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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1. 5. 18.~19.(화,수) - 음력(4. 7.~8.), 일출 05:18~일몰 19:24
●산행지: 비슬지맥 3구간 졸업(앞고개-오우진나루)
●산행코스: 앞고개-낙수봉(314.8m)-임도(산림자원센타)-밀양추모공원-덕곡리고개-오례봉-날뒤고개/마흘리고개-우령산-복호암-방동고개-종남산-헬기장-이연고개-평리고개-유대등-팔봉산-여시태고개-평촌고개-마산고개-배죽고개-인산-붕어등-처녀묘등-외산공소-소구리굼-오우진나루
●먹거리: 생수2리터, 빵(단팥크림빵), 왕만쥬2, 팩소주,캔맥, 홀스2, 박하사탕12, 알마겔3, 홍삼스틱2
●준비물: 고아텍스, 스틱, 헤드랜턴, 구급약, 피부연고, 부직반창고, 마스크3, 충전지2, 충전짹, 반장갑, 손수건, 면수건, 휴지, 물티슈, 스패츠, 말방울, 매트, 안대, 귀마개, 긴팔, 양말, 여분의류, 띠지20
●거리: 약 31.89km
●소요시간: 21.52h
●누구랑: 나홀로
●경비: ITX22,200, 택시9,100, 편의점8,100, 택시10,900, ITX36,800, 뒤풀이12,400
●날씨: 15~29, 대체로 맑음
●산행경과:
* 5. 18.
- 16:00 : 앞고개
- 17:01 : 낙수봉
- 17:18 : 산림자원센타 임도
- 17:50 : 밀양시립묘원/ 담마숲
- 19:08 : 덕곡리고개
- 19:29 : 오례봉(317.2m)
- 20:11~25 : 날뒤고개/마흘리고개
- 22:11 : 우령산(596.4m)
* 5. 19
- 04:45 : 우령산(596.4m)/ 삼면봉(무안면, 부북면 → 초동면)
- 04:56 : 복호암
- 05:20 : 방동고개/ 성황당터, 탁자식 벤치2
- 05:49 : 종남산갈림길
- 05:55~06:42 : 종남산(662.6m)/ 삼면봉(초동면, 부북면 → 상남면)
- 07:03 : 헬기장
- 07:21 : 양회임도
- 07:40 : 이연고개
- 08:08 : 평리고개
- 08:40 : 유대등(341.3m)
- 09:17 : 팔봉산
- 09:52 : 여시태고개
- 10:03 : 평촌고개
- 10:41 : 마산고개
- 11:24 : 배죽고개
- 12:08 : 인산(213.9m)
- 12:45 : 붕어등(278.4m)
- 13:10 : 처녀묘등(210.3m)
- 13:35 : 외산교
- 14:40 : 오우진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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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간세부거리
앞고개-(2.9)-산림자원센터-(1.2)-담마숲-(5.8)-마흘리고개-(5.2)-종남산-(5.7)-팔봉산-(5.1)-붕어등-(4.9)-처녀묘등-외산공소-오우진나루터
- 앞고개~오우진나루 31.9km
-. 앞고개~덕곡리고개 7.1km
-. 앞고개~날뒤고개/마흘리고개 10.9km
-. 앞고개~이연고개 21.7km
- 덕곡리고개~외산교 23.1km
-. 날뒤고개/마흘리고개~외산교 19.8km
-. 날뒤고개~종남산 5.6km
- 종남산~외산교 14.3km
-. 외산교~오우진나루 1.05h
-. 오우진나루~상남면 5.3km
* 사전 정보 및 식수 공급처
- 밀양추모공원: 건물내
- 종남산: 약수터
- 여시치고개: 상단 외딴집
- 마산고개, 배죽고개: 인가 수도
- 외산공소: 전원슈퍼
- 밀양 개인택시(010-3591-6432, 055-355-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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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앞고개 내려가는길
- 서울역~밀양역 08:17, 09:56, 4.56h, 24,700
- 밀양역~부북면 7, 7-1번 버스
- 부북면~앞고개 택시10,000
* 외산교에서 서울 오는길
- 오산리~밀양역: 농어촌버스(17:10)
* 밀앙역에서 서울 올라오는길
- 밀양역~서울역 14:24, 17:06, 18:34, 04.51h, 2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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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을 마치고 ITX를 타고 내려가 쉬는 날에 비슬지맥 3구간을 강행했습니다. 풀잎에 맺힌 빗물로 신발이 젖어들었지만 크게 지장은 없었습니다.
밀양역에 도착해 역전에서 부복면 가는 버스로 부복면으로 이동했습니다. 거기서 식사를 하고 앞고개로 택시를 이용할렸는데 두어 개 있는 식당이 영업을 쉬고 동리 회의를 하고 있네요. 브레이크타임이람서로.... 할 수 없이 택시를 불러타고 앞고개로 향했습니다.
비슬 다음으로 팔공지맥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문수와 덕산을 두고 순서를 다시 정리 중에 있습니다. 비슬과 팔공을 알고나니 대구를 중심으로 군위와 경산이 어떻게 배치되었는지 안개처럼 희미했던 대구 인근의 지리가 퍼즐이 맞춰지듯 환해졌습니다.
비슬지맥은 강력한 TK를 상징하네요.^^ 신라 화랑의 후예, 경주, 청도, 영천, 경산, 대구가 어떻게 뭉쳐져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신라 화랑이 삼국을 통일하기 앞서 청도를 전초기지 삼아 밀양, 창녕, 고령, 김해의 가야를 복속시켜 그 토대를 이룬 곳입니다. 공교롭게도 선초 영남 유생의 자존심이자 사림파의 거두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생몰지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비슬지맥은 이래저래 경상도의 뼈대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처녀묘등에서 외산공소로 방향을 잡아 소구리굼에서 묘지를 통해 뚝방길에 내려서고자 마음을 먹고 갔으나 고수 흉내내기란 마음같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 외산공소를 향하는 능선을 찾아보려 했지만 그저 남의 트랙이나 열심히 쫒아다니는 형편인지라 대나무숲만 빽빽하고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외산교에서 뚝방길을 걸어, 밀양강합수점 정자에서 경전선 콰이강의 다리를 바라보며 준희선생님께 전화로 졸업인사를 드렸습니다. 처녀묘등에서 내려서서 약간 둔덕으로 오른 지점에서 좌측으로 빠지는 루트가 있다고 말씀하시네요. 그때 거기서 준희선생님을 떠올리고 전화드리는건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이후 밀양시내로 가기보다는 삼랑진으로 조언을 주셨는데 잠수교에서 다시 강건너를 돌아 삼랑진까지 가기에는 불어터진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상남면에서 밀양으로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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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시
경남 동북부에 있는 시로 경부선 철도의 주요 연선 지역 중 하나로 부산과 대구 중간에 있고, 경북 청도군과 마주보고 있다. 그리고 울산과 창원도 인접해 있어서 경상도의 주요 대도시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이다. 대도시들은 모두 밀양시에서 차로 1~2시간 만에 갈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여러 대도시들의 영향을 골고루 받고 있는 도시다. 시청을 기준으로 밀양에서 창원까지는 31km, 부산까지는 47km, 대구까지는 43km, 울산까지는 51km다. 읍, 면 단위로 주변 대도시의 영향력이 있는데, 상동, 청도면 지역은 대구, 산외 지역은 울산, 삼랑진 지역은 부산, 하남읍 지역은 창원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대구로의 유동인구는 의외로 적어서 2017년 통계에 따르면 대구로의 유동인구는 부산, 창원, 김해, 울산으로의 유동인구보다 적었다. 삼국시대 초기 변한의 땅으로 미리미동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기원전부터 6세기까지 가야에 속하였으나 법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推火郡, 미리벌)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전국 지명을 한화할 때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하였다. 밀성군 휘하의 다섯 영현으로 밀진현(密津縣, 삼랑진읍), 상약현(尙藥縣, 창녕군 영산면), 오구산현(烏丘山縣, 청도군 청도읍), 형산현(荊山縣, 청도군, 화양읍), 소산현(蘇山縣)을 거느린 지역 중심지였다. 고려시대 995년(성종 14)에 밀주군이 되었다. 조선 1401년(태종 1) 밀성군으로 칭하다가 1415년에 밀양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대구부 밀양군, 1896년에 경상남도 밀양군이 되었다. 1914년 양산군, 김해군, 영산군의 일부를 병합하고 청도면을 신설하여 12면을 관할하였다. 1923년 밀양면을 指定面으로 하고 1928년 하동면이 삼랑진면으로 개칭되었다. 1931년에 밀양지정면, 1963년에 삼랑진면, 1973년에 하남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하였다. 1946년 밀양읍 대성정을 상동면 안인리로 하였다. (구 대성역소재지) 1989년에 밀양읍이 시로 승격함에 따라 시·군이 분리되었다. 이미 15세기 경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전까지는 얼음골 사과를 한양에 있는 임금님께 진상하던 조용했던 동네가 1905년 개통한 경부선 덕분에 널리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같은 밀양 땅의 삼랑진이 더 중요한 역이어서 삼랑진이 필수 정차역이었다. 밀양시내는 상대적으로 삼랑진보다 인구수도 적고 듣보잡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사실 삼랑진이 밀양보다도 먼저 발전했다. 광복 이후부터 발전을 거듭하였고, 1980년대 드디어 새마을호가 밀양역에 정차하게 되면서 밀양의 위상이 달라졌다. 이때 이미 삼랑진은 끝도 없이 몰락해 갔다. 지금은 무궁화마저도 일정 배차량 말고는 안 서고 통과하는 역이 삼랑진이다. 1995년 1월에는 밀양시와 밀양군이 통합해 도농복합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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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고개(189.4m)
밀양시 무안면 동산리와 부북면 대항리의 경계로 24번국도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이 고개는 '안고개'라고도 불린다.
- 밀양 버스가 하루 두세 차례 지난답니다.
- 앞고개를 출발할 때는 우측(서쪽)이 밀양시 무안면이고 좌측(동쪽)이 밀양시 부북면으로 나뉘어 처음에는’S자’ 형태로 전체적으로 남향하면서 삼면봉인 우령산(596.5m)까지 이어지고, 우령산에서 우측이 밀양시 무안면에서 초동면으로 바뀌어 남동향하여 종남산 감림봉까지 이어지고, 이 갈림봉에서 상남면을 만나 남쪽 상남면, 북쪽 부북면을 가르며 동향으로 잠시 진행하다 헬기장(573.7m)에서 온전히 상남면 안으로 들어서서 동향하여 종남산임도[5번]까지 이어진다. 종남산이후로도 오로지 밀양시 상남면 안을 달려 밀양강과 낙동강 두물머리인 오우진나루까지 이어지게 된다.
♤ 산림자원센터 임도
임도 좌측편 아래에는 밀양시 산림조합의 「산림자원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 임도에서 가시잡목으로 정면의 308m봉과 318.1m봉을 생략하고, 좌측 임도를 따라 나가 밀양추모공원으로 바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 밀양추모공원
밀양추모공원 진입도로로 내려서서 진입도로 앞으로 나서면 도로 한가운데, 예쁜 소나무 두그루가 서있는 둥근 화단이 보이고, 정상 기맥길은 소나무 뒤편 숲길로 올라서야 한다. 소나무 화단에는 기맥길 방향으로 「←쉐우민 수행공동체 / 담마숲」표지판이 붙어있다.
♤ 쉐우민수행공동체
위빠사나 마음챙김 명상은 ‘사띠’, 즉 알아차림을 예민하게 해서 지금 현재 내 몸, 마음, 감각 등의 변화에 특별한 주의집중을 하는 것이다. 즉 내 호흡에 내 주의를 세밀하게 머물거나, 내 마음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번뇌를 끊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마음챙김 수행을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체험하는 국제적인 명상센터가 미얀마에 있다. 쉐우민, 마하시 센터 등이 그곳이다.
- 밀양추모공원 전후의 등로가 잡목과 가시나무 때문에 정상 등로를 진행하기가 어렵다는 선답자들의 산행기가 대부분이지만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큰 어려움 없이 정상 등로로 운행할 수 있다.
- 지맥의 좌측 부북면 덕곡리 방향이고, 우측 무안면 운정리 방향이다. 임도를 가로질러 숲길로 들어선다.
♤ 덕곡리고개/ 골안마을고개
골안마을 뒤편 고갯마루로 양회임도 갈림삼거리이다.
♤ 오례봉(317.2m)
바위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봉우리이다. 3등삼각점 창원 305가 있고 준희님 317.2m봉 산패가 있다.
오례봉에서 약 30분 정도 진행하다가 시그널이 많이 달려있는 등성이에서 우틀하여 내려서고 곧 좌틀하여야 한다. 선명한 길을 따라 직진하여 알바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10분여 진행하면 날뒤고개에 이른다.
♤ 날뒤고개/ 마흘리고개/ 1080번 2차선 지방도로
경남 밀양시 무안면 마흘리에 있는 고개로, 마흘리에서 부북면 제대리(堤大里)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고려시대 밀성군이 2군 4현을 관내로 두고 있었는데 수령이 창녕군, 청도군, 풍각현, 영산현 등으로 넘어갈 때 이 고개를 통하여 나갔다고 하여 날재 날재(日峴) 혹은 나으리고개, 출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이 고개는 수령이 다닌 곳이라 하여 옛날부터 서민들이 결혼을 할 때는 이 고개를 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풍습이 무안면에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고개의 정점은 무안면과 부북면의 경계지점이 되기도 한다. 무안면 마흘리에서 그 이름을 따와 마흘리고개로 통칭되고 있다.
- 무안면과 부북면 표지판과 밀양경찰서 홍보판 좌측 숲길이 들머리다. 이정표(←덕대산 9.2km, ←종남산 5.8km, ←우령산 3.3km)가 가리키는 방향 비포장 산길로 오른다.
날뒤고개/마흘리고개에서 1시간 30분 정도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 우령산(牛嶺山, 596.4m)/ 삼면봉(무안면, 부북면 → 초동면)
우령산은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삼면봉으로 밀양시 부북면, 무안면, 초동면 경계에 있다. 정상은 잡목과 소나무가 우거져 조망은 전혀 없고 정상석 하나만이 공터에 박혀있다.
♤ 우령산 전망대
우령산은 사방이 막혀있어 조망이 없다. 조망은 종남산 방향으로 20m 진행하면 멋진 바위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에서 밀양 시가지와 가야할 종남산을 조망할 수 있다. 이정표(←종남산 2.3km, 신생마을 4.6km→, ↓마흘리고개 3.0km)가 있다. 50m 전방에 설치되어 있는 조망바위 데크 전망대에서 밀양시내 삼문동 물돌이가 조망된다.
- 진행 방향으로 조망되는 우측이 종남산, 그 좌측이 헬기장 봉우리, 그 좌측 아래로 밀양CC, 그 좌측이 사포산업단지....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 예림서원(禮林書院)
선초 사림의 거두 점필재 김종직선생이 태어난 곳이 종남산과 연결된 우령산 아래 부북면 제대리이다. 후손들이 복원한 김종직 생가터 추원재가 있다. 이곳에 전심당이라는 당호를 걸어 도학의 의리 정신을 지금도 계속 알리고 있다. 김종직이 남길 글 조의제문의 비극은 후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바른 말을 하면서 살기 힘든 시대인데 조선시대에 왕의 잘못된 부분을 비판한 강직한 선비의 마음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된 곳이 밀양 무량원이다. 점필재 김종직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문장가, 사람파의 중심으로 불린 김종직(1431~1492)은 밀양 대동리에서 태어나 정몽주와 길재로 이어진 사제관계인 아버지 김숙자에게 성리학을 배워 사림파 도학을 계승하였다. 1453년 과거에 합격하여 함양군수, 직제학, 도승지, 이조참판, 전라도관찰사, 공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고 1492년 밀양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하였다. 그를 따른 제자들이 많은데 김굉필과 정여창은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가 되었다.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는 도학을 바탕으로 한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단행했는데 기묘사화로 아쉽게 무산되었다. 현재 부북면 후사포리 예림서원에 위패를 봉안하여 향사되고 있다. 예림서원은 왜 상남면 예림리가 아닌 부북면 후사포리에 있을까. 처음 1567년(명종 22) 중동면 자씨산에 덕성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에 복원하고 1634년(인조 12) 상남면 예림리에 지어져 1669년(현종 10) 왕이 서원 이름을 예림으로 내려서 이후에 예림서원으로 불리게 된다. 예림리에 있던 서원이 1680년(숙종 6) 화재로 전소되어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옮겨 짓는다. 이후 서원이 철폐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고 1960년대부터 1980년까지 여러 차례 복원하고 보수 공사를 하여 지금의 예림서원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예림리 지명만 남아있고 예림서원은 후사포리에 위치하고 있다.
- 점필재 김종직은 1413(세종 14년) 6월 외가(外家)가 있는 경남 밀양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에서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지내고 사후 증 호조판서에 추증된 강호 김숙자와 밀양박씨(密陽朴氏)의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 김숙자에게서 수학하였다. 어머니는 밀양박씨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딸이다. 증조부는 사재감령(司宰監令)을 지낸 은유(恩宥)이고 할아버지는 성균관 진사 관(琯)이다. 아버지 강호 김숙자는 경상도 고령과 개령, 성주 등지에서 수령과 교수직을 역임하였으며, 밀양에 거주하던 박홍신의 사위가 되면서 밀양에 정착했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김숙자의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 관계에 진출을 시도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김숙자는 포은 정몽주의 문인인 야은 길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일찍부터 총명하여 암기에 능하였으며 날마다 수 천자씩을 기억해 갔다고 한다. 15세에 이미 시문에 능하여, 많은 문장을 지었으며, 20세가 못되어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의 한사람이자 중시조격이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왕조 수립 이후 성리학을 전승한 것은 길재, 권우였고,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조선정계에 진출한 이는 권근이었으나, 세조 이후 조선 조정에 본격적으로 출사한 것이 김종직과 그의 동료, 제자들이었으므로 김종직을 사림파의의 실질적인 중시조로 간주한다. 김종직은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이를 통상 붕당 정치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정여창, 최부(崔溥),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으며, 남효온과 남곤, 송석충, 김전, 이심원 역시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의 초 회왕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기록에 남겼으나 그 자신은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세조의 찬탈(세조 찬위)을 비판하였으나 세조의 조정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성종때까지 벼슬살이를 했다. 광해군 때의 인물인 허균은 이를 두고 김종직론을 지어 심하게 비꼬았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성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제자들을 관직에 등용시킴으로써 훈구파와 심한 대립을 일으켰다. 훈구파에 대한 비판과 부도덕성 질타에 그치지 않고 그는 세조의 단종 폐위에 대해 반발하였다. 그는 세조의 단종에 대한 양위를 가장한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풍자하는 작품을 남겼다. 조의제문은 단종과 세조를 초나라 의제와 항우에 비유했다. 그런데 문장이 워낙 난해해 당대의 식자층도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훗날 조의제문을 접한 연산군이 “어찌 이 글이 어떻게 세조를 능멸하고 노산군을 위한 제문이란 것인가?”하고 되물을 정도였다. 조의제문은 중국 진나라 때 항우가 초나라의 의제를 폐한 것에 세조가 단종을 폐한 것에 비유하여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이었다. 항우는 스스로 보위에 오른 뒤 의제를 강에 던져 죽인다. 김종직은 단종의 시신이 강에 떠내려갔다는 풍설을 듣고 중국의 고사에 빗댄 것이다. 이 글은 그의 사후 이미 죽어 땅에 묻힌 김종직을 부관참시시키고 숱한 선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도 관직에 나간 것에 대해 이후 비판의 소재가 되었으며, 허균은 김종직론 이라는 비평을 남겨 그를 신랄하게 비난한다. 그의 글 중 조의제문은 훗날 성종실록의 편찬 과정에서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 등에 의해 사초에 올려지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다. 김종직은 세조의 단종 폐위를 우회적으로 풍자해서 비판했다. 그런데 그가 세조를 비판한 것이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앙갚음을 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529년(중종 24) 10월 16일 생원 이종익(李宗翼)은 상소를 올려, 김종직이 어느 대신의 천거를 받았지만 세조가 완고하여 쓸모없다 하자 발끈하며 화를 냈다고 하였다. 유자광은 종 출신 서자로 세조의 총애를 받은 이후 예종, 성종, 연산군 때까지 요직을 지냈다. 유자광은 남이가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여 죽인 일이 있는데(남이의 옥사) 김종직은 유자광을 혐오하고 경멸하였다.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유자광이 함양의 대관림을 돌아보고 소고대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내려와 학사루를 보고 절경에 감탄하여 아전에게 필묵을 시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학사루에 걸어놓았다.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유자광이 지은 시가 학사루 현판으로 걸린 것을 보고 떼도록 지시한다. 그는 유자광의 시가 함양 동헌의 현판에 새겨있는 것을 보고 소인배의 글이라 하여 떼내어 불사르게 했다. 김종직은 대노하여 아전에게 호통을 치고 그 현판을 철거하여 아궁이에 태워 버렸다. 그러나 이 일은 입소문으로 전달되었고 관찰사 유자광이 이를 듣고 불쾌하게 여겼다 한다. 또한 천첩 출신 서자로 출신성분에 열등감을 가진 유자광은 이 일로 김종직을 증오하게 된다. 이는 후일의 '무오사화' 의 한가지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성리학적 윤리의 실천으로 학행일치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인심이 이를 통쾌히 여겼고, 함양에는 그를 찾아 문인들이 몰려들었다. 김종직이 관직을 그만두고 밀양으로 낙향할때 문하생들이 서울에서 정자에 술상을 차려놓고 송별시회를 했다. 이때 초청하지도 않은 유자광이 이곳에 들러 인사를 하면서 선생에게 술잔을 권하여 마지못해 잔을 받게되자 선생의 제일 나이 어린 제자 홍유손이 '무령군 대감! 송별시 한수 지어 보시우! 후세 사람들 중 누가 또 대감의 시를 현판해서 걸지 모르지 않습니까?'라며 조롱하였다. 함양 학사루 사건을 빗대 조롱한 것으로, 무안당한 유자광은 이후 김종직과 그 문하생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당시에 세도도 막강하였고 벼슬도 높았던 유자광은 선비들로부터 이렇게 모욕을 당하자, 이극돈, 임사홍 등과 손잡고 선비들을 몰살 시켰던것이다. 1488년 5월에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반려되고 병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가 그해 10월 16일에 한성부좌윤 겸 동지성균관사로 임명되었다. 그 뒤 한성부 판윤을 거쳐 1489년(성종 20년) 1월에는 공조참판겸 동지경연 홍문관 제학 성균관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여름 형조판서 겸 홍문관 제학이 되었다가 겸홍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그러나 평소 지병인 중픙(中風)의 마비 증세로 인하여 휴가를 주었으나 낫지 아니하므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병환에 차도가 없자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1492년 초 형조판서에 재임명되고 지경연춘추관사와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그러나 곧 병으로 사직하고 밀양으로 낙향하였다. 점필재는 세차례나 상소로 사퇴했지만 성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종은 '점필재는 단직하고 성긴하여 거짓이 없고 학문의 연원이 넓고 깊다' 라는 내용의 비답을 친서로 두 차례나 보내어 윤허하지 않았다. 그는 성종이 내린 녹을 사양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나라에서 주는 녹을 받으라 권하여도 불응하고 세 번이나 글을 올리며 사양했으나 성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친히 비답문을 지어서 보내며, 어사품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1492년 7월 집안에 있던 서적을 살펴 다른 사람에게서 빌린 서책들을 되돌려주게 하였다. 그는 문집으로 《점필재집 (米畢齋集)》, 저서로는 《유두유록 (流頭遊錄)》, 《청구풍아 (靑丘風雅)》, 《당후일기 (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로는 《동문수 (東文粹)》, 《이준록 (彛尊錄)》, 선산군의 향토지인 《일선지(一善誌)》 등을 남겼다. 그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종은 특별히 쌀 70석을 하사하고 의원을 보내어 약을 하사하였다. 그해 8월 19일 밀양의 명발와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부음이 듣고 성종은 특별히 조회를 이틀간 파하고 애도하였으며 태상시에 명하여 바로 문간의 시호를 내렸다. 5남 3녀를 두었으나 아들 넷을 일찍 여의고, 후처 문씨에게서 얻은 아들 김숭년(金崇年)의 나이가 7세밖에 되지 않아 후처인 문씨(文氏)가 상주가 되고, 제자이자 외조카인 강백진, 김중진, 제자이자 처남(그의 본처 조씨의 남동생)인 호조참판 조위가 호상을 하였다. 밀양군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 서산(西山) 건좌손향(乾坐巽向)에 묻혔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62세였다. 김종직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당했다. 밀양에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이 때 호랑이가 나타나 찢어진 시신을 지키며 몇 날 며칠을 슬퍼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시신을 거두어 이장하여 안장한 이후에도 호랑이는 무덤을 지키다 결국 그 앞에서 죽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가엾이 여겨 김종직 묘 옆에 호랑이 무덤을 따로 만들어주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묘 옆에는 김종직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호랑이의 설화가 깃든 인망호폐(人亡虎斃) 비석이 있다. 사망 직후 그에게는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가 1494년(성종 24) 문간(文簡)으로 개정되었다. 다시 1708년(숙종 34년) 원래의 시호대로 회복되어 문충으로 다시 복작되었다.
♤ 복호암(伏虎庵)
우령산 전망데크에서 8분여 내려서면, 우측 전방에 암릉 봉우리가 나타나는데 복호암(伏虎庵)이다. 수직 절벽에 가까운 복호암에는 일제시대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복호암은 호랑이가 쭈구려 앉아 밀양시를 내려다 보고 있는 형상인데, 당시 밀양 경시청에서 보면 복호암이 자기들을 노려보고 있다고 생각하여 석공에게 지시하여 암봉을 깨어부수라고 지시하였다. 석공이 산으로 올라가 암봉을 깨뜨리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석공에게 떨어져 석공은 그 자리에서 죽고 나머지 인부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고 한다. 원래 복호암은 더 큰 규모의 암봉이었는데 그 때 일부가 깨져 지금의 모습이라고 한다.
- 복호암 정상에서 가야할 남동쪽 종남산으로 향하는 비슬지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 방동고개
고개 동쪽은 사포마을, 서쪽은 봉황리 방동마을인데, 지금은 우측(서쪽) 방동 꽃새미마을(2.0km) 방향으로만 등로가 뚫려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창녕ㆍ무안 등지에서 밀양장을 가기 위해서는 모두 이 고개를 넘었는데, 등짐 맨 나귀가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넘었다 하여 「방울재」로 불리다, 「방동고개」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종남산(終南山, 662.6m)/ 봉수대(烽燧臺)/ 삼면봉(초동면, 부북면 → 상남면)/ 산불감시초소
종남산은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과 상남면, 부북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원래 이름은 자각산(紫閣山)이었는데, 밀양시의 안산으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남산으로 불리다가, 뒤에 종남산으로 개칭되었다. 밀양시 중심에 솟아있는 산으로 동쪽으로는 만어산, 북쪽으로는 화악산, 서쪽으로는 화왕산과 영취산, 남쪽으로는 덕대산이 병풍처럼 자리잡고 있다. 우령산과 덕대산을 이어주고 있으며, 방동고개· 방동저수지가 있다. 「여지도서」에는 “영현은 종남산으로 부르며, 부의 서남쪽 15리에 있으며 기우제단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종남산의 개칭에는 몇 개의 설화가 전래된다. 그 대표적인 것은 옛날에 이 고을에 큰 해일이 발생하여 남산 꼭대기가 종지만큼 남아 있었다 하여 종지산이라고 했다는 일설이 있고, 다른 한 가지의 민담은 옛날에 종남이라는 의적이 이 산에 숨어 살았다고 하여 종남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 당나라 수도의 남산이 종남이였기 때문에 서울의 남산도 종남이라 하였다. 이것을 모방하여 이 밀양의 남산도 종남산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봉우리 동편에는 고려시대 이래의 남산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 유적이 있으며, 북쪽으로 추화산 봉수대에 응보(應報)하였다.
- 종남산에 올라선다. 정상에는 산불감시요원이 상주하고 있으며, 산불감시카메라탑과 2005년에 복원한 봉수대, 봉수대 설명판, 망원경과 정상석 2개가 있다. 정상부는 어른 키가 훌쩍 넘는 철쭉 군락지로 만발하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 좌측 멀리 비슬산과 창녕의 화왕산이 조망된다. 북쪽으로 밀양시가지 삼문동 물돌이 뒤편으로 구만산과 억산방향이고, 그 우측으로 운문지맥의 운문산과 영남알프스 천황산, 제약산이 조망된다. 종남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탁월하여 사방팔방 막힘없는 일망무제이다.
♤ 밀양남산봉수대(密陽南山烽燧臺)
밀양남산봉수대는 경남 밀양시 상남면 남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봉수대로, 2000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227로 지정되었다. 종남산(終南山: 663m) 제2봉 꼭대기에 있으며 임진왜란 이전에는 남쪽의 김해 자암산봉수대(子巖山烽燧臺)와 연결되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1654년(효종 5)에 새로 설치된 백산봉수대(栢山烽燧臺)를 거쳐 신호를 받았고 북쪽으로는 추화산봉수대(推火山烽燧臺)에 연결하였다. 보호면적은 3,230㎡이며, 밀양시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종남산 봉수대는 밀양시에서 2004. 11~2005. 5까지 공사비 2억 6천만원을 들여 정비하여 지금처럼 깨끗하게 복원하였다.
- 봉수대 서쪽 방향으로 나서서 앞으로 펼쳐지는 전망을 바라보면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지맥 능선과 멀리 팔봉산을 지나 비슬지맥 끝지점인 오우진나루가 희미하게 가늠된다.
- 서쪽으로 시계가 좋으면 지리산 천왕봉도 조망이 가능하다고 한다.
♤ 밀양시 삼문동(三門洞) 물돌이
원래 밀양은 영남루 주변과 북쪽 산기슭이 중심가였고 이를 읍성이 둘러싸고 있었던 전형적인 조선시대 지방 중심지였다. 1902년 밀양을 통과하는 경부선 부설로 성벽의 석재는 모두 경부선 공사에 이용되어 과거의 경관은 거의 사라졌다. 밀양시 삼문동이 위치한 하중도가 밀양강에 둘러싸여 있다. 강물이 300도 가량 원을 그리면서 섬을 만든 뒤 돌아 나가는 물굽이를 흔히 ‘물돌이’, ‘회돌이’라고 부르는데, 경북 안동 하회마을, 영주 무섬마을, 예천 회룡포가 그런 경우다. 이 하중도는 밀양강을 따라 떠밀려온 모래가 오랫동안 쌓여 섬을 이뤘는데, 조선시대 말까지 홍수 피해가 잦아 민가가 드물었던 곳이었으나, 1910년 과거의 용두제(삼문동의 남쪽)를 현재의 삼문제로 개축하면서 홍수 피해가 없는 안정적인 토지로 바뀌었다. 그 후 삼문동은 남쪽의 밀양역과 북쪽 구시가지 사이의 요충지로 변해, 밀양의 시역 속에 완전히 포함되었다. 현재 밀양의 관공서 대부분은 이곳에 위치해 있다.
♤ 밀양강(密陽江)/ 응천강(남천강의 옛이름=밀양강)
밀양강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와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 892m 지점 동쪽 계곡, 고현산(高峴山, 1,033m)에서 발원하여 청도군 운문면을 지나 S자형의 유로를 그리면서 남류하다가 경남 밀양시 상동면에서 동창천(東倉川, 밀양강 본류)이, 상동면 내호리 경계부에서는 지류인 청도천(淸道川)과 합류하여 본격적으로 밀양강으로 불리며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와 상남면 외산리 사이에서 낙동강 본류에 합류한다. 유로연장 99㎞, 유역면적 1,476㎢으로, 이 강은 유로에 비하여 유역면적이 넓어 낙동강과의 합류지점에는 너비 4Km에 이르는 넓은 충적평야(밀양평야)가 발달했고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 쌀 생산량이 많으며 시설채소와 사과, 감, 복숭아 등의 과수재배도 활발하다. 강유역의 중심도시인 밀양시에는 밀양강의 용수를 이용한 섬유와 양조 등의 각종 공업이 발달했다. 밀양시에 있는 강가의 영남루(嶺南樓)는 관광명소의 하나로 매년 아랑제가 열리고 있다.
♤ 덕대산(德大山, 622m)
종남산에서 지맥을 벗어나 남릉을 따라 4Km 지점에 종남산과 같은 형태의 산봉이 솟아 있는데 이 산이 덕대산으로 산 아래에 있는 초동면에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인물이 많이 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산의 전체적인 형세는 종남산과 더불어 내륙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북릉은 종남산에서 중봉을 거쳐 연결되고 동릉은 남산마을 쪽으로 급하게 쏟아지고 있으며 서릉은 무안면 쪽으로 길게 뻗어나가면서 완만한 산세를 펼치고 있지만 산세를 열고 있는 쪽은 남쪽사면으로 초동면을 품고 있다.
♤ 헬기장(573.7m)
헬기장봉우리에 올라 상남면과 부북면을 가르는 능선은 좌측으로 보내고, 지맥길은 우측으로 들어서면서 온전히 상남면 안으로 들어선다.
♤ 밀양시 상남면(上南面)
상남면은 영남지역의 분수령인 비슬지맥의 맨 끝자락에 정기를 모은 종남산과 덕대산의 높은 줄기가 서북방향으로 병풍처럼 둘려진 곳이며, 동남으로는 응천강(남천강의 옛이름=밀양강) 하류와 서남으로는 낙동강 본류에 연접한 광활한 평야지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쪽을 제외한 동,남,북 세 방향 모두 강으로 둘러싸인 곳이며, 일제강점기부터 개설된 송하보(용두보)의 수리시설이 잘되어 도내에서도 유수한 곡창지대의 하나이다. 동쪽으로는 응천강의 하류를 따라 삼랑진읍과 경계를 이루었고, 서쪽에는 덕대산과 들판을 사이에 두고 초동면, 하남읍과 인접해 있으며, 남으로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김해시 생림면과 경계를 이루었고 북으로는 가곡동과 부북면을 경계로 위치한다. 삼한시대 변한의 미리벌이란 부족국과 가락국의 땅이었으며 1895년(고종32년) 밀양부를 밀양군으로 변경할 때 부남면을 상남면과 하남면으로 분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면의 남-북으로 관통하는 신국도25호선이 위치하여, 인근 대도시인 창원ㆍ마산40㎞, 대구 70㎞, 울산ㆍ부산 80㎞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2006년 3월부터 신대구부산간 고속도로가 남북으로 개통되어 상남면 기산리에 남밀양 IC가 개소된 후 더욱 편리해진 교통망과 함께 밀양시의 새로운 관문이 되고 있다. 농업 특산물로는 풋고추, 딸기, 깻잎 등의 시설원예 집산단지이며 약용작물로 맥문동이 대한민국의 시배지로 잘 알려져 있다.
♤ 종남산임도
헬기장에서 15분 정도 내려서면 임도에 도착이다. 이정표(밀양경찰서 5, ↓헬기장, ←대동아파트, ↘종남산, ↖우곡마을, ↑남산·연금)에서 다음 구간 들머리는 남산·연금 방향이다.
366m봉을 넘어서면 좌측 뒤편으로 밀양시내가 넓게 펼쳐져 있고, 우측 뒤편으로 운문지맥이 산너울을 이루고 있다. 우측 전방으로 상남면의 넓은 들판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로 영축지맥이 흐르고 있다.
♤ 이연고개(200m)
잘록이 안부로 좌측의 선명한 등로를 따라 내려서면 '이연마을'인데, 이 마을이름에서 고개 이름을 따 왔다.
♤ 평리고개
우측의 상남면 남산리 평리마을에서 그 이름을 따 왔는데, 우측 멀리로 덕대산(622.1m)이 보인다.
♤ 유대등(341.3m)/ 새미실봉
인근 마산리 무량원마을에 한림등, 신감등, 스물등이 있으며 청도면에도 띠밭등, 무지개등, 상곳등, 굴밭등, 오얏등, 구불등, 개등 등이 있다. 등(嶝)이란 봉우리 또는 산등성이를 말한다.
전에는 송전탑(#16)에 희.준 산패가 시그날에 묻혀 있었는데, 최근 높이 341.3m 산패로 바뀌었다.
♤ 팔봉산(390.5m)/ 뒤쪽에 벙커
팔봉산에서 좌측으로 조망한 상남면 밀양수리들과 이회수리들, 대구-부산 고속도로와 밀양강, 그 너머 경부선 철로가 보인다.
- 팔봉산에서 직진하면 알바, 급좌틀로 내려서야 한다.
♤ 여시태/ 호치(狐峙)
무량원(無量院)에서 연금리(淵今里)로 넘어가는 고개를 여시태 고개라 하고, 무량원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여시태골 이라고 한다. 여우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시태는 여시티에서 온 말로 호치(狐峙), 연금리(淵今里)에 대한 이 지방의 사투리이다. 여어티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연금리와 평촌리를 이어주던 고개이다. 연금리에 있는 여시태 마을에서 고개이름을 따왔다. 여시태는 외금마을 남쪽 여시태의 고개 밑 마을터인데 지금은 집이 없어졌고 옛 기록에 호현으로 되어 있으며 금동역 아래쪽에서 수산현에 이르는 고개라 하였고 여시는 여우이고 태는 티 곧 치의 변화된 음이다. 옛날에 이 고개를 넘나들면서 생긴 길손들의 설화와 전설이 많이 남아있다. 25번 국도를 4차선 차량전용도로로 확장하면서 여시태고개로 이어지는 맥길을 엄청나게 깎아내어 낭떠러지 절개지로 만들어, 기맥길인 건너편 171.5m봉으로 이어가는 길이 없어졌다. 나주임씨 가족묘원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좋다. 5번 국도에서 평촌마을로 내려서는 지선 도로가 보이는 평촌교차로와 그 좌측편의 감나무 단지 위의 155m봉과 그 뒤의 144m봉, 인산(213.9m)과 붕어등(278.4m)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가늠해본다.
- 제일비료 공장을 지나 도로를 따라 내려서다 좌측의 여시태고개 방향을 올려다보고 도로를 따라 내려선다. 평촌교차로에서 우측 조음리 서낭달마을로 이어지는 22번 도로와 만나 좌측 교차로 방향으로 나간다. 평촌교차로 고가도로(마산교) 앞이다. 고가도로 위로 25번 국도가 지나가고, 여기서 삼랑진/평촌리 방향으로 고가도로 밑을 통과하여 직진한다.
♤ 평촌고개
마산교 밑을 지나 광성스틸 좌측 도로(22번 도로)를 따라 약간 오르면 평촌고개다. 평촌고개에는 '←작원관(鵲院關)', '← 만어사(萬魚寺)', '← 효심추모관(孝心追募館)', '무지개전원교회' 등의 입간판과 볼록거울이 세워져 있고, 그 우측 옆에는 '평촌부대 앞 버스정류소'와 교통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교통표지판 뒤편 감나무 단지로 오르는 농로길 철문 옆으로 오른다.
♤ 평촌리(平村里)
마을 이름과 같이 평평한 들판에 있는 마을이다. 동명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임진왜란을 비롯한 크고 작 은 국난을 당했을 때 이 마을만은 피해를 당하지 않고 평화를 지킬수 있었다는데서 평촌이 되었다고도 한다. 종남산 줄기에서 퍼져 내린 나지막한 야산 한자락이 무량리와 경계를 이루 었고 남쪽 마산리와의 사이에도 작은 산봉우리 하나로 구분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지금의 평촌을 중심으로 응천강 건너의 삼랑진읍 숭진리 일부와 용성리 일부를 편입하여 법정리로 삼았다. 단위 마을은 평촌 본동과 대흥동으로 나누어 지고 있다.
♤ 마산고개/ 두번째 만나는 감나무 농장
잘록이 안부이다. 좌측 아래로 마산마을이다. 삼각형 형태의 독특한 건물이 보이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일제수난 기념교회'란 명패를 단 '무지개 전원교회'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야생화 단지가 교회 안에 있다고 한다.
- 감나무 단지 최 상단인 144m봉(개념도 146m)에 오르기 전 좌측으로 보면, 마산마을과 평촌리 이회수리들 너머에 밀양강교와 삼상교가 길게 뻗어 나가고, 그 뒤로 영축지맥 능선이 산너울을 이루고 있다.
- 감나무 농장 최상부 146m봉으로 가다가 90도 좌틀하여 배죽고개 내려간다.
♤ 마산리(馬山里)
동네 안산이 말처럼 생겼다 하여 말미라 불리어 오고 있는 고촌이다. 종남산,덕유산의 산줄기가 서로 엉기어 동남향으로 뻗어 내려오면서 수 많은 등성이와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동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당시 동산리 세천에 속해 있던 무량원을 합치고 말미(馬山)와 느리미(晩山)마을을 합쳐서 하나의 법정리가 된곳이다. 마산마을 안 이곳 저곳에서 지석묘와 각종 석기, 패총 유물 등 매장 문화재가 발견된 일이 있어 선사시대 이래의 주거지 임을 짐작하게 하는 곳이다. 이 마을 서쪽에 이웃해 있는 무량원이란 관영 여숙(旅宿)이 조선초기에 폐쇄되어 옮겨온 후 무량원이 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금동역이 백족으로 옮겨지고 백족에서 다시 이 마을로 옮겨짐에 따라 마산원이 역으로 승격된 바 있다. 그러므로 이 곳은 역 마의 사육과 관리 등으로 말과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고 영남대 로의 교통 요지로서 관인과 여행객의 출입이 빈번한 도회를 이룬 마을 이다. 그러나 역은 곧 없어지고 원도 제도의 폐지와 함께 그 자취가 사라졌다.
♤ 무량원(無量院)
마산리 서북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마을이며 조선 초기 이래의 원(院)터가 남아 있다. 원(院)이란 역과 역 사이 또는 역 부근에 공용으로 여행하는 관원들을 위하여 설치한 국영의 여숙소 같은 곳인데 원집 이라고도 하였다. 원집에는 원주(院主)를 두어 소속된 전답(田畓)을 경작하여 경비 충당을 했으며 인근의 승려들을 원주(院主)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이 곳에도 옛날부터 절이 있었으며, 무량(無量)이란 지명도 절 이름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무량원(無量院)은 금동역(金洞驛)과 하남면 양동역(良洞驛) 사이의 원으로 그 북쪽 산자락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묘소가 있었으나 연산군 무오사화(1498)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 후 부북면(府北面) 대동리(大洞里) 생가 곁으로 이장하였다. 따라서 이 때에 무량원(無量院)은 폐쇄되고 마산리로 원(院)을 이전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생원 이경운(李慶雲)이 입촌하여 성주(星州) 이씨(李氏)의 구거지(舊居地)가 되었다.
♤ 배죽고개/ 시친이[(洗川)고개/ 세번째 만나는 감나무 농장
배죽고개는 경남 밀양시의 상남면 동산리에 있는 고개이다. 배죽이란 이름은 고개 아래의 배죽마을에서 유래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는 배죽(白足,白竹,仁山)이라고 표기하였다. 배죽은 백족에서 변화된 음으로, 옛날 마산(馬山) 앞에 있는 돌더미에서 백마가 나타나 강물을 마시고 사라져버린 뒤에 그 발자국을 남겼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중세천마을과 상세천마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명 시친이(洗川)고개라고도 한다.
- 배죽고개는 중앙선이 없는 아스팔트 포장길이다. 감나무 농장 사이로 우측 능선을 향해 오른다.
♤ 인산(213.9m)
129m봉에서 좌측 아래 삼남초교가 있는 인산마을이 보이고 멀리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오우진나루가 가늠된다. 인산마을로 통하는 고개(92m)를 넘어 감나무단지 정상인 151m봉에 올라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등로 좌측으로 만산(87.6m)을 지나 밀양강교와 삼산교로 이어지는 전경이 조망된다. 준희님 산패가 있고 지맥길은 좌측으로 내려선다.
♤ 붕어등(鲫魚嶝, 278.4m)
붕어등은 경남 밀양시 상남면 동산리에 있는 고개이다. 주위에 인산, 처녀묘등, 배죽고개 등으로 이루어진 넓은 산지가 있고, 양쪽에 이회수리들과 하남평야가 있다. 붕어등에는 이름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이 전설에서 지명이 비롯되었다.
- 준희님 산패와 3등삼각점 밀양 314가 있다. 지맥길은 좌틀이다.
♤ 밀양시 상남면 어은골(魚隱谷, 魚隱洞)
큰 어은동과 작은 어은동으로 땅이 나누어져 있다. 풀숲이 우거진 마을앞 질펀한 늪속에 물고기가 숨어 살았다 하여 어은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이 곳의 지형적인 조건으로 보아 제방이 없었던 시절에는 낙동강 물이 밀어닥쳐 마을 앞 숲속으로 고기가 숨이 들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옛날 이곳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밤낮없이 찾아오는 과객들 때문에 그 치닥거리로 여간한 부담과 고민이 아니었 다. 과객을 줄이기 위하여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던 어느 날 스님 한분 이 찾아왔다. 주인은 스님에게 과객을 줄일 방도를 의논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손님의 발을 끊어 버리게 할 수는 있지만 후회하게 될것이라 고 하면서 머뭇거리자 주인은 그 방도를 캐어 물어서 스님은 하는 수 없이 주인더러 집 앞에 있는 연못을 묻어버리라고 일러 주었다. 주인은 하인들을 동원하여 연못에 흙을 반쯤 메웠을 때 난데없이 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날개 달린 붕어 세 마리가 연못에서 솟구쳐 나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후 부잣집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어졌으나 그 대신 식솔들에게 연달아 우환이 생겨 여러 가지 재앙이 발생하더니 급기야 재물이 없어져 가세가 갑자기 기울었다. 주인은 그제서야 후회를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연못에서 날아간 세 마리의 붕어는 마을 뒷산에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어은동에는 그 연못의 자취가 남아 있고 세 마리 붕어가 죽은 곳을 붕어등 또는 붕어뫼라 전하고 있다.
♤ 처녀묘등(210.3m)/ 육각정자
준희님 산패가 달려이고, 정자앞에 운동시설이 방치되어 있다. 운동시설 앞에 처녀묘가 있는데 규모가 크다.
처녀묘등에는 이 지역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오랫동안 장가를 가지 못하고 혼자 살던 총각이 홍수 때 밀양강으로 떠내려 온 처녀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고 여기에 묻어 주었더니 곧 장가를 들게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묘로, 이후 장가를 못 든 노총각들이 이 곳에 와서 제를 올리고 치성을 드리면 바로 장가를 들게 된다고 한다.
- 여러 기의 묘지 아래로 낙동강변 마을인 오산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강 건너로 삼랑리와 묘봉산(283.5m)이 조망된다.
♤ 외산공소/ 소구리굼
비슬지맥의 끝지점을 외산교 앞보다는 외산마을 외산공소 좌측으로 내려가서 3번군도를 건너 소구리굼에서 산줄기는 끝이 나고 오우진나루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km정도 되는 넓은 들판에 비닐하우스촌이다. 걸어서 간다면 소구리굼에서 동쪽으로 난 제방을 따라가 오산교앞에서 외산교에서 온 제방길을 만나 동북으로 난 삼남제방을 따라가면 밀양강이 낙동강에 합수되는 오우진나루이다. 마을 공동묘지 사이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이어가다, 앞쪽 잡목과 잡풀이 앞을 막는 곳에서 우측 넓은 수레길따라 내려서는데 지맥길은 우측으로 내려서지 않고, 좌측 직진 방향으로 잡목과 넝굴 잡풀 사이를 헤치고 내려서서 외산마을과 외산공소를 거쳐 소구리굼을 지나 제방둑길을 따라 오우진나루로 이어진다. 처녀묘등을 내려와 오산마을과 밀양강과 낙동강의 합수점과 낙동강 건너의 진영읍 쪽으로 보고 좀 넓은 수렛길을 따라 그대로 쭉 내려오면 외산교앞으로 떨어지니 외산마을로 내려갈려면 신경을 써 좌측으로 가야한다. 외산공소를 지나서부터는 지형이 모두 논밭으로 구획정리가 되어있어 지맥길을 가늠키 어렵다. 양수장 건물을 등대삼아 농로를 따른다.
♤ 외산리(外山里)
상남 평야 끝 부분인 낙동강 본류와 연접한 곳에 몇 개의 독뫼(獨山)와 나지막한 야산들이 능선을 이루면서 동산리와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동리이다. 그런가 하면 동으로는 응천강, 남으로는 낙동강 본류, 서로는 구박천의 흐름으로 마치 강류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이 드는 아늑한 곳이다. 동산과의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있는 외산 본동과 오산 등으로 표기되고 있는 오미라는 낙동강 유역의 강마을이다. 그리고 어은동과 골안(谷內), 해동마을들이 1914년 행정구역 정비때에 편성된 외산리의 단위 마을이다.
♤ 오우진(五友津)나루
오우진나루는 경남 밀양시 상남면 외산리 밀양강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지리적 요충지의 나루터로, 삼랑진읍과 김해시 생림면을 이어주는 나루터이다. 조선시대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모아놓는 조창과 통창 통영이 있었으며, 가까운 고을의 세미를 여기서 배에다 싣고 하구언→남해안→서해안→강화포구를 지나 서울의 마포나루까지 수송하는 주요한 수운의 요지였다. 오우진이란 이름은 삼랑포 뒤의 후포산(뒤기미, 뒷개뫼)에 여흥 민씨(驪興 閔氏)의 재사(齋舍)인 오우정(五友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뒷기미나루라는 이름도 후포산 아래에 있다고 하여 명명한 것이다. 「여지도서」에는 오우정진(五友亭津)이라고 되어 있고, ‘부의 남쪽 40리에 있고 밀양강가에 있다’고 적혀있다.
- 나루 건너 삼랑진에서 우측 마사리로 낙동강을 건너는 경전선 낙동강교와 그 뒤 삼랑진교가 지나고 있다
- 낙동강 강변의 마사리 마사1구 마을과 그 뒤 작약산(芍藥山, 377.8m)이다. 작약산 좌측 뒤편 멀리에 무척산(無隻山, 702.2m)이 보인다.
♤삼랑진읍(三浪津邑)
삼랑진읍은 경남 밀양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읍이다. 밀양, 양산, 김해 등 세 지역이 접경을 이루며, 경부선과 경전선이 분기하는 철도교통의 요지이다. 밀양강(응천강)이 낙동강 본류에 흘러들어 ‘세 갈래 물결이 일렁이는 나루’라 하여 삼랑진이라 하였다. 예로부터 영남대로와 접속하는 수운의 요충지로 조선 후기 동안 낙동강의 가장 큰 포구 중의 하나로 1765년(영조 41년)에는 삼랑창(三浪倉, 후조창 後漕倉)이 설치되어 밀양, 현풍, 창녕, 영산, 김해, 양산 등 여섯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를 수납, 운송하며 물자의 최대 집산지로 성장하였으나, 육로교통의 발달로 조창이 없어지면서 읍의 중심이 삼랑리(낙동)에서 송지리로 이동하게 되었다. 1928년 이전까지는 자연, 인문지명으로서의 삼랑진으로만 존재하였으나 1905년 송지에 삼랑진역이 들어서고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번창하면서 공식 행정지명을 ‘하동’에서 ‘삼랑진’으로 개칭하였다. 종소리 나는 만어사의 경석과 임진왜란 전적지 작원관이 알려져 있으며, 특산물인 딸기는 시배지로 유명하다.
♤ 밀양 삼랑진읍 작원관지(密陽 鵲院關址)
작원관은 고려시대 이후 동남의 육로와 남북간 수로의 요충지로서 문경의 조령관과 함께 동래에서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과 국방의 2대 관문 중 하나이다. 당시 김해와 밀양 등 낙동강 유역에 창궐하던 왜적들의 침공을 방비하던 요새였던 작원관은 작원진 나루터로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던 원. 관. 진의 역할을 수행했다. 작원(鵲院)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때 어느 임금이 만어사 행차를 위해 이곳 나루터를 건넜을 때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수많은 까치들이 지저귀며 임금 일행을 맞이하여 까치원이라 하였다는 설이 그 하나다. 또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서 백제의 군사를 맞아 싸을 때 백제의 왕이 위기에 몰리게 되자. 부왕을 따라 종군한 공주가 금까치로 변해 날아다니며 신라 진영을 교란시켰고. 백제의 왕은 이를 틈타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금까치는 김유신 장군이 쏜 화살에 맞아 검세 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후 금까치가 날아간 마을을 금새라 했고 이 곳을 까치원이라 했다는 게 두 번째다. 임진왜란초 1592년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한 소서행장의 왜군 1만8천700명은 낙동강을 따라 밀양으로 진군했다. 그해 4월 18일 밀양부사 박진은 300여명의 병졸과 약간의 수병.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이곳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결사항전했고 더 이상 북진을 못한 왜적은 한밤 산기슭에 수천명의 군사를 매복시켜 놓았다가 이튿날 새벽 일제히 조총을 쏘며 아군의 배후를 기습공격하니. 아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중과부적으로 군사를 거의 잃고 후퇴하게 된다. 이것이 작원관 전투이며 거침없던 왜적의 진군을 늦춘 성공적인 전투로 평가된다. 작원관 항전이 있은 지 400여년이 흐른 지금. 후세들은 이곳에 그날의 일을 돌에 새겨 호국영령들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길이 받들고자 위령탑을 건립해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다. 주변의 관광지로는 만어사와 삼랑진 양수발전처. 숭진리 3층석탑 등이 있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비슬지맥 졸업을 축하 축하드립니다~
함수점에 서면 가슴이 벅차 오르지요~
이해합니다~
법광대선배님!^^
먼저 주왕지맥을 마지막으로 162개 전 지맥 완주를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가야산 모임에서 뵐 수 있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답니다.
막걸리 큼지막하게 한사발 따라 올리겠습니다.
비슬지맥 언제 졸업하셨어요? ㅋㅋ 몇 년 걸리셨는지 궁금하거든요. 만나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비슬지맥 2017년5월20일 출~6월4일 6구간 졸업했습니다~
162지맥중 비슬지맥을 첫번째루 했슈~
그러시다면 162지맥을 4년만에 끝내신거네요. 빠르게 끝내신 택입니다.^^
야근이 끝나고 바로 itx 타시고 비슬지맥을 향하셨네요.
피곤하신 몸은 itx에서 잠시 쉬시고 산에 드셨을 테니
많이 피곤 하셨을텐데 물기 털며 우령산 까지 도달
하셔서 비박도 하시고..
전 산에서 잠시 난장은 해봤어도 비박은 안해 본지라
비박 하는 기분이 궁굼 하기도 하네요..
난중에 기회되면 비박도 해봐야 겠어요..
어떤 기분이며 분위기가 어떨지요.
새벽에 기상하셔서 산행 시작 하려 할때 부산에 뛰어님과
희야님도 만나시고 산중에서 아는분들 만나면 무쟈게
반가운 마음이 앞서죠 ^^
고맙게도 새벽 이슬 물기도 털어 주고 가시니 발걸음도
가볍게 걸음 하셨겠어요.. ㅎㅎ
자주 안쓰시던 아재개그 하시려니 좀 머쓱하시죠..
자주 쓰다보면 은근 매력적이고 재미 나답니다. ㅎㅎ
기럭지 긴것들이 하나둘씩 뒤안길로 밀려 나네요.
홀로 마무리 하신 기럭지 긴 비슬지맥 축하드립니다.
맞습니다. 다류대장님!
휴가를 따로 내지않고 쉬는 날 내려갔습니다.
야근 마치고 ITX로 내려가며 잠을 청했구 그래서 계획에 우령산에서 비박하는 시간을 넣어둔 거구요.^^
우령산에서 신새벽에 예기치않게 반가운 분들을 만났습니다.
나중에 트랙을 확인하니, 19시간 31분에 45.36km로...
외산교에서 거꾸로 비슬지맥을 타고 올라가 화악산을 찍고 다시 되돌아와 아래화악산에서 돛대산으로 하산하셨더군요.
그리고 지도상의 유대등을 오르며 경호님도 만났네요. 사진으로만 보았는데 반가운 얼굴이라 딱 알아봤습니다.^^
다음번 타자로 호미지맥을 해야할지, 문수지맥을 해야할지 저울질 중입니다.
문수지맥 → 덕산지맥 → 보현지맥 → 팔공지맥 순으로 해얄것 같아서요.
이제 날씨가 뜨거워졌습니다. 살살 더위에 적응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비슬지맥 졸업을 축하합니다.
제게 영남의 지리는 안갯속이 아니라 아주 캄캄한 밤입니다. ㅋ
홀대모 선배님들의 산행기를 보며 조금씩 지명과 줄기부터 머리에 담고 있습니다.
지리에는 필연적으로 역사와 인물, 지역의 문화가 함께 합니다.
특히 '퐁라라'님의 지리, 역사, 인물, 산야초 등을 망라한 자세한 후기를 보면 그 수고로움과 함께 정성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
그나 저나 저는 하루 20km를 넘게 걸으면 이틀은 꼼짝 못하는 비실 체력과 음침한 곳만 들어서도 섬칫하는 유리 멘탈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과 부러움만 앞섭니다. ㅠㅠ
봉화동천선배님!
못할거 같으면서도 그게 점차 적응이 되더라구요.
누가 시키면 절대로 못하는 일입니다. 내가 기꺼이 하고자 하니 되더군요.^^
저는 홀대모의 전통을 살려 가급적 주위를 넓게 살피며 둘러가는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지맥을 하는 방법은 여러가지 입니다.
무한도전처럼 속도를 위주로 산행하는 방법도 있구요. 나름 저마다 특색이 있어서 좋습니다.^^
개성을 멋부리며 마음껏 가는 것은 좋은데,,,
홀대모 산방에 올려지는 후기를 운영진에서 약간 거르기로 하였습니다.^^
첫째는 너무 날림으로 무성의하게,
즉 다시 말해 후답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산행기를 먼저 거르고,
그 다음으로 허영과 겉멋부림으로, 폼생폼사 산행에 정성을 다하지 않는 산행기도 걸러 내실을 기하고자 운영진에서 논의하였습니다.
어찌보면 지나친 간섭일 수도 있겠으나 홀대모가 어딥니까?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 이뤄낸 곳이고, 지켜보고 계시는 곳이기에 여타 산방과는 차별을 두는게 당연한 일입니다. 이점 양해 있으시길 바랍니다..^^
퐁라라님!!
비실이가 종주했던 비슬지맥종주길이 가물가물하여 퍼갑니다. 꾸~~뻑
비실이대선배님!
퍼가서 어디다 쓰시게요.^^
이 산행기는 제께 아니라 여러 선배님들이 남겨주신 산행후기를 정리한 짜갑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꼭 전달해 주십시요.
벌써 봄모임이 목전입니다. 오늘 야근하고 낼아침 출발이네요.
저도 선배님들을 뵈올 생각에 기대기대 두근두군 한데 비실이부부대선배님은 큰 경사를 앞두고 오늘 잠을 못 이루실듯 합니다.
내일 모임장소에서 반갑게 뵙겠습니다.^^
장거리 긴지맥 비슬지맥을 완성하셨네요 초입 접근이 생식마을 이상하기도 하고 대구의 대표산 비슬산도 지나고 4개의 지맥도 출발하는 비슬지맥 종남산에서 바라보는 밀양시의 휘감아도는 하천의 모습은 감탄입니다 퐁라라님 비슬지맥 완성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화이팅입니다 ~~~
세르파선배님!
출발할 때는 언제 합수점에 이를꼬 걱정되지만 시작하면 끝이 보이더군요..^^
비슬지맥 영남에서는 의미가 깊은 산줄기네요.
종남산에서 조망이 비슬지맥 졸업구간의 백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봉수대 성벽을 따라 40여분 주위의 운무가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른 선배님들 올려주신 밀양시내 물돌이 사진을 많이 감상했기에...
구름이 다 걷힐 때까지는 기다리지 못하고 망원경으로 당겨보고 출발했습니다.^^
이번 구간도 세르파님 띠지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드리고요.
상사병 나면 어쩌려구요. 팬관리 차원에서 가급적 얼굴좀 보여주세요~~ ㅎㅎㅎ
운영자님 죄송합니다 가을모임부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이틀동안 32km, 22시간에 걸친 구간 장도를 이어가셨네요.
이로써 세번에 걸친 비슬지맥도 뒤안길로 두셨습니다.
비슬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다행히 비소식은 없었고 맑은 날씨로 조망도 시원스레 드러납니다.
우령산의 비박처에 한밤중에 멧돼지 울음소리가 난다고 해서 섬뜩하기도 했답니다.
종반부의 팔봉산은 지난달 초에 준.희선생님께서 다녀가신 곳이어서 친숙감이 드네요.^^
만만치 않은 한줄기 마무리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봄모임 준비에 너무 바쁘신데 크게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비가 조금 온다기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몇 방울 후둑후둑 하고 말더군요.
준희선생님이 붕어등과 처녀묘둥에 산패가 자꾸 실종되는게 언놈 소행인지 서운하다 하셨습니다.
다행히 인산 산패는 높이 매달려 손이 안타고, 팔봉산 산패도 잘 살아있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그렇잖아도요.~ 선생님께서 정성스레 달아 주셨던 한달전 모습인데요. ㅎ
아~ 방장님 시그널 고리가 찢어져 땅에 떨어져 있었어요. 나무가지에 묶어두고, 홀대모띠지도 하나 걸어두었습니다.
여기 말고도 방장님 띠지 두어 군데 더 보았습니다.^^
비슬지맥을 여름이 해서
정말 대구,경북이 덥구나..란걸 느꼈는데
그나마 큰 더위가 오기전 마무리 하셨군요.
합수점에서 두개의 강이 만나는 모습을 보면
늘 뿌듯하더군요..
합수점에서 뒤로 보이는 무척산이 참 멋져 보입니다.
긴 산행 수고 많으셨습니다. ^^
감사합니다. 똥벼락님!^^
아 저 큰 몽팅이가 신어산이 아닌 무척산인건가요.^^
팔공을 여름에 지날거 같아 은근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물만 있으면 더위는 감내할 자신 있습니다. 추위보단 더위가 낫더라구요.
내일 모임에 법광님과 함께하심 좋을텐데 어떠신지 몰겠네요.^^
나홀로 비박 까지 대단 하십니다
전 아직 비박은 해 보지 않았는데 넘 수고 많았서요
이틀날은 날씨도 좋고 늘 지맥은 힘들지만 하나하나 완주의 기쁨이 배가 되는것 같네요
다시 한번 비슬지맥 완주 축하 축하 드립니다^0^
넵 와룡산선배님!
무거운 침낭이나 텐트는 언감생심입니다. 항상 추위와 싸워야 해서 긴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짧게 자고 일어납니다.^^
어서 빨리 체력을 길러 옷가지 히나라도 더 넣고 갈려고 노력 중입니다. 이제 여름이니 한시름 덜었는데 여름은 모기때문에 모기장텐트는 필숩니다.^^ 감사합니다~
종남산에서는 누구나 오래 머무나 봅니다.
밀양시내를 휘감고 돌아가는 밀양강모습이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종남산에서 내려다본 외산교 방향을 내려다 밧을때 금새 닿을거같아서 룰루랄라 했는데요.
막판에 끝없이 이여지는 감나무밭에 6월의 따가운 햇살 죽는줄 알았습니다.
비슬지맥 졸업 축하드림니다.
네, 부뜰이운영자님!
종남산에서 일출내지 조망을 염두에 두고 1시간 거리인 우령산에 비박지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비온 뒤라 운무가 꽉 들어차 벗겨지는 것도 장관이었지만 다 기다릴려면 1시간은 족히 걸릴것 같더군요.
다행히 부뜰이운영자님 올려주신 사진도 보았기에 일정상 출발하였습니다.^^
감나무과수원은 평촌고개, 마산고개, 배죽고개, 인산 올라가는 길에도, 처녀묘등 가는 길에도... 계속 되더군요.
모두 진영단감으로 시중에 풀리는 그 단감인것 같습니다.
한 가지에 감꽃을 하나씩만 남겨두어야 감이 크게 잘되고 이듬해에도 잘 열린다고 한참 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붕어등과 처녀묘등에 표지판이 없어졌어요. 누군가 일부러 제거한 모양이죠.
다행히 인산의 표지판은 높다랗게 설치되어 살아남았다고 보였습니다.. 감사~ 저 지금 출발 준비 중입니다.^^
퐁라라님의 산행기를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보게 됩니다.
산을 향한 그 치열함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
1시간을 기다려 삼문동 물돌이를 확인하는 끈질김이라니....
비박장소에서 쥐를 잡아가며 밤을 다스리는 열정이라니....
비박장소에서의 간결한 먹거리, 팩소주 하나에 캔맥 두 개. ㅎ ㅎ ....
그리고 멧선생 헛기침하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그 오붓한 장면에서 옛 기억 하나가 소환되네요.
대간 시작한지 50여일이 다 되어가던 1997년 한 때,
단목령 근처 한밤중, 텐트 주위에는 멧선생들 운동회가 열렸습니다.
텐트에 접근은 못하고 저들끼리 치고박고 난리법석이었지요.
그 난리통에도 피곤한 몸은 달콤한 꿈나라로 빠지고 말았는데......
날머리 마루금 소구리굼.
저도 외산공소까지만 잇고 일행들 일정 때문에 외산교로 빠졌었는데,
작년 산벗들 완주 축하산행 때 소구리굼을 훑으며 밟았던 기억이 납니다.
비슬지맥을 단 3번만에 완주하신 열정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느라 고심하신 흔적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앞으로도 아름답고 치열한 산행 계속 이어가시길 힘껏 응원합니다. 즐감했습니다.
범산선배님!
저도 2005년 대간 북상 중에 두로봉 에서 비박을 했는데요.
멧돼지 새끼들이 텐트주위에서 꿀꿀거려 코펠 뚜껑을 들고나가 열심히 쫒았던 기억이 소환됩니다.^^
범산선배님이 올려주신 소구리굼 묘지쪽으로 내려서는 사진 보았습니다.^^
외산리로 올라가 소구리굼이라도 넘어볼까하다가 우회했습니다.
저는 갠적으로 평지도 재미있게 잘 걷고, 추위보다 더위를 더 잘 견디기에 한편으로 여름이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