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업 [金重業, 1922.3.9 ~ 1988.5.11 ]
1900년대 식민지와 6.25전쟁의 소용돌이로 인해 세계 건축의 흐름에 ‘소외’정도를 너머, ‘고집’으로 일관된 우리나라의 건축적 상황에서 서구의 모더니즘을 한국 건축으로 승화시킨 최초의 건축가이며, 자기만의 독특한 건축적 경지인 서양 건축의 한국화 혹은 한국건축의 현대화를 이룬, 한국 현대 건축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건축가가 바로 김중업이다. 1922년 평양에서 5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터 감수성이 예민하여 시와 그림에 탐닉하던 그는 그림교사의 권유로 요코하마고등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하여 파리 에꼴 데 보자르 출신의 나까무라 준뻬이교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공고를 졸업하고 1942년부터 일본의 한 건축사무소에 근무하다가 해방 전 귀국하여 여러 곳에서 일하며 혼란기를 보냈다. 1947년에는 서울공대 건축과 조교수가 되었으나 6.25로 인해 부산 피난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문화, 예술인과 교류했고 그 인연으로 1952년 이탈리아 베니스로 건너가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게 되었다. 그 문하에서 새로운 유럽 건축을 보고 배우게 된다. 그의 프랑스 파리, 코르뷔지에 사무소 근무는 한국 현대건축 가의 첫 유럽진출이라는 의미로도 값진 것이다. 그는 4년간 협동으로 샨디갈의 '난트 아파트', 파리의 '브라질관' 등을 설계했다.
1956년 귀국하여 홍익대 건축미술과 교수가 되었으며 건축활동도 병행했다. 1956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자신의 사무실을 개설하면서 자신의 창조성을 보다 확대하고 미래를 향한 거대한 세계를 펼치는 작품활동을 하였으나 꼿꼿한 선비정신을 떠올리게 하는 성격, 비타협적인 작가의식때문에 군사정권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오다 1971년 11월 거의 반강제적으로 출국, 프랑스로 추방되어 해외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1978년 11월 영구 귀국 했고 1988년 5월 11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서울대 교수, 홍익대 교수, 프랑스 공인건축가, 하버드 객원교수 등을 거치면서 필그림 홀 계획안(56년), 부산대학교 본관 및 유수 대학의 건물들, 주한 프랑스 대사관(59년), 부산 충혼탑(80년), 서울올림픽 기 념비(85년) 등 국내외에 대략 200여개의 프로젝트와 작품을 남겼다.
이즈음 그의 건축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서강대 본관(1958)을 시작으로 하여 한국 현대건 축의 기점이 된 '주한프랑스대사관(1960), 이어 '제주대학 본관' (1962-95)을 발표, 그의 예술적건축작품성을 보여 주었다.
이 시기 그의 건축역(建築歷)은 최고조에 달했고 국제적 명성도 얻었다. 프랑스 국립방송국에서는 그의 작품을 영화화하기도 했다(1970). 1972년에는 미국의 건축잡지 「아키텍튜랄 포럼」(Architectural Forum)에 그의 작품 제주대학이 소개 되기도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쾌활한 시작(試作)' "···현대건축에서 한국의 전통을 재현하려는 건축가의 시도는 새로운 제주대학 건물로 귀착된다. 이 건물은 콘크리트 디자인으로, 형태가 대담하고 디테일은 섬세하다. 이것은 이 건물의 건축가인 김중업의 전형적인 미학이다. 조형의식이 단일하지 않고 오히려 이원적이고 대립적이라는 사실은 거장들의 작품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김중업의 작품에서도 첫째 굵게 움직이는 선, 둘째 작은 원이 서로 병치되면서 하나의 전체를 구성, 셋째 예각으로 된 삼각형의 선, 이 세가지 요소가 이원성으로 단조로움 대신 깊이와 미묘함을 느끼게 한다.
그의 작품중 ‘나의 작품세계에 하나의 길잡이가 되었고, 이것으로부터 비로소 건축가 김중업의 첫발을 굳건히 내딪게 되었다’ 라고 자평하기도 했던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완공 후 10년이 지나면서 지붕에 균열이 일어나 지금은 다른 지붕이 올려지고 주위환경 또한 많이 변했지만, 그 당시 시공기술을 고려할 때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서구건축과 한국건축의 이질적인 요소인 공간의 인식과 건축의 구축체계를 절묘하게 해결한, 한국 현대건축사에 서 매우 중요한 건물로 한국 ‘현대건축의 원점’이라고 세인들은 평하고 있는 작품이다.
젊어서는 르 코르뷔지에에 수학했고 인도의 샨디갈 프로젝트에서 일했다. 대부분의 그 자신의 작품들은 이 제주대학을 포함해서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1층은 주로 커다란 회의실들과 식당들이 있다. 2층은 도서관, 행정실들과 연구실 영역이다. 3층은 대부분 교실들로 채워져있다. 덮개 루프 테라스는 옥외의 교육과 오락의 공간이다···. " '삼일로빌딩 '(1969) 이후 현실참여 발언으로 박정회 정부의 기피 인물이 되어 해외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파리를 거쳐 미국에 머물며 로드 아일랜드대학(1976-78)과 하버드대학(1977-79)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1981년부터 새로운 도약을 기대하며 '육사박물관 (1981) 등을 설계, 구성적이며 회화적인 그의 건축세계를 펼쳤다. 그의 첫 건축전은 1971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개최도었다. 그는 한국 현대건축 최고의 낭만주의자로서 그만큼 끼친 영향도 많았다. 1988년 5월 11일 일기로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건축계와 인연을 끊었다.
집을 지을 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우선 향입니다. 남향이 아니면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 다음에는 거기서 살아야 할 당사자 들을 생각합니다. 가족과 장본인의 취미도 고려의 대상이 됩니다. 거기서 적정넓이가 나옵 니다. 그 다음에는 배열을 잘해 쓸모있게 꾸며줘야 합니다. 말하자면 집을 통해 그 사람의 자화상을 그려주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성적 측면보다는 비합리적 정서, 감성, 영감 등을 중시하며 시적이고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던 그는, 비록 지금은 운명을 달리하였지만 아직도 그의 작품은 현재성을 잃지 않고 그의 영혼이 함축되어 심원한 시적 울림의 조형언어로 살아 숨쉬고 있다.
주요작품
필그림 홀, 건국대 도서관/1956
명보극장/1956
부산대 본관, 人자집/1958
서강대 본관/1959,
주한 프랑스대사관/1960
청평 설씨산장/1962
제주대 본관/1964
서산부인과 의원/1965
유엔묘지 정문/1966
한국미술관(주한이태리 대사관), 한남동 정씨댁/1967
진해공군공관, 한남동 이씨댁, 갱생보호회관/1968
삼일로 빌딩/1969
도쿄호텔/1971
성공회 회관/1974
서교동 흥씨댁/1975
한국교육개발원 신관, 한남동 이씨댁. 태양의 집/1979
방배동 민씨댁/1980
육군사관학교 박물관/1981
부산시 충혼탑, 사직동 박씨댁/1983
성북동 이씨댁/1984
박시우 치과의원 (욱일빌딩)/1985
군산여성회관, 군산시민회관/1987
국제보험(주), 평화의 문(올림픽 상징조형물), 경남문화회관, 광주문화방송국, 중소기업은행 본점(선경빌딩)/1988
군인아파트, 드라마센터, 홍익대 인문관/대학원, 국제방송센터 (I.B.C)/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