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7월 5일 금요일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 『로마 미사 경본』: 신심 미사, 19-1.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 『미사 독서』 Ⅳ: 신심 미사, 19-1.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디 양반 가문이었으나,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1836년 열여섯 살에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다음,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진쟈상(金家巷)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49년 11월 25일 비오 12세 교황은 그를 한국에서 전교하는 모든 성직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 교회의 대표 성인으로 세웠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과거 대축일이었던 7월 5일에 성대하게 신심 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말씀의 초대
즈카르야는 주님의 계명을 어기는 이들을 책망하다가 주님의 집 뜰에서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는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 덕분에 환난도 자랑으로 여긴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너희는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즈카르야를 살해하였다(마태 23,35 참조).>
▥ 역대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4,18-22
그 무렵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18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1-5
형제 여러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한국 순교자의 영성』, 가톨릭 출판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참수되기 전에 남긴 말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았습니다. 세례 때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라는 사제의 질문에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은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과 연결된 우리의 믿음을 너무 쉽게 다른 것들과 바꾸어 버립니다.
바빠서, 수험생이라서, 돈을 벌어야 해서, 교우들과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상처를 받아서 등 다양한 이유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말로 소중한 가치는 지키고 간직하여야 하는 대상이지 버림의 대상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과 연결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신앙 때문에 어려움이나 갈등을 겪을 때마다 오늘 복음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성령께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우리 영혼에 들려주고 계십니다.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십자 성호를 긋고 성령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며 믿음을 지키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한국 교회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1845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확고한 용기로 순교의 화관을 받았습니다. 비록 1년의 짧은 사목이었지만 신부님이 뿌린 씨앗은 한국 교회의 성직자들로 열매 맺었습니다. 드디어 2009년에는 5000번째 사제가 탄생했습니다. 신부님이 사제서품을 받은 후 164년 만의 일입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의 한인 성당도 주보성인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입니다. 해외에 있는 많은 공동체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주보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태어난 곳은 솔뫼입니다. 솔뫼는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는 뜻을 지닌 송산(松山)의 우리말입니다. 한국을 방문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솔뫼를 방문하셨습니다. 성지는 2004년에 복원한 성인의 생가와 함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관, 소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 및 기념탑 등으로 조성됐습니다. 기념관은 성당을 비롯해 성인의 생애와 사목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김대건관, 대전교구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내포교회관, 기증 유품실, 소영상관 등으로 이뤄졌습니다. 김대건 성인의 삶과 신앙을 보고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솔뫼에서 태어난 성인이 순교로 생을 마감한 곳은 서울 새남터입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분은 김대건 신부님뿐만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낳은 순교 성직자 14명 가운데 11명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11명 가운데 8명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 그리고 성 샤스탕 신부님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새남터에는 현재 이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전통 한옥 양식으로 세워진 새남터성당에서 꼭 둘러봐야 할 곳은 2006년 문을 연 '새남터 기념관'입니다. 모두 4개 공간으로 이뤄진 기념관에서 '도입 공간'(입구)은 새남터성지 역사와 103위성인 성화를, '전시 공간'은 천주교 수용과 창설, 박해 및 순교과정 유물들을 전시했습니다. 또 '추모의 장'은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 14인의 흉상과 부조 및 추모대가 있습니다. '체험 및 교육 공간'은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해를 모신 조배실과 영상물 상영실, 박해 체험 공간 등으로 꾸며졌습니다. 경기도 안성 산골짜기에 있는 미리내는 성인이 묻힌 곳입니다. 당시 대역죄로 처형당한 김 신부님의 유해를 거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성인이 순교한 지 40일이 지난 후 목숨을 걸고 성인 유해를 거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민식 빈첸시오(1829∼1921)입니다. 미리내는 다름 아닌 이민식의 고향입니다. 성인이 미리내에 묻힌 사연입니다. 미리내(은하수의 우리말)는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신자들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달빛 아래 냇물과 어우러져 은하수처럼 보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경당 앞에 있는 네 개의 묘 가운데 성인의 묘는 왼쪽에서 두 번째입니다. 성인의 왼쪽은 강도영 신부, 오른쪽은 차례대로 페레올 주교ㆍ최문식 신부의 묘입니다. 묘역 위편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어머니 고 우술라와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순교하실 때, 오늘날 이렇게 많은 사제가 배출되고, 신앙인이 많아지고, 신앙의 자유가 생기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박해의 칼이 너무 강하고,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순교자들의 피와 땀 위에 이렇게 아름다운 한국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순교자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진 교회를 발전시키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순교자들의 피와 땀이 무색할 정도로 나약하고,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잠시의 편안함과 육신의 자유보다는 영원한 삶과 그 영원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참된 신앙을 선택하였고 그래서 오늘 우리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의 수호성인이 되셨고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존경하는 성인이 되셨으며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편안하고 쉬운 길보다는 어렵고 힘든 길 그러나 보람되고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길은 때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줍니다. 하지만 그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그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키워주고 그러한 끈기는 영원한 삶을 갈망하는 희망을 낳습니다. 또한, 그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 걸어가신 신앙의 길, 희생의 길, 순교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순교의 사전적인 정의는 자기가 믿는 종교, 즉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아 목숨까지 잃게 되는 일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순교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과연 순수한 인간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인가? 어쩌면 죽음의 공포는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공포인데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인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지....
그런데 순교의 내막에는 다른 비신자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겉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처절한 죽음의 모습이지만 참 신앙인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죽음의 고통보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의 순교의 마지막 순간에 슬픔의 통곡이 아닌 기쁨의 성가가 울려 퍼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순교는 인간의 의지를 통해 스스로 선택하는 자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으로 초대되는 자비와 은총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내 현세적인 욕심만을 따라 살아가는 이에게 순교의 은총은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으로 따져 보아 손해가 막심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의 주님이심을 믿으며 그분과 함께하는 것을 진정 기뻐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순교의 첫 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도로서 살아가는 것도 그분의 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결과입니다. 곧 순교의 영광도 그분의 영이 함께하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늘 우리와 함께하시어, 우리가 언제나 세상의 유혹 속에 패배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언제나 승리하며 영원한 생명을 살아갈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늘의 성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w)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21-1846년
같은이름 : 김 안드레아, 김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앙드레, 앤드루, 앤드류
성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이고 이름은 지식(芝植)이라고 하는데, 그의 집안은 열심한 구교 집안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Pius)와 아버지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신앙 깊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열심한 신덕으로 충실히 생활하던 중, 16세 때인 1836년에 모방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으므로,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무렵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이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고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 부제 혼자만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845년 4월 주교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그곳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사제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이어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堂) 신학교 성당에서 다블뤼 안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같은 달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나바위라는 조그마한 교우촌에 상륙하였다. 김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기다리는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엄해서 고 주교는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함으로,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 신부가 황해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토로하자 황해도 감사는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시켜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고 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배교를 강요했으나, 김 신부는 도리어 관리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을 붙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김 신부의 나이는 26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즈카르야(Anthony Mary Zachary)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 1502-1539년
같은이름 ;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자카리아, 자카리아스, 자카리야, 재커리, 즈가리아, 즈가리야
성 안토니우스 마리아 자카리아(Antonius Maria Zacharias, 또는 안토니오 마리아 즈카르야)1502년 말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 크레모나(Cremona)의 귀족 가문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안토니에타(Antonietta Pescarolli)에게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일찍이 정결을 지키겠다는 서약과 함께 자신에게 남겨진 유산을 포기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고 청빈을 사랑했다. 1522년 파도바(Padova)의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로 활동하던 중 자신의 소명이 영혼의 병자를 치료하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신학을 배운 뒤 1528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0년 밀라노(Milano) 과스탈라(Guastalla)의 토렐리(Torelli) 백작 부인의 지도 신부가 된 그는 ‘영원한 지혜의 형제회’에 합류하였고, 그곳에서 밀라노 귀족 출신인 페라리(Bartolomeo Ferrari)와 모리쟈(Jacomo Antonio Morigia)를 만나 그들과 함께 성 바오로(Paulus)를 주보성인으로 하는 성직 수도회를 설립했다.
이것이 ‘바르나바회’(Barnabitarum)라고도 불리는 ‘성 바오로 성직 수도회’이다.
이 수도회의 목적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쇄신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여자 수도회인 ‘성 바오로의 천사 수녀회’도 설립하였다.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는 1539년 과스탈라에서 병에 걸려 크레모나에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그 해 7월 5일 29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1849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897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안토니우스 마리아 즈카르야 성인은 이탈리아의 아버지요 수호성인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성녀 필로메나 (Philomena)
활동년도 : +500년
신분 : 동정녀
지역 : 산 세베리노(San Severino)
같은 이름 : 삘로메나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부근 산 세베리노에서 공경을 받는 성녀 필로메나는 옛 로마 순교록에 포함되어 있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충분하지 않고 또 8월 11일에 축일을 기념하는 성녀 필로메나와 상당히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 그녀에 대해 오늘날 알려진 것은 없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필로메나는 백합 또는 닻을 지닌 처녀로 그리고 세 개의 화살을 지닌 처녀로 그려진다. 때때로 종려와 채찍을 든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