 나섰더니 교회에 갔다고 한다. 깜깜한 밤에 교회 창문으로 딸을 찾고 있는데 셋째 아들 친구가 뒤에서 반짝 들더니 교회 한 가운데 안아다 놓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없이 목사님 설교를 듣게 되고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의 설득으로 교회를 나가게 된다. 그후로 늘 성경읽기 찬송가 부르기로 열심히 교회에 나가 집사 권사직까지 받게 된다. 어머니는 아는 것이 교회밖에 없었다. 집에 교인들을 불러 심방을 하고 자식들이 용돈을 주시면 모두 교회에 갖다 바치는 것이 가장 즐거움이었다.
생명의 아버지는 힘든 농사일과 방앗간 일을 하시며 능 생각이 공부를 안 하여 출새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그래서 자식들은 절대 도시에서 거지가 될망정 시골서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된다며 시골 땅을 팔아서 라도 공부를 시켰다. 생명의 형들도 머리가 좋아 형들은 명문 대학을 나와 약사 공무원 등을 하며 서울로 올라왔다.
그래서 막내인 생명은 나이가 드신 부모님과 함께 지내느라 집안 농사일을 다 도와드리고 심지어 어머님의 부엌일을 다 도와 드리니 김장 담구는 일도 요리하는 일도 다 현장에서 배웠다.
생명은 운동을 잘하여 토성초등학교 때는 육상선수로 달리기 투포환을 잘 했고, 정주중학교에서 배구 선수를 했다. 이어 정주고등학교에 진학하여서도 배구선수를 했다. 정주고등학교의 배구팀은 전국체전에 도 대표 팀으로 뽑히는 유명한 팀이었다. 고1때는 후보 선수이지만 여름 방학 중 훈련에 참가하라고 하는데 빠졌다. 개학 후 고3선배가 체육실로 부르더니 너는 30일간 훈련에 빠졌으니 빠따 30대를 맞고 빠지란다. 그래서 30대를 야구 방망이로 맞고 빠졌다. 그런데 2학년이 되니 정규 멤버가 모자란다고 다시 나오란다. 2학년 담임 오선생은 생명의 큰형과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래서 생명은 큰형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두 분이서 1달만 그것도 수업이 다 끝난후 연습해서 전국체전만 나가면 끝내기로 하고 훈련에 참가하였다.
고3이 되어 이제껏 선수생활을 하느라 공부를 열심히 못했으니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겠다고 정주독서실에서 저녁을 먹고 공부하고 자고 아침에 큰 형님 댁에 와서 아침 먹고 등교를 하였다. 고3이 되자 한국 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하셨다가 복부 관통상을 입으신 군사훈련교육을 맡았던 황교관이 자기네 집으로 오란다. 그래서 2월 어느 일요일 집으로 찾아갔더니 매운탕을 끓여 놓으시고 따끈한 대포를 한잔 따라 주시며 한잔하란다. 잘 못한다고 하자 황교관은 “이놈아 남자가 술도 좀 할 줄 알아야지!” 하며 술을 강권하였다. 생명은 대포 한 잔을 마시고 얼굴이 시 빨개져 얼굴을 못 들고 있었다. 황교관은 이 술은 너희 반 전 아무개가 연대장을 하겠다고 들고 온 뇌물 이라며 자기는 그 친구가 맘에 안 든다고 하신다. 너는 사격도 최고점을 맞고 교련 점수도 최고고 이제까지 간부를 계속 해왔으니 네가 연대장을 하라고 하신다. 생명은 이제껏 배구 선수하느라 공부가 모자라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도 생각해보라고 하신다. 그래서 그 날 밤 생명은 절대로 공부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뜨리면 안 되기 때문에 편지지를 사서 장장 10장에 걸쳐 연대장을 할 수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이 써서 이튿날 아침 학교 정문에 서서 학생지도를 하는 황 교관에게 그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그 이후로 황교관은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