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용화사(龍華寺)
충북 청주시 서원구 무심서로 565. [사직1동 216-1]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
창건 및 연혁
용화사의 사적(1933년 10월에 기록한 법당 상량문)에 의하면, 1902년 3월 14일 고종의 후궁인 엄비(嚴妃)의 명에 의해 청주 지주 이희복이 창건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엄비는 1901년 어느 날 낮잠을 자고 있었다. 천지가 요동하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가자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피어오르면서 일곱 선녀의 부축을 받고 미륵부처님이 나타났다. 미륵부처님은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으니, 큰 절을 지어 우리를 구해달라.’고 간청하며, 이와 같은 사정을 청주군 지주에게 물어보라 말한 뒤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 이에 엄비는 고종에게 고하여 청주군 지주에게 어명을 내리고 조사하도록 하였다.
같은 시각 청주군 지주 이희복도 같은 내용의 꿈을 꾸었다.
3일 후 어명을 받은 이희복은 자신의 꿈이 엄비의 꿈과 일치한 것을 알고 필시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하여 사람들을 서쪽으로 보냈다. 과연 그곳에 가니 큰 늪이 있었으며, 이희복은 늪의 물을 퍼내고 보니 그곳에 칠존의 석불이 묻혀있었다.
그 일이 어명과 부합되는 일이라 상고하니 엄비는 너무나 신기하고 기뻐서 내탕금을 내려 그곳을 정비, 사찰을 짓고, 일곱 부처를 안치토록 했다.
이에 이희복은 상당산성 안에 있던 보국사(輔國寺)를 이곳으로 옮기고 용화사(龍華寺)라 했다.
용화사라고 한 것은 미륵불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설법도생하였기 때문이다.
용화사의 창건 당시 사찰 규모는 미륵전 15칸, 산신각 칠성각 3칸, 설교전 15칸, 행랑 4칸의 비교적 큰 규모였다.
이후 1935년 화재로 불타 버리자 김원근(金元根)거사가 당시 충북도청 부속 건물인 선화당(宣化堂)을 매입, 이곳에 옮겨 법당 등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한국전쟁 때는 법당이 완전히 소실되어 칠존 석불도 노천에 방치되었다. 1972년 콘크리트 법당인 미륵보전을 새로 지어 칠존 석불을 안치했다.
1995년에는 용화보전을, 2008년에는 극락전을 새롭게 마련하고, 칠존 석불을 모셨다.
성보문화재
현재 용화보전(삼불전), 극락전, 관음전, 삼성각, 팔각구층석탑, 용화지문(일주문, 범종루) 등이 있다. 무엇보다 보물로 지정된 용화사 석조불상군이 있다.
용화보전은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안으로 가면 1층인 통층 구조다. 용화보전에는 용화사석조불상군 중 미륵불, 석가모니불, 약사불 등을 모셨으므로 삼불전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세 분의 부처님 좌우로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이 자리한다. 석가모니부처님 등위에도 선각으로 새겨진 분이 있으니, 불단 뒤로 가서 친견하시길.
극락전에는 새롭게 모신 아미타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의 삼존불이 자리하며, 용화사석조불상군 중 유마거사, 미륵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석조상도 자리한다.
용화사 이전 칠존불이 계셨던 사찰은?
1992년 국립청주박물관이 옛 절터인 이곳 용화사 부근에서 발굴한 청동반자의 명문 판독결과 고려 후기에 큰 사찰이었던 사뇌사(思惱寺)라 밝혀졌다. 사뇌사는 신라 말이나 고려시대 초에 창건된 대찰로 일부 학계에서는 몽고의 4차 침입 때 유물들이 매몰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설에는 삼국통일의 의지가 태동하던 선덕여왕 대에 미륵불 칠본존을 중심으로 70칸 규모의 사찰로 창건되어 신라 화랑들의 심신 단련과 군사들의 충성을 맹세하는 도량이었고, 이후 여러 차례의 병화(兵火)로 법당은 소실되었으며, 미륵불은 대홍수로 무심천에 묻혔다고 한다.
청주 용화사 홈페이지
http://www.yonghwas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