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이시(棗栗梨柹)의 의미
제사는 산 날에 지낸다고도 하고, 돌아가신 전날 지낸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는 전부 틀린 말이다. 제사는 돌아가신 날 지내는 것이다. 요새 시각으로 말하자면, 돌아가신 날 0시가 시작되는 시각에 지내는 것이다.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여, 돌아가신 날이 시작되는 첫 시각에 예를 올리는 것이다.
축문에 휘일부림(諱日復臨)이란 말이 있다. 휘일은 돌아가신 날이라는 말이다. 기일(忌日)과 같은 말이다. 부림은 다시 돌아왔다는 뜻이니, 돌아가신 날이 다시 돌아왔다는 뜻이다. 그러니 돌아가신 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 돌아가신 날 0시에 지내지 않고, 편의상 초저녁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더러 있는데, 이런 집은 반드시 돌아가신 날 초저녁에 지내야 휘일부림의 원칙에 맞는다.
제사를 책임지고 맡아서 주관하는 사람을 제주祭主라 한다. 제수를 진설한 후 제주 이하 모든 참사자가 차례대로 선 뒤, 제주가 신위 앞에 나아가 분향한 다음 재배하고, 술을 조금 잔에 부어 뇌주(酹酒)하는데 이를 강신(降神)이라 한다. 뇌주는 술 한 잔을 모사(茅沙)그릇에 세 번 나누어 붓는 것을 말한다.
강신의 절차가 끝나면, 제주 이하 모든 참례자들이 재배하는데, 이것을 참신(參神)이라 한다. 그런데 신주(神主)를 모시면 참신을 먼저 하고, 지방(紙榜)을 모시면 강신을 먼저 한다.
제사상에 음식을 진설할 때, 우리는 전래로 음양론에 근거하여, 산 사람은 양(陽)이고 죽은 사람은 음(陰)으로 보아, 밥과 국그릇을 산 사람과 반대로 놓는다. 즉 밥은 서쪽(향해서 왼쪽), 국은 동쪽(향해서 오른쪽)에 놓는다. 홍동백서(紅東白西)라 하여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에 두는 것이나, 어동육서(魚東肉西)라 하여 생선은 동쪽, 육류는 서쪽에 두는 원칙도 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 과일은 조율이시(棗栗梨柿)라 하여 대체로 대추, 밤, 배, 감의 순서로 놓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매우 깊은 뜻이 감추어져 있다. 대추나 밤, 배, 감 등의 과실에 담긴 참뜻을 알아보자.
대추는 꽃이 피면 반드시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한 줄에 수없이 많은 열매가 달린다. 이는 곧 자손의 번창과 다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밤은 땅속에서 싹을 틔우고도 오래오래 썩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보통의 곡식 씨앗은 싹을 틔우고 나면 이내 썩어서 흙이 되어 버리지만, 밤은 자신이 틔운 싹이 나무로 자라 손자뻘인 열매가 맺어야 썩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는 곧 죽은 뒤에도 자식을 생각하고 걱정해 주는, 조상의 은덕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배는 그 껍질은 누르고, 속살은 희다. 황색은 오행상 가운데를 뜻하고, 흰빛은 순수와 깨끗함을 상징한다. 조상의 덕을 받들어 항상 흔들리지 말고 깨끗함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감은 반드시 접을 붙여야 감나무가 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지만, 감은 그렇지 않다. 감 씨를 심으면 감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감 같이 생긴 조그만 고욤 열매가 열린다. 즉 감 씨를 심으면 감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욤나무가 되는 것이다. 감나무를 만들자면, 이 고욤나무의 그루터기를 칼로 쪼개고, 거기에다가 다른 감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접을 붙여야 하는 아픔의 과정을 겪어야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저 태어나기만 하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지를 꺾어 와 접을 붙이듯이, 부모의 양육과 교육이라는 접을 붙여야 옳은 인간이 된다는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과일 하나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제사는 조상에게 복을 빌고, 또한 그 음덕을 추모하며, 올바른 자손이 될 것을 기원하는 다짐의 의식이다. 제사의 이러한 참된 뜻을 알고 임한다면 좀 더 엄숙하고 간절한 의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이치가 어찌 하나의 제수(祭需)에만 해당될 뿐이겠는가? 내 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상사에도 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고 배울 바가 있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가르쳐 주는 목표를 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일상사가 다 무의미하고 흔해빠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