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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추정강숙려의 풀꽃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추정
-제17회 해외 한국문학 심포지엄 원고-
재외 한인 문학의 모국어 지향적 담론
--재일 왕수영 시인과 조선족 김학천 시인을 중심으로
김 송 배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회장)
1. 재외 한인 문학과의 교류
우리는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사회, 경제, 문화 등 각 분야마다 진취적인 발전을 성취했다고 하지만, 항간에서 일부 논객들은 정신문화의 중심축을 이루는 문학이 위기를 맞았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우리 문인들 스스로의 진단을 통해서 이를 치유할 수 있는 자성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문제이지만, 국가의 정책수립과 그 시행에서도 상당한 의구심과 우려를 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들은 더욱 큰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물질문명의 팽배로 인한 정신적 패퇴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지만, 요즘 사회에서 등한시할 수 없는 첨단 테크노피아의 시대에 상응하는 문학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큰 요인은 문학서적을 읽는 층이 점점 얇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학청소년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들이 배회하고 방황하는 곳은 다름아닌 인터넷 매체이며 사이버 공간이다. 이 사이버 공간에서 횡행하는 그들만의 문학작품들이 과연 일정한 여과장치도 없이 범람하는데 대해서 이것을 또다른 참다운 문학의 장이라고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 돈 버는 방법(재 테크)과 잘 먹고 잘 사는 법(건강법)에 관한 서적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 세상에서 한낱 문학서적의 효용가치가 있겠느냐는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에서 정신문화란 일부 특정계층의 전유물처럼 치부하면서 개인주의, 이기주의만 활개를 치고 있는 슬픈 시대에 직면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시대적 변모에서 우리는 한국문학의 세계화 혹은 재외 한인문학의 활성화를 위해 정책적 배려는 엄두도 못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대중성이 짙은 문화가 해외에서 자생력을 획득하는 것을 보면 우리 문학도 대중 속으로 밀착되어야 한다는 어눌한 제안을 하는 점도 앞으로 이런 문제들이 반드시 연구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거나 오늘의 주제는 재외 한인문학과 모국어에 관한 담론이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중국의 한인문학에서 지향하는 모국어의 사랑은 참으로 광범위 하다. 여기서는 일본과 중국에서의 우리 문학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으며, 고국과 어떤 교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일본의 경우를 보면 학술적인 교류는 어떠한지 잘 모르겠으나, 공식적으로 행해지는 문학 교류는 국가적으로나 문학단체의 측면에서도 전무한 것으로 보아서 국가와 문학단체들이 얼마나 그동안 재외 문인들에 대한 관심이 소원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인식은 최근의 왕수영 시집『마음은 달보다 먼저 조국으로 간다』서문에서 밝혔듯이 ‘지금 일본에는 한류(韓流) 붐으로 한국과 일본이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다. 한국의 영화와 음악이, 텔레비전 드라마가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한국에서 오는 연예인들의 언동이 점잖고 교양이 돋보여 일본인들을 감동시킨다. 한국 붐에 휩싸인 일본인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고 한국어와 한국요리를 배우는 이들이 놀라운 숫자로 불어나고 한국을 옆집 가듯 드나든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고 이제는 <가깝고도 아주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가깝고도 가까워진 한국(본국)과 일본이 재일(在日) 동포를 잊고 재일 동포를 건너 뛰어 내왕하는 것 같은 인상이 깊다. 잊혀진 동포의 역사를 한국인도 일본인도 등한시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라는 언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에 회자되거나 표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아도 출판사나 문학동아리 혹은 개인적 연분으로 상호 초청하는 문학의 교류는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본인도 2000년 11월 23일, 왕수영 시인이 주관하여 도쿄 조후시 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강과 다마천의 교류(漢江と多摩川の交流)’에 참가하여 성춘복, 이경희, 김선진, 박희영 시인 등과 함께 시를 낭송한 일이 있으며 다음 해에는 그들을 서울로 초청하여 시 낭송과 문학강연을 한 적이 있다.
한편 1999년 12월에는 ‘2000년 시의 축제’라는 이름으로 세계 한민족 시인선을 국내(태학사)에서 발간하고 중국, 러시아, 일본, 인도네시아, 칠레, 브라질, 멕시코, 캐나다, 미국의 한인 시인들의 작품을 집대성한 일이 있다. 여기에서 재일 시인 왕수영, 이미자, 김 윤 등의 작품을 대할 수 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모국어 사랑과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김 윤 시인이 ‘두 개의 나라를 등에 지고 다른 하나의 나라에 얹혀 궁글며 허덕이는 사람들. 시를 쓰는 아픔, 눈이 뱅뱅 돈다’거나 이미자 시인이 ‘부모의 신세타령을 일본어로 모국어로 엮어가면서 내 뜨거운 열망의 출구를 찾는다’는 언지는 참으로 이국에서의 갈등을 눈물겹게 승화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 조선족의 경우는 어떠한가. 중국이 개혁정책을 실시하고 1992년 한중수교가 되면서 조선족 문단도 활기를 띄기 시작하는데 그 연륜에 비해서 일본보다는 더욱 활성화한 것이 사실이다. 1993년에 완공된 ‘연변민족문학원’ 청사는 당시 연변작가협회 이근전 주석이 한국의 문학계, 경제계, 정계에 조선족 문학의 총체적 어려운 상황을 홍보하여 약 400만 달러의 거금이 무상으로 제공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1998년부터는 김학천 주석의 노력으로 한국문협과 민작이 윤번제로 조선족 작가들을 국내에 초청하여 국내 문학과 문인들을 소개하고 약 10일 간 문학유적지 탐방 등 문예지원금을 받아 실시한 바 있다.
이 때, 6회에 걸쳐 30 여명의 조선족 문인이 고국을 방문하여 상호간 문학교류가 본격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고국을 이해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연변민족문학원에서는 지금까지 도합 6기의 문학강습반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김승옥 소설가의 알선으로 이호철, 박완서, 황금찬, 김영현, 홍기삼, 성춘복, 이근배 등 30여명의 국내 문인들이 참가, 문학 강연을 하면서 조선족 문인들과 그곳 문학 지망생들에게 문학적 자질을 제고하였다.
그리고 한국문인협회는 1991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 전, 북경과 2002년, 심양 ․ 하얼빈에서 두 차례 ‘해외문학심포지엄’을 개최하여 한국 문인들과 조선족 문인들 간에 광범위한 교류가 이어졌으며 김학천 주석은 2000년, 한국문협 미국 로스안젤레스 해외문학심포지엄에서 주제를 발표하여 미국의 교민 작가들과의 친목과 교류에도 공헌하였다.
한편 연변민족문학원과 경북 상주 ‘숲문학회’ 사이에는 2002년에 자매결연이 맺어져 이들은 상호 방문과 문학의 교류를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어서 문학과 우정이 동시에 연결되는 좋은 본보기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의 ‘한민족글마당’이라는 순수 작가들의 모임에서는 매년 재외 문인들에게 ‘동포문학상’을 수여하고 있는데 2006년에는 조선족 김학천 시인이 수상하는 영예를 가지기도 했다.
이처럼 재외 한인 문인들과의 교류와 그들의 모국어 사랑에 대한 담론은 동남아에 국한해서도 그 범위가 너무 광대하여 종합적으로 다루는 것은 어려워서 오늘 이 심포지엄에서는 재일 왕수영(王秀英) 시인과 조선족 김학천(金學泉) 시인에 한정해서 그들의 시적 진실과 교감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2. 왕수영 시인의 시적 진실
먼저 왕수영 시인의 문학적 경력을 잠시 살펴보면, 그는 1937년 부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문과 재학중 교내 ‘어머니날’ 행사에 시가 장원을 하고 그후 은사 박두진 시인에게 사사를 받아 1961년『현대문학』지 추천완료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부산 경남여중고를 졸업할 때까지는 무용에 뜻을 두었고, 특히 안무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시를 쓰는 예술적 재질이 뛰어난 재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문단 데뷔와 동시에 장편소설『뜨거운 그늘』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이 소설이 그 당시 일본에 있던 저항적 시인이자 번역가인 김소운(金素雲 : 1907~1981)시인의 눈에 띄어서 일본의 교포신문에 연재를 하고 일본 방문을 초청 받게 된다. 그는 일본에 머무는 동안 니가타를 출항하는 102번째 북송선을 취재하게 되고 이 일이 엉뚱하게 꼬여서 1964년에는 조총련 관련자로 몰려서 남산에 끌려가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1년 뒤 귀국하여 KBS의 인기프로였던 ‘재치박사’로 출연하면서 시집『화문의 영토』(1970:월간문학)와『당신은』(1975:) 을 출간하고 1976년부터 일본에 영주하게 된다. 그는『주부생활』주일 특파원으로 많은 취재활동을 하는 동안 부산일보에 「일본통신」을 연재하고 국내 잡지에 장편소설도 연재하는 열정을 쏟았다.
그의 시집으로는『당신의 뜻으로』(1982),『동경의 13월』(1992:제3기획),『조국의 우표에는 언제나 눈물이』(1995:마을),『조센진의 흉터』(1995:마을),『마음은 달보다 먼저 조국으로 간다』(2005:답게) 등 7권이 있으며, 소설집은『조국은 멀다』등 8권과 수필집『쪽발이 잡은 조센진』(1999:정우사)과 일본에서 일어로 출간한『모가 나는 한국인, 둥글게 쓰다듬는 일본인』(角が立つ韓國人丸くおめる日本人-2000)이 있으며 번역서가 30여권에 이르고 있다.
한편 그는 1996년에 ‘제11회 상화시인상’과 1998년에는 ‘제32회 월탄문학상’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40여년간 일본에 살면서 ‘한국의 시를 낭독하는 모임’과 ‘수영 씨의 모임’을 주재하면서 한국의 시와 한국의 춤과 판소리를 지도하고 이 멤버들이 심포지엄 위문공연 등의 활동을 펼치는 억척 한인 여성의 표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상과 같이 그의 간단한 약력과 저서들의 제목으로 보아서도 그가 얼마나 고국과 모국어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시집『동경의 13월』‘책머리’에서 이러한 심경의 일단을 다음과 같이 그의 진실로 토로하고 있다.
아무런 자극도 없고 / 신선한 바람도 없는 / 일본어의 일상 속에 / 무디어가는 모국어 // 내 나라를 / 떠나와서 / 모국어로 시를 쓰는 / 일이 힘들다 / 고독한 작업이다 // 그러나 한국어로 / 시를 쓰는 일만이 / 유일한 구원이다.
이처럼 재외 한인들은 이질적인 집단 속의 일상생활에서 언어문제가 가장 큰 고통이다. 그러나 그는 ‘모국어로 시를 쓰는’ 것은 힘들고 고독하지만, ‘유일한 구원’으로 수용한다. 이러한 시인의 의식은 이국이라는 단절된 공간에서 지향하려는 조국사랑이다. 더구나 일본이라는 역사적, 사회적 특수상황에서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시인의 지적 혜안과 내면의 진실이 복합적으로 분사하는 간절한 염원이기도 하다.
대체로 그는 7권의 시집을 통해서 이러한 조국에 대한 잊을 수 없는 향수의식과모국어 지향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그의 진솔한 언어에 접근할 수 있다. 어찌보면 향수나 모국어가 따로 분리될 수 없지만, 그가 절감하는 인생의 원류(혹은 시적 원류)는 그의 인생관과 문학관 모두가 모국어로 결집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운 / 모국어에 목메어 / 꽃을 심어 봅니다 / 새봄이면 / 모국어로 피는 꽃과 / 서러운 얘기 엮어 보려고 // 구름으로 낮익은 얼굴 빚으며 / 기다립니다.
--『동경의 13월』:「새봄에는」중에서
한국을 떠나와 / 타국에 사는 사람들 중에 / 한국을 조국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 모국이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그러나 한국어를 / 조국어라 하지 않고 / 모국어라 합니다 // 말은 조상이 직접 가르친다기보다 / 바로 어머니가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어머니가 있어도 / 모국어를 모르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 모국어를 못하는 아이들은 / 어머니가 있어도 고아입니다 // 자식을 가졌다고 어머니가 아닙니다 / 모국어를 가르쳐야 어머니입니다.
--『고국의 우표에는 언제나 눈물이』:「고아」전문
왜 당신은 우리 말을 못합니까 / 우리 말을 못하면 우리 사람 아닙니다 / 국적은 우리와 같아도 / 말을 못하니 ‘쪽발이’입니다 / 한 청년이 날카롭게 아들의 / 심장을 찔렀다.
--『마음은 달보다 먼저 조국으로 간다』:「판소리」중에서
그렇다. ‘모국어로 피는 꽃’을 ‘기다’리는 ‘동경의 13월’, 그의 「새봄」은 너무 애절하다. ‘동경’이라는 이질적이면서 특수한 공간에서 접하는 ‘새봄’의 시간성은 불합리와 모순의 사유를 진지하게 접목시키고 있다.
한편 ‘모국어를 가르쳐야 어머니’임을 단정적으로 적시하는「고아」에서도 ‘조국’과 ‘모국’에 대한 혼란을 지적하고 ‘타국에 사는’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모국어를 못하는 아이들’과 모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어머니와의 대칭은 결론적으로 ‘고아’라는 상실감의 원형이 생활 속에 잠재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는 다섯 번째 시집『고국의 우표에는 언제나 눈물이』의 ‘책머리에’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함으로써 그의 내면의식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당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 살고 있는 교포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재일교포로서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 조국 사람들은 재일교포의 의식세계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 분명히 조국은 그리운 곳이고 꿈에도 잊지 못하는 곳이며 보고 싶은 얼굴이 많다. 일본은 항상 타국이며 외롭고 서러운 곳이다. / 그러나 그리워하던 조국엘 가보면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고 밤이 내린 한강에서 실컷 울고 싶기도 한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면 낯선 타향이던 서러운 땅이 아늑하고 안정된 고독을 안겨준다. / 도대체 이 정처없는 운명의 실타래는 언제 다 풀어져 끝날 것인가. 일본에서는 더운 피가 도는 조국 사람의 손을 잡고 싶고, 조국에 가면 성실하고 검소하게 살고 있는 일본집의 이웃이 부러워진다. / 올해는 참으로 긴 세월만에 조국 나들이를 하고 많은 감격과 큰 용기와 뜨거운 위안을 듬뿍 혈관에 담아왔다. 그래서 다시 객지의 삶이 신선하고 풍부해졌다. / 조국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시를 쓰는 일이 가장 큰 기쁨이고 구원이다. 특히 일본에 살면서 모국어를 돌아볼 경황이 없고 일본어의 유혹에 빠지기 일쑤다. 그러므로 모국어로 글을 쓰는 일은 오히려 다른 지역의 교포들보다 몇 배 힘이 든다.
이처럼 인용이 약간 길었지만, 그의 조국과 모국어에 대한 솔직한 의식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모국어 사랑에 대한 갈등일 수도 있다. 생활공간에서의 동화는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를 ‘운명’이라는 가치관으로 정리하면서 ‘시를 쓰는 일이 가장 큰 기쁨이고 구원’임을 인식하고 있다. 위에 예시한「판소리」도 동질의 어조를 들을 수 있다. 시적화자 ‘어머니’와 ‘아들’ 간에 벌어지는 일본의 생활상을 적나나하게 묘사하여 ‘판소리’ 사설처럼 펼쳐지고 있다. ‘엄마 등에 업혀온 / 그때 세 살 아기 / 조국의 세 살 아기 / 오십오 년만에 비행기 타고 / 귀국’했으나 그 아들에게 돌아온 것은 ‘왜 당신은 우리 말을 못합니까’라는 일종의 핀잔과 함께 ‘국적은 우리와 같아도 / 말을 못하니 쪽발이입니다’라고 아들의‘심장을’ 찌르는 대목에서 우리는 더욱 많은 사유가 뒤따라야 할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시적소재와 주제의 천착은 왕수영 시인의 작품과 생활전반에서 확립된 진실이며 또한 재일 한인 문학의 주체로서 우리 모국어 사랑의 표본이 되고 있음에 경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왕수영 시인과 작품에 대한 고찰과 연구는 앞으로 좀더 진지하게 진행되면 그의 시 세계뿐만 아니라, 재일 한인 문학의 근원과 지향적 주제를 심도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정영자 교수의『동경의 13월』의 서평(모국어에 대한 절대적 사랑과 구원)과 성춘복 시인의『조국의 우표에는언제나 눈물이』의 해설(근원적인 문제의 천착을 위하여), 그리고 김우종 평론가의『마음은 달보다 먼저 조국으로 간다』의 해설(일본 땅 왕수영 시인의 영토)들은 한결같이 조국의 사랑과 모국어를 원류로 한 시 창작의 열정을 통해서 존재를 성찰하고 긍정하면서 삶의 지표로 정립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알 수 있게 적시하고 있다.
3. 김학천 시인의 문학적 교감
김학천 시인은 연변에서 출생하여 연변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한 국가 1급 작가이다. 그는 연변작가협회 주석과 중국작가협회 전국위원을 역임하고 현재는 중국연변사회과학계연합회 주석과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위원회 위워, 중국시가학회 이사로 재임 중이다.
그의 저서는 중문시집『繽紛的季節』,『世紀之交的獨行』등 2권과 한글 시집『꿈 많은 봇나무 숲』(1998 :연변인민출판사)과『봇나무 숲 情結』(2000:한국 청년문화사)가 있고 중역시집은『장도야 은장도』,『포공영』,『하늘은 놀이터』,『내 사랑 천지』등 다수가 있으며 혜란강문학상과 천지문학상, 제4기 중국소수민족 문학상(중역번역부문)과 제7기 중국소수민족 문학상(중역 시집부문), 제4회 한국 한글마당문학상(해외 한글부문) 등을 수상한 바 있다.
또한 한글판『20세기 중국 조선족문학선』총 6권과 중국판『중국 조선족문학작품정수』총 5권을 주편으로 간행한 바 있는 그는 자신의 문학 창작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첫 째, 중문 창작, 둘 째, 한글 창작, 셋 째, 중역 창작 등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 세 부류 중에서 중문 창작에 가장 비중을 높게 두고 다음으로 중역 창작이며 한글 창작은 10년 전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상당한 궤도에 이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천착하는 시적주제나 소재는 중국으로 이주한 동기가 사뭇 재일 왕수영 시인의 경우와는 다르기 때문에 주로 자연 풍광과 그들만의 애환과 가끔 한국의 현대적인 모습을 묘사하여 한국시와 근접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엿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오랜 시간의 폐쇄와 단절에서 개방이라는 정세의 흐름에 따라 고국과의 인적 물적 교류에서 획득된 일련의 사회적 감각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진다.
우리는 먼저 조선족 문학의 개요를 이해함으로써 김학천 시인의 인간적 교감을 그의 작품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조선족 문학의 형성과정은 대체로 약 100년 전, 한민족이 항일투사, 피난민으로 중국에 이주하면서 조선족 역사와 조선족 문화가 성립된다. 조선족 문학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면서 지금까지 민족문학의 특색을 살려서 김학철, 리근전, 박효근, 리혜선, 우광훈 등의 소설가와 윤동주, 심련수, 김 철, 리삼월, 김성휘, 조룡남, 리상각, 박 화, 한 춘, 남영전, 김학천, 리성비, 최룡국, 리임원, 석 화, 박설매 등의 시인들이 한글로 창작하고 있으며 이들은 1956년에 연변작가협회를 창립하여 51년의 문단 역사를 통해서 중국내에서 조선족 문학의 중심체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문학은 민족정신을 가장 완벽하고 가장 생동하며 가장 진실하게 고양하는 문화형태로써 민족이 있는 한 문학은 시종 존재할 것이며 문학이 존재하는 한 민족은 우리의 언어와 함께 완강하게 살아남을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조선족 문학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김학천 시인의 다음과 같은 언술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의 만사 만물은 역사의 거창한 흐름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오로지 과정만이 영원하다. 시는 이러한 역사의 거창한 흐름 속에서 튕겨나오는 파도의 물방울이다. 아름답기가 눈앞을 아찔하게 하는 꽃망울이다. 달은 마냥 우리에게 밝은 쪽을 보이고 있다. 그 다른 한 면은 어떠할까? 그쪽에도 시의 정서가 있을까? 나는 줄곧 생각한다. 오로지 진정이라야 감동을 줄 수 있고 오로지 새롭고 아름다워야 그림같이 생동할 것이다. 시의 소종한 점은 시가 사람들로 하여금 정감에 젖어들게 하고 철리에 깨우치게 되고 상상의 하늘에 날아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꽃이 없는 자연계는 단조로울 것이고 술이 없는 세상은 적막할 것이고 시가 없는 인생은 어떠할까?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또 감히 생각할 수 없다. 끝없이 윤회하고 노고하나 매번마다 새로운 계절이 선사한 영감과 열주(烈酒)가 지펴 타오르는 격정은 나로 하여금 번번이 감격과 감동의 흐느낌에서 모대기다가 또 샘솟듯 한 시의 분출에 융합한다.
이 글은『2000년 시의 축제』에 게재된 그의 ‘시작 노트’ 전문이다. 그의 시적 발상과 창작에는 자연과의 조화뿐만 아니라, ‘시가 없는 인생’에 대한 회의가 잠재하고 있다. 거기에는 어쩔 수 없이 동화해야 하는 이국의 정치적 형태에서도 소수민족의 애환을 투영시킨 혼불이 그의 심연에 침잠되고 그것을 한글 작품으로 승화해야 하는 남모르는 갈등도 잠재되어 있다.
한국의 경주는 / 번거로운 / 신라의 고도(古都)였다 // 오늘의 경주는 / 선경같이 아늑한 / 이야기와 이야기가 겹친 공원도시였다 // 불국사의 종소리는 / 신라의 달빛 아래에서 / 머나먼 슬픔과 기쁨을 용해(溶解)한다 // 외로운 첨성대는 / 주단 같은 잔디 우에 우뚝 서서 / 천 년의 퀴즈를 풀어본다 // 거친 성미에 그래도 세심한 경주김씨 / 신라 왕손의 후예들은 / 오늘도 왕조(王朝)의 성쇠(盛衰)를 진맥해 본다 // 서안(西安)마냥 / 옛 장안(長安)의 진전한와(秦碘漢瓦) 속에 중국마냥 / 한국의 역사와 현실은 여기에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눈다.
--『경주』전문
서울의 지하철은 / 사면팔방으로 노니는 거룡이다 // 손님들은 조수(潮水)마냥 / 몰려왔다 또 밀려간다 // 피곤과 초조함은 뒤엉겨 / 기대와 무료(無聊)가 융합된다 // 역과 역은 / 졸음과 환상 속에서 연결된다 // 혹여 음악소리와 / 구걸하는 소리는 새로운 악장(樂章)을 엮어간다 // 그렇게 많은 지하철 열차와 손님들은 / 어디서 왔다 또 어디로 갔을까 // 끝없이 분해했다 조합하고 / 끝없이 조합했다 또 분해하고 // 지하의 세계는 울렁이는 질주 속에서 / 질서는 꽤나 정연하다.
--『서울 지하철』전문
이러한 시적정황은 한국이다. 그가 빈번한 고국방문을 통해서 얻어진 작품이다. 이처럼 많은 작품을 한국과 한반도에서 추출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정신의 계승과 고양이며 모국어의 사랑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한글로 창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중국학교에서 중국글로 공부하고 중국글로 창작하다가 연변작가협회 주석을 맡으면서 우리 민족과 집중적이고 직접적으로 어울리게 되어 우리글로 우리 민족의 정서와 감정을 본질적으로 터득하게 되어 본격적으로 우리 글로 창작을 하고보니 너무나 신비롭고 미묘하였으며 오히려 모국어로 자신의 감정과 감수를 표달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고 그는 ‘한민족 글마당 해외동포문학상’ 수상소감에서 밝히고 있다.
다시 김학천 시인의「불효자식」이란 시가 떠오른다. ‘금년이면 122세인 할배 김우갑(金又甲)씨가 / 1968년 여름 중국의 돈화(敦化)라는 곳에서 / 86세를 일기로 운명하실 때 / 아버지와 우리 형제에게 하시는 말씀- / 고국은 찾되 / 고향은 찾지 말라 // 1997년 9월 / 한국에 온 나는 /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경북으로 / 상주로 / 외서면으로 / 백전리로 옮겨졌다(『숲문학』 제5호에서)’는 ‘고향’과의 인연이 비록 ‘할배’이지만, 그는 지금도 작품 속에서 형상화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4. 재외 한인 문학의 활성화
이상과 같이 단순하게 일본과 중국의 한인 문학을 지엽적으로 일개인에게서만 살피는 것으로 재외 한인 문학을 전부 이해했다고 하기에는 어렵고 또 이들만으로 재외 한인 문학의 활성화를 이야기한다는 것도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지 사회의 다수민족에 비해서 우월하지 못한 문화의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모국의 생활과 향수를 탈피하여 현지의 문화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동화함으로써 현지민과의 차별성과 갈등 등의 요소를 가급적 빨리 해소하야 현지 이민사회의 정립과 개인 생활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코리아 타운이 설정된 재미동포 사회가 바로 이런 난관을 극복하면서 모국어로 생활하고 문인들은 모국어로 창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0년, L.A.에서 열린 어느 문학 심포지엄에서 당시 재미시인협회 이사장이었던 송순태 시인이 발표한 ‘북미주 한인 시인들의 시적 관심’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들의 시 창작 방향을 제시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왜 북미주 시인들은 20년, 혹은 30년을 살면서 현지의 삶에 관한 시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고 떠나온 땅에 두고 있는가. 그토록 조국을 사랑하는 것인가. 그토록 모국이 그리운 것인가. 아니면 자기 삶에 대한 숙고나 고민없이 그저 ‘시란 그리움이다’는 식으로 관념적인 시를 써내기 때문인가. -중략- 우리가 겪고 있는 이민살이의 삶을 시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문화적 충격을 벗어나기 위해서 온 가족이 사투를 벌려야하는가 하면 또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서 몸부림 쳐야 한다. -중략- 북미주 시인들이 망향조의 시에 그토록 매달리는 것도 이민살이의 그 고통을 직접 고백하는 것보다 관심을 고국으로 돌려 그리움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이민살이의 고충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도 동일한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타국에서나마 동일 민족끼리 현지민과 다른 하나의 공동체 생활공간에서 모국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경우와 현지민과 적극 밀착하면서 우리의 문화를 전파하는 등의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민단과 조총련이라는 교민단체가 있으나 얼마만큼 교민들의 권익과 생활 보호에 노력하고 모국어 사랑에 기여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사절의 경우는 왕수영 수필집『쪽발이 잡은 조센진』에서 명쾌하게 대할 수 있다.
“왕상이 우리 동네 이사왔을 때 나는 겁 없이 호랑이 소굴로 들어온 왕상을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우리 동네는 조센진을 거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일본 이름으로 일본 행세를 하며 사는 조센진이라도 우리 동네에는 이사를 안 옵니다. 그런데 왕상은 자기가 조센진(미안합니다. 다음부터는 한국인이라고 하지요)이란 사실을 숨기기는커녕, 일본인이 숨어서 조센진을 차별하는 것까지도 밝게 끄집어내어 유머로 처리하거나 진지하게 설득하거나 해서 지금까지 차별하는 쪽에 있던 일본인을 스스로 반성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우리 동네로 와서 회장을 맡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힘껏 응원하겠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들은 현지사회의 문화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모국으로부터 전래된 기본적인 문화의 특성을 대부분 보존하면서 살아가는 중용의 길이라고 연변대학 조문학부 김관용 교수는 말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조선족은 한 세기 남짓 중국 이민생활에서 숙명적으로 중국 요소와 모국 요소가 혼재한 이중적 문화에 길들여져 있다고 피력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배달민족이 영위하는 세계, 이 한국문학이라는 대 계통 속의 자 계통으로 존재하고 또 하나는 중국의 주체민족-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56개 소수민족이 영위하는 중국문학이 자 계통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진다.
이러한 조선족 문학의 특성에 대해서 전임 연변작가협회 주석이었던 조성일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조선족 문학은 기본적으로 조선족이 중국 각 시대의 역사적 생활공간에서 이루어 온 문학으로서 모국의 국민과 모국 문학과의 내재적인 정신적, 문화적 연계를 확보하여 왔지만, 조선족 문학에는 중국 사회와 중국 역사적 내용이 수용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조선족 문학이 비록 조선어 문학권에 속하는 다른 문학과는 달리 많은 경우 중국의 역사 변천, 중국의 독특한 사회생활, 중국의 자연 풍경, 중국 국민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조선족의 가치관념, 도덕규범, 사유 방식, 심리 갈등, 심리 추구 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족 문학의 중국적 특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 이처럼 이질적 문화를 수용하면서 우리 문화를 계승하고 다시 모국어로 창작하는 재외 문인들의 고충이야말로 더욱 값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외 문인들과의 교류는 생각보다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문협과 펜클럽 등의 문학단체들이 공동으로 풀어나가야 할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사실 금년도의 문예진흥기금 중에서 ‘해외동포 예술교류 기반구축사업’에 대한 지원은 아주 미미하며 소극적이다. 더구나 문학 관련 교류에는 ‘『미주문학』발간 지원’, ‘재일 민족문학 교류’, ‘『도라지』잡지 발간’, ‘조선족 문학과 예술’, ‘중한문학 비교 연구’, ‘『고려문화』지원’ 등으로 약 5,400만원 정도의 지원에 불과하다.
이처럼 국가에서는 정책적으로 관심이 없고 민간 문학단체에서는 예산타령으로 사업 시행에 어려움을 호소하다보면 재외 한인 문학과의 교류는 차치하고라도 재외 한인문학의 활성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외치면서도 양분된 한국문단 한쪽과 관계 정책부서에서는 지금 작년에 금강산에서 남북 작가들이 모여 출범했다는 ‘6.15민족문학인협회’(남쪽에서는 폭우로 수해가 발생하여 복구에 경황이 없었는데 거기에서는 ‘조국은 하나다 / 권력의 눈앞에서 양키 점령군의 총구 앞에서 / 자본가 개들의 이빨 앞에서’라는 시를 낭독하면서 박수를 쳤다고 함.)에 문예진흥기금 2,500만원을 투입하는 양상은 어떻게 수용해야할지 그저 아연(啞然)할 뿐이다.
이상과 같이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살펴본 재일 한인 문학과 중국 조선족 문학이지만, 동아시아에서 우리 한국문학이 중심축이 되어 공동으로 활성화하지 않으면글로벌 시대에 대처하기에는 상당한 난점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관계 당국과 문학단체들은 이런 점을 깊이 연구 검토하여 개선하는데 노력해줄 것을 당부하면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