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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태 지음 / 가톨릭출판사
1. 작가소개
지은이 김문태는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한 문학박사다. 우리 문화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고전문학과 구비문학을 연구해 왔으며, 가톨릭대학교 ELP학부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시가와 서사 문맥 연구」·「국문학연구와 국어교과교육」·「되새겨 보는 우리 건국신화」 등의 국문학 연구서와 강화의 옛이야기와 옛 노래들을 조사한 「강화 구비문학 대관」, 소설 「세 신학생 이야기」등 많은 책을 펴냈다.
지은이는 2001년부터 10년간 중국 동북성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일제 강점기 때 중국에서 선교하다 순교하신 세 신부님과 그분들을 돕던 세 여인의 행적을 조사한 것을 토대로 「둥베이는 말한다」를 펴내게 되었다. 그는 긴 시간 동안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지천명’에 들어서서 비로소 하느님의 뜻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2. 세 선교사에 대한 증언들
김선영 요셉 신부(1898.8.15~1974.2.14)
김선영 요셉 신부는 1898년 경기도 광주 모현면 모현리 순교자 집안에서 1남4녀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고 성장하여 본당 사제의 총애를 받으며 복사를 하였고, 서당에서 안명근(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으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0세때인 1908년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대신학교 교육을 거쳐 1923년 서울교구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후 바로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신학생들에게 5년간 라틴어를 가르쳤다. 1928년 황해도 감목대리가 있는 장연 본당으로 전임되어 정열적으로 사목하던 중, 1931년 모종의 모함사건으로 본의 아니게 시흥군 동작동 본가에서 휴양하였다. 김선영 신부는 본가에서 지내는 동안 정신적 고통과 장출혈 등 심한 병고에 시달려 죽음의 위기까지 맞았으나, 이를 잘 극복하였다.
☞ 주님의 도구에게는 시련이라는 과정을 마련하시는 거 같다.
5년후 누명이 벗겨져 다시 성직 생활을 하게 된 김선영 신부는 1936년 4월 한국천주교 최초 해와 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처음에는 만주 하이베이쩐(海山鎭) 산무춘(善牧村)의 초대 신부로 부임하여 사목하였다. 1년후인 1937년에 지린(吉林)교구의 주교좌성당인 창춘(長春)본당으로 옮겨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 전교하였다. 또한 언어 능력과 재능이 출중하여 지련교구장인 가스페 주교의 비서를 하였다.
☞ 김선영 신부님은 우리 나라 최초의 해외 선교사로 기억될 것이다.
1946년 하얼빈 다오와이(道外)본당의 프랑스인 신부가 별세하자 김선영 신부는 주임 신부로 임명되어 하얼빈으로 파견되었다. 아울러 방지거회(프란치스코회)수녀들이 운영하던 성당 근처의 선무(善牧)병원도 관할하였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어 외국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추방되자 김선영 신부는 ‘대리 주교’가 되었으며, 치치하얼, 자무쓰, 옌지 등 세 교구에서 피난 나온 주교와 신부들을 맞아 접대하고 도와주었다.
1951년부터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부 주도의 종교혁신운동이 일어나 교황과의 관계를 끊고 삼자(三自)사상에 입각한 애국교회가 세워졌다. 김선영 신부 역시 혁신하여 애국교회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1951년 10월 9일에 체포, 투옥되었다. 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은 1954년 10월 5일까지 교황과의 관계를 끊고 애국교회에 가입하라고 회유와 협박을 받았다. 심지어는 애국교회 주교로 임명해 주겠다는 제의도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혁신 제의를 완강히 거부하자, 양세환 신부와 손잡고 미국 첩자로서 정보 수집 등 간첩활동을 한 반혁명분자라는 죄목으로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예잔강, 핑산, 위치안, 베이안 등의 감옥에 이감되면서 주로 돌 깨는 노역을 하였다.
☞ 15년의 징역형. 감히 나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믿음의 깊이
1966년 15년 형기가 끝났으나, 또다시 멀고도 추운 러시아 국경근처 인룽허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8년간 강제 노역을 하다가 75세인 1974년 2월 14일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치고, 수용소 인근 산에 죄수들과 함께 묻혔다. 김선영 신부가 감옥과 강제 수용소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는 그의 걸레와 같은 의류 유품이 대변해 주고 있다.(p388-390)
☞ 김선영 신부님의 선교사로서의 수고는 하느님이 갚아주셨을 것이다.
김선영 신부에 대한 증언
3년 전에 중풍에 걸려 왼쪽 몸이 마비된 조선족 할머니가 그 뒤를 잇는다. 15세 무렵에 콩팥이 안 좋아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아팠는데, 선목병원에 있던 김선영 신부님이 자신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는 기억을 떠올린다.
“미사 끝나고 나오면 점심때가 거의 다 되지요. 그러면 김선영 신부님이 ‘식사하러 가자.’라고 하셨어요. 성당 울안에 차 루치아라는 분, 안 과부 그분이 거기서 밥 짓고 그랬지요. 김 신부님이 천주교 신자라는 걸 언제나 떳떳이 내놓고 믿어야 된다. 자기가 천주교 신자라는 걸 언제나 마음 속으로 간직하고, 겁내면 안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김선영 신부님이 감옥에 가서 돌을 깨며 고생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용기가 없어 면회 가지 못했다며 눈물을 글썽인다.(p140)
☞ 남 앞에서 성호를 긋기가 쑥스러워하는 신자들에게 오늘날에도 유효한 신부님의 말씀
"내가 열두세 살 때 김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신부님이 우리 교리반에 오면 우리가 막 좋아했는데, 그러면 신부님은 우리를 강복하고 가셨습니다. 키가 그다지 작지 않고, 얼굴은 둥글 넓적하고, 눈이 컸습니다. 여기 해북진에 계시다 다른 성당으로 전근되어 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신부님께 혼인성사를 받았다는 한족 할머니) (P220)
“난타이 올라가는 고 밑에 이층집이 성당이었는데, 신부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해 주었어요. 얼굴이 동글납작하고, 키는 크지 않았어요. 신부님 성은 김가였고, 조선 신부님이었지요. 신부님은 우리에게 성가를 가르쳐 주고, 풍금치고 그러셨어요.”(p313)
☞ 신부님은 음악적인 소질도 있으셨는가 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40년대 초반, 이곳에 조선족 성당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조선족 신자가 많았다는 것이리라. 김선영 신부님과 임복만 신부님이 이곳에서 함께 사목 활동을 했다. 두 신부님의 활동 영역이 얼마나 넓었는지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지란성과 헤이룽장성을 비롯해 이곳 라오닝성까지 발길이 닿았다. 놀랍기만 하다. 동북삼성의 천주교 신앙은 순전히 그분들의 땀과 피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척박한 땅에 심은 신앙의 씨앗이 오늘 같은 큰 나무로 자랐으니 말이다.(p313)
"제가 열서너 살 때 또에 이십도가에 살 때 김 신부님은 우리 집에 자주 오시곤 했습니다. 김 신부님은 키는 크지 않고 자그마한데, 그때 내가 보기론 마흔 살이 안 넘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주 태도가 좋았습니다. 성격이 좋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선영 신부님이 운영하던 선목병원 앞에 공안들이 정자 같은 조그만 집을 하나 짓더란다. 어린 제보자가 어른들에게 묻자 신부님을 감시하려고 그런 거라고 했다. 그러니 그 압박이 얼마나 컸을까. 결국 신부님은 그들 손에 붙들려 갇힌 채 선종했다.(P352)
“김 신부님은 통통하고 키가 아주 작았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성대가 좋아서, 김 신부님이 미사하면 성당이 전부 울렸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신부님은 아주 엄격했습니다. 아주 원칙을 따졌습니다. 미사때 움직이거나 잠을 자면 아주 엄격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린 아이들을 사랑했습니다. 우리 어린 아이들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미사 끝나고 아이들이 지나가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토닥여 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길 가다가 만나도 꼭 그랬습니다.(p362)
☞ 원칙을 엄격히 지켜면서도 자애로우신 신부님. 타고난 신부님.
"내가 신품을 안 받았을 때, 장춘 주교부에서 만나 봤어요. 그때는 내가 신학생이었어요. 일이 있어서 주교부에 갔는데, 거기서 김 신부님을 만난 거지요. 그때 남한테 듣기로 고 주교님이 김 신부님을 주교로 하얼빈에 보낸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내가 척 볼 때는 ‘고 주교님이 제일 신임하는 신부님이구나.’하고 생각했어요. 아주 재능있고, 주교님이 제일 신임하는 길림교구의 신부로 생각했지요.“ 당시 가스페 주교님이 하얼빈에 김선영 신부님을 부주교로 보낼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지하교회의 한 주교님) (p94)
"김선영 신부님이 얼마나 인내심 많고 친절한지. ‘향방에 늙은 수녀를 만나 보러 가겠다.’고 하니까 얼마나 친절하던지요. 어느 방향의 무슨 차를 타고 가라고 그렇게 열심히 말씀해 주더래요. 조선 신부님들은 불란서 신부님 같지 않게 인자하고 열성적이예요. 우리 중국 수녀들은 조선 신부님들을 딱 친오빠같이 생각했대요. …… 언젠가는 신부님들 모두 공안국에 붙들려갔대요. 모두 마스크를 끼고서 큰 차에 탔는데, 보니까 몽땅 신부들이었대요. 데리고 다니면서 신부님보고 ‘우리 공산당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 많은가? 여기도 가 봐라. 여기도 좋다.’하며 구경을 시켰대요. 공산당 좋다고 자랑하러 다녔대요.“(아흔을 목전에 둔 한족 수녀님) (p93)
☞ 여기서도 신부님의 따뜻하고 친절한 성품이 느껴진다.
손님 접대실에서 연세가 많은 한족 수녀님들의 증언을 듣는다. 1948년에 푸순에서 베이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김선영 신부님을 처음 만났단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전부 피신하던 때의 일이었다.(p314)
사제였다가 환속했다는 한족 노인이 김선영 신부님에 대해 증언한다. 푸순(撫順)의 조선족 성당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공산당을 피해 푸순에서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갔다는 말은 나중에 들었고, 그 후로는 소식을 못 들었단다.(p340)
1952년 김선영 신부님이 체포될 당시, 목재상을 하던 부모 집에 신부님의 물건을 숨겨 놓았단다. 그래서 자기 집도 수색을 당한 이후 상당한 핍박을 받았단다. 복사를 하던 자신도 며칠 동안 울었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노인은 신부님 때문에 교난(敎難)을 당한 게 아니라, 교회 일을 해서 교난을 당한 거라고 힘주어 말한다. (p362-363)
김선영 신부님에 관한 증언이 이어진다. 어떤 이는 신부님이 중국 공산당이 제창한 삼자혁신을 반대하다가 체포되었다고 말한다. 종교에 있어서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력(自力)을 강조한 운동 말이다. 또 다른 이는 신부님이 성모군(레지오 마리애)을 조직한 죄로 붙들려 갔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김선영 신부님이 탄압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사목했다고 힘주어 말한다.(p298)
☞ 참 목자는 환란의 시기에 드러난다.
또 다른 할머니는 김선영 신부님이 자기 집에서 성모군(레지오 마리애)회의를 할 때 세 번 왔다고 증언한다. 7~8명의 남교우들만 참석해서 자신은 아이를 데리고 집 밖에 나가 있었다고 한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성모군은 진짜 반동 같더란다. 성모군은 군대고, 군대는 싸움하는 건데, 공산당과 싸움하니까 반동이라는 거다. 그러던 중 신부님이 체포되자 공안이 자기 남편도 잡아갔다. 이튿날 공안이 집을 수색해 장롱에서 성모상과 관련된 성물들을 다 가겨갔다고 한다.(p363)
☞ 레지오 마리애가 중국에 일찍 진출한 것 같다.
그간의 증언을 퍼즐 조각처럼 맞춰본다. 김선영 신부님은 당시 이곳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 수도자 후송 책임을 맡았던 듯하다. 그러고는 외국인 추방령이 내려졌는데도 베이징에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그 길로 다시 하얼빈으로 가서 사목활동을 계속했던 모양이다. 공산당의 박해가 예상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양 떼를 구하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 셈이다. 남들은 호랑이를 피해 달아나기 바쁜 시절, 섶 지고 불로 뛰어든 격이었다. 대단한 용기다. 아니, 순교 정신이 없었다면 흉내도 낼 수 없는 어리석음이다. 결국 그 저돌적인 의지가 중국 동북삼성 곳곳에 하느님의 이름을 퍼뜨렸다. 바오로 사도가 이국땅의 이방인들에게 그랬듯이……(P315)
☞ 무엇이 신부님을 계속 중국에 남게 했을까?
1966년에 김선영 신부님을 노동개조농장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서로 말을 못하게 해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정치범으로 온 지식인들처럼 신부님도 묵묵하고 점잖았다고 회고한다. 150여 명이 숙사에서 같이 생활했는데, 6시에 기상해서 하루 종일 돌만 깨게 했단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밤 9시까지 학습을 시켜 다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1974년에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어 몇 달 만에 선종해 이 근처에 묘를 썼다고 한다. 나중에 유해는 한국으로 이송되었다.(김선영 신부님과 함께 지냈다는 한족 농부) (p148)
이런저런 걸 싸들고 위치안(玉泉) 감옥으로 면회 가면 김선영 신부님은 늘 그랬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잘 먹고 잘 산다. 나보다 더 편안한 사람 없다. 오지 마라.”
여자 혼자 험하고 먼 길을 오가는 게 안쓰럽고, 그 어렵던 시절에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사 가지고 오는 게 부담스러워 그랬으리라. 신부님을 위해 어렵사리 싸 들고 간 것들은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나뉘 준다는 말을 간수에게서 들었다고 한다.(강순옥 데레사 수녀님) (p108)
☞ 본인의 어려움보다 양들의 어려움을 더 헤아리시는 목자의 마음이 존경스럽다.
"다른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예요. 김 신부님이 감옥에서 석방된 후 다시 거기에 노동하면서 개조하게 되었는데, 서로 같이 개조하는 사람 중에 젊은 사람들이 김 신부님을 양아버지 삼은 사람이 많았대요. 마음이 선량하시고, 아이들은 선도래서 개조를 잘하게 하고 그러니까 아버지로 삼은 사람들이 많은거죠. 어떤 사람들에게 들었는데, 김 신부님 무덤의 흙을 가지고 가면 집에 앓는 사람의 병이 다 나았대요.“(p118)
☞ 신부님의 숨은 인품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제보자는 김선영 신부님은 본 적은 없지만, 신부님의 시신을 수습해 한국으로 이송한 최경숙 님에게서 들었다며 말을 잇는다. 최경숙님이 감옥에 계신 김선영 신부님을 면회하러 갔을 때 사정이 형편없었단다. 돌아눕지도 못하게 벽 양쪽에 못을 박아 놓고, 기어서 대소변이나 간신히 볼 수 있는 감방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이렇게 말하더란다.
“나는 잘 있으니까 여기 오지 말고, 감옥에 계시는 임복만 신부님하고 양세환 신부님이나 잘 구완해 드려라.”(p139)
☞ 신부님의 삶은 참 목자의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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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복만 바오로 신부(1908.1.10~1994.1.15)
임복만 바오로 신부는 1908년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리 구교우 집안에서 3난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 수업을 받고, 1935년 전주교구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나바위본당 보좌, 군산 둔율동 본당 주임, 되재(고산)본당 주임 신부로서 사목하였다. 이후 1942년 6월 중국 선교에 파견되었다. 장춘에서 4~5개월 중국어를 습득한 후, 하이베이쩐 산무춘에 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을 대상으로 전교하였다.
☞ 신부님도 구교 출신이다. 믿음도 뿌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1946년 공산당이 하이베이쩐을 장악하면서 1947년 9월부터 소위 공산당 투쟁을 받기 시작하여 프랑스 신부들과 함께 육체적•심리적 고통을 심하게 겪었다. 마침 그 무렵에 외국인은 모두 본국으로 추방한다는 공산당 정부의 지시가 내려져 프랑스인 우(牛)신부와 함께 1949년10월 하얼빈 다오와이 본당으로 왔다. 그 후 외국 신부들은 본국으로 귀향하고, 임복만 신부는 김선영 신부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951년부터 소위 종교혁신 운동이 일어나 교황과의 관계를 끊고 정부 주도의 애국교회에 가담하라는 압력을 계속 받았으나, 김선영 산부와 함께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로 인래 김선영 신부는 1951년 10월에 체포 투옥되었으며, 임복만 신부는 산무병원에서 잡일을 하면서 몰래 성무를 집행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1954년 9월에 체포 투옥되었다. 공산당의 토지 개혁을 비판하였고, 정부 주도의 애국교회를 거부하였으며, 레지오 마리애(聖母軍)를 조직하여 공산당에 항거한 ‘반혁명분자’라는 죄목으로 5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 권력 앞에 완강히 거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감옥에서 매일 하는 일은 주로 돌을 깨서 자갈을 만드는 일이었다. 1959년 5년간의 형기가 끝날 무렵, 공산당 정부는 로마 교황과의 관계를 끊고 애국교회에 가입하라고 집요하게 권유하였다. 임복만 신부가 이를 끝내 거부하자, 3년형을 추가로 선고하였다. 1962년 9월 8년간의 형기를 마쳤으나, 또다시 러시아 구경 근처의 넌장의 강제노동 수용소에 보내져 노역을 하였다. 그러나 임복만 신부는 양들에 대한 사랑에 불타 1963년 봄, 수용소에서 몰래 탈출하여 신자들을 비밀리에 찾아다니면서 성사 집전과 전교를 하였다.
그러다가 1968년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또다시 체포되어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고는 1년 1개월간 샹팡 임시감옥에 투옥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1969년 넌장 강제수용소에 돌려보내졌으나, 다시 빠져나와 몰래 신자들을 돌보며 전교를 하였다.
☞ 신부님에게서 바오로 사도의 자취가 느껴진다. 수용소를 탈출하면서까지 전교를 하는 이 믿음.
현재 만주 지방의 하얼빈, 수란, 옌지(延吉), 무단장(牧丹江), 자무쓰, 이춘, 허강 등지에서 교회 공동체가 성장하고 있는 것은 임복만 신부가 강제수용소 30년살이 동안 몰래 다니면서 전교한 피땀의 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님을 닮은 임복만 신부님.
1990년대에 들어와 임복만 신부는 모진 옥고와 험난한 인생 여정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급기야 중풍으로 인해 용변 처리와 언어 소통조차 어렵게 되었다. 이에 1992년 12월, 신자들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그렇듯 아끼고 사랑하던 양들과 선교지를 떠나 50년 만에 84세의 지친 노구를 끌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1년만인 1994년 1월15일에 낯선 이방 땅과도 같아진 한국에서 생을 마쳤다.(P390-393)
☞ 주님을 향한 50년의 피땀의 길...이제라도 신부님의 삶이 알려져 기쁩니다.
임복만 신부에 대한 증언
“신부님이 오셨다 하면 신자들이 성사 받으러 많이 왔습니다. 고해성사 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하는 사람들은 와서 혼배성사를 받기도 하고요. 여러 사람 봤어요. 중국 사람들하고 같이 고생 많이 하셨어요. 신부님이 여기 오셨을 때 제가 보고 정말 놀란 것은 신부님이 열심으로 묵주 기도하는 거였어요. 조그마한 아이들도 그렇고, 신자들이 항상 신부님 흉내 내는 게 허리 구부리고 묵주 기도하는 거였어요.”(조선족 노수녀님) (p64)
☞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시는 신부님.
일흔된 조선족 할머니가 교우촌 하이베이전(海北鎭) 산무춘(善牧村)에서 만났던 임복만 신부님에 대한 추억을 떠올린다.
“그때 선목촌에 성당이 있었는데, 거기 임 신부님이 오셨어요. 제가 열한 살 때 그 성당 제대에서 일했어요. 신부님이 미사 드리기 전에 처음에는 뭐 입고, 두 번째는 뭐 입고, 세 번째는 뭐 입을지 옷을 다 개서 차곡차곡 놓아 드렸지요. 임 신부님은 언제나 웃는 얼굴이셨어요. 신부님은 성가도 가르쳣고 고해성사도 주셨어요. 우리는 밭에다가 꽃 심어 가지고 그거 잘라서 제대 앞에다 꽂아 놓고는 했어요”
그 시절 임복만 신부님이 공안에 체포됐다가 석방된 날의 기쁨도 전한다. 신부님이 성가를 가르쳐 주고, 자신의 집에서 미사도 드렸다고 한다.(p156-157)
☞ 언제나 웃는 얼굴의 사제에게서 하느님을 만난다
임복만 신부님을 생각하면 정말 옛날 성인과 같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부님은 지린성으로 헤이룽장성으로 중국 땅을 안 다닌 데가 없단다.
“우리 외할머니가 우창 쪽에 살았습니다. 기차에서 내려서 산길로 한 70리길 되는데, 신부님은 외할머니 한 분을 위해서 그 멀고 추운 데까지 가셨어요. 미사후 같이 식사도 했는데, 밥알이 바닥에 떨어지면 주워서 다시 잡습디다. ‘쌀은 백성들이 수고스럽게 지은 귀한 것이니, 한 알이라도 소중히 여겨라.’ 그런 부탁을 합디다.”(부모님 고향이 거제도라는 조선족 교우) (p167-168)
☞ 신부님의 삶은 성인의 삶이었네.
한족 할머니는 임복만 신부님이 항상 헌 옷만 입고 다녔으며, 10리길을 걸어 다녔다고 회고한다.
“한 번도 새 옷, 좋은 옷 입으신 걸 못 봤습니다. 허술하게 입고 다녔어요. 혼자서 가방을 들고 와서 미사를 드렸는데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정지 칸 하나를 조그맣게 만들어서 신부님 오시면 그 칸에서 주무시고, 우리는 안 칸에서 잤습니다.”(p201)
☞ 얼마나 검소하신 신부님인가!
소화데레사 수녀회 소속인 젊은 한족 수녀님이 뒤를 잇는다. 어릴 적에 무단장(牧丹江)에서 임복만 신부님에게 보례(補禮)를 받고, 첫영성체를 하고, 견진성사까지 받았다고 말한다.
“제가 여덟 살 때 임 신부님을 처음 볼 때는 신부님이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고해성사를 하는데, 아버지처럼 잘해 주셔서 그다음부터는 안 무서웠습니다. …………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입쌀하고 백미가루는 적게 주고, 강낭가루 같은 거를 줘서 우리 집도 생활이 곤란했어요. 그런데 조선 신부 왔다고, 조선 신부는 밥을 좋아한다고 이밥(쌀밥)을 해 주는 것 봤습니다.”(p201-202)
본당 신부님은 어느 노교우에게 들었다면서 말문을 연다. 예전에 나이 어린 복사가 임복만 신부님의 옷에서 돈을 훔쳐서 도박을 했다고 한다. 그걸 안 본당 회장이 그 복사의 뒤통수를 때리자 임복만 신부님은 그러지 말라며 말렸단다. 그 노교우는 자신이 바로 그 도둑이었다며 울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p219)
☞ 증언을 들으면 들을수록 대단한 신부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임 신부님 말 듣고, 내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신부님이 중국말은 잘 못했지만, 사람은 어떻게 해서 세상에 났고,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으야 된다는 걸 말씀하시는데, 내가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때가 열여섯 살 때쯤으로 미사드릴 때 심장이 막 불타오르는 거 같았어요. 그랬는데 지금은 어찌 된 건지, 냉담자가 된 듯이 신부님이 미사 드리면 그저 ‘미사다.’하고 참가하고 옵니다.“
그 시절에는 사제 만나는 게 그렇게 어려웠단다. 그런데 신부님을 만나 고해성사를 보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기뻤다고 한다. (p329)
☞ 한 분의 사제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가!
수녀님의 가족이 돌아가며 증언한다. 임복만 신부님을 처음 만났을 때 하느님 뵙는 것처럼 기쁘고, 예수님 오신 것처럼 반가웠단다.
“그때 하느님 만난 것처럼 기뻤습니다. 임 신부님의 말은 잘 못 알아들어도, 신부님이 오시니가 예수님이 오신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신부님 보내 주셔서.’하며 기도했습니다. 몇 년 동안 고해를 못 해서 고해성사하고 미사 참례했습니다. 신부님이 ‘성경책 많이 보라. 기도하라.’한 건 생각나는데, 오래되서 다 잊어먹었습니다. 첫 번째 만날 때, 울지 않은 교우들이 없었습니다. 기뻐서 …… .” (p334-335)
☞ 그 어려운 시기에도 강조하신 건 ‘성경과 기도’
뒤이은 제보자들은 이곳에서 첫 사제로 임복만 신부님을 만났다고 말한다. 집에서 기도하며 지내다가 신부님에게 교리받고, 고해성사하고, 보례받고, 영성체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단다. 친부모 만난 것보다 더 기뻤다고 한다. 신부님이 예수님을 대표해서 온 것만 같더란다.(P357)
☞ 그 당시의 교우들은 신부님을 예수님 뵙듯이 했다. 그 본받을 공경심.
"조그만 모자 쓰고 흰 적삼 입고 있는 노인, 임 신부님을 처음 보았을 때 아주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다음에 교리를 배우고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그때야 신부가 이런 분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보통 사람 만난 거 같지 않고, 그렇게 가깝고 친밀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음력설 명절보다도 더 기뻐했습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임 신부님 만나고 나서야 ‘천주교가 이렇게 좋구나.’하는 걸 깨닫아, 허강 부근의 신자들을 다 일으켜 세웠습니다.“(p358)
☞ 우리가 믿는 천주교가 이렇게 좋은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제일 인상 깊은 것은 임 신부님이 정통 신앙에 충성하신 점이에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교회를 그대로 믿고, 아주 조금도 마음의 동요가 없는 그게 제일 마음에 들어요. 교황청에 대한 충성이 말예요. 그 당시 신부님들은 정부에서 애국회에 돈도 주고 하니까 정부 쪽으로 가셨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임 신부님은 ‘난 그렇지 않겠다. 내 모든 걸 주교님께 맡기고 내 길로 가야겠다’라고 말씀하셨어요.“(지하교회 주교님의 증언) (p61)
☞ 시련에서도 정통에 충실한 믿음의 사제.
원로 신부님은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전교한 사람은 임복만 신부님뿐이라고 증언한다.
“임 신부님이 감옥에 갈 것 생각 안하고 계속 전교한 게. 그게 사제로서 존경을 받아요.”
프랑스 신부님들도, 중국 신부님들도 모두 없던 시절에 홀로 사목한 신부님이라고 말한다.(랴오닝성 러허교구 소속의 한족 노신부님) (p76-77)
☞ 정말 바오로 사도같다. 임복만 신부님은.
“임 신부님이 투쟁할 때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그때 내가 앉아있는데, 신부님을 데리고 사람들이 오더군요. 신부님을 보고 내가 화닥닥 일어났어요. 그리고 울기 시작했어요. 몸을 이래 묶고 들어오는데, 교우들을 보더니 눈감고 눈을 안 떴어요. 교우들이 나서서 귀퉁이를 치기 시작했어요. 아무 소리 안 하고 눈을 꽉 감고 매를 맞았어요. 그다음에는 혁대로 치는데도 소리 한 번 안 내셨어요. 사람을 바꿔 가며 마구 때렸어요. 어떻게 때렸는지 신부님이 막 넘어지셨어요.”(p119)
☞ 말없이 매를 맞으시는 예수님 생각이 난다.
임복만 신부님은 정직한 사제라고 말한다. 동지섣달 헤이룽장성 넌장에서 감옥살이하던 신부님의 말을 전한다.
“눈이 허연데, 맨손으로 콩대를 베는데 막 눈물이 나더라. 마지막에는 몸이 너무 고달프니까 내가 기도 생활도 못하겠더라.”
그러면서 신부님이 눈물을 흘리더란다.(조선족 할아버지) (p168)
☞ 얼마나 힘드셨을까!
한족 할아버지는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임복만 신부님이 조선족 동네에 가서 농사를 지었다고 술회한다. 자신의 누나가 신부님을 만나고 와서는 그저 울더란다. 추운 겨울날 조그만 솜저고리를 입고 새끼 꼬는 모습이 안타깝다며…… . 외국인 추방령이 떨어져 다른 나라 신부님들은 모두 자국으로 돌아갔는데, 임복만 신부님은 왜 안 돌아가고 감옥에 갔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찬다. 중국 신부님들도 벌벌 떨며 꼼짝 못하고 그랬는데, 임복만 신부님은 오랫동안 고난을 받고도 교우들을 기쁘게 대하는 걸 보고 성덕없이는,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그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p185)
"교황님께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난 절대 양 떼를 놓고 내 나라 안 간다.’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지하교회 한족 신부님) (p186)
☞ 양떼를 버려두지 못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았다. 신부님은.
임복만 신부님은 하이베이전에서 공산당의 압박을 피해 교우 집에 숨어 지냈는데, 그때 신부님을 모시고 있던 제보자의 아버지는 나중에 당국에 끌려가서 흠씬 두들겨 맞았단다.(p214-215)
콧수염을 기른 할아버지는 감옥에서 임복만 신부님과 함께 고생했다고 말한다. 서로 대화는 못했지만, 자신이 성호를 그어 교우임을 드러낸 적이 있다고 한다.
“감옥에 아홉 칸이 있었는데, 임 신부님은 2호 칸에 있었습니다. 나는 3호 칸이니까 이쪽 맞은편이고, 우리 아버지, 불란서 신부님이 다 한 줄에 있었습니다. 나하고 맞은편에 있어서 난 임 신부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난 임 신부님을 아는데, 신부님은 나를 못 알아보았습니다. 신부님이 교우를 다 알수는 없잖아요? 신부님을 자꾸 불렀지만 못 알아봐서 내가 라틴어를 하며 성호를 그으니 반가워하면서 날 봤습니다. 내가 그냥 있으면 신부님은 나더러 기도하라고 해서, 나도 기도하고 신부님도 기도했습니다.”(p218)
☞ 감옥에서도 양을 보살피는 신부님...기도하라.
하이베이전에 있던 임복만 신부님이 공산화된 후 심하게 고난당했던 사실을 덧붙인다. 더운 날, 사람들이 신부님에게 솜옷을 입혀놓고 마구 때리더란다. 고꾸라지면 발로 차서 또 끌어올리고 하면서 ……. . 나중에 젊은 사람들이 신부님 옷을 벗기고 혁대로 내리치더란다. 신부님은 아무 소리없이 그저 어린 양처럼 맞기만 했단다.(할머니 제보자) (P222)
☞ 정말 어린 양이셨구나.
이어 도착한 조선족 제보자는 임봉만 신부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회고하며 눈물을 흘린다. 혼란했던 시절, 한족 신부님들은 환속해 결혼을 하기도 했고, 그러지 않았다 하더라도 교황님에 대한 태도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신부님에게 편지를 써서 그런 사제가 드리는 미사에 참례해도 되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물론 신부님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신부님이 시안(西安)에 성지 순례하러 가는 길에 베이징에 들러 처음 만나게 되었단다. 중국에 조선 신부님이 한 분 있다는 말을 듣고 설렜는데, 실제로 임복만 신부님을 만나자 아버지를 만난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p240-241)
"임 신부님의 신앙은 정말 강렬했습니다. 중국에서 삼자운동이 일어났을 때, 정부는 ‘혁신해도 신앙에는 문제가 없다.’고 해 임 신부님은 그 자리에서 동의서에 이름을 썼대요. 돌아오셔서 기도 중에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답니다. 이에 미사 끝나고 나서 전체 교우들 앞에서 말씀하시길 ‘교우 여러분, 내가 잘못했습니다. 혁신도 할 수 없고, 교황님도 끊을 수 없습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정부 쪽 사람들도 있었는데, 신부님이 그 많은 교우들 앞에서 이 말씀을 하신 건 용감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잡혀 가지고 판결받은 것 같습니다.“(지하교회 주교님) (p276-277)
☞ 이 얼마나 굳센 믿음이며, 용기인가?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하고 난 후 사제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외국 신부님들은 전부 쫓겨 나갔고, 중국 신부님들은 모두 몸을 숨겼다. 그토록 삼엄하던 때, 임복만 신부님은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신자들을 방문하며 돌보았다. 무단장(牧丹江) 역전에서 신자들에게 몰래 고해성사를 주고 성체를 영하게 했다.(p277)
☞ 죽음을 무릎쓰고 양떼를 돌보시는 목자의 열성.
임복만 신부님이 하이베이전의 조선족 동네에서 공산당에게 투쟁당했던 일을 참담한 심정으로 증언한다. 어릴 때, 신부님이 공상당원에게 크게 맞아서 형편없이 되었다는 말을 부모에게서 들었단다.(P357)
☞ 그 긴 세월의 수감 생활에서 얼마나 맞았을까! 사제의 그 고귀한 몸에.
김 수산나 할머니와 그 아들인 김 바오로와 김 블라시오 형제가 임복만 신부님을 봉양했던 시절을 증언했다.
“신부님이 감옥에 가서 고생한 얘기를 나보고 몇 마디 하셨어요. 주변에 돼지 치는 데가 있었데요. 밤에는 승냥이가 무서워서 못 살겠더래요. 막을 쳐 놓았는데, 모기는 물지 승냥이는 울지. 먹는 것도 그저 죽지 못해서 잡숫고 살았다고 그래요. 집도 그저 오막살이 집, 비 안 새고 춥지만 않게 해 놓고 있는데, 혼나셨대요. 기차에다가 자갈을 싣는 작업을 하던 중 소변보러 저쪽으로 건너갔는데, 도망가려고 그랬다며 매를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대요. 매 맞고 나니까 열이 나더래요. 그래서 냉수 두 사발을 마시니까 열이 다 풀리더라고 그러데요.”(p41-42)
☞ 소변보러 가다 맞은 이야기는 참으로 안쓰럽고 눈물겹다.
조선족 할머니 집을 방문해 임복만 신부님과 최경숙 님에 대한 증언을 듣는다.
“임 신부님이 감옥에서 나와 돌아갈 가정이 없는 사람들 있는데서 혼자 생활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넌장에서 생활비는 조금씩 보내 준다고 했어요. 죽은 최 모니카가 주동적으로 임 신부님을 모셔와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신부님이 오셨다고 일러 줬지요. 그래서 신부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니카가 아니었으면 그 신부님 여기 나올 길이 없어요.”(p46)
이어 할머니 조카의 증언이 뒤따른다. 임복만 신부님에게 참회하고 고해성사를 하자 보속으로 성모경을 600번 읽으라 했는데, 훗날 그 성모경을 외워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체험담을 들려준다.(p47)
☞ 보속으로 성모송 600번이라니?
"신부님 보니까 키가 그만하고 수염이 요렇게 났는데 눈물납디다. 그때 예순넷이라 그래서 신부님보고 그랬죠. ‘신부님, 하느님은 한 분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옳지, 한 분이지.’ 그럽디다. ‘하느님이 한 분이라면 지하교회나 지상교회나 한가지인데, 많은 교우 이끄는 게 신부님한테도 공로가 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하니까 ‘그 말은 옳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황을 저버려서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지 못한다.’라고 말씀합디다. 집으로 돌아올 적에 역전까지 그 신부님이 나오면서 강복 줍디다. ‘잘 가라. 무사히 잘 가서 신앙을 꼭 가슴에 품고 잘하라.’고 합디다.(임복만 신부님을 만난적 있다는 두 분의 할머니) (p70-71)
☞ 신앙을 꼭 가슴에 품어라! 노사제의 당부말씀이 귀에 감긴다.
"임 신부님은 인자하세요. 떳떳하시고. 노개농장에서 일하시다 서란의 할머니네 집에 와 계셨어요. 동네 할머니들이 ‘웬 할아버지가 와 계시는가?’하고 말하면 시아주버니라고 했어요. 그러면 ‘아이고, 저렇게 멀쩡한 할아버지가 혼자 됐으면 노친네 만나서 자식 볼 것이지 이렇게 제수네 집 늙은이들 사는데 와 있다.’라고 별나게 말하는 분이 있어요. 그러면 신부님은 ‘재가를 하려니가 본 노친네 생각이 너무 나서 할 수가 있어야죠. 그래 이렇게 늙었수다.’ 그렇게 대답을 하세요. 홀아비 된 것 같이…….“ (딸이 수녀라는 조선족 할머니) (p73)
☞ 신부님의 깨알같은 유머.
"임 신부님이 감옥에서 고생한 건 잘 모르지만, 문화대혁명 때 향방 공안국에서 고생한 건 내가 잘 압니다. 임 신부님은 문화대혁명 때 화물차로 죄인을 실고 갈 때 제일 뒤에 섰어요. 그 차에는 삼면으로 홍위병이 있었지요. 뒤에 서 있으니까 뒤에서 따라오면서 막 때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어요. 그때 신부님 머리 위에다 수박 껍데기를 씌었어요. 수박 껍데기 위에는 나뭇가지고 뭐고 장난으로 마구 꽂아 놓고, 수박 껍데기에서 줄줄 물이 흐르는데, 돌로 때리고 침도 막 뱉고, 뒤에서 따라가면서 군중들이 이렇게 때렸어요.“(한족신부님) (p99-100)
☞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수녀님은 문화 혁명이 터졌을 때 임복만 신부님과 함께 견디기 힘든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사람들 앞에서 가위로 머리카락을 다 잘리고, 온 몸이 시퍼렇게 부을 정도로 매를 맞았다. 임복만 신부님도 군중 앞에서 혁대로 수없이 맞았지만,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참더란다.(강순옥 데레사 수녀님) (p108)
☞ 공산치하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한 그 수난의 여정
제보자들은 임복만 신부님에 대해 증언하며 울먹이기도 하고, 밝게 웃기도 한다. 문화 혁명의 여파로 사제를 보기 힘든 시절에 만난 임복만 신부님에 대한 감격이 생생하다. 오랜 세월 동안 감옥살이와 노동개조농장 생활을 한 후, 지린성 북단의 수란에 숨어 전교하던 신부님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더욱이 말년에는 병이 나 거동조치 못하던 삶이 고되었다.
“우리가 서란에 찾아갔을 때, 임 신부님은 이미 병이 나셨어요. 우리가 말했지요. ‘신부님이 몸이 건강해야 되는데, 이래 가지고 정말…….’ 신부님은 말없이 고저 고개만 끄떡끄떡했어요. 노후했어요. 내복만 입고 앉아 있는데, 얘기하게 되면 침이 나오고 그래서 가련하게 보이데요. 우리가 ‘신부님, 어떻게든지 치료받아 가지고 회복되길 원합니다.’하니까 신부님이 악수하데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섰지요.”(p142)
☞ 신부님의 수고는 하느님이 알아주실껍니다.
비교적 젊은 중국인이 가족들과 함께 찾아온다. 문화 혁명 때 자신의 아버지와 임복만 신부님이 끌려가 고생했단다. 자기 아버지는 교우라 여섯 달 만에 나오고, 임복만 신부님은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갔다고 전한다. 감옥에서 밥을 적게 주었는데, 신부님은 항상 그 밥의 절반 이상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 주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사람마다 밥을 달라고 해서 감옥에 있는 모든 이들이 신부님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P224)
☞ 정말 성인 신부님이시다.
증언하는 여회장에게서 어떠한 두려움도 느낄 수 없다. 임복만 신부님이 1980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일을 차분하게 풀어 놓는다.
당시 단칸방에 살고 있던 그녀는 방을 반으로 나누어 신부님을 봉양했다고 한다. 그것도 한 달간이나…… . 희한한 건 당시에 무척 곤란하게 지냈는데, 자루에서 쌀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 부부가 입을 모아 기적이라고 했단다. 그때는 공안국에 단속된다는 것도 모르고 마냥 기뻐했단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날픈 여인이 행한 사제에 대한 지극정성, 박해를 무릅쓰고 양 떼를 찾아다니는 목자에 대한 충실함은 곧 하느님에 대한 그것이리라.(p282-283)
☞ 감동이다.
이어서 임복만 신부님이 자무쓰(佳木斯)에서 체포될 때의 상황을 전한다.
“임 신부님하고 아버지가 가목사에서 공안에 잡혔답니다. 둘이 다 잡혔는데, 신부님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고, 아버지는 한 주일 있다가 왔습니다. 그날, 신부님이 처음 와서, 교우들이 아주 많이 왔어요. 미사를 시작하려고 제의를 다 입었는데, 누가 고발해서 미사는 시작도 못했답니다.”(p335)
일흔 살이 넘은 할아버지는 1980년에 임복만 신부님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난생 처음 사제를 만나 감동받았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 뒤 신부님이 두 번째로 이곳을 방문한다고 할 때, 역에 마중 나갔지만 사흘을 기다려도 안 오더란다. 알고 보니, 자무쓰에서 미사를 드리다 잡혀갔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며 또다시 눈물을 찍어 낸다.(P354)
☞ 우리는 사제를 보고 반가워 울음을 터뜨릴 수가 있을까?
예전에 임복만 신부님이 체포된 곳이어서인지 교우들의 증언이 대체적으로 침울하고 차분하다. 임복만 신부님이 여기 와서 고해성사를 주고 있는데, 공안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20~30명되는 교우들을 한쪽으로 몰아넣은 채 신부님에게 쇠고랑을 채워 데리고 나갔다. 그때 신부님을 잡아간 게 부모 잡아간 것보다 더 걱정됐단다. 나중에야 신부님이 세상을 떴다는 말을 들었단다. 증언하며 울먹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p359)
30여 년 전에 임복만 신부님을 만났다는 조선족 제보자의 말소리가 조곤조곤하다. 참으로 못살던 시절, 신부님을 위해 음식을 특별히 마련하면 화를 내며 수저를 안 들었단다. 신자들의 어려운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리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반면 소박한 음식은 맛나게 잘 들었단다. (p368)
☞ 음식 하나에도 신부님의 인품이 드러난다. 참 목자이신.
1981년 이곳에 석 달이나 머물며 전교한 임복만 신부님에 대한 증언이 이어진다. 교우들은 당시 어떤 사제도 오지 않던 이곳에 신부님만 찾아와 성사를 주었다며 하나같이 울먹인다. 공산당의 감시가 무서워 몇몇 교우들이 밖에서 망을 보는 가운데 몰래 미사를 드리곤 했단다. 그런 와중에 전교하러 다닌 임복만 신부님이야말로 신부중의 신부라고 입을 모은다.
당시에 한족 신자들이 신부님에게 묻곤 했단다.
“이 나쁜 중국에 있을 게 뭐 있습니까? 조선에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신부님은 한결같이 말하곤 했단다.
“내 일생을 하느님 사업을 위해 바쳤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다시 교우들이 울먹인다. 처음 만난 신부님이 자신들을 그렇게 사랑하는지 몰랐다며……(p300)
☞ 정말 신부님의 마음이 임마누엘 예수님의 마음이 아닐까?
10여명의 한족 교우들이 일행을 반갑게 맞는다. 어떤 이는 1984년에 임복만 신부님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를 기억하며 눈물을 훔친다. 다른 이는 외국 신부님이 중국의 농촌에 와서 몹시 고생하는 걸 보고 가슴이 아팠다며 울먹인다. 또 어떤 이는 신부님이 어렵게 사는 자기를 자식처럼 여겨 50위안을 줬다며 흐느낀다.(p326)
☞ 눈물은 은총이다. 국경을 초월한 한 형제의 소박한 마음이 아름답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1984년 무단장에서 임복만 신부님을 처음 만났단다. 그때 공안이 신부님을 잡으러 온다고 하니까 미사하면서 딱 세 마디 했다고 한다.
“꼭 열심히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내가 여기 미사 드리러 오기 쉽지 않습니다. 천당에 가서 만납시다.”
그때 미사에 참례했던 모든 교우들이 울었단다. 제보자도 외국 신부로서 그렇게 위험한 데 와서 미사 드리는 것에 감동했다고 한다. 그 뒤 지하교회가 정통적인 교회라는 걸 알고 신앙이 더욱 깊어졌다고 술회한다. 그 뒤 신학생이 되어서 수란에서 다시 만났을 때, 신부님이 상처에 약을 두어 번 발라 달라고 하더니, 더는 안 바르겠다고 했단다. 이상해서 그 이유를 묻자 마귀가 유혹하는 것 같다고 하더란다.(지하교회 한족 신부) (P351)
☞ 천당에 가서 만납시다. 아멘.
미사가 끝나자마자 증언을 듣는다. 1985년에 임복만 신부님이 이곳을 방문했단다.
“고해성사하는 사람들이 항상 줄을 서서 기다렸어요. 그래서 연세많은 임 신부님이 하루에 두 세 시간 자는 거 같았습니다. 여기서 고해성사와 미사를 드리고는 가방 들고 또 다른 곳에 갑니다. 거기에 감동되었습니다. 조선 신부로서 중국 교우들을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천당에 가서 저를 위해 기도드리는 걸압니다. 우리를 친자식같이 대하는 걸 보고, ‘조선 사람이 중국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사랑하는가?’라고 했습니다.”
중국 교우들에게 그렇게 사랑을 베푼 신부는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 한족 신부님들이 다녀가면 임복만 신부님의 겸손과 친절을 더욱 느끼게 된단다. 그래서 임복만 신부님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고 한다.(p307-308)
☞ 신부님이 중국에 뿌린 씨앗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 사랑과 함께.
미사후 소강당에서 제보자들의 증언을 듣는다. 1985년 경에 이곳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임복만 신부님의 활약상이 생생하다.
“1985년 여름에 오셨는데, 우리가 성당에 나와서 신부님한테 이렇게 말 듣기는 처음이었어요. 신부님 오신다니까 얼마나 기쁜지, 그 기쁜 감정은 말로 다할 수 없었어요. 조선말로 우리가 모르는 거를 차근차근 가르쳐 줘서, 아휴, 어떻게나 기쁜지, 그리고 ‘정말 감사하구나.’하는 것을 느꼈어요. 고해한 다음 미사보니가 ‘야, 천당이 이보다 더 좋을까?’하며 감격스러웠어요.”(p103)
☞ 나는 얼마나 감동없이 미사에 참례하는가? 부끄럽다.
채록 장소가 애국교회인지라 임복만 신부님이 애국교회를 심하게 반대했다는 대목에서는 제보자의 목소리가 시르죽어 가는 듯 낮아진다. 또한 신부님이 선교하러 다니다 허기질 때는 허리춤에 찬 콩 한 쪽을 씹고, 한 덩이 소금을 빨아 먹었다는 대목에서는 애절함이 묻어난다. 허기져서 소금을 빨았다니 ……. (p103-104)
☞ 허기를 무릎쓰고 선교하는 모습이 눈에 스친다. 그 모습.
“1986년도에요. 윤씨네 누구 수녀원에 간다는 소문이 짝 퍼져 서란에 계시는 임 신부님의 귀에도 들어갔나 봐요. 김 요안나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셔서 저보고 한번 들어오라는 거예요. 신부님이 계신 곳은 비밀이니까 신부님 이야기는 하지 않더군요…… 그래 갔더니, 임 신부님은 제가 상상했던 그런 멋쟁이는 아니셨어요. 제 가슴이 아팠어요. 사실 소박한 중국 할아버지 같았지요. 생활하는 것이나 입은 옷같은 그 외적인 모습 보고 가슴 아팠어요. 막 불쌍한 마음이 들어 많이 울었는데, 신부님은 아마 모를 거 같아요. 제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지린성당 수녀님) (p173-174)
☞ 남을 위해 울어준다는 것. 그것이 기도가 아닌가!
제보자는 임봉만 신부님이 전교하러 다니던 시절에 동행했단다. 신부님은 출옥한 뒤 노동개조공장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기회만 되면 몰래 빠져나와 전교하러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체포되면 다시 노개농에 갇히고, 또다시 기회를 엿보다 빠져나와 전교하기를 거듭했다.
"그때는 우리 외사촌 누이가 임 신부님을 모시고 동북에 가서 몰래몰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우리 집에 왔습니다. 그때는 흑룡강성 전체에 중국 신부님들도 없었습니다. 임 신부님이 겨울에 외삼촌 집에 오셔서 석 달 동안 미사하고 성사 주셨죠. 그러다가 섣달 그믐날 내가 신부님을 모시고 하얼빈시 최 루시아 고모 집으로 갑습니다. …… 임 신부님은 쉴 때마다 묵주를 만드셨습니다. 그 때는 묵주가 집집이 다 없었습니다. 산에 가서 싸리나무 구멍을 내서, 묵주를 만들어 가는 곳마다 나눠주곤 했습니다. 참 빠르게 잘 만들었습니다. 휴식할 때는 마당에 돌아다니면서도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고 열심히 기도드렸지요.“(p239-240)
☞ 도저히 상상이 안되는 신부님의 열정. 누가 신부님의 그 열정을 가둘 수가 있었을까?
제보자는 임봉만 신부님이 신앙 이외에 먹고 자고 입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교우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만 생각하던 사제라고 회고한다. 세속에 대한 일은 염려도 안 하고, 생각도 안 했다는 것이다.(p240)
☞ 이런 사제를 나도 만나보고 싶다.
"임 신부님이 며칠 안 오면 우리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나가 일하다가 들어와서 신부님이 있는지부터 살핍니다. 와서 잡아갔을까봐. 그래 앉아 있으면 우리 마음이 놓입니다. …… 아침에 기도 끝나면 묵주 만드는 게 일인데, 어떤 때는 교리문답을 글로 썼습니다. 우리 아들한테도 교리 문답을 한 권 줬습니다. 미사는 하루에 한 번, 밥 먹고서 날이 어두운 8시쯤에 했습니다. 여기 있는 교우들은 다 왔습니다. 미사 끝나면 성가 배워 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포도주와 면병이 없어 미사도 드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교우는 사방으로 수소문해서 포도주를 구해 오고, 또 다른 교우는 면병을 만들어 와서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P323-324)
☞ 고난 중에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다. 참 행복이다.
비교적 젊은 여교우는 자신이 지금까지 열심히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건 다름 아닌 임복만 신부님 때문이란다. 외국인이 자기 부모까지 버리고 중국에 와서 선교하는 걸 보고 끝까지 믿어야 되겠다는 결심이 생겼다고 한다.
“아주 덕성스럽고, 아버지같았습니다. 내 아이가 태어날 지 한 달이 안 되었을 때, 임 신부님이 아이를 안고 ‘날 할아버지라 부르라. 넌 조그만 천사다.’라고 말한 게 생각납니다. 그때 갓 영세했는데 임 신부님 보고서 ‘잘 믿어야 되겠다.’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p326)
☞ 감동을 주는 할아버지 사제.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그렇다.
"너희 배고픈가? 배고파도 참아야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요것도 못 참는가?“
대제(大齊)때 단식하는 신자들에게 임복만 신부님이 하던 말이란다.(p327)
☞ 얼마나 가슴을 때리는 밀인가!
또 다른 제보자는 성호를 긋고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증언한다. 첫 사제로 임복만 신부님을 봤을 때, 마치 예수님을 뵙는 거 같았다고 한다. 신부님이 자기 집을 방문해 성체를 옷장에 모셨단다. 그때 신부님에게 ‘여기가 고생스러우니 살기 좋은 한국에 돌아가라.’고 말했단다. 그러자 ‘양 떼를 놓고 못 간다.’고 했다며 노인이 울먹인다.(P354)
☞ 이 마음이 양 데를 돌보는 목자의 마음이 아닌가!
"내가 수란이라는 데 처음 가 봤어요. 혼자 갔지요. 하느님이 길을 가르쳐 준 거 같아요. 그날이 부활절이라고 교우들이 많이 모여 있더구만요. 회장님이 써 준 편지를 임 신부님께 보이니까 깜짝 놀라데요. 그날 미사를 하고, 이튿날 신부님과 다시 또 얘기했더니만 ‘네가 이렇게 불쌍한 인간이구나.’이러더만요. 그 집에 있으면서 일 주일 공부했어요. 갈 때는 머리가 많이 아팠는데, 거기서는 아프지 않았어요.“
임복만 신부님의 지시로 자신에게 모질게 대하는 남편을 위해 54일 기도를 연거푸 했다고 한다. 결국 남편은 술 담배를 끊고 입교했다. 그런 신부님이 병이 난 대목에서는 울음이 터져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미신을 믿던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준 분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조선족 교우인 중년여성) (p360)
환갑 무렵의 제보자는 신부님이 참 좋은 분이었다며 젊은 날을 추억한다.
“임 신부님이 인자하셨어요. 사람이 참 좋으시지만 엄격하고 무서워 말도 잘 못했는데, 점점 친하게 되고부터는 진짜 좋은 신부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겸손하고, 뽐내지 않고, 항상 가난한 사람 돕고, 없으면 도와주고, 그전에는 제 남편이 술을 먹고 술주정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임 신부님이 위로하고 이야기해 가지고 그 사람이 술을 먹지 않고, 기도도 잘 드리고, 진짜 열심히 지냈어요.”(p368)
☞ 모든 사람이 좋은 신부로 기억하는 신부님의 삶은 힘드셨지만 값지셨습니다.
신부님이 숨어다니며 사목하다 말년에는 말도 못하고 기동도 못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너나없이 눈물을 흘린다.(p42)
☞ 모든 것을 주님을 향해 바친 선교 사제의 삶이 눈물겹다.
양세환 비오 신부(1918.9.23~1965.11.4)
양세환 비오 신부는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 차마동의 구교우 집안에서 4난5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31년 평양 교구생으로 동성 소신학교에 입학, 사제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1935년 덕원 신학교로 잔학하여 1938년에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그의 가족은 1934~1935년경 만주로 이주하여 창춘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양세환 신부는 1943년 창춘 대신학교 성당에서 지린교구장인 가스페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이때 양세환 신부를 포함해 8명이 함께 서품되었다. 이 서품식에는 지린교구에서 선교 중인 김선영 신부, 임복만 신부뿐만 아니라 평양교구에서도 두 신부가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양세환 신부는 언어 실력과 재능이 뛰어나 신학생 시절부터 지린교구장인 가스페 주교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 이 뛰어난 재능이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지다니. 꼭 김대건 신부님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품 후 창춘 본당에서 뿐만 아니라 지린, 반스 등지를 다니며 전교하였고, 신학교에서는 음악과 일본어를 가르쳤다. 김선영 신부의 하얼빈 전임 후에는 가끔 하얼빈에 가서 한국인 세 신부가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 도한 랴오닝성에서 사목 중이던 신인균 요셉 신부와도 친밀히 교류하였다. 1949년 8월말 하얼빈을 방문 후에 체포 투옥되었다.
당시 중국 대륙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당이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중국 천주교회는 자연히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민당에 동조, 협력하였다. 외국어 실력이 출중했던 양세환 신부는 미국과의 접촉에 통역 등으로 협조하였고, 공산당에 쫓기는 국민당 간부 부인이 대만으로 피신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인해 공산당 정부로부터 ‘미국간첩고문’이라는 죄목으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양세환 신부는 창춘 감옥에서 삼엄한 감시와 참혹한 고통 속에 옥살이를 하였다. 면회를 다녀온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에 따르면, 양세환 신부는 언제나 발에 무거운 쇠고랑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 얼마나 힘드셨을까?
옥중에서도 양세환 신부는 교황과 단절하고 애국교회에 가입하라고 집요하게 강요당했지만,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한 비협조에 대한 보복으로 사방이 가시철망으로 둘러싸여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찔리는, 시멘트 바닥의 방에서 3개월을 지냈다. 면회 간 최정숙 모니카에게 그런 지옥과 같은 곳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 굽히지 않는 참 신앙의 용기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렇게 살벌한 감시와 참혹한 고통 속에 15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양세환 신부는 49세의 젊은 나이인 1965년 11월 4일 병으로 옥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감옥 내 죄수 묘지에 묻혔는데, 그 후 도시 개발로 인해 묘지가 없어지는 와중에 흔적도 없이 산화되어 버렸다. 그는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시신마저도 번제물로 바쳤던 것이다.(P393-395)
☞ 주님을 향한 선교 사제의 길은 험하지만 그 수고 하느님께서 갚아 주시리라.
양세환 신부에 대한 증언
양세환 신부님은 창춘 신학교에서 한 번 만나 봤단다. 양세환 신부님을 사랑한 조선 교우들이 머리카락을 잘라서 버선을 떠 줬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충격적이다. 교우들이 신부님을 얼마나 끔찍이 공경했으면 그리 했을까 싶다.(사제였다가 환속한 한족 노인) (p340)
☞ 어떤 신부님이셨는지는 이 증언으로 상상이 된다.
흰 수염을 기른 한족 할아버지는 가슴에 손톱만한 빨간 십자가를 달고 있다. 조선 신부님으로는 어려서 양세환 신부님을 처음 봤단다. 신부님이 여기 와서 미사를 드리고 가다가 성모군(레지오 마리애)을 조직했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갔단다. 어른들이 거기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다시는 묻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았단다.(p189)
뒤이은 할머니는 많은 말을 하고 싶어 한다.
“양 신부님은 얼굴이 동그랗고, 살색이 맑았습니다. 안경 낀 멋쟁이고 예뻤습니다. 성가도 잘 불렀지요.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산이나 공원에 가서 꽃 뜯어 주고 성가 부른 거 많이 생각나요. 신부님은 아주 겸손하고 아이들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아주 좋아했지요. 아주 좋고 얌전한 신부입니다.” 후에 한족 수녀님으로부터 양세환 신부님이 특무(국민당 편에 서서 일한 간첩)로 잡혀가 감옥에서 순교했다는 말을 들었단다.(p190)
☞ 겸손하고 사랑많으신 신부님, 장f 생기고 재능이 많으신 좋은 신부님이셨구나.
“나는 그때 길림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열여섯, 열일곱 살 날 때였습니다. 끝나면 집에 와서 미사 참례했는데, 그 미사 때 양 신부님을 길림에서 봤어요. 그때 신부님은 젊고 곱게 잘 생겼습니다.…… 그다음에 감옥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반동분자고, 특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한족 할아버지) (p193)
1944년에 양세환 신부님을 처음 만나 미사에 참례하게 됐단다. 그러다 신부님이 간첩으로 잡혀 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마도 신부님이 교황님에 관한 소식 등을 라디오로 들어서 그런 것 같단다. 1953년, 중국 당국이 외국인들을 국외로 내쫓을 때였다.(여든 중반의 한족 할아버지) (p369)
“양 신부님은 내가 보기에는 아무 죄도 없었어요. 면회를 가서 신부님 보고 실컷 울었어요. 자주 가 봤어요. 양 신부님 찾아갈 때, 택시 타고 갔어요. 자전거를 탈 줄 몰라서요. 나중에 양 신부님은 감옥에서 병이 나 돌아가셨어요.”(아흔된 할머니) (p89-90)
이어 한 주교님 자신이 27년간 감옥살이하면서 한때 양세환 신부님과도 같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얘기를 꺼낸다. 서로 대면하지는 못했다고 하나, 일행의 놀라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감옥살이하면서 춥고 졸린 것도 그렇지만, 가장 힘든 게 배고픔이었다고 한다.(지하교회의 한 주교님) (p95)
양세환 신부님은 두 신부님과 사정이 다르다. 국민당과 관련된 고위층 부인이 대만으로 피신한 일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면회를 가니 곱던 양세환 신부님의 얼굴이 형편없이 되었고, 뼈만 앙상하더란다. 쇠고랑을 찬 채 …… .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옥에서 선종하고 말았다.(강순옥 데레사 수녀님) (p108)
☞ 세상의 악에 스러진 신부님의 삶이 인간적으로 애처럽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적하던 시절, 양세환 신부님의 특무(간첩혐의)로 붙들러 갔단다. 신부님은 여섯 나라 말을 구사할 수 있었으니 외국인과 접촉이 빈번해 그런 혐의를 받았을 거라고 한다. 결국 신부님은 투옥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종했다.(일흔 중반의 한족 할머니) (P352)
☞ 신부님의 삶이, 재능이 너무 아깝다.
3. 이 책을 읽고 앞으로 내 삶에서 실천할 것
- 매일 선교사를 위한 묵주기도를 5단씩 봉헌한다
첫댓글 김선영 요셉신부님,임복만 바오로신부님,양세환 비오신부님 세분의 삶은 선교사들이 어떻게 선교해야 하는지를 예수님의 삶을 몸으로 실천하셨네요. 마음지기님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금당님, 늘 격려의 답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세신부님의 사랑 가득찬 고귀한 삶에 고개 숙여집니다.
과거 저의 신앙생활을 깊이 반성합니다.
불평불만만 하고 감사를 모르는 저의 교만을 용서 청합니다.
천국에서 저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세신부님께
청합니다.
저희들의 영육 성화를 위해 빌어주소서.
좋은글 올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잘 계시지요...같은 본당인데도 얼굴 뵌지가 오래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