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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씨(全氏)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한강의 언덕(전과웅)
병조에서 상고(相考)(주1)하여보니 등직급(登職給)을 이룬 것은 고려공신 태사(太師) 전이갑 의갑 형제가 삼한을 통합하는데 개국입훈(開國立勳)하여 공이 만백성에게 끼치니 이에서 더 장할쏘냐? 공을 갚는 전음(典蔭)이 후손에게 미쳤다. 이갑과 의갑이 기랑(騎郞)(주2)으로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복지겸 등과 더불어 궁예의 난을 당함에 뜻을 같이하여 밀모(密謀)를 정하고 밤에 태조에게 가서 말하기를 삼한이 분열되어 모든 도적이 도처에 일어나니 지금 왕공(王公)께서 크게 꾸짖어서 모든 도적을 멸하고 도읍을 정하여 나라를 세워 몸소 태평성대를 이루어주시기 원합니다. 크게 가뭄이 든 가운데 비구름같이 역할을 하여 주사옵고 어두운 것을 폐하고 맑은 것을 세워서 은나라와 주나라의 일을 행하소서! 하고 청(請)하니 태조가 얼굴빛을 변하여 가로되 ‘어찌 다른 뜻이 있으리오. 내 실로 덕이 없으니 감히 탕무(湯武)의 일을 행하리오.’ 하니 가로되 ‘신민(臣民)이 도탄에 빠졌으니 다 건져 주기를 원하고 하물며 덕망이 공(公)보다 나은 이가 없는데 만약 우리의 뜻을 받아 드리지 않으면 우리들은 죽으려야 죽을 날이 없습니다.’ 하였다. 모든 장수가 부응하여 노적가리위에 있게 하고 말 탄 사람으로 크게 부르짖어 가로되 ‘왕공(王公)이 이미 거사를 하였다.’하니 궁예가 듣고 놀라 달아났다. 왕건 태조가 즉위하여 공신을 책봉하는데 공의 형제를 1등공신으로 책록하였다. 그 후 견훤의 난에 역전(力戰)하다 전사(戰死)하니 태조가 그 공열(功烈)을 아름답게 여겨 이갑의 시호를 ‘충열’이라하고 아우 의갑의 시호를 ‘충강’이라 사(賜)하고 그 자손이 하향(遐鄕)에 멀리 떨어져 살아 비록 잔미하더라도 군력을 면제하고 특(特) 전지(傳旨)를 내려 문무반열(文武班列)에서 재목에 따라 등용할 것을 이조 병조 예조에 계의(啓依)하여 왕이 윤허하니 선왕의 보공(報功)하는 전장(典章)(주3)과 같았다. 을미년에 명하여 선현 자손을 특별 성책(成冊)하는데 이 두 형제의 자손도 적서(嫡庶)를 가리지 말고 전은을 베풀 것이며 봉사자손(奉祠子孫)에겐 각별히 거두어 쓰고, 지자손(枝子孫)과 천한 자라도 군무를 면하라고 하였다. 조선조에 와서 태조 태종 선조 효종대왕 등 모든 임금 때에 전지(傳旨)가 이러하였다. 좌부승지 남훤(주4)이 입계하여 윤허를 얻었다. 선현의 자손이 비록 천역이라도 각기 고장의 관의 혜택을 입어서 어진이를 돌보아 드림이 어떠한고? 이갑 의갑의 자손으로 먼 곳에 떨어져 사는 자에게 명령하여 은전을 베풀어 각도 각 관청에 시행케 하였다. 崇禎(주5)甲申後乙丑全氏承蔭(주6)(168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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受敎文
敎旨下兵曹
兵曹爲相考成給事高麗功臣太師全以甲全義甲兄弟統合三韓開國立勳有功斯民莫盛於此保功之典蔭乃後世以甲義甲始自騎郞與申崇謙庾黔弼裵玄慶卜智謙等當弓裔之亂同懷密謀夜詣太祖之邸曰三韓分裂群盜並起今王大呼遂滅草寇定都立國身致太平大旱之餘望如雲霓廢昏立明請行殷周之事夫太祖作色曰豈有異志予實不德敢行湯武之事乎曰臣民塗炭咸願極濟况德望未有居公之右者若不受而不從吾等所願死無日矣於是諸將扶擁而出坐於積穀之上出令人馳且呼曰王公已擧義矣弓裔聞之驚駭出走太祖卽位詔冊推戴功臣以兩人爲首其後甄萱之亂力戰死之太祖嘉其功烈諡以甲爲忠烈公諡義甲爲忠康公其子孫落在遐鄕雖極殘微勿定保事特蒙敎東西班隨材收用之意亦自吏曹禮曹入啓依允聖敎丁寧先王報功之典章章如是至於乙未沙汰考講之時先賢子孫別件成冊而二公子孫嫡庶並以下入講例而奉祠子孫則各別收用諸枝子孫賤庶亦勿定軍保逮朝鮮太祖大王太宗大王宣祖大王孝宗大王列聖以來奉承傳敎是乎等以次知左副承旨臣南翧入啓依允先賢子孫雖入賤役各自本官得代定頉下以顧尊賢如何以甲義甲子孫落在遐鄕者沙汰考講勿入講例閑丁賤役幷以勿侵之意如委各道各官依此施行事
崇禎甲申後乙丑全氏承蔭(168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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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상고 [ 相考 ] 서로 비교(比較)하여 고찰(考察)함
(주2) 기랑[ 騎郞 ] : 병조의 낭관.
(주3) 전장[ 典章 ]
국가의 제도와 문물. 법식(法式).
[네이버 지식백과] 전장 [典章]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주4) 남훤(南翧)
[관련정보]
[문과]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丙子) 별시(別試) 을과(乙科) 2[探花郞]위(3/11)
[생원시] 인조(仁祖) 8년(163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57위(87/100)
[상세내용]
남훤(南翧)에 대하여
1609년(광해군 1)∼1656년(효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도(伯圖), 호는 창명(滄溟).
증조부는 남호(南琥), 조부는 남이신(南以信)이고, 부친은 감사(監司) 남두첨(南斗瞻)이다. 외조부는 한응인(韓應寅)이고, 처부는 권현(權晛)이다.
1630년(인조 8) 경오식년사마시(庚午式年司馬試)에 생원(生員) 3등으로 합격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별시문과(丙子別試文科)에 을과(乙科) 2등으로 급제하였다. 1641년(인조 19) 정언(正言)이 되고 이듬해 지제교(知製敎), 부수찬(副修撰),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1651년(효종 2)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거쳐 승지(承旨)를 지낸 후 1655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창명집(滄溟集)』이 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國朝人物誌
[출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주5) 숭정[ 崇禎, Chóngzhēn ]
명(明) 제16대 황제 명사종(明思宗) 주유검(朱由檢)의 연호이며 명의 마지막 연호로 1627~1644의 17년간 사용되었다. 숭정 17년(1644) 3월 이자성(李自成)이 베이징을 함락시키자 숭정제는 지금의 베이징 시청구(西城区, 서성구) 경산(景山)인 매산(煤山)에 올라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하며 명은 멸망하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숭정 [崇禎, Chóngzhēn] (중국시사문화사전, 2008.2.20, 도서출판 인포차이나)
(주6) 승음[ 承蔭 ]
공신(功臣)이나 당상관(堂上官) 이상되는 자의 자제로서 문음(門蔭)을 승습(承襲)하는 것을 말하며, 관리 선출을 위해 시행되는 각종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고도 이들은 일정 이상의 관직에 제수되었음. [참고어]음서(蔭敍).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승음 [承蔭]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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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수교등록[各樣受敎謄錄]
시대 조선
성격 상소문, 등록
유형 문헌
수량 1책
소장/전승 규장각 도서
창작/발표 시기 조선 후기
간행/발행처 예조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조선 후기 선현·공신의 후예들의 군역·잡역의 면제요구에 관한 상언(上言)·상소를 왕에게 아뢰어 수교하여 정리한 책이다.
[내용]
조선 후기 예조에서 편찬한 책. 1책. 필사본. 선조 말부터 순조 때까지 수록되어 있으나, 주로 17세기 효종에서 숙종연간에 선현·공신의 후예들이 군역·잡역에 침책(侵責)당한 내용과 군역·잡역의 면제요구가 수록되어 있다.
구체적인 선현·공신은
경순왕
문익점(文益漸)
신숭겸(申崇謙)
장진필(張眞弼)
우탁(禹卓)
박현(朴鉉)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간언신(簡彦信)
전이갑(全以甲)
우현보(禹玄寶)
강민첨(姜民瞻)
이색(李穡)
최충(崔冲)
공자(孔子)
김문기(金文起)
기자(箕子)
안유(安裕)
배현경(裵玄慶)
설총(薛聰)
김원발(金元發)
등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제공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