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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ㆍ 버나데트 맥도널드(Bernadette McDonald)
옮긴이 ㆍ 송은희
펴낸곳 ㆍ 하루재클럽
분 야 ㆍ 등산 > 등반가
펴낸날 ㆍ 2016년 9월 20일
판 형 ㆍ 125×205 양장본 / 쪽수 : 528쪽
가 격 ㆍ 38,000
ISBN 978-89-967455-5-6 03900
| 책 소개
히말라야의 영원한 등반 기록가 엘리자베스 홀리!
불굴의 여성 엘리자베스 홀리의 생애와 업적은 지난 40년간 히말라야 등반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엘리자베스 홀리의 생애를 세심하게 연구한 버나데트 맥도널드는 흡입력 있는 글과 능수능란한 세부묘사로 네팔 왕국에서 비범한 삶을 산 홀리의 이야기와 세계 최고 산악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시킨다.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의 에베레스트 초등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히말라야 등반의 방대한 역사를 알고 있는 엘리자베스 홀리는 모든 유명 산악인들과의 만남을 토대로 정보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을 만들었다. 엘리자베스 홀리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이 책은 모든 히말라야 등반가들의 필독서다.
| 저자 소개
저자인 버나데트 맥도널드는 지난 20년간 캐나다 ‘밴프 센터’에서 산악문화 부문 부위원장을 지내며 ‘밴프 국제 산악영화제’를 이끌어온 세계 산악계의 유명 인사이자, 10권의 산악도서를 저술한 작가이다. 그녀는 엘리자베스 홀리의 삶을 다룬 이 책으로 작가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했고, 폴란드의 히말라야 황금세대를 다룬 『Freedom Climbers』로 보드먼-태스커 상과 밴프 그랑프리 등 6개의 상을 휩쓸었다. 그녀는 보드먼-태스커 상(영국), 밴프 그랑프리(캐나다), 미국 알파인 클럽 산악문학상(미국), 케쿠 나오로지 산악문학상(인도, 3회), ITAS 상(이탈리아) 등 세계 각국으로부터 많은 상을 수상했다. 현재 그녀는 폴란드등산연합회, 히말라얀 클럽, 한국산서회 명예회원이다. 대표적인 저서로 《Freedom Climbers (보드먼-태스커 상, 밴프 그랑프리 수상작, 9개국에서 출간)》, 《Alpine Warriors (2015년 밴프 산악역사 상 수상작)》, 《보이텍 쿠르티카》 등이 있다.
| 목차
감사의 말씀
서문
제1장 수수께끼 같은 사람
제2장 백과사전 마인드
제3장 홀리의 성장 배경
제4장 『포춘』 시절
제5장 아시아로 가는 길
제6장 네팔이 손짓하다
제7장 새로운 삶
제8장 등반 기초 배우기
제9장 평생 친구 힐러리
제10장 과거와의 단절
제11장 위대한 성취
제12장 등정 경쟁
제13장 많은 주장, 많은 야심
제14장 걸어 다니는 문서 파일
제15장 기록가인가, 역사가인가?
제16장 목표 변경
제17장 에베레스트의 여왕
제18장 여기는 네팔
에필로그
참고문헌
찾아보기
| 책 속으로
홀리의 성장 배경
오랫동안 치열하게 공부를 끝마친 홀리는 이제 익숙한 미시간대학을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녀는 만약 박사과정을 밟더라도 미시간대학에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무엇보다 지쳤고, 휴식이 필요했다.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는 도싯이 좋았지만,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홀리는 실천가라서 행동 계획을 갖고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할 일이 없으면 불안을 느꼈다.---p.97
포춘 시절
당시 『포춘』은 업무 분담 체계가 분명했다. 자료 조사원은 여성이고, 글을 작성하는 기자는 모두 남성이었다. 그 틀을 깰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홀리가 당시 글을 쓰는 기자가 되려고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옛 동료에 따르면, 홀리는 ‘똑똑하고 문학적’이었으나, 상상력이 남달리 풍부하지는 않았다. 홀리는 자료 조사원이라는 위치를 십분 활용해 열심히 일했다. 홀로 여행하며 미국은 물론 캐나다, 브라질에서도 자료 조사 작업을 했고, 기자가 원고를 작성해 보내오면 문장마다 검토, 재검토, 교차검토 했다는 표시로 점을 찍어서 보냈다.---p.103
네팔이 손짓하다
홀리가 네팔에 온 것은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라 직업적인 목적도 있었다. 인도를 떠나기 직전, 그녀는 네팔이 역사상 최초의 총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인도 뉴델리의 ‘타임사’ 사무소에 들러 카트만두 통신원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 보았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자, 그녀는 두 기자와 함께 네팔로 넘어왔다. 한 명은 아주 유능한 『뉴욕 타임스』 통신원 엘리 아벨이었고, 또 한 명은 점잖고 위트가 넘치는 『런던 옵저버』의 통신원 시릴 둔Cyril Dunn이었다. 셋은 한 팀으로 움직였고, 네팔의 지도자급 정치인들과 인터뷰했다. 그녀는 경험 많은 기자들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 네팔은 마헨드라Mahendra 국왕이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려는,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시기에 진입해 있었다.---p.151
새로운 삶
홀리는 무용담이 넘쳐나는 등산 세계에 점점 이끌렸으나, 네팔의 정치 기사를 쓰느라 바빴다. 10월 『타임』은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인 네팔 국왕이 중화인민공화국 당서기와 서명한 국경조약의 내용 — 그 안에는 ‘에베레스트 소유권’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 을 알아내 기사를 써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카트만두에 있는 사람 어느 누구도 그 내용을 알지 못해, 홀리는 인맥을 동원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네팔에서 보이는 곳, 즉 남쪽은 에베레스트의 네팔 지명인 사가르마타로 남기고, 중국의 티베트 쪽에서 보이는 곳은 티베트 이름인 초모룽마로 남기기로 한다.” 네팔 정부 고위직과 맺은 인맥 덕분에 이 정보를 얻은 홀리는 마감일에 맞춰 기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p.183
등반 기초 배우기
1970년대와 1980년대 『아메리칸 알파인 저널』 필진에 먼저 이름을 올린 사람은 체니였다. 이후에는 홀리의 이름이 함께 올랐고, 1980년대 후반 체니가 사망한 이후부터는 홀리의 이름만 올랐다. 체니의 죽음 직후 신문 및 잡지사와 원고 계약을 맺은 홀리는 앞으로는 다른 스타일로 기사를 쓰겠다고 강조했다. 다르게 쓴다는 말은 바로 편집 방향을 달리 하겠다는 뜻이었다. 체니는 종종 자신의 견해를 밝혔지만, 홀리는 기사에서 사견을 드러내는 것은 부적절하기 때문에 논평 없이 시즌별 등반에 대한 설명을 포함해 원정대와 원정대장 목록, 원정대의 기본 정보, 사망자 목록만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가끔 행간에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가급적 개인적인 의견의 노출은 피했다. 홀리는 자신이 산악인도 아니고, 몇몇 사람들의 생각처럼 폭넓은 관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논평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식의 기사는 산악인들 사이에서 논쟁을 촉발했고 논란거리가 됐다.---p.218~219
과거와의 단절
1970년대 후반부터 히말라야에서도 새로운 양식의 등로주의로 무장한 경험 많은 소규모 산악인들이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들은 미등봉뿐만 아니라 이미 등정된 산이라도 기존 루트가 아닌 신루트로 등반하는, 상당히 어려운 목표에 도전했다. 이것은 에베레스트 노멀 루트에서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 대규모의 극지법 등반이 변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였다. 이제 산악인들 ― 영국과 미국, 유고슬라비아, 일본 출신 ― 은 히말라야에 새롭고 가볍고 아름다운 등반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경험 많은 일부 산악인들은 네팔에 살다시피 하면서 여러 곳을 등반하러 다녔고, 무시무시한 히말라야의 벽 등반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홀리는 이들 많은 산악인들과 친숙한 사이가 됐고, 그중 몇 명은 친구가 됐다.---p.264~265
위대한 성취
1980년대 초, 네팔에서는 동계등반과 거벽등반, 에베레스트 단독등반 등 새롭고 흥미진진한 발전과 주목할 만한 성과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몇몇 뛰어난 인물들이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는데, 홀리는 이들 덕분에 일하는 보람을 느꼈다. 그중에는 폴란드의 안드레이 자바다도 포함돼 있었다. 큰 키에 정중하고 매력적인 이 사나이가 이끈 폴란드 원정대는 1973년 7,492미터의 노샤크Noshaq를 올라 겨울에 7천 미터 이상을 오른 최초의 기록을 세웠고, 1974년에는 로체에서 8,250미터까지 오르는 쾌거를 올렸다. 자바다는 이 두 차례의 동계등반에서 모두 선등으로 나섰다. 대단한 혁신가였던 그는 처음으로 네팔 정부에 동계등반을 허용해 줄 것을 청원했고, 결국 네팔 관광성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1979~1980년 겨울에 에베레스트를 개방했다.---p.273~274
등정 경쟁
등정 경쟁이 치열해지자 홀리는 상당한 관심을 갖고 이들을 지켜봤다. 1986년 1월 쿠쿠츠카와 크슈토프 비엘리츠키는 무산소로, 그것도 겨울에 칸첸중가를 오르는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쿠쿠츠카에게는 10번째, 비엘리츠키에게는 4번째 8천 미터급 고봉이었다.
쿠르트 딤베르거가 홀리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좋은 이미지는 ‘등정 경쟁’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 『공기의 영혼Spirits of the Air』에서 “카트만두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며, 히말라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정통한 이 매력적인 숙녀는 몇 년 동안 ‘등정 경쟁’을 공들여 기록하고 있다. … 홀리는 8천 미터급 고봉을 오른 모든 산악인을 순위표를 만들어 기록한다. 이 순위표 덕분에 해마다 사람들은 이들이 등반을 어떻게 했는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이 산악인은 2개, 그러는 동안 저 산악인은 3개, 또 다른 사람은 4개 … 그리고 5개를 등정한 사람이 2명….”이라고 언급했다.---p.302~303
많은 주장, 많은 야심
홀리는 그때 혹시 토모 체센이 자신의 주장을 헷갈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주 분명했다. 자신이 정상 바로 밑에 있었는데, 바람이 불고 장소가 좁아 정상에 서는 것이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팔을 쭉 뻗으면 정상에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면서 등정을 주장했다. 홀리는 당시의 인터뷰를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한 말을 믿었죠. 그는 자누에도 갔었잖아요? 내 사무실에 들렀는데, 등반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했어요. 준비가 아주 잘돼 있었습니다. 루트 개념도를 보여 주며 어느 곳을 어떻게 올랐는지 등반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가 자누와 비교해 달라고 하자, 그는 “기술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로체가 자누보다 훨씬 크고 넓어서 제가 아주 작아진 느낌이 들었죠.”라고 답했어요. 그런데 그의 거짓이 들통나고 말았죠. 그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어 안타깝지만, 이제는 믿지 않습니다.”---p.346~347
걸어 다니는 문서 파일
미국인 콘래드 앵커는 러시아 최고의 산악인 부크레예프와 홀리 사이에 있었던 재미난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부크레예프도 에드 비에스터스와 에라르 로레탕처럼 시샤팡마를 두 번이나 올랐다. 다시 돌아가서 진짜 정상을 밟고 오라는 홀리의 닦달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부크레예프는 앵커에게 “다시 가야 해. 홀리가 그러는데, 정상에 오르지 못했대.”라며 비밀을 털어놓았다.
홀리의 1998년 봄 시즌 등반 보고서는 좌절과 실망감으로 가득했다. 최고의 산악인들이 산에서 죽었고, 일부는 성공과 기록을 부풀려 말했다. 홀리는 이 시즌을 “거짓 등정 주장과 등정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 남봉, 자신의 힘보다 더 큰 야망으로 인한 에베레스트와 초오유에서의 사망사고로 엉망이 된 시즌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술이 부족한 산악인들이었다.”라고 평가했다.---p.399
기록가인가, 역사가인가?
홀리는 보통 자신을 ‘역사가’라고 칭하지 않았고, ‘기록가’라는 표현을 더 좋아했다. 등반 경험이 없어 진정한 역사가의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느 쪽일까? 기록가인가, 역사가인가? 등반 경험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등산 역사가가 될 수 없는 걸까? 아니면, 그러한 역할에 요구되는 책임감 때문에 역사가라는 소명의식을 꺼려 하는 걸까?---p.413
많은 산악인들은 홀리가 등반 기록가로서 최고의 위치에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많은 히말라야 등반 자료를 모았다. 카트만두를 거쳐 가는 수백 명의 산악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홀리는 놀라울 정도로 운동 능력이 뛰어난 사람, 쭈글쭈글한 늙은이, 젊고 유능한 산악인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났다. 등반 전 활기 넘치고 열정적일 때도,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지쳐서 카트만두를 떠날 때도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p.422
목표 변경
경제적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산을 오르는 상업 등반대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홀리는 에베레스트 등반에 관한 기사를 쓰고 기록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중 많은 경우가 노멀 루트를 반복해서 오르고 낮은 고도에서도 산소를 사용하는 등 거의 다 비슷한 등반이었기 때문에 홀리는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녀가 관심을 가질 만한 등반을 하러 히말라야에 오는 산악인들도 여전히 있었다.---p.429
홀리는 시즌별 등반 보고서에 이 두 등반에 대한 의견 대신 단순한 사실만 써 놓았다. 그녀는 어느 쪽이 더 중요한 등반인지 평가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그럴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계속 자신을 역사가가 아닌 기록가라고 주장하면서, 그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가는 사실 이면을 파고 들어가 맥락을 파악한 다음, 그 맥락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홀리는 이러한 입장을 유지하면서, 인터뷰 중 많은 내용을 추려서 계속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그녀의 생각에 따르면, 어떤 등반이 더 의미 있는지는 읽는 사람이 판단해야 할 몫이다.---p.447~448
에베레스트의 여왕
로스켈리는 홀리가 ‘세계 최고의 산악인들’과 일하면서 염증을 느꼈을 것이라 추정하며, 홀리가 관심을 기울였던 최고 산악인들은 주목을 받는 사람들로, 일부는 상당히 이기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홀리의 냉소가 유명인사들에게 개인적으로 실망한 탓이 아닐까 의심하며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했다. “오랫동안 자신이 아주 중요한 인물인 줄 아는 스타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분수를 알게 해주는 일을 해낸 홀리는 존경 받아 마땅합니다.” 그는 홀리가 모든 산악인들보다 등반에 대해 10배는 더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홀리는 우리 산악인들의 우상입니다!”---p.459
여기는 네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현재는 ‘등반 커뮤니티’가 ‘존재하며’, 그 중심에 홀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카트만두에서는…. 데이비드 브리셔스는 엘리자베스 홀리 없는 카트만두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보리스가 죽었을 때와 지미 로버츠가 떠났을 때 카트만두 분위기가 얼마나 변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홀리는 이 모든 과정을 견뎌 냈다고 힘주어 말했다. “관광성이 변하고, 비행기 조종사들이 바뀌고, 트레킹 회사가 1개에서 150개로 늘어났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힘을 가진 단 한 명이 바로 홀리였어요.” 홀리는 라스트 모히칸이다. 마지막 사람까지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데도, 그녀는 여기에 여전히 혼자 남아 있다.---p.477~478
| 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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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홀리의 흥미로운 삶!
이 책은 히말라야의 영원한 등반 기록가 엘리자베스 홀리의 삶을 담은 전기이다. 엘리자베스 홀리는 1946년 이국적이고 외진 곳 네팔에 정착했다. 이후 카트만두로 몰려든 산악인, 순례자, 정치인들 소식을 <로이터>와 <타임사> 같은 외국 언론사를 통해 세계에 알리는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홀리는 산을 오르거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방문한 적은 없지만, 네팔 히말라야의 가장 중요한 기록 책임자이자 영감을 주는 최고 권위자가 됐다. 그리고 에드먼드 힐러리와 라인홀드 메스너, 크리스 보닝턴, 토마스 후마르, 에드 비에스터스 같은 유명 산악인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홀리는 등반 경험이 없어 진정한 역사가의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로 자신을 ‘역사가’가 아닌 ‘기록가’로 표현하는 걸 더 좋아했지만, 많은 산악인들은 홀리가 등반 기록가로서 최고의 위치에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것은 홀 리가 카트만두를 거쳐 가는 수백 명의 산악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많은 히말라야 등반 자료를 모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홀리는 히말라야 고산에 흥미를 느끼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특별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 산악인 리뷰
한 불굴의 여성의 생애를 세심하게 연구하여 전기를 작성한 버나데트 맥도널드에게 축하를 보낸다. 엘리자베스 홀리의 생애와 업적은 지난 40년간 히말라야 등반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흡입력 있는 글과 능수능란한 세부묘사는 네팔 왕국에서 평범치 않은 삶을 산 홀리의 이야기와 세계 최고의 산악인의 삶을 생생하게 복원시킨다.
― 알린 블룸
이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멋지게 잘 쓰여진 이야기다. 홀리 여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이 훌륭한 여성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이 책은 모든 히말라야 등반가들의 필독서다.
― 타시 텐징(텐징 노르가이의 손자)
힐러리와 텐징의 에베레스트 초등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히말라야 등반의 모든 역사를 알고 있는 한 사람, 그가 바로 엘리자베스 홀리다. 모든 유명 산악인과 만남을 토대로 그녀는 정보로 이뤄진 산을 만들었다. 마침내 우리는 멋진 이야기와 베일에 싸인 홀리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됐다.
― 라인홀드 메스너
엘리자베스 홀리보다 더 폭넓은 히말라야 등산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모든 유명 산악인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다. 흥미진진한 시절에 멋진 장소에서 뛰어난 사람들과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라 더욱 특별한 그녀의 삶이 책으로 엮어져 기쁘다. 홀리는 아주 특별하고 뛰어난 존재로 오래 오래 기억되길 바란다.
― 에드먼드 힐러리 경
아주 흥미로운 여성의 삶을 담은 훌륭한 전기다. 엘리자베스 홀리의 신비로운 삶의 베일을 들춰내면서, 작가는 히말라야의 등산역사를 엿볼 수 있는 멋진 특강을 들려준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부터 바부 치리, 라인홀드 메스너에 이르기까지 홀리의 45년 카트만두의 삶을 관통하는 수많은 인물들과 함께 흥미롭게 재해석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 존 크라카우어
하루재클럽은 해외 전문산악도서를 등반사(史)·등반가(家)·등반기(記) 시리즈로 엮어 계속 출간합니다.
북한산 하루재에서 인수봉을 바라보며 가졌던 산과 등반에 대한 경외심을 잊지 않는 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첫댓글 기록하면...홀리 여사지요...
하루빨리 받아보길 기대합니다...ㅎ
발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