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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만 해도 하늘에 구멍이 뚥린 것처럼 쏟아지던 폭우가
오늘은 비내리는 걸 하늘이 잊은 것일까?
언제 비가 왔느냐는듯이 맑갛게 개였다.
여름 특유의 뭉게구름마져 먼산위에 간간히 보이면서....
갑자기 발바닥도 간지럽고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아 앉아있질 못하겠다.
인왕산이 궁금해서
또 보따리를 싼다.
얼음물 한병에 미싯가루 한병, 신 김치 조금(막걸리 안주용) 이게 전부다.
물론 막걸리는 가다가 사서 넣으면 될끼고,
오늘은 지난번 처럼 가다가 다기 돌아오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라디오도 챙기고, 우산과 우의는 물론 지갑까지 꼭꼭 챙겼다.
인왕산!!
인왕산 하면 호랑이가 먼저 떠오른다.
우리가 책을 통해서 수없이 읽었던 이야기 아닌가?
조선 500년 역사에 수없이 많은 호랑이가 출몰하여 인명을 살상했으며
심지어는 경복궁 내정과 창덕궁 후원까지 들어와 소란을 피워 조정의 큰
근심거리 이기도 했단다.
그래서 군대까지 동원하여 소탕작전을 벌인 기록까지 남아 있는데,
지금은 그게 씨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인왕산은 해발 338m로 산 전체가 화강암인데 그게 밖으로 노출되어
기암괴석을 이루고 곳곳에 솟아올라있어 예로부터 명산으로 알려져 왔다.
조선 개국초기에는 왕궁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산으로 불렀으나 세종 때
왕조를 수호하는 뜻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金剛神의 이름인 인왕으로 개칭
했다고 한다.
인왕산을 갈려면 #3호선을 타고 경복궁역에서 내려 사직공원으로 해서
올라가야하는데 가깝고 등정 시간도 짧아 간단히 다녀 오기엔 아주 좋은
코스다.
사직공원 입구에서 종로 도서관을 우측으로 끼고 빙돌아 올라가니 국궁장이
나온다.
나는 또 궁금증이 발동해서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들어 가 본다.
7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두분과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세분이
열심히 활을 쏘고 있다.
힘이 부치는지 시위를 당기는 할아버지의 팔이 벌벌 떨리는 게 보인다.
저러다가 화살이 과녁까지나 날아 갈 수 있을까하는 괜한 걱정도 해보고,
그래도 시위를 떠난 화살은 어김없이 과녁을 향해 날아는 가는데 떨어지는
지점은
과녁이 아니다.
상하좌우 아주 자유를 만끽하며 떨어진다.
그러다가 가끔은 과녁에 맞기도 하는데 그건 대부분이 아주머니들이 쏜거다.
백발삼사십중이나 될까?
역시 우리나라는 여성들이 강한 것 같다.
엊그제 끝난 LPGA US Open에서도 우리의 예쁜 딸 지은희가 내노라 하는
코쟁이들을 다 제치고 우승컵을 차지했다(상금과 보너스가 무려 11억)
마지막날 생중계를 보던 사람들은 마지막 홀에서 버디 잡는 걸 보고 환성을
질렀으리라.
어디 그것 뿐인가?
LPGA무대에서 박세리 이후 우리의 딸들이 세계를 제패한 게 어디 한두번인가?
양궁은 아예 우리 낭자들의 무대요.
탁구, 배드민턴, 핸드볼, 역도, 뭐 못하는 게 없다.
또 김연아는 어떤가?
세계에서 우리나라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길래 그럴 수
있을까?
우리 주변국만 비교해보자
중국(13억)과는 1/33 즉 3%에, 일본(1억2천)과는 1/3 즉 30% 정도 밖에
안된다.
이런 숫자로 그들을 이긴다는 건 산술적으로는 도져히 불가능하다.
이건 완전히 氣로 똘똘 뭉쳤다는 거다.
우리여성 동무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이야기 본질이 또 다른곳으로 흘러버렸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내가 보고 있는게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한 할아버지는 나를 힐끔힐끔 보더니 활을 놓고 앉아서 땀을 훔치는 시늉을
한다.
나도 보기가 민망해서 더 이상 보질 못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국궁장에서,
저 멀리 뒤로 과녁이 조그맣게 보인다.
과녁이 생각보다는 멀다. 100미터는 족히 될듯.
그 바로 뒤의 희미하게 보이는 건물(뽀쭉탑이 있는)이 서울 경찰청이다.
사진 한장 찍는 것도 너무 어렵다.
폰카메라로 찍으니 잘나오지도 않는데다가 찍는 사람들이 대개 초보자들이다.
배경을 중심으로 해야 될 걸 인물 중심으로 해서 뒷 배경이 다 가려지고
지금 이 사진도 그렇다. 주 대상이 과녁인데 인물이 그걸 가려버렸으니...
물론 찍기 전에 어떻게 어떻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경험상 잘 안되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 했으리라.
그래도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고마운데, 화를 낼 수는 더욱 없지 않은가?
집에와서 확대해 보면 쓸 수있는게 20%나 될까?
무엇보다도 좋은 경치를 놓치는게 너무 아쉽다.
돌아 나오면서 등산로의 이정표를 확인하고,
이제 등산이 시작 된다.
인왕산 등산로 이정표
여기도 다른 등산로 못지 않게 산책 시설을 잘해 놓았다.
시내에 가까워 많은 시민들이 산보를 하기 때문이리라.
중간중간 오르는 곳곳에 운동 기구도 설치 해놓다.
올라가는 도중에 길을 가로지르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 나온다.
아하!! 이게 인왕산 길이렸다!!!.
아스팔트 길을 왼쪽옆으로 끼고 오솔길을 한참 걸어가니 군 초소가 나온다.
초병이 공사중이라 출입을 금지 한다고 다른 길로 돌아 가란다.
곳곳에 군부대 초소가 있고 출입통제를 많이 한다.
길을 가로 질러서 정상쪽으로 올라 갈려고 보니 석굴암 입구라고 적힌
팻말이 있다.
아~ 잘 되었네 구경이나 하고 가자하고 올라가는데 또 초병이 있다.
석굴암이 여기서 얼마나 올라가야 되냐고 물었더니 10여분을 더 올라가야
된단다.
에라 치우자.
오늘의 목표는 인왕산 정상 아니였던가?
마침 등산객이 한사람 올라오는데 차림새가 초보는 아닌듯 해보여 이 길이
정상길 맞냐고 물었더니 맞단다.
그럼 꽁무니만 쫄쫄 따라가면 되겠구나 하며 열심히 따라갔다.
그런데 그는 내가 첫눈에 본 것처럼 배테랑이었다.
핵핵거리며 열심히 따라가는데도 어느샌가 저 멀리 가버렸다.
어차피 저 양반을 따라가긴 틀렸고,
개울에 물이 맑고 시원해 보이니 땀이나 식히고 가자하곤 개울로 내려 갔다.
그런데,
어라???
이 개울 이름이 만수천이란다.
이런!! 이런!! 약수터 이름도 만수약수터다.
허허 고연지고!!!
만수천을 돌아드니 또 운동기구를 설치 해놓은 작은 운동장이 나온다.
이건 뭐 등산 코스인지 운동장인지 모르겠다.
내가 올라 온 코스만 해도 줄잡아 열곳은 되는 거 같다.
허참 왜 이렇게 많이 해 놓았을까?
이용율이 얼마나 될까?
이 많은 시설이 정말 시민을 위해서 한걸까?
이놈의 의심병이 또 도진다.
이 대목은 대충 넘어가자.
내힘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시민들의 민원이 있어 설치 했다면 할말 없는 것 아닌가?
그기엔 80대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 한분이 열심히 운동을 하고 계신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운동에 열중하는 모습이 안스럽다.
저 할머니도 스러져가는 젊음을 찾고 싶은 아니 찾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유지라도 하고 싶은 욕망에 이런 높은 곳까지 올라와 저렇게 열심히 하리라.
운동장 복판에는 크고 교묘하게 생긴 바위하나가 놓여 있는데,
그 바위뒤에 할머니 나이쯤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한분도 운동을 하고 계신다.
나는 바위위에 걸터 앉아 조끼를 벗어 배낭에 집어 넣고는 그분들이 운동하는
걸 지켜 보았다.
먼훗날의 나를 보는 듯해서.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분들이 하는 행동(짓)이 재미있다.
할아버지는 운동보다는 할머니쪽에 더 관심이 있는 듯 연신 할머니쪽을 훔쳐
보는데,
할머니는 그걸 알면서도 싫지는 않은 듯한 눈치다.
여러가지 상황으로 보아 오늘 처음 만난 사이는 아닌듯 한데,
저 나이에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도 힘에 부칠텐데,
올라오는 가까운 곳에도 운동기구를 설치 해 놓은 곳이 여럿 있었는데 궂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모르긴 해도 이성에 대한 열정으로 힘드는 줄도 모르고 올라왔으리라.
이런걸 노년의 로맨스라고 하던가?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길.
점점 경사가 가팔라지고 숨도 차오르는데,
소나무 사이로 언듯언듯 정상이 보인다.
과연 바위하나는 절경이다.
여기서 그냥가면 나중에 후회 할 것 같아 족적을 남기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등산객이 오지 않는다.
에라 그냥 갈까 아니야 좀만 더 기다려 보자.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갈등을 한다.
10여분을 기다렸더니 젊은 사람이 혼자 올라온다.
왼쪽 뒤에 보이는 둥근 바위가 정상이다.
하늘엔 구름이 오로라 처럼 펼쳐지고,
숨을 몰아 쉬며 얼마인가를 더 올라가니 산성이 나온다.
서울 산성이다.
서울산성을 보니 갑자기 중국의 만리장성이 떠오른다.
중국의 역대 왕조(춘추전국시대부터 기록에 나온다)가 북방의 오랑케(한족
입장에서 보면)들이 가을 추수만 끝나면 말을 타고 내려와 곡식과 재물을
약탈하고 인마를 살상하니,
그 시대의 권력자들에게는 이걸 막는게 최고의 과제 였으리라.,
그 규모도 대단해서 성위는 4필의 말이 동시에 횡대행진이 가능하고(폭 4.5m)
높이는 10여m (안팎이 다르다)에 100m마다 돈대(墩臺)를 만들어 병사들이
드나들고 후퇴 할 땐 방어벽으로 사용 할 수있도록 되어있다.
그 길이는 갈라져 나온 가지까지 모두 합하면 이름 같이 一萬里가 아니라
무려 一萬六千里(6400km)나 된다.
우리나라 두만강 끝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총길이가 3천리라는데 그걸
생각하면 그 길이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참고로 경부고속도로가 427km-1천칠십리다.)
발해만(요동반도 앞 바다)의 산해관에서 시작하여 북경을 거쳐 실크로드
전구간을 북서쪽으로 가로질러 자위관에 이른다.
쌓은 재료는 시기와 구간에 따라 다른데 기와나 돌, 진흙등을 이용했다.
북경 부근에는 대부분을 바깥은 돌로 쌓고 내부는 돌과 기와를 섞어 쌓았다.
그 크고 많은 돌들을 어디서 어떻게 가져왔을까?(또 궁금증이...)
자료에 의하면 그 부근에는 같은 종류의 돌이 없단다.
그렇다면 수십, 수백 키로 떨어진 곳에서 가져왔다는건데,
어휴~ 지금보면 미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이것이 최고의 기술 (하이테크 - High Tech.)이 였으리라.
허긴 그런것들 때문에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가 되었겠지만,
선조들 덕분에 짭짭한 관광 수입으로 후손들이 잘 먹고 잘 산다.
만리장성을 보면서 그 규모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강제노역으로
백성을 동원하여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까
라는 걸 생각했다.
실제로 이에 대한 애환서린 얘기들이 아직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만리장성 얘기는 밤이 새도록 해도 끝날 것 같지 않으니 여기서 줄이고,
우리의 서울산성도 역사가 꽤나 깊다.
(물론 만리장성과는 길이나 규모, 역사적으로도 비교가 안되지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에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삼봉 정도전을
시켜 궁궐과 종묘사직을 건설케 한다.
2년뒤인 1396년부터 수도를 방어, 수호하기 위해 4山 즉 백악(지금의 북악산),
남산, 낙산, 인왕산을 이르는 17km의 성곽을 약 50일에 걸쳐 급조 하였는데
이때 각지방에서 동원한 인력이 무려 11만8천명이란다.
짧은 기간에 급조된 성벽은 돌과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메꾸는 등 그 축성
방법이 매우 조잡하다.(지금도 남산의 동쪽과 인왕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따라서 제2차 공사를 했는데 1차 공사 때 완성하지 못한 부분을 보완하고,
8개의 성문(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숙청문,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덕문)
을 지었는데 지금은 숭례문, 흥인지문, 광희문, 숙정문 4곳만 남아 있다.
그후에도 계속 보완하여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건 1422년 세종 때
란다.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한 성벽은 많은 부분이 무너지고 없어져서 지금은 복원
공사를 하여 옛모습을 되찾고 있다.
산성에 기대어,
성 안쪽에는 성을 따라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오르내리도록 한 것이다.
이게 만리장성과 크게 다른점이다.
만리장성은 성의 폭을 넓게하여 그위를 병사가 말을 타고 다닐 수 있게 했고,
우리 산성은 성안쪽에서만 다닐수 있도록 해놓았다.(윗 사진의 돌계단처럼)
성을 이루고 있는 돌에는 새까맣게 이끼가 낀 것과 방금 돌쟁이(석수)가
쪼아만든 듯 깨끗한 돌이 섞여 쌓여있다.
유실된 부분을 복구하다 보니 그러리라.
그런데 원래 있던 돌은 가믐에 콩나듯 보이고 새로 쌓은 돌이 대부분이다.
위의 사진에서 내가 기대고 있는 부분이 이끼 낀돌이고, 그 윗쪽으로 올라가면서
희게 보이는 부분이 전부 새로 만든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건 수리라기 보다 새로 축조 한다는 게 더 맞을 거 같다.
산성을 끼고 오르면서 이 생각 저 생각 오만가지 잡생각을 다 한다.
조선 태조와 세종시대를 오가며 성을 쌓는 일꾼들을 호령도 해보고,
직접 돌을 지고 저 험난한 길을 오르기도 해보고(허허 과연 저 무거운 걸 지고
일어서긴 했을까?),
축조 설계도 해보고(이건 어쩔 수 없는 엔지니어다 ㅉㅉ...)
올라도 올라도 돌계단은 끝이 없고,
이제나 저제나 하며 힘겹게 오르는데 앞에 이정표가 나타난다.
헉~
정상이 아직도 0.49km(490m)나 남았단다.
(여긴 0.01km 단위까지 표시해주는 섬세한면도 보인다.)
그냥 0.5km라고 해도 건강에 해롭진 않을건데,
산성을 뒤로하고 정상을 가르키는 이정표를 잡고 한컷.
그런데 웬걸?
200미터도 못가서 초소가 나타나고 정상이 보이는게 아닌가?
역시 이정표는 믿을게 못된다고 생각하며 또 돌계단을 올랐다.
초소엔 민간인 복장을 한 초병이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보초를 서고 있다.
여기서 군생활을 한다?
이건 군생활이 아니라 신선과 노는게 아닌가?
예전처럼 공비 걱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고가 많다고 말을 건네고 여기가 정상이냐고 물었더니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뒷쪽을 가르킨다.
어이쿠 오늘 내가 왜이러지?
(정상가는 길이 쌍봉낙타의 등 같아서 여기가 정상인 걸로 착각 했다.)
아직도 한 2~300미터는 더 올라가야 되는데(그렇다면 이정표가 맞는거다)
그래도 그곳은 앞이 탁 트여 북쪽으로는 북한산의 높은 봉우리가 동쪽과
남쪽으로는 시내와 저 멀리 한강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그런데 저 멀리 보이는 저 높은 봉은 무슨 봉일까 궁금한데 초병은 모른단다.
짜식! 매일 눈만 뜨면 보이는 걸 궁금하지도 않나?
난 그게 궁금해서 죽겠는데,
눈을 돌리니 바로 아래쪽에 작고 아름다운 바위 봉우리가 하나 있다.
저건 또 무슨 봉일까?
초병이 그건 기차 바위란다.
뭐여?
저게?
전혀 기차를 닮지 않았는데?
초병 왈 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양이 다르다는데 자기는 잘 모른단다.
아~ 그럴 수 있겠구나.
언젠가는 그 모습을 볼 수 있겠지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자리를 뜬다.
기차바위를 배경으로(이 방향에서 보면 기차를 닮은 형상은 볼 수 없다.)
왼쪽 바로뒤 가까이 있는 게 기차 바위, 오른쪽 멀리 아스라히 보이는 뽀죽한
봉우리가 북한산의 보현봉 이란다(이건 나중에 여러 사람에게 물어 봐서 겨우
알아낸 거다)
저기도 내 반드시, 기필코, 정말로 올라 보리라.
이젠 정상을 가야지.
이 역시 바위로 된 곳인데 그 정상엔 또 초소가 보인다.
전신주 때문에 경관이 자연 스럽지 못하다.
전봇대 오른쪽으로 산끝자락에 조그맣게 초소도 보이고,
기차바위에서 본 인왕산 정상
군사 시설이 많아 사진을 찍는데도 제한이 많다.
찍지마라는 걸 초병 눈을 피하면서 까지 찍을 필요는 없는거고,
정상을 오르는 길은 계단을 만들어 놓아 오르는 게 어렵지 않다.
서울근교의 대표적인 철계단이다.
철계단을 오르니 이번엔 진짜 정상이 나타났다.
정상엔 삼각점이 있고 역시 초소가 있었다.
초병 둘이서 티셔츠를 입고 근무중이다.
나는 그 초병들이 군인인줄 알았는데 전경이란다.
허긴 전경이나 군인이나 뭐가 다를까마는,
인왕산 정상의 바위
산님들이 바위에 올라서서 발아래의 사바세상을 내려다 보고있다.
산 아래에서 보던 바위 모습을 정상에선 볼 수 없고 그냥 바위 일뿐이다.
그 멋진 모습을 정상에선 볼 수없다는게 아쉽지만,
저아래 세상을 내려다 볼 수있다는 것만해도 어딘가?
저 멀리에 청와대와 경복궁이 발아래에 앉아 있다.
여기서 보니 청와대가 경복궁에서 북악산으로 올라가는 줄기에 자리하고
있는데 풍수지리학적으로 보면 소위 말하는 조선왕궁의 맥을 끊는 곳이다.
(이건 풍수지리가가 아니더라도 한눈으로 알 수 있다)
푸른지붕의 청와대가 보인다.
사진 왼쪽엔 청운중학교와 경기상고가 보이고 중앙엔 경복고가 있다.
청와대는 일제시대의 산물로 조선을 통치하던 경무대 자리다.
즉 조선이란 나라를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일본화 하려고 했던 원뿌리였던 곳으로 자리는 명당중에
명당이다.
우리의 모든 것 심지어 말부터 글까지 말살하려고 했던 곳이지 않는가?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제 나라 제 민족을 찾을 것이니.
그럼 말과 글이 얼마나 중요한건가?
좋은 예가 있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 였던 청은 만주족의 누루하치가 세운나라다.
그런데 청이라는 왕조가 무너지면서 만주족들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화려한 과거를 잃어버리고 만주족이란 자부심도,
말도, 글도 다 사라진, 역사책에만 남아있는 비참한 민족이 되어 지금은
저마다의 살길을 찾아 중국대륙을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거지가 되어 가고
있다.
구심점이 없어졌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다시 뭉치기는 정말 어려워졌다.
글도 말도 없는 상태에서 같은 말과 글을 쓰는 한족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중국이 추구하는 한족화가 되버린 것이다.
그런데 조선족은 어떤가?
그들은 학교에서 중국어와 한글을 같이 가르치고 집에서는 아직도 조선말을
쓴다.
주체성을 잃지않고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뒤에는 그래도 국제무대에서 방구 꽤나 뀐다는 한국(Republic Of Korea)이
라는 祖國이 떡 버티고 있어 힘이되곤 있지만,
사실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기업들이 언어가 통하는 조선족을 많이 기용해서
쓰고 있다.
그들은 한국 기업의 중추역할을 하면서 한족 보다 많은 봉급을 받는다.
한족의 몇배는 된다.(물론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만 그렇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잘사는 민족중의 하나가 조선족이다.
만주족에 비해서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모르긴해도 내 눈에는 조선족이란 걸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더라.
이대로만 유지된다면 언젠가는 조선족 자치주(길림성,요녕성,흑룡강성)는
한국땅(?)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꿈도 꿔 본다.
그런데 이꿈도 점점 멀어져 가는 듯하다.
젊은 사람들이 저 마다의 직장(주로 한국기업)을 찾아 고향을 등지기 때문이다.
고향엔 지금의 한국과 마찬가지로 노인네들만 남아있고,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자녀들은 이제 한국말도 한글도 모른다.
그들에게 한글과 말을 가르칠 학교가 없기 때문이다.
또 있어도 학비가 비싸서 감히 엄두도 못낸다.
이 한국인(외국인) 학교는 대개 대도시에 한두개있는데 주로 한국기업의
주재원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학비 때문에 주재원들도 마음대로
보내기 어렵다.
그래서 주재원들도 회사에서 보조해 주는 대기업에 근무하는 사람이 아니면
기러기 아빠가 되어 혼자 생활 하는 이가 많다.
조선족?
그런데 이게 왜 조선족인가?
한국의 법무부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의 통계자료에는 '한국계 중국인'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중국에서 사용하는 조선족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남북을 통틀어 민족명으로서 '한민족'(韓民族)이라는 표현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신분증에도 조선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계 중국인이 아닌 한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Korean people'을 일컫는
용어로 조선족을 사용하기도 한다.
청와대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옆풀떼기 빠졌다.
다시 돌아가서,
입장을 바꿔 반대로 우리가 일본을 점령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입장이 그렇게 다르다.
일본은 한국을 지금의 만주족과 같이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은 만주국이라는 걸 세우고 초대 황제로 청의 마지막 황제 뿌이를 갖다
세운다.
우리가 "마지막 황제 뿌이"란 영화에서 보았던 바로 그것이다.
그리곤 황제부터 일본화 시켰 했다.
그 넓디 넓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지배 할려면 반드시 필요한 절차이리라.
완전히 지배를 한후에는 필요없는 황제는 버릴 것이고(이게 兎死狗烹 아닌가)
이왕 옆으로 빠진김에 좀 더 빠져보자.
중국 자금성에 가면 마지막 황제인 뿌이의 기념관을 별도로 만들어 자료를
전시해 놓았는데 그기엔 뿌이의 여러부인들과 선조들(역대왕들)의 초상과
사진들이 걸려있고,
행사 때 마다 기념으로 찍어 놓은 사진들도 있다.
어릴 때 황제가 되기 전의 사진부터 마지막 주검이 되어 관을 옮기는 과정까지.
황제 자리에 있을 때 찍은 사진은,
항상 맨 앞자리 중앙에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떠~억 폼을 잡고 앉아있다.
그런데 만주국의 황제 자리에 있을 때는 꼭 로봇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다가 중국공산당 정권이 들어서자 평민이 된 황제가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도 있다.
공산당이 들어서고 그 기념으로 간부들과 같이 찍은 걸 보면 공산당 간부들이
중앙을 차지하여 앉아있고 뿌이는 왼쪽 맨 뒷줄 귀퉁이에서 앉지도 못하고 서
있다.
아!!!!
권력의 무상함이여!!!
무정한 세월이여!!!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자.
경복궁 흥례문에서 본 인왕산.
서산이란 이름을 인왕산으로 바꾼 세종도, 옛 아내가 그리워 치마바위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중종도 지금 나 같이 여기서 인왕을 바라 봤겠지?
(이 사진은 나중에 경복궁에서 찍은 것이다)
싸간 미싯가루와 다 녹지 않은 얼음물로 허기진배를 채우고,
(오늘도 이걸로 점심을 떼워야 한다)
배를 채우고 나니 한결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역시 사람은 배가 불러야 여유도 생기나 보다.
예부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았던가?
한숨돌리고 주위를 돌아 보고는 하산을 준비한다.
하산길에 안산을 바라보며 언제인가는 저산도 내발로 밟아 주리라고 다짐한다.
마음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데,
안산
안산에서 출발해서 인왕산을 거쳐 북악산을 가려면 시내를 두번이나 지나야
한다.
난 그게 싫다.
차라리 다음 기회에 하나씩 하나씩 다시 오르는게 낫지.
2~3분쯤 내려오니 오른쪽에 조선초기 때 쌓았음직한 허물어진 옛성이 나타난다.
돌성 역시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나보다.
부서지고 허물어 졌지만 그 웅장한 모습은 화려했던 그 옛날을 말해주는 듯하다.
무너져 내린 옛고성
작은 돌과 흙으로 쌓았는데 조잡한 수준이다.
이걸 보니 갑자기 "황성옛터"라는 노래가 생각 난다.
이것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폐허"라는 공통 분모 때문이리라.
그래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소나무 그늘에 앉아 휫바람으로 한곡조 뽑고,
내려오는 길에 저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산성이 보이고,
그것을 보수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들로 붐빈다.
요즘은 예전과 달라 돌쟁이도 많지 않은데 어떻게 저 긴 성을 다 보수하는지
궁금하다.
또 호기심 증세가 나온다.
저 아래 끝없이 이어지는 산성이 가물가물하게 보인다.
보수현장이 보고싶다.
그 동안 궁금했던 것도 많았고,
그런데 여기도 못들어가게 하니 우짜겠노?
포기해야제잉~
곳곳에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공사중이라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보이고 전봇대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어제까지 내린 비에 개울마다 맑은 물이 졸졸 흐른다.
가끔은 장갑을 벗고 손을 담궈 시원함도 맛보고,
발도 담궈 탁족(濯足)이라도 하고 싶은데 길가라 다른 사람들 눈도 있고...
군부대의 철조망을 돌아 내려오는데 쉬가 마렵다.
자연화장실을 이용해서 나무에 거름도 주고,
하산중에 만난 바위가 형상이 예사롭지 않다.
구멍이 숭숭 뚥렸는데 일부러 사람이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오랜 세월 비바람에
시달려 저렇게 되었으리라.
줌인하여 본 바위
산을 내려오니 또 찌는 듯한 더위가 나를 기다린다.
산을 오를 때 흐르는 땀은 한줄기 산바람이면 깨끗이 씻어 버릴 수있는데,
사바세상의 더위는 에어컨이란 문명의 산물로도 어딘가 찜찜하다.
오래 쐬면 머리까지 아프고,
또 산을 그리워 할 수 밖에....
첫댓글 아~ 나그네님 이제 산사나이가 되어가는것 같네 산행이야기도 재미있고 중국자금성과 만리장성 그리고 인왕산과 청와대 경복궁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요즈음 산에 푹 빠진듯 ...어제는 날씨로 취소 되었지만 여섯명이 기다렸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