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5회 참선과 명상, 같은 점과 다른 점 – 11
이 공부가 결국은,
“定慧雙修(정혜쌍수)다. 정과 혜를 닦는 것이다.”
사마타 = 定 = 止 = 寂
위빠사나 = 慧 = 觀 = 惺(성)
이것을 조선시대 때의 언해본을 보니까,
신미대사가 최초로 우리 훈민정음을 가지고 번역을 하셨잖아요.
惺惺寂寂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언해본을 찾아보니까,
惺→ ᄉᆞᆲᄉᆞᆲ하다. ←이것이 15세기의 우리 한국어로 또렷하다는 뜻
입니다.
寂→ 괴외ᄒᆞ다. ←이것은 고요하다는 뜻입니다.
惺寂→ 삽삽하고 괴외하다.
惺惺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다스리는 것이냐?
인간의 모든 한계의 상황은 수행할 때 가장 큰 장애는 딱 두 가지입니다.
昏沈(혼침)과 悼擧(도거)입니다.
悼擧는 망상 피우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가 공부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참선을 하시거나 어떤 명상을 하시거나 쭉~~ 있다
보면 뇌파가 고요해지잖아요.
고요해지면 갑자기 잠으로 떨어지는 뇌파로 떨어집니다.
그것이 昏沈이고요. 그 다음에
정신이 바짝 들어서 맑아지면 어떤 장애가 있느냐 하면, 망상이ㆍ딴
생각이 자꾸 일어나잖아요.
이 昏沈과 悼擧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영원한 과제 상황입니다.
참선을 하실 때, 선정이나 정과 혜를 닦는데 가장 어려운 부분이 되는
데요. ‘昏沈이 온다. 흐릿하게 자꾸 잠이 오려고 한다.’ 했을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惺惺이지요. 그렇지요? ←이것이 慧입니다. 그 다음에
‘망상이 생긴다.’ 자꾸자꾸 망상이 생긴다고 했을 때, 나타나는 것이 뭡
니까? 고요하게 가야 되겠지요. 고요할 寂자가 필요하거든요.
이렇게 필요한 두 가지가 昏沈과 悼擧에 대한 우리 근본의 모든 수행은
定과 慧ㆍ止와 觀ㆍ사마타와 위빠사나, 이것 두 가지입니다.
인간의 모든 과제 상황은 졸립거나 딴 생각나거나 이 두 가지로 대별
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을 모두 다스리는 것이 定慧든ㆍ止觀이든ㆍ惺惺寂寂이든 전부 다
여기 해당하는 내용이 되겠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형태의 모든 인간의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
어서 “간화선이나 위빠사나나 방식은, 패턴은 거의 똑같은 것이다.”
간화선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들 이렇게 얘기를 하지요.
“부처님 당시에는 간화선이라고 하는 것을 수행을 안 했는데,
호흡이라든지 관법이라든지 4념처 수행이라든지 ←이런 것이 초기
불교에ㆍ근본불교에 많이 있는데, 간화선이라는 것은 수행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탄허스님이 명백하게 해놓으신 말씀이 있습니다.
“성인과의 거리가 멀어져서...
예전에는 근기가 수승해서, 부처님 때만 해도
호흡법만 가지고도 무색계ㆍ4선정에 막 들고,
이렇게 하실 수 있는 그런 형태가 됐고, 관법도 하시고,
제자의 근기에 따라서 스승이 보셔서 啐啄同時(줄탁동시)가
가능했다.”
이러십니다.
안에서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밑에서 막 쪼으고 있잖아요.
그러면 위에서 스승이 봐서 ‘지금 어느 정도 공부가 되고 있으니까
여기를 한번 두들겨 줘야되겠다.’ 위에서 병아리가 알을 때리고 있는
데를 정확하게 같이 때려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알을 깨고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言下에 大悟(언하대오)했다.” 한 마디의 말 끝에
깨치는 겁니다.
‘지금 어느 경지가 돼있고, 공부가 어느 정도 되어 있는데,
지금 상태에서는 이렇게 한 마디 해주면 깨칠 수가 있겠다.’ 그래서
예전에 조사 어록에 보면, 공부하고 있는 제자에게 말 한마디를 던져
서 그 말 끝에 깨치는 형태가 나왔지요. 그것을 “조사선”이라 그럽니
다.
조사스님이,
선지식이 제자들에게 아주 딱 해당하는 적당한 말을 던져서 깨닫게
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근기가 그 말을 해줘도 못알아 듣는
수준이 오는 겁니다. 그 말을 왜 했는지 모르는 것이지요.
그렇게 됨에 따라서 의심이 생기고, 화두라고 하는 방법이 생긴겁니다.
‘스님이 나한테 저 말을 왜 했을까?’
임제 선사만 해도 황벽스님 한테 스무 방망이씩 3일을 맞고도,
왜 맞았는지 처음에 몰랐습니다.
먼 길을 갈 동안, ‘진리를 물어봤는데 왜 나를 60방망이나 때렸을까?’
굉장히 의심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대우스님 한테 가서 깨치게 되거든요.
그러듯이 言下에 大悟하는 조사선이 안 되다 보니까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간화선이라고 하는 것까지 나오게 됐는데요.
그것을 탄허스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느냐?
첫댓글 _()()()_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_()()()_
기도를 하면서 망상을 안하기로 늘 다짐을 하지만, 단 한 번도 망상이 일어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어느날은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경전을 공부하면서 이 공부를 놓지못하는 것은 아마도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깨달음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쪼임까지는 아니더라도 톡톡 노크를 합니다. 합장 _()()()_
@日覺心
이하동문.
언제 저의 생각을 보셨습니까?
고맙습니다._()()()_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이렇게 꼭곡짚어서 명확히 ..._()()()_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도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간화선이든 위빠사나든 모두 어려운 일입니다.
먼저 바른자세를 취하지를 못하고 昏沈, 悼擧는 일상이 되고 있으니 참으로 슬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뚫고 깨우치신 어른들께 고개숙여 예배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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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혼침과 도거,
우리의 고뇌를
딱 집어 주시네요
文光스님 – 呑虛思想 - 韓國學을 말하다. 5廻-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