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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문정희
감자
허허벌판 감자밭에
항아리만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감자를 캐다가 배가 고파서
감자더미에 올라앉아
감자를 혼자 구워먹고 있었다.
멀리서 한 사내가 고라니같이
뛰어왔다.
쫓기며 쫓기며 숨겨 달라고 했다.
여자는 감자 먹던 손으로 급한 김에
아래를 가리켰다.
고란이는 치마 속으로 들어갔다
둘은 큰 항아리가 되었다.
총든 병사가 달려왔다.
여자는 감자 먹던 손으로 급한 김에
먼데를 가리켰다.
병사는 먼데로 사라지고
여자는 앉은 채로 흔들렸다.
산이 뒤뚱거렸다.
감자가 입으로 마구 들어갔다.
감자밭에 불길 치솟았다.
여자는 날마다 뚱뚱해졌다.
두엄만큼 되었다.
집더미만큼 되었다.
드디어 여자는 감자를 낳았다.
천년 동안 줄줄이 낳았다.
우리 지구에는 감자들로 가득해졌다.
닮은 감자들은 서로가 우스워서
맨날 웃었다.
총든 병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갔는가?
감자들은 가끔 생각했다.
찔레, 전예원, 1987
겨울나무 문정희
겨울나무&
열어주소서
눈 속에 슬픈 발을 묻고
저 나무들이 서서 울고 있습니다.
당신의 신(神)의 터전에
바람이 휘몰아치면
삶은 꽃처럼 흔들립니다.
이곳은 어느 곳일까
제가 앉아서
입맞춘 소중한 모습.
이제 저의 두 눈이 멀어도
살이 터져서 닫을 수 없는 뜨거움을……
벗은 나무여, 벗은 나무여,
제 밀물을 소리치게 해주소서.
새떼, 민학사, 1975
고향을 찾아서 2 문정희
고향을 찾아서 2
가을도 아닌데 고향 사람들은
모두 낙엽되어 흩어져 있었다.
다리에 구렁이 같은 힘줄이 솟아
쌀 두 가마 등짐지던 사출이 아저씨도
이빨로 소주병을 까던 기훈이 오빠도
엉댕이가 맷돌 같던 쌀장수 화순댁도
모두 어김없이 낙엽이 되었다.
키다리 선출이 칠푼이 알밤이조차도
모두 낙엽이 되었다.
수북한 낙엽 속에서 용케
송장 메뚜기처럼
살아남은 이복 언니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날보고 그 자리에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
마른 갈비뼈 사이로
쉬잇쉬잇 해수병이 드나드는
목쉰 울음 속에
그녀는 내 이름 부르지 않고
30년 전에 죽은
울아버지 부르며 통곡했다.
내 슬픔 당당하게 뺏어들고
땅을 치며 먼저 울어버렸다.
나는 슬픔조차 빼앗겨
타관 사람처럼
그냥 서 있기만 했다.
찔레, 전예원, 1987
곡비 문정희
곡비(哭婢)&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엄마는
곡(哭)을 팔고 다니는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먹고 살았다.
그네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먹으며
까무러칠 듯 울어대는 곡(哭) 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
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일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옥례엄마 머리 위에
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의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
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찔레, 전예원, 1987
기다리던 답장 문정희
기다리던 답장
젊은날엔
카키색 군복을 입고
양구나 포천 어느 고지에서
불침번을 서던
용감하고 씩씩한 군인 아저씨
여학교 시절, 내가 보낸 위문편지에
가슴만 설레이다가
반백이 된 오늘에야
비로소 답장 하나 보내왔어요.
40여년 동안 윤내어 닦던 군화
날카롭게 갈던 무기로
현해탄이나 압록강 지키지 못하고
한부모를 가진
우리가 우리 가슴 겨냥했던 것
그것이 부끄럽다고 고백해왔어요.
그것이 기막히다고 고백해왔어요.
찔레, 전예원, 1987
꿈 문정희
꿈&
내 친구 연이는 꿈 많던 계집애
그녀는 시집갈 때 이불보따리 속에
김찬삼의 세계여행기 한 질 넣고 갔었다.
남편은 실업자 문학청년
그래서 쌀독은 늘 허공으로 가득했다.
밤에만 나가는 재주 좋은 시동생이
가끔 쌀을 들고 와 먹고 지냈다.
연이는 밤마다
세계일주 떠났다.
아테네 항구에서 바다가재를 먹고
그 다음엔 로마의 카타꼼베로!
검은 신부가 흔드는
촛불을 따라 들어가서
천년 전에 묻힌 뼈를 보고
으스스 떨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또 떠나리.
아! 피사, 아시시, 니스, 깔레……
구석구석 돌아다니느라
그녀는 혀가 꼬부라지고
발이 부르텄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그만
뉴욕의 할렘 부근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밤에만 눈을 뜨는
재주꾼 시동생이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몽땅 들고 나가
라면 한 상자와 바꿔온 날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울었다.
결혼반지를 팔던 날도 울지 않던
내 친구 연이는
그날 뉴욕의 할렘에 쓰러져서 꺽꺽 울었다.
찔레, 전예원, 1987
대못 문정희
대못
떠나올 때
눈먼 어머니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왔어요.
비바람 그치지 않는
정든 골목에서
여름에도 추워하는 내 친구들은
벙어리인 채
손만 흔들었어요.
한 줄 꿈도 없이
목메이는 기도도 없이
길이 너무 많아
길이 없는
이 나라는 내겐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나는 그냥 뛰어요
눈멀고 입다문 그 모습
대못으로 가슴에다 박아 안고서.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마흔살의 시 문정희
마흔살의 시
숫자는 시보다도 정직한 것이었다
마흔살이 되니
서른아홉 어제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하늘의 모가지가
갑자기 명주솜처럼
축 처지는 거라든가
황국화 꽃잎 흩어진
장례식에 가서
검은 사진테 속에
고인 대신 나를 넣어놓고
끝없이 나를 울다 오는 거라든가
심술이 나는 것도 아닌데 심술이 나고
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겁이 나고 비겁하게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잊기를 새로 시작하는 거라든가.
마흔살이 되니
웬일인가?
이제까지 떠돌던
세상의 회색이란 회색
모두 내게로 와서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새옷을 예약하는 거라든가
아, 숫자가 내 기를 시든 풀처럼
팍 꺾어놓는구나.
찔레, 전예원, 1987
바다 앞에서 문정희
바다 앞에서
문득, 미열처럼 흐르는
바람을 따라가서
서해 바다
그 서럽고 아픈 일몰을 보았네.
한생애
잠시 타오르던
불꽃은 스러지고
주소도 모른 채
떠날 채비를 하듯
조용히 옷을 벗는 해안선을 보았네.
아, 자연
당신께 드리는 나의 선물은
소슬히 잊는 일뿐
더운 호흡으로 밀려오던
눈과 파도와
비늘 같은 욕망을
잊는 일뿐이었네.
잊는다는 일 하나만
보석으로 닦고 있다
떠나는 날
몸과 함께 땅에 묻는 일이었네.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바위 문정희
바위&
푸른 물로 `너는 내 지귀다' 찍어 놓은
아차산 애기중 자효스님은
새벽마다 호올로 피리 불었다.
피리 소리 청보리로 푸르러서
앞 밭의 나는 날마다 출렁였다.
자효는 흰 찻종지 향내음 담아
두 손으로 바쳤다.
출렁이는 마음 연잎 숟갈로 저어 바쳤다.
`참 향기로와요'
자효는 색실 같은 그말에 그만 걸려 넘어져
연잎도 아낌없이 나에게 바쳤다.
새들도 꽃송이로 날으는
첫눈 오는 날
백팔 번 기운 누더기 하나
문 밖에 서 있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백팔 번 기운 누더기 실땀마다 피가 돌아서
자효 몸은 대낮같이 빛이 솟았다.
겨울나무로 세워 놓고 나는 그 가사 벗겨 가졌다.
피리도 연잎도 가사도 없는
천둥 벌거숭이 봄이 왔다.
아차산 뜨락엔 정적이 내렸다.
정적이 싹들을 틔우기 시작했다.
큰스님 말씀처럼 꺼덕않는
부도 하나 절마당에 누워서 하늘 보았다.
`이 바위 참 편하겠네요. 내가 가져가고 싶어요.'
나는 바위어깨 쓰다듬으며 지귀를 쏘아보았다.
이때 문득 터지는 뇌성!
`그 욕심이나 여기다 부리고 가세요'
그리고 날 집어서 바위 위에 내동댕이치고
자효는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천년이 흘렀다.
눈 하나 깜박이는 찰나였다.
가시 빠져버린 황혼의 나는 오늘
그 옛날 부려 놓고 온 욕심을 만나러 간다.
석태는 조금 끼었지만
지금도 꺼덕않는
천년의 욕심.
찔레, 전예원, 1987
불면 문정희
불면(不眠)&
사막을 걸었다.
흐르는 모래 위의
달빛에 감기어
끈끈한 비밀들이
몸 비비는 소리.
더러는 하얀빛을
지우지 못하여
지금 모든 뜰의
꽃잎들은 흔들리고 있다.
내가 때묻은 만큼
빛나는 손톱 끝에서
바람이 변하여
비가 내리고
벗어나지 못하는
슬픈 둘레
그 사이에 끼인
뜨거운 하늘을 이고
내가 떠오르고 있었다.
새떼, 민학사, 1975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문정희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부제: 투옥당한 패장(敗將)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男根)을 잘리는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사기(史記)』를 써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해 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는 끌 수 없는
제 눈속의 불
천년 역사에다 당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 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찔레, 전예원, 1987
새떼 문정희
새떼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
피도 흘러서 하늘로 가고
가랑잎도 흘러서 하늘로 간다.
어디서부터 흐르는지도 모르게
번쩍이는 길이 되어
떠나감 되어.
끝까지 잠 안든 시간을
조금씩 얼굴에 묻혀가지고
빛으로 포효(咆哮)하며
오르는 사랑아.
그걸 따라 우리도 모두 흘러서
울 이유도 없이
하늘로 하늘로 가고 있나니.
새떼, 민학사, 1975
수목 사이로 문정희
수목 사이로
왜 나는
저 쭉 쭉 뻗은
수목들을
서방삼을 생각을 못했을까
손가락을 쫙 펴고
뜻도 없이 어깨에 힘을 주고 서 있는
아이들의 그림만 쳐다 보았을까
시간은 레먼 같은 것
처음엔 향긋한 냄새도 풍기지만
찔금찔금 눈물도 나게 하지만
그러나 벗기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느니,
하늘을 찌를 듯한
검초록을 두르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수목이나 서방삼아
크낙새 같은 새끼들이나
주르르 낳았어도 좋았을 것은
크낙새같이 귀한 자식들
퍼덕퍼덕 길러봐도 좋았을 것을.
찔레, 전예원, 1987
시간 1 문정희
시간 1
너의 머리칼을 만져본다.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찰나
언제나 숫처녀인 그대의 몸을
신 앞에 두 손 한번 모은 적 없는
내게 무슨 은총으로
이러히 두려운 신방을 주는가.
그 앞에 떠는
나는 눈먼 짐승이다.
손만 닿으면 눈 녹듯 옛날이 되고 마는
섬뜩한 촉감에 떼밀리어
나는 뜻없이 깊어만 가는데
모르겠다.
다만 아느니
어느 날 네 머리칼 한 올 내 눈 쑤시어
나는 소멸하리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시간 2 문정희
시간 2
갈수록 갈수록
멀기만 하다.
너는 내가 있어
흐르는 물이 아니었다.
소용돌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좋았다.
위로 치솟을 땐
어지러웠고
부서져내릴 때는
신이 났다.
그 몰락조차도
재미있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속에 빠져
부드러이
죽어갔다.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어린 사랑에게 문정희
어린 사랑에게
벌판의 풀잎 칼이
네 손 베면
나의 속살에서 피가 흐르고
갈대밭 마파람이
네 맘 흔들면
나의 굴헝에서 천둥이 친다.
아,
나 홀로는
절대히 살아 있지 않음이여
너로 하여
내 목숨의 빛남이여
이 아프고 눈먼 끈을
어느 별은 알리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연 문정희
연
어릴 때 바닷가에서
놓쳐버린 연이 햇볕이 되어
우리방에 와 걸려 있다.
종이 울리면
지금도 설레이는 이 연을 잡으려고
꽃도 꽂아두고
죽은 여자도 바쳤지만
추위만 남고
그만 날려버리려고
무수한 담배를 피워대도, 연은
하얀 웃음으로 서 있다.
나는 바닷가로 뛰어가
부는 바람에도 별처럼 울먹이며
연을 따라 하늘로 하늘로 오르다가
끝끝내 아름다운
연 속에 빠지어
파랗게 익사하고 말았다.
새떼, 민학사, 1975
오동나무 문정희
오동나무
나 바람나서 떠나며
조강지처처럼 던져놓고 간
옛집에 돌아와보니
그곳은 이상한 양말 공장이 되어 있었다.
내가 시를 쓰며 정경화를 듣던
나의 서재엔 양말들이 서로 싸움질을 하고 있고
시가 되다 만 말꼬투리와, 아직도 떨고 있는
바이얼린 음계가 발가락마다
감겨 있었다.
`잘못했어. 잘못했어'
몽당연필이 대그르르 굴러나와
검은 피를 보이며 훌쩍거렸다.
아침 저녁 차 끓이던 주전자며
우리들의 입술이 부딪쳤던 싸움닭이 그려진
찻잔하며 모서리가 닳은 모국어 시집들……
장미들은 그후 곧 자결해버렸고
잔디는 뿌리째 뒤집혀버렸다고
그 중 누군가가 귀뜸해주었다.
`지난 겨울엔 오동나무가 목에서 피가 나게 울었어요.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울음소리가 하도 기막히고
슬퍼서 겨우내 잠들지 못했어요.
그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났어요'
주전자가 뾰족한 입으로 계속 울듯이 소리질렀다.
주인이 떠도는 사이 옛집은 늑골이 부서지고
피부병 3기가 되어 있었다.
오동나무는 말이 없었다.
견디는데 이골이 난 몸짓으로
희미한 나이테만 하나 더 두르고 서 있었다.
양말짝 속에 들어가 할딱이고 있는
시의 단서들과 조각난 정경화의 음계를 주워들고
나는 오동나무를 힘껏 끌어 안았다.
잠시후 함께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찔레, 전예원, 1987
오빠 문정희
오빠
이제부터 세상의 남자들을
모두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다.
집안에서 용돈을 제일 많이 쓰고
유산도 고스란히 제 몫으로 차지한
우리집의 아들들만 오빠가 아니다.
오빠!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오빠라는 말로 한 방 먹이면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꽃이 되지 않으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그 거칠던 숨소리
으쓱거리며 휘파람을 불러주던 그 헌신을
어찌 오빠라 불러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마음을
어찌 나물캐듯 캐내어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헐떡임이 사라지고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
찔레, 전예원, 1987
유자 문정희
유자(柚子)
나 처녀 적에
풋사랑 들고 와 퇴짜맞은
여드름장이
어느 고샅 햇빛 속을 서성이다가
놀처럼 안으로 타는
노총각 되어 왔다.
떫고 무성한 수식어
뜨거워 돋은 가시
모두 버리고
좀체로 열리지 않은 마음속에다
색깔 중에 깊은 색깔
향기 중에 깊은 향기
담아가지고
오늘 느닷없이 내 방에 와서
소슬한 입술 한 번
기다리고 있다.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이명 문정희
이명(耳鳴)
요즘 내 귀에서는 이명이 들리기 시작한다.
누군가 급하게 대문을 두들겨서 나가보면
거기엔 싸늘한 정적이 서 있는 거라든가
손목시계를 풀 때마다 검은 배암이
스믈렁하고 가죽나무를 넘어가는 소리에 시달리고 있다.
간이 굳어 죽어가며 그가 흐윽! 하고 내쉬던
마지막 숨소리, 퉁퉁 부은 젊은 손으로 베옷 서걱이며
그가 떠나가던 소리.
고아가 되어 야간 열차 타고 서울로 오던 날 밤
정으읍―강겨엉―서대저언―절뚝거리며 따라오던
기차 소리……
두근거리며 온 몸에 얼음이 박혀
사시사철 삐걱거리는 뼈마디 소리.
귀를 물로 씻고 솜방맹이로 샅샅이 후벼봐도
귀를 떼서 햇빛에 걸어놓아 보아도
이명은 멈춰지지 않는다.
아예, 큰 신혼살림을 차리고 들어앉았는가 보다.
깨가 쏟아진다.
찔레, 전예원, 1987
정구 문정희
정구
정구를 친다.
천사같이 하얀 그대의 날개에서
포롱거리며
내게로 오는 한 알의 우주.
야채처럼 싱싱한 햇살이 내리는
녹음 한낮에
그대가 내게 주는 한 알의 우주.
나는 다시 그대에게
나를 보낸다.
사랑이란 서로를 주는 것이듯
우리들은 우리들의 우주 속에 빠져서
힘껏 서로를 주고 있었다.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참회 시 1 문정희
참회 시(詩) 1
말로써 우리가 감동되던 시대는 갔다.
우리들은 모두 어두움 속에서 더욱 빛나는
별이 되어
몸으로 올라
몸으로 올라
온몸으로 통곡하는 것이
이 시대의 감동이다.
봄이 오면
내 기다림과 부끄러움을 말하리라.
새벽이 오면
나는 꿇어앉아 기도하리라.
손풍금 소리 같은 나이 어린 자유(自由).
눈 멀고 힘 잃은,
결코 순백해야만 하는 우리 어머니 앞에
바람 따라 쏠려다니던
죽은 말들의 서러움을.
말이 다시 노래가 되고,
노래는 흐르고 흘러서
아, 감동의 푸른 나무로 부활되기를.
새떼, 민학사, 1975
촌장 문정희
촌장(村長)
촌장님 용서하셔요.
쑥처럼 뻣세져서
산불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역신과 자고 있는 아내를 봐도
무심한 이 눈을
눈을 빼서 꽃씨처럼 종이에 싸서
한 십년 후에 오는 봄에
뿌리려 함을 용서하셔요.
어둠이 쌓이고 쌓여서
새벽을 만든다지요.
`불을 끄라! 불을 끄라!
눈에 켠 불을 끄라!
적이 온다. 중요한 시기다.
이때 빠꼼대는 게 그 누구얏!'
촌장님
이때 속노래 함을 용서하셔요.
`절망을 부끄러워 말라.
수많은 잎처럼
쌓이고 쌓여서
썩어 문드러져
호수 속의 노래되어
졸 졸 흐를지니'
아, 울다가 잡혀간 친구를
기다리는 이 겨울.
새떼, 민학사, 1975
콩 문정희
콩
풀벌레나 차라리 씀바귀라도 될 일이다.
일 년 가야 기침 한번 없는 무심한 밭두렁에
몸을 얽히어
새끼들만 주렁 주렁 매달아 놓고
부끄러운 낮보다는 밤을 틈타서
손을 뻗쳐 저하늘의 꿈을 감다가
접근해오는 가을만 칭칭 감았다.
이 몽매한 죄,
순결의 비린내를 가시게 하고
마른 몸으로 귀가하여
도리깨질을 맞는다.
도리깨도 그냥은 때릴 수 없어
허공 한 번 돌다 와 후려 때린다.
마당에는 야무진 가을 아이들이 뒹군다.
흙을 다스리는 여자가 뒹군다.
새떼, 민학사, 1975
파꽃길 문정희
파꽃길
흰 파꽃이 피는 여름이 되면
바닷가 명교리에 가보리라
조금만 스치어도
슬픔처럼 코끝을 건드리는
파꽃 냄새를 따라가면
이 세상 끝에 닿는다는 명교리에 가서
내 이름 부르는 바다를 만나리라
어린시절 오줌을 싸서
소금 받으러 가다 넘어진 바위
내 수치와 슬픔 위에
은빛 소금을 뿌리던 외가 식구들
이제는 모두 돌아가고 없지만
서걱이는 모래톱 속에 손을 넣으면
차거운 눈물샘은 여전히 솟으리니
조금만 스치어도
슬픔처럼 코 끝을 건드리는
파꽃 냄새를 따라가서
그리운 키를 쓰고 소금을 받으리라
넘실대는 여름바다에
푸른 추억의 날개를 달아주리라
찔레, 전예원, 1987
편지 문정희
편지&
부제: 고향에서 혼자 죽음을 바라보는 일흔여덟 어머니에게
하나만 사랑하시고
모두 버리세요.
그 하나
그것은 생(生)이 아니라
약속이에요.
모두가 혼자 가지만
한곳으로 갑니다.
그것은 즐거운 약속입니다. 어머니
조금 먼저 오신 어머니는
조금 먼저 그곳에 가시고
조금 나중 온 우리들은
조금 나중 그곳에 갑니다.
약속도 없이 태어난 우리
약속 하나 지키며 가는 것
그것은 참으로 외롭지 않은 일입니다.
어머니 울지 마셔요.
어머니는 좋은 낙엽이었습니다.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폐허의 노래 문정희
폐허의 노래
바람을 보러
들에 갔더니
풀들만 온몸으로 울고 있었네.
내가 보고 싶던
바람은 없고
서산마루에 다만,
풀들의 울음이 떠다니며
누구의 승천을 의논하고 있었네.
아, 산도 밀 수 있는
내 슬픔의 무게
후둑후둑 내리는 큰 빗속으로
하얀 그리움이 꿰어 다님을……
새떼, 민학사, 1975
하늘 문정희
하늘&
하늘입니다. 깊게 차오르는
샘물을 퍼냅니다.
해가 저뭅니다.
바람 많은 고향에
남기어둔
한 굽이의 흐름을
흔들리는 손으로 건졌습니다.
눈물 속에는 눈물 속에는
나의 어린 새끼손가락 가시를
서럽게 파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자라고 있습니다.
새떼, 민학사, 1975
황진이의 노래 1 문정희
황진이의 노래 1
나는 바람인가봐요.
담도 높은 대궐 안에
문도 많은데
문마다 모두 열어젖히고 싶어요.
닿는 것마다
흔들고 싶어요.
지체있는 뭇 별들을
죄다 따고 싶어요.
아니어요.
작은 햇살에도 얼굴 부끄러운
풀꽃 같은
사랑 하나로
높은 벽에 온몸 부딪고
스러지고 싶어요.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흐름에 대하여 문정희
흐름에 대하여
바다에 가서
바다가 되고 싶다.
참으로 흐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흐름의 숨결로 키워낸 진주는
왜 슬픔처럼 영롱한 것인지
알고 싶다.
하늘은 왜 우리에게
햇살과 함께
자유를 주었는가.
우리들은 왜 흐르는가.
바다에 가서
바다가 되지 못하고
날개가 되지 못하고
왜 약속처럼 산으로 가는가.
산으로 가는가
한 벌 죽음으로 자유와 햇살 빼앗기고
다만 혼자 제 목숨 갖고 가는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