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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茂朱] 예부터 산이 높고, 물이 맑은 무주
조선 태종 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옛 신라 땅의 무풍의 무(茂)와 주계의 주(朱)를 따서 이름 지은 고을이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 서로 맞닿았던 요충지였다
설천면의 라제통문에서 덕유산 산록에 있는 백련사에 이르는 약 28㎞의 굽이진 계곡 일대를 구천동(九千洞)이라 한다.
무주 문화관광 http://tour.muju.go.kr/index.sko
무주관광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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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관광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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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관광 이야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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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반딧불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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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포엠 한국 100경(1)
http://www.ktv.go.kr/common/popup/vodplayer.jsp?cid=396696
영상포엠 한국 100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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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통문[羅濟通門]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있는 석굴문(石窟門).
통일문으로 설천면 두길리 신두[新斗]마을과 소천리 이남마을 사이를 가로질러 암벽을 뚫은 통문을 말하는데 무주읍에서 동쪽 19킬로미터의 설천은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경계에 위치하여 두 나라가 국경 병참 기지로 삼아 한반도 남부의 동서문화가 교류되던 관문이었다.
이와 같이 통문을 경계로 한 동 ·서 두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판도와 문물이 다른 지역이었던 만큼, 600년이 지난 지금도 통문을 경계로 언어 ·풍습 등에 차이가 있으며, 사투리만으로도 두 지방 사람을 식별할 수 있다. 나제통문은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 입구의 경승지이기도 하다. 현재 덕유산(德裕山)국립공원 경역(境域)에 들어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 무주구천동 계곡 33경중 제1경인 나제통문을 시작으로 구천동 계곡을 따라 경승지가 이어져 주뵨 풍경아 매우 아름답다.
머루와인동굴 무주 적상면 북창리
무주구천동 http://tour.muju.org
무주 남대천 섶다리 미국 CNN - 한국서 가봐야 할 50선정
무주 남대천 섶다리는 선조들이 통나무와 솔가지, 흙을 이용해 만들어 초겨울부터 여름까지 사용하다가 장마가 지면 떠내려 가도록 했던 가교로 무주군은 반딧불축제에 전통체험 프로그램으로 재현하면서 대내외에 널리 알렸다.
무주 반딧불축제 섶다리 밟기 체험행사는 섶다리 놓기에서부터 다리 위에서의 전통혼례와 농악놀이, 상여행렬까지 주민들이 주도해 더욱 화제가 되고 있다.
CNNgo는 무주 남대천 섶다리에 대해“매우 인상적인 다리”’라며“무주군은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섶다리의 전통을 기억하기 위해 해마다 6월 반딧불축제를 개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다. 과거엔 섶다리가 놓인 마을이 많았지만 요즘은 대부분 콘크리트 다리로 대체됐다.
무주반디랜드
곤충박물관에서는 반딧불이를 비롯해 1만3500여 마리의 희귀곤충표본과 200여종의 열대식물, 그리고 수 천 마리의 나비 떼를 만나볼 수 있다.
또 돔 영상관에서는 천정에 설치된 돔을 통해 은하의 탄생과 별자리, 우주탐험 등에 대한 정보를 신비한 영상으로 감상해 볼 수 있다. 곤충박물관은 설날인 3일은 무료입장이다.
천문과학관은 설 당일을 제외하고 입장이 가능하며 층별로 마련된 전시실에서는 우주 탄생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별자리, 망원경의 원리와 종류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3D 입체영상을 관측실에서는 태양과 행성, 성운과 성단 등의 천체들과 인공위성을 관측할 수 있다.
통나무집은 숙박인 가능한 시설로 곤충박물관과 천문과학관 견학을 마치고 숲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충분한 휴식을 만끽할 수 있다.
무주반딧불축제 http://tour.muju.go.kr/tour/tourinfo/inc/movie_festival_bandi01.jsp
현재 반딧불이는 무주군 설천면 일원에만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무주군은 지난 1997년부터 반딧불이를 보호하고 자연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반딧불이 축제를 해오고 있다.
백련사(白蓮寺)
1900년(광무 4)에 당시 무주부사였던 이하섭이 중수하였고 6·25전쟁 때 불타버린 뒤 1961년에 대웅전을 건립하였으며, 1968년에 요사를 건립하였다. 그 무렵 백련암으로 불리던 절 이름을 백련사로 바꾸고 30여 년 동안 중창 불사에 힘썼다.
주요 건물로 대웅전, 원통전, 선수당, 문향헌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매월당 부도(전북유형문화재 43), 백련사 계단(전북지방기념물 42), 정관당 부도(전북유형문화재 102)가 있다.
안국사[安國寺]
1613년(광해군 5) 증축하고 이듬해 사고(史庫)를 두어 사각(史閣)과 선원각(璿源閣)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을 보관하고 덕웅(德雄)을 승장으로 하여 승병 92명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사찰 이름을 안국사라고 바꿨으며, 1910년에 사고의 책을 규장각으로 옮기자 이철허(李徹虛)가 사고 건물을 경내로 이전하였다. 1968년 유정환(柳正煥)이 이 건물에 천불을 모시고 천불보전이라고 이름을 바꿨고, 1990년 초에 댐 건설로 절 지역이 수몰지구에 포함되자 1991년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1993년에 절을 완전히 옮겼다.
안국사는 1989년 적상산 양수발전소 건설로 수몰되어 본래의 터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으며 이 자리는 원래 호국사 옛터이다.
안국사 천불전 적상산 사고의 선원각을 옮겨온 것이 바로 이 건물인데, 옆면과 뒷면에 두른 널벽, 앞뒤로 붙인 여러 개의 교창, 위층과 아래층이 분리된 중층구조 등에서 사고 건물의 잔영을 살필 수 있다.
안국사 극락전 단청 조선 말기 적상산 사고의 서책을 햇볕에 말리는 일을 맡은 관리 이면광. 그가 부임해 보니 사고를 지키는 수호사찰인 안국사가 낡아 보수작업을 시작했단다. 하지만 절집의 단청을 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낙담했다. 그러던 차에 한 노승(하얀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자신에게 단청을 맡겨달라고 간청했다. “제가 지금부터 100일 동안 단청을 할 테니 극락전에 하얀 막을 치고 물 한 그릇만 넣어 주되 절대로 그 안을 들여다보지 마시오” 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안국사의 주지스님이 약속한 날을 하루 앞두고 휘장을 들춰보았더니, 휘장 안에서는 학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단청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단청을 하다 놀란 학은 그만 너울거리며 날아 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안국사의 단청은 완성되지 못했다. 전설대로 안국사 극락전에는 추녀 밑에 단청을 하다 만 자리가 남아있다. 안국사가 근래 들어서 절집을 옮긴 것이고, 진짜 학이 단청을 했을 리야 없겠지만, 단청을 하지 않은 채 남겨놓은 한평 남짓의 공간은 그 전설을 더욱 낭만적으로 만들어낸다.
적상산(赤裳山)/적상호
적상산은 4면이 층암절벽으로 둘러싸여 가을 단풍이 붉게 물들면 마치 여인네의 치마와 같다고 하여 적상(赤裳)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최영장군이 적상산을 오를 때 암벽이 앞을 막아 장도를 쳐 산길을 만들었다는 장도 바위로 사람 한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 정도의 폭이다. 장도바위와 주변의 산세가 험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장도(長刀)바위)
적상산성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전략 요충지로 왕에게 청하여 산성을 축성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조선여지승람>에 따르면 최소한 고려 중엽 거란의 2차 침입(1010년) 이전에 축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고, 시대적 정황과 축성 방식 등을 볼 때 백제시대에 축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적상산에 오르는 길에 꼭 들러야 할 두 군데가 있다. 머루와인 저장고와 천일폭포다.
사고(史庫) 고려 및 조선시대 나라의 역사기록과 중요한 서적·문서를 보관한 국가의 서적고(書籍庫).『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璿遠譜略)』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서적고.
조선전기의 사고는 춘추관. 충주. 전주. 상주의 4곳의 사고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를 제외한 곳의 사고가 모두 불에 타서 1603년 선조36년부터 다시 인쇄해서 춘추관. 강화도의 마니산. 강원도의 평창 오대산. 경상북도 봉화군의 태백산. 평안북도의 묘향산. 이렇게 5곳에 보관 하였습니다. 그 후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서 1633년 묘향산사고는 무주의 적상산사고로 옮겼으며 마니산사고는 1660년 현종때 다시 정족산사고로 옮겼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정족산본 강화도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에 있었던 사고. 정족산사고가 설치된 계기는 마니산사고가 1653년(효종 4) 11월 실록각(實錄閣)의 실화사건(失火)으로 많은 사적들을 불태우게 되자 새로이 정족산성 안에 사고 건물을 짓고, 1660년(현종 1) 12월에 남은 역대 실록들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재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태백산본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보존되었던 조선왕조실록으로, 모두 848책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472년간의 왕조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사서(史書)이고, 태백산사고는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을 제외한 실록이 소실되자 1606년(선조 39)에 설치한 외사고(外史庫)이다. 연제구 거제동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에 있는 조선왕조실록이다.
춘추관본 인조 때 '이괄의 난'(1624년)으로 불탔다.
적상산본 1950년 6ㆍ25전쟁 때 북한으로 옮겨져 김일성종합대학에 보관돼 있습니다.
오대산본 일제에 약탈된 뒤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불탔고, 도쿄대에서 보관해온 일부가 2006년 반환됐습니다. 규장각에 임시 보관 되었습니다.
많은 청년이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오직 한 청년이 그 약초를 구해다 주어 어머니를 치료하게 되었고 약속대로 그 청년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약초 이름을 하늘에서 떨어져 마목(麻木:마비가 되는 증상)을 치료하였다는 뜻으로 천마(天麻)라 하였다고 한다.
천마는 간에 작용하여 경련발작, 파상풍, 소아급만경풍, 어지럼증, 두통, 신경쇠약, 두통 등에 쓰인다.
2007년 처음 시작한 안성천마축제는 전국 최대 주산지인 안성천마의 효능과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리고 더불어 지역발전과 면민소득 증대에 기여하고자 시작됨. 해발 300~600m의 준고랭지역으로 천마 최적의 재배여건을 갖춤. 장소 : 무주군 안성면 생활 체육공원(10월 중순) <무주 천마축제>
덕유산 남서쪽 자락에 있다. 계곡물은 용추폭포·문턱폭포·칠연폭포·명제소 등 비경을 만들며 금강 상류인 구리향천으로 흘러든다. 한 줄로 이어지는 일곱 연못 사이로 일곱 폭포가 있는 7폭(瀑) 7연(淵)이 아기자기하고 절묘한 경관을 보여 준다. 물이 맑고 차며 주변 경치 또한 빼어나다. 에 노송과 단풍나무가 울창해서 여름에는 피서객, 가을에는 단풍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담(澤)은 늪지대이고 / 소(沼)는 강물이 소용돌이치는 곳이며 / 연(潭)은 계곡의 맑은 물이 깊이 모은 곳이며 池<淵<湖는 규모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담(潭) : 연못<담>자로 구모가 작은 못으로 한라산 백록담 등
소(沼) : 못<소>, 늪<서>자로 큰 못이나 늪으로 물은 깊지 않으나 넓은 면적임
연(淵) : 못<연>, 깊을<연>, 모래톱<연>자로 물 잠긴 곳이 넓고 깊은 백두산 천지연 등
칠연의총[七淵義塚]
무주 지방에서는 시위대 출신 신명선(申明善)이 덕유산을 거점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무주·장수·순창·용담(龍潭)·거창 등지에서 활약하였는데, 1908년 4월 칠연계곡 송정골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으로 150여 명의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1969년 계곡 근처에 묻혀 있던 유해를 주민들이 수습하여 묘역을 만들고 칠연의총(七淵義塚)이라 이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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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德裕山] 덕이 많고 너그러운 모산(母山)이라 하여 ‘덕유산’. 덕유산국립공원의 주봉은 향적봉 (해발 1,614m)이며 행정구역으로는 전북 무주군과 장수군, 경남 거창군과 함양군 등에 걸쳐 있으며 197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
무주리조트 1990년 덕유산국립공원 무주구천동 안에 개장한 종합휴양지로 스키장 등 동계스포츠 시설을 위주로 한 대단위 레저·오락 시설 단지이다
무진장 즉 예로부터 무주ㆍ진안ㆍ장계지방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이들 지역명의 첫 글자를 따서 ‘무ㆍ진ㆍ장’이라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1972년 11월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때의 일이다. 전국 91.9% 투표에 찬성 91.5%를 기록했다. 바로 그 선거에서 무진장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여주었는데 투표율은 자그마치 103%였다.
소와 삐딱밭 무주는 마을마다 커다란 산을 끼고 있는 고지대로, 논보다 밭이 많다. 그런데 그 밭 또한 평범하지 않다. 깎아지른 산비탈 같은 무주의 밭은 일명 ‘삐딱밭’이라 불린다. 이 산비탈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소! 마누라 없인 살아도 소 없인 못사는, 소사랑에 관한한 둘째라면 서러운 무주 사람
천일폭포
하늘 아래 하나만 있다고 해서 ‘천일(天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5m가 넘는 절벽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장쾌하면서도 시원하다. 이 외에도 장도바위, 장군바위, 송대폭포, 안렴대 등의 명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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