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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처럼 며칠을 머물렀던 이색렬以色列이라는 나라를 나선다. 백림柏林으로 가는 비행기,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이륙을 기다리고 있다. 어린아이가 딸린 부부가 와서 자리를 좀 바꿔 줄 수 있는지 묻는다.
몇 줄 뒤로 뒤로. 비상구 옆에 나란한 좌석이 둘만 있고, 눈이 크고 얼굴이 갸름한 아가씨 옆자리. 아름다운 여인은 내가 통로에서 걸어 다가가는 동안 시선이 마주치자, 마치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놀란듯한 눈길로 한참을 쳐다보았다.
"제가 옆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리고 곧바로 일어나 머리 위 선반에서 짐가방을 꺼내려고 한다. 아주 짧은 바지를 입고 있다. 다리가 아주 예쁘고 길다. 나는 대신 일어서서 가방을 내려준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한국에서요. 이스라엘분이에요?"
"네."
이색렬은 중국인들이 이스라엘을 음차하여 부르는 말 以色列(이써리에)을 우리식으로 읽은 것이다.
아가씨는 얼굴의 화장을 고치기 시작한다.
"스님, 시리아의 새 대통령이 국민적 지지를 업고 이스라엘을 일주일 안에 공격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데 그래도 가실 거예요?"
몇 번의 곡절 끝에 우봉스님을 따라 이스라엘에 가서 참선법회에 동참하기로 했었다. 여행이 임박해지자 그곳의 정치적 상황이 평상시보다 더 좋지 않다며 스님이 걱정이었다.
"네, 전 괜찮은데요. 거기서 죽을 거면 가서 죽어야죠."
"좋아요. 그럼 같이 가서 죽읍시다."
직항 노선이 없어 암스테르담까지 갔다가 중동 쪽으로 되돌아오는 장거리 비행 끝에, 녹초가 되어 텔아비브공항에 도착하니 자정이 지났다.
앞에 선 사람들이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것을 지켜보니 입국심사도 몹시 까다로워 보였다.
"이스라엘에 어디서 묵으실
겁니까?"
"텔아비브예요."
심사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아, 체류할 호텔이나 집 주소 같은 것을 묻는 거구나. 머릿속에 걷히지 않는 안개처럼 끼어있는 노독과 불편한 잠기운이 무겁다.
"공항 대기실에 누가 마중 나와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아는데요."
" 그 사람 전화번호 같은 거 있어요?"
"몰라요, 대신 날 마중하라고 그 사람을 보낸 사람 전화번호는 있는데……."
급한 김에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번호를 눌렀지만 연결이 안 된다는 안내멘트가 나온다. 점점 궁지에 몰린다.
"입국 목적은요?"
"참선요. 이스라엘 사람들이랑 모여서 참선할 거예요?"
"참선요?"
처음 보는 이국의 옷차림을 한 나를 의혹의 눈초리로 빤히 쳐다본다.
통과 시간이 지연되고 줄 서서 기다리는 뒷사람들이 의식되기 시작하자 심사가 뒤틀리려고 한다. 참선 몰라? 참선 안 하면 마음의 평화가 오겠니, 세계평화가 오겠니?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보가 되면서 한 술 더 뜬다.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러 왔다고도 할 수 있소."
그는 질문을 계속하는 대신 직감으로 내 표정이랑 눈빛을 읽어보려 하다가 더 이상 해석이 안 되는지, 누군가를 불러 날 어딘가로 데리고 가라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따라가 상급심사관을 만나자, 일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어떻게 오신 거예요?"
"한국의 승려입니다. 이스라엘 불자들이 모여 하는 선수행에 동참하러 왔어요."
그는 나를 잠깐 똑바로 쳐다보더니, 지체없이 도장을 집어 들고는 여권에 찍어주웠다.
"저도 불교 수행에 관한 책을 몇 권 봤는데 꼭 수행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습니다."
짐가방을 챙겨 들고 밖에 나오니 우봉스님도 마중 나와 계셨다.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유발이라는 풍채가 좋고 혜가 밝아 보이는 군장성급 출신의 현직 변호사다.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그는 이틀 전엔가 시리아의 미사일 공격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새로 개발한 아이언돔(Iron Dom)이라는 방어벽이 그것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서 더 이상의 공격이 당장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차분하고 선량한 인상의 불자 집에서 묵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곱슬머리 여자아이의 엄마였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잠자리에서 누리는 새벽의 휴식은 감미로웠다. 음식솜씨도 매우 세련돼서 전형적인 히브리식 주식인 후무스나 데이트시럽을 넣은 요리,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 같은 향취가 나는 오렌지 등을 별 소리도 없이 금방금방 차려냈다.
이튿날, 예루살렘 시내구경을 하는 것과 사해死海에서 목욕하는 것 사이에서 택일하라고 해서, 나는 당연히 후자를 택하였다. 유대교, 카돌릭, 기독교, 이슬람교의 발원지였으나 그 덕분에 수천 년 동안 너무 자주 종교적 분쟁의 소용돌이이기도 했던 도시, 스스로 신으로부터 선택되었다고 믿었으나 도리어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처럼 유랑해온 유대민족이 몇 천년 전 조상들이 살았다는 고향 땅에 돌아가자고 모여들어 세운 나라, 그 후유증으로 기존의 아랍 토착민들이나 주변의 이슬람교 국가들과 여러 차례 큰 전쟁과 갈등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고, 아직도 늘 전쟁과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나라, 머리가 좋고 매우 적극적인 유대인 특유의 기질 때문인지, 미국을 위시한 서구열강의 후광과 지원 때문인지, 무기산업과 IT산업의 성공 때문인지, 주변의 여러 이슬람 국가를 합한 것보다 GDP가 더 높아 질시의 대상이 되는 나라의 수도를 돌며, 나는 역사의 흐름을 타고 하염없이 계속되는 중생의 부질없는 생사에 대하여, 그 어리석음에 대하여 또 씁쓸한 감정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냥 지상 어딘가에 있는, 몹시 염도가 높아 사람이 가라앉지 않고 둥둥 뜬다는 어느 신기한 바다에 들어가 노는 일이란 얼마나 느슨하고 단순하고 동화적인가? 사해死海, 죽은 바다, 혹은 죽음의 바다라는 이름조차 두려움을 일으키거나 거부감을 주기보다, 오히려 강한 흡인력으로 호기심을 부추겼다.
가끔 우리는 얼마나 죽고 싶어지는가? 번지점프를 하듯, 한번 마음먹고 뛰어내리기만 하면, 이 웃기는 놀음들과 치렁치렁한 가식과 미운 애새끼 같은 자아를 떼어 놓고, 단번에 완전한 휴식과 100퍼센트의 속죄가 가능한 기적의 탈출구는 없는 것인가.
늘어선 아성들과 말을 통하지 않게 만드는 아상我相의 탑들과, 하다한 분별의 거리를 지나면, 그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 뿐.
비루먹은 짐승들이나 어쩌다 겨우 살 것 같은 불모의 사막지대를 지나 죽음의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자 세월에 지치고 닳은 마음은 오히려 나른하고 자유로운 여행자의 감성에 젖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지각이 융기하고 침강하면서 원래 바다였던 부분이 고립되어 형성된 사해는, 여러 강물이 흘러들지만 나가는 문이 없어 밖으로 통하지 않는, 사실 바다라기보다는 큰 호수라고 한다.
사해 주변은 강수량이 매우 적은데다 적도 가까운 곳이라 일사량이 많아 안에 갇힌 물은 매우 심하게 증발한다.
덕분에 이 호수의 수면은 해수면보다 417미터나 낮고, 염분 농도는 보통의 바닷물의 다섯 배가 넘어 30퍼센트 이상이다. 몹시 짜기 때문에 물고기 한 마리 살 수 없고 심지어 박테리아도 생존하기 힘들다고 한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라는 옛 말을, 수지염즉무어水至鹽則無魚로 고쳐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이 너무 맑으면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하기 힘들다는 말보다, 사람이 너무 짜면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욱 지당하신 말씀 아니겠는가.
어디 벽두의 원주민처럼 혹은 강가Ganga 강의 고행자들처럼 우린 무슨 신성한 의식인 양 몸에 바닥에서 건져 올린 까만 진흙을 바른 다음 죽음의 바다에 입수했다. 물은 약간 미끈거리는 느낌인데 피부는 따끔따끔 가볍게 놀란다. 적당한 깊이에 이르자 습관적으로 헤엄을 쳐보려 했으나 웬걸, 그렇게 되지 않는다. 너무 강한 부력 때문에 자칫하면 머리를 짠물에 처박고 이목구비가 수모를 당할 뻔했다.
사람이 깊은 물에 빠졌을 때 헤엄치지 못하면 물을 먹으며 허우적거리다 익사하게 되는 이유는 인체의 비중이 바닷물보다 높고 응집력은 물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에겐 물고기나 법화도량의 올챙이들처럼 물속에서도 호흡할 수 있는 아가미가 없고, 지구의 중력에 저항할 수 있는 에너지가 충분치 않다는 것도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사실 세상에 생명들이 이렇게 살아간다는 일은, 어렵고 어려운 생존의 조건들 속에서 위태위태하게 줄타기를 하는 격이지만, 조건만 갖추어지면 생존의 의지가 있는 것들은 아무 노력이나 대가 없이도 거저 생존해가고 삶을 즐기고 향유한다. 천상천하 순간순간의 모든 일들이 따로 작위作爲나 작위자作爲者가 없이도 조금도 어김없이 벌어지는 인과의 소치일 뿐인데, 생각해보면 복잡다단한 수많은 조건들 속에서 벌어지는 낱낱의 사건들이 실로 아슬아슬하고 신비로워 꿈만 같은 기적의 연속이 아닌 것이 없다.
시간이 지나자 몸뚱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전혀 새로운 조건의 이 물에 적응해가면서 그 안에서 움직이는 법을 터득한다. 그것은 엎드려 허우적허우적 물장구를 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인간으로 고개를 들고 일어서서 직립보행直立步行 하는 것이었다.
내 몸은 서서히 영혼의 휴식 같은 평화로운 기적에 젖어들며 두 팔로 물을 열듯이 가르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소금으로 만든 인형이 바다에 녹아들듯, 조금씩 나를 잊고 바다가 되어간다. 온몸의 세포들이 다 누리는 이완과 마치 공중부양과도 같은 환희가 차츰 엄습하듯 침투해와 존재의 중심에 부딪히고, 거기서 반사해나가는 자비심은 법계의 끝까지 거침없이 번져갔다. 나는 바다의 중심을 향해 하염없이 나아갔다.
그 침묵 속의 춤을 스피커에서 울려오는 안내방송이 깨뜨렸다.
그쪽으로 계속 가면 요르단 쪽에서 발포할지 모르니 되돌아 나오라는 것이었다. 아쉬워하며 방향을 선회하고 보니 어쩐지 모든 사람들은 아까부터 해안가에서만 놀고 있었고, 바다 가운데 있는 문제아는 나뿐이었다. 멀리서 우봉스님도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스님, 그렇게 깊이 사해에 들어가 본 느낌이 어떠세요?"
소금물을 씻어내며 스님이 미소 짓는다.
"놀라워요. 예수님이 걸었다는 바다가 바로 여기였나 봐요."
비행기는 21세기 어느 오후의 지중해를 가로지르고, 히브리의 아리따운 아낙은 옆자리에 앉아 아직도 얼굴을 치장한다. 왜 아까부터 계속 화장만 하세요? 이미 예쁘신데.
나를 의식해서 그러는 건지, 반대로 아예 무시하는 행동인지, 동서고금에 있는 여인의 의식일 뿐이라고요? 헉, 가슴에도 화장품을 바르세요?
사해를 다녀온 날 저녁에, 시내의 한 요가스쿨에서 열리는 달마토크(Dharma Talk)에 참석했다. 우봉스님이 작년에 동유럽 순례할 때처럼 다시 사람들에게 당신 옆에 앉은 나에게 질문을 많이 해달라고 주문하자, 화살이 나에게 날아오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데 그 감정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이 무엇입니까?"
"……?"
"사랑이 일종의 감정이거나 행위일뿐이라면, 당신이 느끼듯이 그것은 지나가는 것이고 결코 영원히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사랑이 존재의 양태이거나, 심지어 있고 없고의 차원을 넘어서는 우리 내면의 무엇이라면 이미 시간 밖에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이고, 어디서 왔습니까? 당신의 근원이 무엇인지,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발견하십시오. 영원한 사랑 마르지 않는 샘이 거기 있습니다."
"선禪이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데, 사실은 나는 이렇게 나일뿐이고, 이렇게 자명하게 엄존하고 있는데, 왜 내가 누군인지 따위를 물어야 합니까?
공연히, 이렇게 편안히 있는 나를, 묻는 자와 물어지는 자로 분열시켜 혼란만 일으키는 일 아닙니까?"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엄마는 아이를 재우려고 합니다. 그때 아이는 난 지금 이대로 좋고 만족스러운데 왜 꼭 자야 하느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 기분일지라도 이대로 멀뚱멀뚱 있는 것보다 엄마 말 듣고 제 시간에 편안히 푹자고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면 왜 엄마가 옳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나'없는 곳을 지나 열반을 얻으시고 그 길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며, 우린 아이들처럼 고집 부리기보다, 그 자비로운 분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참구하여 깨달음으로써, 한번 죽었다 깨어나야 합니다. 생사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거기엔 고통의 끝이 없습니다. 부디 열반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스님은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전 죽었습니다. 오늘 사해(Dead Sea)에 들어갔다 왔거든요. 이미 죽어버린 사람은 더 이상 나이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죽었다 깨어나 보면, 자신이 살았다 죽었다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화장을 마친 여인은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왜 내 쪽으로 이렇게 기울어지세요? 잠들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요? 물론 반듯하게만 잘 수 없을 테니 당연히 한쪽으로 기울 수 있고, 반대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기울수 있는 확률은 50%이겠죠. 게다가 저쪽으로 기울어져 머리가 창에 부딪히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왜 다리까지 이쪽으로 갖다 붙이세요? 좌석이 좁은 데 비해 다리가 너무 길어서라고요? 예쁜 롱다리 자랑하려는 의도는 없는 거예요?
어떤 수도자가 버스를 탔는데 옆에 앉은 여인과 몸이 닿았다. 그 경건한 수도자는 흔들리려는 마음을 모아 기도를 시작했다.
"주여, 나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그런데, 여인은 잠을 청하면서 스스럼없이 더 몸을 기대어왔다. 기도는 더 절박해졌다.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차마저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하면서 상황을 최악으로 몰아갔다. 마지막 기도가 새어나왔다.
"주여, 뜻대로 하소서."
이슬람교들은 상대방의 제안이나 요구를 응낙할 때 "예"하는 대신, "인샬라"라고 한다. '신의 뜻대로'라는 의미라고 한다. 한 치 앞의 세상일도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고 보면, 그러겠노라고 선뜻 약속하기보다 신이 허락한다면 그리하겠다는 정도로 '인샬라'하고 말하는 것이, 만물의 주재자가 저 위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로선 한결 더 정직하고 신실한 표현일 듯하다. 그러나 불교적 진리에서 보면, 신이 보통의 인간들보다 훨씬 순수하고 복력이 많은 존재들이라 해도, 만물을 지배하고 전횡하는 개체적 인격으로서의 신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샬라 같은 말을 불교적으로 바르게 말하자면 '인연 따라'쯤 될 것이다.
인연 따라.
아, 옷깃 스치는 인연을 따라 이 여인이 내 곁으로 와 기대었구나. 갑자기 그녀의 가슴을 읽게 된다. 나는 화두를 따라 근원으로 돌아가고, 차츰 우리 안 모든 것의 중심에서 자비심의 물결이 일어 점점 커져가는 동심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다음날은 나사렛에 갔었다. 숭산스님 문하의 몇 선 센터 사람들이 함께 모여 며칠 동안 용맹정진하는 데 동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공간이 여의치 않아서인지 수행장소는 임시로 빌린 여인숙이었다.
유럽의 나라들을 다녀보면 지금 서양 사회에 불교 있는 불교의 열풍을 실감할 수 있다. 정말 많은 지성인들과 젊은이들과 사회의 엘리트들이 불교를 공부하고 선수행禪修行을 하며 불교야말로 우리 인류의 마지막 문명적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길 가는 스님을 붙들고 법을 묻고, 식당 종업원이 와서 호의를 베풀며 참선에 대하여 질문한다. 그들은 신앙을 위주로 하는 그들의 전통적 종교로부터는 이제 탈피하려고 한다. 과학기술문명의 방향 없는 질주나 물질적 풍요 또한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참으로 중요한 것, 남은 유일한 가능성은 마음의 변화라는 믿음이 이제 그들의 신앙이다. 불교야말로 가장 높고, 가장 실천적인 가르침이라 여기며 이제 그 길인 수행에 대하여 묻는다. 그들은 신의 심판이나 대하여 묻는다. 그들은 신의 심판이나 내세에 기약하기보다 지금 당장 이 마음을 닦고 계발하여 스스로 행복하고 자유로운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 하며,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기법들을 즉각 증험하려 하고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지 않는 것이다.
어떤 서양 사람이 동남아에 있는 어느 불교 국가에 와서 수행을 배우면서 보니까, 절에 온 서양 사람들은 서투르지만 정말 열심히 진지하게 수행을 해보려고 하는데, 막상 현지의 그 나라 사람들은 절에 오면 스님들한테 절이나 하고 공양이나 올리지, 정작 불법의 핵심인 수행을 애써 하는 사람이 좀처럼 없는 것 같아서, 수행을 지도해주시는 스님에게 직접 이유를 물었다.
큰스님은 위트 넘치는 대답으로 받아 넘기셨다.
"당신들은 잘 믿지 않지만 이 사람들은 윤회를 믿잖아? 다음 생이 있다고 믿으니까 수행을 다음 기회로 미루는 거지."
여인숙 주인은 이슬람교도인데, 몇 년째 겪어보니 불자들이 자기 업소를 빌려 선수행을 하고 떠난 후마다 장사가 잘되었다며, 이 예사롭지 않은 투숙객들의 정기적인 이용을 매우 환영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객실이 퍽 허술한 대신, 넓고 천정이 높은 홀이 있어, 예불, 참선, 공양, 법회의 목적으로 쓸 수 있었다.
각자 바리바리 싸들고 온 수행 준비물을 옳겨놓고 난 후, 잠깐 나사렛 시내 구경을 하자는 사람들을 따라나선다. 수행에 동참한 베카라는 어리고 맑아 보이는 고등학생 아이가 비 그친 뒤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유발이 자기가 데려온 제자라고 자랑했다.
긴 가뭄의 계절에 며칠 단비가 내렸는데 여인숙 주인은 그것도 수행의 열정과 기상이 넘치는 이 수행자들 덕분이 아닌가 하고 있었고, 오랜 석축이나 건물 벽 등에 말라붙어 있던 식물들에게도 생기가 돌았다.
이맘때쯤 이 지방의 식물들은 갈증으로 거의 죽어가며 지내다가 어쩌다 단비라도 내리면 순식간에 푸르러지고, 이내 다시 말라비틀어져 가며 언제 내릴지 모르는 생명수에 대한 타는 목마름으로 인욕의 세월을 견딘다고 한다. 초목이 오래 목말라하며 비를 기다리듯, 지중해성기후와 사막지대 사이에서 생존을 이어갔던 이 지역의 옛사람들도 오아시스 같은 구원의 가르침이나 구세주, 복락원復樂園에 대한 갈망을 견디며 살지 않았을까, 이런 토양에서 생겨나 로마의 종교가 되어 다수의 현대인들까지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종교들이 왜 이다지 의타적이고 맹목적이고 말세론적인 구원관을 지니게 되었는지, 자못 기후의 영향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종교학자는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흥미로운 종교 현상을 관찰하고 조사했는데, 그곳 토착 원주민들의 신앙은, 미래의 어느 날 존 프럼이라는 신이 하늘에서 비행물체를 타고 내려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고 믿는 자들을 영원히 구원하리라는 것이었다. 그 심판의 때는 정확하게 날짜까지 정해져 있었으나, 다만 그 해는 아직 계시 된 바가 없어서, 매년 그날이 임박해 오면 사람들의 광기 어린 신앙심은 더욱 세차게 불타오르며, 옛날에 딱 한 번 다년간 적 있다는 신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기대로 섬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존 프럼교의 지도자는 라디오를 통해 신의 계시를 받는다고 했는데 그 해에는 틀림없이 존 프럼이 올 것이라고 했다며,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신이 탄 비행기가 착륙할 비행장까지 닦게 했다. 그러나 그 해에도 그 심판의 날은 그저 아무 일 없이 평화롭게 지나갔을 뿐, 누구 하나 오지 않았다.
그 종교학자는 사기꾼 같아 보이는 그 지도자를 찾아갔다.
올해는 틀림없이 온다더니 당신들의 신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군요. 당신이 속이는 거요, 당신의 신이 속이는 거요? 왜 이렇게 번번이 속으면서도 헛된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거요?
그러자 그는 너무나 태연하게 대꾸했다.
"뭘 이 정도를 가지고 그래요? 당신들은 2천 년이나 속아왔으면서."
나사렛 예수가 아버지랑 목수 일을 하며 컸다고 사람들이 믿는 집터도 보았고, 30대 초 처음 설교를 했다는 작은 회당도 들렀다. 시내엔 가톨릭 교황이 다녀간 뒤 교황청에서 많은 지원을 해서 지었다는 거대한 성전도 있어 기웃거려 보았지만, 가슴엔 흐린 도시처럼 잿빛의 느낌이 쌓일 뿐이다. 길거리나 가게의 사람들은 거의 이슬람교들 같아 보였다.
사람들의 농담이 들려온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데 왜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지요?"
"마리아가 예수를 낳기 위해 왜 베들레헴으로 갔는지 아십니까?"
"헤롯왕이 갓 태어난 유대의 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했기 때문 아니었나요?"
"그건 성경에 애굽으로 피신했던 이유로 기록된 바이고, 사실은 사람 수에 맞춰 로마가 부과하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기록이나 소문, 주장 등과, 사실은 항상 다를 수 있죠.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예수를 구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로 믿고 싶었던 사람들의 갈망의 소산일 수 있습니다. 사실 구약에 여호와 신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세계를 직접 심판하고 지배하겠다는 약속이 있기는 하죠.
신의 성육화成育化라는 징표로 원죄에서 태어나는 보통 인간의 탄생과 달리, 처녀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리라고 합니다. 물론 구약의 기약에 의하면 그 탄생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한 번이고, 그렇게 인간으로 태어난 신은 세상을 심판하여 단번에 흑백을 가르기로 돼 있지, 왔다가 일단 죽고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고 부활했다가 다시 재림을 한다 한다 하면서 2000년 동안이나 아무 소식이 없는 그런 시나리오는 아니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런 예언이 이사야서에 나오기는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이 성육화하여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다는 사기는 당시의 아무개왕 시대를 말했고, 사실 예수는 그 왕의 시대보다 몇백 년이나 뒤늦게 태어났죠. 한 번도 생전에 임마누엘이라 불린 적도 없었어요. 결국 예수는 구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세상을 심판하지도 못했고, 신의 영원한 왕국은 시작하지도 못했습니다. 처녀 탄생설도 어떻게 믿습니까? 누가 봤어요? 사실, 예컨대 제 마누라가 저랑 막 결혼해서 아직 성관계를 갖지도 않았는데, 이미 임신 중이라고 하고, 그것도 태중의 아이가 성령으로 잉태하게 된 신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걸 제가 어떻게 믿겠습니까?"
"마누라가 외간남자랑 정을 통하다 현장에서 남편한테 딱 걸려, 정부가 도망치고 나면, 여자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폴란드 여자 같으면, '저를 죽여 주세요' 한대요. 프랑스 여자는, '자기야, 저 남자도 좋은 사람인데……' 하고, 이스라엘 여자는, '여보, 나 성령으로 임신하게 된 것 같아'그런다는데요."
어린아이 형제가 버스를 타고 있었다.
동생은 이제 막 한글을 읽을 줄 알게 되었는지 차창 밖에 보이는 간판이나 광고판 글씨 따위를 보이는 대로 읽는다.
틀리게 읽으면 형이 바로잡아 준다.
"까끌래 뽀끌래 미용실, 명성 황우
갈비, 임마누엘 교회…… 형, 임마누엘이 뭐야?"
"……."
"형도 몰라?"
"글쎄, 임마는 알겠는데 누엘은 잘 모르겠어."
종교와 신앙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 우리를 구원할 진리가 있고, 종교가 그 진리에 이르는 길에 대한 가르침이라면, 종교인은 이 세상을 사는동안 그 길을 닦고 수행하여 진리에 이르고 그것을 증험해야 한다. 믿음과 지향으로서의 신앙은 진리의 증득에 이르기 위한 수행의 동기와 자양이 되어야지, 그것이 종교의 잣대나 구경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행복과 자유를 찾는 생명들을 지성의 차원에서 끌어내려 무지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며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도그마티즘과 세상의 평화를 깨뜨리는 온갖 대립과 분쟁을 양산할 뿐이다. 그런 사이비 신앙, 혹은 신앙 자체를 위한 신앙은 선과 악을 잘못 가르고, 욕망에 가까운 공허한 희망을 부추기며, 결국 자타의 고통과 혼란으로 귀결되고, 인류의 행복과 진보에 해악을 가져올 뿐,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좋다. 그러나 무엇이 진리이고 그것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종교가 말하는 진리는 내면의 실참수행實參修行을 통해서 본래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지, 밖으로 생각의 길을 따라간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식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논쟁과 토론을 통해 규명되는 것도 아니며, 다수의 권위나, 스승이나 현자라고 인정받는 뛰어난 타인의 권위나, 책이나 경전 등 시간 속에서 전해지고 살아남은 것들의 권위에 의해서 검정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결국, 그것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남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그대 안의 근원적 진리를 향해 이르노니, 그것은 모두가 스스로 참구하여 깨달아야 할, 실답게 정진하여 이르러야 할 내면의 본원일 뿐이다.
용맹정진이 시작되었다. 다들 아주 진지하고 숙연해져서 흐트러짐 없이 예불, 정진, 공양 등의 일정을 따랐다. 매우 의미 있고 아름답고 행복한 내 생애 며칠, 시간 밖의 시간이 흘러갔다. 인구의 반가량이 이슬람교도라는 이곳에선 하루에 몇 차례씩 꼬박꼬박, 소가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음치가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울려와, 지금은 알라신에게 기도할 시간이라고 알려왔지만, 우리는 조석으로 우리 근원의 다른 이름인 부처님께 삼업三業을 모아 예경하고, 침묵과 조화 속에서 공양하고, 줄곧 일체 존재에 내재한 진리를 꿰뚫은 자, 저 불조佛祖의 한마디 말, 화두를 들고 내면의 고요 속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가면서 모두의 얼굴에서 존재의 기쁨, 공존의 환희가 꽃처럼 피어난다.
마지막 날 회향 전 행사로 법회와 수계식이 있었다.
법회 모두冒頭의 법문을 하는 지도법사는 뜻밖에도 공양주 노보살님이었다. 대중과 좌선정진을 같이하다가 때가 되면 시설도 별로 좋지 않은 공양간에 가서 잠시 뚝딱거리다가 마치 신통력으로 만든 것처럼 참 깔끔하고 맛깔스럽고, 심신에 다 약이 될 것 같은 음식을 내어, 정진하는 화합청중和合淸衆에게 말없이 공양 올리던 분. 방선 시간에 공양간을 지나가다 마주치면 미소 짓는 모습에서 그대로 보살마하살의 향기가 끼쳐왔었다.
"종교는 말이나 이론을 넘어 실천되어야 하고, 존재에 내재화되고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거의 모든 것을 같이해 온 친구가 둘 있었는데, 그중 한 친구는 저를 따라 조금씩 불교수행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 친구는 표면상 그동안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어떤 종교 조직에 가입하거나 종교적인 모임에 참석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가 내가 지금껏 만나 알아온 사람 그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친구의 말이나 행동이나 태도는 언제나 한결같이 따뜻하고 지혜롭고 아름다워서, 나는 나 스스로 그동안 선수행의 깊이나 날카로움에 점점 빠져들면서도, 한 번도 굳이 그 친구에게 참선을 같이 해보자고 권유할 필요나 종교적 의견 차이 따위를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불과 몇 달 전에 만났을 때, 여느 때처럼 생글생글 웃으면서 불쑥, 말했습니다.
"얘들아, 난 이제 곧 죽을 거야.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았는데, 이미 말기래, 물론 난 치료하려고 애 안 쓸 거야. 이젠 너희들도 몇 번 못 보겠네, 그렇지만, 난 아무런 후회나 미련이 없어. 지내온 날들을 생각해보면 모두가 유익했고 행복했고 감사한 마음뿐이야. 무엇보다 너희들과 만나 같이 살아올 수 있어서 기쁘고 감사해."
우린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태연하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얼굴에 희색까지 도는데 오히려 우리 눈에서만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한참 울고 있다 내가 한대꾸는 고작 이것이었습니다.
"너 지금 선사들처럼 임종을 앞두고 법문하는 거니?"
그 친구는 의사가 예상한 것보다 더 빨리, 그리고 어이없도록 쉽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참으로 뛰어난 선의 스승이었습니다.
선禪은 말을 떠나 존재의 실상에 바로 이르는 길이며, 종교가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믿음이나 이론 혹은 사상적 경향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천둥소리 같은 침묵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질문은 나와 우봉선사가 받았다.
"불교의 가르침 안에는 더러 표현이 아주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컨대 어떤 때는 애착을 버려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때는 큰 자비심을 지녀야 한다고 하고, 어떤 때는 마음을 잘 챙기고 통어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때는 다 놓아 버려야 한다고 하는 것 등입니다. 이렇게 모순된 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금 그 질문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과를 정확히 보고 바르게 작동하는 지혜는 분별을 넘어서 있습니다. 언어적 분별로 그 지혜의 존재에 도달하려 하거나 그 작용을 이해하려고 하면 막막해지거나 갈팡질팡하게 됩니다. 마음을 작동시켜 생각으로 알려고 하지 말고 생각하는 자가 무엇인지 그 근원을 참구해 보십시오.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지면서 그 가운데 점차 밝은 지혜가 드러나 모든 것을 혼돈 없이 다루고 문제를 풀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처럼 수계식을 하고 지켜야 할 계율을 받는데, 마음의 근원을 바로 찾아 들어가는 선을 하는 사람들이 꼭 계율을 지켜야 합니까?"
"계율도 마음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는 해탈의 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태어나서 말을 배울 때 문법을 먼저 배우고 나서 말을 사용하는 법을 익혀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엄마나 주변 사람들 말하는 것을 흉내 내면서 다시 말하면 말을 직접 사용해보면서, 점차 말을 잘할 수 있게 되고 문법에 통달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성불하여 마음을 부처님처럼 잘 다루고 쓰게 되는 것이 수행의 목표라면, 수행은 마음의 근원을 바로 참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그 근원을 아직 꿰뚫지 못했다 해도 마음 씀을 배우는 것, 다시 말해 부처님의 행을 본받아 계행을 지켜가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이라 하지요."
"세상은 끝없이 넓고 중생들은 하염없이 새로 태어나고 죽는데 그들을 다 돕고 다 제도한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도록 요원해 보입니다. 좌절감을 느끼시진 않으세요?"
"중동 어느 나라에 한 공주가 있었는데 무척 인격적으로 뛰어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한테 드러나거나 특히 언론매체들에 노출되는 것을 아주 꺼렸다고 해요. 당연히 그럴수록 더 기자들이나 스토커들이 늘 그 행방을 추적하고 뭐라도 취재하려고 안달이었겠죠. 어느 날 집요하게 따라붙던 어느 잡지사 기자가 아주 이른 새벽에 바닷가로 신책하러 나가는 공주를 마침내 포착했습니다. 그런데 접근해서 몰래 촬영을 하면서 보니까, 공주는 물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무엇인가를 땅에서 집어 들어 바닷물 속에 자꾸만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도로공사로 원래 바다였다가 바다에서 분리되어 말라가는, 그대로 두면 다 죽게 될 무슨 바다 생물들을 건져서 그놈들이 살아오던 바다 쪽으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일이었어요. 하염없이 그 행위가 되풀이되자 기자는 다가갔습니다. 다행히 공주는 걱정했던 것처럼 기자의 예상치 않은 출현에 기겁해 하지는 않았습니다. 기자는 안도하며 물었지요.
"여기 이놈들이 이렇게 수도 없이 많은데 당신이 수백 마리, 수천 마리를 살려준다 해도 그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나머진 다 구제되지 못한 채 불행하게 죽을 텐데, 그렇다면 당신의 수고가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요?"
공주는 생명을 건지는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습니다.
"이놈들 한 마리 한 마리에겐 다 하나뿐인 생명이예요. 나도 한 번에 한 마리씩, 할 수 있는 만큼 방생할 뿐입니다."
"아까 방선 시간에 밖에서 보니까 비둘기 두 마리가 담 위에서 먹이를 놓고 서로 쪼며 싸우고 있는 걸 봤어요. 생명들의 본성이란 이렇게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냉혹한 이 생태계 전체를 지배하는 유일한 룰인 듯해서 슬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원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구원을 말하는 종교들도 서로 싸우고 경쟁하고, 결국 그 싸움에서 지는 종교는 도태되는 것 아닌가요?"
"저 창밖의 나뭇잎들을 보세요. 다 따로따로인 것 같고, 얼마 못 살고 결국 떨어져 죽을 거면서 맹목적 생존의지와 이기적 경쟁심에 사로잡혀 부질없이 다투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다시 눈을 뜨고 그 근원을 살펴보세요. 모든 잎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근원에선 하나이고, 때가 되어 죽는다 해도 더 깊은 차원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성장을 거듭합니다. 우리의 근원을 참구하고 그것을 살펴 깨닫는 일은 삶의 태도와 그 의미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대자비심을 얻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안도와 행복에 이르게 됩니다. 종교의 목적은 그 깨달음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지, 종교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 해도 그 진리에 대한 설명에 집착하고 추종하고 더구나 그 진리의 이름으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물론 진리 자체는 생겨났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경쟁 속에서 생존하거나 도태되는 것이 아니지만, 진리에 대한 가르침은 이 현상계 속에서 드러날 때도 있고 사라져버릴 때도 있지요. 또, 진리라는 이름으로 말해지고 믿어지는 것들 가운데 사실이 아닌 것도 있고, 진리의 가르침들엔 분명 진리 아닌 것들에 대한 부정도 포함돼 있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는 종교의 역사 위에 앉아 있습니다. 여러 종교가 이 땅에서 생겨나고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또 다른 종교가 이곳으로 흘러들고 이 지역의 종교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종교의 역사는 대부분, 진리의 역사, 구원의 역사이기보다는 유감스럽게도 무지의 역사, 대립과 전쟁의 역사, 파괴와 살상의 역사였습니다. 나아가 종교는 역사상 수많은 정치적 침략과 약탈과 살육의 첨병이거나 명분이기도 했습니다. 왜 구원을 약속하고 평화를 부르짖고 도덕성을 강조하는 종교들이 이런 짓을 해온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이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까요? 서로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근본주의적인 태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될까요? 그것만으로 작은 시작이나 쉽게 공감을 얻는 구호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않습니다.
무상정등정각자無上正等正覺者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모든 종교를 그냥 다 인정하셨나요? 부처님은 모든 것을 바쳐 진리를 찾아 수행하셨고 , 그리하여 마침내 진리를 깨달으셨고, 깨달은 바를 가르쳐 다른 이들을 그 깨달음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하면 모든 종교들의 본질이나 진리에 대한 주장은 다 공통적이고 옳은 것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더러 외도들의 그릇된 소견들을 부수고 논파論破하여 몸소 깨달으신 진리를 더 명료하게 드러내시기도 하셨지요. 그것은 결코 아집이나 명리에 대해 집착에서 하신 일이 아니고 오로지 중생을 미혹과 고통에서 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불자인 우리들도 진실하고 실다운 수행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내면적인 수행의 길로 진실하게 나아가야지, 공허한 언어나 관념의 세계에서, 혹은 덧없는 현실의 세계에서 시비를 가리려 하거나 헛된 갈등에 휩싸여서는 안 됩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추종한다든지, 이 무지한 인간들이 지금껏 믿고 따라온 모든 종교적 가르침들이 다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믿거나 함부로 주장하는 것 또한 모두 의미가 없고 바르지 않은 일입니다. 실다운 수행과 깨달음, 이것이 이 세상에 진리의 가르침이 남아 이어져가게 하고 이 무상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영원한 평화와 행복에 이르게 하는 길이요, 진정한 종교의 역할입니다."
한마음이 되어 내면을 참구해온 용맹정진의 클라이맥스는 장엄했다. 일관된 동반상승의 느낌 속에서 함께 정진했던 도반들이 이제 헤어질 시간이 왔다. 그러나 우리의 이별은, 지금부터 다 함께 열반에 이르도록 내내 한 길 위에 있고 끝까지 함께 나아가리라는 무언의 내밀한 약속 같았다. 그것은 엄숙한 출정과도 같았고, 마주 잡는 서로의 손길에서 구도의 열의를 전해 받았으며, 서로의 가슴에서 법희와 하나 됨의 감동을 껴안았다. 어린 가슴이 감당하기엔 헤어짐의 느낌이 너무 큰 것인지, 베카만이 눈물 흘리느라, 돌아서는 우봉스님과 나를 끝내 쳐다보지 못하였다.
비행기가 곧 착륙할 것이라고 했을때, 어깨에 기대고 잠든 여인의 호흡은 아늑하고 편안해져 있었다.
" 이 옷은 한국 사람들이 입는 옷이에요? 지금까지 제가 본 옷 중에 제일 멋져요."
기내에서 제공하는 음료 같은 것도 한방울 마지시 않고 화장하고 잠만 자던 사람이 언제 깨었는지, 여태 자신이 베고 자던 남자의 어깨에 걸쳐진 옷에 대해 대뜸 물었다.
"한국 스님들의 옷입니다. 보통의 한국 사람들이 다 이 옷을 입는 건 아니고요."
"스님이세요?"
그녀는 문득 자기 가슴에 손을 갖다 대고 또 한 번 놀란 사람처럼 빤히 쳐다본다.
"네, 한국 선불교의 스님들이 평상시에 입는 옷이에요."
그녀는 더 말을 잊지 않았다. 오래 길을 따라오던 사람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더 다가오지 못하는 느낌 같은 것이 가로 놓였다. 이렇게 다시 이 생의 옷깃이 스치는구나 …… .
나는 출가 전에 아주 가끔 길거리나 산길에서 마주치던 스님들의 잿빛 복장이 주던 그 많은 느낌을 떠올렸다.
세상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지 않은, 그 잿빛 구도의 길은 무엇일까.
부처님은 세상의 욕락을 버리고 구도의 여정에 나선 출가사문出家沙門들에게 분소의糞掃衣를 입도록 했다. 그것은 화장터 등에서 시체를 쌌다가 버린 천들을 주워다가 원색의 느낌을 죽이고 물을 들여 괴색壞色으로 만든 다음, 들판에 서로 잇닿아 있는 이웃과 이웃의 논밭처럼 잇대어 기워 만든 옷이었다. 이 납의納衣는 탁발로 살아가는 걸사의 옷이었지만, 일체중생이 생사의 굽이를 돌아 열반의 길로 가는 데 쓸 공덕을 심어 거두는 복전福田이 될, 공양 받을 만한 자, 응공應供들의 복전의福田衣였다.
잿빛…… 세상의 모든 색깔이 제각각 개성을 포기하고 다 섞이었을 때 나타나는 색깔, 혹은 모든 색깔이 다 불에타 사멸해갈 때 한결같이 돌아가는 마지막 색깔. 모든 것을 담고 있으되 모든 것을 넘어선 색깔 아닌 색깔.
이색렬夢遊以. 온갖 색깔들을 벌여 놓았다는 뜻? 아, 나는 잿빛의 승복을 입고,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메마른 바람에 휘날리는 이 목마른 사람들의 갖가지 색깔 옷자락을 스쳐간다.
독일 백림柏林 공항에서 비행기가 멈췄다. 다시 그녀의 짐을 내려주고, 배낭을 둘러메고 돌아서서, 손을 들어 인사한다. 그녀는 아직도 가슴에 손을 얹고 있고, 가슴 안의 무엇인가를 진정시키려 애쓰는 것 같다.
내 가슴에 이는 파도를 헤친다. 이색렬夢遊以, 이 온갖 빛깔들이 스펙트럼, 혹은 어지러운 마블링을 지나는 잿빛 물결의 나그네여, 그대 안의 영원한 이름은 무엇인가? 다시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다.
호주머니 안에 손을 넣으니 메모지가 하나 잡힌다.
한국에 돌아가면 범종 구해서 이스라엘 승가에 보낼 것. 예불이나 참선 시간에 쓸 법당 안의 소종을. 귀로 듣기엔 비록 그 소리 크지 않아도, 삼계 중생 가슴마다에 반야般若를 깨우는 범음梵音이기를…….
문종성번뇌단 聞鐘聲煩惱斷 이 종소리에 중생의 온갖 번뇌 사라지며
지혜장보리생 智慧長菩提生 반야지혜 자라나고 보리종자 생겨지이다
이지옥출삼계 離地獄出三界 지옥세계 여의고 삼계에서 벗어나
원성불도중생 願成佛度衆生 원컨대 성불하여 일체중생 건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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