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궁과 중국건축
중국이 고대문명국가라지만 가장 볼품 없는것이 건축이다. 西安에서 서쪽으로 15키로미터 |떨어진 阿房村이란 곳에 가면 진시황이 BC212년에 자기의 애첩 阿房의 이름을 따서 질려다 못진 아방궁유적이란 관광명소가 있다. 중국사람들의 무책임함이 역역히 묻어나는 곳이다. 싸구려 건축재료로 제멋대로 건축한 이도 저도 아니고 죽도 밥도 아닌 사불상(四不像)건물들에 그럴듯한 이름만 달아놓고 우리돈 1 만원에 해당되는 70위엔을 입장료로 받는다. 그리고 지저분하고 허접한 선물상점을 만들어 놓고 장사를 한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가장 감탄되는 것이 있다면 엄청난 면적의 광장과 웅장한 건물들이다.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 뮌헨의 마리엔 광장, 바로셀로나와 로마의 스페인광장,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광장등등, 이런 광장주위는 왕왕 법원, 성당, 극장 혹은 원로원(Senatus)등 웅장한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있고 기마영웅상이나 조각분수대 같은 예술작품도 있다. 이런 광장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고대로부터 인간의 만남을 중요시 했음을 말하고 웅장한 외관과 대조되는 섬세한 디테일을 볼수있는 무수한 건물들은 그들이 건축에 가미한 철학과 세계관을 느낄수 있게 한다.
지금에 와서 중국사람들은 아방궁을 재건하고 싶은데 참조물이 없었다. 중국의 왕조는 모두 황제의 虐政을 못참아 폭발된 농민기의에 의해 멸망되었고 또 왕조들은 전부 단명 왕조들이다. 한 왕조에서 건축한 건물이나 능묘는 왕조말기의 농민기의군에 의해 싹쓰리당하고 도굴당한다. 그래서 통치자들도 역사에 오래 남 길 건물은 짓지 않는다. 진시황은 병마용만 지어놓고 자기의 시체는 없애 버렸다. 자기가 죽자마자 춘추전국시대의 伍子胥(오자서)처럼 시체를 꺼내 채찍으로 때리는 鞭尸(편시)의 벌을 받을것이기 뻔했기 때문이다.
유럽같은 광장은 더욱 안 만든다. 중국 임금들은 백성들이 길다란 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것은 괜찮으나 둥그런 원형광장에 모이면 폭동이나 모의했지 무슨 다른 할일이 있겠느냐 라고 생각했다. .
진시황이 아방궁을 지을 때 참고로 할수 있었던 고대 건축은 만리장성과 병마용 밖에 없었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것들이 어디 건축물인가? 그러니까 진시황이 생각했던 아방궁의 청사진이 무엇인가를 지금 와서 알배가 없다.
그런즉 몇년전에 중국사람들이 아방궁을 관광명소로 복원하려 했을때 도무지 무엇을 참고하여 복원을 할지 두서가 없었을 것이고 어쩔수 없이 대충 남아있는 고적을 참고하였을것이다.
수나라시대의 건축은 대운하와 하남성 趙縣에 있는 倣造된 아치형 석교 하나 뿐이다. 문헌에는 웅장한 도시가 있었고 또 殿堂, 陵墓, 石窟, 塔, 宮殿등이 있다고 했으나 실물이 남은 것이 없다
唐나라시대의 건축도 남은 것은 없다. 불교사찰이나 殿堂도 모두 현대에 재건한 倣古建築일뿐이다.
그런데 다행이 한가지가 있었다. 즉 명나라 永樂 18년(1420년)에 끝낸 북경의 紫禁城( (故宮이라고도 한다)이다. 이 건축이야 말로 중국 고전건축기술의 집대성이라고 볼수 있다. 그래서 아방궁건축중에는 적지 않게 고궁의 건축모양이 보인다. 그러나 진시황이 건축한 阿房宮이 어떻게 명나라 건축의 특징을 갖고 있을까? 말이 안되긴 같은 일이다. 하하, 웃기지 아니한가.
중국사회과학원 考古연구소 연구원 李毓芳교수(女)가 인솔한 연구진이 수년간 연구한 결과 고대에는 아방궁이 있었지만 項羽가 태웠다는 말은 낭설이고 아방궁은 아예 지어지지도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그런즉 지금 관광객에 전시하는 아방궁은 지표면에 남은 몇몇 기초공사 흔적으로 거금을 들여 제멋대로 만든것인즉 정말 안만들기 보다 못한 건물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