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주기도문에 보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내용이 나온다. 얼마나 찔리는 내용인가? 주기도문을 외울 때 다른 부분은 크게 해도 이부분에서는 웬지 크게 자신이 없다. 그래서 크고 분명하게 소리를 내기가 좀 쑥스럽다. 그냥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함께 외우니 외우는 거지. 크리스스톰은 주기도문을 외울 때는 앞부분을 침묵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다들 어찌 할 수 있나! 우리도 헛기침을 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다.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는 바로 이 용서에 대해서 예수님께 문의한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그리고 주님의 답변을 듣기도 전에 일곱 번까지라도 하면 되느냐고 꽤 수준높게 제시한다. 아마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야, 베드로 너 정말 대단하다 그렇게까지 생각하다니...”라고 말이다. 사실, 누가 일곱 번까지 용서할 수 있는 아량이 있겠는가?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한다.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490번? 아니다. 그 이상이다. 그것은 무한한 용서를 의미한다. 그러면서 일만 달란트 빚진 종과 일백데나리온 빚진 종의 비유를 말씀해 주신다. 지난 주의 설교는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가? 바리새인의 의와 세리의 의로서 회개에 대한 것이었다. 회개는 죄지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면 용서는 그 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지어놓고 용서해 달라고 한다. 그 빚을 없애달라고 한다. 그러나 입장을 달리해서 내가 빚을 받을 위치에 있으면 어떻게 하는가? 너무 까다롭게 굴지는 않는가! 오늘 이 비유를 통해 용서에 대해 몇가지 레슨을 얻자! 용서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II. 용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다. 일만 달란트가 얼마가 되는가? 일만달란트는 약 육천만 데나리온이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삯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 하루의 일당을 5만원씩 친다면 약 3조원이 되는 액수였다. 그 빚진 자가 그 일만 달란트를 갚을 수 있겠는가? 성경은 그가 갚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갚을 것이 없는지라.” 그는 주인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없는 빈털터리였다. 이것을 갚는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인은 그나마 최소한의 손해를 보기 위해서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했다. 모든 가진 것에 차압이 들어온다. 그때 그 빚진 종이 무어라고 하는가? 그 종이 엎드려서 절하면서 말한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그러나 사실 그 빚진 종의 이 말을 믿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것은 헛된 약속이었다. 그 종은 그 빚을 갚을 도리가 없었다. 그가 “갚으리이다”라고 한 것은 급한 대로 얼른 대답이 나온 것이지 그것을 해결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말이었다. 갚긴 뭘 갚냐! 아마 갚으라고 놓아주면 도망가 버릴 것이다. 빚쟁이 치고 안갚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있느냐?
그런데 갚는 것도 어느 정도 되야지 갚을 엄두를 내지 너무 지나치게 많아버리면 뒤로 누어버린다. 속된말로 “배째라”하면서 누어버리는 것이다. 배를 안째도 될 정도면 갚을 것인데 전혀 못 갚을 정도 되면 헛된 약속을 할 수 밖에 없다.
예) 우리가 무엇을 참지 못하는가? 사소한 것이다. 저는 머리핀이다. 여자가 셋이나 되다 보니까 얼마나 머리핀이 많은지 모른다. 침대에서는 등을 찌르는 것이 있는데 머리핀이다. 머리카락이 방바닥에 수북한 것, 텔레비전 리모콘이 없는 것, 배가 고픈 것... 이런 것은 화를 내고, 용서 못할 듯이 하지만 사실, 더 큰 일이 있으면 화를 낼 수도 없고 용서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다른 것은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 빚을 갚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때 채권자 임금이 취한 반응은 무엇인가?
이미 그 주인은 그 종이 그 빚을 갚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두번 장사하냐! 어제 못 갚은 사람이 지금 쪼은다고 당장 갚을 수 있겠는가! 주인이 할 수 있는 것은
탕감이다. 그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사실, 탕감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여기서 빚은 죄이며 잘못이다. 이것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용서라는 것이다. 그 용서는 은혜였다. 어떠한 보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임금도 잘 생각했다. 이래 저래 빈털터리에게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주인이 가장 속편하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용서였다. 용서 안 하면 어쩔 것이여...
용서하는 것이 가장 편한 것인 줄 알라. 주어 팬다고 속이 시원하냐? 내가 당한 것, 손해입은 것과 똑 같이 손해를 끼치고 복수를 한다고 속이 시원해 지냐? 그렇다고 죽은 아들이 살아나며 그렇다고 이미 지나간 일이 해결 되냐? 무엇을 깬다고 무엇을 두드려 부신다고 화가 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문제의 해결점이었다. 종과 주인사이의 빚 문제는 용서와 용서받은 은혜 외에는 다른 해결의 방법이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죄를 짓고 남에게 몹쓸 짓도 하고 가슴 아픈 일도 많이 해서 회개할 것도 많이 하지만 역으로 피해를 입은 것, 가슴 아픈 것, 억울하고 속상한 것 등 우리가 용서해주어야 할 것도 많다. 그때 해결방법은 바로 용서라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예)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모유를 먹어야 한다고 한다. 이유는 모유속에는 특수면역 성분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이가 이가 날 때 쯤이 되면 이것 저것 다 입으로 들어간다. 장난감도 모두 입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드는 생각에 아기가 입에 대면 바이러스나 병균이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라 기가 막힌 면역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이들이 커가면서 감기를 많이 앓다가 어느 정도 크니까 이제는 그리 자주 아프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이들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몸이 이겨내는 것이다. 몸 안에서 면역체계가 있어서 외부로부터 오는 웬만한 병원균들을 물리치는 것 같다. 우리가 예방주사를 맞는다. 왜 맞는가? 면역을 위한 항체를 생성하기 위해서이다. 항체가 생기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러한 바이러스 같은 많은 유해한 것들이 우리를 공격해 들어온다. 비수 같은 말, 경제적인 손실,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 인격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등등...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무방비 상태로 있는가? 무차별공격을 당하고 쓰러지는가?
여기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항체이다. 우리에게는 용서의 항체가 필요하다. 우리는 용서를 받으며 살고 용서를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만일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을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무지 억울하고 속상하고 그 모든 일을 용서 없이 해결하기 위해 많은 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무지 살수 없게 된다. 용서는 우리 삶의 면역기능을 한다. 용서는 인간관계의 윤활유와 같다. 만일 용서가 없게 된다면 우리의 관계는 뜨거운 관계에 있게 될 것이다. 언제나 관계가 과열되어서 여기 저기 화재 사건이 많이 날 것이다. 일만달란트 빚을 받을 그 임금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용서였다. 다른 방법 찾지 말라.
III. 용서하는 자는 강한 자이다.
탕감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던 사람은 주인이다. 용서에 대해 그는 말할 자격이 있다. 빚진 자가 와서 그 주인에게 와서 “주인님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 빚을 탕감해주시면 일을 깨끗하게 끝납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약한 자는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약한 자는 그냥 당하는 것일 뿐이다. 힘쎈 애가 약한 애를 때렸다. 그때 약한 애가 어떻게 하는가? “좋아 내가 용서해 줄께”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아니다. 용서해서 가만히 봐주는 것이 아니라, 꼼짝 못하는 것이지 뭐. 하지만 강한자는 꼼짝할 수 있으면서 넘어가 준다.
용서는 강한 자의 용어이다. 용서는 마음이 넉넉한 자의 용어이다. 용서는 은혜가 넘치는 자의 용어이다.
특별히 용서하는 자는 왜 강한다고 하는가? 용서하는 자는 용서를 받는 자보다 강하다는 차원이상이다. 용서하는 것은 용서하는 자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고 자신과의 협상 속에서 해결을 보고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하는 자는 자기를 이기기에 강한 것이다. 자신을 통제하고 절제할 수 있기에 강한 자이다. 용서를 할 때는 용서를 받는 자와의 문제이기보다는 용서하는 자신에 대한 문제이다. 빚진 종이 주인에게 무어라고 하는가? “내게 참으소서”라고 한다. 말 한번 잘했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저는 그것을 지금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주인인 당신이 해결해주십시오라는 말이다. 당신이 강한 자이니 콘트롤을 좀 해주십시오라는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주인은 그 종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고 자신이 손해를 감수하겠다고 결정했다. 그 주인은 자기 안에 있는 갈등을 해결해야 했다. 용서의 결단을 한다는 것은 말로만 이루어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내 자신의 감정도 콘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참으려면 속 타지 않겠느냐? 내 속이 썩어야 한다. 그리고 물질적인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다 팔아도 못 갚을 것을 주인이 알아서 처리해 준다는 것이다. 용서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에는 많은 투자가 들어가는 것이고 희생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하는 자는 자기를 콘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성숙한 자라는 것이다. 27절에 보면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더니”라고 한다. 그 주인은 마음에 결단을 한 것이다. “그것 없다고 못 사냐? 내가 참지! 내가 없이 살지!” 이런 마음으로 자기를 이긴 것이다.
참으로 이기기 어려운 자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용서가 바로 자기와의 싸움인 것이다. 용서할 일이 있는가? 자기와 싸워이겨야 한다.
예)새벽에 나와 기도하는 것도 자기와의 싸움이다. 나를 깨우는 것은 알람이다. 그 소리가 듣기 싫다. 알람이 나의 적과 같다. 띠리리리 리리리 리리리... 그것도 밧데리가 많이 나가서 이상하게 1/4음이 떨어져서 들린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2절도 있다. 띠리리리 리리리 리리리리리(이야이야오)노래이다. 나를 얼마나 죽이고 나를 이기느냐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싸움이다. 적은 저기에 있지 않고 바로 여기에 있다.
Selfcontroll이 가장 어렵다. 살이 찐 사람은 먹는 것을 콘트롤해야겠지. 그런데 앞에 놓여 있는 음식이 그 앞에 그냥 있을 뿐인데 그게 무슨 잘못이 있냐? 엄마가 밥을 맛있게 한 것이 잘못인가? 자기 콘트롤이다. 그것을 보고 내가 스스로 절제를 해야지. 선악과도 그냥 동산중앙에 그대로 있었다. 우리는 잘못해 놓고 지금 와서 다시 아담과 하와처럼 핑계를 한다. 왜 거기다가 만들어 놓으셨나요? 따먹고 싶게... 선악과가 거기있는 것이 죄냐? 내가 그것에 집중하지 말았어야지... 밧세바가 목욕을 하고 있다. 야 더우니까 목욕을 할 수 있지 뭐가 문제냐? 누가 보라고 했것냐? 보는 내가 문제이지... 얼는 눈을 돌려야 할 것 아닌가!
우리는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바로 그 부분에 찜찜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지 못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비난을 하고 화를 내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갚으라고 난리를 떨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여유 없이 살고 그거에 목숨을 걸고 살았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말 강하시다. 여유가 있다. 그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 어떤 이를 용서하시는가?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죄의 값을 치르신 것이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는 보상설이 아니고 만족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죄의 값을 치르신 것은 사탄에게 잔금을 지불하듯이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의와 사랑을 만족하시고 스스로 그 용서의 댓가를 지불하시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에는 사탄하고의 협상의 문제가 아니고 자신과의 문제였다. 즉, 자신의 의를 상하게 하지 않고 어떻게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느냐하는 것이 문제였다. 하나님의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요구한 것이다.
IV. 이왕 할 용서, 끝까지 해라.
우리의 용서는 철저한 용서이어야 한다. 피상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용서가 되어서는 안 되고 무한한 용서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몇 번 용서하라고 하는가? 490번이다. 그것은 무한한 용서를 의미한다. 용서를 하되 끝까지 용서해야 한다. 이 무한한 용서는 피상적인 용서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다. 무한한 용서는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용서이다. 35절에는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라고 한다. 피상적으로 나오는 용서는 용서받을 사람을 위함이라기보다는 나의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그런 교육을 받았고 사람들이 내가 용서하나 안하나 이목이 집중되어 있으니 하는 피상적인 용서이다. 사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
모든 일이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진실함이 있어야 한다. 사랑을 할 때도 마음으로부터 사랑해야지 된다. 다른 사람을 높이고 치하할 때도 마음으로부터 인정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존중할 때도 마음으로부터 해야 한다. 감사할 때도 마음으로부터 감사해야 한다. 회개를 하고 잘못했다고 사과할 때도 마음에서부터 해야 한다. 겸손할 때도 마음으로부터 낮아지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
예) 인종차별도 마음에서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독일에서 차별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이 사람들은 그리 차별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혹 차별을 받았다면 차별 한 사람이 몹시 무식한 사람들임을 알아라. 차별도 차별을 받아본 사람이 한다. 한국사람들을 보라. 오히려 얼마나 차별이 심한지 모른다. - 월드컵 중계 시 어느 흥분한 아나운서가 세네갈 선수들을 향해 까만해서 누가 누구인지 잘 구분이 안 되네요 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는 분명 주의했을 것인데, 흥분하다보니 마음을 표현했던 것이다.
예)어느 집사님과 함께 밥 먹으면서 아시아 사람에 대한 말을 했다. 그 집사님 왈, 글쎄 언젠가는 저보고 베트남 사람아니냐고 하잖아요! 저는 그저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 말이 귀에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그 분에게 인종을 차별하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닙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은연중에 마음으로부터 인종을 차별합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겉으로만 가리우거나 입술을 주의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숨기려 해서는 안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말과 행동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가짐부터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 마음을 완전히 고쳐먹어야 한다. 입술에 파숫꾼을 세우면 대단히 피곤하다. 그러다가 만일 실수로 나의 속마음을 비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더욱 몹쓸 사람이 된다.
예)오늘부터 탁구를 겨울운동으로 하는데, 탁구얘기를 한번 더 하겠다. 1987년도 필리핀에 있을 때 제가 어느 목사님과 탁구를 치는데 그분이 내게 완패를 당했다. 마침 그 탁구 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 자리에 이형숙전도사님이라고 싱글 여선교사님이 있었다. 그러면서 저는 장난삼아 그 여자 전도사님 앞에서 “여자가 들었으니 금방 퍼지겠네”라는 식으로 말했던 것이다. 그가 몹시 화가 났다. 가지고 있는 책과 공책을 땅바닥에 내어던지고는 “당장 사과하세요”라고 했다. 그렇게 화를 낼 줄을 몰랐다. 농담이었는데 그렇게까지... 그래서 나는 그에게 사과를 했다 형식적으로... 그리고 뭐 그렇게 대단한일은 아니지 싶어서... 그녀는 1주일동안 아파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우리는 서먹한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한국에 방학동안 가 있어야 했다. 나는 아무래도 사과를 다시 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참으로 진지하게 용서를 빌었다. 그때 그녀는 울면서 자신의 마음을 말하며 우리의 관계를 새로이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싸우면 개입해서 서로 악수하고 헉을 하고 미안해해라고 요구는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불완전하다. 진정한 용서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용서는 중심으로부터 하는 용서이어야 하고 그러한 용서는 무한한 용서가 된다. 용서하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
V. 오늘 비유 후반에서 우리는 너무 슬픈 일을 본다. 보기에 너무 민망한 일이다. 화가 나기도 한다. 이 빚을 탕감 받는 종이 얼마나 싸가지가 없는지를 보게 된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용서함 받았기에 마음이 넓어있어야 하고 용서함을 배워야 하고 은혜를 끼칠 수 있어야 한다. 용서를 받은 사람은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자(약 500만원)에게 자신의 빚을 갚으라고 멱살을 잡고 옥에 갖다 집어넣었다.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그것을 보고 친구들이 참으로 민망하게 여겨 주인에게 고하였다. 그것은 주인을 화나게 만드는 행동임이 분명하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싸가지 없다고 욕하는 이러한 빚을 지어놓고 탕감 받은 이 친구! 그가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 이익은 악착같이 보면서 죽어도 손해는 안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마땅한 것도 도무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권리만을 주장하고 의무는 게을리 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그러니 용서함이 없는 사람이 어찌 주기도문을 제대로 외울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끼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권리만 갖는 것이 아니라, 의무도 행해야 한다. 일년 중 년말이 되면 제가 꼭 즐겨하는 말씀이 바로 이 회개와 용서이다. 왜냐하면 지나온 한해 우리는 상처를 입고 상처를 주고 손해를 입히고 손해를 입고 빚도 지고 빚도 받을 것도 있고 회개할 것과 용서할 것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2007년도 이것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용서받을 일이 있는가? 용서하여야 할 일이 있는가?
용서는 우리 삶의 면역이다. 용서가 없으면 우리는 바로 질병에 걸려 관계가 깨어지고 빚에 눌려 살수 없게 된다. 용서가 없으면 법 밖에 없는 삶이다. 법대로 하는 삶이 편안한가? 언제나 살얼음 걷는 것같이 내가 무슨 잘못이 없나를 의식해야 하고, 냉정한 삶밖에 되지 않는다. 용서라는 윤활유가 우리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야 한다. 용서가 있는 삶은 은혜가 넘치는 삶이다.
용서가 아니면 해결 방법이 없음을 인식하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아직 얼마나 연약하고 미성숙했는가를 의미함을 깨달으라. 용서하지 못한다면 내 안에 사랑이 없는 것이고 은혜가 없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다. 용서를 하되 겉으로만의 용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 그럴 때 지속적인 용서가 되고 참된 용서가 된다.
주님이 오신 크리스마스로 흥청거리는 이 계절에 용서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빚을 청산하신 주님을 따라 사는 이 한주간이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